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진리를 얻는 기본적 공과다 (제 2 부)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이 어떤 성과를 거둬야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임한 환경이 하나님의 시련임을 명백히 알면서도 여전히 기꺼이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못하며, 또 하나님을 미덥지 않다고 여기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의지할 용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한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또 어떤 진리를 갖춰야 하느냐? 또 어떻게 구하고, 어느 정도까지 구해야 순결해지고 완전하게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갈 수 있느냐? 이는 순종의 진리와 관련이 있다. 사실 이때의 너는 하나님에 대해 그다지 잘 알지 못하고, 진실한 믿음 또한 있을 리가 없다. 진실한 믿음이 없으면 어떤 이상(異象) 측면의 진리를 갖춰야 네가 하나님에 대한 의혹, 추측, 오해, 반발심이 전혀 없이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어떤 진리를 갖춰야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여 불순물이 없고, 개인의 요구와 선택이 전혀 없을 수 있겠느냐? 이런 것들을 너희가 아직 잘 모르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앞으로 어떻게 추구해야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너는 얼마간의 진리를 갖춰야 한다. 네가 진리를 얻어 생명이 되어야 비로소 너의 분량이 되며, 네가 순종할 수 있는 근거와 기초가 된다. 네가 이런 진리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진리를 갖춰야 하느냐? (하나님을 알고자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이 외에도 사람이 협력하고 실행해야 한다. 너희는 베드로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하나님께서 사람을 장난감처럼 다룬다고 하신들 사람이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나이까?”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는 순종과 관련이 있다. 네가 이렇게 체험하면 천천히 진리를 이해하게 되어 자연히 성과를 이루게 된다. 우선, 너는 하나님과 진리에 순종하는 이런 태도를 지녀야 한다. 우선 하나님이 어떤 눈빛, 태도, 말투로 너를 대하는지, 너를 싫어하는지, 하나님이 너를 드러내려 하는지는 상관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이 베드로가 한 그 말처럼 하기 쉽겠느냐? (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일들을 체험했고 어떤 실제를 갖추었기에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냐?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든 그 모든 것이 구원을 위한 것이며 사랑이라고 완전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장난감으로 여긴다고 하신들”이라고 말했는데, 너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든”이라고 말했다. 너는 자신을 피조물,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여기고 있다. 이 둘은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차이가 있다! 노리갯감과 사람은 무엇이 다르냐? 노리갯감은 바로 아무것도 아니며, 가치 없는 싸구려이다. 짐승이라고 해도 되고, 장난감이라고 해도 되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하냐? 사람은 사상과 두뇌를 가지고 있으며 말을 할 줄 알고 일을 할 수 있다. 또한 정상적인 사람이 하는 일들에 종사할 수 있다. 사람과 노리갯감을 비교하면, 가치와 지위가 다르지 않으냐? 만약 네가 자신을 노리갯감이 아닌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럼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 요구하는 바가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너의 요구는 무엇이냐? (저를 사람으로 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너를 사람으로 대해야 하느냐? 만약 하나님이 사람에 대한 요구를 너에게 말하고 실행하게 한다면, 너는 실행해 낼 수 있느냐?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고 사람에게 준수하라고 한다면, 너는 지킬 수 있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다면, 너는 실행해 낼 수 있느냐? 이런 것들도 네가 해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너를 사람으로 대해야 하느냐? 만약 네가 양심과 이성이 없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너를 사람으로 대해야 하느냐? 만약 사람이 제멋대로 나쁜 짓만 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면, 이런 사람이 인성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여전히 이런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사탄과 마귀를 모두 사람으로 대할 수 있겠느냐? 너를 사람으로 대하는 것과 노리갯감으로 대하는 것, 이 둘은 태도와 대우가 다르다. 너를 사람으로 대하면, 너는 어떤 대우를 요구하겠느냐? 너를 존중해야 한다. 너와 상의하면서 말을 해야 하고, 너의 기분을 배려해야 하고, 너에게 충분한 공간과 자유를 주어 너의 존엄과 체면을 지켜 줘야 한다. 이것이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노리갯감’은 어떤 대우를 받느냐?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이리저리 걷어찹니다.) (필요할 때 한 번 쓰고는 불필요해지면 버려 버립니다.) 매우 적절한 표현이다. 노리갯감을 대할 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럼 사람을 노리갯감처럼 대한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필요할 때는 가져다 쓰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바로 전혀 존중하지 않으며, 그의 권리를 수호할 필요도 없고, 또한 그에게 어떠한 권리도 주지 않는다. 그는 자주권이 없으며, 선택권 또한 없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그와 상의할 필요가 없고, 그의 체면 같은 것들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기분이 좋으면 그에게 좀 잘해 주다가 기분이 나쁘면 그를 걷어차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노리갯감을 대하는 태도이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을 노리갯감으로 대한다면, 사람은 어떤 느낌을 받겠느냐?