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파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제 4 부)

어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을 오랜 세월 믿었는데도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이냐? 이는 사람의 본성 본질에 의해 결정된다. 악인,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당연히 적그리스도의 길을 택하게 된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똑같이 하나님 말씀을 읽으며 똑같이 설교를 듣는데, 왜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택하고, 어떤 사람들은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고 복받기를 추구하는 길을 택하느냐? 객관적인 환경은 다 비슷하다. 다만 인성과 품성이 다르고 개인적인 기호가 다르기에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이 말세에 그토록 많은 말씀을 했고, 그 말씀이 선포된 지도 어언 30년이 되어 가는데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가 하나님의 양이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양이 아닌 자는 사람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진리를 사랑하지도 추구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무엇에 집중하겠느냐? 무엇을 추구하겠느냐?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위와 복을 추구하는 마음이 매우 강하며,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목을 빳빳이 세우고 명리와 지위를 추구한다. 자신을 잘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늘 공로를 비교하고 가는 곳마다 자기 밑천을 뽐낸다. 이런 행위, 행동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바울이 그렇게 죽음을 자초했다. 사람이 오랫동안 설교를 들었는데도 바울처럼 회개할 줄 모르고 진리를 전혀 깨닫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면, 이는 죽음을 자초하는 것 아니겠느냐? 처음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사람의 일부 행위와 행동은 개인의 뜻에서 비롯되고, 불순물이 섞여 있고, 어쩌면 거래 심리나 개인적인 속셈, 욕망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것들을 보지 않는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이 사람에게 분명히 전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패괴와 불순물, 연약함이 있어도 허용하고, 사람이 거래를 해도 허용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느 정도 많은 말씀을 한 후에도 기어이 네가 지키고 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부정하고, 심지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하고,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한다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하겠느냐? 이런 일을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다며 너를 불신파라고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진리이자 사람이 구원받기 위한 길이라는 것도 믿지 않는다. 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의 모습과 표출에서 그가 걷는 길이 진리 추구의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가 걷는 길은 어떤 길이냐? 자신의 밑천과 공로에 기대 하나님에게 상을 요구하는 것인데, 걷는 것은 바로 바울의 길이다. 바울을 어떻게 해부하든, 그는 스스로에게 대입하지 않으며, 뉘우치고 회개하지도 않고, 자신을 인식하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한 모든 일이 옳고 진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선포하든, 이런 부류를 어떻게 해부하고 정죄하든 그는 전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관점과 복받으려는 속셈, 하나님과 거래하는 행동이 흔들리거나 변하는 일도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하나님 음성을 듣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그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당신은 당신 마음대로 말씀하십시오. 저는 제 생각대로 행동할 테니까요. 당신은 당신이고 저는 저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행사하시든, 당신의 뜻이 무엇이든 그게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그건 제 생사와 무관합니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불신파입니다.) 그가 믿는 것은 누구냐? 그가 믿는 것은 그 자신이다. 이런 부류가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역겨우며, 멸망해야 마땅하다. 이런 자는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자기 밑천에 기대고, 경험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며, 하나님께 공을 내세워 상을 요구한다면, 곤란해질 것이다.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그들의 결말을 정의한다면 ‘죽음을 자초한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앞으로 이런 부류를 만났을 때, 죽음을 자초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 적절하겠느냐? 그가 그래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하지 마라. 그를 일깨우고 경고해 주며, 말을 돌려서 이끌면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어라. 하지만 그 사람의 본질과 성품이 정말 바울과 똑같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가 죽음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사실을 알려 주지는 말고 계속 봉사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라. 