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하나님을 대할 때 갖춰야 할 태도 (제 1 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는지를 알려면 우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한지를 보아야 한다. 경외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한다면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이 있는 것이고, 경외하고 순종하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느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사람은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자 추구할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두 가지를 갖추고 있다. 하나님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진리 추구를 어떻게 실행에 옮겨야 하겠느냐? 너희들은 매일 본분을 이행하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고 있느냐?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느냐? 진리를 구해 해결할 수 있느냐? 이것은 생명 진입의 문제와 관련된다. 너희는 본분을 이행하면서 패괴를 드러낼 때 자신을 반성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이렇게 실행하거나 체험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상관이 없게 된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거나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하나님의 어떤 말씀과 관련이 있는지, 자신에게 어떤 생각과 관점, 그릇된 속셈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의 내적 상태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사람의 내적 상태에는 어떤 것이 포함되느냐? 사람의 입장, 태도, 속셈, 관점, 그리고 일부 사탄의 철학, 논리, 지식을 포함하는데, 결론적으로 그런 것은 다 사람이 평소에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어떤 일이 생기면 먼저 자신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순서다. 두 번째는 그 관점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관점의 옳고 그름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느냐? 하나는 하나님 말씀으로 판단해야 하고, 또 하나는 그런 일을 하는 원칙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이를테면,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이나 이익, 규정, 그리고 하나님의 명확한 말씀을 통해 이 관점이 올바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판단하는 기준이다. 너희는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의 관점을 성찰할 수 있느냐? 성찰할 수 있든 없든, 첫 번째 단계에서 너는 반드시 이렇게 실행해야 한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한 가지 관점을 갖고 있다. 그 관점은 어떻게 생겨나겠느냐? 네가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엇을 근거로 바라보는지, 어떻게 처리할 계획인지, 네 처리 방법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등이 바로 관점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패괴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무엇을 근거로 바라보는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지 등은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관계가 있다. 어떤 일을 대하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이든 사람이 모든 일을 대하는 태도와 처리 방법에는 한 가지 관점이 있는데, 그 관점이 그의 일 처리를 이끌고 지배한다. 그리고 그 관점이 생겨난 근원이 무엇에 근거하는지가 그 관점의 옳고 그름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네 관점이 사탄의 철학과 논리에 근거해서 생겨난 것이고, 네 말의 속셈이 유명해지고 얼굴을 알려서 너를 알고 이해하고 기억하고 네게 동조하는 사람들을 늘리는 데 있다면, 그것이 바로 네가 그 일을 하는 출발점이다. 네 내면에 이렇게 옳지 않은 속셈이 있다면, 거기에서 생겨난 관점과 행동 방식도 분명히 옳지 않을 것이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 관점과 태도, 행동 방식이 생겨났을 때, 너는 성찰할 수 있느냐?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다. 절대적인 조건은 무엇이겠느냐? 자신의 관점이 그릇되었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 네게 옳지 않은 속셈과 사적인 계산, 욕망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잘못된 관점대로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 옳지 않은 속셈과 관점을 내려놓는 동시에 진리를 구해야 한다. 자신의 관점이 옳지 않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고 또 그것이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임을 분명히 안다면, 너는 그것을 저버려야 한다. 육을 저버리는 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진리에 부합하는 일을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하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하지만 잘못된 관점을 저버리지 못한다면, 너는 진리를 실행할 수 없고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네가 알고 있는 것은 바로 도리일 것이다. 네가 말하는 것이 네 행위를 제약하거나 지도할 수 없고, 네 잘못된 관점을 바로잡을 수도 없다면, 이는 그것이 도리임을 더 확실히 증명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 단계에서는 자신의 관점을 성찰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자신의 관점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여 잘못된 관점은 저버리고 포기하는 한편, 옳은 관점은 계속 견지하고 지켜야 한다. 지금 너희의 문제는 무엇이냐? 한 가지는 성찰하는 법이 거의 없는 것이다. 너희에게는 성찰하는 습관이 없다. 또 한 가지는 설령 성찰했다 해도 자신의 속셈과 관점이 옳은지 그른지 모르는 것인데, 옳은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다가 결국에는 멍해지고 흐리멍덩해져서 자기 뜻대로 해 버린다. 이런 상황도 있다. 또 어떤 상황이 있겠느냐? (때로는 성찰을 통해 자신의 속셈과 관점이 그릇되다는 것을 깨닫고 저버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이겨 내지 못해 타협하고 이유와 핑계를 대며 자신과 타협합니다. 또 그때 실행하지는 않고 나중에 후회합니다.) 