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 갖춰야 할 태도 (제 2 부)
각 종류의 일이 닥칠 때, 사람은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서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럼 인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겠느냐? 한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구원받을 수 있을지를 어떻게 판단해야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사람의 내면에는 모두 관념과 패역이 있고 패괴 성품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이익과 하나님의 요구가 상충되어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일들을 자주 겪으며,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이 밖에, 사람은 또 누구나 하나님께 오해와 관념을 품거나 원망하고 반발하고 거역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다름에 따라 대하는 방식도 다르게 마련이다. 어떤 사람은 관념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혼자 진리를 구해 해결한다. 왜 말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다. 그런 말을 했다가 부정적인 영향이 생길 것이 두려워 남에게 영향을 주지 않고 그저 혼자 속으로 해결하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이 이와 유사한 내적 상태가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그들을 도와준다. 이는 마음씨가 선량한 것이다. 마음씨가 선량한 사람은 남을 사랑으로 대하며, 남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한다. 그가 일을 하고 남을 돕는 데는 늘 원칙이 있다. 그가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이유는 도움이 되기 위해서이다.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일 처리에 원칙과 지혜가 있다. 이는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는 한 가지 기준이다. 그는 소극적인 것이 사람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말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기에 혼자 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는 어떤 관념이 생기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해결하며, 나중에는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된다. 이러면 관념은 점점 줄어든다. 하지만 어떤 이는 이성적이지 못하다. 그런 사람은 관념을 갖고 늘 이 사람 저 사람과 교제하기를 좋아하지만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며, 남들까지 관념이 생기게 한다. 이것이 다른 이를 해하는 것 아니겠느냐? 또 어떤 이는 관념이 있어도 자신이 이야깃거리가 될까 봐 두려워 형제자매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들한테는 마음대로, 서슴없이 말한다. 그는 가족 중에 믿지 않는 사람을 형제자매로 여긴다. 그 행동으로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의 이런 행동이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예를 들어, 친척 중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그리고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가 자신의 관념을 가족들에게 퍼뜨리면 결과적으로 가족들을 구렁텅이에 빠지게 할 것이며, 모두가 하나님께 관념과 오해를 갖게 될 것이다. 관념과 오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역병과 같아 한 번 퍼뜨리면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해를 입게 된다. 특히 어리석은 자가 들으면 더 어리석어진다. 오직 진리를 깨닫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만이 그런 관념, 소극성, 오해에 속하는 부정적인 것들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은 그런 분량이 전혀 없다. 어떤 사람은 옳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 정도의 지각이 있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전혀 분별해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늘 관념과 소극적인 것을 퍼뜨리는 사람이 있으면, 많은 사람이 그 부정적인 것에 교란되어 연약해지고 소극적으로 변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은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 엄청난 미혹이며, 크나큰 살상력을 지닌다. 토대가 있는 사람은 그다지 큰 영향을 받지 않으며, 시간이 좀 지나 진리를 깨닫게 되면 돌이킬 수 있다. 그러나 믿은 지 얼마 안 돼 토대가 없는 사람이 그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 들으면 소극적으로 변하고 연약해지기 쉽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물러나 믿지 않게 될 수도 있으며, 악인의 경우에는 관념을 퍼뜨리고 교회 사역을 교란할 수도 있다. 소극적인 것과 관념을 거리낌 없이 퍼뜨리는 사람은 어떤 존재겠느냐? 전부 악인이자 마귀이며, 드러나 도태될 대상이다. “저는 외부인에게 퍼뜨린 적은 없고 집 안에서만 얘기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집 안에서만 말했든 밖에서 말했든 성질은 똑같다. 집에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네가 하나님에게 관념과 오해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네가 진리를 구하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증거다. 네가 진리를 구해 관념을 해결하지 않고, 그 관념들을 포기할 생각도 없기 때문에 네가 누군가에게 말하든 성질은 모두 같다. 또 어떤 이들은 관념이 있으면 여기저기 퍼뜨리고 누구를 만나든 얘기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방해와 교란을 일으켜 집으로 되돌려 보내졌다고 치자. 누가 그에게 어째서 되돌려 보내졌느냐고 묻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천성적으로 솔직해 뭐든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실수로 예전에 했던 나쁜 행동을 털어놓는 바람에 리더 일꾼이 그걸 알고 저를 악인으로 규정해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당신들도 교훈을 얻으세요. 