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한 본분 이행이란 어떤 것인가 (제 1 부)
지난번 예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내용에 대해 교제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심판과 형벌을 받아 온전케 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기본 조건에 관한 것이었다. 그 네 가지 기본 조건이 무엇이었느냐? (첫째,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셋째,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넷째,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이 네 가지 조건에는 각각 세부적인 내용이 있고, 구체적인 실행, 그리고 뜻하는 바가 있다. 사실, 이 네 가지 내용은 요 몇 년 동안 계속 말해 왔던 것이다. 오늘 다시 이 화제에 대해 말한다면 식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지 않으냐? 이 네 가지 내용은 모두 진리 실제와 생명 진입에 관련되며, 끝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아직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고 그저 진리라는 글자 자체와 단순한 도리만 조금 이해할 뿐이다. 비록 실제를 조금 교제할 수는 있지만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어떤 측면의 진리든 항상 교제하고 자주 들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이 실제 체험 속에서 각 항목의 진리에 대해 점점 더 깊이 인식하고, 제대로 체험할 수 있다.
심판과 형벌을 받아 온전케 되기 위한 네 가지 기본 조건을 모두 정리했다. 다음은 첫 번째 항목인 합격점에 이르는 본분 이행에서부터 얘기해 보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근 몇 년간 계속 본분 이행에 관련된 내용을 교제해 주셔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 본분 이행 시 어떤 원칙들을 지켜야 하는지 등도 손금 보듯 훤하니, 이보다 더 명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요 몇 년간 일상생활에서 접한 것 역시 전부 본분 이행 측면의 진리였습니다.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할 때부터 이것에 관한 진리를 구하거나 먹고 마시며 들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화제를 교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속으로 벌써 알고 있습니다.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한다는 내용 아닙니까?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앞서 말한 그 몇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는 원칙을 구하되,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며, 조화롭게 협력하고, 생명 진입과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는 내용이겠지요.” 너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고 체험한 것들이 이러한 내용이다. 또한, 너희가 깨달은 것 역시 이런 내용이다. 너희가 얼마나 깨달았든, 오늘 또다시 이 부분의 진리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중복된 내용이 있다면 너희에게도 유익하니 한 번 더 제대로 묵상해 보아라. 예전에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받아들이면 된다. 중복되는 것이든 아니든 자세히 듣고, 그 안에 어떤 진리가 있는지, 그 진리가 너희의 생명 진입에 유익한지,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들어 보아라. 그렇기에 다시 한번 ‘본분 이행에 합격하기’라는 화제를 교제하는 것이다. 이는 꼭 필요한 일이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에 관하여 ‘합격’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먼저 ‘본분’이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하겠다. 다 듣고 나면 너희는 본분이란 무엇인지, 합격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고, 어떻게 실행해야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길이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본분이란 무엇이냐? (본분이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겨 주신 부탁이자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만 맞게 말했다. 이론적으로는 어떠한 문제점도 찾아볼 수 없지만 자세하게 파고든다면 그 말은 완벽하지 않다. 거기에는 하나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이 화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그가 일생 동안 어떻게 살아갈지, 이 세상에서 어떤 일들을 할지, 그의 운명이 어떨지 등은 모두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예컨대, 어떤 이는 세상에서 음악을 한다. 음악을 하는 것은 그의 일생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그 사명을 본분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또 어떤 이는 전 세계가 놀랄 만한 위업을 이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느 정도 기여를 했으며 시대도 바꿔 놓았다. 이는 그의 필생의 사명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 사명을 본분이라 칭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그의 일생의 사명, 그가 일생 동안 한 일들을 하나님이 그에게 맡긴 부탁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네.) 그렇다.