이것이 바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게 적절하지 않겠느냐? (적절합니다.) 사탄이 봉사하도록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다. 만약 네가 이렇게 형제자매를 대한다면 그것은 악행이니 하나님은 혐오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게 한다면 이는 사탄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고, 지혜로운 것이다. 큰 붉은 용, 사탄, 마귀가 하나님의 선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보느냐? 이는 하나님의 지혜이니 정죄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진리이다. 사탄이라는 놈은 이용해야 한다.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일부 사역을 제대로 해낼 수 없고, 성과를 내기도 힘들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 구원받는 길을 걷는 사람도 힘쓰는 단계를 거치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혜로 네가 봉사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네가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이다.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많은 일을 할 때 원칙 없이 자기 뜻대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봤을 때 너는 힘쓰기를 원치 않지만, 객관적 사실로 볼 때는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힘을 써서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과 진리를 깨달아야 점차 진리 추구 단계로 넘어가 진실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 뜻에 부합하여 구원받는 길을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힘쓰는 것은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게 하는 것과는 완전히 성질이 다르다.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 봉사하게 할 뿐 사탄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반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힘쓰는 자가 진리를 추구한다면 그는 바로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다. 일부 힘쓰는 자의 경우, 그가 쓸모 있다면 그를 이용해서 봉사하게 하지만, 만약 그가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엄하게 경고하고,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단번에 차 버리고 출교해야 한다. 이렇게 대해야 한다. 그가 평소에 성실히 힘을 쓰고 사역을 교란하지 않는다면 계속 힘쓰게 해야 한다. 어쩌면 언젠가 진리를 깨닫고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는 좋은 일이니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으냐? 사람을 미리 정죄하지 마라. 어떤 사람들이 정죄받는 원인이 무엇이냐? 바로 교란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본분을 열심히 이행하지 않고, 본성 본질이 바울과 똑같아서 죽어도 회개하지 못한다. 이런 자는 죽음을 자초하는 인간이 분명하다. 이런 부류는 교회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존재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들에게 실상을 알게 하는 것이 좋은 일이겠느냐? 이들이 실상을 알게 될 것이 두려우냐? (두렵지 않습니다.) 그가 만약 스스로에게 대입하여 회개한다면 이는 좋은 일이니 기회를 주어야지 단번에 내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가 실상을 알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나오면서 계속 교란한다면, 이는 정말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다. 그 스스로 옳은 길을 가지 않으니, 이때는 사정 봐줄 필요 없다. 이런 부류는 제명하고 도태시켜야 한다.

복음 전파의 실행 원칙과 관련된 부분은 기본적으로 이러하다. 복음을 전할 때는 책임을 다하고, 반드시 모든 복음 대상자를 진지하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최대한 구원하려 하니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참도를 구하고 알아보려는 사람은 누구라도 쉽게 놓쳐서는 안 된다. 또한, 복음을 전할 때는 반드시 원칙을 파악해야 한다.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들의 종교적인 배경, 자질 고하, 인품 등 여러 측면을 관찰하고 알아보고 파악해야 한다. 진리를 갈망하는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면, 이는 하나님이 예정한 사람이니 온 힘을 다해 진리를 교제하여 그를 얻어야 할 것이다. 인성이 좋지 않고 인품이 너무 나쁘며 갈망하는 척하고 늘 변명을 늘어놓거나 관념을 끌어안고 내려놓지 않는 경우라면, 그 사람을 한쪽에 내버려두고 포기해야 한다.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 중에 이해 능력이 있고 자질도 무척 좋지만 지나치게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종교 관념을 고수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랑으로 인내심 있게 진리를 교제해 해결해 주어야 한다. 만일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포기해도 된다. 그러면 우리도 모든 성의를 다한 것이다. 요컨대,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참도를 알아보고자 하고 진리를 구하는 한, 최선을 다해 그에게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 주고 진리도 많이 교제해 주며 하나님의 사역을 증거해야 한다. 또 그의 관념이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를 얻기 위해 노력하며 그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복음 전파 원칙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를 얻을 수 있겠느냐? 