이는 진리에 순종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작은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대부분 자신의 잘못된 속셈과 관점을 이겨 내고 저버릴 수 있다. 물론 특별한 환경이 닥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겨 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너도 이겨 내지 못한다면, 이것은 정상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겨 낼 수 있는데 네가 이겨 내기 힘들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지 않은 것이고, 네게 진리 실행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네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고 자신의 마음이 편안한 것과 사욕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며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네 마음속에서 중요하지 않다. 이는 네 마음속 속셈과 네가 추구하는 관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사람의 내적 상태에는 주로 어떤 것들이 포함되느냐? (속셈, 입장, 관점 같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내적 상태에는 주로 그런 것들이 있다. 사람의 내적 상태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은 무엇이냐? 사람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마음속에 수시로 생겨나는 것이자 사람이 생각 속에서 의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해 보아라. (속셈입니다.) 그렇다. 사람의 속셈은 내적 상태에서 뚜렷한 한 부분으로, 가장 흔히 보이는 것이다. 많은 일에서 사람은 거의 다 자신의 생각과 속셈을 갖고 있다. 이런 생각이나 속셈이 생겨도 사람은 아주 정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을 위한 것으로, 자신의 체면이나 이익을 위한 것이고, 혹은 무언가를 덮어 감추거나 자신의 무언가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때 너는 그 속셈이 어디서 비롯되었으며, 왜 그런 속셈이 생겼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 집에서 네게 교회의 인원을 정리하는 사역을 시켰는데,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건성으로 임하고 몸을 사리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원칙대로라면 그에게 처분을 내려야겠지만 그와 너는 사이가 좋다. 그럼 너는 어떤 생각과 속셈을 품겠느냐? 너는 어떻게 실행하겠느냐? (자신의 취향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그 취향은 어떻게 생겨났겠느냐? 그가 너한테 잘해 주었기 때문에, 혹은 너를 위해 어떤 일을 해 주었기 때문에 너는 그에게 호감이 생겼고, 이럴 때 그를 보호하고 변호해 주려 할 것이다. 이것이 감정의 작용 아니겠느냐? 너는 그에게 정을 느끼기에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라는 식으로 양면 수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좀 더 열심히 해야 해요. 더는 대충 해서는 안 돼요. 고생도 좀 해야 해요. 이건 우리 본분이잖아요.” 다른 한편으로는 너는 “그 사람 많이 좋아졌습니다. 본분 이행 효과도 전보다 좋아졌습니다.”라고 상부에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네 속마음은 이랬다. ‘이건 내가 그 사람을 달래서 그렇게 된 거지, 안 그랬으면 그대로였을 거야.’ 그리고 너는 계속 ‘그 사람은 나한테 잘해 주는데, 내가 그 사람을 제명할 수는 없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에게 이런 속셈이 있다면 이것은 어떤 내적 상태이냐? 이는 개인의 감정적인 관계를 지킴으로써 교회 사역에 해를 입히는 것이다. 이런 행동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이런 행동이 순종적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순종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반항하는 것이다. 네게 임한 일, 또는 네가 해야 할 사역에 대한 네 생각에 주관적인 판단이 있는 것인데, 거기에는 감정적인 요소가 섞여 있다. 너는 정에 휘둘려 일을 처리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이 공정하다고, 다른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생각대로 일을 처리한다. 이렇게 사역을 하면 에누리해서 하여 사역 성과에 영향을 미치며, 교회 사역에 피해를 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정에 휘둘려 일을 처리한 결과이다. 만약 성찰하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를 발견할 수 있겠느냐? 영원히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런 식의 행동이 옳지 못하며 순종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와줘야지. 내가 도와줘서 그가 좋은 방향으로 달라진다면 제명할 필요도 없어. 하나님은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잖아?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니까 나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을 도와주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행동해야 해.’라고 생각한 후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할 것이다. 너는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고도 마음이 편하며 진리를 실행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 과정에서 너는 진리에 따라 실행한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취향이나 속셈에 따라 행한 것이냐? 너는 완전히 자신의 취향, 속셈을 따라 행한 것이다. 전반 과정에서 너는 소위 호의와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감정, 처세 철학을 동원하여 얼버무렸고 중용의 길을 택했다. 겉으로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도와주는 것 같지만 사실 속으로는 정에 휘둘린 것이다. 또한, 상부에서 알게 될까 봐 절충적인 방식으로 사람 마음을 회유하고 누구의 미움도 사지 않고 사역을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의 중용의 길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정의할 것인데, 너는 진리와 하나님 요구에 대해 늘 연구하고 분석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식으로 진리를 대하고 하나님 요구를 대하고, 또 그런 태도로 본분을 이행했을 때, 너의 속셈은 여기서 어떤 작용을 한 것이냐? 자신의 이익과 체면, 인간관계를 지키는 작용을 했다. 반면, 하나님의 요구를 개의치 않으며, 자신의 본분과 교회 사역에 좋은 작용을 하지는 못했다. 이런 사람은 100% 처세 철학에 기대 살아간다. 