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을 주고 그 부탁을 맡겼기 때문에 그는 온 인류 가운데서 인류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일과 이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가 어떤 분야에 종사하든, 그게 예술이든 상업이든 정치든 경제든 또는 과학 연구든, 전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운명을 어떻게 정해 놓았든, 그들은 그저 하나님의 경영 사역 밖에 있는 사람으로, 이방인에 속한다. 그들이 한 일 또한 하나님의 경영 사역 밖에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책임과 그들이 받아들인 부탁, 그들의 평생 사명을 본분이라고 칭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한 일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는 수동적으로 창조주의 부탁과 창조주가 맡긴 사명을 받아들였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받은 사명과 다하는 책임은 본분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 또한 그들에게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책임을 맡았든, 평생 어떤 부탁을 받아들이든, 어떤 사명을 완수하든, 그것을 본분 이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본분이란 무엇이고, 어떤 전제 조건을 달아야 본분이라는 말과 이 측면의 진리를 명확하고 분명하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조금 전에 이렇게 교제한 것을 통해 너희는 한 가지 이치를 깨달은 것 아니냐? 어떤 이치이냐? 다시 말해, 인류 가운데서 어떤 한 사람이 얼마나 큰 사명을 받았든, 어떤 변혁을 이뤘든, 인류에 대한 기여가 크든 작든, 그러한 사명과 부탁은 다 본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무관하며, 그저 사명일 뿐이기 때문이다.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그들은 사명을 완수한 데 불과하며, 그것은 하나님이 운명적으로 정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경륜,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과 무관한 것이라면, 사명을 완수한 그 행위를 본분 이행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본분이라 하겠느냐? 마땅히 이렇게 이해해야 한다. 즉,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 중 하나님이 맡긴 부탁과 사람의 사명이 본분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완전하고 정확하지 않겠느냐? 정확하다면 그것이 바로 진리이다. 정확하지 않고 편면적이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도리이다. 네가 무엇이 본분인지 완전히 깨닫지도, 분명하게 알지도 못하면, 본분이라는 측면의 진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예전에는 사람이 본분에 대해 잘못 이해한 부분이 많았을 수 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해 갖가지 관념과 모호함이 생겼다. 그래서 사람은 이런 관념과 모호함으로 본분을 해석한 다음 그것들에 따라 본분을 대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사람의 일생을 하나님이 정해 준 이상, 사람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 것인지, 일생을 가난하게 살 것인지 부유하게 살 것인지, 어떤 일에 종사할 것인지도 모두 하나님이 정해 주는 것이며, 사람이 평생 무엇을 하고 어떤 일을 할 것인지도 모두 하나님이 맡긴 부탁이자 사람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사명에 관계된 이상, 모두 본분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본분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한다. 이것이 오해가 아니겠느냐? 어떤 이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에 이렇게 말한다. “아이를 낳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부탁입니다. 이것은 사명이며, 아이를 부양해 기르는 것은 우리의 본분입니다.” 이것이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니겠느냐? 또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번 생은 농사를 짓는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이런 운명을 타고 난 이상 우리는 농사를 잘 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부탁이자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고되어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생은 농사를 잘 짓는 것이 바로 본분입니다.” 그는 운명과 사명, 운명과 본분을 동일시하는데, 이것은 오해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오해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장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제가 예전에는 뭘 해도 해내지 못했는데 장사를 한 뒤로 아주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보아 하니 하나님께서 제 이번 생은 장사해서 가족을 부양하는 운명으로 정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생 동안 장사를 잘하고 크게 해서 온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이 제 본분일 것입니다.” 이것은 오해가 아니겠느냐? 사람이 자신이 살아가는 일, 무엇으로 생계를 꾸리는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활을 누릴 것인지 등등 자기 사명과 관계된 이런 일들을 모두 본분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본분을 오해한 것이다.