만약 이야기 나누는 과정에서 그 사람이 자질도 괜찮고, 인성도 좋은 사람인 게 확실하게 판단되면 반드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네 책임을 다해야 한다.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고 방식과 방법도 있어야 한다. 어떤 방식과 방법을 사용하든 그건 모두 그를 얻기 위한 것이다. 요컨대, 그를 얻기 위해 책임을 다하고, 사랑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하여 네가 깨달은 진리를 전부 교제해 주고, 네가 해야 할 일을 다해야 한다. 설령 그를 얻지 못해도 너는 전혀 거리낄 게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성의를 다한 것이다. 네가 진리를 명확하게 교제하지도 않고, 상대가 관념을 죽어도 내려놓지 않는다고 네가 인내심을 잃고 스스로 그 사람을 포기한다면, 그건 직무 유기에 해당한다. 너에게 그건 과오이자 오점이다. “오점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정죄하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그 사람이 고의적으로, 일관되게 그렇게 했는지를 봐야 한다. 이따금 과오를 저지른 것이라면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회개하면 된다. 하지만 알면서도 일부러 과오를 저지르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정죄될 것이다. 참도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일부러 죄를 저지르는 것인데 정죄되지 않을 리가 있겠느냐? 진리 원칙에 따르면 이것은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것이고, 최소한 네 책임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네 잘못을 평가할 것이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정죄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실수를 줄이거나 피하려면 온 힘을 쏟아 책임을 다해야 하고,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의 모든 문제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해결해 주어야 한다. 특히 중요한 문제는 절대 질질 끌거나 미루어서는 안 된다. 만약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이 같은 질문을 반복적으로 한다면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귀찮아하지 말고 대답해 주되, 그가 이해해서 더는 물어보지 않을 때까지 어떻게든 문제를 분명하게 교제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네 책임을 다한 것이고, 마음속으로 죄책감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일에서 하나님께 죄책감이 없을 것이다. 그 본분, 그 책임은 하나님이 네게 맡긴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하나님을 향해 하고, 무엇이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따라 한다면 그런 실행은 진리와 하나님의 요구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그러면 네 언행으로 상대가 도움을 얻을 것이고, 찬성하며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 네 말에 빛 비춤과 실제적인 것이 있으며 또 분명하게 말한다면, 논쟁이나 의견 충돌을 피할 수 있을 것이며, 동시에 상대가 진리를 깨닫고 도움을 얻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네 말이 모호하고 애매하며 분명하게 진리를 교제하지 못하고 빛 비춤도 실제적인 것도 없다면, 상대의 관념이나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커녕 상대가 약점을 잡고 너를 판단하거나 정죄하기 쉽다. 그러면 그 문제는 더욱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 말씀을 몇 단락 더 교제해야 상대가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는 지혜롭게 말해야 하고, 진리도 분명히 교제해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해결함으로써 상대가 감탄하고 진심으로 승복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성과를 내기 쉽고, 상대가 순조롭게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이는 복음 확장에 도움이 된다.

복음 전파의 실행 원칙과 관련하여 한 가지 측면이 더 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반드시 바르고 단정해야 하며, 언행이 성도의 품위에 부합해야 한다. 또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자제하고, 행동을 신중히 해야 한다. 어떤 복음 대상자는 낯선 이가 방해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럼 어떻게 그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느냐? 혹자는 복음을 전하면서 하루에 세 번씩 전화를 하고, 상대가 퇴근하기만 하면 바로 그의 집으로 달려가며, 얼굴을 보자마자 하나님 말씀을 읽어 준다. 상대가 얼마나 바쁜지 신경 쓰지 않고 적절한 때를 고르지도 않는데, 이렇게 하면 상대를 성가시게 하기 쉽다. 또 혹자는 너무 어리석어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은 정말 사악합니다. 그러니 직장을 그만두고 일하러 나가지 마세요. 지금이 어떤 시기입니까? 대재난이 곧 닥칠 테니 얼른 하나님을 믿으셔야죠!” 이런 식의 복음 전파가 적절하겠느냐?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상대는 이방인이고, 아직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 밖에, 복음 대상자의 사생활이나 개인의 관점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복음 대상자에게 “보세요,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이방인의 옷을 입지 않습니다.”라든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런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어떠어떠한 것을 먹어야죠.”라고 말하는데, 이는 쓸데없는 참견 아니겠느냐? 이런 것을 가리켜 어리석다고 한다. 