그의 말과 행동은 모두 자신의 체면과 감정,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진실로 순종하지 않고, 그 어떤 입장 표명이나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마음속에 조금의 가책이 없고, 그것이 어떤 문제임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다면 사람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어떤 일을 처리하든 원칙에 따라 하지 못한다. 속셈과 사적인 욕망으로 산다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의 속마음을 성찰하지 않고, 또 그 속마음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온갖 이유를 들어 자기에게 유리한 거짓말이나 핑계만 늘어놓는다면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체면, 인간관계는 잘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는 맺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은 시간은 참 오래됐는데, 본인의 체험에 대해 교제하라고 하면 그는 늘 말이 없다. 성품 변화에 관한 자신의 체험 간증에 대해 나눌 게 전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자신을 성찰하거나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일이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길을 가고, 패괴 성품 속에서 살면서 자신의 속셈이나 관점, 욕망, 계획대로 행동하며, 회개할 줄도 모른다. 사람이 믿는 존재는 하나님이고, 듣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며,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이고, 교제하고 설교하는 것도 진리이다. 그러나 행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셈과 상상에 따라 실행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사람은 또 하나님의 요구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때 어떤 부분을 가장 참답게 대해야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체험하고 진리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가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하나님 말씀과 설교를 다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겠느냐?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은 어째서 참답게 대해야 하는 부분에서 참답게 대하지 못하는 것이냐? 어째서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 말씀에 의구심을 품는 것이냐? ‘하나님은 왜 이렇게 요구하셨을까? 이런 요구가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나? 이렇게 요구하시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인 걸까? 이렇게 요구하는 건 하나님의 행사가 아닌 것 같아. 난 받아들이지 못하겠어. 하나님의 이런 요구는 사람의 뜻에 맞지 않고, 사람의 관념이나 상상과 너무도 달라.’ 말해 보아라. 이렇게 판단하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다. 사람이 이런 태도와 속셈을 가지고 하나님의 요구를 판단하고 대한다면, 하나님에게 마음을 연 것이겠느냐, 닫은 것이겠느냐? (닫은 것입니다.) 이는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라 반항하는 태도다. 그는 우선 하나님의 요구를 연구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비웃기도 한다. “하나님은 교회의 형제자매들과 자주 접촉하지 않고 교회의 일도 모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집에서 이렇게 처리하는 건 좀 독단적인 것 아닐까요? 저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일을 처리할 때 형제자매의 상황에 맞춰 기회를 주죠. 하나님은 성육신하셨으니 사람의 연약함을 이해해 주셔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지 않으시면 저희가 이해하고, 어떤 일은 하나님께서 돌보지 못하시면 저희가 돌보겠습니다.” 그는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반항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는 연구를 마친 후에 판단을 할 것이다. 어떻게 판단하겠느냐? 그는 “어쨌든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그리고 제가 믿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죠.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하십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리스도를 부정한다. 그건 그리스도의 말씀이 반드시 하나님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행사와 말씀이 그의 이익과 속셈, 관점에 저촉되고 위배되는 순간, 그는 하나님을 부정한다. “어쨌든 내가 믿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어쨌든 하나님은 공의롭다. 하나님은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한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판단하는 말 아니냐? 이는 어떤 성질의 말이냐? (모독하는 말입니다.) 뒤에서 사람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판단하는 것이지만, 뒤에서 하나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모독이다. 하나님을 모독할 수 있는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겠느냐?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이겠느냐? 이런 사람은 그야말로 사탄의 심부름꾼이고 악인이므로 버리고 도태시켜야 한다.

교회에서 하나님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하는 모습이 나타나느냐? 흔하지는 않더라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어느 교회든 불신파와 악인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특별한 상황에서 마음속에 이런 내적 상태가 나타날 수 있겠느냐? 판단, 반항, 모독 같은 것들이 생겨났을 때 너희 마음속에 어떤 반응이 나타나느냐? 이것들이 심각한 성질의 문제임을 인식할 수 있느냐? 예를 들어 네가 결혼한 적이 없는데, 적당한 환경에서 좋은 상대를 만나 사귀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치자. 예전에 평생을 하나님에게 바치고 결혼 상대를 사귀지 않겠다고 하나님에게 맹세했지만 늘 상대가 괜찮다는 느낌이 들어 사귀기로 했다. 그런데 사귀고 나서 보니 걸림돌이 많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고 하나님도 허락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가 없어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자신을 저주하고 저버린 끝에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다. 