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진리를 얻는 기본적 공과다 (제 3 부)
사람은 모두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쉽게 순종하지만, 일단 어려움이 닥치면 순종하지 못한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바로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여 이 어려움을 해결해야 한다.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이 높여 주는 고상한 사람이라고 느끼다가 비천하고 하나님 눈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노리갯감으로 변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전혀 가치가 없는 천박한 놈이 되었어도, 여전히 기꺼이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고 하나님에게 어떤 요구도 없을 수 있다면, 이 경지까지 체험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 (베드로는 마지막 7년 동안 수백 번의 시련을 체험했습니다.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리 오래 믿어도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는 시간이 길고 짧음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진리로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네가 무엇을 추구하는지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은 단지 명예와 지위만을 추구하여 늘 나서고 싶어 하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싶어 하지만, 좌절과 실패를 조금만 겪어도 바로 쓰러져 소극적이 되고 나부라진다. 어떤 사람은 잇속 차리는 것은 좋아하지만 진리는 사랑하지 않는다. 이익을 얻으면 기뻐하지만, 진리를 얻지 못했다고 마음 아파하거나 신경 쓰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지위가 없으면 하나님을 믿을 기운이 나지 않고, 지위가 생기면 누구보다 더 기운이 나서 소극적일 때가 전혀 없고 기꺼이 지쳐서 죽을 정도로 일을 한다. 하지만 진리 실행과 원칙에 따른 일 처리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오래 믿었어도 체험 간증이 전혀 없다. 다른 사람이 3~5년 믿고 체험 간증을 그렇게 잘하는 것을 보면 마음속으로 부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지만, 그 후에도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만약 진리를 향해 노력하는 것을 중시하지 않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오래 믿었어도 소용이 없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께 온전케 되지 못한다. 베드로는 수백 번의 시련을 겪은 후 온전케 되었다. 너희도 수백 번의 시련을 겪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지금 너희는 몇 번 겪었느냐? 수백 번은 고사하고 백 번이라도 되느냐? (백 번도 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수백 번의 시련을 겪고 온전케 되었는데, 만약 너희가 아직 한 번도 겪지 못했거나 단지 백 번만 겪었다면, 베드로가 겪은 수백 번에 아주 많이 모자란다! 너희의 분량이 지나치게 작으니 진리 추구에 공을 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어떻게 공을 들여야 하느냐?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데에 공을 들여야 한다. 아무렇게나 전혀 머리를 쓰지 않고 시시덕거리며 하루 종일 일에만 쫓겨서는 안 된다. 일에 바빠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일이 많으면 바빠야지 바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일에 바쁠 때에도 진리와 원칙을 향해 노력해야 하며, 반드시 무엇인가를 깨달아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하나님에게 달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어떻게 달라고 하느냐? 바로 매일 마음속으로 이를 위해 간구하고, 묵묵히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이는 너에게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이 너의 뜻을 이루도록 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만약 너의 마음이 진실하다면,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들어주어 네가 공과를 배울 적합한 환경을 안배하고 예비해 줄 것이다. 네가 “저의 분량이 지나치게 작은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큰 시련을 주시어 저를 쓰러뜨릴 수도 있을까요?”라고 말하는데, 그럴 리가 없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믿음의 크기와 실제 분량을 가장 잘 알고 있다. 너는 하나님이 3살짜리 아이에게 어른의 짐을 지울 리가 없다는 것을,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네 마음속에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에게 구해야 하고 네가 이런 염원과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너에게 이런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이 행할 것이다. 만약 네가 늘 두려워하고 피한다면, 시련이 너에게 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늘 평안하고 무사한 나날을 보내고자 한다면, 그럼 하나님은 너에게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마음 놓고 대담하게 하나님께 간구하고, 진심으로 자신을 봉헌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면, 하나님은 그제야 역사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절대 함부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으며 성과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해진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으며 네가 지기 힘든 짐을 너에게 지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온전케 되는 것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려면, 사람이 의지가 있어야 한다. 무슨 의지가 있어야 하느냐? 온전케 되는 것을 추구하는 의지, 진리와 인성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의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증거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그런 의지가 없고 단지 “나는 본분 이행하느라 바쁘고, 부담을 지고 있으며, 봉사를 하고 있고, 설교를 듣고 있으니 다른 사람보다 못하지 않아.”