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 1 부)

본분 이행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진리에 공을 들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진리 원칙을 파악해야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본분과 관련된 각종 업무나 전문 기술을 배울 필요가 있으며, 반드시 간단한 실용 기술을 익혀야 한다. 기술적인 업무는 좀 알고 있지만 어떻게 자신의 본분에 적용해야 할지 몰라 일할 때면 늘 머릿속이 모호하며, 어떻게 하는 게 옳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는 게 잘못이고 원칙에 위배되는지 알지 못한 채 마음이 혼돈 상태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렇게 해도 괜찮은 것 같고 저렇게 해도 괜찮은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감을 잡지 못하며,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 알지 못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내적 상태나 수많은 일에 대한 인식과 판단 기준이 모호해진다. 일하지 않을 때는 뭐든 아는 것 같고 전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막상 현실적인 환경이 닥치면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알지 못한다. 그제야 자신이 원래 아무것도 갖추지 못했으며,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기가 말할 줄 아는 도리는 쓸모가 없어 그저 남과 상의하고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이다.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근심 걱정에 휩싸인 채 이렇게 해도 틀린 것 같고 저렇게 해도 틀린 것 같아 정확한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제야 진리가 없으면 한 걸음도 나아가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럼 이럴 때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사탄 철학과 지식이겠느냐, 아니면 진리를 깨닫는 것이겠느냐? 진리를 깨닫는 것이 핵심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떤 일을 마쳐도 자신이 없고,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며, 사역을 마친 후에 어떤 성과가 날지 등 이런 것을 판단하지 못한다. 어째서 판단하지 못하겠느냐? 왜 늘 자신이 없겠느냐? 네가 일을 처리할 때 정말 착실히 원칙을 따랐는지, 네가 실행한 것이 원칙이 맞는지, 진리에 부합하는지 너 자신조차 불분명하고 검증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성과가 조금이라도 나면 자신에게 능력과 밑천이 있다고 생각되어 날아갈 것 같지만, 눈에 띄는 성과가 없고 원칙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바로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 ‘하나님은 언제 나를 깨우쳐 주실까? 하나님은 왜 항상 다른 사람만 깨우쳐 주시는 거지? 나는 왜 어떤 영감도, 깨우침과 빛 비춤도 없는 걸까?’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자기 행동의 마음가짐이 옳고, 노력을 기울였다고 여기며 하나님이 열납하고 인정하고 긍정해 주기를 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칭찬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이것이 환득환실 아니겠느냐? 자기 분량이 미미하고 패역과 교만함이 너무 많으며 일만 좀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너무 패괴되었다고, 자신은 마귀 사탄이니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지만,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성적을 내면 자기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고, 그래도 능력이 있고 성과를 낼 수 있으니 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환득환실 아니겠느냐? 환득환실의 이런 내적 상태는 어떻게 생겼겠느냐? 이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많은 내적 상태와 태도가 생겨나는데, 주요하게는 환득환실의 내적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평소 상태이다.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에 자기 주제를 모르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알지 못한다. 또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에 본분 이행의 원칙과 기준, 성과가 무엇인지 모르며,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왜 너에게 노하는지, 왜 너를 칭찬하는지, 왜 네게 관용을 베푸는지 등을 알지 못한다. 이런 일을 다 모르는 것이다. 또 자기가 어떤 위치에 서 있어야 하는지 모르고, 자신의 행동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한 것인지, 합격했다고 할 수 있는지 역시 판단하지 못한다. 때로는 일을 처리하면서 위축되고, 또 때로는 과하게 행동하는 등 늘 불안정한 상태를 보인다. 불안정한 상태는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결국,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일 처리에 원칙이 없고, 일할 때 이리저리 휘둘리며 늘 오류가 생긴다. 일하지 않을 때는 뭐든 아는 것 같고 논리적으로 도리를 말하지만 막상 일이 생겨 처리하라고 하면, 깨달은 진리를 실생활에 적용하라고 하면 길을 찾지 못하고, 어떤 원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알아. 또 하나님께 관념이나 오해를 품지 말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그런데 이 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지?’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줄곧 규례에 맞추려고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되지 않는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 말씀 서적을 뒤적이며 찾는 자가 정말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겠느냐? 이는 정말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저 몇몇 도리를 이해한 것이며, 진리의 실제적인 면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는 그가 평소 말하던 것,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이 전부 도리임을 의미한다. 