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깨달을 수 있어야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다 (제 2 부)

너희가 관찰해 보아도 좋다. 교회에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많으냐? (예전에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릇되게 이해하고 무감각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하나님의 교제를 다 듣고 난 뒤 진정으로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으로, 이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다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소수이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다수다. 예를 들면, 순종에 관한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인식해야 하겠느냐? 많은 사람들은 순종은 말을 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이 닥쳤을 때 반항하거나 패역을 드러내지 않으면 순종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하는지, 사람은 순종의 의의와 원칙이 무엇인지,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순종을 실행할 때 사람 내면의 어떤 패괴들이 해결돼야 하는지, 이런 세부적인 일들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저 규례만 지킨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순종은 밥하라고 했을 때 청소하지 않고 청소를 시켰을 때 유리를 닦지 않는다는 의미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이렇게 간단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쓸 필요 없어. 하나님은 그런 건 보지 않으셔.’ 사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동시에 패역과 패괴를 해결함으로써 진정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의 진리이다. 결국,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 깨닫고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떻게 요구하든 다 마땅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므로 사람은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정도이다. 사람이 이 정도로 인식할 수 있으면, 순종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규례만 지킨다. 그러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순종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순종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실행하기도 힘들고 방법과 실행 원칙도 찾지 못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은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진리를 아무리 교제해도 그는 알아듣지 못하고, 순종의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생명 진입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생명 진입이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드러내는 속셈과 관념, 기호, 선택을 분석하고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패역한 내적 상태를 인식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전혀 합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정도까지 깨달으면 진리를 실행하기 쉽다. 이것은 순종에 관한 진리 실행의 시작일 뿐이다. 자신의 패괴 성품을 반성하고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너의 패역과 하나님에 대한 지나친 욕망, 너의 기호, 타산, 야심을 해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너는 끊임없이 자신의 패괴를 발견하고, 자신이 가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자신의 본성 본질을 알게 되고,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기가 쉽지 않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이치는 쉽게 이해가 되고 말하기도 쉽지만, 실행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슨 목적으로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겠느냐? 그저 사람을 드러내기 위해서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는데, 이 안에 담긴 진리는 무엇이냐?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과정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정결케 하는 과정이다. 즉, 하나님이 순종 방면의 진리로 사람을 정결케 하고 단속하며,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자신을 인식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패역과 패괴 성품, 하나님께 대적하는 자신의 본성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본질을 인식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어떤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 사람은 심하게 패괴된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인식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피조물로서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를 인식하여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고 더 이상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효과를 거둔 것이며,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다. 이것이 자신에 대해 세부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포함된 세부적인 문제가 아니겠느냐? 사람이 순종 방면의 진리를 들을 때 이렇게 세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느냐? 사람은 이런 세부적인 내용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러한 세부 사항에 대해 알지 못하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으면,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자신의 세부 사항을 인식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구원받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공과다. 사람이 끝까지 순종하면,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연구하거나 개인적 관점을 가지지 않는다. “내 생각에”, “내가 보기에”, “나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란 말을 최우선에 둔 생각과 욕망, 야심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부에 따르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다. 