합격한 본분 이행이란 어떤 것인가 (제 3 부)

이어서 본분 이행에 불합격인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교제해 보자. 먼저 예를 하나 들어 볼 테니 이 사람의 본분 이행이 과연 합격인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지 분별해 보아라.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리더로 선출되었는데, 그를 접대하는 가정은 반만 하나님을 믿는 집으로, 믿는 사람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있는 그런 가정이었다. 그런데 그 가족들이 하나같이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다. 바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면 유난히 눈치를 살피며 굽신거리는 버릇이었다. 이 버릇이 리더에게는 은연중에 무엇이 되었겠느냐? (시험입니다.) 시험이 되었다. 이것은 그에게 복이 되겠느냐, 화가 되겠느냐? 아직은 복이 될지 화가 될지 모르니 계속 얘기를 이어 나가 보자. 그 집 사람들은 리더를 접대한 후 끼니마다 고기를 비롯한 좋은 음식을 대접했다. 그들이 리더를 이렇게 대접한 이유는 무엇이냐? 사랑하는 마음에서였느냐? 만약 형제자매를 접대했다면, 이렇게 음식을 대접했겠느냐? 분명 아닐 것이다. 리더가 갔으니까 매일 고기를 대접한 것이었다. 결국,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분이 좋아진 리더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 집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군요. 형제님 어머니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형제님 아들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형제님과 부인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중에 온 가족이 모두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요.” 이 말을 들은 그 가족들은 몹시 기뻐했다. ‘우리 식구가 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구나. 안 믿는 사람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니, 리더에게 고기를 대접한 게 헛되지 않았어. 앞으로도 계속 대접해야지.’ 사실, 그 가족들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떤 건지는 잘 몰랐지만, 좋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가 천국에 들어가서 복을 받는 일을 마다하겠느냐?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리더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으니까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닌가? 리더는 하나님을 대신하니까, 리더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 뒤로 그 리더가 그들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을 할수록 그 집 사람들이 더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했다. 그러다 보니 그 리더는 다른 집에 갈 생각이 없었다. 다른 집에 가면 이렇게 좋은 대접도 못 받고, 이 사람들처럼 자기에게 굽신거리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리더는 점점 살이 쪘는데, 얼굴에도 살이 붙어서 ‘사람 머리’가 ‘돼지 머리’가 되고 말았다. 동역자 모임에서 그가 한눈에 들어왔다. 겨우 한 달 못 본 사이에 그렇게나 살이 찌다니, 얼른 그의 사역 상황을 캐물었다. 결국,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호되게 책망하며 이 문제의 본질을 해부한 다음, 그 거짓 리더를 교체했다. 나중에 더 많은 문제점을 알게 되었다. 그 거짓 리더는 실제 사역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매일 지위의 복을 누렸다. 자신에게 아부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발탁했지만, 뇌물을 주지 않는 사람은 억압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닭고기 요리를 많이 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 거짓 리더의 본분 이행이 어떠냐? 본분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어떤 것이냐? 그는 사역하러 간 것이 아니라 지방에 관직을 수행하러 간 것과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렇게 잘 먹고 살이 찔 수가 있었겠느냐?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그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접대 집만 찾고, 그 집에 살면 나갈 생각은 않고 계속 먹기만 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그가 본분을 이행할 때 별 부담도 없고 별로 고생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부담이 있는 리더 일꾼이라면, 교회 사역이 그렇게 많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 상황에서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겠느냐? 조급하면 바빠지기 시작할 것이다. 서둘러 문제를 처리하고 에너지를 쏟으며 고생도 하다 보면 살이 빠질 수밖에 없다. 이는 법칙이다. 어떤 상황이라야 갈수록 살이 찌느냐? 틀림없이 온종일 배불리 먹고, 신경 쓸 일도 없을 때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사역 현장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어 부담도 없고, 육적인 편안함만 누릴 때 비로소 점점 살이 찐다. 한 달 지나면 ‘사람 머리’가 ‘돼지 머리’가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그 거짓 리더는 본분을 어떻게 이행했겠느냐? 그가 이런 식으로 리더 사역을 하는 것은 변질된 것이다. 이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벼슬아치가 되어 편안함을 누리고, 지위의 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는 실제 사역을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나쁜 짓도 했다. 자기한테 굽신거리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지 않는 사람을 억누르고, 형제자매들에게 그 사람을 책망하도록 부추겼다. 결국, 사람들 사이에 불만이 터져 나오고, 그에게 반감을 느끼고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가 교체된 이유는 둘째 치고, 그가 그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한 것이 합격인지부터 얘기해 보자. 그가 지위의 복을 누리면서 실제 사역을 하지 않은 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다. 그는 하나님 선민을 위해 일하지 않고, 하나님 선민들 앞에서 벼슬아치 노릇을 하면서 전혀 본분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리더 사역을 하면서 본분 이행에는 전혀 충실하지 않고, 마음도 힘도 다하지 않았다. 오로지 마음과 힘을 다해 먹고 마시고 즐기기만 하고, 어떻게든 지위의 복을 누릴 궁리만 했다. 접대 가정에 진리를 교제해서 그들의 그런 굽신거리는 행동을 제지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접대해야만 천국에 가고 상을 받을 수 있다고 거짓말로 속였다. 이것은 악행이 아니냐? 그가 접대 가정을 그렇게 대한다면 교회 사역을 대할 때는 어떻겠느냐? 하나님 선민을 대할 때는 어떻겠느냐? 기만과 무성의로 일관할 게 불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이 자는 대체 본분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하나님이 그에게 부탁한 사역이 과연 무엇인지 알겠느냐? 