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 갖춰야 할 태도 (제 3 부)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진정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이 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평가나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율법시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하나 주겠다고 하자 당시 아브라함이 뭐라고 했느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말씀한 것을 믿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태도였다. 그가 하나님을 판단했느냐? 비웃었느냐? 뒤에서 어떤 일을 꾸몄느냐? 그러지 않았다. 그 어떤 얄팍한 수도 쓰지 않았다. 이런 것이 바로 순종이며,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본분을 지키는 것이다. 그의 아내 사라는 어떠했느냐? 아브라함과 다르지 않았느냐? 사라가 하나님을 대했던 태도는 어떠했느냐? 의심하고 비웃었으며, 불신하고 평가했다. 그리고 자신의 여종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보내는 얄팍한 수를 써서 결국 그렇게 많은 황당한 일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라는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문을 가졌고 하나님의 전능함을 믿지 못했다. 사라는 왜 믿지 못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과 배경이 있다. 우선은 아브라함이 너무 나이가 많은 데다 자신도 이미 나이가 들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건 불가능한 일인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루실 수가 있겠어? 너무 황당하잖아? 이건 어린아이를 속이며 장난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도 않았으며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옳은 태도냐? (아닙니다.) 이것이 창조주를 대하는 마땅한 태도냐? (아닙니다.) 그럼 사라는 자신의 위치를 지켰느냐?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지키지 못했다.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장난으로 여기고 진리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이루려는 일 또한 믿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황당한 일들을 벌였고, 그럼으로써 일련의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이는 모두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녀의 뜻은 ‘이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루시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이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내가 뭘 좀 해야겠다.’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오해와 평가, 추측, 의심이 들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보면, 바로 패괴 성품을 지닌 자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아브라함은 그런 일들을 했느냐?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축복을 내린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태도, 경외심과 충성심, 그리고 진정한 순종을 보고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을 하나 주어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하려 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며, 사라에 대한 특별 혜택인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은 매우 중요하다. 순종에 의심이 들어 있느냐? (없습니다.) 의심이 들어 있다면 과연 진실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분석과 평가가 들어 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꼬투리를 잡기 위한 것이라면? 더더욱 진실한 순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실한 순종임을 완벽하게 보여 줄 수 있는 태도와 행위, 표출은 무엇이냐? (믿는 것입니다.) 진실로 믿는 것, 이것이 한 가지이다. 하나님이 한 말씀과 일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은 옳고, 진리이므로 의심할 필요도, 남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고, 혼자 속으로 계산하거나 분석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순종의 한 측면 내용으로,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옳다고 믿는 것이다. 사람이 한 일이라면 누가 한 일인지 살펴볼 수 있다. 그 사람의 배경이 어떤지, 어떤 나쁜 짓을 한 적은 없는지, 인품은 어떤지 분석해 봐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님이 한 일이라면 얼른 입을 가리고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며, 의심하거나 의문을 갖지 말고 전부 받아들여야 한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여기에 관계된 일부 진리를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며, 또 하나님이 한 일임을 믿고 순종할 수도 있지만 진리를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본인이 깨달은 것이 이론적 성질을 띠고 있어서 마음이 편치 않다면, 그럴 때는 마땅히 구해야 한다. ‘이 안에 어떤 진리가 있을까? 내 생각이 어디가 잘못된 걸까? 하나님과의 거리는 왜 생긴 걸까? 내 어떤 관점이 하나님 말씀과 충돌할까?’ 그다음에는 그런 것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이자 순종을 실행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는 순종한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일이 닥치면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누가 알겠어? 피조물인 나는 간섭하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지!’ 이것이 순종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어떤 태도이냐? 책임을 다하지 않으려는 것이며, 하나님이 하는 일에 무관심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순종할 수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말씀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반드시 응한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이 두 가지 ‘반드시’는 그에게 백 퍼센트의 확실함이다. 그래서 그는 의심하지 않고,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았으며, 그 어떤 얄팍한 수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순종의 태도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은 축복이었다. 그는 아무런 의심도 없었고, 사람의 뜻이 섞인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욥에게 닥친 일은 아브라함과는 전혀 달랐다. 