이러면 하나님이 너를 정결케 하는 과정이 끝이 나고, 너의 패괴는 정결케 되고 너는 진정한 피조물이란 신분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면 자신의 위치를 찾고 자신의 위치에 제대로 선 것이다. ‘나’란 말을 최우선에 둔 생각과 결정, 욕망 등 이런 것들의 교란이 없으면 너는 쉽게 순종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늘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시는데 이는 불합리해요! 좀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제 불만이 나름의 이유가 있고 합리적이지 않나요?” 이것이 순종이냐? 이런 사람은 순종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냐? 그는 순종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순종의 의의가 무엇인지, 자신의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지, 자신의 본분은 무엇이고 사람이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사람을 폭로한 말씀은 때로 엄해 들으면 가슴이 찔리고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심지어 존엄과 인격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랑과 이해심이 없으셔. 사람을 봐주거나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고 양해해 주거나 관용을 베풀어 주지도 않으셔. 너무 가혹하셔!’ 사람은 다 자신의 존엄과 인격을 중히 여긴다. 존엄과 인격에 상처를 입으면 사람은 받아들이기 가장 힘들어한다. 순종하고 싶어도 순종하지 못한다. 그는 속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너무 높은 요구를 하시네. 이것은 나를 놀리고 괴롭히시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틀렸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람에게 억지로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에는 조건이 있으며, 그것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고, 또 진리를 깨닫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말씀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선포하는 모든 진리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요구하지 않는다. 보아라.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 즉시 징계나 징벌을 받는 경우가 있느냐? 그런 경우는 없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진리를 향해 노력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보고 하나님이 그에게 반드시 하라고 요구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상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의중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멋대로 평론해서는 안 된다. 네가 늘 자신의 이치를 따지며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정결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네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실제를 살아 내지 못했다고 할 것이다. 그럼 네가 말하는 순종은 그저 이치일 뿐이며, 영원히 하나의 이론인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배치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의 환경 속에서 항상 마음속에 관념을 갖고 있으면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고 하나님께 반항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순종의 진리 실제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순종이란 그저 이치이자 공허한 말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은 어떤 배경에서 비로소 조금이라도 순종할 수 있겠느냐? 적절한 환경이 필요하고, 그의 관념에 부합해야 하며, 또 기분이 좋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순종의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실제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의 순종이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관념에 부합해야 하고, 또 그의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순종할 수 있는데 이런 배경은 극히 드물다. 그러면 진실한 순종은 어떤 모습일까? 그가 진리라고 인정하기만 하면 이유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사람의 입맛이나 관념에 맞든 맞지 않든 모두 순종하는 것이다. 그에게 죽으라고 해도 이유를 따지지 않고 순종할 수 있다면 그것을 죽기까지 순종한다고 한다. 이것이 베드로의 순종인데 이런 순종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몇 명 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진리는 어디서든, 어느 시대든, 사람이 당연히 지켜야 할 도이다. 누구든 마땅히 지켜야 할 도인 것이다. 사람이 준행할 수 있든 없든, 준행하길 원하든 원치 않든, 진리는 패괴된 인류든, 사탄에 의해 패괴되지 않은 인류든, 현재의 인류든, 앞으로의 인류든, 인류라면 마땅히 준행해야 하는 도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왜냐하면 진리는 바른길이자,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 모든 피조물이 준행해야 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기 때문이다. 진리가 너의 사상 관점이나 너의 성품과 충돌할 때,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순종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이 순종의 진리이다. 순종의 진리가 무엇이냐?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이 진리의 실제적인 측면은 무엇이냐? 네가 실행하길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네가 보기에 맞든 틀리든, 너의 관점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에 대해 네가 어떻게 보든, 너는 당연히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순종이자 순종의 진리이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못한다고 진리가 진리가 아니고 빈말이 돼 버리는 건 아니다. 이런 관점은 터무니없고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이 실행하지 못해도 그건 진리일 수 있겠죠. 만약 모든 사람이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건 진리가 아니지 않나요?” 이 말이 맞느냐? (틀렸습니다.) 그것은 논리적 추론이다. 사실, 진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네가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진리는 사람이 준행해야 할 도이자 올바른 길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해도 진리를 실행할 수 없다고 해서, 진리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고, 만 명의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없어도 진리는 여전히 옳은 것이다. 모든 사람이 실행하지 못하더라도 진리는 여전히 옳다.