그는 이 부탁을 무엇으로 생각했느냐? 자신이 지위의 복을 누리기 위한 밑천이자 근거로 생각했다. 그 결과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교회 생활을 교란해서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에 손해를 입혔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면 불합격일 뿐만 아니라 악행이 된다. 본분 이행에 합격의 성분이 없는데 하나님께 기억되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는 너무나 가련하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도 가련하지만,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더욱 가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첫 번째 사례는 바로 ‘사람 머리가 돼지 머리로 변한’ 사례다. 이 사례는 상대적으로 간단하다. 즉, 지위의 복을 누리면서 본분 이행에는 눈곱만큼의 충성심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으며, 하나님이 준 본분을 자신이 지위의 복을 누리기 위한 밑천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건 분별하기가 쉽다. 첫 번째 사례의 이름을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거기에 대조해 보면서 타인을 분별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채찍질해야 한다. 내가 얘기한 이 사례를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사람, 이런 행위가 혐오스럽지 않으냐? (혐오스럽습니다.) 너희가 만약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면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느냐? 너희가 그 거짓 리더에 비해 좀 이성적이고, 절제할 줄 알고, 진리에 공을 들일 수 있다면 그나마 희망이 있다. 그러나 만약 그와 마찬가지로 먹고 마시는 것만 좋아하고 지위의 복을 누린다면 드러나 도태될 것이다. 그러면 완전히 거짓 리더에 해당하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자이다. 이제 조금은 분별도 생기고, 진리도 조금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네가 구원받을 희망이 얼마나 되느냐는 얼마큼 절제하고 단속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이 둘은 정비례 관계에 있다. 네가 절제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신의 기호에 따라 행동하고, 패괴 성품 속에 살면서 지위의 복을 누리고, 누가 굽신거리면 그저 좋아서 거기에 도취되고, 자신을 전혀 반성하지 않고, 진실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을 희망은 제로이다.

다음 사례를 보도록 하자. 복음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교회의 많은 사람이 각지로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하는 이 사역은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대했든, 그 본분을 좋다고 여기든 아니든, 여하튼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부탁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부탁이라면 그것은 사람의 책임과 관련되고 사람의 본분과도 관련된다. 사람의 본분과 관련되기에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도 관련된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잘 사는 동네, 잘 사는 사람만 찾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차 타고 큰 집에 사는 사람만 보면 속으로 부러워서 샘이 났고, 대접이 후한 집에 가면 눌러앉으려 하고 그 집에 미련을 가졌다. 그러면서 자기는 복음 전파 과정에서 공을 세웠으니까 은혜를 좀 누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의 복음 전파는 무엇이 되었느냐? 육적인 즐거움에 연연하며 봉사를 대가로 육적인 즐거움과 맞바꾸었으므로, 노동력을 판 것이 되었다. 2~3년 뒤 그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사람들을 얻고 교회를 세웠고, 그것으로 밑천이 생기자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나중에 ‘금의환향’할 때는 신수가 훤해지고 완전히 멋쟁이로 변모했다. 그자는 고급 가전, 전자 제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온몸을 좋은 옷으로 휘감아서 고향 사람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다들 그가 어디서 큰돈을 벌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여기에 문제가 없느냐?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계속 밖에서 본분을 이행했다. 원래 집에는 값나가는 물건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누군가 좋은 옷과 가전제품을 베풀어 그것을 전부 집에 가져왔으니 입는 것,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물건들은 대체 어디서 난 것이냐? 복음을 전하며 고생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을 오래 믿은 것과 복음을 전하면서 고생하는 걸 알고 사람들이 좋은 물건을 챙겨 준 것이다. 이렇게 ‘준 것’이 베푼 것이냐? 사랑이냐? 그런 좋은 물건들이 복음을 전해서 얻은 것이고, 남들이 그에게 잘 보이려고 준 것이라면, 그가 그 물건들을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냐? 좀 거북한 소리지만, 그는 복음 전파 기회를 이용해서 얻은 것이다. 허구한 날 남 앞에서 궁한 소리만 하며 그 물건이 맘에 든다고 하는데, 그러면 상대는 마지못해 줄 수밖에 없다. 이건 재물을 갈취하는 사기성을 띠고 있지 않겠느냐? 일부 복음 전파자들은 이런 말을 즐겨 한다. “복음을 전하는 저희는 하나님의 사자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저희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을 받았으니 얼마나 큰 복을 받았고, 얼마나 큰 이득을 보았습니까! 여러분은 이토록 부유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토록 많이 누리고 있으니, 성의 표시를 좀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께 남는 것, 또는 쓰지 않는 것들을 저희에게 좀 나눠 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자꾸만 이런 소리를 해 대니, 미안한 마음에 그에게 물건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자기가 물건을 받을 명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건을 준 사람은 마음이 달가웠겠느냐? 준 사람의 마음이 달갑고 말고를 떠나, 어쨌든 그 물건들은 복음 전파자들이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치를 따지는 사람들도 있다. “왜 얻으면 안 됩니까? 저도 힘들게 사역하고 복음을 전해서 그만한 물건을 좀 얻었는데, 이건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네가 복음을 전하는 건 어떤 일을 하는 것이냐? 일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냐? 복음을 전하는 건 거래가 아니다. 그것은 네 본분이다. 남에게 물건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하나님에게는 닿지 못하고, 감히 달라고 하지 못하니까 남에게 달라고 손을 내밀고, 영적인 이론을 한바탕 언급하며 사람을 미혹했다.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조금 얻으니까 너는 자신이 공도 있고 힘도 썼으니 보상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하기는 좀 그러니까 물건을 요구하며, 그렇게 해야 힘을 쓴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본분을 이행한 것이냐? (아닙니다.) 