라며 만족한다면, 너는 발전 가능성이 없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하고 기껏해야 봉사자 정도만 될 뿐이다. 이는 현 상황에 안주하고 진취적이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예배에서 진리를 교제하지 않으며 설교만 들으면 조는 네가 속세의 일은 눈을 반짝이며 거침없이 말을 하니 이것이 바로 봉사자이다. 어떤 사람은 진리만 들으면 눈을 반짝이며, 자신에게 모자란 것이 너무 많다고 여겨 좋고 실제적인 말을 들으면 재빨리 기억한다. 늘 자신이 하나님의 요구에 많이 부족하고, 마음속에 긍정적인 것이 너무 적으며, 사탄의 독소가 너무 많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너무 많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어쩐지 하나님께서 내게 만족하지 않으신다 했어. 내가 너무 모자랐네. 하나님과 합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오해는 지나치게 많았어. 나는 언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을까?’라며 곰곰이 생각한다. 그는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이런 문제를 곰곰이 생각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을 받지 않고, 늘 하나님 앞으로 와 묵도한다. ‘하나님, 저에게 시련을 주시고 저를 드러내 주시옵소서. 제가 진리를 깨닫게 하시옵소서. 제가 진리 실제를 얻고, 당신을 알도록 하시옵소서. 저를 징계, 심판, 형벌하시옵소서.’ 그는 이 일에 부담을 가지고 있기에 마음속으로 늘 걱정하며 늘 진리를 위해 노력하기를 갈망한다. 그러자 하나님이 역사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이 사람, 일, 사물, 다양한 환경을 안배하여 그가 매일 공과를 배울 수 있게 하는데, 이는 그가 덤으로 얻는 것 아니겠느냐? 베드로는 왜 수백 번의 시련을 겪을 수 있었느냐? 그것은 베드로가 진리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정결케 하기 위해 시련을 주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그 길이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는 바른길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를 위해 간구하고, 또 이를 위해 헌신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로소 그에게 역사하게 된 것이다. 설마 하나님이 그가 마음에 들어 반드시 그에게 시련을 주고 그를 온전케 하려고 했단 말이냐? 바로 그렇다. 하나님은 목표와 원칙을 가지고 어떤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는데, 이는 절대적이다. 왜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얻지 못하는 것이냐? 바로 그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그럴 의지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고 사람에게 강요하지도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온전케 하려는 것은 엄청나게 좋은 일로, 아무리 큰 고통을 받더라도 그럴 가치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럴 의지가 없어 시련과 환난이 임하면 무작정 피하고 숨어 버리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강요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만날 용기조차도 없다. 그는 “그리스도를 만나면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교제도 할 줄 모르는데 만약 그리스도께서 저의 문제점을 알아보신다면 제 체면이 깎이는 거잖아요? 만약 책망과 훈계가 임하면, 그럼 제가 견딜 수 없으니 숨고 하나님을 경원시해야 해요. 만약 제가 늘 하나님과 접촉하고 늘 하나님 앞에서 살다가 하나님께서 저를 간파하시고 싫어하시게 되어 저를 도태시키시면 좋은 종착지도 없어지니까요.”라고 말한다. 그러하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속마음을 감추고 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에게 강요하겠느냐?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네가 무엇을 추구하든 너의 의지가 있는 만큼 하나님이 온전케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늘 하나님을 피하고 멀리하며, 늘 하나님에게 속마음을 감추고 있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에 대해 하나님 말씀에서는 무엇이라 말했느냐?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피하는데, 하나님이 그래도 기어코 너에게 시련을 주고 너를 온전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 생각은 틀렸다. 네가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면, 네가 아무리 간구하고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행하지 않고 사람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데, 이 또한 하나님 성품의 일면이다. 하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는 오로지 베드로, 욥, 아브라함처럼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인생의 바른길,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어 결국에는 진리를 얻고 온전케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얻기를 원하지만, 네가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강요하겠느냐? 하나님은 여태껏 강요한 적이 없으며, 성령은 무작정 너를 감화시키지 않을 것이고 너를 붙잡고 놔주지 않으면서 너를 반드시 온전케 해야지 온전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솔직하게 알려 주마.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태도이다. 하나님은 단지 마지막에 하나님의 사역이 끝난 후 욥, 베드로, 아브라함 같은 사람을 더 많이 얻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 하나님은 무리하게 구하지 않고 순리에 따른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역의 실제적인 면이다. 하나님은 인원수를 규정하지 않는다. 10명, 20명, 아니면 1~2천 명, 또는 만 명이라고 하나님은 규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끊임없이 이렇게 사역을 할 뿐이다. 실제적으로 행하고, 실제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다닐 뿐이다. 바로 이렇게 사역을 하고 말씀하며 각 측면의 진리에 관련된 사역과 사람에게 이로운 사역을 한다. 바로 이렇게 계속하는데, 올바른 사람과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의 내면에 역사하는 것이다. 