하나님 집에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지만 그것도 사람을 가려서 해야 합니다. 가족에게는 조금 정직해도 되지만 외부인에게 정직하면 손해를 봅니다. 그래서 제가 손해를 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게 바로 교훈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얘기를 듣고 ‘하나님 집에도 그런 일이 있나? 우리도 앞으로 말조심을 해야겠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냐? 하나님이 그렇게 많은 말씀을 했는데 10년 동안 듣고도 한 마디도 기억하지 못하면서 악인이 한 마디 하자 단단히 기억하고 마음에 새겼다. 그런 다음 그가 말을 하고 일을 할 때마다 사람을 경계하기 시작했다면, 그것은 현혹되고 중독된 것이다. 그가 어째서 중독된 것이겠느냐? 한편으로는 그가 자질이 형편없고 너무 어리석어서 남의 말과 행동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 입장이 없으며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또 진리를 고수하지 못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하나님에게 믿음이 없고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남에게 현혹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분명 좋은 사람도 아닐 것인데, 마귀가 하는 말도 받아들일 수 있다. 마귀가 관념을 퍼뜨리는 속셈과 목적이 무엇이냐? 모두가 그를 동정하게 하려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그는 기뻐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방해하고 교란하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제멋대로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이런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느냐? 그걸 굳이 말할 필요가 있느냐? 하루빨리 교회에서 정리하고 그가 하루라도 교회에 머물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런 악인이 하나님 집에 머무르게 되면 재앙뿐이다. 그들은 잠재된 위험이며 시한폭탄이다. 그를 정리해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가 밖에서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게 해라. 그것은 하나님 집과 무관하다. 이런 사람들은 가장 음흉하고 구제 불능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 집에서 어떤 사람이 돌려보내지는 것이 일시적인 부주의로 말실수를 했기 때문이겠느냐? 어떤 사람이 돌려보내지는 것이 정직한 사람으로 살면서 솔직하게 털어놓고 자신을 인식했기 때문이겠느냐? 하나님 집에서는 계속 교회를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정리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모두 일관되게 본분을 잘 이행하지 않고, 심지어 악을 행하고 교란할 수 있는 악인, 적그리스도, 불신파다. 일시적인 과오나 패괴 표출로 정리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진리를 실행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살았다는 이유로 정리되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이것은 모두 공인된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소수이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다수인데, 다수가 정리되면 누가 힘쓰겠습니까? 다수가 정리되면 구원받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일찍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은 인류가 너무 깊이 패괴되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 수가 많은 것이 아니라 정제된 사람을 원한다. 하나님 집에 남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말을 잘 듣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다. 대다수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들은 자질이 부족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는 없지만 말을 잘 듣고 순종할 수 있으며 나쁜 짓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남아서 힘쓸 수 있다. 힘쓰는 자 가운데서 살아남는 사람들은 모두 충성심이 있고, 어떻게 힘을 쓰든 원망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말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남게 되면 교란을 일으키기밖에 더하겠느냐? 설사 그가 조금 힘쓴다고 하더라도 항상 누군가 지켜보고 있어야 하고, 잠깐 지켜보지 않으면 또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고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런 사람이 힘을 쓰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크다. 이런 힘쓰는 자들은 반드시 정리해야 한다. 정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민들이 교란당하고 교회 생활이 교란당하게 된다. 악인을 교회에서 정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선민들이 정말로 악인에게 해를 입고 망치게 된다. 그러므로 악인을 정리해야만 하나님의 선민들이 교회 생활을 할 때 교란받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선민들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해 구원받을 수 있다. 악인을 제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하는 일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누구에게든 사랑과 관용으로 대하고 모두 도울 수 있는데, 유독 진리에만 관심이 없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하나님과 대립하는데, 하나님의 철천지원수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바로 불신파이자 마귀다. 마귀는 진리를 가장 싫어하고 증오한다. 진리와 관계되고, 하나님이 말씀한 것과 요구하는 것과 관계된 것이라면 그는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심하고 반항하고 관념을 퍼뜨릴 수 있다. 또 교회 사역에 불리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고, 심지어 그의 사적인 이익에 손해가 발생하면 일어나 공개적으로 하나님에게 맞설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마귀이고 진리와 하나님을 증오하는 사람들이다. 