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순종해야 진실한 신심이 생긴다 (제 3 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또 어떤 일들을 하느냐? (깨우치고 인도하십니다. 환경을 마련하고 그런 다음 진리를 사람의 내면에 만들어 주십니다.) 베드로가 당시 예수로부터 들은 질책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폭로와 심판, 정죄였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심을 얻기 전에 사람은 반드시 이런 것을 겪어야 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왜 반드시 겪어야 하느냐? 그런 것이 없으면 안 되느냐? 심판, 폭로, 꾸짖음, 징계, 질책, 심지어 저주까지, 이런 것들을 건너뛸 수는 없느냐? (없습니다.) 굳이 질책하지 않고 좋은 말로 잘 얘기한다고 해 보자. “베드로야, 네가 좋은 마음에서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나도 이해한다. 앞으로는 그런 말을 삼가도록 하거라. 사람의 좋은 뜻으로 내 계획을 가로막지 않도록 해라. 사탄을 대신해 말하지 말고 사탄의 출구가 되어서도 안 된다. 앞으로는 좀 조심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해라. 말하기 전에 그게 옳은 말인지, 그 말이 하나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하나님을 화나게 하지 않을지 잘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 사람은 사탄에게 너무 깊이 패괴되었기 때문이다. 패괴 성품이 너무 깊이 뿌리박혀 패괴 성품대로 사는데, 모든 생각, 행위, 상상, 관념, 인생의 목표와 방향, 말과 행동의 출발점이 모두 패괴 성품에서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이 질책하지 않고 되겠느냐? 질책하지 않으면 사람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죄짓는 병근을 없앨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죄짓는 병근을 없애지 않으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는 잘 알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죄하고 저주하는 것이 사람에게 좋은 일이 아니냐?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사람의 무엇을 드러내느냐? (사람의 연약함, 분량,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믿음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사람을 드러낸다. 네가 고집하는 도리, 늘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 네 신념, 겉면의 열정과 좋은 마음 등은 모두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네가 열정이 아무리 크고, 아무리 열심히 뛰어다닌다고 한들 너에게 진리가 있느냐?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인위적인 좋은 것, 인위적인 상상은 모두 소용없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을 가지려면 반드시 폭로, 심판, 정죄, 저주 등 여러 가지 하나님의 사역 방식을 겪어야 한다. 때로는 징계를 받아야 하고, 약간의 징벌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이 두려운 일이냐? 그건 두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하나님의 고심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다. 그러니 그 고통은 받을 가치가 있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하는 것, 그 방식들로 사람에게 사역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사람에게 기대를 품고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 얻고자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일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무턱대고 하는 것도, 상상대로 하는 것도 아닌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님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나님께 진실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 구원받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베드로는 세 번 주를 부인한 다음 본인의 믿음을 반성했느냐? (반성했습니다.) 정상 인성을 지닌 사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실패와 좌절에 부딪히면 자신을 반성할 줄 안다. 베드로도 분명 이렇게 반성했을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절대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베드로와 같은 일을 겪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비록 주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그건 특별한 상황이었어. 그런 특별한 상황에서 걱정하지 않고 무섭지 않을 사람이 어딨고 연약해지지 않을 사람이 어딨겠어? 괜찮아. 나는 그래도 주님을 무척 사랑해. 내 가슴은 뜨겁기만 하고 영적으로도 강건해. 영원히 주님을 떠나지 않을 거야! 세 번 주님을 부인한 건 그래도 사소한 오점이니까 하나님도 기억하지 않으시겠지. 내 신심은 아직도 여전하다고.” 이렇게 반성하면 어떠냐? 이것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냐? 이렇게 하면 진실한 신심을 얻을 수 있느냐? (없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이렇게 생각했다고 해 보자. ‘주여, 당신은 사람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저를 가지고 이렇게 내기를 하십니까? 제가 당신을 부인할 거라고 예언하실 것이 아니라 세 번 인정한다고 예언하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면 저도 당신을 따르면서 체면이 섰을 겁니다. 또 당신에 대한 제 신심도 돋보이고, 당신 예언도 맞아떨어져서 서로 좋았을 텐데요. 저는 당신을 정말 진심으로 믿고 있어요. 당신께서 저를 온전케 하시고, 체면을 세워 주셔야지요! 저를 질책하셔서는 안 되고, 그런 방식으로 저를 대하셔서도 안 됩니다. 저 베드로는 당당한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하나님을 부인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 하필 저입니까? 왜 다른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까? 이건 너무 불공평합니다! 