무엇이 달랐을까? 아브라함에게 닥친 일은 복이었고 좋은 일이었다. 그는 백 살이 다 되도록 아들이 없어 아들을 바라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그가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는 틀림없이 순종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욥에게는 화가 닥쳤는데 그가 어째서 순종할 수 있었겠느냐? (그는 속으로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큰 고통을 받지 않을 때는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이 복을 내릴 때도 순종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거두어 갈 때는 순종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욥이 어떤 관점과 어떤 이성을 갖고 있고, 어떤 진리를 깨닫고, 또 하나님에게 어떤 측면의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그 화를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었겠느냐? (그는 하나님이 하신 것은 모두 좋은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이 고생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시는 것도 하나님의 권병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성이 있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모든 것은 좋은 일이라고 믿으면 사람은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은 쉽다. 그런데 하나님이 한 모든 것이 사람에게 화인 것을 알고도 순종하는 것이 쉬우냐? 어떤 것이 더 진실한 순종이겠느냐?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사람에게 모두 화인 것을 알고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욥이 어떤 이성과 진리를 갖췄기에 그런 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냐? (욥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습니다. 그는 사람에게 축복과 은혜를 내려 주셔야만 하나님이신 것이 아니라 거두어 가셔도 역시 하나님이시고, 화와 재난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이시고, 사람이 항상 경배해야 하는 분이시라고 이해했습니다.) 주된 것은 욥이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가 올바른 위치에 섰다는 사실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이 외부의 사람과 일, 사물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지 않고, 하나님의 본질은 영원히 하나님의 본질이고 변하지 않는다고 인식했다.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면 하나님이고, 화를 내려 사람에게 고통과 징벌을 주거나 사람을 멸하면 하나님의 본질이 변한 것이고 하나님이 아닌 것이 아님을, 하나님의 본질은 영원히 변치 않음을 인식한 것이다. 사람의 본질도 변하지 않는다. 즉, 사람이 피조물이라는 이 위치와 본질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해도 너는 여전히 피조물이며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욥에게 그토록 큰 시련을 주었지만, 욥은 불평하지 않고 순종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 약간의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말고, 그가 하나님께 불평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도록 그를 지배한 가장 큰 힘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은 영원히 사람이므로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든 옳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대하든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 말이 아주 적절하지 않으냐? 하나님에게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어떤 축복을 주어야 한다고, 또는 네게 어떤 시련을 주어야 한다고, 네게 하는 사역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고 하나님께 요구하지 마라. 이런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 것은 이성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평안하고 무탈할 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좋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닥치면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것은 진리로 해결해야 한다. 이 진리는 무엇이냐? 자신의 위치에 제대로 서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대하든 모두 마땅한 것이며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은 하나님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요구가 있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지 말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어떤 이유와 목적, 어떤 의미에서 하든 평가하지 마라. 이런 것은 네가 평가할 바가 아니다. 너의 책임과 본분은 오로지 피조물의 위치에 제대로 서서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옳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지만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은 이 진리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네가 진리를 깨달아야만 일이 닥쳤을 때 진실로 순종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설교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욥이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야. 소와 양이 얼마나 되든, 재산이 얼마나 되든, 부가 얼마나 되든, 자식이 얼마나 되든 모두 하나님이 내려 주신 것이고 사람 마음대로 될 수 없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노예와 같아서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시든 사람은 언제나 인내해야 해.’ 그는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로 하나님을 인식했다. 이런 인식이 옳은 것이냐? 결코 옳지 않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인식해야 옳은 것이겠느냐? (사람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에 맡겨야 합니다.) 그렇다. 너는 하나님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고 요구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에게 하나하나 일일이 교제해 달라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분명하게 교제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과 겨루고, 그러면서 자신에게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너무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양심과 이성이 너무 없는 것이다. 