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파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제 5 부)

어떻게 해야 복음 전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먼저, 복음 전파 본분과 관련된 각 항목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예를 들어, 복음 전파 본분에 관한 정의, 지위 설정, 그리고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할 때 실행하고 진입해야 할 진리, 지녀야 할 태도와 겪어야 할 고난, 치러야 할 대가 등의 진리를 모두 깨닫는다면 복음 전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 밖에, 소극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어떤 그릇된 행동 방식을 피해야 하는지, 어떤 것들이 사람의 선의에 속하는지, 사람의 생각과 행동 방식이 과연 복음 전파 원칙에 부합하는지 등을 돌아보아야 한다. 즉, 복음 전파와 관련된 모든 행위와 행동 방식, 원칙, 규정이 정말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분명히 성찰해야 한다. 진리 원칙에 부합할 때만 지속하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버려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해야 성과가 점점 좋아진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반드시 조화롭게 협력해야 한다. 이는 복음 사역에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조화롭게 협력하지 않으면 사역을 전개하기가 무척 힘들어진다. 형제자매 간에는 서로 포용하고 인내하고 붙들어 주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반드시 조화롭게 협력해야 한다.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순종해야지 늘 자신은 옳고 남을 틀렸다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확정하고, 하나님 집에서 규정한 원칙에 근거하여 진리를 교제함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해야 할 것이다. 이 외에도, 협력하여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로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보완하는 법을 배워야지 남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또 한 측면으로는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은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설령 종교인이라고 할지라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매우 연약하며,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이 조금만 있어도 반항하고,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말이 한 마디만 나와도 논쟁을 벌이기 쉽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포용과 인내, 크나큰 사랑이 필요하고, 어느 정도 방식과 방법도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이 선포한, 사람을 구원하는 모든 진리를 전해 주어 하나님의 음성, 창조주의 말씀을 듣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바로 하나님의 현현을 갈망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보고 하나님 음성을 듣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말은 적게 하고 하나님 말씀은 많이 읽어 주며, 읽어 준 후에는 다시 진리를 교제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얼마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가 쉽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이 의무가 누구에게 주어지든 미뤄서는 안 되며, 어떤 핑계나 이유를 대면서 거부해도 안 된다. 혹자는 “저는 말재간이 없고, 성경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데다가 나이도 어립니다. 만에 하나 시험과 위험이 닥치면 어떡합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복음 전파는 위험한 일을 하라고 안배한 것이 아니다. 위험성이 있다면 하나님 집에서도 보내지 않을 것이다. 교회에서 복음 전파자를 안배하는 데는 원칙이 있으며, 위험을 무릅쓰게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조건과 자질, 장점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안배하고, 형제자매가 서로 협력하여 누가 어떤 일을 하는 게 어울리는지 보고 결정하는 것이다. 위험한 요소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위험한 일을 직면하니 말이다. 만약 하나님이 직접 보내는 거라면, 설령 그 앞에 시험과 고통, 혹은 위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너는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째서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겠느냐? (그것은 사람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복음 전파를 자신의 책임이자 본분으로 여기는 것이며,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이다. 이것은 진리이니 사람은 가감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언젠가 네가 다른 본분을 이행하는 게 적합하지 않거나 복음 전파에 사람이 필요해 너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안배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반발심도 품지 말고, 분석하거나 연구하지도 마라. 이는 하나님의 부탁이자 네 책임과 본분이니 골라서는 안 된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이상, 스스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부탁이며, 하나님의 선민은 누구나 거기에 몫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저는 여든이 넘어 문밖으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한테 그런 부탁을 하실까요?”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저는 이제 겨우 18살입니다. 세상을 겪어 본 적이 거의 없고, 사람들을 사귀는 법도 모르는 데다가 담이 작고 겁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제게 그 본분을 주실까요?”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줄 수 있다. 네 나이가 어떻게 되든, 힘닿는 데까지 복음 전파의 본분을 이행하고, 전할 수 있는 만큼 전해야 한다. 