이건 변질되었다. 그는 복음 전파를 무엇으로 둔갑시켰느냐? 하나님의 복음을 상품으로 둔갑시켜 팔았고, 물질적인 것과 맞바꾸었다. 이것은 어떤 행위냐? (투기입니다.) 이것이 투기라고? 이 성질을 그렇게 표현하는 건 너무 가볍지 않으냐? 악을 행한 것이고, 악행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왜 이것을 악행이라고 하겠느냐?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본분을 이행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행위다. 네가 어느 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면서 복음을 전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얻게 되면, 너의 사명이 완성된다. 네가 사명을 완수한 뒤, 네가 받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 준다. 그러니 너는 누구에게 달라고 요구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도 무언가를 베풀어서 복음과 맞바꿀 이유가 없다. 하나님의 복음은 값을 매길 수 없다. 얼마를 주고도 살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다. 네가 복음 전파를 이용해서 물질적 도움을 요구하는 것은 증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행동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표시다. 또한, 네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다음, 너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어떤 성질이냐? 그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짓이다.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사역은 상품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복음을 인류에게 값 없이 베푼 것으로, 그것은 무료이고 그 안에는 어떤 거래도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을 상품으로 취급해서 남에게 팔고 돈이나 물질을 요구한다. 이것은 간증이 없는 짓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행위다. 이것이 악행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행이다. 이런 식의 본분 이행은 합격이겠느냐? (불합격입니다.) 이것은 방금 얘기한 ‘사람 머리가 돼지 머리로 변한’ 그 사례보다 더 심각한 성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심각한 부분이 어디냐? (하나님을 욕되게 했습니다.) 그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모독하는 짓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짓이다. 하나님의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먹고, 복음을 상품처럼 남에게 판매해서 폭리를 도모하고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다니, 그런 자는 어떤 인간이냐? 그런 자는 강도이자 악인이다. 그것은 사탄의 짓거리다. 분명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인류를 창조했는데, 사탄과 악령은 자신들이 사람을 만들고 하늘과 땅을 만들었으니 자신들을 신으로, 창조주로 여겨 숭배하라고 사람들을 미혹한다. 그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짓이 아니냐? 죄를 짓는 것이고, 악행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짓이다. 사람이 복음을 팔아먹는 행위는 사탄의 행위와 같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가 복음을 팔아먹는 목적이 무엇이냐? 사람들이 자신을 복음의 사자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마치 복음이 자신에게서 나오고 자신이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챈 것은 무슨 죄냐? 어떤 성질이냐? 그건 하나님을 대적한 악행이고, 하나님을 모독한 행위다. 그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본분 이행에 해당하느냐? 그건 완전히 악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런 식의 복음 전파는 전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좋은 물건 좀 받는 것도 당연하지. 그까짓 거 뭐라고. 이방인들 사이에서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것이 옳은 소리냐? 여기서는 네 의도가 무엇인지, 네가 탐낸 것이 무엇인지, 어떤 성질에 속하는지를 봐야 한다. 만약 네가 이익을 목적으로 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팔고, 진리를 팔아 너 개인적인 이익과 맞바꾸었다면, 이것이 바로 악행이다. 이런 행위를 악행이라고 정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여기느냐? (아닙니다.) 전혀 지나치지 않다. 사람이 본분을 받아들이고 이행하게 되었는데 이런 결과를 낳았다면, 누굴 탓해야 하겠느냐?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이는 사람의 본성이 사악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어떤 이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지만 염치와 인격, 양심이 있다. 그는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은 그런 사람이 인성이 없으며, 탐욕스럽고 성품이 흉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로 인해 그의 본분 이행이 합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악행으로 변질된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악행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까? 그는 복음을 전하여 적지 않은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여 뚜렷한 효과를 낸 걸로 미루어 보면 악행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맞는 말이냐? (틀렸습니다.) 왜 틀렸다고 하느냐? 복음 전파는 그의 본분이자 책임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그의 의도와 목적, 원칙이 무엇인지, 그의 태도에 책임감이 있는지, 이런 것에 근거하면 그가 과연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악을 행하는 사람인지 규정할 수 있다. 그는 비록 본분을 계속 이행했지만, 그 출발점이 잘못되었다.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은 데다가 악행도 많이 저질렀고, 진리를 실행하는 모습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어떤 성질이냐? (복음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이 사례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느냐? ‘복음을 팔아먹는’ 사례라고 하자. 이 이름만 들어도 성질이 아주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팔아먹을 수 있느냐? 복음을 팔아먹는 문제는 그 성질이 매우 심각하다. 그렇다면 복음을 팔아먹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사람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 어떤 내적 상태인지, 어떤 행위, 어떤 방식인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두 번째 사례이고, 이 사례의 성질은 첫 번째보다 더 심각하다.