이것은 피조물이 해야 할 말이 아니다. 사탄도 하나님을 대할 때 감히 이렇게 신경질적으로 말하지 못한다. 너는 패괴된 사람인데 어찌 사탄보다 더 교만할 수가 있느냐? 사람이 하나님과 얘기할 때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느냐? 사람이 이 일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겠느냐? 사실 욥이 말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말은 이미 그가 어째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안에 구할 진리가 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 말에 불평이 담겨 있느냐? 원망이 담겨 있느냐?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 말 속에 애매한 뜻이 있느냐? 부정적인 뜻이 있느냐? (없습니다.) 분명히 없다. 욥은 마지막까지 체험한 후에 창조주가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사람이 선택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 말이 조금 서운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사람 일생의 운명은 하나님이 이미 다 안배해 놓았다. 네가 받아들이든 말든 그것은 사실이다. 너는 네 운명을 바꿀 수 없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므로 너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그가 어떻게 하든 모두 옳다. 그는 진리이자 만물의 주재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 이 만물에는 너도 포함되고, 모든 피조물도 다 포함된다. 그러니 네가 항상 반항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겠느냐? (사람 자신의 잘못입니다.)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네가 항상 이유를 찾고 트집을 잡고 싶어 한다면 그것이 옳은 것이냐? 네가 항상 하나님에게 복을 받고 혜택을 얻고 싶어 한다면 그것이 옳은 것이냐? 그것은 모두 옳지 않다. 이런 관점들은 하나님을 잘못 인식하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관점이 옳지 않기 때문에 무슨 일이 닥치든 너는 하나님에게 반발하고 하나님과 겨루고 대항할 것이 뻔하다. 그러면서 너는 항상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옳지 않아. 이렇게 하시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게 하시면 다들 항의할 거야. 그렇게 하시면 하나님답지 않으셔!’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다운가 아닌가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그는 언제나 하나님이다. 만약 네게 이런 이성과 인식이 없고 매일 직면하는 일에 대해 항상 연구하고 넘겨짚어 판단하면 결국 너는 사사건건 하나님과 겨루고 하나님에게 대항하게 될 것이고, 이런 내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약 이런 인식을 가지고 피조물의 위치에 제대로 서서 일이 닥쳤을 때 이런 측면의 진리와 대조하고 그 진리를 실행하고 진입한다면, 네 내면에서 차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나서 너도 모르는 사이에 ‘알고 보니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옳은 일이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좋은 일이야. 사람은 연구하고 분석할 필요가 없어. 자신을 하나님의 지배에 맡겨야 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을 때는 속으로 가책을 느끼며 ‘나는 제대로 된 피조물이 되지 못했어. 어째서 순종하지 못할까? 이건 창조주를 상심하게 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할 것이다. 네가 제대로 된 피조물이 되려고 할수록 이 측면의 진리를 더 잘 깨닫고 명백히 알게 될 것이다. 너 스스로를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할수록, 하나님이 너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된다고, 너에게 그런 식으로 말해서도 안 되고 그런 식으로 너를 책망하고 훈계하거나 지배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너는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네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많고,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많을수록 너는 왜곡된 길로 나아갈 것이며 관념, 판단, 모독 같은 것들이 밖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면 그만큼 악행과 가까워진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곧장 분석하고 연구하기 시작하고, 차츰 의구심이 생기고 비웃으며, 그다음에는 판단하고 부인하고 정죄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결과다. 하나님을 이렇게 대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이것은 모두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생각한다. ‘내가 사람이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건 맞아.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아껴 주셔야 해.’ 이런 관점이 옳은 것이냐?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는 하나님이 결정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피조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는 모두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에게는 그의 원칙이 있고 그의 성품이 있다. 사람이 요구해도 소용이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할 이성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너무 무례하게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시는 건 사람을 사랑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으시는 겁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으시는 겁니다!”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다. 그를 어떻게 대해도 상관없다. 그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며 존중받을 자격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대적하는 일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위해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저를 이토록 책망하고 훈계하시는 걸까요? 왜 저를 소외하시는 걸까요? 왜 저를 거들떠보시지도, 높여 주시지도 않는 걸까요?”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저는 순박하고 착실한 사람입니다. 모태 신앙에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순수한데요! 가정도, 직장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서 그동안 하나님이 저를 정말 사랑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보니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외된 기분이 듭니다. 하나님께 정말 실망했습니다.” 이러면 큰일이 아니냐? 