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이 사랑스럽다고 여기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진리 실제를 갖추었길래 죽기까지 순종하는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었느냐?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노리갯감으로 대하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게 나를 대하신다면, 나는 순종해야 해. 하나님께서 나를 노리갯감으로 대하신다 해도 내가 어찌 달갑게 여기지 않겠어?’라고 생각했다. 베드로는 기꺼이 원할 수 있었는데, 이 ‘기꺼이 원하다’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지배에 따르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순종의 진리이다. 사탄에게 넘기는 것, 이는 노리갯감을 대하는 행동 아니냐? 필요 없으면 바로 버리고 너를 사탄에게 넘겨 사탄이 너를 시험하고 농락하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어떤 태도였느냐? 불평했느냐? 하나님을 원망했느냐? 하나님에게 욕을 했느냐? 사탄에게 빌붙었느냐? (아니요.) 이것이 바로 순종이다. 불평하지 않고, 이러한 소극적이고 반발하는 태도가 없으면 패괴 성품이 해결된 것 아니냐? 이는 완벽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것으로, 배반을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디에 놓으시든, 제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디에 놓으시든, 저는 여전히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설령 저를 멸하시어 재가 되더라도, 그래도 저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저는 사탄에게 빌붙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며 이 정도까지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일정 기간 동안 진리를 갖춰야 한다. 그런 다음 이 일을 간파하고 똑똑히 안 후에 다시 진리를 실행하면 많이 수월해진다. 네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아도, 또한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을 나타내지 않아도 네가 정확한 태도를 지닐 수 있으며 이런 순종을 하게 되니 이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에게 너를 어떻게 대해 달라고 또는 너에게 정확한 기준을 달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설령 이 말이 진리에 부합하고 창조주가 마땅히 갖춰야 하는 것이라 해도 너는 이러한 것들을 요구해서도 안 된다. 네가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셔도 괜찮습니다. 저에게 죽으라고 하셔도, 지옥에 떨어지라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셔도 다 괜찮습니다. 설령 저를 사탄에게 넘기신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저의 하나님이시며, 저는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순종의 실제가 생긴 것이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장난감처럼 다룬다고 하신들 사람이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나이까?”라는 말을 할 수 있었는데, 이 말은 너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순종이다. 네가 만약 자주 이 말을 묵상하여 이 말을 진실로 인식하고 체득한다면, 그럼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하기 훨씬 수월해진다. 사람은 가장 비이성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을 거역한다. 사람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때와 봉사를 별로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고 대들 자격이 없어 그래도 얌전할 수 있지만, 일단 사역과 봉사를 좀 하고 나면 자격이 생겼다고 여겨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려고 하고 축복해 달라고 요구하는데, 이러면 골치 아파진다. 이성이 또 비정상적으로 되었으니 이상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진리 실제가 없으면 바로 이렇게 가련한데 진리를 갖추지 않으면 되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수 없고, 진리를 갖추지 않으면 양심과 이성이 비정상이 된다. 도리를 매우 잘 이해하고 있어 말할 때는 다들 “나는 피조물이니 마땅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해. 그것이 내가 갖춰야 할 이성이야.”라고 한다. 매우 명확하게 말하고 큰 소리로 구호도 외치지만, 일이 임하면 하나님이 배치한 것임을 명백히 알면서도 결국 받아들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다. 이는 어찌 된 일이냐? 사람에게 패역이 있고 사람의 패괴 성품이 해결되지 않아 100% 또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제 사정이다. 충분한 진리를 갖추지 않으면 사람이 사는 게 이렇게 가련하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 이들 역시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아니냐? 왜 그들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냐? 바로 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는 독선적이고 교만합니다. 일이 임하면 늘 반발하고, 이유를 대고, 쓸데없는 일에 집착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반대로, 그가 그것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라는 것, 하나님이 그를 위해 마련한 환경이라는 것, 하나님이 그를 정결케 하려 한다는 것, 하나님이 그가 그 가운데서 진리를 얻게 하려 한다는 것을 믿으면, 설마 그가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냐? 설마 그가 거역과 배반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냐? 설마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냐? 그럴 수 없다. 왜 그럴 수 없느냐? 사람이 이러한 진리 실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의 분량이 지나치게 작아 하나님이 지금은 너희에게 시련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일단 너희에게 시련을 주면, 너희 모두 정체를 드러내 도태됨으로 사탄의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실 아니겠느냐? 