한순간의 적절치 않은 언행 때문에 네가 이번에 복음 전파를 위해 치른 대가가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니 항상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며, 자기 행동을 제약하고 규범화하고 단속해야 한다. 단속이란 무엇이냐? 일을 할 때 규율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말을 하는 게 적절한지, 복음 대상자가 어떤 말을 듣고자 하는지 파악하여 상대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이야기를 하거나 그런 행동을 하지 마라. 또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일은 묻지도, 나아가 간섭하지도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상대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네가 “아들이 둘이나 있다니 좋네요. 딸 하나만 더 있으면 참 좋겠어요.”라고 말했다고 해 보자.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어떤 복음 대상자는 영어를 할 줄 아는데, 그에게 “영어 실력이 정말 좋으시네요. 당신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 집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없거든요.”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적절하겠느냐? 사람은 모두 다르다. 어쩌면 그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너보다 더 적극적이고 열정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직 하나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니 절대 상대를 곤혹스럽게 하거나 상대의 삶을 간섭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또 이런 상황도 있다.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고 일부 진리를 깨달으면 자기가 평범한 범인, 속인들보다 고귀하다고 생각하면서 이방인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참도를 알아보려는 사람들을 봐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 ‘당신들은 말이야,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눈멀고 어리석으며 무지한 자들이야. 죽어 마땅한 존재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내가 오늘 당신에게 복음을 전하는 건 이게 본분이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을 상대도 안 했을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어떤 태도냐? 너는 그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였을 뿐 다른 사람보다 고귀하지 않다. 설령 네가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해도 패괴된 인류 중 한 명 아니겠느냐? 네가 다른 사람보다 무엇이 대단하냐?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을 무시하지 마라. 네가 그에게 복음을 전해 준다고 할지라도 너는 그보다 고귀하거나 고상하지 않다. 너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패괴된 인류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이를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세상 사람들을 구제한다거나 중생을 제도한다는 시선으로 다른 이를 보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당신들은 정말 불쌍해. 나는 매일 당신들 같은 사람을 위해 속을 끓인다니까.’라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왜 속을 끓이느냐? 너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으면서 다른 사람 때문에 속을 끓인다면, 이는 가식 아니겠느냐? 남을 기만하는 것 아니겠느냐? 외식하지 마라. 사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새 사역을 받아들인 지 20년, 30년이 지났을지라도 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 매일 하나님과 같이 생활하며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한다고 해도 너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본분을 이행하는 것으로, 이는 너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몇 사람을 얻든, 너는 언제까지나 너이며 다른 사람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너는 여전히 패괴된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설령 네가 수많은 사람을 얻었다고 할지라도 거만하게 굴거나 나아가 오만 방자하게 굴어서도 안 되며, 경험이 많다고 거들먹거리면서 스스로를 뽐내서도 안 된다. “저는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숱한 경험과 교훈을 종합했습니다.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든 한눈에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아볼 수 있죠.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게 쉬울지 어려울지, 사람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 저는 다 감이 옵니다. 전도 가능한 사람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그를 얻을 수 있을지 역시 방법이 있고요.”라고 말한다. 복음 전파의 경험이 있다고는 하나 네 생명 진입은 여전히 무척 얕은 상태이다. 또 약간의 생명 체험이 있고 변화를 얻었다고는 하나 너는 때때로 허풍을 떨며 스스로를 뽐낸다. 이것이 문제 아니겠느냐? 은사가 있는 사람은 누구보다 쉽게 큰소리를 치며, 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복음 대상자를 훈계하려 들고,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숭배하기를 바란다. 이는 성품의 문제 아니겠느냐? 행위의 변화만 있고 성품 변화가 없는데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겠느냐? 성품 변화의 간증이 없이 복음 진리만을 통해 하나님을 증거한다면 이런 자가 하나님이 쓰기에 합당하겠느냐? 