이런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은 무엇이냐?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했고,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다. 늘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해 하나님이 마땅히 자신을 존중하고, 높여 주고 혹은 사랑하고, 소중히 대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항상 이런 착각과 그릇되고 무리한 요구가 있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최소한 하나님의 혐오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일이고, 회개하지 않으면 도태될 위험이 있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고 대해야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할 수 있고, 이런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이런 요구를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리더로 배정을 받고 무척 의욕에 불탔다. 한동안 사역한 결과, 그가 외부의 사무적인 일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리 교제도 할 줄 몰라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그의 교회 리더 직무가 교체되었다. 이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냐? 그런데 그는 이치를 따지고 원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들은 본연의 사역도 제대로 못 하고 방해와 교란만 일삼았으니까 교체되고 도태된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저는 나쁜 짓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교체된 것입니까?” 그는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느냐? 그는 자신이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 리더가 되어야 마땅하고 교체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집에서 자기에게 너무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이 원망과 반발심으로 가득 차고 하나님에게 관념이 생겨 그는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리더를 뽑거나 도태시키는 일에는 다 원칙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 일에는 원칙이 없는 것 같아. 이번 일은 하나님께서 잘못하신 거야!’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한 일이 자신의 이익에 손해를 입히거나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그는 꼬투리를 잡는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너는 자신의 신분을 알아야 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너에게 어떤 은사나 특기가 있든, 얼마나 대단한 재간이나 능력이 있든, 심지어 하나님 집에서 얼마나 대단한 공로가 있고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거나 어떤 밑천이 있든 하나님이 보기에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네가 그런 것들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면, 너와 하나님 사이에는 또 오해와 갈등이 생긴 것 아니겠느냐?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너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를 줄이고 하나님과의 갈등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너 자신이 옳다고 믿고 고수해 오던 것들을 부인해야 한다. 그러면 너와 하나님 사이의 거리는 없어지고, 너는 자신의 위치에 제대로 서게 된다. 그리고 너는 순종하게 되고, 하나님이 하는 일은 모두 옳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또한 너 자신을 부인하고 내려놓는 한편, 자신의 공로를 밑천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 조건을 따지지도, 요구하지도, 상을 바라지도 않게 된다. 그때는 너에게 더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모든 오해는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사람이 자기의 분수를 모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 눈에는 어떤 존재인지 모른 채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고, 하나님 눈에 비치는 자신의 지위를 과대평가한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와 밑천을 진리로 여기고, 하나님께 구원받는 기준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마음에서 너의 위치, 하나님이 너를 대하는 태도는 모두 적절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는 이 원칙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너는 진리를 깨달을 것이고, 너의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에 부합할 것이다. 너는 이런 이성을 갖춰야 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든 네가 순종할 수 있다면 너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 갈등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으로 너를 대해도 순종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래도 하나님과 겨루고 하나님에게 대항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설령 마음이 조금 편치 않더라도, 혹은 여의치 않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네가 이미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를 어느 정도 갖춘 상태이기 때문에 너는 자신의 자리에 제대로 설 수 있고, 하나님께 대항하지도 않을 것이다. 즉, 너를 멸망으로 이끄는 행동이나 방법들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때면 너는 안전하지 않겠느냐? 네가 안전해지면 마음이 편해지고, 그러면 베드로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그렇게 오랫동안 모색하고, 또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다. 결국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비로소 마음속으로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를 갖추게 되었다. 지금 너희는 어떠하냐?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하고 무슨 일이든 분명하게 말한 것은 다 떠먹여 준 것이나 다름없다. 길을 조금도 돌아서 가지 않고도 이렇게 많은 것을 얻었으니 크게 이득을 본 것인데 어째서 아직도 만족을 모르느냐? 지나친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는 주로 무엇에 대해 교제했느냐? 한편으로는 평소 자신의 각 측면의 내적 상태를 중점적으로 성찰한 뒤 분석하여 그것의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갖가지 오해를 해결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생길 때는 내면의 강퍅함과 고집스러운 면이 진리를 구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사라지면 너는 진리를 구할 수 있다. 