본분이란 대체 무엇이겠느냐? 대다수 사람이 조금씩 치우치고 틀리게 받아들인다. 하나님 집에서 네게 곡식과 채소를 재배하는 일을 안배한다면 너는 어떻게 대하겠느냐?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농사를 짓는 것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함이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분 속에 그런 내용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이 어째서 그렇게 받아들였겠느냐? 본분 이행에 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무엇이 본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에 관한 진리를 깨달았다면, 농사짓기를 원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자기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사실, 이것도 하나님이 맡긴 부탁이다. 이 일이 깨알만 한 일일 수도 있고, 모래알만 한 일일 수도 있지만, 일의 크기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생겨난 일이다. 지금 하나님이 이 일을 네가 완성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너는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 너는 그것을 본분으로 간주해 받아들여야 하고, 도의상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그저 수동적으로 순종하며 농사짓는 일을 안배받았으니 농사짓는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네가 알아야 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교회에서 네게 농사를 짓고 채소를 재배하는 일을 안배한 것은 너를 부자로 만들기 위함도 아니고, 네가 가족을 먹여 살리게 하기 위함도 아니다. 바로 재난 기간 동안 하나님 집의 사역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풀타임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의 평소 식사를 보장하여 그들이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체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이 농장 교회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일반 농민들이 농사짓는 것과는 성질이 다르다. 일반 농민이 농사를 짓는 것은 어떤 성질의 것이냐? 가족을 먹여 살리고 생존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정해 준 것이며, 그것이 바로 그의 운명이다. 그래서 그가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짓는 것은 본분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지금 너는 하나님 집에 와서 똑같이 농사를 짓고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 집의 사역에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것과 성질이 다르다. 이것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며,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이자, 창조주가 네게 맡긴 부탁이고 네게 부여한 책임이다. 네게 있어서 그것은 네 분분이다. 그러면 이 본분과 세상에서의 그 사명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하겠느냐? (본분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겠느냐? 본분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일을 네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님이 네게 맡긴 것이다. 이것은 한 가지 측면의 원인이다. 이 밖에도 한 가지 주된 원인이 있다.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받아들이면, 너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있게 된다. 하나님 집에서는 고된 일이든 피곤한 일이든, 또 사람이 좋아하는 일이든 싫어하는 일이든, 네게 안배된 것이 바로 네 본분이다. 네가 그것을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이자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책임으로 받아들인다면, 너는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네가 행하는 것과 이행하는 본분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이 있는데, 네가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성심성의를 다해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복이겠느냐, 화이겠느냐? (복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복이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조금 고생하면 불평을 쏟아 내는데, 네가 아주 큰 복을 받고도 그걸 알지 못하고, 아주 큰 혜택을 입고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이냐? 이것이 바보가 아니겠느냐? 이때 사람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이것이 본분임을 알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 너희에게 본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깨달음이 생겼느냐? 깊은 이해가 생겼느냐?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서 본분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중요합니다.)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 본분은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평생 어떤 사명을 완수했든,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다면 구원받는 것과는 무관하다. 다시 말해, 네가 평생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세웠든 그것은 그저 한 가지 사명을 완수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기에 구원받는 일과는 무관하며, 인류를 경영하는 하나님의 사역과도 관계가 없다.
