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파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제 3 부)

오늘은 복음 전파의 본분을 이행하는 측면의 진리를 교제했는데, 얻은 것이 좀 있느냐? (있습니다.) 여태까지 복음 전파의 진리에 관해 교제할 때는 이상(異象)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즉, 전적으로 이상 측면의 진리를 교제했지 오늘처럼 이렇게 수많은 세부 문제에 초점을 맞춰 교제하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이 이상 측면의 진리를 큰 틀의 내용만 좀 알 뿐,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세부 실행의 길이나 원칙에 관해서는 잘 모르기에 오늘은 이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져와 교제하였다. 몇몇 사례와 사람들의 태도, 혹은 사람이 이런 일을 직면할 때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인지, 사람의 관점은 무엇인지, 사람이 어떻게 이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할지 등의 다양한 화제를 교제했는데, 이를 통해 복음 전파 측면의 진리가 어느 정도 구체화되고 실제 상황에 적용되었느냐? 나는 너희가 이 측면의 진리를 들은 후 마음속이 한결 밝아졌으리라 믿는다. 또 복음 전파 과정에서 구체적인 문제들에 부닥쳤을 때, 이런 말씀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도 믿는다. 이 말씀들은 전부 공허하지 않고 실제적이며, 진리 원칙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복음 전파와 관련된 일이 닥쳐 그릇된 내적 상태로 살거나 복음 전파 과정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너희는 이러한 진리로 너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만약 해결할 수 있다면 오늘의 교제는 헛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다면, 혹은 아예 제멋대로 굴면서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함부로 굴고, 본분이나 책임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런 진리는 너희에게 공허한 말일 것이며, 어떤 작용도 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작용도 하지 못한 것은 진리가 너를 도울 수 없어서도, 진리가 네게 도움이 되지 않아서도 아니다. 네가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으며, 복음 전파 본분을 여가 활동이나 시간 때우는 소일거리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너희가 이런 관점으로 복음 전파라는 이 본분을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합격한 본분 이행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럼 먼저 묻겠다. 이런 관점으로 복음 전파라는 이 본분을 대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너희는 이 점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 것이다. 이런 관점, 이런 태도로 이 본분을 대한다면, 너 스스로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이고, 네 그런 태도를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을 좀 얻어 겉으로 선행을 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네 본분 이행의 속셈과 동기는 진리 원칙에 어긋난다. 종교인들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속셈과 동기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의 속셈과 동기를 판단한다. 또 하나님은 본분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관찰하며, 이러한 것들에 근거하여 사역함으로써 사람의 패괴를 정결케 하고, 사람이 죄악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복음을 전하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어떤 부류의 사람이든, 네 자질이 어떻든, 과거에 어떤 본분을 이행했든, 어떤 본분을 이행하다가 복음 전파팀에 들어가게 됐든 너는 복음 전파의 진리 원칙들을 지켜야 하며, 복음 전파를 본분과 책임으로 여겨 맡아야 한다.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고,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해 교체된 후 복음팀에 배치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 리더 일꾼이 있다. 그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저는 리더 일꾼이었는데 사역을 잘해 내지 못해 복음팀에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제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은 한동안 저를 단련시키기 위함일 것입니다. 제가 진리를 갖추고 스스로를 훈련하게 하시는 거죠. 그러니 저는 복음 전파에 공을 들일 필요가 없이 대충 임해도 됩니다. 어쨌든 저는 리더 감이니 제 분량이 성장하면 다시 저를 리더로 삼으실 겁니다. 저는 자질이 좋으니까요. 리더가 되지 않으면 재능을 낭비하는 거죠. 지금 교회에는 리더 일꾼이 부족하잖아요!” 이 말의 속뜻인즉슨, 하나님 집에서 그가 리더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시킨 것은 훈련할 기회를 준 것이고, 진리를 갖추게 하는 것이며, 기본적인 사역을 좀 해 보도록 훈련시키고 양성시키는 것이란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복음 전파 본분을 대할 때 임시적이라는 관점을 가졌다. 즉, 복음을 전했다는 명분을 얻고 기분 전환을 하며, 식견을 키우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성과를 내고, 진리를 깨닫고, 사역을 좀 하게 되면 자신을 다시 리더 일꾼으로 발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을 갖고 복음 전파 본분을 이행하는데 진실로 회개할 수 있겠느냐? 