비록 제가 당신을 부인한 사실을 인정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저를 드러내셔서 남들에게 제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으니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합니까? 나중에도 제게 좋은 종착지가 있을까요? 이건 저를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까? 좀 서운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따지는 것이다. 이러는 게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런 내적 상태는 어떤 것이냐? 여기에는 불복과 원망이 담겨 있다. 하나님이 하는 일이 자신의 관념과 구미에 맞지 않으니 자기 체면과 위신이 떨어지고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람의 선택이 들어 있고, 사람의 원망과 불복, 대항, 패역이 들어 있다. 이런 것들은 다 패괴 성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이런 태도와 내적 상태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해도 하나님이 꾸짖지 않는다면 사람이 드러난 후 진실한 믿음이 생기겠느냐?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신심을 가질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드러냄을 이렇게 원망하고, 거역하고, 대적하고, 거부한다면, 또 하나님이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느냐? 그것이 사람의 생명에 초래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가장 먼저, 손해를 초래한다. ‘손해’가 암시하는 바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보기에 너란 사람은 정말 골칫거리라는 뜻이다. 너는 무슨 일을 만나든 네 선택과 구미를 내세운다. 개인의 뜻과 주관, 개인의 상상, 관념, 결론을 내세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왜 믿는 것이냐? 너에게 하나님이란 신앙의 대상이자 정신적인 지주일 뿐이다. 너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생명 공급도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너에게 어떠한 심판 사역을 해서 많은 고통을 주는 일은 더더욱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좋다. 나는 역사하지 않겠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너는 나를 떠나야 한다. 너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있고, 내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너는 내가 너를 구원하는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고, 나 역시 너를 구원하지 않는 편을 택할 수 있다.” 이것이 서로 상관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자유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그럴 권리가 없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을 택할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사람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다. 너는 포기해도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해도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은 너 자신이다.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버림받고 도태되어 최종에 받는 형벌은 배가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의 결말이다. 그러면 큰일이다! 따라서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하나님 사역에 순종하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사람은 하나님에게 진실한 신심이 생겨나고, 진실한 믿음에 이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생겨나는 것이다.

패괴 성품은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의도 속에 숨어 있고,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 속에 숨어 있고, 각자의 마음과 생각 속에도 숨어 있다. 또한 진리에 대한, 하나님과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생각, 이해, 관념, 관점, 바람, 요구 안에도 숨어 있다. 그것은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이런 것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대하느냐? 바로 여러 가지 상황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너를 드러낸다. 드러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심판도 할 것이다. 네가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생각과 마음을 품을 때, 네가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려는 내적 상태와 관점을 지닐 때, 네게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대적하고, 하나님께 맞서려는 내적 상태가 있을 때, 하나님은 너를 질책하고 심판하고 형벌할 것이다. 심지어 때로는 너를 징계하고 징벌할 것이다. 징계하고 질책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사람이 회개하고 변화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 네가 회개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너를 징계하고 질책해서 이루는 효과는 바로 너를 돌이키게 하고, 이로 인해 너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관념이고, 그릇된 것임을, 또한 사탄에게서 비롯되고 사람 뜻에서 비롯된 네 마음가짐은 진리에도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 마음에도 합하지 않고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없음을, 그것은 하나님이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노하게 만들고, 나아가 하나님이 저주하게 만든다는 것을 말이다. 이 점을 알게 되면 너는 네 속셈과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바꾸겠느냐? 먼저 하나님이 너를 대하는 방식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한 상황과 사람, 일, 사물에 순종해야 한다. 흠을 잡지 말고 객관적인 이유를 대지도 말고, 책임을 미루지도 마라. 