다음의 사례 역시 복음 전파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전에 하나님 집에서는 복음 전파 원칙과 방식을 정했는데, 그중에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친구를 사귀는 방식이 있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이 기회를 봐서 빈틈을 노렸다. 어떤 사람들이겠느냐? 본성이 사악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정말 사악한 그 사람들이 그 기회를 빌려 짝을 찾고, 연애를 하며 남녀 관계를 맺었다. 이런 일이 발생하니까 그들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사탄에 속하는 사악한 무리가 빈틈을 노린 것이었다. 그들은 복음 전파를 빌미로 이성을 만났으며, 그러다가 적합하다 싶거나 비교적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상대와 시시덕거리고 접촉했다. 겉으로 보기엔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얻기 위한 것 같지만, 사실상 개인적인 정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또 하나님의 사역을 확장한다거나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거나 본분을 이행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그런 일들을 저질렀다. 생각 없이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없다. 사실, 다들 속으로는 다 알면서 뭐가 뭔지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누구나 그런 짓을 할 때는 속으로 그것이 죄짓는 것이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짓이고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짓이라는 것쯤은 다 안다. 하지만 그들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했고, 나아가 기를 쓰고 핑계를 대며 자신이 지은 죄를 변명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가릴 수 있느냐? 한두 번 잘못을 저지른 후 회개한다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지만, 누차 타일러도 바뀌지 않는다면 위험해진다. 어떤 이는 그런 일을 저지를 때마다 마음이 불안해져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다가 다시 생각을 달리한다. ‘별 큰 악행도 아닌데 뭐. 기껏해야 패괴 표출일 뿐이야. 이제부터 하지 않으면 내 결말과 종착지에 영향이 미치지 않을 거야.’ 과오를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이 진실로 회개하는 태도겠느냐? 그에게는 뉘우치는 마음조차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또 옛 버릇이 재발하지 않겠느냐? 내 눈에는 아주 위험해 보인다. 이런 사람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그의 본분 이행에는 ‘사적 경영’의 요소가 있다. ‘공적, 사적으로 동시에 경영하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커다란 불순물이냐! 이는 확실히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는 행위다. 이 사람들의 본분 이행에는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없다. 이는 물건을 요구하거나 복음을 팔아먹는 성질보다 더 심각하다. 어느 부분이 심각하냐? 이건 일종 육체의 거래, 정욕의 거래로, 매우 역겨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성질은 어떠냐? 이는 참도를 알고도 고의로 죄를 지은 것이다. 여기에 ‘고의’라는 두 글자가 있는데, 그 성질이 달라졌다. 사실, 그들은 사역지침의 규정과 원칙이 사람을 지혜롭게 하여 사탄에게 꼬투리가 잡히지 않도록 해 준다는 점, 그리고 그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속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빈틈을 노렸다가 기회를 잡아 사악한 정욕과 사욕을 마음대로 드러냈다. 이는 고의로 저지른 행위이다.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히 10:26)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속죄제조차 없다면, 이 사람들은 구원받는 일과 관계가 있겠느냐? 이 또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들은 어쩔 수 없었거나, 혹은 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그 당시의 환경 때문에 그런 짓을 저질렀다. 만약 횟수가 세 번 이하로 많지 않으면 용서할 수 있다.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뜻이냐? 처음 저질렀을 때, 그걸 깨닫고 진리를 구하며 뉘우치는 태도를 보인다면, 또한 돌아서서 더 이상 저지르지 않고, 또 본분을 이행하게 해 달라고 청한다면, 그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어도 된다. 이런 상황이면 그래도 구원받을 희망은 있다. 하지만 이 희망이 얼마나 될지는 개인의 추구에 근거해야 한다. 너에 대해 규정하거나 보증해 주는 사람이 없다. 주로 네 개인적인 추구에 달렸다. 나는 너에게 어떠한 약속도 해 줄 수 없다. 그런 잘못을 또 저지르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그런 약속은 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용서할 수 있는 횟수를 초과한 데다 누차 타일러도 고치지도 않고, 복음을 전하는 동안 그 악행을 상쇄할 만한 어떤 선행도 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끝이다. 그는 그토록 많은 악행을 저지르고 선행도 전혀 없었다. 그가 복음을 전한 것은 함부로 남녀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일 뿐,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본분에서 어긋났다. 그것은 속죄제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규정해야 하느냐? 더러운 귀신이자 악령이라고 규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정상인이 아니다. 그는 죄를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본분과도 무관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없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쫓겨나고 제거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구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저지른 행위는 합격한 본분 이행은커녕 본분과도 관련이 없다. 