헤어진 뒤에 네 마음이 몹시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도 정상이다. 이는 인성의 정상적인 연약함이지만 너는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원망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진리를 대하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다. 이 일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으면 그 사람의 내면에 어떤 잘못된 생각이 있는 것이겠느냐? (내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결혼 상대를 사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이 큰 문제이냐, 아니냐? 조금 믿기 싫고,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때 왜 하나님을 믿는 길을 선택했을까?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좋으련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텐데. 이렇게 잘 맞는 상대를 간신히 만났는데 놓쳐 버린다면 2년 뒤에는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 앞으로는 결혼 상대를 사귀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이번 생은 정말 이대로인 걸까?’라고 생각한다. 소극적이고 후회스러운 생각이 들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기가 싫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는 태도다. 하지만 이것도 가장 심각한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생각이 무엇이겠느냐? 너희가 이런 일을 경험해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경험해 본 적이 없다면 정말로 위험한 것이다. 경험해 본 사람은 모두 일을 약간 꿰뚫어 볼 수 있고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안전한 것은 아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확실히 시험이 작지 않으므로 신중해야 한다. 자칫 부주의했다가는 시험에 빠질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말세에 태어나서 하나님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이고, 내가 지금 젊어서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이야.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정말로 잘 맞는 상대를 만나도 사귈 수가 없고, 결혼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야. 왜 결혼 상대를 사귈 수 없는 거지? 설마 결혼이 범죄란 말인가? 형제자매 중에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사람들도 많잖아? 그들도 하나님을 믿기는 마찬가지잖아? 어째서 나는 결혼 상대를 사귈 수 없는 거지? 하나님은 공의롭지 못하셔!’ 하나님에 대한 판단과 불만이 생긴 것이다. 그는 속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한 일이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 하나님에게 불만을 품고 크게 원망한다. ‘하나님은 내게 너무 불공평하시고 매정하셔! 남들은 결혼하는데 왜 나는 결혼할 수가 없지? 남들은 아들딸을 낳아 기르는데 왜 나는 그럴 수가 없지? 남들에게는 그런 기회를 주시면서 왜 내게는 그런 기회를 주지 않으시지?’ 원망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내적 상태냐? (반항하고 맞서는 것입니다.) 반항하고 불만을 품고 달갑지 않게 여기며,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 받아들이거나 순종하려는 뜻이 조금도 없다. 그저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길 바라지만 결혼을 선택하는 것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 만에 하나 정말로 결혼했다가 얽매이고 자유롭지 못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하여 훗날 구원받지도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되면 후회하게 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너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했다. 너는 상대를 찾아서 결혼할 것인지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그건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네 선택이 옳든 그르든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런데도 너는 어째서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있느냐? 너는 어째서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원망하는 것이냐? 어째서 그렇게 많이 원망하는 것이냐? (자기 이익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관계된 일이어서 마음이 내키지 않고,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구실을 찾아내 불평을 늘어놓으려 한다. 이것이 어떤 성품이냐? (흉악함입니다.) 이것은 흉악함이다. 자신의 이익이 충족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고 하나님의 안배가 적절하지 못하다고 원망한다. 이것은 성품이 흉악하고 강퍅한 것이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이런 내적 상태와 생각이 모두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이런 일이 없었다면 이런 것들이 생겨나고 표출됐겠느냐?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닥치기 전까지는 이 방면에서 네 이익이 하나님의 요구와 충돌하지 않을 것이고, 네 이익도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에 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추구함에 있어서 네가 남들보다 더 낫고 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이 닥쳤을 때 네 이익과 관계된다면 너는 이익을 포기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다. 이 일에서 무엇을 알 수 있느냐? 사람이 무엇 때문에 항상 하나님을 원망하고 판단하는 것이겠느냐? (자신의 이익이 충족되지 못했을 때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연결되어 있고 자신의 속셈과 욕망, 계산이 충족되지 못하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반항하고 하나님을 판단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모독하기도 한다. 사실 판단하는 것 자체가 반항하는 내적 상태이고, 모독은 더욱 심각하다. 