네가 깨달은 것이 진리이고 네게 진리 실제가 있다면,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어떻게 해야 원칙 범위 안에 들어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네가 이해한 것이 진리가 아니라 도리라면, 정말 일이 닥쳤을 때 도리에 기대 규례를 지키면 통하지 않을 것이고, 원칙과 실행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측면의 진리를 듣고 이해한 것 같고, 이 말씀들이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 같고,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좀 이해한 것 같아 전부 아는 느낌이겠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실행할 줄 모르고 함부로 규례에 맞추어 일을 망치게 된다. 이는 망신 아니겠느냐? 정말로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실행의 원칙을 찾을 수 있고, 실행의 길이 있으며,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다. 글귀와 도리만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말할 때는 진리를 깨달은 것 같아도 일을 처리할 때는 멍해져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는 글귀와 도리를 늘어놓을 줄 안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은 것은 절대 아니며, 글귀와 도리를 말하는 자는 전부 사람을 미혹하는 사기꾼임을 충분히 입증한다. 남들은 물론이요 자신까지 속이는데, 이는 남을 곤경에 빠뜨리고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지금 너희는 진리를 더 많이 깨닫고 있느냐, 아니면 도리를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느냐? (도리를 더 많이 이해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해 진리를 묵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과 다 관계가 있다. 하지만 너희가 말한 것은 전부 주관적인 원인이다. 객관적인 원인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사람의 자질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10여 년 동안 설교를 들어도 진리와 도리의 차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규례를 지키는 것과 진리 실행의 차이도 분별하지 못한다. 그는 설교도 열심히 듣고 자세히 분별하기도 하지만, 그 차이를 알아내지 못한 채 언제나 모두가 교제하는 내용이 거의 비슷하고 다 훌륭하고 무척 실제적이라고 생각하며, 아무리 들어도 무엇이 도리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한다. 이는 자질 문제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의 자질은 진리 실제에 이를 수 있느냐? 리더 일꾼이 매번 예배 자리에서 교제하거나 평소 너희와 교류하고 접할 때, 너희는 그가 하는 말 중 진리 실제는 얼마나 되고 도리는 얼마나 되는지 알아챌 수 있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은 너희에게 어느 정도 분별력이 있다는 뜻이다. 또 아예 분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은 너희 자질이 부족하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의 자질은 몇 가지 등급으로 나뉘는데, 기본적으로는 자질이 부족한 것, 자질이 평범한 것, 자질이 좋은 것, 자질이 뛰어난 것 이렇게 4가지 등급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자질이 부족한 것보다 더 심각하면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그런 자는 자질이 전혀 없으며, 무엇을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일을 해도 생각이나 논리, 원칙이 없어 머리가 실타래 같다. 즉, 바보와 다름없는 자로, 흔히 짐승과 같다고 일컫는 부류이다. 자질이 너무 떨어진다면 지적 장애가 있고 정상인의 이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속된 말로 멍청이, 바보, 반편이라고 불린다.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사람은 지적 장애자에 속하므로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을 몇 해 동안 믿고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최소한의 복음 전파 본분조차 이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리 교제도, 복음 증거도 못 하는 것은 자질이 부족한 모습이다. 그럼 자질이 부족한 것에는 또 어떤 모습이 있겠느냐? 여러 해 동안 설교를 들어도 전부 같은 것 같고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 각 진리 사이의 세부적인 차이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도리인지는 더더욱 구분하지 못한다. 간단한 글귀와 도리조차 말하지 못하니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언급할 나위도 없다. 이런 자는 자질이 누구보다 떨어지는 사람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은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몇 년 동안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며,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자기 인식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몇 년 동안 믿든,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든 결국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몇 가지 규례만을 지키면서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일만을 기억하는데, 그나마도 많아지면 기억하지 못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자질이 부족해 진리에 미치지 못하며, 너무 많은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껏해야 얕은 도리만을 좀 이해하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또 흔히 교만해져서 큰소리를 친다. 어떤 이는 “저는 모태에서부터 주님을 믿었습니다. 오래전에 성결해졌고, 세례를 받아 정결케 됐죠.”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지 3~5년, 혹은 10여 년이 지나도 똑같은 소리를 늘어놓는데,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또 어떤 사람은 “제가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고요? 당신들이야말로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겠죠. 저는 이미 오래전에 성결해졌다고요.”라고 하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자, 자질이 누구보다 떨어지는 자이다. 