그러니 그들의 말로와 결말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하는 것에 따라 결정된다. 이 사례는 역겹지 않으냐? 앞에서 말한 두 번째 사례보다 성질이 더 심각하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성질이 심각한 자들이 반성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진 후 더 이상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복음을 전하는 데 힘을 쓸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기간에 일부 사람들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들이 한 사역은 어떻게 됐느냐? 본분 이행이 아닌, 힘만 쓰는 일이 되었다. 사실, 그들도 적잖이 힘을 들였다. 하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이 그들의 운명과 결말을 결정지었다. 똑같이 복음을 전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이런 시험에 부닥치게 되느냐? 장소와 정도만 다를 뿐, 누구나 그런 시험에 맞닥뜨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시험에 빠져들고 죄를 저지르겠느냐?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거나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정죄할 수 있다. 그들의 성품과 인성에 문제가 있기에 드러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그런 결과에 대해 누구를 탓하겠느냐?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그들 스스로를 탓할 뿐, 다른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복음 전도 기간에 어떤 과오를 저지르든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 태도로, 끝내는 도태되고 만다. 어떤 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한 여성을 강점하고 이 여성이 짝을 만나서 결혼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는 무척 심각한 성질의 문제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악인입니다.) 이런 부류의 악인이 하나님 집에 남아 있을 수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악질적인 인간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했다! 그가 그런 일을 저지르면 그로 인해 하나님을 보는 시선에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하나님 믿는 사람이 어쩜 그럴 수 있어?” 이 일은 이미 하나님에게 치욕을 주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출교하지 않고 처리하지 않은 채 복음을 계속 전하게 하고, 또 회개의 기회를 준다면 이건 완전히 잘못된 일이다. 그는 초범이 아니고, 그 성질이 매우 심각하므로 곧바로 출교시켜야 한다. 안 그러면 하나님을 욕되게 할 것이고, 사탄이 꼬투리를 잡아 하나님 집을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일관되게 음란한 사람은 반드시 교회에서 출교해야 한다. 그런 음란한 귀신 같은 자는 이미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했으므로 하나님이 절대 구원하지 않는다. 그의 복음 전도 효과가 얼마가 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얻었든 관계없다. 그가 바른길을 걷지 않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망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집에 있을 수 없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그가 한 행위를 본분 이행이라고 볼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 그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 앞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 노력을 기념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합격의 성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본분 이행이 변질되어 악행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악을 행한 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나님은 그를 제거해 버린다. 제거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이 선택하고 예비해서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제명되어 그런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악령과 더러운 귀신,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에게로 그를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구원받을 희망이 어떻게 되겠느냐? (없습니다.) 똑같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을 따르더라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결국 이 지경에 이르러 도태되었다. 이 역시 한 부류 사람이다. 이 사례는 방금 얘기한 사례보다 더 심각한 성질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심각하기도 하고 대표성을 띤다. 이 사례와 세 번째 사례는 하나로 합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세 번째 사례 중에서도 특수하고 전형적인 사례에 속하므로 대표성이 있다. 이 사례를 뭐라고 해야 하겠느냐? ‘사악한 무리는 반드시 제거된다’, 이렇게 정하겠다. 이 세 가지 사례에 등장하는 세 가지 부류 사람들의 본분 이행은 대부분 효과 없는 봉사다. 어떤 경우를 두고 효과 없는 봉사라고 하느냐? 그들은 본분 이행을 봉사로 변질시키고, 봉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본분을 본분으로 대하지 않고, 온갖 나쁜 짓을 하고 온갖 악행을 저질러서 결국에는 도태되고 좋은 결말을 잃어버렸다. 이 세 가지 사례는 모두 심각한 성질을 지녔다.