오해가 사라지지 않으면 마음속에는 장벽이 생겨서 기도를 해도 형식에만 그친다.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아예 듣지도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생기고, 거리와 장벽이 생기면 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닫혀 버린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도 듣기 싫어지고, 진리도 구하기 싫어지게 되는데, 네가 어떻게 하든 그것은 과정을 거치고, 위장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풀려서 이 고비를 넘기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요구 하나하나를 참답게 대할 수 있게 되고, 진실로 정직한 마음을 지니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된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갈등, 거리, 오해가 생긴다면, 사람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냐? 사탄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초래되는 결과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 사람의 성품 변화는 거기서 멈추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여러 가지 내적 상태를 성찰할 때는 한편으로 자신을 인식하고,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에 대해 어떤 오해가 있는지를 성찰하는 데 신경 써야 한다. 오해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느냐? 주로 관념, 상상, 규정, 의혹, 연구, 추측 등이 포함된다. 사람 내면에 이런 것들이 있으면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이다. 네가 이런 내적 상태에 빠져 있을 때는 너와 하나님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것이므로 얼른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생겼으니 본분을 이행할 수가 없다고, 먼저 하나님을 오해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되겠느냐? 안 된다. 본분에 지장을 주지 말고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본분을 이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너의 오해가 부지불식간에 호전되기 시작할 것인데, 너는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언젠가 “사람은 피조물이고, 창조주는 영원히 나의 주님이시며, 그 본질은 변함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위치도, 하나님의 지위도 변함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모든 인류의 눈에 틀린 것처럼 보여도 저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진리이며, 영원히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본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을 연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지배와 모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일은 모두 옳으며, 사람은 하나님께 여러 가지 요구를 해서는 안 됩니다. 피조물은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장난감으로 대하시더라도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저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닙니다.”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다면, 이 부분의 진리에 대한 체험과 인식이 있다면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에 진입할 것이며, 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본분을 이행하든, 각 부분의 진리를 실행하든 많은 어려움이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가장 크고 깊은 진리다. 많은 경우 사람이 여러 가지 어려움과 걸림돌에 부닥치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일에 직면했을 때 그것은 무엇으로 초래된 것이냐? (사람이 위치를 잘못 섰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위치를 잘못 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고, 하나님을 연구하려고 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려고 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정확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부인하려고 한다. 그 숨은 뜻은 바로 사람이 피조물이 되기 싫고,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서고 하나님께 트집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곤란해진다. 네가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피조물의 위치를 지킨다면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항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해나 관념이 생길 수는 있지만 최소한 너의 태도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이길 원하는 것이고 너의 출발점은 하나님께 순종하길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욥은 믿음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시련이 그에게 닥쳤을 때 처음에는 그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았느냐? (몰랐습니다.) 사람은 영계를 직접 꿰뚫어 보는 능력이 없다. 욥은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련이 그에게 닥쳤을 때 그는 분명히 어리둥절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어이쿠, 이게 무슨 일이지? 모든 게 평안했는데 어쩌다 갑자기 이런 일이 닥쳤을까? 이 가축들과 전 재산이 어쩌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걸까?’ 처음에 그는 어리둥절했다. 어리둥절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오해가 생겼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한 그런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럽고, 아무 예상도 하지 못하고 아무도 그에게 미리 알려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가 전혀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가 잘못된 선택을 내리거나 잘못된 길로 나아가거나 또는 순종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욥은 어떻게 했느냐? 그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자신의 행동을 진지하게 반성했을 것이다.