사람의 본성 속에는 다 진리를 증오하는 성품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증오하는 본질이 있다. 그저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떤 이들은 악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대적할 수 있고, 어떤 이들은 그저 패괴 성품이나 소극적인 정서를 드러내기만 한다. 그러면 어떤 이들이 하나님을 증오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냐? 그들에게 진리를 증오하는 성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증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진리를 증오하는 성품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바로 마귀이고 하나님의 원수라는 의미이다. 마귀란 무엇이냐? 진리를 증오하고 하나님을 증오하는 사람은 모두 마귀다. 마귀가 구원받을 수 있느냐? 절대로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교란한다. 이런 사람들이 마귀이고, 살아 있는 귀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각지의 교회에서 교회 사역을 교란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귀에 속하며 살아 있는 귀신이다. 또 교회에서 제멋대로 날뛰고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모두 살아 있는 귀신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만약 어떤 이들을 살아 있는 귀신이라고 단정했다면 서둘러 그들을 제명해야 한다. 어떤 이가 평소에는 태도가 훌륭하나 일시적으로 내적 상태가 좋지 않거나 분량이 너무 작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저질렀지만 항상 그러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본성이 그런 사람이 아니므로 남겨 사용해도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인성이 그다지 좋지 않아 누구라도 그에게 밉보이면 끝도 없이 이치를 따지고 지나치게 몰아붙이지만 힘쓰려고 하고 기꺼이 고생하려 한다는 한 가지 장점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당분간 남겨 사용해도 된다. 만약 이런 사람이 툭하면 악행을 저질러 사역을 교란하는, 마귀와 사탄에 속한 사람이라면 그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 이것은 한 치의 예외도 없는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교회에서 제명해야 한다. 절대로 교회에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된다. 어째서 제명해야 하겠느냐? 제명하는 근거가 무엇이겠느냐? 어떤 이들을 제명하는 것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와 교훈을 주기 위함이고, 또 어떤 이들을 제명하는 것은 그의 본성을 꿰뚫어 보았고 그가 구원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보아라. 사람마다 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제명되면 몹시 소극적이고 마음이 어두워지지만 본분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행한다. 이런 사람은 제명되고 나면 일절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과 내적 상태가 다르고, 걷는 길도 다르다. 제명된 후에도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이런 사람들은 어떤 내적 상태를 가지고 있느냐? 그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는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과 다르다. 너희가 분별하지 못한다면 너희가 자질이 너무 부족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으로, 교회 사역을 할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차이를 알 수 있는 사람은 그들을 구별해서 대할 줄 안다. 이 두 부류 사람들의 차이점이 무엇이겠느냐? 그들이 걷는 길은 어떤 차이가 있느냐? 그들이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에 어떤 차이가 있느냐? 너희가 그것을 분별해 낼 수 있느냐? (제명된 후에도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은 그에게 약간의 양심이 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그도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했어. 교회에서 나를 제명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어야 해. 나는 여전히 피조물이고 창조주를 인정해.’ 그의 내면에 양심이 약간 작용하는 것입니다. 제명된 후 본분도 이행하지 않고 하나님조차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신파로 드러난 것입니다.) 누가 이어서 말해 보겠느냐? (제명된 후에도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마음속으로는 전에 자신이 했던 일로 인해 하나님에게 빚졌음을 이미 깨닫고 그것을 메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명된 후에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가 예전에 본분을 이행했던 것이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복을 받으려는 마음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복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 본분을 이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힘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 두 부류 중 양심이 있는 이들은 누구냐? (제명된 후에도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약간의 양심이 있는 것이고 사람됨의 마지노선이 있는 것이다.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든, 하나님이 그를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딜 가든 피조물이므로 계속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것이 양심이 있고 사람됨의 마지노선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어딜 가든 적어도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내면에 이런 믿음이 있어야만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정말로 믿음이 조금 있는 사람이며 아마도 회개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명되고 나면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저를 원치 않으니 저도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 제가 믿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신의 사람됨의 마지노선마저 포기하고, 자신이 예전에 했던 것들조차 부인한다. 