이런 사람에게 진리를 교제해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네가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그는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진리 실행인지, 무엇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인지, 무엇이 생명 진입인지, 무엇이 성품 변화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이러한 것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며 거기에 이르지도 못한다. 그저 하나님을 믿으면서 규례를 지키는 것에만 집중한다. 또 속세에서 벗어나 세상을 버리고 마귀와 교류하지 않는 것, 악을 행하지 않고 죄를 적게 짓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지키고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는 것 등의 일이 기본적으로 종교 신앙의 형식에 머무른다. 그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의 도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며, 들은 게 많아지면 더 혼란스러워져서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에게 하나님이 이번 단계 사역에서 사람에게 어떤 요구를 했는지 물어보면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간단히 도리만 좀 늘어놓을 뿐이다. 이는 자질이 너무 떨어져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주된 모습은 바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력이 없다는 것이다. 즉, 설교를 들어도 글귀와 도리만을 좀 이해할 뿐 새로운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일이 닥쳐도 처리할 줄 모르고 진리를 실행할 줄도 모르며 공허한 도리나 늘어놓고 규례만 지키는 것이다. 설교를 들을 때는 이해한 것 같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여전히 규례를 지키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며, 늘 글귀와 도리를 늘어놓으면서 남을 훈계한다.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어 이해한 도리가 많아지면 다른 사람과 교제할 때 인식에 관한 말을 좀 할 수 있고, 완전하고 구체적으로 의미를 말하며, 정상적으로 대화할 수 있지만,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실제인지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기가 말하는 그런 도리가 진리 실제라고 생각한다. 또 다른 사람들이 진리 실제와 관련된 체험, 본인의 인식과 실행 길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여 진리와 도리는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들어도 그런 설교 내용에서 실행해야 할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구원받기 위해 반드시 어떤 진리를 갖춰야 하는지 깨닫지 못하며, 스스로를 인식할 줄도 모르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위해 어떤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를 알지도 못한다. 또 실생활 속에서 규례와 종교 의식을 지키고 꾸준히 예배에 참석하며 남에게 도리를 늘어놓고 본분 이행에 좀 힘을 쓰는 것 외에 성품 변화나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고 생명 진입을 이루는 것과 관련된 진리에 전혀 진입하지 못하고 깊이를 더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평범한 것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이 정도 수준에 이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20~30년간 믿고도 여전히 도리만 늘어놓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을 10년 넘게 믿고도 도리만 늘어놓는 사람을 접해 본 적이 없느냐? (있습니다.) 그런 자가 바로 자질이 평범한 사람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에게는 어떤 모습이 있느냐? 자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길든 짧든, 설교를 듣고 나면 그것이 성경의 말과 차이가 있고, 교계에서 하는 말과 완전히 다름을, 그 도가 더 깊이 있고 자세하며 실제적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후 진리를 실행하고 실제에 진입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하며, 실생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할지 훈련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너희는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했을 때, 처음에는 규례만을 지키며 마음속으로 생각한 대로 말하다가 조금씩 설교를 듣고 실제로 체험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종합하여 결국에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진리가 무엇인지, 생명이 과연 무엇인지 등을 체험하고 경험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를 듣고 깨달은 진리를 자기 실생활에 적용하여 자신의 실제로 만들며, 실제적인 체험이 생겨 생명 체험에 점차 깊이를 더하게 된다. 즉, 설교를 들을 때나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그 안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여기에서 진리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공허한 도리도, 한 가지 표현 방식도, 어떤 분야의 이론도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실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관련이 있고, 자기가 표출하는 갖가지 패괴 성품과 관련이 있다. 그는 이러한 내적 상태를 성찰하여 하나님 말씀이나 하나님이 폭로한 것과 대조한 후 어떻게 하나님 말씀대로 실행하는지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것이다. 자질이 좋은 것은 주로 어디에서 구현되겠느냐? 설교를 들으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고, 그 말이 자신의 실제 내적 상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깨달으며, 그 말이 자기에게 주는 영향은 무엇인지 대조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것이다. 듣고 이해하며 대조하는 것 외에도 그는 실생활 속에서 실행의 원칙을 파악할 수 있고, 그런 원칙을 실생활 속에서 직면한 모든 어려움이나 닥친 일에 적용할 수 있다. 