다음으로는 하나님이 그렇게 했을 때 사람이 실행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진입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 구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깨달으라는 것은 이것이다. 네가 자신의 패괴 성품과 사탄 본질을 인식한 뒤 하나님이 너에게 마련해 준 상황에 순종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 뜻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너는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항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게 되고, 곧이어 더 이상 하나님께 따지지 않고, 순종하게 된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하나님 말씀에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탄이라 하셨으니 저는 사탄입니다. 제가 무슨 일을 잘못했는지, 하나님께서 왜 저를 사탄이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당신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으니 저는 얼른 뒤로 물러가서 하나님 뜻을 구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네가 저지른 그 일의 성질을 사탄이라고 하면 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것은 어떤 태도냐? 이것이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이 너를 마귀 사탄이라고 하는 것은 마지못해 받아들이지만 너를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순종이겠느냐? 순종이라고 하면 완전히 복종하고 받아들여야 하고, 이유나 조건을 따지지 않는 것이다. 객관적인 원인이 어떻든, 원인 결과를 분석하지 않고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순종에 이를 수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에 가까운 것이다. 하나님이 사역하고, 네가 그것을 많이 체험할수록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진실되게 느끼고, 하나님에 대한 신심도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다 좋고, 거기에 안 좋은 건 없어. 트집 잡지 말고 무조건 순종하자. 순종은 내 책임이자 의무, 본분이야. 피조물인 나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하나님께마저 순종하지 못한다면 나는 뭐가 되는 거지? 바로 짐승이고 마귀야!’ 이것이 진실한 믿음이 생긴 것 아니냐? 네가 이런 수준에 이른다면 불순물이 사라져서 하나님이 쉽게 쓸 수 있고, 너 역시 하나님의 지배에 쉽게 순종할 수 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면 하나님께 축복받을 수 있다. 그러니 순종에는 배울 만한 공과가 많이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하나님 말씀에 그는 아무 소리 않고 자기를 반성했다. 지금 사람들은 그렇게 못 한다. 하나님이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한다면 아마 이럴 것이다. “누가 사탄입니까? 저보고 사탄이라니, 그러시면 안 되죠. 제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라고 하신다면 괜찮죠. 그건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이라고 하신다면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순종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심이 있는 것이냐? 진정한 순종이 있느냐? (없습니다.) 순종과 진실한 신심은 어떤 관계가 있느냐? 사람은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한다면 차츰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신심이 생겨난다. 너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과정에서 진실한 신심을 얻는다. 그런데 너에게 진실한 신심이 없다면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규례도 아니고 논리도 아니다. 진리는 철학이 아니기에 논리성을 가지지 않는다.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고 결코 분리할 수 없다. 네가 만약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신심이 있어야 하고, 신심을 가지려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규례이자, 글귀이자, 이론이다. 이는 큰소리치는 것이다! 생명의 일은 규례가 아니다. 말끝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의 유일한 구주, 유일무이한 참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는데, 너는 하나님께 진실한 신심이 있느냐? 환난이 닥쳤을 때 무엇에 의지해야 굳게 설 수 있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무나 많은 진리를 선포했기 때문에, 혹은 천국에 가기 위해 하나님을 받아들인 이들이 많다. 하지만 막상 쫓기거나 환난이 닥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잃고 물러나거나 집에 숨어서 감히 본분을 이행하지 못한다. 그럴 때는 네가 하던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관하시니 제 생명은 하나님 손안에 있다고 믿습니다.”라는 그 말은 이미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그건 그저 너의 입버릇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너는 그 말을 실행하고 체험할 용기도 없고, 그 말대로 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네가 하나님께 진실한 신심이 있는 것이냐? 하나님 믿는 본질은 단순히 하나님 이름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너는 이 사실을 네 생명으로 바꾸고, 네 생활의 실제 간증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즉, 일이 닥쳤을 때 그 말이 네 행위를 주도하고, 네가 행동하는 방향과 목표를 주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째서 그 말에 따라 살아가야 하느냐? 예를 들어, 네가 다른 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하게 되었다고 하자. 너는 너무 좋았다. 그 나라는 큰 붉은 용이 다스리지 않아서 신앙에 대한 박해도 없고, 하나님을 믿어도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으니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중국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언제든 잡혀갈 위험이 따른다. 