이런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없는 것이다. 이 두 부류 사람들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이런 것들을 모르겠느냐? 하나님은 아주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했으므로 만물을 감찰하고 주재할 수 있다. 양심이 없는 불신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제게는 왜 보이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제명당한 것이 뭐가 어때서요? 난 어딜 가든 똑같이 살 수 있습니다. 설마 제가 당신이 없으면 못 살 줄 아십니까?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난 더 자유롭지요!’ 그의 태도가 이렇다. 이것은 불신파가 정체를 드러낸 것이고, 그를 제명한 것이 옳았음을 의미한다. 이런 불신파는 제명해야 마땅하며 제명하길 잘한 것이다. 하나님에게 믿음이 있는 사람이 제명당했을 때는 다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제명된 후에 이렇게 말한다.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면 저는 살 수가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저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 없이는 안 됩니다. 제가 어딜 가든 다 하나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러고는 계속 본분을 이행한다. 그가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도 아니고 멍청한 것도 아니다. 이런 생각에 지배받기 때문에 그가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에게도 억울한 마음도 있고 관념도 있고 원망하는 마음도 있는데 어떻게 계속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이겠느냐? 그의 인성에 양심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양심의 작용이 없는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수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차이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누구든지 다 차이가 있다. 중요한 순간에 사람에게 양심과 이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많은 일을 좌우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조금 전 내적 상태에 속한 것 중 속셈에 대해 교제했고, 다음은 입장과 태도에 대해 교제하겠다. 한 측면의 전문 용어든 한 측면의 진리이든, 그 속에는 모두 많은 세부적인 내용이 있다. 표면에 드러난 두 글자 또는 몇 마디 말처럼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네가 그것을 한 단어나 한 가지 개념 또는 몇 마디 말의 글자적인 의미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그저 도리에 머물 것이다. 하지만 네가 그런 글자 그대로의 단어나 몇 마디 말을 실제 내적 상태, 실제 생활에서 사람이 드러내는 생각, 관점 또는 행동과 결부하여 대조해 본다면, 너는 자신의 많은 문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들은 진리에 위배되고, 어떤 문제들은 도리에 맞고 규례에 부합하며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부합하는 듯하지만 사실상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도 맞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의 관점과 입장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만 부합할 뿐 진리 원칙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평가하고 분별하지 않는다면 사람에게는 모두 통과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해 본다면 사람의 사상 관점은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것이고 부정적인 사물이 된다. 너희가 또 어떤 문제를 발견했느냐? (하나님, 저는 “부모에게 효도하라.”, “현모양처가 되어라.”와 같은 전통문화의 사상 관점이 사람이 보기에는 모두 옳고 정확한 것이지만, 진리의 각도에서 보면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부모를 섬기고 공경할 수 있고, 현모양처가 될 수도 있는데,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 볼 때 아무 문제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겠느냐? 그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겉으로 드러난 두 가지 측면의 모습만 보면 문제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본성 본질로 평가하면 그가 하나님을 대할 때 순종하느냐? 그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느냐? 이 두 가지 측면에 문제가 있으면 그가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 뻔하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측면의 모습이 장점이라고 해도 그의 본질을 대표할 수는 없다.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부모를 섬기고 공경하고 아무리 현모양처라고 해도 그것이 그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그가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난 사람임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의 이 두 가지 장점은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그가 이 두 가지 장점을 갖췄다고 해서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은 절대로 아니며, 의로운 사람의 기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 패괴된 사람은 마음속에 사탄의 철학이 충만하고 남들에게 칭찬과 찬동을 얻고 싶어 하며, 남들과의 관계를 지켜 자신을 보호하기를 좋아하고, 또 남들이 자신을 우러러보도록 두각을 나타내고, 자신을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이런 사탄의 철학에 따라 사는 것은 모두 하나의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이 출발점이 도달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냐? (남들이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그가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남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를 옹호하고 그에게 찬동할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탄의 철학에 따라 살 때는 모두 한 가지 관념과 상상을 품고 산다. “좋은 사람은 좋은 보답을 받는다.”, “좋은 사람은 일생이 평안하다.”