이는 깨닫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깨닫는 능력이 있는 자야말로 진정 자질이 좋은 사람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패괴 성품을 표출할 때, 자신의 내적 상태나 그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자기가 이해한 도리와 대조할 뿐이다. 그는 그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 본질의 근원이나 진리와 관련된 면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책망과 훈계, 해부와 분석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으면 그 일 자체에 대해 얼마간 인식이 생기지만, 다른 내적 상태나 환경이 닥치면 또 인식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원칙을 찾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평범한 것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한테 왜 자질이 좋다고 말하겠느냐? 어쩌면 그도 일이 닥쳤을 때 당장은 실행의 길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설교를 듣거나 하나님 말씀에서 구하여 길을 찾음으로써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게 된다. 그럼 비슷한 일이 닥쳤을 때도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는 규례를 지키지 않고 그 안에서 돌파구를 모색하며, 하나를 보고 열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는 원칙을 찾았고, 그 측면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그 측면의 진리가 가리키는 사람의 내적 상태, 표출, 패괴 성품, 그리고 관련된 사물, 삶 속에서 마주하는 환경 등을 모두 알게 되었으며, 이런 일을 할 때의 원칙이 무엇인지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닥치면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수 있는데, 이는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진리를 깨닫는 자질을 갖춰 팀장이나 리더가 되지만, 어떤 사람은 도리까지만 이해할 수 있어 팀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원칙을 파악하지 못하고 관리 감독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게 팀장을 시키는 이유는 앞장서고 관리 감독하게 하기 위함이다. 무엇으로 관리 감독을 하겠느냐? 도리나 구호, 지식, 관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원칙으로 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 집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자 최고의 원칙이다. 네 자질이 평범하거나 자질이 너무 떨어진다면 진리를 깨닫지 못할 텐데 어떻게 관리 감독을 하고 어떻게 그 책임을 짊어지겠느냐? 너는 그 사역과 본분을 감당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팀장으로 뽑혔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떤 사역도 해내지 못해 허울뿐인 팀장으로 있다가 교체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팀장으로 뽑힌 후 진리 원칙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에 사역을 감당하고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팀장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주요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개중에는 인성이 좋지 않은 소수의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질이 너무 떨어져 본직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도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진리 이해든, 어떤 분야의 업무나 전문 기술 학습이든 그 해당 원칙을 파악하고 근원을 알며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면을 찾아 자신이 하는 일이나 종사하는 일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정확한 기준과 원칙을 정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것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하나님 집의 각 사역에서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맡지만, 자질이 평범하거나 부족한 사람은 그 사역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는 절대 하나님 집에서 사람을 차별하거나 일부 사람을 무시하거나 가리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자질 문제로 관리 감독을 하지 못한다. 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근원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이냐? 자질이 평범하거나 너무 떨어져서 진리에 이르지 못하고,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유는 열심히 듣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너무 젊어서일 수도 있으며, 하나님을 믿는 일에 아직 개념이 없고 그리 흥미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다 주된 원인이 아니다. 주된 원인은 자질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자질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얼마나 오래 사역하든,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든,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든 갈피를 잡지 못하며, 본분 이행도 차일피일 미루면서 엉망으로 만들 뿐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팀장이 되어 몇몇 사역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는데, 처음 사역을 책임지게 됐을 때는 원칙을 파악하지 못해 몇 번의 실패를 겪지만, 그 후 구하고 자문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깨닫고 원칙을 파악하게 되어 원칙대로 관리 감독하고 혼자 사역을 맡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있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원칙을 알려 주어도, 심지어 세부적인 실행의 길을 말해 주어도 들을 때는 이해한 것 같지만 일할 때는 여전히 원칙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자기 뜻과 상상대로 하면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원칙에 부합하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히 말하지 못하고, 하나도 아는 게 없다. 만약 상부에서 물어보기라도 하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떻게 말하는 게 적절한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상부에 관리하고 지도해 달라고 요구해야만 감을 잡게 된다. 이는 자질이 너무 떨어지는 것이다. 자질이 너무 떨어지면 하나님의 요구에도, 진리 원칙에도 미치지 못하고,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은 언급할 나위도 없다.