상대가 참도를 받아들여 생명 진입의 진리와 실행 측면의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데, 네게 실제적인 체험이 없어서 어떻게 체험 간증을 말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는 결함 아니겠느냐? 언제나 도리를 늘어놓아 사람들에게 앙망과 우러름을 받는 데만 집중하고 높은 자리에 서려고 한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이는 자신을 증거하는 것으로, 패괴 성품에 속한다. 심판과 형벌을 체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품 변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 어떤 복음 전파자들이 체험 간증을 말하면, 그것을 들은 상대는 큰 도움과 감동을 받으며 마음속으로 탄복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어떤 복음 대상자도 무시하지 않으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고, 정상적으로 지내며 친구가 될 수 있으니 확실히 정상 인성의 이성이 있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이룬 것이겠느냐? 이는 그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수확을 얻었고, 최소한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달았으며, 자신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생명 성품에 변화가 생겨 더는 교만하게 굴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을 보고 ‘예전에 나도 저랬지. 저들을 무시해선 안 돼. 나라고 뭐 특별한 것도 없잖아.’라고 생각하며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자신의 본성을 인식한 후에 복음 대상자가 드러내는 무지와 어리석음, 혹은 연약함을 보면 무척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남을 비웃지 말고, 누구를 보더라도 보잘것없는 중생이라는 생각, 태도를 갖지 마라. 이런 태도를 갖는다면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고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많은 사람을 볼 때 마음속에서 이런 패괴된 내적 상태가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지 20년이 됐고, 복음 전파도 10년이나 했다고 해 보자. 복음 대상자들 사이에 있을 때, 그들은 늘 네가 자신들보다 대단하다고 여기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20년이나 믿었는데, 저희는 이제 막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분량도 보잘것없고요. 이렇게 비교하니 당신과 저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이네요. 당신은 어른이고, 저희는 갓 태어난 아기죠.” 그들이 이렇게 비교하면 너는 어떻게 생각해야겠느냐? ‘내가 저들보다 일찍 복음을 받아들였고, 하나님을 믿은 기간도 저들보다 길지만, 생명 진입이나 진리에 있어서는 아직 멀었어. 아직 하나님의 진정한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나는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길에서 아직 멀리 떨어져 있어.’라고 생각해야 한다. 너는 마음속으로 네 실상을 알고 있다. 상대가 아무리 너를 우러러보고 앙망해도 너는 어떤 느낌이겠느냐? “저는 평범한 사람이니 저를 앙망하지 마십시오.”라며 반감을 가질 것이고, 즐겁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마음속으로 네가 아무것도 아니며,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저 글귀와 도리만 좀 말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리석어 다른 이를 앙망하기를 좋아한다. 만약 네가 앙망받는 기분을 좋아하고 그 가운데서 즐거워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만약 네가 그것을 싫어하고 그런 장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너를 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고, 올바른 내적 상태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너는 쉽게 잘못을 저지르거나 일을 그르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한 이런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자주 직면하는 일들이다. 먼저, 소극적인 측면에서 너희는 부적절한 말이나 방식, 행위, 그리고 성품 면에서 표출하는 부적절하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피해야 한다. 이 밖에, 적극적인 측면에서 너희는 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본분에 충성을 다하고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를 보여 본분 이행에 합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조금씩 진리와 원칙을 구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자신이 이행하는 모든 본분을 끝까지 견지하고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네가 이행한 어떤 측면의 본분이든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께 기억되며, 취할 만한 부분과 합격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 또 복음을 전하는 동안 너는 과오와 실수를 점차 줄이고, 본분을 이행할 때 거래하고 공치사를 하려는 내적 상태와 욕망, 야심도 줄여 나가도록 노력하는 한편,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그 책임을 절대적으로 이행하고, 본분을 자기 본직 일로 여기고자 추구해야 한다. 이 밖에도, 네가 이행한 그 본분을 몇 년 후에 돌아본다 해도 한 점 부끄러움 없도록 노력해야 한다. 즉, 죄책감을 갖는 일을 점점 줄여 나가야지 변화가 전혀 없어서는 안 된다. 복음 대상자에게 복음을 전할 때, 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면 마음이 괴롭고 죄책감이 들 것이며, 사전 준비가 부족했다고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 복음을 전할 때도 똑같은 내적 상태로 변화가 없다면, 그 기간에 너는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이 측면의 진리를 실행하지도 얻지도 못했으며, 내가 교제한 것들이 너에게는 항상 도리에 불과했다는 의미이다. 