라는 것이다. “좋은 사람은 좋은 보답을 받는다.”, “좋은 사람은 일생이 평안하다.”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누구도 분명히 말하지 못한다. 오히려 좋은 사람이 장수하지 못하고 나쁜 사람은 장수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누구도 이 일의 근원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불변의 규율이 하나 있다. 바로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행동에 따라 각자에게 보응을 내린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니 아무도 이것을 바꿀 수 없지만 이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면 사람이 사탄의 철학에 따라 살면 쉽게 변화할 수 있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어째서 변화하기가 쉽지 않겠느냐? (그것들은 사람이 생존하는 법칙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구하지 않고 이런 관념들을 분별하지 못하면 쉽게 변화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실 일이 닥쳐 이런 속셈과 행동이 나타났을 때 네가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면 옳지 않다. 이방인이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도 정상이다. 그가 전적으로 사탄의 철학과 법칙에 따라 살기 때문이다. 그는 이것들을 보배로 여기고 이것들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지금 너희는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고 이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으므로 내면 깊은 곳에 이런 것들에 대한 평가가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대체 옳은 것이냐, 틀린 것이냐? 이런 것들이 틀린 것임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인데,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부정하는 태도여야 한다. 그러면 어째서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냐? 무엇이 문제이냐?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육을 저버리길 원치 않습니다. 일이 닥치면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고려합니다. 자기 내면의 속셈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을 저버리지 않으려 하는 것도 한 가지 측면이다. 큰 이익과 관계됐을 때 너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면 평소에 일상생활의 처세에서 큰 이익과 관계되지 않을 때 그런 사탄의 철학과 법칙을 너희는 성찰했느냐? 해결하려고 진리를 구했느냐? 변화가 있었느냐? (어떤 일들은 성찰하고, 인식한 것은 변화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크게 개의치 않고 성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변화하기가 쉽지 않다. 너의 일거수일투족과 모든 언행, 눈빛 하나하나에서 모두 패괴 성품이 드러나고, 모두 패괴 성품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도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으면 구원받기가 쉽지 않다. 네가 육을 저버리기가 인격이 분열되는 것처럼 무척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된다면, 너는 곤란하다. 변화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부터, 또 자신의 모든 언행에서부터 특히 명리와 지위에 관계된 일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진리를 구할 수 있으며 자신의 육을 저버릴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변화될 수 있다. 너희가 지금 사탄의 이런 철학과 법칙을 내려놓기 어렵다고 느끼는데, 그러면 일상생활에서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너희의 관점과 행동, 일 처리 방식이 진실로 변화되었느냐? (때로는 말하고 행동할 때 자신에게 옳지 않은 속셈이 있음을 인식하고 되돌리려고 합니다. 기도 후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실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행한 후에 자신의 행동 이면에 있는 그 속셈이 해결되지 않았고 그저 겉으로 보이는 행동만 변화했음을 알게 됩니다. 한 예로 제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가 그걸 깨닫고는 서둘러 육을 저버리고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제가 방금 말할 때의 속셈이 옳지 않았습니다. 제가 간사하게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다음에 또 일이 닥쳤을 때도 그 속셈에 지배받아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싶고 거짓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 속셈이 깊게 뿌리내려 있는 거 같습니다. 마음속에 반복해서 드러납니다.) 그러면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려는 그 속셈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겠느냐?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갖가지 패괴 성품에서 비롯된 속셈은 그 본질도 모두 다르다. 어떤 것은 본질이 사악하고, 어떤 것은 흉악하고, 어떤 것은 황당하고, 어떤 것은 터무니없으며, 어떤 것은 강퍅하다. 각각의 본질이 있다. 