결국 의지가 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온전케 되는데, 이런 사람들이 바로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이로써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공의롭고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오늘 너희가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찌감치 예정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출생 가정, 시간, 성장 환경, 자질, 은사, 재능, 생존 환경을 예정해 주었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이 모두 예정한 후, 마지막에 사람에게 보여 준 하나님의 공의로운 일면은 무엇이냐? 바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추구하고 대가를 치러야 얻어진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예정하기는 했지만 사람의 협력 또한 반드시 필요하며, 하나님은 바로 사람이 가는 길과 사람의 진리 유무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규정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이다.
성육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을 모든 사람들이 다 보았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대하는데, 너도 보았고, 그도 보았으며, 너희 모두 보았다. 성육신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보고 ‘외모가 너무 평범해 눈에 띄지도 않는데 성육신 하나님일 수 있어? 난 안 믿어. 믿을 수가 없어.’라며 관념을 갖거나, 할 수 없이 관념을 가지고 마지못해 억지로 따르지만 의심하면서 믿는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볼 때 이성이 있어 ‘성육신 하나님께서 비록 평범한 사람이지만 진리를 선포할 수 있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으니 그분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 마땅해. 나는 그분이 하는 말씀을 진리와 창조주의 말씀으로 삼아 받아들이고 실행하며 그분을 따르겠어.’라고 생각하는데, 결국에 그는 온전케 되고 진리를 얻게 된다. 결국 진리를 얻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선민을 매일 이렇게 양육, 공급, 목양, 역사하며, 내가 설교를 하면 성령 또한 하나님 선민에게 역사한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다 양육과 공급을 얻게 되고,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교회 생활에 참여한 사람과 본분을 이행한 사람이라면 모두 이렇게 매일매일 하나님의 역사를 누리게 된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대한다. 누가 문제를 제기하든 모두 해답을 주고, 별도로 어떤 사람을 특별히 보살피거나 그에게 특별한 환경을 마련해 주지 않으며, 또는 그가 별도로 성령의 빛 비춤과 깨우침을 얻도록 끈질기게 독촉하고 재촉하지 않고, 그에게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은혜시대에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사해 주기 위해 사람이 회개의 길을 걷도록 하였고, 많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어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의심하지 않게 하였다. 이 단계의 사역은 모두 진리를 공급하는 것으로,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 진실한 믿음이 생기게 하기 위함이다. 네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든 결국 진리를 얻게 되면, 네가 바로 온전케 되는 사람이며 살아남는 사람이다. 네가 결국 진리를 얻지 못하면, 네가 무슨 원인을 찾든 소용이 없다. 네가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으시니 제가 믿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늘 진리를 선포하시지만 제가 진리에 이르지 못하니 믿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지나치게 실제적이고 평범한 사람이라 믿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로 너의 문제이다. 똑같이 너에게 진리를 공급했는데 왜 다른 사람은 온전케 되고 너는 도태되었느냐? 어째서 너는 얻지 못했느냐? 이는 바로 너에 대한 심판이며,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 단계에서 하나님은 말씀 사역만 한다. 즉, 실제적으로 말씀으로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이적과 기사를 보고 싶다면, 그럼 네가 2천 년 전으로 돌아가 예수님 시대에 나타냈던 이적과 기사를 보아라. 이 단계를 믿지 말아라. 네가 하나님의 심판 사역을 받아들이면 이적을 보려 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 이는 합리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공평하고 합리적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면, 하나님은 너를 불공평하게 대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봉사만 추구하여 마지막까지 충심으로 봉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네가 살아남도록 하고 너 역시 은혜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마지막까지 봉사하지 못한다면, 그럼 도태된다. 도태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냐? 바로 멸망이다! 이는 합리적인 것으로,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한 것이다. 지금 보면 사람이 가는 길이 매우 중요하지 않으냐? 네가 어떤 길을 가기를 추구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지, 네가 어떻게 추구하는지, 너의 염원이 무엇인지, 네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구하는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너의 태도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너의 태도는 어떠한지, 이러한 것들이 매우 중요하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면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느냐? 예를 들어, 네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하나님이 너를 구했다면, 이것이 너를 온전케 할 수 있느냐? 네가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해서 네가 온전케 될 수 있느냐? 