또 네가 현재 어떤 본분을 이행하고 있든, 온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온다면 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옳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갖고 있지만 남는 시간을 활용해 복음을 전하면서 성과도 낸다. 이는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일이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는 모든 사람의 책임이니 선택하지도 거부하지도 말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또한,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행동하거나 거부하거나 자신을 위한 어떤 이유, 핑계를 지어내 그 본분을 이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너무 위험한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혹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는데, 만약 지금 네 분량이 미미하고, 다른 사람이 너를 대신해 줄 수 있다면, 또 네가 다른 본분을 이행하는 데 적합하다면 바꿔도 된다. 하지만 네가 꼭 그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다. 거부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몸이 약해 외부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고초를 치르는 걸 견디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는데, 큰 고초를 치르지 못하겠다면 작은 고생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조금의 고생도 하지 못하겠다면 징벌의 큰 고통을 받게 되지 않겠느냐? 살아 있는 한, 숨이 붙어 있는 한 너는 본분을 이행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만약 네가 본분을 거부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며, 피하고 벗어나려 한다면, 이는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가 아니다. 반발하고 경계하는 것 역시 사람이 지녀야 할 태도는 아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준비하고 있어야 하며, 복음 전파를 자신의 의무와 본분으로 여겨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었는데 교회에서는 한 번도 제게 복음을 전하라고 안배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그것은 좋고 나쁨과 상관이 없다. 어쩌면 하나님이 아직 네 복음 전파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네가 다른 본분을 이행하는 게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모두 중요한 본분이라면 어떻게 선택해야겠느냐? 교회의 안배에 순종해야지 개인적인 바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네 복음 전파를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이 “지금 그 본분은 네게 적합하지 않고 중요하지도 않구나. 복음 전파 본분이 더 중요하겠다.”라고 말씀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되, 분석하지도 판단하지도 연구하지도 말고, 나아가 반감을 갖거나 거절해서도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보여야 할 올바른 태도이다. 사람이 이런 태도를 지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봤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이고 적절하다는 것 아니겠느냐?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무엇을 통해 나타나느냐? 하나님이 일을 시켰을 때 네가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하나님이 어떤 일을 부탁했는데, 네가 연구하고 궁리하면서 ‘왜 나한테 시키셨을까? 이게 나한테 도움이 될까?’라고 생각한다면 너와 하나님의 관계는 정상이 아니며, 너는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 일은 큰일이고, 하나님께서 나한테 시키신 일이야.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은 허술하게 처리해선 안 되고 신중히 대해야 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시키시든, 어떤 부탁을 맡기시든 그건 내가 이행해야 할 본분이고, 나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해. 하나님이 어떻게 안배하시든 나는 거부하지 않고 그렇게 할 거야. 내 본분을 지키지 않고 거부한다면,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완수하지도 않는다면 그건 하나님을 배반한 것과 같아.”라고 말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이 지녀야 할 이성이고, 피조물이 본분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이기도 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탁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거부하고, 이유를 대면서 본분을 거절한다면 그 문제의 성질은 심각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을 때는 반드시 피조물의 입장과 지위에 서서 창조주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올바른 태도이다. 본분을 올바른 태도로 대하지 않는다면, 그 문제의 성질은 무척 심각하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돼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네게 진지하게 따져 볼 필요는 없겠지만, 하나님을 몇 년간 믿고 일부 진리를 깨달았는데도 하나님의 부탁을 거절하여 복음을 전하지 않고 대충 건성으로 본분을 이행한다면 이는 어떤 성질의 문제겠느냐? 이는 양심과 이성이 없는 것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짓이며, 또한 하나님을 배반하는 짓이다. 이는 대역무도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자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반드시 징벌받아야 할 것이다. 네가 스스로를 피조물이라고 인정했다면 피조물이 지녀야 할 이성은 무엇이겠느냐? 창조주가 시키는 대로 하고, 창조주가 안배한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지녀야 할 양심과 이성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절대적으로 순종해야지 조금이라도 거역해서는 안 된다.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는 많은 사람에게 적용된다. 