만약 네 과오와 실수가 점점 줄어들며, 죄책감을 느끼고 참소받는 것들 또한 점점 줄어든다면, 이는 어떤 의미겠느냐? 네 본분 이행의 순수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책임감이 점점 강해진다는 의미이다. 이는 네가 이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면서 점점 더 충성심이 생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복음을 전할 때 진리를 교제하거나 성경 장절을 얘기하지 않고 사람의 방법에만 의지했다면,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적절하며, 그것은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인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고, 어느 정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느낌을 받았느냐? 어쩌면 지금은 그런 느낌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각 측면의 진리를 더 많이 갖추고 어느 정도 분량이 생기면 더 정확하고 실제적인 태도와 시선으로 과거의 네 행동을 바라볼 것이다. 이는 네 내적 상태가 정상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지금 너는 예전의 그런 행동 방식에 대해 아무 느낌이 없고, 경멸하지도 않으며, 올바른 관점을 갖거나 올바른 평가를 내리지도 못하고 뜨뜻미지근하고 무감각하다면, 이는 무척 골치 아픈 일 아니겠느냐? 이는 네가 마음속으로 이러한 측면과 관련된 진리를 전혀 갖추지 못했으며, 심지어는 사람의 갖가지 악행이나 간계,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 방식에 대해 무감각한 태도를 보이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 심지어는 그것들과 한패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네 내면은 어떤 상태겠느냐? 너는 불의한 것들, 죄와 관련된 것들, 진리와 부합하지 않고 어긋나는 것들을 좋아하니 문제가 심각하다. 계속 이런 행동 방식으로 실행해 나간다면 무척 심각한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어떤 결과겠느냐? 네 악행을 쌓아 갈 뿐만 아니라 구원받는 길에서 점점 멀어진다. 어째서 점점 멀어진다고 하겠느냐? 너는 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구하지 않고, 일 처리를 할 때도 원칙 없이 네 뜻대로, 네 기호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네가 본분을 이행하는 목적은 진리에 진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임무를 완수한 후 보고하기 위해서이다. 네가 준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네가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의 부탁이 아니다. 그것은 성질이 다르다. 그러므로 네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걷는 길은 구원을 향한 길이 아니라 힘쓰는 길이며, 바울이 하나님과 거래한 그런 길이다. 그러면 네 모든 행동은 언젠가 하나님에게 바울과 똑같은 결말로 규정될 것이다. 이런 결과가 초래되지 않겠느냐?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 반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네 방식과 방법이 모두 실용적이고, 네 출발점과 마음가짐이 모두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면, 또 네 일 처리 원칙과 걷는 길이 전부 하나님의 요구를 따르는 것이고 진리에 완벽히 부합한 것이라면, 이런 실행은 어떤 성과를 가져오겠느냐? 너는 점점 더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고, 일 처리에 원칙이 생길 것이며, 생명도 갈수록 성장할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충성심 역시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러면 구원받는 길에 오른 것이다. 이와 동시에, 너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조금씩 네 패역과 패괴, 각종 패괴 성품을 성찰한 후 이러한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갈수록 자제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순종하는 마음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 후 책임감은 점점 더 커지고, 네 충성심의 순수도는 점점 더 올라갈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또한 깊어질 것이다. 이와 함께, 각 진리 실제의 측면에 대해서도 갈수록 체험과 인식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 네가 걷는 길은 바울의 길과 완전히 상반되는, 베드로가 진리를 추구한 길, 구원받는 길이 된다. 그럼 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얻을지 너 자신도 체험할 수 있을 것이고, 하나님도 너를 칭찬할 것이며, 네 마음속에는 더 큰 평안과 기쁨이 생겨날 것이다. 네가 행동하고 드러내고 보여 주는 과정에서 아무리 우여곡절을 겪었어도, 시행착오를 겪거나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고 심지어는 실패하고 쓰러졌어도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걸어온 길은 전반적으로 구원받는 길이다. 그럼 하나님은 네 결말을 어떻게 정하겠느냐? 하나님은 성급하게 네 결말을 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차근차근 타이르며 너를 붙들어 주고 도와주고 인도하여 구원받는 길에 오르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여 마지막에 온전케 되게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너는 완벽히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점에 근거한다면,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것 또한 구원받는 길에 오를 기회와 가능성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기회가 있는 것이고, 완벽하게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단, 그것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지에 달려 있다.