또 하나의 사례가 있다. 이 사례 역시 아주 심각하다. 사역을 여러 해 해 온 어떤 사람이 있었다. 겉보기에는 열심히 진리를 추구하고, 진실로 헌신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결혼과 가정도 내려놓고 직장과 미래도 내려놓은 채 본분을 이행하느라 여러 곳을 다니며 크고 작은 사역을 가리지 않고 수행했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그가 깨달은 진리는 많지 않았다. 진리를 별로 구하지 않은 탓에 글귀와 도리만 조금 얘기할 수 있었는데도 스스로를 잘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사람이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도리만 읊어 대고 규례만 지킬 뿐이었다. 평소에 사람들에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누구에게도 미움을 사지 않았지만, 교회 사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또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도 않았다. 요컨대 그가 사역하는 태도는 뜨뜻미지근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치도록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건성으로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사역 효과는 별로 없었다. 한번은 어떤 일이 있었는데, 그때 직무에 소홀하고 건성으로 일한 탓에 하나님의 제물 중 천만 위안이 넘는 손실이 발생했다. 천만 위안이 넘는 금액은 어느 정도일까? 보통 사람에게 천만 위안이 넘는 금액은 천문학적인 숫자다. 놀라서 ‘헉’ 소리가 절로 나고 감히 상상도 안 되는, 평생 본 적도 없는 큰돈이다. 하지만 이 ‘나이 지긋한 양반’은 천만 위안이 넘는 제물을 잃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회개하거나 괴로워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 일로 교회에서 출교되자 불평하기까지 했다. 이건 어떤 놈이냐? 두 가지를 얘기해 보자. 첫째는 네가 사역하는 동안에 이 돈을 손해 보았다면 그게 누구 때문이든 너 역시 책임이 있다. 너에게도 그 돈을 잘 지킬 책임이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이것은 직무 유기다. 그건 사람의 돈이 아니라 제물이기 때문에 사람은 최대한 충성심을 발휘해서 대해야 한다. 만약 제물에 손해가 발생하면 사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 사람이 죽더라도 갚지 못한다! 사람 목숨이 돈으로 얼마나 되느냐? 손실이 너무 클 경우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다! 관건은 이 문제의 성질이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이다. 이 ‘나이 지긋한 양반’은 그 많은 제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정말 괘씸한 인간이다! 천만 위안이 넘는 제물을 잃어버리고도 백 위안 남짓 되는 돈을 잃어버린 것처럼 상부에 전혀 보고도 하지 않고 그 일에 대해 전혀 뉘우치지도 않았다. 아니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우리 이 돈을 어쩌다 잃어버렸는지,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돈을 갚아야 할까요, 아니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 할까요? 아니면 상부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책임지고 물러나고 하나님 앞에 죄를 인정합시다.” 그에게는 이런 태도조차 없었다. 괘씸하지 않으냐? (괘씸합니다.) 너무나 괘씸하다! 그는 이렇게 큰 악행을 저지름으로써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드러냈다. 둘째, 출교되고 난 다음, 그는 거기에 따르지도 않고,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급기야 원망을 했다. 이런 사람들은 말이 안 통한다. 그가 무슨 원망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아라. 그는 이렇게 원망했다. “저는 20년 넘도록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결혼도 안 하고, 많은 걸 버리고,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필요 없다고 출교시키는군요. 저도 다 갈 데가 있습니다!” 얼마 후 그는 결혼했다. 말해 보아라. 보통은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에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렇게 빨리 결혼할 수 있느냐? 그럴 기분이 드느냐? 일반적으로 양심과 인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큰 일을 저지르면 죽고 싶은 생각마저 들기 마련이다. ‘이번 생은 끝났구나. 20년 넘게 하나님 믿으면서 어쩌면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지? 이건 다 내 탓이야. 출교되어도 싸지! 천만 위안은 고사하고 백만 위안도 못 갚는데. 나를 팔아도 못 갚을 거야. 내 목숨은 그만한 가치가 없어!’ 못 갚을 것을 아는데도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느냐? 설마 그 돈이 하나님께 봉헌한 제물이라는 걸 몰랐단 말이냐? 그 돈은 네 것이 아니고, 네 책임은 그 돈을 보관하는 것이다. 그건 너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고, 네가 잘 보관해야만 하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이다. 네가 아무렇지 않게 책임을 내던지고 그 돈을 잃어버렸으면 더더욱 책임을 미루면 안 된다.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제물에 사고가 나지 않게 잘 보관할 의무와 책임이 있지 않으냐? 사고가 날 확률을 최대한 낮춰야 하지 않느냐? 그 정도도 못한다면 너는 어떤 놈이란 말이냐? 산 귀신이나 다름없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나 역겹고 비인간적이구나! 그 뿐만이 아니다. 출교된 다음에는 하나님 믿는 걸 관두고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믿는 가족들까지 교란했으니 그 성질이 더욱 심각하다. 본분을 이행하는 긴 세월 동안, 그는 많은 것을 버리고 많은 대가를 치러 가며 적지 않은 사역을 했다.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기도 했고, 옥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그런 행위에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지는 않는다. 사람의 운명은 무엇으로 결정되느냐? 사람의 운명은 그 사람이 어떤 길을 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갔다면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 집에 이렇게 큰 손실을 입히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큰 사고가 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인품, 그가 가는 길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너희가 보기에 그가 이런 길을 가리란 것을 하나님이 알았겠느냐, 몰랐겠느냐?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알았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드러난 것이냐, 아니면 도태된 것이냐? 드러난 것이기도 하고, 도태된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볼 때 그는 본분을 열심히 이행했다. 본분에 충실했고, 헌신했고, 대가도 치르고, 고생도 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에게 그런 일을 행했느냐? 왜 그를 드러내려 했느냐? 그의 무엇을 드러내려 했느냐? 겨우 그의 결말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냐? 아니다. 그의 믿음, 그의 인성, 그의 본질과 본성을 드러내려 했고, 이런 것들은 모두 드러났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아직도 그에게 한 줄기 희망을 품겠느냐?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일말의 희망도 품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직도 그에게 자애와 긍휼이 있겠느냐? 