또는 네가 잘 때 꿈에서 천국에 가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다면, 이것이 너를 온전케 할 수 있느냐? (온전케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진리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마지막 단계의 이 사역, 즉 하나님의 경영이 끝나는 시기의 이 단계 사역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고 사람을 드러낸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네가 하나님 말씀에서 온전함을 얻으면 네가 살아남아도 아무도 할 말이 없고 사탄도 참소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 공급이 이렇게 많은데도 결국 네가 얻지 못한다면, 그럼 누구를 원망해야 하겠느냐? (자신을 원망해야 합니다.) 길을 잘못 선택한 것을 원망해야 한다. 사람이 어떤 길을 가느냐가 매우 중요한데, 왜 중요하냐? 이것이 사람의 종착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늘 ‘예언이 이루어졌나?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셨나?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언제 땅을 떠나시지? 하나님께서 땅을 떠나실 때, 내가 볼 수 있을까?’를 연구하지 말아라. 너의 종착지와 너의 온전케 됨과 관계가 없으니 네가 이것들을 연구해도 소용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너와 관계가 있느냐? (하나님을 믿을 때 가는 길이 관계가 있습니다.) 네가 가는 길이 네가 온전케 될 수 있는지 여부와 관계가 있다. 온전케 됨을 추구할 때 마땅히 진입해야 하는 진리는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최고의 진리이며 가장 중요한 진리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본질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추구하는 것이니 너는 이번 생에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추구해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추구하면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가게 된다. 왜 이번 생에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추구해야 하느냐?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추구하는 과정이 바로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왜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하느냐? 바로 패괴 성품은 하나님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네가 사탄의 성품에 따라 산다면 본질이 사탄과 마귀이니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추구하려면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는 매우 필요하다! 너의 패괴 성품이 하루라도 제거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해결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네가 하나님과 대립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니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게 된다. 패괴 성품을 해결한 만큼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으며, 패괴 성품을 해결한 퍼센트만큼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
이번 예배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람은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온전케 됨을 추구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되는 과정 속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추구하는 이 공과가 매우 깊이가 있어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의 실행, 생활, 추구, 그리고 사람이 가는 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주제이다. 패괴 성품 해결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너는 점차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좀 생긴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이 생긴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왜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게 되었느냐? 네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하는 기준과 원칙이 무엇인지, 목적은 무엇을 위해서인지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서로 연관된 것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을 아는 것만 추구한다면, 이는 매우 어렵다. 네가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하나님을 아는 것만 추구합니다. 꽃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새끼 양이 왜 무릎을 꿇고 젖을 먹는 것인지, 소는 왜 무릎을 꿇지 않고 젖을 먹는 것인지, 저는 이런 것들을 연구합니다. 이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럼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연구하면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절대 알 수 없다. 진리는 연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만 진실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연구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만물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며 참으로 기묘하다는 것을 네가 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중시해야 하는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추구하고 패괴 성품을 해결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추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지엽적인 문제를 조금씩 모두 이해하게 되면 실행과 진입의 길이 열린다. 패괴 성품을 철저히 해결할수록 진리를 실행해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더 수월해진다. 일단 패괴 성품의 구속을 받지 않으면, 사람은 진정한 석방과 자유를 얻게 되며, 어떤 진리를 실행해도 전혀 힘이 들지 않고 수월해진다. 이것이 바로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된 것 아니겠느냐?
2017년 10월 1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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