방금 말한 ‘좋은 자질’ 위에 한 등급이 더 있다. 바로 ‘뛰어난 자질’이다. 자질이 뛰어난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서 체험 속에서 점차 하나님 말씀이 가리킨 각 측면의 내적 상태가 어떤 것인지 체험하고 느끼고 인식할 수 있다. 즉, 공급이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혼자 하나님 말씀에서 실행의 길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이 알려 준 원칙과 방향, 기준대로 스스로에게 요구하는데 오류도 없고 치우친 점도 없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며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알아 갈 수 있다. 이는 가장 뛰어난 자질이고, 이런 사람이 바로 이해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들 사이에 이런 자가 있더냐? 너희는 지금 이 인류 가운데서 이런 자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생각해 보아라. 성경에는 이런 사람이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욥과 베드로가 그러합니다.) 욥과 베드로 모두 그런 사람으로, 인류 가운데서 자질이 가장 뛰어났다. 일단 그들의 인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차치하고 자질만 놓고 본다면, 그 둘은 자질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무엇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겠느냐?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본 적이 없음에도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말씀한 적이 없는데, 그는 어디에서 체험과 경험, 인식을 얻었겠느냐? 삶 속에서 관찰하고 발견한 후 자세히 음미하여 마음으로 감응을 느끼고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은 것이다. 그는 이러한 진리를 하나하나 깨달았고, 깨달은 후에는 자신이 이해한 대로, 깨달은 진리대로 실행하면서 조금씩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말은 사람이 지키고 실행하고 준행해야 할 최고의 도이다. 후세 사람들이 보기에는 욥이 이 말을 아주 쉽게 실행해 낸 것 같다. 하지만 네가 간단하고 쉽다고 느낀 것은 이 말 안에 담긴 실제적인 면을 인식하지도, 체험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욥은 이 말을 어떻게 얻었느냐? 자신의 실제 체험으로 얻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라’는 말을 좌우명이나 진리 원칙으로 삼아 지키고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옳은 생각이지만, 욥은 말이 아니라 오로지 행동에만 집중했다. 그런 행동 원칙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일상생활 속에서 체험한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 원칙을 지킬 수 있었겠느냐? (삶 속에서 경험하고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정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고, 사람에게 한 하나님의 사역을 보았다. 그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게 경외심을 품었으며, 진실한 믿음과 앙망, 진실한 순종과 신뢰의 마음을 갖게 됐다. 그의 경외심은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오랜 세월 하나님을 믿고 따른 후, 그의 실행과 태도를 종합하여 생긴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행위와 인식, 그리고 일 처리 원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태도와 표출, 행위, 그리고 마음 깊은 곳의 본심, 일 처리 원칙 등 그 모든 태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욥에게 내린 정의이다. 욥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말씀을 듣고 많은 진리를 공급받은 후 스스로의 이해를 통해 조금씩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그에게 명확한 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하나님의 사자뿐이었으며, 그가 들을 수 있었던 것 또한 기껏해야 선조들이 전해 준, 하나님과 관련된 전설이나 이야기뿐이었다. 그가 알 수 있었던 것 역시 그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욥은 그 얼마 안 되는 정보를 통해 삶 속에서 점차 더 많고 더 실제적인 것들을 인식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도 점점 큰 믿음과 진실한 경외가 생기게 되었다. 이 두 가지가 생긴 후 욥의 진실한 분량과 자질이 보였다. 우리는 욥에게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인류가 구원받는 것과 관련된 이 수많은 진리는 사실 정상 인성의 사유와 자질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씩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욥이 바로 그 사례로, 그는 실제적인 것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느냐? 시련을 겪으면서 실증한 최고의 좌우명이자 최고의 인식이었다. 그 좌우명과 최고의 인식은 무엇이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인류 가운데 이 일을 욥처럼 진실하게 인식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욥과 같은 인식에 이른 사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지금 사람이 이해한 것은 도리뿐이다. 위의 말은 욥이 체험한 것으로, 후세 사람들은 이 말을 할 수는 있어도 마음속에 그러한 인식이 없다. 욥도 처음에는 이런 인식이 없었다. 하지만 이 말은 그에게서 비롯되었으며, 그가 겪고 체험한 것으로, 욥에게는 그런 실제가 있었다. 후세 사람들이 욥의 말을 어떻게 배워서 따라 하든, 도리만을 이해할 뿐이다. 어째서 도리에 불과하다고 하겠느냐? 한 측면으로는 사람이 실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사람은 아예 그러한 체험이 없으며, 체험 속에서 얻은 그런 인식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그 인식은 공허하다. 