이는 스스로를 반성하며 인식하지 않는 것이고,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무척 까다롭지 않으냐? 복음 전파를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꽤 대단하게 여기니, 정말이지 분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실상이 어떻게 된 것인지 그는 전혀 모르고 있다. 사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해력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저 겉으로만 말재간이 좀 있고 마음을 쓰는 것 같아 자질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리더 일꾼이 되자 인품이나 자질 등 여러 부분이 전부 합격점을 받지 못했고, 리더 일꾼의 기준과 조건에 맞지 않아 도태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주제를 모른 채 뻔뻔스럽게 큰소리를 치고, 낯짝도 두껍게 허풍을 떤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 자기 위치를 그렇게 설정한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나 복음 전파에 배치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하나님 집의 모든 본분은 상, 중, 하의 등급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복음 전파 본분을 하나님 집의 모든 본분 중 가장 비천한 사역으로 여긴다. 즉, 잘못을 저지르고 본분 이행에 합격점을 받지 못한 사람이 복음 전파팀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본분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이런 식의 이해는 복음 전파를 자기 책임이자 평생 이행해야 할 의무로 여기는 것과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그와 같이 이해한다면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무엇을 잘못했느냐? 그는 사람이 평생 이행해야 할 가장 큰 책임과 의무, 즉 복음 전파 사역을 가장 비천한 일로 여기고, 그것을 자기 책임이나 의무로 삼지 않았고 본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분을 이행할 때는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복음 전파는 본분 중 하나라고 하나님 집에서 아무리 교제해도 그는 그렇게 여기지 않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집의 각급 리더 일꾼과 책임자는 상위 계급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있어. 그들은 마지막에 큰 상을 받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겠지. 그 아래에서 따르는 사람들은 전부 졸개들이야. 특히 복음 전파자들은 항상 교회 밖의 사람들을 접하니까 모든 사역 중에서 그들의 사역이 가장 고되고 힘들 거야. 그 사람들은 마지막에 온전케 될지 장담할 수 없어.’ 그는 복음 전파라는 본분을 이렇게 설정했다. 이것이 그의 잘못 아니겠느냐? 복음 전파라는 신성한 책임과 의무를 가장 비천한 일로 여기고, 등급에 따라 가장 낮은 일로 구분하는 그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그들은 이 본분을 무시하고, 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을 깔본다. 그러니 그들이 이 본분을 이행할 때 어떤 관점을 갖고 있겠느냐? (임시적이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복음 전파를 자신의 본분 내 사역으로 여겨 최선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얻을 수 있으면 얻고, 얻지 못하겠으면 관두자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복음 전파라는 이 본분을 무시한다. 그러니 복음 전파의 성과가 또 어떻겠느냐? 그들이 복음 전파 본분을 잘 이행하기 위해 각 측면의 진리를 갖출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 하나님 말씀 발췌문과 성경의 장절을 외우고, 각종 체험 간증을 숙지함으로써 복음 전파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갖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치우치게 이해하거나 관념이 좀 많은 사람을 만나 어려운 질문을 받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대하겠느냐? (포기할 것입니다.) 그것이 한 가지 태도이다.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복음을 전할 때 왜 이렇게 그릇되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걸까? 정말 운도 없지!”라고 말하지 않겠느냐? 그는 복음 대상자에게 사랑을 보이지 않으며,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일에서 그는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은 더더욱 없다. 그는 육적인 기호대로 복음 대상자를 대하는 것을 선택한다. 질문이 많고 관념이 큰 사람을 만나면 포기하고, 관념이 없거나 적은 사람만 골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또 그는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으려 한다. 허영과 체면, 명예, 지위 등에 도움되지 않을 때, 육적인 기호에 맞지 않고 육적인 누림과 충돌될 때 그는 무엇을 선택하겠느냐? 포기하고 도망치기를 선택하며,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않고 거부하기를 선택한다. 이와 동시에 마음속으로 몰래 하나님을 원망한다. ‘이렇게 그릇된 사람, 관념이 많은 사람을 왜 만나게 하신 겁니까? 왜 저한테 이런 고통을 겪게 하시는 거냐고요. 체면이 떨어지고 헛수고를 했는데 사람도 얻지 못했잖습니까.’라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무의식중에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된다. 그래서 그는 복음 전파 본분을 받아들이길 원치 않으며, 복음 전파의 책임을 다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복음 전파 본분에 대한 태도가 이런 것이라면, 도태되기까지 멀지 않았다.