하나님 집에서는 늘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말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럼 본분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겠느냐? 크게 보자면,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으로 인해 생긴다. 작게 보자면,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되면서 여러 가지 사역이 생기는데, 그러한 사역은 사람이 협력하고 완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사람에게 책임과 사명이 생기게 되고, 그 책임과 사명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본분인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각종 사역이 바로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그렇다면 본분에는 상하 귀천이나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겠느냐? 그런 차이는 없다.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 집의 사역에 필요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확장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이 곧 사람의 본분이다. 이것이 바로 본분의 유래이자 정의이다. 사람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든,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없다면 본분이 생기겠느냐? 아니다. 이제 확실해졌을 것이다. 본분은 무엇과 관계되느냐?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관계됩니다.) 그렇다. 인간의 본분, 피조물의 본분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사역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인류 가운데서 전개하는 경영 사역이 없다면, 사람에게 본분이란 것도 생기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본분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비롯된 것이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다. 이렇게 볼 때 본분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너무나 중요하다. 큰 측면에서 보면, 너는 하나님의 경륜 사역에 협력하는 것이고, 작은 측면에서 보면, 너는 서로 다른 시기, 서로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요구되는 하나님의 각종 사역에 협력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어떤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든, 그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준 사명이다. 때로는 그것이 중요한 물건 하나를 간수하거나 보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사소한 일로서 네가 맡은 책임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것이고,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네 본분이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본분은 하나님의 부탁이며, 주로 복음 전파하는 것, 증거하는 것, 동영상 제작하는 것, 교회의 리더 일꾼이 되는 것, 혹은 더 위험하고 더 큰 몇 가지 사역이 포함된다. 어쨌든 하나님의 사역, 그리고 복음 확장 사역에 필요한 일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본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본분이란 크게 보면 한 사람의 사명이자 하나님이 맡긴 부탁이고, 작게 보면 네가 맡은 책임이자 의무이다. 너의 사명이자 하나님이 맡긴 부탁이고, 너의 책임이자 의무라면 본분 이행은 네 개인적인 일과 무관하다. 본분은 개인적인 일과 무관하다. 왜 이런 화제를 언급하겠느냐? 사람은 본분을 대하고 이해하는 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본분이란 하나님의 경영 사역 중에서 피조물이 받아들여야 할 부탁이자 완수해야 할 사명이다. 큰 전제는 알고 있겠지만 세부적으로 놓고 말한다면, 본분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겠느냐? 어떤 사람은 본분을 자신의 일처럼 여겨 하는데 이 원칙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왜 옳지 않으냐? 너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탁한 일을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차이가 있다. 자신을 위해 일할 때는 어떤 원칙으로 하느냐?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남과 상의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구할 필요도 없다. 무작정 자기 성질대로 하고, 자신에게 이롭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도 이런 원칙으로 하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어떤 이들은 “저는 제 일을 할 때 이렇게 진지하게 하지 않고, 이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본분을 제 일로 여기며 하고 있고, 이 원칙이 적절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행하는 것이 본분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이겠느냐?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본분을 대할 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인다’라는 말은 아주 쉽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 속의 진리를 실행할지는 네가 본분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방금 본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본분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하나님이 맡긴 부탁이며, 하나님의 경륜 사역, 그리고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봤을 때, 본분과 네 개인적인 일 처리 원칙은 관계가 있겠느냐? 네 개인적인 취향과 생활 습관, 생활 규칙과 관계가 있겠느냐? 전혀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과 관계가 있느냐? 진리와 관계가 있다. 어떤 이들은 “이 본분이 제게 주어진 이상 제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본분 이행의 최고 원칙은 여러분 중 누구에게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본분을 잘 이행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 말고도 제게는 더 높은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본분을 자신의 큰일로 여기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잘 해내서 최고의 효과를 얻어 내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 원칙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으냐? 하나님으로부터 본분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부탁임을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다면, 하나님의 부탁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이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과 관련된다. 본분을 하나님의 부탁으로 여겨 대하는 것이 자신의 일로 여겨 대하는 것보다 훨씬 높지 않겠느냐? 다르지 않겠느냐? 만약 본분을 하나님이 부탁한 일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네 본분 이행의 원칙은 단순히 본분을 자기 일로 여기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본분을 대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며 하나님의 뜻에 맞겠느냐? 