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며칠 동안 구한 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의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가 걸은 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시련이 막 닥쳤을 때는 욥이 비록 어리둥절했지만, 그는 이것이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일임을 알았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것을 아무도 건드릴 수 없고, 설령 사탄이라고 해도 건드릴 수 없다. 겉으로 보면 욥은 하나님이 한 일을 조금 오해한 것 같다. 그는 그 일이 어째서 자신에게 닥쳤는지, 하나님이 한 일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가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해 부인하거나 의구심을 품는 오해가 아니었다. 그의 그런 오해는 하나님 편에서는 허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바로 뒤이어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가려 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한 일이 모두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서둘러 무릎을 꿇고 받아들였다. 일반인들이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욥이 당시에 얼마나 어리둥절했든,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나서야 그에게 닥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든 그의 태도는 항상 피조물의 위치에 서 있었다. 그 일이 닥쳤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 일대에서 제일가는 부자이고 하인도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이것들을 남이 함부로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어서 하인을 시켜 다시 빼앗아 와야 해.” 그가 이렇게 했느냐?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것이 하나님이 한 일이므로 사람이 나서서는 안 된다고, 사람이 나서는 것은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항하고 자신에게 닥친 그 모든 것에 맞서는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고, 이 일을 평가하고 판단하지 않았으며, 손을 뻗어 이 모든 것을 되돌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기다리며 상황의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려는지 살펴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욥이 한 행동은 그의 본래 위치를 지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피조물의 본래 위치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태도였다. 이 일이 닥쳤을 때 욥은 비록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그는 구할 수 있었고, 창조주가 행한 모든 일이 옳다고 인정하고 그런 다음 순종할 수 있었다. 그는 사람의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강도가 와서 빼앗으려 했을 때 그는 강도가 마음대로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혈기로 강도와 다투지 않은 것이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게 아니라면 그들이 빼앗아 갈 수 없을 거야. 지금 그들이 빼앗아 갔다는 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야. 사람이 손을 뻗어 봤자 소용없어. 사람은 혈기에 의지해서도, 손을 뻗어서도 안 돼.’ 손을 뻗지 않은 것은 강도들에게 참고 양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약함의 표현이 아니고 강도를 두려워한 것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빼앗아 가려면 빼앗아 가거라. 이것들은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피조물이 해야 하는 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불평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다투거나 빼앗거나 지키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진실한 모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진실로 인식했기 때문에 이렇게 했던 것이다. 만약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는 사람의 방법으로 다투고 빼앗았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보았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한 일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며, 몇 년 동안 하나님을 헛되게 믿은 것이다. 하나님이 베풀어 줄 때는 기뻐하고, 하나님이 빼앗으려고 하면 노여워하고 원치 않고 억지로 빼앗으려 하며,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그것들을 잃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기만을 바라고 빼앗아 가지는 못하게 하며, 하나님이 손으로 배치한 것에 순종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행동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이것은 패역이고 반항이다. 사람이 항상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은 욥이 했던 것과 정반대다. 욥은 피조물의 본래 위치에 서서 여호와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시련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시련을 받아들이고 또 하나님이 준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행동했느냐? 그가 울고불고 소란을 피웠느냐? 그가 원망을 했느냐? 그가 사람의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이 모든 것을 되돌리려고 했느냐? 그러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마음대로 빼앗아 가게 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는 진실한 믿음과 인식이 있고 진실한 순종이 있었다. 어느 하나도 간단하지 않은데, 모두 일정 기간 체험하고 구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가 창조주를 어느 정도 알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욥이 뭐라고 했느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라고 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뭐라고 했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라고 했다. 이 말인즉슨, ‘당신은 믿지 마라. 당신이 믿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이라면 어째서 당신이 화를 입었겠는가? 이것은 보응을 받은 것이 아닌가? 당신이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닥쳤단 말인가? 당신이 잘못 믿은 것이 아닌가?’라는 뜻이다. 욥이 아내에게 뭐라고 했느냐? 그는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욥 2:10)라고 했다. 욥은 그의 아내가 어리석고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과 인식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한 것이라고 했다.