많은 복음 전파자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대충 건성으로 사역하는 태도를 보이며 줄곧 바뀌지 않는다.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로 사역을 대하지 않고 ‘어차피 시간도 많고 할 것도 없는데 이거라도 하지 뭐. 지금 복음팀이 활발하게 활동하니까 나도 거기 껴야겠다.’라고 생각하고는 덩달아 복음을 전한다. 사실 이 과정에서 그들이 치르는 대가는 한정적이다. 시간을 좀 쓰고 좀 뛰어다니는 것일 뿐, 진정한 대가는 치르지 않는다. 그들은 복음을 전할 때 늘 육적인 기호와 자신의 관념, 상상에 근거하며, 진리 원칙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부자나 자산가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전하려 하지 않는다. 또 외모가 뛰어난 사람에게 전하기를 좋아하고, 외모가 평범한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 밖에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한테 복음을 전하기를 좋아하고, 말이 안 통하는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는다. 또 관념이 적은 사람에게 전하기를 좋아하고, 관념이 너무 많은 사람에게는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하기 쉬운 사람에게 전하기를 좋아한다. 말을 많이 안 해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어야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해야 하거나 피곤할 것 같으면 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다가 가정 환경이 훌륭한 대상을 만나게 됐다. 그는 집도, 차도 있었고, 부모님이 좋은 직업에 종사했으며, 외동인 데다가 외모도 훌륭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시집가면 부자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복음을 전하고 싶어 했다. 그가 받아들인다면 더없이 좋을 거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누군가 그녀를 막으며 그는 진리를 구하는 사람도, 복음을 전할 만한 사람도 아니라고 했지만, 그녀는 “우리가 진리를 많이 교제해 주면 받아들일지도 모르잖아요. 이렇게 좋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구원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 아니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실 그녀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그녀가 정말 그 사람을 얻어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했겠느냐? 그녀는 그에게 어필하려고 했다. 한동안 어필하자 마침내 성과가 있었고, 그녀는 그와 이어지게 됐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일을 처리할 때 늘 자신만의 속셈을 가진 것이고, 진리 원칙을 어긴 것이다. 결국, 그녀는 갖가지 수법으로 ‘전해’ 데려왔고, 그 사람과 결혼까지 했다. 그리고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거둔 최고의 성과는 소울메이트를 만나게 된 거예요. 이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겠죠. 결혼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거니까, 제가 그를 만나 결혼할 수 있었던 것도 다 하나님의 안배에서 비롯된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자 축복이에요.”라고 말했다.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꾸리게 됐는데, 그녀가 계속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1, 2년이 지나자 기분이 좋을 때만 가끔 복음을 전할 뿐, 대부분 시간을 가정생활에 전념했고 마음이 갈수록 공허해졌다. 그러다가 결국 가정생활은 집안일을 하는 것,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 떠들며 티격태격하는 것뿐임을 깨달았다. 그런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느낀 그녀는 뉘우치며 생각했다. ‘역시 하나님을 믿는 게 의미가 있지.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전하자!’ 나중에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잘 포장해서 늘어놓으며 말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이니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죠.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는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다면 살길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부르신 거죠.” 이 얼마나 낯 두꺼운 짓이냐! 돌아온 그녀는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하며 “본분을 이행하지 않으니 공허하더라고요. 사람은 본분을 이행해야 해요.”라고 했다. 진리를 실행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하는 말은 다 역겹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왜 하나님에게는 너를 원하는지 원치 않는지 묻지 않는 것이냐? 너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짝을 찾아 본분을 내팽개치고 도망갔다. 그때는 왜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동의하는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묻지 않았느냐? 너는 네 책임을 다했느냐?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을 완수했느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했느냐? 본분을 본분으로 여겼느냐? 전부 아니다. 