네가 아무리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저는 하나님의 모든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외칠지라도 사실 앞에서 그것이 하나님의 행사임을 마음으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거두어 가고 파괴했다면, 너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겠느냐? 그러기 힘들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하기 어렵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한 본뜻도, 하나님의 주재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며, 피조물이 서야 할 위치와 지녀야 할 순종, 그리고 해야 할 일을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것을 모르면 네가 입으로 욥이 한 말을 전해 봤자 그것은 어느새 빈말, 수식어, 스쳐 지나가는 말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네가 욥과 똑같은 말을 해도 이 말에 대한 욥의 인식과 이해, 그리고 이 말을 할 때의 심정은 너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심경이다. 욥은 평소에 이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갔을 때 바닥에 엎드려 하나님의 행사를 찬미했다. 반면, 너는 수시로 이 말을 하는데 만약 하나님이 네 것을 거두어 간다면 어떤 태도를 보이겠느냐? 엎드려 기도할 수 있겠느냐? 너는 순종하지 못할 것이다. 설사 표면적으로는 “순종하자. 이건 하나님의 행사잖아. 사람은 이렇다 할 능력도 없고, 반항도 할 수 없는걸.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순응하자.”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진실한 순종이겠느냐? 일단 네 이런 소극적이고 반항적이며 반발적인 정서가 도대체 어떤 성질인지는 차치하고, 네 그런 태도는 욥과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차이가 무척 크다. 이것이 바로 진리 실제를 갖춘 자와 갖추지 못한 자의 차이이다. 또한, 이는 사람의 체험과 깨달음이 생명의 자연스러운 표출이 된 것과 도리만 이해했을 뿐 실제가 없는 것의 분명한 차이이다. 일이 닥치지 않았을 때, 사람은 누구나 욥의 그 말을 입에 올리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대다수가 욥의 그 말을 하지 못한다. 이는 그가 단지 도리만을 이해했을 뿐, 그 말이 그의 생명이 되지 않았으며, 그에게 일이 닥쳤을 때 사상과 태도를 주도하지도 못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말을 생명으로 삼은 사람은 일이 닥쳤을 때 이 말이 그의 일상생활에서 얘기하는 좌우명일 뿐만 아니라 그가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 나아가 하나님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임을, 이 말은 그가 외치는 구호가 아니라 그의 생명의 체현임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진리를 깨달은 것과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이제 베드로에 대해 살펴보자. 왜 베드로의 자질이 좋았다고 하겠느냐? 베드로는 예수가 선포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은혜시대에 살았다. 예수가 은혜시대에 전한 구속의 도는 율법시대보다 높았으며, 생명 진입 측면에 관한 기본적인 진리와 관련이 있었고, 또한 성품 변화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진리와 관련이 있었다. 예컨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는 것, 사람이 패괴 성품을 표출할 때의 대처법 등과 관계되었다. 예수는 이러한 것을 길게 말하지 않았고, 그렇게 체계적으로 말하지도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언급했다. 그것은 당연히 욥의 시대보다 훨씬 많았지만 지금 이 시대보다는 훨씬 적었다. 성경에 사람의 성품 변화,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마음속 깊은 곳 패괴된 본질 및 패괴 성품의 표출과 관련된 측면의 진리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수는 분명 이런 이야기를 어느 정도 했다. 다만 사람이 거기에 이르지 못해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다. 예를 들어, 예수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답했다. 이는 어떤 성격의 말이냐? (교만하여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말입니다.) 이는 바로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여 교만한 말을 한 것으로, 자기 인식과 관련이 있다. 닭이 운 후에 베드로는 무엇을 깨달았느냐? (자신이 큰소리를 쳤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마음속으로 느낀 바가 있지 않았겠느냐? (있었습니다.) 이 일이 벌어진 후, 그의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이었느냐? (후회하고, 마음속으로 자책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반응은 자책과 후회였다. ‘주님의 말씀이 맞았어.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저 바람이나 이상, 구호에 지나지 않았어. 내게는 그런 분량이 없었던 거야.’ 예수가 체포되는 상황 앞에서 베드로는 겁을 먹고 두려워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저자는 너희의 주가 아니냐? 저자를 모르느냐?”라고 질문했을 때, 베드로는 어떻게 생각했겠느냐? ‘맞아. 나는 저분을 알아. 하지만 여기에서 그 사실을 인정한다면 나도 잡혀가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겁을 먹었기에, 또 고난을 치르고 예수와 함께 잡혀갈까 봐 두려워했기에 인정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믿음을 이긴 것이다. 그럼 그의 믿음은 진실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거짓된 것이었느냐? (거짓된 것입니다.) 그때 그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라는 과거 자신의 말이 일방적인 착각이었음을, 그것은 그의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 빈말이자 구호, 도리였음을, 자신에게는 진실한 분량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럼 그는 자신에게 진실한 분량이 없다는 사실을 언제 깨달았느냐? (사실이 닥쳐서 드러났을 때 깨달았습니다.) 사실이 닥쳐 드러났을 때 자책하고 후회하면서 깨달았다. ‘이제 보니 내 믿음과 분량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보잘것없었구나. 주님의 말씀이 맞았어. 그때 내가 주님께 한 말은 허풍이었어. 그건 진실한 믿음이 아니라 한때의 충동이었던 거지. 일이 닥치자 나는 겁을 먹고 고난을 겪지 않으려고 했어. 그것은 사심을 품고 나 스스로 선택한 거야. 나한테는 순종도,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어. 내 믿음과 분량은 겨우 이 정도였다고.’ 그의 후회는 이런 생각으로 연결되지 않았겠느냐? 