이익에 손해가 생기면 그는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생각할수록 불만스러우며, 생각할수록 자신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반항하기 시작한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입에서도 원망이 터져 나오고 판단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반항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 나타나느냐? (본분 이행에 마음을 쓰지 않고 건성으로 합니다.) 그것은 한 가지 측면이다. 예전에 본분을 이행할 때는 70~80퍼센트의 힘을 쓰고 무슨 일을 하든 온 마음을 다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에게 의견이 생기고 본분을 이행해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판단할 뿐 아니라 마음이 달갑지 않아 본분을 이행할 때 힘을 10~20퍼센트밖에 쓰지 않고 완전히 건성으로 한다. 이것은 패역한 내적 상태에서 나오는 반항적인 행동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자포자기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자포자기하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팀장을 할 때 예전에는 오전 8시에 예배를 하면 그는 5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묵상하며 준비한 뒤에 예배에서 교제할 내용을 기록했다. 이것은 진지하게 본분을 이행하는 태도이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차례 책망과 훈계를 겪고 난 뒤부터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찍 일어나 봐야 무슨 소용이 있어? 하나님께서 보시지도 못하고 사람들도 칭찬하지 않잖아. 내가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하나 없고 늘 책망을 당하기만 해. 정말 힘을 내고 좋은 소리도 못 듣고, 하나님께도 칭찬받지 못하잖아. 앞으로 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위험한 것 같아.’ 다음 예배 때 그는 미리 준비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교제하지도 않고 기록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무슨 태도이냐? (책임감이 없는 것입니다.) 책임감이 없고 건성으로 하며 마음과 힘을 다 쏟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러는 것이겠느냐? 그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 농간을 부리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과 겨루는데, “당신이 저를 책망하고 훈계해서 제 마음이 편치 않으니 저도 이런 방식으로 당신을 대하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마음과 뜻을 다했는데도 하나님은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불공평하십니다. 앞으로 저도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무슨 성품이겠느냐? 이것은 짐승 같은 성품이 드러난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부정하고, 하나님이 사람의 폐부와 심장을 감찰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하나님이 진실로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부정한 채 오로지 관념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이다. 그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할 때 어떤 행동이 나타나겠느냐? 건성으로 하고 자포자기하고 책임감이 없으며, 원망하고 오해하고 관념을 퍼뜨려 남을 선동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반드시 복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무슨 복을 받나요? 누가 보았습니까? 우리는 모두 바울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몇 명이나 있나요?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것이 어디 그리 쉽겠습니까?” 그가 퍼뜨리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에 대한 판단, 관념, 불만이다. 이런 행동의 성질이 무엇이냐? 대항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어째서 이렇게 대항할 수 있는 것이냐? 그의 내면에 있는 관점이 옳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사람에게 하는 요구, 방식 자체를 그가 오해하고 또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사역할 때 그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종하지도 못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못하면 결국 무엇이 생겨나겠느냐? 반발심, 판단, 정죄, 모독이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으면 저절로 이런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저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악인만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그런 행동을 합니다.) 그렇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 인성이 악독한 사람은 모두 각기 다른 정도로 이런 행동과 표출이 있다. 비교적 추구하는 사람이라도 자기 마음과 맞지 않는 일이 닥치면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기도를 하고 하나님 말씀에 비춰 보며 자신을 성찰하고 진리를 구한 뒤에 되돌리고, 되돌린 후에는 회개하여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순종할 수 있게 된다. 때로는 이런 순종에 불순물이 좀 있고 억지로 하는 마음도 좀 있고 기준에 못 미치는 부분이 있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이 순종하려고 하고 약간의 진리라도 실행할 수 있다면, 그 후 각 방면의 진리에 대해 점차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네가 순종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고, 성찰을 통해 이것이 문제임을 알고도 진리를 구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이 너를 대하는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이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너는 불평을 하고 멋대로 판단하고, 거리낌 없이 아무 말이나 다 할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을 것이다. 가볍게는 집에서 불평하고 그릇을 던져 화풀이를 하고 속으로 하나님에게 거리감을 느낄 것이고,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심하면 형제자매에게 소극적인 것을 퍼뜨리고, 관념을 퍼뜨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계속 회개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켜 교회에서 제명당하고 출교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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