너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냐? 길에서 알게 된 친구에 불과하다. 인사 한 번으로 안면을 트고는 취할 만한 이익이 있으면 함께 지내고, 없으면 그대로 안녕이다. 그러다가 또 언젠가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생각나는 그런 관계 말이다. 너는 하나님을 그렇게 한때 알던 친구로 여겼다. 그럼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보겠느냐? 너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네가 마음이 괴롭고 하루하루 사는 게 공허해서 하나님이 필요해졌다고, 돌아와서 본분을 이행하겠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무 생각 없이 네게 본분을 주겠느냐? (그러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 그렇겠느냐? 너는 자격이 없다! 이런 부류는 하나님을 믿은 후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데도 본분을 다하기 전에 한마디 인사도 없이 그렇게 하나님을 저버렸으며, 사역 장소를 떠나고 본연의 사역을 버렸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떻게 보겠느냐? 이는 어떤 성질이겠느냐? (배반입니다.) 배반은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는 탈영병과 같다! 탈영병이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겠느냐? 그들은 본분 이행의 기치를 들고 사익을 취했으며, 개인의 앞날과 생계를 위해 계산하고 계획하면서 본분 이행의 본래 취지를 어겼다. 결국, 본분을 이행하다가 중도에 도망가 탈영병이 되었다. 이런 사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게 아니라 개인의 속셈과 목적을 품고 하나님을 기만하다가 결국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 아니겠느냐? “하나님 집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은 맞지만, 하나님 집에 들어올 때는 심사를 거쳐야 한다. 하나님 집을 떠나는 것은 자유이므로 아무도 막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하나님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반드시 몇 단계에 걸쳐 교회 리더 일꾼의 심사와 검증을 받고, 진실로 회개한 것이 확인되어야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바로 나갈 때는 쉬워도 돌아올 때는 어렵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면서 너무 어렵고 고생이 너무 심해 책임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탈영병이 된 것이다. 복음 확장 기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모든 복음 전파자, 특히 중요한 직위에 있는 책임자는 하나님에게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들이다. 복음 확장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면서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제멋대로 자리에서 이탈해 탈영병이 되었으니, 이는 가장 심각한 과오이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에 속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의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은 탈영병이 된 사람을 어떻게 대할 것 같으냐? (방임하실 것입니다.) 방임한다는 것은 상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이다. 방임된 사람이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하나님이 보기에 회개의 태도가 괜찮을 경우 다시 그를 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본분 이행 과정에서 탈영병이 된 사람에게만은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그를 구원하지 않고 혐오하여 내치실 것입니다.) 아주 정확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중요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에게는 다 하나님의 부탁이 있다. 그런데 본분을 이행하는 도중에 제멋대로 도망쳐 탈영병이 되었다면, 그 사람이 예전에 어땠는지, 앞으로 어떠할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런 부류를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으로 보며, 다시는 본분 이행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다시는 본분 이행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네가 만약 “저는 무척 후회하고 있고, 하나님께 죄스럽습니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뭐에 씌어서 정신이 혼미해졌나 봅니다. 지금은 너무 후회스럽습니다. 제가 다시 본분을 이행하여 공을 세우고 회개할 수 있도록, 제 과오를 만회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기회가 없다고 할 것이고, 더 이상 너를 상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탈영병을 이런 태도로 대한다. 평범한 과오를 저지른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은 어쩌면 그건 한때의 과오라고, 혹은 환경이 열악하고 분량이 작으며 진리를 깨닫지 못한 등의 이유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할 것이며,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탈영병들에게만은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설마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도 이행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일까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본분을 이행하거나 복음을 전해도 되고, 설교를 듣거나 교회에 들어와도 된다. 