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그렇게 큰 일이 닥쳤을 때 한눈에도 하나님이 한 일임을 알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욥에게 이렇게 권하기까지 했다. “당신은 길을 잘못 들었다. 믿지 말고 하나님을 버려라.” 이 얼마나 화나게 하는 말이냐! 그녀는 어째서 욥에게 하나님을 버리라고 권한 것이냐? 그녀의 재산이 사라지고 더는 누리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자가 가난뱅이가 되고 무일푼이 된 것이다. 그녀는 하나님이 그녀의 것을 빼앗은 것에 불만을 품었기에 욥에게 믿지 말라고 한 것이다. ‘나는 믿지 않을 것이다. 당신도 믿지 마라. 멀쩡한 집을 다 빼앗겨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빈털터리가 되고 부자가 가난뱅이가 됐다. 이러면 하나님을 믿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믿지 마라!’라는 뜻이다. 이것이 어리석은 말이 아니냐? 그녀는 이렇게 행동했다. 욥이 그녀의 말을 들었느냐? 욥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녀에게 현혹되거나 교란당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관점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왜 그랬겠느냐?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라는 한 마디를 굳게 지켰기 때문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정상적이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모두 옳아. 사람은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해.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복을 받으려고만 해서는 안 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을 그토록 오랫동안 누리고도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이제는 하나님을 증거해야 할 때야. 하나님께서 빼앗으신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그분이 원하시면 언제든 빼앗으실 수 있는 거야. 사람은 요구를 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느냐? 이것이 당연한 일이냐? 사람이 이 일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믿음이 생길 것이다.
창조주는 어떻게 해도 옳으며, 다 진리이며, 어떻게 하든지 창조주의 신분과 지위는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마땅히 그를 경배해야 한다. 그가 인류의 영원한 주이고, 영원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혹은 하나님이 빼앗아 가면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람의 잘못된 관점이지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이 사실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마음속으로 이것이 진리임을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점점 정상적이 된다. 네가 그저 말로만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인정할 뿐 사실로 닥쳤을 때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할 수 있으며 진실로 순종할 수도 없다면 말로만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속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일이 닥치든 하나님이 하는 것이 옳고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도리를 아는 데만 집중한다. 영적인 이론은 인정하지만 일이 닥치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종하지도 못한다. 이런 사람은 외식하는 사람이다. 평소에 입으로 말하는 것은 모두 옳지만 자신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 닥치면 너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며 하나님이 이렇게 하면 안 된다거나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여긴다. 네가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 수 없고, 진리를 구해 자신의 패역을 반성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너는 늘 이치를 따지기 좋아하는데, 너의 이치가 진리보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공개 석상에 내놓을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이 너의 편을 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이들이 너를 지지한다고 해도 모두 패괴된 인간이다. 지지하는 이도, 지지받는 이도 모두 패괴된 인간이 아니냐? 모두 진리가 없는 것이 아니냐? 설령 모든 인간이 너를 찬성하고 하나님께 대항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틀릴 리가 없다. 틀린 것은 역시 인간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종의 주장이냐? 아니다. 이것은 사실의 진상이고 진리다. 사람은 이 방면의 진리를 늘 묵상하고, 또한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은 세 단계에 걸친 사역을 하였는데, 어느 단계 사역이든 당시에는 많은 이의 반대에 부닥쳤었다. 예를 들어, 예수가 구속 사역을 할 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그를 반대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체 인류 가운데 수억 명의 사람이 예수가 구세주임을 인정하고, 세계 각지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퍼져 있다. 예수가 이미 인류 전체를 구속하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 예수의 구속을 부정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뭐라고 이러쿵저러쿵 말하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영원히 옳고 정확한 것이다. 전 인류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하나님을 반대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옳다. 한 치의 잘못도 없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는 진리가 없고 하나님이 사역을 하는 의의와 본질을 조금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패괴된 인류가 하는 말은 모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전 인류가 가진 모든 이론을 귀납한다 해도 역시 진리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진리 한 구절도 당해 낼 수 없다. 이것은 사실이다. 사람이 이 점을 모르면 천천히 체험해야 한다. 체험의 전제가 무엇이겠느냐? 너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고, 그런 다음 실행하고 체험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너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조금도 오차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하고 진리 추구를 중요하게 여길 것이며 진리를 마음에 받아들여 네 생명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9월 10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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