아마 모든 사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처음 이 측면의 진리에 관한 교제를 들을 때, 그것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모든 사람이 복음 전파라는 이 본분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며, 이 측면의 진리를 인지하고, 이 본분에 정확한 정의를 내렸을 것이다. 그럼 사람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피조물로 생각합니다.) 너는 피조물이다. 그럼 피조물의 첫 번째 임무는 무엇이냐? (창조주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에게 순종하는 첫 번째 태도는 무엇이냐?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럼 피조물이 첫 번째로 이행해야 할 본분은 무엇이냐? (복음을 전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바로 그 대답을 원했다. 한참을 돌아서 본론으로 왔구나. 모든 피조물의 첫 번째 임무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하고 전파하여 온 세상 땅끝까지 퍼져 나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할 직책이자 의무이다. 어쩌면 지금 너는 그 본분을 이행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 본분이 네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으며, 그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너는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 본분이 너와 관련이 있으며, 그것은 다른 사람의 책임일 뿐만 아니라 네 책임, 네 본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현재 네게 그 본분을 이행하라고 안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너와 무관한 것은 아니며, 네가 그 본분을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네게 그 본분을 맡기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복음 전파라는 본분에 대한 견해가 진리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겠느냐? 이 수준까지 이해한 후, 어느 날 수중의 일을 마쳤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모두 각지로 흩어지라는 명령을 듣는다면, 심지어 가장 낯설고 원치 않는 곳, 열악한 곳으로 가라는 명령을 듣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그 순간이 오면 훌쩍거리며 눈물을 훔칠지도 모른다. 지금 너희는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하고, 인식을 가져야 한다. ‘저는 이번 생에 이 시대에 태어나 복 있게도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경륜 사역에 동참하게 됐습니다. 제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와 의미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 확장을 위해 필생의 에너지를 바치는 데 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너희에게는 이런 의지가 있느냐? (있습니다.) 이런 의지를 갖고, 이런 준비와 계획을 해야만 진정한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다. 혹자는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지금 당장 복음을 전하러 가라고 하신다면 저는 두려울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강요하지 않는다. 설령 준비가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에게 당장 쓰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 언제 쓰임 받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는 일이니 조급해할 것 없다. 하나님이 너를 쓸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예비한 후, 네 분량이나 경력 등 모든 조건이 적절히 갖춰졌을 때, 너를 각지로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때 너를 ‘복음 사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이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을 복음 사자라고 할 수는 없다. 이는 변치 않는 사실이다. 그럼 뭐라고 해야겠느냐? (‘복음 전파자’라고 해야 합니다.) 비교적 정확하다. 어떻게 부르든 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다. 만약 호칭이 달라지고 사람의 신분이 달라진다면 그 사역의 본질도 달라질 것이다. 본질이 변하는 순간, 진리의 궤도를 벗어나게 된다. 또 진리의 궤도에서 벗어나는 순간, 종교적 행위가 되며, 그렇게 되면 사람은 구원받는 길에서 점점 멀어져 완전히 반대로 가게 된다. 그러므로 절대 그릇된 길을 가서는 안 된다. 언제 어느 때라도, 각지로 파견되거나 보내진 복음 전파자는 그저 복음을 전하는 본분을 이행하는 것일 뿐 증인도 전도인도 아니며, 복음 사자는 더더욱 아니다. 이는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다.

많은 사람이 여기까지 듣고 마음이 밝아졌을 것이다. 또 많은 사람이 고무되어 기대감을 품고 ‘잘됐네. 앞길이 밝겠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비해 주신 길은 광명의 길이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안배가 있고, 하나님이 예비한 본분 이행의 환경이 있으며, 사람이 마땅히 누려야 할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비해 놓은 특수한 환경들, 사람이 겪어야 할 수많은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순조롭지 않다. 이 밖에, 만약 네가 스스로 피조물임을 인정한다면, 복음 전파라는 책임을 다하고, 그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고난을 겪으며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그 대가는 육적인 병고나 고난일 수도 있고, 혹은 큰 붉은 용의 박해와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복음 전파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환난일 수도 있는데, 배신당하는 것, 욕먹는 것, 얻어맞는 것, 정죄되는 것일 수도 있다. 심지어는 집단 구타를 당해 생명의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것, 즉 하나님의 사역이 끝나고 하나님의 영광의 날을 보기 전에 복음 전파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준비를 해야 한다. 이는 너희를 겁주는 게 아니라 사실이다. 이 말을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얘기했다. 