교회에서는 네 이름을 제명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아무리 본분을 이행하고 회개한다고 해도, 설령 힘을 쓴다고 해도 너를 원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태도이다. 이 일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하나님은 왜 그렇게 그들에게 매정하고 단호하신가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나 이 일은 사람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이런 태도를 갖고 있으니 네 마음대로 생각해라.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결정할 권력이 있다. 권력이 있어서 그렇게 행하고 처리하는데, 사람이 어찌할 수 있겠느냐? 항의할 수 있겠느냐? 그러게 누가 너더러 바른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탈영병이 되라더냐? 복음 확장 사역은 혼자서 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네가 본분을 이행할 수 없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택한다. 네가 그 본분에 협력하지 않고 그 본분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네가 눈이 멀었다는 의미이고, 어리석고 못났다는 의미이다. 너는 그것이 복인 줄 모르니 네게는 그 복이 없다. 그러니 썩 물러가라! 네가 물러갔다가 얼마 후 다시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너를 원하겠느냐?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너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탈영병들에게만 이런 태도를 취한다. 혹자는 “제가 돌아와서 본분을 이행하니까 성령의 깨우침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당시 네가 본분을 이행하다가 제멋대로 떠날 때도 성령이 가로막지 않았는데, 이제 돌아왔다고 해서 성령이 네게 깨우침을 줄 리 있겠느냐? 착각하지 마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어기면서 일하지 않으며, 누구를 대하든 원칙이 있다. 이 일은 사람에게 어떤 경고를 하느냐? 본분과 진영을 지키고, 자신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탈영병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가 지나치냐? (지나치지 않습니다.) 어째서 지나치지 않다고 하겠느냐? ‘지나치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이든, 지금 이 시기에 모두가 이행하는 각각의 본분은 하나님이 정한 것과 관계가 있지 않겠느냐? 무척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본다면, 네가 그 본분을 이행하기까지 하나님이 많은 사역을 하지 않았겠느냐? 하나님은 창세 때부터 너라는 사람을 예정해 놓았다. 네가 어떤 시대, 어떤 시기에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 그 가정이 네게 어떤 영향을 줄지, 하나님은 네가 어떤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필요한지, 네가 미리 어떤 지식을 익히게 할지 등을 말이다. 예를 들어, 네가 외국어를 배우고 그 자질과 재능을 갖춰 네 본분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하나님은 수많은 예비 사역을 했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그런 예비 사역을 했겠느냐? 네가 사람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하기 위함이겠느냐? 네가 세속을 추구하고 사탄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겠느냐?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의 복음 확장 과정에서,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하나님이 네게 준 것들을 바치게 한다. 그런데 네가 하나님이 준 것들을 바칠 수 없고 오히려 사탄을 위해 봉사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기분이겠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처리하겠느냐? 하나님의 성품대로라면 어떤 처분을 내리겠느냐? 하나님은 단번에 너를 차 버리고 원치 않을 것이다. 너는 배은망덕하며, 네 뿌리를 알지도 못한다. 또 하나님이 준 것을 다시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도리어 사탄에게 갖다 바쳤으니, 이는 심각한 배반이다. 하나님은 그런 배신자를 원치 않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 사역 과정에서 자신의 자질을 각자가 이행해야 할 본분에 발휘하고, 하나님을 믿은 후의 체험이나 인식, 깨달은 진리 등을 다 본분 이행에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사람이 하나님나라 복음 확장 사역에서 미약한 힘이나마 다할 수 있다. 여기에서 미약한 힘이란 무엇이냐?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하나님이 네게 진리를 깨닫고, 총명과 지혜를 갖추게 하는 목적은 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게 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네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이자 의미이다. 만약 네가 그 가치와 의미를 살아 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뜻이며, 하나님 집에서 폐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네가 사탄과 육을 살아 내는데, 하나님이 너를 원하겠느냐? 네가 살아가는 가치와 의미가 사라지면 하나님이 보기에 너라는 존재는 하나님 집에서 마땅히 없어져야 할 사람, 영원히 사라져야 할 사람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너를 원치 않는다. 