오늘은 주로 복음 전파의 본분 이행과 관련된 각 항목의 진리에 대해 교제하였다. 그럼 다시 처음에 교제하던 화제로 돌아가 보자.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을 어떻게 불러야겠느냐?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렇다. 증인이라거나 전도자라고 불러서는 안 되며, 복음 사자라고 불러서는 더더욱 안 된다. 결국, 그들은 복음 전파자이다. 그러니 절대 스스로를 증인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사람은 뭔가를 증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만 않아도 훌륭하다. 전도자라고 부르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그 호칭과는 더 거리가 있으니 말이다. 네가 전하는 것은 ‘도’가 아니며, 네가 전하는 말은 ‘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자에 대한 호칭을 정하면, 이 본분에 대한 정의가 정확해진다고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본분을 이행하는 인원은 절대 증인, 전도자가 아니다. 그런 것과는 차이가 너무 크다. 만약 증인, 전도자라고 부른다면 사람은 자신을 남보다 더 높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사람은 과시하고 거들먹거리기가 쉬울 것이다. 과시하고 거들먹거리는 것이 좋은 일이냐, 아니면 나쁜 일이냐? (나쁜 일입니다.) 네가 그를 추켜세우거나 높여 주지 않아도 그는 항상 거들먹거리려고 하는데, 만약 네가 그를 추어올리면서 증인, 전도자, 또는 복음 사자라고 부른다면 의기양양해진 그는 어떻게 되겠느냐? 어깨가 올라갈 것이다. 이제 복음 전파의 본분과 관련된 각 항목의 진리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느냐? (네.) 복음 전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려면 반드시 많은 진리를 갖추어야 한다. 혹자는 “저는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진리를 갖출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라고 말하고, 또 혹자는 “저는 아직 언제 복음을 전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복음을 전해 본 경험이 없고, 말도 잘 못하는데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는데, 복음을 전하지 못한대도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는 갖출 수 있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다가가는 연습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이런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이 본분을 잘 이행하고 싶고 하나님과 협력하고 싶다면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 이상(異象) 측면 및 실행 측면의 진리를 갖추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진리를 갖추는 것은 하나님의 선민이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다. 이러한 진리는 누가 갖추든 쓸데없지 않고, 복음 전파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진리를 깨달으면 어떤 도움이 되겠느냐? 사람에게 어떤 복을 가져다주겠느냐? 어쩌면 사람은 누구나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이 부단히 깊이를 더하고,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부단히 체험하며 진리에 대한 인식이 계속 깊어지고,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갈수록 친밀해지며, 사람과 하나님의 교류 역시 갈수록 빈번해짐에 따라, 사람은 조금씩 이런 이상 측면의 진리와 하나님 사역 측면의 진리를 하나님의 행사, 그리고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에 대조해 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대조해 보는 과정이 곧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이다. 네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꽤 되는데도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현현 사역을 하는지 등을 모른다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게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했는데 결국 하나님에 대해 하나도 이해하는 바가 없다면, 헛되이 믿은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마귀가 퍼뜨리는, 하나님에 대한 헛소문을 듣는다면 너는 믿겠느냐? (믿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믿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네가 정말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느 날 그런 헛소문을 들었을 때 의심을 품고 마음속으로 ‘설마 저 말이 진짜일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까?’라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할 것이며, 본분도 이행하고 싶지 않아질 것이다. 또 헛소문에 영향을 받아 앞에 놓인 길이 한없이 어두컴컴하다고 느끼며 미망에 빠질 것이다. 사람이 늘 미망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정말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모르기에 늘 미망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미망은 어떤 상태에서 생겨나겠느냐? 모순적으로 보이는 수많은 것들이 사람을 곤혹스럽게 하고, 방향감을 잃게 하며,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해 미망에 빠지는 것이다. 너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을 정확히 이해하고 분별하며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느냐? 이는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이해, 진리를 갖춘 정도와 관련이 있다. 늘 미망에 빠지는 사람은 어째서 그렇겠느냐? 