지금 너희의 분량이 너무 작아서 도리를 말하고 구호를 외치는 것은 그럭저럭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문제는 매우 명확하게 보지만, 자신이 어떤 내적 상태인지는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 정도의 분량과 이런 내적 상태인데 하나님이 너희에게 시련을 줄 수 있겠느냐? 아직은 너희에게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할 때가 아니다. 너희는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 이는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직면하는 기본적인 공과이자 가장 깊은 공과이다.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 만큼의 분량과 믿음을 갖게 되니 이는 서로 대응하는 것이다. 절대적인 순종에 도달하려면 어떤 진리를 갖춰야 하느냐? 우선, 하나님에게 어떠한 요구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진리 중 하나이다. 이 진리를 너는 어떻게 운용하겠느냐? 네가 하나님에게 요구를 할 때, 이 진리로 자신을 가늠하고 반성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에게 어떤 요구를 갖고 있지? 이런 요구들이 진리에 부합하나? 이성은 있는 건가? 이것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거지? 상상인가, 아니면 사탄이 준 생각인가?’ 사실 모두 아니다. 이것들은 사람의 패괴 성품에서 생겨난 것이다. 너는 이러한 무리한 요구의 배후에 있는 속셈과 욕망이 정상적인 인성의 이성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분석해야 한다. 너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느냐? 네가 만약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저를 노리갯감으로 여긴다고 하신들 제가 어찌 달갑게 여기지 않겠나이까?”라고 말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언제 사람을 노리갯감으로 여겨 사탄에게 넘기셨습니까?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매우 잘해 주시고, 저를 매우 선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기에도 바쁜데 어떻게 사람을 노리갯감으로 삼으시겠어요? 이 말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고,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이 말을 하게 된 것이냐? (다양한 시련을 체험한 후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어 한 말입니다.) 베드로는 너무도 많은 시련과 연단을 겪고 나서 개인의 요구, 타산, 욕망을 전부 다 내려놓았다. 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으며,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갖지 않았고, 자신을 완전히 내놓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저에게 시련을 주셔도, 저를 채찍질하셔도, 저에게 심판과 형벌을 내리셔도, 환경을 일으켜 저를 책망하고 훈계하셔도, 저를 단련하셔도, 저를 사자 굴과 이리 굴에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모두 옳고, 어떻게 하시든 저는 모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모두 진리이니 저는 불평하지 않고 선택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절대적인 순종 아니겠느냐? 때로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모두 진리라고 말하는데, 나는 왜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에서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도 진리에 부합하지 않을 때가 있구나. 하나님도 틀릴 때가 있네. 하지만 어떻게 말하든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니까 순종하자!’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절대적인 순종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선택적인 순종이지 진실한 순종이 아니다. 이 말은 베드로의 사상 관점과 모순된다. 노리갯감이 되면 너에게 이유를 말해 줄 필요도 없고, 합리적일 필요도 없으며, 너를 어떻게 대하든 다 괜찮다. 또한 너와 상의하지도 않고, 너에게 사실을 분명히 말해 주거나 도리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만약 네가 통과된 후에야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이는 노리갯감으로 대하는 것이겠느냐? 이는 너에게 충분한 인권, 자유, 존중을 준 것이며, 또한 너를 노리갯감이 아닌 사람으로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노리갯감이란 무엇이냐? (바로 주도권이 없으며, 권리도 없는 것입니다.) 단지 권리만 없느냐? 너는 이 말을 어디에 적용해야 하느냐? 예를 들어, 네가 한동안 구했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 일이 있거나 네가 하나님을 이십 년 넘게 믿었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깨닫지 못하는 일이 있을 경우, 이런 상황에서 네가 순종해야 하느냐? 이 역시 순종해야 한다. 이 순종의 근거는 무엇이냐? 바로 “하나님께서 저를 노리갯감으로 여긴다고 하신들 제가 어찌 달갑게 여기지 않겠나이까?”라는 베드로의 말이다. 만약 네가 늘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을 가늠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을 가늠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규정하고 대적하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이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겠느냐? 만약 네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받아들이지도 순종하지도 않겠느냐? 이럴 때는 어떻게 진리를 구해야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을 따라야겠느냐? 이는 진리와 관련이 있으니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답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피조물의 위치에 서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이 네게 모습을 감추든 나타내든,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든 없든, 너는 네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 네 본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 실행 측면의 진리도 알아야 한다. 