그건 마귀 소굴에서 사는 것으로, 너무나 위험하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한다. “몇 년 동안 해외에서 하나님을 믿었으니 네게 생명 체험이 조금 생겼을 것이다. 중국에 형제자매들 생명이 아직 여린 곳이 있는데 네가 가서 그들을 목양하도록 해라.” 너에게 이런 책임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순종하고 받아들이겠습니다.) 겉으로야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속으로는 괴로울 것이다. 너는 밤에 이불 속에서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당신은 제 연약함, 제 보잘것없는 분량을 알고 계십니다. 저는 중국으로 돌아가도 하나님 선민들을 목양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갈 수는 없습니까? 제게 임한 부탁이니 저도 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막상 갔다가 제대로 하지 못해 본분 이행에 합격하지 못하고 당신 뜻을 저버릴까 봐 걱정입니다! 해외에 2년만 더 있을 수는 없습니까?’ 이런 선택은 어떠냐? 완전히 거부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동의한 것도 아니다. 부탁을 완곡하게 거절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냐? 이는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다. 네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은 반발 정서가 생겼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모르겠느냐? (아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한다. “가지 마라. 너를 난처하게 하지 않겠다. 단지 너에게 시련을 준 것이었다.” 그러면 너는 드러난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진실한 신심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이 연약함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패역이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다. 이 시련을 통해 네가 하나님께 진실한 신심, 진정한 순종이 없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함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검증되었다. 너는 말한다. “제가 무서우면 안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생명이 위협받는다면 저도 거절할 수 있고, 그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도 제 길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게 무슨 신심이란 말이냐? 진실한 신심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구호를 크게 외쳐본들 이럴 때 소용이 있겠느냐?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맹세한들 소용이 있겠느냐? 다른 사람이 너에게 진리를 교제하고 설득한들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설령 설득해서 네가 억지로 간다고 한들 그것이 진정한 순종이냐? 하나님은 너의 그런 순종은 원치 않는다. 네가 기꺼이 원하지 않는 한, 가더라도 아무 소용없고, 하나님도 역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는 이 일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네가 흔쾌히 원해야지, 가기가 싫어서 제3의 길을 생각하고, 또 도망치거나 거부하고 거절하고 싶은 생각만 든다면 안 가도 된다. 언제든 네 분량이 충분해지고 신심이 생기면 그때는 네가 자발적으로 신청하며 이렇게 말하면 될 일이다. “제가 가겠습니다. 아무도 안 가도 저는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두렵지 않습니다. 목숨 걸고 가겠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 아닙니까? 사탄이 뭐가 무섭습니까? 하나님 손안에서는 장난감일 뿐입니다. 저는 무섭지 않습니다! 잡혀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 은총, 하나님 긍휼 덕분이지만, 상황이 발생해서 잡혀가더라도 그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입니다. 제가 감옥에서 죽더라도 하나님을 증거하겠습니다! 목숨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평생 깨닫고 체험한 것, 인식한 것을 아직 잘 모르고 깨닫지 못한 형제자매들에게 전부 교제해 주겠습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들도 저처럼 이런 신심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고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겠습니다. 물론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려면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도 바쳐야 할 수도 있겠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저 자신을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저한테는 하나님이 계시고 제 목숨은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겠습니다.” 돌아가면 어려운 상황에서 고생할지도 모른다. 빨리 늙어서 흰 머리와 주름이 생기고 병을 얻을지도 모른다. 잡혀가서 박해받을지도 모르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위험을 만날지도 모른다. 이런 문제는 어떻게 마주해야 하느냐? 이것도 진실한 신심과 관계가 있다. 한순간의 열정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는데, 돌아간 다음 이런 고통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모든 것을 내걸고, 하나님의 주재를 믿어야 한다. 외모가 좀 늙어 보이거나 병을 얻는 것은 모두 사소한 일이다. 네가 하나님께 죄짓고 하나님의 부탁을 거부한다면 평생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일생에서 하나님의 부탁을 거절해 하나님께 죄짓는다면, 그것은 영원한 오점이다! 그 기회를 잃는다면 네가 여러 해의 청춘을 바쳐도 되돌릴 수 없다. 건강한 몸이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예쁘장한 얼굴, 좋은 몸매가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 80세가 되어도 생각이 여전히 또렷하다고 한들, 하나님 말씀 한 마디도 무슨 말인지 모른다면 가련하지 않으냐? 