실제로 정말 눈앞의 길이 흐릿해 보이기 때문이겠느냐? 사람이 늘 미망에 빠지는 것이 정말 눈이 멀었기 때문이겠느냐? 그렇지 않다. 마음의 눈이 멀어서이다. 즉, 진리와 하나님,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판단이 무감각해진 것이다. 어째서 무감각하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행사와 성품을 인식하지 못하며, 모든 일에 대한 정확한 판단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일을 판단하고 규정하든 기준이 없고 모호하다. 또 어떤 일을 바라보든 명확하지 않고 불분명하며,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꿰뚫어 보지 못한다. 이것을 무감각하다고 한다. 무감각함은 사람을 눈멀게 하고, 눈먼 사람은 늘 미망에 빠진다.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럼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설교를 듣고도 왜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떤 일도 파악하지 못한 채 제멋대로 규례에 맞추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눈멀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완전히 눈멀었다고 할 수는 없어도 반쯤은 눈이 먼 것이다. 사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어떤 일도 꿰뚫어 볼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고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든, 계속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는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또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지 여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대다수의 사람은 여러 해 동안 설교를 들으면 결국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게 된다. 너희도 적잖은 진리를 깨달았지만 적절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 몇몇 진리는 적용하지 못했기에 자신이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생각할 뿐이다. 정말 체험의 시간이 다가와서 선택을 하거나 진지하게 따져 봐야 한다면, 이 측면의 진리가 점차 명확해질 것이다. 지금은 네 인상 속에 공허한 큰 틀의 것, 도리적인 것들로 남아 있겠지만, 체험과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많은 진리가 네 내면에서 점차 실제적, 현실적이 될 것이고, 너로 하여금 진리의 본질적인 면을 깨닫게 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게 되고, 민감하게 문제를 바라보게 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설교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인성과 패괴 성품, 사람의 각종 내적 상태, 그리고 각 부류 사람의 갖가지 본질적 모습에 대해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알아채지 못하니 눈뜬 봉사와 다름이 없다. 반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지만, 사람의 행동거지 하나, 표정과 태도 하나에도 감응하며, 자기도 모르게 이런 일로부터 인상을 받는다. 이런 인상과 느낌은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이는 사람이 깨달은 진리가 사람에게 일종의 분별력을 주어 그런 행위나 행동 방식, 또는 태도의 본질에 대해 정의를 내리게 하는 것이다. 이 정의는 어떻게 나온 것이겠느냐? 진리가 깨닫게 한 것이고, 진리가 사람에게 준 분별력과 판단력으로 인한 것이다. 지금 너희는 일부 진리를 깨닫고, 몇 가지 일에 어느 정도 분별력이 생겼지만 그리 정확하지 않고, 안정제를 복용한 것 같은 느낌도 없으며, 아직 모색하는 과정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모든 일을 하나하나 다 저희에게 교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그럴 필요는 없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책임이 있고,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사역 범위가 있다. 나는 각 항목의 진리를 모두 너희에게 알려 줄 것이니, 남은 것은 너희가 일상생활 속에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체험하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고 배치할 것이다. 사람은 반드시 한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협력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네가 추구하지 않는다면 내가 아무리 분명히 말해 줘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강제로 주입하지도, 강압적으로 네가 알고 깨닫고 진입하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며, 성령도 그렇게 역사한 적이 없다. 오직 네가 스스로 원하며 주동적, 자발적으로 실행하고 진입해야만 이런 진리가 네 내면에서 부지중에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열매를 맺을 때 네 마음은 밝아질 것이니, 이것이 바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무슨 일을 대하든 무감각할 것이고, 반응이 둔할 것이며, 무엇을 보든 밝히 알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일을 했는데 남들이 그것을 가리켜 악행이라고, 어떤 성질이라고 하면 너는 알지도 알아채지도 못한 채 다른 사람이 알려 주는 말을 듣고 도리상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너는 아직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인정하지 못했는데 정말 깨달았겠느냐? 너는 깨닫지 못했다. 그렇기에 어떤 일들이 닥칠 때 그저 규례만 지킬 뿐이다. 이는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해 초래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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