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 오직 진리만이 인류를 정상적으로 생존하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며,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게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이며, 또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효과다. 진리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나님이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모두 진리다.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진리이다. 사람이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길 원하는 상황에서 순종하려면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느냐? 사람의 모든 패괴 성품, 개인의 선택과 타산, 계획 등을 해결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인식한 후 단번에 내려놓을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 순종의 진리를 구하거나 실행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상황을 마련해 달라고, 사람과 일, 사물을 일으켜 달라고 구하고,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구함으로써 점차 해결되고 정결함을 얻게 된다. 네가 정결함을 얻어야 절대적인 순종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네가 순종하면 이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이 문제들은 영원히 해결될 수 없다. 마지막에 이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어 네가 정결함을 얻으면, 너란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너희는 이 관계를 이해했느냐? 네가 순종해야 이 방면의 진리가 네 안에서 너의 실제가 된다. 네가 이 방면의 실제를 살아 내면 이 방면과 관련된 너의 문제는 해결된다.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이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가늠해야 정확하겠느냐? 하나님 말씀 글자 그대로를 이해할 수 있는지만 보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겠느냐?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설교 교제를 들으면 모두 알아듣고 마음속으로 깨닫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어떤 말씀들은 분명히 얘기하든 얘기하지 않든 조금만 얘기해 주어도 금방 깨닫고, 뜻을 완전히 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차리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설교 교제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며 항상 오해하고 모순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네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에게 진리를 분명히 교제해도 그는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고 그저 도리만 이해할 뿐이다. 규례를 지킬 줄만 알아도 다행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기가 어렵다. 하지만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든 없든 모두 진리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진리를 분명히 깨달을수록 사람에게 이롭다. 일을 꿰뚫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추구하려면 한 방면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정성을 쏟아 묵상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교제하고,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하는 것이다. 네가 실행하고 체험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너의 실제가 되어야 비로소 너는 하나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거기에 내재한 진리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가 진리를 깨닫게 되면 자연히 영적인 이해력이 있게 된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게 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럼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목적은 진리를 실행하고 깨닫는 것이다. 실행할 때 길이 있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실행한 후에 거기에 내재한 진리를 깨닫고 그 안의 관계와 실행의 원칙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으로, 진리를 깨닫는 효과를 얻는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와 관련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큰 문제인데,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 없는지와 관계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는데, 대체 순종이 무엇이냐? 순종하는 대상은 무엇이냐?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마련한 현실적 상황, 사람과 일, 사물, 그리고 각 본분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요구에 순종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순종의 실제에는 또 무엇이 있느냐? (상부의 사역지침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가지이다. 또 있느냐? (하나님 집에서 우리에게 안배한 모든 본분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본분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몹시 중요한 일이다.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는 진리 실제의 유무와 관련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람됨의 기준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됨에는 무엇이 포함되느냐? 어떻게 형제자매를 대하고, 어떻게 재물을 대하고, 어떻게 앞날과 결혼, 정, 그리고 육적인 즐거움을 대하는가 하는 것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런 여러 방면의 일에서 모두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하며,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진리의 원칙에 따라 실행하고 살면, 그것은 다 순종이고, 모두 순종의 실제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순종의 진리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 올바르냐? 이는 처신과 관련이 있다. 어떤 형제자매가 눈에 거슬린다고 늘 그를 괴롭히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게 사람됨의 원칙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대하라고 했느냐? (공평하게 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공평이란 무엇이냐? 