전혀 없다. 누군가 물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자애와 긍휼이 없다면 곧 공의와 위엄 진노만 있다는 뜻입니까?” 바로 정답이다. 그런 악인에게는 자애도 긍휼도 필요하지 않다. 이미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다. 그가 하나님 성품을 심각하게 거슬렀기 때문에 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위엄, 진노뿐이다. 그의 결말은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는 도태되고 제거되었다. 따라서 이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든 하나님 눈에는 산송장이고, 더러운 귀신과 악령 속에서 사는 사람, 인면수심에 사람의 탈을 쓴 무리 속에 섞여 사는 송장일 뿐이다. 바로 이런 성질 때문에 창조주의 눈에서 제거되었다. 그의 결말, 자신에게 일어난 큰일을 대하는 그의 최종적 태도로 볼 때, 그가 줄곧 이행해 오던 본분에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가 이행한 본분에 ‘합격’이란 두 글자가 없다는 것을 너는 어떻게 알았느냐? 판단과 추리를 통해서 알았느냐, 아니면 사람의 본질을 보고 가늠한 것이냐? (사람의 본질을 본 것입니다.) 그렇다. 마치 바울과도 같다. 그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고, 베드로처럼 온전케 되기를 추구했다면 그런 분수 모르는 소리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의 그런 결과도 원인이 먼저 있었다. 이 사람이 오늘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제물을 대하는 태도, 자신의 악행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동안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과연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태도는 그의 본질과 그가 걸어온 길을 모조리 드러낸다. 그가 가는 길이 진리 추구의 길,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길이고, 그가 정말 본분을 자신의 책임과 의무로 생각했다면, 이런 피치 못할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이 일을 대하겠느냐? 반항, 원망과 같은 지금의 이런 태도는 절대 있을 수 없다. 귀신 같은 모습이 드러나고, 영혼 깊은 곳의 본성 본질이 완전히 드러나자 그는 사람이 아닌 마귀였다.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20년 넘게 믿으며 지금까지 와서 이런 광경에 이르지는 않는다. 사람이라면 그 많은 제물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뉘우치겠느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겠느냐? 얼마나 벌벌 떨리겠느냐? 그는 자신이 책임을 회피하기 어렵고,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 받을 수 없으니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를 뉘우쳐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적어도 교회에서 자기를 출교시켰다고 해서 하나님을 그만 믿고 배반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 믿는 가족들을 교란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끝에 가서 드러낸 여러 가지 모습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그는 불신파다.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인성도 악독하다. 이것이 네 번째 사례다. 이 사례는 뭐라고 명명하면 좋겠느냐? (‘제물 천만 위안 분실 사례’가 좋겠습니다.) 그의 태도도 덧붙여야 한다. ‘막대한 제물을 분실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태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주고, 최소한 그가 저지른 일의 심각성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니 말이다.

앞에서 말한 일들의 발생과 사례 속 인물들의 갖가지 모습, 그리고 일이 벌어진 후에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등은 모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기고 드러난 것들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걷는 길과 사람의 결말은 본분 이행과 밀접하고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본분 이행이라는 이 화제는 영원한 화제인 셈이다. 또한 본분 이행에 관련된 진리 역시 영원한 화제로, 그것은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깨달아야 할 진리이자, 생명 성장과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다뤄야 할 화제이다. 그것은 사람의 성품 변화나 생명 진입, 사람이 가는 길, 마지막 결말 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오늘 본분 이행에 관해 많은 얘기를 했고, 아울러 몇 가지 사례도 교제해 보았다.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나님이 인정하는지, 악행을 저지르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또 합격한 본분 이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희가 깨닫도록 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 네 가지 사례에 등장하는 사건은 하나하나가 다 심각하고, 가슴이 철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일들은 내가 지어낸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이고,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참, 본분 이행을 안 하면 아무 일도 없는데, 본분만 이행했다 하면 사고가 나네. 그럼 본분 이행을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이 생각은 어떠냐?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 담그는 격 아니냐?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너는 진리를 구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적극적인 태도요, 정상인들이 갖춰야 할 태도이다. 본분 이행 과정에서 생긴 문제 때문에 정죄되고 출교되고 도태되고 제거되고, 나중에는 구원받을 희망이 사라지는 게 겁나서, 아예 본분 이행을 하지 않고 소극적이고 대항적인 자세로 본분을 대한다면, 이런 태도는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인성이 너무 부족해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은 무리야. 그렇다면 기꺼이 봉사만 하면 되지 않을까? 봉사자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도 높지 않고, 원칙 기준도 별로 없으니 힘만 쓰면 되잖아. 시키는 대로 하면서 말만 잘 들으면 되고, 무슨 큰 책임을 맡지 않아도 되고, 리더 일꾼이 되겠다는 야심도 없어. 나중에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게 가장 큰 복이지 뭐.” 이런 속셈은 어떠냐? 아주 비열하고 추하지 않으냐? 이렇게 진취적이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겠느냐? 인성이 없는 사람이 봉사한들 합격할 수 있느냐? 인성이 없는 사람은 봉사를 해도 합격할 수 없고, 충실한 봉사자가 되어 살아남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번에 몇 차례 교제하면서 사례를 비교적 많이 언급했다. 그런 사례들은 기억하기 쉽지만, 교제하는 진리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 한 가지 좋은 점은 바로 이런 사례를 언급하면 거기에 관계된 진리는 보다 쉽게 기억하거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례를 들지 않고 그런 효과를 내려면 아마 좀 힘들 것이다. 이렇게 사례를 들면 그것이 사람에게는 채찍이 되고 경고가 되어 그 안에서 올바른 길을 찾도록 해 준다. 