만약 너희에게 이런 의지가 있고,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충성을 다한다면 이는 분량이 있다는 의미이다. 종교 신앙의 자유와 인권이 존중받는 외국에서 복음을 전하면 어떤 위험도 맞닥뜨리지 않을 거라고, 무슨 일이든 순조롭고 하나님도 축복해 줄 거라고, 하나님의 크나큰 능력과 권병이 사람과 함께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것은 사람의 관념이자 상상이다. 지난날,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을 믿었지만, 결과적으로 성육신한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럼 지금의 교계가 성육신 하나님에게 어떤 나쁜 짓들을 저지를 수 있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모독하는 등 너무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무슨 나쁜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잊지 마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다. 오직 그들에게만 그런 일을 저지를 기회가 있었다. 이방인들은 그런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 그들이 정부와 결탁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또한, 예수의 사도들은 모두 어떻게 죽었더냐? 어떤 자는 돌에 맞아 죽고, 어떤 자는 말에 끌리다가 죽었으며, 어떤 자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고, 어떤 자는 거열형에 처해지는 등 온갖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들이 죽은 이유는 무엇이더냐? 그들이 나쁜 짓을 저질러 법적 제재를 받은 것이냐?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주의 복음을 전파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들을 정죄하고 욕하고 때렸으며, 나아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그렇게 순교했다. 순교한 사람들의 마지막 결말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어떻게 규정했는지 등은 차치하고, 하나만 물어보겠다. 그러니까 그들이 마지막에 이르러 죽음을 맞이한 방식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느냐?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관념으로 본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전파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대가를 치렀고, 또 마지막에는 사탄에게 잔혹한 죽임을 당했으니 관념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런 일이 닥쳤고,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여기에는 구해야 할 어떤 진리가 있느냐?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죽도록 허락했다. 이는 하나님의 저주와 정죄겠느냐, 아니면 안배와 축복이겠느냐? 전부 아니다. 그럼 무엇이겠느냐? 현대인들은 그들의 죽음을 떠올리기만 해도 몹시 가슴 아파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여기까지 말하면 너희는 감정이 이입되어 마음이 불편하고 아프지 않겠느냐?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했으니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 그런데 왜 그런 결말, 그런 말로를 맞이한 걸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그들의 육은 그렇게 죽고 사라져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결말이 그런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이 죽을 때, 세상을 떠날 때 어떤 과정과 방식을 겪었든 그것은 그들의 생명과 그 피조물들의 마지막 결말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이 아니다. 너는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반대로, 그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한 것이다. 그 피조물들은 가장 귀한 생명, 그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이용해 하나님의 행사와 크나큰 능력을 증거함으로써 사탄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옳은 것임을, 예수는 하나님이자 주님이며, 하나님이 입은 육신임을 선고했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에도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는 이 세상에 대한 하나의 심판 아니겠느냐? 그들은 목숨으로 세상에 선고하고 인류에게 증명했다. 예수는 주이자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고, 그가 행한 구속 사역은 전 인류를 살아남게 했다는 것을,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순교한 사람들은 어느 수준까지 본분을 이행했느냐? 궁극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느냐? 이 궁극의 경지를 무엇으로 보여 주었느냐? (목숨을 바침으로써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다. 목숨을 대가로 바쳤다. 사람의 삶에서 가정, 재물, 물질 등은 모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며, 자신과 관계가 있는 것은 오직 생명뿐이다. 생명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이 가장 귀하게 여길 만한 것, 가장 귀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가장 귀한 것을 바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증하고 증거했으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이름과 사역을 부정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을 이용해 이 사실의 존재를 증거했다. 이는 최고 수준의 증거 아니겠느냐? 이는 최고의 본분 이행으로, 책임을 다한 것이다. 사탄이 위협하고 협박해도, 심지어 마지막에 생명을 대가로 바치라고 할 때도 그들은 자신의 책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본분 이행이 궁극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 말이 무슨 의미겠느냐? 너희도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겠느냐?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너의 책임이라는 것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필요로 한다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은 내면에 두려움과 걱정이 있겠지만, 그 걱정이 소용 있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네가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네가 걱정하든, 걱정하지 않든 소용이 없다. 