우선 먼저, 너는 이 본분을 누가 안배했는지, 어떤 급 리더가 너에게 시킨 건지 분석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분석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하는 것, 이것이 한 조목이다. 이 밖에도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것의 상하 귀천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부탁이고 하나님 집의 사역이긴 하지만, 이런 일을 하면 남들이 깔볼 거야! 체면이 서는 일은 남들보고 하라고 하고, 티 나지 않고 뒤에서 힘을 쓰는 일은 나한테 시키네. 이건 불공평하잖아! 난 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 거야. 난 체면도 세우고 이름도 날리는 본분을 맡아야 해. 이름을 날리거나 체면을 세우지 못한다 해도 내게 이득이 되고 몸이 편한 본분이어야 돼.” 네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 태도가 옳은 것이냐?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고르는 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자기 취향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다. 이는 본분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본분을 거절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습이다. 그 안에는 개인적인 취향과 바람이 섞여 있다. 네가 자신의 이익과 체면 등 갖가지 요소를 고려하면, 그것은 순종하는 태도로 본분을 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어떤 태도로 본분을 대해야 하느냐? 첫째, 분석하지 말고, 누가 안배한 것인지 따지지도 말고,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한 본분이니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둘째, 상하 귀천을 논하지 말고, 어떤 성질의 본분인지, 그 본분을 이행하면서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앞에서 하는 일인지 아니면 뒤에서 하는 일인지 등을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 다른 한 가지 태도는 순종하고 자발적으로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본분이 주어졌을 때 너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잘못해서 도태될까 봐 두려워 몸을 사리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머문다면, 이것이 순종하는 태도이겠느냐? 가령 형제자매가 너를 리더로 뽑아 주었고, 너도 속으로 이왕 뽑혔으니 그것이 바로 자신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별로 능동적이지 않다고 치자. 왜 그렇게 능동적이지 않은 것이겠느냐? 네 마음속에 몇 가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리더가 되는 건 좋은 일 아니야. 칼날 위를 걷고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아! 잘해도 상을 받지 못하고, 잘못하면 책망과 훈계를 받아야 해. 책망을 당하는 건 그런대로 괜찮은데, 교체되거나 도태된다면 모든 게 다 끝이 아니겠어?’라는 생각에 마음속에서 싸움이 시작된다. 이것이 어떤 태도이겠느냐? 경계하고 오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본분을 대함에 있어서 가져야 하는 태도가 아니라,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다. 그러면 긍정적인 태도는 무엇이겠느냐? (마음에 거리낌이 없고, 짊어질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너희 말은 조금 공허하다. 네가 그 정도로 두려워하는데 마음에 거리낌이 없을 수가 있겠느냐? 짊어질 용기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어떤 마음을 가져야 짊어질 용기가 생길 수 있겠느냐? 네가 항상 일이 생겼을 때 감당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워하고, 네 내면에 많은 걸림돌이 있으면, 너는 전혀 짊어질 용기가 생길 수가 없다. 너희가 말하는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것’이나 ‘짊어질 용기가 있는 것’ 또는 ‘만 번을 죽어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분노한 청년들이 구호를 외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으로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지금 필요한 것은 올바른 태도다. 올바른 태도를 가지려면, 이 측면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네 내면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그 부탁과 본분을 순조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실행의 길이며, 진리이다. ‘짊어질 용기가 있다’와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는 말로 네 마음속 공포를 없애려 한다면 효과가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 그것은 진리도, 실행의 길도 아니다. 네가 입으로는 “저는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다른 생각도, 불순물도 없습니다. 짊어질 용기가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겉으로는 본분을 짊어진 것 같다. 하지만 그 뒤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감당하기 힘들 것 같고 마음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이 책망받는 것을 보면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더 겁먹을 것이다. 자신의 분량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점점 커질 것이고, 그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본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네가 구호만 외치는 것으로는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너는 능동적으로 진리를 구하며 순종하고 협력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것으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겁먹고 두려워하고 걱정해도 소용없다. 드러나서 도태되는 것이 리더가 되는 것과 관련이 있겠느냐? 네가 리더가 되지 않으면 그로 인해 네 패괴 성품이 사라질 수 있겠느냐? 너는 조만간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또 리더가 되지 않으면 너는 더 많은 훈련 기회를 얻을 수 없어 생명의 성장이 느려질 것이고, 온전케 될 기회도 적을 것이다. 리더 일꾼이 되면 고생은 좀 더 많이 하겠지만 수확도 많다. 진리 추구의 길에 들어서고 또 온전케 될 수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이냐! 그러므로 너는 마땅히 순종하고 능동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이것이 네 본분이자 책임이다. 네 앞에 펼쳐진 길이 어떻든, 너는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본분 이행에 마땅히 가져야 하는 태도다.