그러므로 각기 다른 상황에서 동일한 속셈이 나타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네 내면의 패괴 성품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 성품이 각기 다른 상황에서 각기 다른 속셈을 만들어 낸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곤란하고 마음속이 얼마나 혼란스럽겠냐! 사람은 한 가지 속셈만 나타나도 해결할 수 없고 긴 시간 동안 변화해야 한다. 한 가지 성품에서 여러 종류의 속셈이 나타난다면 더더욱 변화되기 힘들 것이다. 네가 이 한 가지 속셈에 대해 부단히 노력하고, 여러 상황과 환경, 여러 사람과 일, 사물에서 이 측면의 속셈을 처리하고 해결한다면 이것은 한 측면의 패괴 성품과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몇 차례 싸움에서 실패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심지어 자신은 변화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 네가 조급해해도 소용이 없다. 패괴 성품은 단숨에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는 한두 번 육을 저버리면 변화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후에도 패괴 성품이 자꾸만 드러나고 너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네가 성품이 변화되는 과정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성품 변화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진리를 너무 얄팍하게 깨달아서는 안 된다. 네가 패괴 성품의 본질을 참으로 인식하게 되면 그것을 철저히 저버릴 수 있다. 네가 지금 이렇게 실행하면 비록 일에 직면했을 때 여전히 패괴 성품을 드러낼 수 있다고 해도 네게 이미 변화가 나타났음은 부인할 수 없다. 적어도 패괴 성품이 드러나는 일이 적어질 것이고, 네 속셈과 불순물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 지금 네 말에는 거짓되거나 진실하지 못한 말이 그리 많지 않고 늘 속마음을 말하고 진실한 말을 한다. 이것은 네게 이미 변화가 나타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실행과 행동 방식에만 변화가 나타났을 뿐 속셈은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어. 이건 구제 불능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옳은 생각이겠느냐?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이것은 치우친 생각이다. 성품 변화는 많은 과정을 겪어야 한다. 실행과 행동 방식에 먼저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옳은 것이고, 사람 내면의 속셈은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만 변화될 수 있다. 실행과 행동 방식에서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면, 이는 사람이 변화되기 시작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꾸준히 진리를 구하여 사람의 속셈과 불순물을 해결한다면, 패괴 성품이 점점 적게 드러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면, 이는 네 생명 성품에 이미 변화가 나타났다는 증거다. 이렇게 일을 바라보는 것이 옳다. 네가 올바른 실행법을 가지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원칙이 조금 생겼다면 이것은 이미 변화가 생긴 것이다. 가끔 패괴 표출이 있다고 해서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네가 “그러면 어째서 또 패괴를 드러내며 고질병이 도지는 것입니까? 이것은 변화가 없다는 증거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틀린 판단이다. 패괴를 드러내는 문제는 몇 년의 체험만으로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패괴 표출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있다. 네 패괴 표출이 갈수록 적어진다면 그것은 변화가 있음을 보여 주는 충분한 증거다. 변화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 점은 너희는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아야 하며 치우치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구원받는 것은 절대로 단 몇 년만에 되는 일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이뤄지는 일이다. 너는 이런 인식을 가져야 한다.
방금 우리는 입장, 속셈, 태도에 대해 교제했다. 입장이 태도를 결정하지 않겠느냐? 입장과 관점에 따라 사람의 태도가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네가 직면한 환경과 사건에 대해 네가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는 네 입장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네 입장이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고 사람의 편에 서서 사람과의 관계를 지키는 것이라면, 네 관점과 행동은 틀림없이 너 자신의 이익과 체면을 보호하고 지키며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 둘 것이다. 만약 네 입장이 하나님 집의 이익을 보호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고 네 충성심을 다하려는 것이라면, 너는 모든 일을 진리에 따라 실행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며 충성심을 다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려는 태도를 가질 것이다. 이것은 서로 일치하는 것이다. 언젠가 너희들이 함께 교제할 때 서로 어떤 도리를 듣거나 기억했고, 혹은 어떤 영적 이론에 대해 파악했는지를 나누는 게 아니라 그동안 자신의 내적 상태와 어떤 일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입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새롭게 발견하고 알게 된 것은 무엇인지, 하나님의 요구나 진리에 어긋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교제할 수 있을 때, 이런 것을 교제할 수 있을 때 너희는 분량이 있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이 자신의 각 부분의 관점과 입장, 속셈, 생각을 성찰해 본 적도 없거나 성찰하고도 옳고 그름도 모르고 어리벙벙하다면, 너희들에게 교회 리더를 맡으라고 했을 때 사람들에게 양육하는 것은 모두 무엇이겠느냐? (글귀와 도리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글귀와 도리, 영적인 이론, 신학 지식만이 아니라 어쩌면 사람들에게 양육하는 것이 자신의 치우친 관점과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관념과 판단일 것이다. 