또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길을 가야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거스르는 일을 피할 수 있고, 큰 잘못을 저지르는 그릇된 길을 가지 않을 수 있는지도 알려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도록 해 준다는 점이다. 이 네 개의 사례를 들으니 너희는 어떤 느낌이 드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기지 않았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이 쉬운 것이냐? (쉽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이 어려운 것이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원칙을 찾지 못해 늘 일을 그르치는 것이 문제냐? (아닙니다.) 그러면 대체 무엇이 문제겠느냐? 진리를 사랑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 것, 이것이 문제다.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도 실행하지도 않고, 거기에 흉악하고 사악하고 교만한 성품까지 더해지면 나쁜 결과가 초래되면서 사람이 예상치 못하거나 원치 않았던 결말을 맞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결말이 나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결말은 보통이면 된다고, 어쨌든 마지막까지 그럭저럭 버텨서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 밥만 축내며 죽을 날만 기다리는 자다. 이런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하면 틀림없이 대충대충 이행하다 툭하면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합격한 본분 이행에 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합격한 본분 이행에 이르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있느냐? (인성을 갖춘 사람입니다.) 인성은 무엇을 포함하느냐? (양심과 이성입니다.) 이렇게 양심과 이성을 갖춘, 인성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한다면 쉽게 합격한 본분에 이를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한 심각하고 부정적인 사례만 설명해 주시니까, 듣고 나서 자신이 없어집니다. 본분 이행은 언제 합격할 수 있습니까? 본분 이행에 합격한 긍정적인 예는 없습니까?” 그러면 이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예를 살펴보자.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진리 추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본분 이행에도 마음을 쓰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람들과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게 되었다. 조화롭게 협력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여기 그런 모습이 하나 있다. 조화롭게 협력한다는 것은 모두가 겉으로 화목하게 지내면서 다투거나 옥신각신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조화롭게 협력한다는 것은, 사역을 하면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네가 그 문제들을 꿰뚫어 볼 수 있건 없건, 또 네 관점이 옳건 그르건 모두 다른 사람들과 의논하고 교제하며 진리 원칙을 구하고, 합의점에 이르는 것이 바로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다. 합의점에 도달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냐? 본분을 더 잘 이행하고, 교회 사역을 더 잘해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효과에 이르기 위해서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우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조화로운 협력을 달성해야 한다. 지금 이미 조화로운 협력의 방향으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진리를 깨달은 뒤에 비록 진리에 따라 완벽하게 실행하지 못해서 중간에 실패하기도 하고, 연약해지기도 하고, 오류가 생기기도 하지만, 진리 원칙을 향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조화로운 협력에 도달할 희망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때는 네가 하는 방법이 옳다고 생각되더라도 자기만 옳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상의할 수 있다. 사람들과 진리 원칙을 자세히 교제하고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명확히 설명해서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고, 원칙을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 집 이익을 고려할 수 있고, 최대한 하나님 집 이익을 지킬 수 있다고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진리 원칙에 부합한다. 비록 최종 결과가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네가 실행한 길과 방향, 목표가 옳다면 그건 하나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느냐? 하나님은 그 일을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하나님은 네 본분이 합격이라고 할 것이다. 합격만 하면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것이냐?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완전히 하나님 요구대로 실행하는 것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단지 너의 길이 옳고, 속마음이 옳고, 방향이 옳은 것만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그런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다. 순종을 예로 들어 보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집이 너에게 일을 하나 안배했을 때, 네가 어떻게 실행하면 본분 이행에 합격하겠느냐? 처음 그 일을 들었을 때 너는 생각이 좀 달랐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께서 이해가 안 되는 일도 구하고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으니 구해야지. 진리도 모르고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 일이 나에게 주어졌으니 시키는 대로 따르고 순종해야 해. 규례라도 우선 지키고 보자.” 이렇게 실행할 수 있다면 합격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합격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과 거리가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그 차이는 네가 진리를 아는 정도에 달려 있다. 너는 순종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리 원칙을 정확하게 찾아서 실행해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규례를 고수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을 양심의 기준에 따라, 규례에 따라 지킨다면, 방법상으로는 문제가 없고, 그 성질 면에서도 잘못이 없지만 진리를 실행하는 기준에는 아직 못 미친다. 아직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한 너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본분을 지킬 뿐, 진리 원칙에 따라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증거의 기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식의 본분 이행은 합격이긴 하지만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수준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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