그가 후회했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를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분량과 내적 상태, 믿음을 정확히 판단했다. 신약 성경에는 베드로가 주를 세 번 부인했다고만 쓰여 있을 뿐, 그가 어떻게 후회하고 돌아섰는지,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의 체험 간증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사실, 베드로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지만, 성경 편집자들이 발췌하지 않았다. 이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두 전도와 간증을 중시하고 생명 체험과 관련된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사도들이 어떻게 전도 사역을 하고 어떻게 고난을 겪었는지에만 관심을 가질 뿐 사람의 생명 진입이야말로 가장 핵심이라는 사실은 몰랐다는 것을,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편집자들은 베드로의 일을 너무 간단하고 두루뭉술하게 기재했지만, 바울의 일은 오히려 매우 많이, 자세하게 적어 놓았다. 이는 성경 편집자들이 편견을 갖고 있었으며, 진리란 무엇인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그들은 바울을 숭배했기에 바울의 서신을 더 많이 발췌하여 수록했고, 베드로의 서신에는 매우 적은 지면만 할애했다. 그런 식으로 성경 편집에 원칙적인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이로 인해 2천 년 동안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바울을 숭배하고 본받게 됐고, 종교계 전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을 걸으면서 적그리스도에게 통제받는 종교 왕국이 되었다. 그들은 베드로의 이 훌륭한 간증을 전부 무시한 채 베드로의 서신 두 개, 베드로전후서만을 기재했다. 베드로가 과연 어떻게 체험했는지,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깨우쳤는지, 예수는 그에게 현현하여 어떤 말을 했는지, 그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어떻게 받아들여 마지막에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는지, 베드로가 그 단계까지 어떻게 걸어갔는지, 그러한 생명 성품의 변화를 어떻게 얻었는지, 그런 믿음과 순종에 어떻게 도달했는지 등의 체험 과정은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장 가치 있는 내용을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으니 실로 너무나 유감스럽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베드로는 주를 세 번 부인했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혔다. 이 두 가지 일을 종합해 보면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주를 세 번 부정할 때부터 마지막에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힐 때까지 그것은 험난한 과정이자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과정 아니겠느냐? 그것은 어떤 과정이었겠느냐? (사람이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를 이루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다. 사람의 성품 변화는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헌신하며, 하나님의 모든 지배에 기꺼이 순종하는 생명 여정이다. 생명 체험은 바로 이런 과정이며, 절대 극적인 것이 아니다. 처음에 자신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못할 때부터 마지막에 용기와 믿음을 갖고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힐 때까지 베드로의 믿음과 성품, 순종에는 얼마나 큰 변화 과정이 있었겠느냐! 분명 성장 과정이 있었다. 이 성장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지금의 사람은 알 필요가 없다. 지금 말한 이런 내용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면서 깨달아야 할 진리로, 하나님이 오늘 사람에게 분명히 이야기하고 공급했기 때문이다. 그럼 베드로는 어떻게 체험했겠느냐? 예수가 떠난 후, 어떻게 체험해야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지 그에게 분명히 알려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이 명확한 말씀으로 공급해 주지 않았던 그 시대에 그는 아무 원망도 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는 일도 없이 기꺼이 순종하는 분량과 믿음을 이루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는 도대체 어떤 진리를 얻었느냐? 또 어떻게 얻은 것이냐? 기도하고 구한 후 조금씩 체험하고 모색한 것이다. 물론, 그 기간에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 특별한 은총과 인도를 얻은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 외에는 스스로 노력해서 깨달은 것이다. 베드로는 그 과정에서 모호하기만 했던 자기 인식이나 하나님의 뜻, 사람이 진입해야 하는 각 측면의 진리를 점차 뚜렷하고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그 후로는 실제적이고 확실한 실행의 길을 찾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어떤 오류도 없이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되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실증을 얻었기에 용기를 갖고 그렇게 실행할 수 있었다. 그 실증은 어떻게 얻은 것이겠느냐? 모색하는 한편, 기도하고 구하여 성령이 역사하고 하나님이 역사하도록 했다. 방해나 징계 없이 성령의 깨우침이 있었고, 평안과 기쁨이 있었으며, 이와 동시에 하나님이 붙들어 주고 축복하고 인도해 주었다. 이렇게 실증을 얻은 것이다. 베드로는 실증을 얻은 후 계속 용기 있게 나아가며 구하고 모색하고 실행했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겪은 후 베드로는 인성 측면, 자기 인식 측면, 성품 측면, 그리고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사람의 패괴 성품이 야기하는 갖가지 내적 상태에 대해 점차 정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정확히 이해한 후에는 이런 일에서 상응하는 실행의 길을 찾는 데에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갖가지 패괴 성품이 다양한 환경 속에서 야기하는 내적 상태를 하나씩 해결했다. 어떻게 해결했느냐? 하나님이 깨우쳐 준 진리와 원칙에 따라 하나씩 해결한 것이다. 물론, 그 기간에 베드로는 수많은 시련과 연단을 겪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느 정도까지 시련과 연단을 주었겠느냐? 마지막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배우게 한 순종의 공과를 이해했다. 