또 어쩌면 더 많이 양육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맞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에도 부합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일방적인 관점과 인식일 것이다. 그러면 결국 너희가 이끈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글귀와 도리만 말하게 된다.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시련이나 정결케 하는 사역을 하려 하면, 대항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것이다. 그것을 아예 정확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진정한 순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것은 너희가 사람들에게 양육한 것이 관념과 상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희의 양육과 인솔로 인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줄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이행한 본분은 어떻겠느냐? 합격이겠느냐? (불합격입니다.) 이제 너희가 어떤 사역을 하고 어떤 진리를 교제해야 사람에게 참된 도움이 되고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지, 사람의 소극성과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참된 인식을 갖고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게 할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느냐? 만약 너희의 사역이 그런 성과를 이루었다면, 너희는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이행하는 본분도 합격일 것이다. 만약 이런 사역을 할 수 없다면 너희는 대체 교회에서 무엇을 했느냐? 너희가 어떤 사역을 하고 어떤 말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참으로 이롭고 도움이 되는지 판단할 수 있느냐? 너희가 하는 사역과 말들이 바울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이론을 말하고 자신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냐? 심지어 바울이 했던 말들보다 더 분명하고 역겨운 것이 아니냐? 너희가 판단할 수 있느냐? 만약 정말로 판단할 수 있다면 너희는 참으로 성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지 1~2년밖에 되지 않는데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로 그의 본분 이행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자. 너는 계속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개인의 요구와 욕망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 사람은 이 측면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고도 출교당했는데 그가 그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해서 하나님 집에서 이렇게 처리한 것에 대해 마음속에 견해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에게 견해가 있다면 너는 그의 견해를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기 싫은 것도 아니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고생을 견딜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너는 “젊은이는 고생과 노고를 견딜 수 있어야 하고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항상 말했다. 말은 옳지만 그의 내적 상태와 맞지 않기 때문에 그는 그 말을 듣고도 여전히 힘이 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오해를 해결하는 것은 도리를 말해 준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진상을 알아보고 근원을 파악해야 한다. 이것을 일의 원인을 규명한다고 한다. 진상을 분명히 파악한 뒤에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만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어떻게 오해한 겁니까? 어떤 오해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에게 얼마나 잘해 주고 얼마나 보살펴 주시는데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을 오해하다니 양심이 없군요!”라고 추궁한다면, 이렇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것은 사람을 권면하고 꾸짖는 것이지 진리를 교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진리를 교제하려면 어떻게 말해야 하겠느냐? (그에게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사실을 믿게 해야 합니다. “당신이 출교된 사람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고 해도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당신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출교된 그 사람을 저절로 꿰뚫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훌륭한 방법이고, 가장 간단한 방식이다. 속속들이 말하지 못하더라도 일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에게 오해가 생겼을 때 보통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왜 괴롭겠느냐? 그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입장 바꿔 생각하며 자신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렇게 오랫동안 믿고도 출교당했어. 나는 그 사람만큼 오래 믿지도 않았으니 하나님께서 나도 원치 않으실까?’ 그에게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한 오해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오해다. 하나님에 대한 이 두 측면의 오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에게 오해가 생기면 그 오해의 본질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정이냐, 아니면 의구심이냐? (의구심입니다.) 이런 의구심은 옳은 것이냐, 틀린 것이냐? 우선 이것은 틀린 것이다. 그러면 네 이성을 통해 네가 지금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느냐? 너의 이런 행동과 태도 또는 내적 상태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느냐? 