사람을 진리 원칙에 따라 대하는 것이지, 사람의 겉모습이나 신분, 지위, 지식 유무에 따라 대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취향과 감정에 따라 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어째서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해야 공평한 것이겠느냐? 많은 사람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방인이 이해하는 공평함이 진정한 공평함이겠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공의롭고 공평하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대할 때 어떻게 요구하는지, 여기에 바로 공평함이 있고, 이를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을 대해야 비로소 공평하다. 교회에서 사람에게 어떻게 요구하고,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그가 이행할 수 있는 본분을 안배해 주고, 그가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교란할 경우, 제명해야 할 것은 제명해야 한다. 너와 관계가 좋아도 안 된다. 이것이 공평으로,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는 원칙에는 이런 것들이 포함된다. 이것은 사람됨의 원칙과 관련된다. 순종의 진리는 한편으론 본분 이행, 그리고 우환과 질병이 임했을 때 사람이 어떻게 순종하고 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굳게 설 수 있는지와 관련된다. 또한, 처신의 측면에서는 주로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하고, 양심과 이성을 가져야 하며, 정상인의 생활과 의식주가 있어야 한다. 삶의 질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요구하느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은혜시대 하나님의 요구였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떤 요구를 하느냐? 의식주행, 말과 행동, 차림새 같은 방면에 모두 하나님의 요구가 있다. 네가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 없는 사람이 되라는 건 아니지만, 육적인 안락을 탐해서도 안 된다. 게으르고, 육적인 안락을 탐하고, 즐거움을 좇는 건 하나님이 요구하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무엇이냐? 너의 본분에 마음을 다하고, 직무와 책임을 다하고, 고생하며 대가를 치르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사역하는 것이다. 재물을 대하고, 세상을 대하고, 사악한 조류를 대하고, 너와 관련 있는 불신자들을 대함에 있어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 하나님은 요구 기준이 있고, 그 안에는 진리가 있다. 이 몇 가지 큰 항목에는 모두 사람이 실행하고 순종해야 할 진리가 있다. 어떤 사람은 안락을 탐하고,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며, 육적인 사욕을 따르길 좋아한다. 또한, 사회의 풍조를 좇아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자기도 해 보려고 하는 등 마음이 늘 밖에 가 있다. 이러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답게 꾸민 이방인을 보고 자신은 하나님을 믿으며 평범한 차림을 하고 있어 늘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어느 부부가 둘이서 즐겁게 사는 것을 보고 자신의 외롭고 적적한 처지를 떠올린다. 늘 이 일로 괴로워 진리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도 않는다. 이러면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사소해 보이고 아주 명백한 진리와는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가장 기초적인 진리와 관련이 있다. 사람이 이런 문제들을 이겨 내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이것들은 늘 내면에서 너를 교란하여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기 매우 어렵다.

어느 방면의 진리든,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것이든, 아니면 비교적 깊은 수준의 것이든, 모두 진리이다. 진리는 어떤 상황에서 사람이 어떤 것들을 실행해야 하는지의 구분이 있을 뿐 깊이의 구분은 없다. 어떤 건 사람의 본분과 관련이 있고, 어떤 건 사람의 일상생활, 예를 들어 일상생활 속 습관, 규율, 개인적 취향과 관련이 있으며, 어떤 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마련한 상황, 사람과 일, 사물과 관련이 있다. 어떤 방면의 문제이든, 그것이 일상생활과 관련된 것이든 본분과 관련된 것이든, 일의 크기를 떠나서 너는 진지하게 대하고 진리를 구하며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설교를 듣고도 진리 실행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들어 보지 못한 설교를 듣는 데만 치중하며, 항상 셋째 하늘의 언어와 비밀을 듣고 싶어 한다. 또 남에게 높은 수준의 설교를 하고 남이 알아듣지 못하면 의기양양해한다. 이것은 너무도 이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공허한 것들만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본분과도 관련 없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드러내는 내적 상태, 패괴 성품과도 관련이 없고, 사람의 생활, 사람의 진입, 본분과도 연관성이 없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드러내거나 보이는 다양한 내적 상태와도 무관하다.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것은 모두 도리고 빈말이지 진리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설교를 많이 듣고는 진리를 깨달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고는 몇 가지 도리와 규례로 정리한 뒤 늘 사람들에게 말하고 교제한다. 하지만 문제나 어려움이 닥치면 처리하지 못한다. 어째서 그가 깨달은 도리가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느냐? 이것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다. 어떤 이들은 몇 년 동안 글귀와 도리를 얘기해 왔지만, 그에게 진리를 교제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면 그러지 못한다. 체험 간증문을 쓰라고 해도 쓸 줄 모르고, 누군가 일이 생겨 그에게 도움을 구해도 도와주질 못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런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고 영적인 이해력도 없으니 참으로 가련하다! 다른 사람의 숭배와 부러움을 사고 싶어서 큰소리치고 구호를 외치며 지식과 도리, 신학에 열중하고, 남들에게 없는 것을 갖추거나 남들이 못 들어 본 것을 배우는 일, 또는 머리로 암기하는 일에만 열중한다. 이러면 영적인 이해력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을 수 없는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과 진리를 깨닫는 것은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몇 년을 믿었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지가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쉽게 깨닫고, 설교를 들어도 쉽게 진리를 깨닫는다.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면 쉽게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2020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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