본분 이행이라는 주제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주제다. 이것은 새로운 주제는 아니지만,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는 무척 중요하고, 사람이 반드시 깨닫고 진입해야 할 진리다. 피조물은 반드시 본분을 잘 이행해야 창조주의 인정을 받을 수 있기에, 본분 이행이 어떤 건지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본분 이행은 이론도, 구호도 아닌, 한 가지 진리이다. 그럼 본분 이행이란 무엇이냐? 이 측면의 진리를 이해하면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적어도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떤 태도와 의지로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완수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동시에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비정상적인 관계도 해결된다고 할 수 있다. 본분 이행을 어떤 이는 밑천으로 여기고, 어떤 이는 일거리로 여기며,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직업, 사업으로 여기거나 심심풀이 소일거리나 오락거리, 취미로 여긴다. 어쨌든 네가 어떤 태도로 본분을 대하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피조물이 해야 할 일, 또는 협력해야 할 일로 여기지 않는다면, 네가 하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네가 본분을 자기 집에서 하는 장사라고 생각한다면 옳은 일이겠느냐? 자신의 일이나 취미로 여긴다면 옳은 일이겠느냐? 사적인 일로 여긴다면 옳은 일이겠느냐? 모두 옳지 않다. 왜 이런 화제를 언급하겠느냐? 무슨 문제를 해결하려고 이러한 것을 교제하겠느냐? 사람이 잘못된 태도로 본분을 대하고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온갖 행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본분 이행 측면의 진리를 이해해야만 사람이 본분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되고, 점차 진리에 부합하여 하나님의 요구와 뜻에 부합할 수 있다. 사람이 본분 이행 측면의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가 본분을 대하는 태도와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본분을 이행하는 효과도 얻을 수 없다. 본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부탁이자, 사람이 마땅히 완수해야 할 사명이다. 그러나 본분은 결코 네 개인적인 경영도, 네가 두각을 드러낼 조건도 아니다. 본분 이행을 통해 어떤 이는 자신의 경영을 하고 당을 짓고, 어떤 이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며, 어떤 이는 내적 공허함을 채운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요행 심리를 만족시키며, 본분을 이행하기만 하면 하나님 집에 분깃이 있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마련해 주는 아름다운 종착지에도 분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분을 대하는 이런 태도는 다 옳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며, 사람이 하루빨리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이 본분인지, 사람은 어떻게 본분을 대해야 하는지, 본분을 대할 때는 어떤 관점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교제한 것 같다. 너희가 잘 묵상해 보고 이런 측면의 진리를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이것이 급선무다. 지금 너희가 당장 알아야 하는 진리가 무엇이겠느냐? 한편으로는 그 속에 있는 이상(異象) 측면의 진리를 이해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행 중에 또 현실 생활 속에서 네가 이런 진리에 대해 어떤 오해가 있고, 또 치우치게 받아들이는 부분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본분 이행 측면의 진리와 관계된 일이 네게 닥쳤을 때, 이런 말과 진리가 네 내적 상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 이것은 교제한 이런 내용을 너희가 진정으로 확실하게 이해했다는 증거다. 만약 네 일상생활에서 부딪치는, 본분 측면에 관계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면, 네가 이런 진리에 진입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너희는 이런 진리를 다 들은 뒤 스스로 정리하고 반성했느냐? 매번 필기를 하고 나면 잘 이해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또 잊어버리고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너희 스스로 조금도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너희가 실행한 것이 이런 진리와 관계가 없는, 진리와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본분 이행의 진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깨닫고 진입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다. 만약 사람이 진리의 말씀을 다 듣고도 얼떨떨하고 혼란스럽다면 그 사람의 자질이 너무 부족하고, 분량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네가 종교의 믿음 방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을 읽을 줄만 알고, 기도하고 예배할 줄만 알며, 네게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그것은 생명 진입도 없고, 아무런 분량도 없는 것이다. 아무런 분량이 없다는 것이 어떤 개념이겠느냐?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단 누가 미혹하면 곧 그를 따라가고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되는 것이다. 또 잘못을 저질렀을 때 누가 두어 마디 책망하고 훈계하는데, 말투가 조금만 딱딱해도 너는 믿는 것을 그만둘 수 있다. 좌절에 맞닥뜨리거나 생활하면서 여러 방면에서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 주지 않고 네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않으면 금세 뒤돌아서서 하나님 집을 떠나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본분 이행이라는 이 가장 기본적인 진리에 네가 조금이라도 진입한다면 너는 이미 진리와 연결되어 있고, 진리 실제와 이미 연결되어 있으며 조금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만약 네게 이 측면의 진리 실제가 전혀 없고 조금도 갖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네 마음속에 아직 진리가 뿌리내리지 않았다는 증거다.