만약 네게 이런 이성이 있다면 너는 자신이 틀렸고 하나님이 옳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초가 생기고 나면 그다음에는 어떤 진리를 교제하든 네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네가 잠재의식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야. 하나님도 사람에게 약점을 잡힐 수 있는 부분도 있고, 하나님도 잘못하실 수 있어. 또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실 수도 있지. 사람에 대한 몰인정함은 불공평한 거야.’라고 생각한다고 치자. 네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네 잠재의식 속에서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 인정하는 것이냐, 부정하는 것이냐?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네 잠재의식 속에서 너는 자신이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겠느냐, 잘못이라고 생각하겠느냐? 잠재의식 속에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어떤 측면의 진리를 아무리 교제해도 소용이 없다. 이 두 가지 관점과 두 가지 잠재의식 가운데 자신을 피조물의 위치에 놓고 창조주가 바로 창조주이고, 사람은 사람이며, 하나님은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첫 번째 것입니다.) 그럼 두 번째는 어떠냐?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어떤 일을 통해 알 수 있느냐? 그는 하나님에 대해 믿고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지 않고, 시시때때로 관찰하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해부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그는 하나님과 평등한 지위에서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을 대한다. 그러므로 그가 갑자기 하나님이 그의 관념과 상상에 맞지 않는 일을 했음을 알게 되면, 그는 감히 하나님에게서 꼬투리를 잡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고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감히 꼬투리를 잡고 흠을 잡아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말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오해가 생기면 하나님이 하는 일을 사람이 측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을 비난하고 판단할 이유도, 자격도 없다. 이런 일이 닥치면 너희는 어떻게 교제해야 하겠느냐? 너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관념에 맞지 않는 어떤 일을 하시든 간에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어야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을 맹목적으로 판단해서도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고 또 패괴된 사람이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으로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닫는다 해도 우리는 역시 패괴된 사람이고, 하나님은 영원히 하나님이십니다. 설령 우리가 진리를 얻어 하나님께 온전케 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좋아하지 않아 우리를 멸하시더라도 우리는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피조물이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 일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관념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다면, 우리가 너무 패괴되고 교만하고 사악하며, 이성이 너무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선 우리는 줄곧 자신을 피조물의 위치에 놓고 창조주를 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잘못입니다. 두 번째 잘못은 계속 하나님을 지켜보고, 하나님의 흠을 잡으려고 궁리하고, 그런 뒤 관찰하고 연구하고 분석한 것입니다. 이것은 더욱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에 순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편에 서서 사탄의 졸개가 되고, 사탄과 손잡고 하나님께 맞서고, 하나님과 겨루고 대항했습니다. 이것은 피조물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이 사람이 보기에 옳든 그르든, 어떤 측면의 진리에 부합하든, 또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어떻게 대조되든, 우리와는 무관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책임과 의무, 본분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책임을 미루지 말고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이 피조물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모두 옳고, 우리가 유익하다고 느끼든, 박탈당한다고 느끼든, 상처받고 고통스럽다고 느끼든 우리는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두고 순종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욥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베드로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크게 못 미칩니다. 자격으로 따지면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할 자격이 없고, 하나님께 오해를 품을 자격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어떤 일에도 평가와 판단을 내릴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자격이 없다고 하면 물론 이렇게 말하면 사람은 듣기가 싫겠지만 패괴된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그런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기 때문이다. 감히 창조주와 자격을 논하고 이유를 따지는 것은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어처구니없는 것 아니냐? 그러므로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고, 이렇게 교제해야만 문제를 조금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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