반대로 만약 하나님이 네가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너는 핑계를 대지도 거부하지도 말고, 주동적으로 협력하며 받아들여야지 걱정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어떻게 죽든 사탄 앞에서 죽어서는 안 되며, 사탄의 손안에서 죽어서도 안 된다. 죽더라도 하나님 손안에서 죽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피조물이 마땅히 갖춰야 할 이성이자 태도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 알아야 할 마지막 진리이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사역하여 사람을 구원한다는 이 복음을 목숨 바쳐 전파하고 증거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런 의지를 갖고 이렇게 증거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런 의지를 갖추지 못했다면 최소한 눈앞의 책임과 본분을 다한 후에 나머지는 하나님에게 맡겨라. 아마 시간이 흐르며 나이와 경력이 많아지고 진리에 대해 깨달은 정도가 점점 깊어지면서 너에게는 하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일생을 바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심지어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이 화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이미 확장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날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의 옛 선지자, 성도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니 말세에 태어난 사람들이 복음 전파를 위해 몸 바치는 것은 새로울 것도, 갑작스러울 것도 못 되며, 나아가 지나친 요구라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자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이것은 진리, 그것도 최고의 진리이다. 네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고,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고 얼마나 많이 헌신하고 대가를 치르겠다고 구호만 외쳐 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 사실이 닥쳤을 때, 목숨을 바치라고 할 때, 최후의 순간에 원망할지, 기꺼운 마음을 품을지, 진실로 순종할지 등이 네 분량을 검증하는 것이다. 목숨을 빼앗기는 순간에 마음이 편안하고 달갑다면, 원망 없이 순종한다면, 네 책임과 의무, 본분을 마지막까지 해냈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기쁘고 평안한 채로 그렇게 갈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떠나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공간에서 또 다른 형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방식을 바꿔 살아가는 것일 뿐 정말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하다니 정말 가엾구나!’라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 눈에 그것은 죽음도 아니고, 고난을 겪으러 간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복을 누리러 간 것이고 하나님에게 더 가까워진 것이다. 네가 피조물로서 이행한 본분이 하나님에게 합격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는 네 본분을 마쳤고, 하나님은 네가 피조물의 대열에서 더는 그런 본분을 이행하기를 원치 않는다. 네 ‘떠남’을 하나님은 ‘떠남’이 아닌 ‘거둬 감’이나 ‘이끌고 감’, 또는 ‘데려감’이라고 한다. 이는 좋은 일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데려가기를 원하느냐? (원합니다.) 원하지 마라. 사람이 살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무척 많다. 그러니 너무 급히 그 길을 가지 마라. 그날이 오기 전에 더 많은 진리를 깨닫고, 창조주에 대해 더 많이 인식하여 어떤 아쉬움도 남기지 않도록 노력해라. 어째서 어떤 아쉬움도 남기지 말라고 하겠느냐? 사람이 인생에서 관련된 일을 이해할 때부터 그 기회를 얻고 그 자질과 조건을 갖춰 창조주와 대화하게 되기까지, 창조주에 대해 진실한 이해와 인식, 경외를 품게 되기까지, 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게 되기까지의 세월은 사실 그리 길지 않다. 지금 하나님이 한시바삐 너를 데려갔으면 한다면, 그것은 네 인생에 무책임한 것이다. 책임감을 갖는다면 한시바삐 진리를 갖추는 한편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을 많이 반성하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얼른 보완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며, 진리 실제에 진입해 하나님을 더 많이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할 수 있고 그 삶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한다. 창조주가 어디에 있는지, 창조주의 뜻이 무엇인지, 창조주의 희로애락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더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전부를 깨닫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하나님을 기본적으로 알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과 기본적으로 합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배려하고 하나님에게 기본적인 위안을 줄 수 있고, 피조물이 해야 할 것들,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조금씩 스스로를 인식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은 사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상호 작용이며, 평생 추억할 만한 과정이다. 또한, 그것은 사람에게 고통스럽고 괴로운 과정이 아니라 누림이 있는 과정이다. 그러니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는 모든 나날과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 세월을 짐이나 부담으로 여기지 말고, 소중히 여기면서 그 단계의 삶을 음미하고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진리를 깨닫고, 어느 정도 사람답게 살게 되며, 하나님께 경외심을 품게 되고, 악행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네가 적잖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거나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오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지 않는다고 느낄 것이다. 