방금 본분이란 무엇인지와 본분의 유래, 생성에 대해 교제한 것은 대체 본분이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함이다. 사람이 이것들을 알면 어떤 좋은 점이 있겠느냐? 본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리를 깨달으면 사람은 본분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적어도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서 올바른 태도로 본분을 대해야 하고,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된다. 마음속에 적어도 이런 개념이 생긴다. 비록 본분은 네가 이행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이자 사명이지만, 네 개인적인 일이 아니고 너 자신의 일도 아니다. 이 말이 조금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이것은 진리가 틀림없으며, 진리에는 실제적인 측면이 있다. 또 이것은 사람의 실행, 진입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요구와도 관계가 있으며, 공허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네가 한 측면의 진리 실제를 체험하고 거기에 진입해야 비로소 그 진리를 갈수록 더 명확히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네가 늘 진리에 의구심을 품으며 의문을 제기하고 연구하거나 분석한다면, 진리는 네게 있어 영원히 진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네 실생활과 무관하며 너의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진리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행동의 지침, 사람됨의 지침, 또는 하나님을 믿는 지침으로 삼는다면, 진리는 네 삶과 인생 목표, 인생 방향, 그리고 처세 방식을 바꿔 놓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역할이다. 사람이 무엇이 본분 이행인지 알게 되면, 그것은 분명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큰 도움과 이익이 될 것이다. 적어도 너희는 본분이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또한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데에 관심이 있거나 바람과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는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진리이자, 가장 기본적으로 진입해야 할 진리이다. 무엇이 본분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지, 어떤 태도로 본분을 받아들이고 대해야 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면 위험해진다. 한편으로 네가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무성의하게 본분을 대하거나, 또 한편으로 교회의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저지르고, 심지어 악행을 저질러 하나님의 행정 법령을 거스른다면, 조금 보수적으로 말해서 반성하도록 격리될 수 있고, 심하면 도태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본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진리이기는 하지만,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관계가 있으며 무관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사람이 본분이 무엇인지 이해했다면, 한 가지 이치를 알았다고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올바른 태도로 본분을 대하는 효과에 이르러야 한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단순히 힘을 쓰는 것으로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 힘만 쓰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사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에는 세부적인 일들이 많다. 올바른 마음가짐, 실행 원칙, 진실한 순종이 포함되며, 영적인 지혜도 있어야 한다. 이런 몇 가지 측면의 진리를 갖춰야만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고,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문제를 철저히 해결할 수 있다. 본분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지 못한 사람은 모두 진리 실제가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며,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르려면 본분 이행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본분의 정의와 유래에 대해 이해하고 나면 본분의 성질과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일의 성질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 집에서 네게 맡긴 일을 본분으로 대하는 것과 세상의 일로 대하는 것, 이 두 가지는 어떤 차이가 있겠느냐? 네가 그것을 본분으로 여긴다면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구해야 한다. “이 일은 제 본분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교회의 규정이 무엇인지, 여기에 담긴 원칙을 제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실행해야만 본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이며, 사람이 본분을 대할 때 마땅히 가져야 하는 태도다. 하지만 세상의 일이나 사생활과 관계된 일을 대할 때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 진리와 원칙을 구할 필요가 있느냐? 원칙은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 부자가 되는 것, 출세하는 것, 명예와 이익을 다 갖는 것 등이 바로 이런 원칙이다. 이런 원칙은 전적으로 세상에 속한 것이고, 풍조에 속한 것이며, 사탄에 속하고 이 사악한 인류에 속한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는 원칙이 무엇이겠느냐? 반드시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구, 진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반면 사람이 세상에서 종사하는 직업이나 일은 진리나 하나님의 요구와 관계가 없다. 네가 능력이 있고, 고생을 각오하고, 충분히 부지런하고, 충분히 악하고 담력이 크다면 사회에서 출세할 수 있고, 큰일을 이룰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는 이런 원칙도 이런 철학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 집에서는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 본분이 어떤 성질이든, 사람이 보기에 높든 낮든, 고귀하든 비천하든, 체면이 서는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하나님이 네게 부탁한 것이든, 교회의 리더가 네게 분배한 것이든, 하나님 집에서 네게 분배한 일이 무엇이든, 네가 일을 행하는 원칙이 진리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모두 진리와 연관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요구와 연관되어야 하며, 하나님 집의 규정, 사역지침과 연관되어야 한다. 요컨대 본분은 사람이 세상에서 종사하는 일과 구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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