관념을 계속 고집하면서 “나는 이 일이 진리에 부합하고 내 생각에도 맞는다고 확신이 들면 순종할 거야. 만약 판단이 안 된다면, 하나님의 행사라는 확신이 안 선다면 그럴 때는 일단 기다릴 거야. 하나님의 행사라는 것을 확신한 후에 순종할 거라고.”라고 말한다면,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이것은 조건적인 순종에 불과할 뿐, 절대적인 순종도, 완전한 순종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모두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성육신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고, 심판과 형벌도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받아들이고 순종하기 쉽지 않다.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할 수 없는데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피조물의 본분은 무엇이냐? (피조물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그것은 근원을 찾은 것이다. 그러면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겠느냐? 피조물의 자리에 서서 창조주인 너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이는 모든 피조물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네가 많은 진리를 다 깨닫지 못하고 모른다면, 네가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없다면, 그럼 너는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겠느냐? 예를 들어, 네가 어떤 예언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느냐? 너는 그 말들이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안에 진리가 있으며, 비록 네가 깨닫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일부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진리가 아닌 것이냐? 만약 네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어쩌면 하나님 말씀이 아닐지도 몰라. 아마 불순물이 있을지도 몰라.”라고 말한다면,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또 거역하는 것이다. 너는 이성을 갖춰야 한다. 이성이란 무엇이냐? 이성이 있다는 근거는 무엇이냐? 바로 피조물의 자리에서 창조주인 너의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고,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이다. 하나님에게 순종할 때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이해했는지, 하나님이 너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냈는지를 근거로 할 필요가 있느냐?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해야 하느냐? 순종의 진리를 근거로 해야 한다. 순종의 진리란 무엇이냐? (피조물의 자리에서 창조주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종의 진리이다. 그렇다면 또 네가 옳고 그름을 분석할 필요가 있겠느냐? 절대적인 순종을 하는데 하나님이 행한 일의 옳고 그름을 고려할 필요가 있느냐? 하나님이 이 부분의 진리를 분명하고, 명백하고, 확실하게 말해 주어야 네가 순종할 수 있는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든 너는 순종의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데,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떤 사람들은 특히 억지를 부리고 따지는 일이 너무 많아 늘 ‘하나님이 진리 아냐? 하나님이 창조주 아냐? 하나님께서 행한 어떤 일들을 왜 나는 꿰뚫어 보지 못하는 걸까?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내게 명백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는 거지? 명백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실행해? 내가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내 내면에서 통과되지 못하기 때문 아니겠어? 통과되지 못하니까 난 순종할 기운이 안 나!’라고 생각한다. 이는 패역 아니겠느냐? 순종하는 데에 기운이 필요한 것이냐? 필요 없다. 단순한 이성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저는 순종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면 순종하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의 말로 변하지 않으니 저는 그저 순종할 뿐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저의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의 본위에 굳게 서 있는 것이다. 네가 이런 이성이 있고 이러한 진리 실제를 갖추고 있다면, 네가 하나님 눈에 사람은 노리갯감과 개미일 뿐이라고 느낄 때 여전히 괴롭겠느냐? 여전히 열등감을 갖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네가 열등감을 갖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너를 사람으로 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여전히 너의 지위가 있고, 하나님이 너를 높여 주기 때문에 네가 열등감을 갖지 않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너를 높여 주지 않고, 늘 너를 책망하고 징계한다면, 너는 서운해할 것이다. 바로 이 서운해하는 것이 문제이니 해결해야 한다. 많은 경우, 사람이 서운해하는 것은 다 사람 내면의 어려움이 너무 커서 늘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늘 ‘당신께서 저를 사람으로 대해 주셔야 해요. 저를 존중해 주시고, 중시해 주시고, 저를 위해 생각해 주셔야 해요. 저의 나약함을 이해해 주셔야 하고, 저에게 관용을 베푸셔야 해요. 저는 분량이 작고 식견이 없으며 이 사역을 해 본 적이 없어요.’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는 늘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순종은 하나도 없다. 오늘 순종의 진리를 교제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들이 여전히 이유가 될 수 있겠느냐? 어떤 이유도 이유가 될 수 없다. 너의 책임, 의무, 본분은 바로 순종이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