이 얼마나 좋은 일이냐! 이 수준에 이른다면, 죽어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지금 죽음을 원하는 자들은 어떤 것이겠느냐? 도피하려는 것이고, 고난을 치르지 않으려는 것이며, 대충 생을 마감한 후 하나님께 가서 도착 보고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께 도착 보고를 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너를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부르기 전에 왜 도착 보고를 하려는 것이냐? 미리 도착 보고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네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 낸 후 하나님이 너를 데려간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오늘 이야기한 내용을 모두 이해했느냐? 이런 말이 너희에게 새로운 부담을 안겨 주지 않았기를 바란다. 또 오늘 교제한 이런 내용이 겁을 준 게 아니라 너희가 깨달아야 할 일부 진리를 깨닫게 했기를,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더 확신이 생기고, 더 든든하고 명확해졌기를 바란다. 이런 성과를 얻었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말해 보아라. (여태까지는 복음 전파를 진정한 본분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내면에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이 많이 있었지요. 다른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면 복음을 전하러 가도록 안배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복음 전파가 가장 안 좋은 본분인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 전파를 진정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기신 부탁으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사람의 책임이니 거부하지 말고 행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자 그제야 제 관점이 너무도 그릇되었으며, 그로 인해 복음 전파라는 본분을 진정으로 잘 이행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제를 들으면서 제 관점을 바로잡았습니다.) 훌륭하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해 보겠느냐? (저는 여태까지 제가 보잘것없는 피조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행하는 본분을 중요한 일이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오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예정하신 모든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은 다 당신이 정해 놓으신 것이며, 심혈을 기울여 계획하고 안배하신 거라고, 만약 사람이 본분에 충성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피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맡기신 부탁이자 피조물의 직책이라는 교제를 들으면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이 길을 가겠다는 크나큰 믿음과 의지가 생겼습니다. 제 인생에 책임을 지고, 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며, 제 사명을 완수하여 하나님께 어느 정도 위안을 드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마음속에 더없는 감동을 받았고, 더 이상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부탁을 그렇게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훌륭하구나. 모두 공감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흐리멍덩하다. 복음 전파 같은 큰일을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분명히 교제하면, 그 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며, 자신이 살아가는 가치를 알게 된다. 이러면 방향을 갖게 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다. 진리 외에 어떤 이론이 네 마음을 흔들고 네 관점을 바꿀 수 있겠느냐? 없다. 오직 진리의 도만이 네 관점을 바꿔 놓을 수 있다. 진리의 도가 왜 네 관점을 바꿀 수 있겠느냐? 이런 진리는 무척 실제적이라서 아무도 반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는 사람의 생명이나 평생의 사명과 관계가 있다. 사람과 무관하거나 별로 상관이 없는 게 아니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진리는 평생의 사명과 관계가 있으며,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나 의미와도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런 내용을 분명히 교제하면 사람의 마음이 바뀔 수 있고, 사람이 받아들여 관점을 바꿀 수도 있다. 오늘의 교제는 본분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에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가 사람의 인생, 삶과 추구 방향을 바꿔 놓을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럼 오늘 이런 말을 한 것도 헛수고가 아닐 테니 말이다. 이런 진리를 교제한 후 실생활 속에서 조금씩 적용하고 체험하고 소화하여 그런 진리들이 네 실제가 되고 생명이 된다면 피조물이라는 네 호칭은 하나님에게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진정으로 얻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정말 네게 생명을 바치라고 하고, 네 목숨으로 하나님의 행사와 복음을 증거하라고 하면 너는 걱정도 두려움도 없을 것이고, 거부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너는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창조주가 너에게 맡긴 부탁이므로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사람은 그날을 기다리고 맞이하기 위해 이런 진리를 듣고 깨닫는 것 외에도 하나님 말씀을 많이 갖추고,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을 더 많이, 더 깊게 인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18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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