그럼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어느 정도까지 역사하여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겠느냐? 우리는 전에 베드로의 말 한마디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아느냐? (“설령 하나님께서 저를 장난감으로 생각하신다 해도 제가 어찌 기꺼이 달가워하지 않겠습니까?”입니다.) 그렇다. 바로 그 말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사역이나 인도를 체험하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은 사람을 장난감으로 여기시는 것 아닐까?’라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는 일의 출발점은 결코 그런 게 아니다. 사람은 인간의 시선과 머리, 지식으로 이 일을 판단하면서 아무래도 하나님은 사람을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갖고 노는 것 같다고, 오늘은 이렇게 하는 게 맞는다고 했다가 내일은 또 저렇게 하라고 한다며 자기도 모르게 ‘아이고, 하나님은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도대체 뭘 하고 계신 걸까?’라고 생각한다. 또 사람은 아리송해지고 갈팡질팡하며,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베드로에게 시련을 주었다. 시련의 최종 성과는 무엇이었느냐? (베드로는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순종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원한 것은 바로 그 결과였으며, 하나님은 그 결과를 보았다. 그럼 베드로의 어떤 말을 통해 그가 순종했고, 그의 분량이 성장했음을 알 수 있겠느냐?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베드로는 하나님의 모든 행사와 사람을 장난감 취급 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했느냐? 그의 태도는 무엇이었느냐? (그는 “제가 어찌 기꺼이 달가워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 그것이 베드로의 태도였고, 그가 한 말이다.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그 이면의 맥락을 모르며, 체험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체험한 적이 없기에 그 이면의 일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 분명히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함부로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이는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시련과 연단을 체험했고, 하나님이 그에게서 많은 것을 거두어 갔으며, 이와 동시에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준 후에는 또 거두어 가고, 거두어 간 후에는 그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한 다음 다시 주었다.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많은 행사가 변덕스러워 보인다. 하나님은 사람을 장난감으로 여길 뿐 사람을 존중하거나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것 같고, 사람의 삶은 장난감처럼 존엄이 없는 것 같다. 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주지 않고 무슨 말이든 다 해도 되는 것 같다. 너에게 뭔가를 줄 때는 “네 그런 행동은 상을 받아 마땅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라고 하고, 거두어 갈 때는 또 다른 말을 하니 말이다. 그럼 이 과정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라는 것도, 하나님 행사의 성질을 알아내라는 것도 아니고, 나아가 이 과정에서 더 존엄 있게 살라는 것도 아니다. 네게 이런 것을 선택하게 하지는 않으며, 네 역할은 이런 게 아니다. 네 역할은 무엇이겠느냐? 너는 체험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도 못한다면 네 유일한 선택은 순종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순종하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순종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이 바로 네가 배워야 할 공과이다. 만약 순종하기 쉽다면 공과를 배울 필요도,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순종하기가 쉽지 않기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네게 시련을 주는 것이고, 너를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대하는 것이다. 언젠가 네가 쉽게 순종하게 되면, 아무 어려움도, 장애물도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즐겁게 순종하게 되면, 너 자신의 선택이나 의도, 기호를 갖지 않게 되면 하나님은 너를 장난감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며,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네가 “하나님이 저를 장난감으로 여기시면 제 삶에는 존엄이 없어요. 저는 이런 상황에 동의하지 않겠습니다. 순종하지 않겠다고요.”라고 말한다면, 그날은 하나님이 너를 버리는 날이 될 것이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고, 하나님은 늘 제게 감추시지만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옳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저는 기꺼이 순종할 것입니다. 순종할 수 없어도 그런 태도를 지녀야 하고요. 원망을 품거나 저 자신의 선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피조물이고, 제 본분은 순종하는 것이니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되겠죠.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하나님의 행사는 모두 옳습니다. 하나님의 행사에 어떤 관념도, 상상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피조물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니까요. 하나님께서 주시면 감사드리고, 주지 않으시거나 혹은 줬다가 다시 거두어 가실지라도 저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사는 다 제게 도움이 됩니다. 설령 어떤 이로움도 없다고 할지라도 저는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네 분량이 이 정도 수준에 이른다면 “제가 어찌 기꺼이 달가워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베드로의 말이 이룬 성과와 같지 않겠느냐? 이런 분량을 갖추어야 진정으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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