이것이 가장 가련한 일이다! 그러니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얻어야 할 가장 중요하고도 소중한 것은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다. 어떤 일을 만나도 우선은 순종해야 한다. 설령 지금은 하나님께 약간의 오해가 있거나 혹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더라도 소극적이고 연약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베드로는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이 설령 사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해도 사람이 무슨 원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만한 신심조차 없다면 네가 베드로처럼 순종할 수 있겠느냐?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일은 모두 이치에 맞는 일이고, 사람의 분량, 사람의 상상, 사람의 관념에 맞는 일이다. 하나님이 네 분량의 크기에 맞게 사역하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베드로와 같은 순종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그건 더욱 불가능하다. 그러니 너는 이 방향과 목표를 향해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에 이를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느냐? 그건 단언하기 어렵다. 하나님께 진실한 신심이 있어야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은 틀림없다. 네가 하나님께 진정한 순종이 없다면 하나님이 너를 깨우치고 인도하고 온전케 하는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할 기회들을 네가 밀어냈다. 네가 원하지 않았고, 네가 계속 숨으면서 거부하고 도망쳤다. 너는 늘 육적으로 편안하고 고생스럽지 않은 상황만 택하려 한다. 이러면 큰일이다! 너는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이끄심, 하나님의 보호를 체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진리를 얻을 수 없고, 진실한 신심도 얻지 못한다. 너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진리를 얻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얻어 생명이 되게 하지 못하는데, 그런 네가 하나님께 얻어지겠느냐? 결단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얻고, 온전케 되려는 것은 주로 무엇을 얻기 위함이냐? 진리를 얻고 하나님 말씀을 얻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 말씀이 네 실제가 되고, 네 생명의 근원이 되고, 네가 행동하는 원칙과 근거, 준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때 네가 살아 내는 것은 무엇이냐? 여전히 패괴 성품이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말을 하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느냐? 하나님은 욥을 어떻게 정의했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이럴 때 딱 맞는 말이다. 너희에게는 욥의 이런 칭호와 정의를 얻는 일이 쉬운 일이냐?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다. 그러려면 언제나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하고, 하나님 뜻을 구해 그 뜻에 따라 행해야 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겠노라고 말로만 떠들고, 막상 상황이나 사람, 일, 사물을 만나면 왜 자신한테 그런 일이 닥쳤는지 분석하고, 원망하고, 오해하고, 또 하나님 뜻을 곡해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원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너를 원하지 않는다. 그때는 서로 남남이다. 그렇게 되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피조물이 되지 않겠다면,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너의 주재자, 너의 하나님이 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정의를 내리겠느냐?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너희는 이런 말을 듣고 싶으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듣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께 정죄되고, 도태되고, 징벌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큰일이다! 일단 하나님께 정죄되고 도태되면, 이것은 단순히 어떤 지도자나 집권자에게 정죄되는 것과 다르다. 상대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고 공급했는데, 그런 하나님이 너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네가 살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 결말이 끝장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고, 조짐이 좋지 않다. 만약 내가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완전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좋은 징조다. 그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이다. 하나님이 욥을 평가한 이 말을 너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그가 먹은 음식, 그의 옷차림, 그의 걸음걸이와 기질 등을 흉내 내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너는 얼른 묵상하고 구해야 한다. ‘욥은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살아 냈기에 하나님께 인정받았을까? 하나님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당신 눈에 완전한 자라고 하셨는데, 이건 대단한 일이야.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으니까. 우린 욥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구하고, 스스로도 그런 경지에 오르도록 노력해야 해. 하나님께 인정받고 나도 그런 칭호를 얻을 수 있도록 말이야. 하나님 눈에 완전한 사람이 될 거야.’ 이러면 하나님 뜻에 합하는 것이다.

2016년 12월 30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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