이 밖에,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확장되는 기간에,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각자의 본분을 이행하면서 한번 또 한번 큰 붉은 용의 탄압과 잔혹한 박해를 겪었다.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평탄하지 않고 더없이 힘겹다. 이는 하나님을 2~3년만 따라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이행하는 본분이 특수한 것이든, 임시로 안배된 것이든 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시로 누군가가 잡혀가고, 하나님의 사역이 교란되고 파괴되고, 본분 이행 인원이 확실히 부족하다. 특히나 자질이 좋고 전문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와 크나큰 능력, 권병 때문에 하나님 집은 이미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났고, 모든 사역이 정상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는 사람이 보기에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현현하여 사역할 때부터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갖은 풍파와 환난을 겪었다. 만약 하나님의 인도가 없었더라면, 하나님 말씀이 사람에게 믿음과 힘을 더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오늘까지 걸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선민이 몸으로 느끼는 바이다. 하나님 집의 사역은 뭐 하나 순조로운 것이 없다. 모두 맨주먹으로 일으킨 것이고, 첩첩이 놓인 고난을 뚫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내디딘 것이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우리는 큰 붉은 용 정권의 광기 어린 탄압과 박해만 마주한 게 아니라 종교계와 패괴된 인류로부터 차별과 비방, 정죄를 받고, 심지어 시대 전체로부터 버림받고 억압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경영 사역은 사탄이 권력을 잡고 사탄의 사악한 흐름으로 가득한 환경, 배경에서 전개되고 진행되는데, 결코 쉽지 않고 험난하다. 그렇기에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에게 위로가 되며, 기특한 존재라고 하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치는 진심과 충성심, 대가, 그리고 본분을 대하는 성의 있고 책임감 있는 태도, 하나님 부탁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공경하고 앙모하는 태도는 하나님에게 무척 소중한 것으로,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반면, 탈영이나 본분 이행을 장난으로 여기는 등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 방식, 태도를 하나님은 몹시 혐오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배해 놓은 각종 환경과 사람, 일, 사물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 진도를 방해하고 망치고 지연시키고 교란하고 지장을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탈영병과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를 대하는 하나님의 기분과 반응은 어떻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갖겠느냐? (그들을 몹시 미워하실 것입니다.) 오직 혐오와 미움뿐이다. 긍휼이 있겠느냐? 없다. 긍휼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혹자는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십니까?”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이 왜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느냐? 그런 사람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 네가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사랑일 뿐이며, 네가 사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그를 소중히 여긴다고 해도 하나님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소중히 여길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단호히 버리고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다. 이것이 합리적이지 않으냐?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한 가지 성품이며 또한 진리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파 과정에서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채 늘 자기 뜻대로 날뛰고, 복음 확장 사역의 방해물이나 걸림돌이 되며, 복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고 파괴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복음 사역의 확장을 가로막는다. 그렇기에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혐오와 미움, 도태이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공의 성품을 드러낸 것이다. 혹자는 “그렇게 처리하시는 건 좀 과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전혀 과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마귀들을 혐오하고 증오한다. 하나님은 위장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고 분명하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 중 가장 두드러지는 두 가지는 무엇이더냐? (널리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점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크게 노하느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저버리며 사탄을 따르는 사람에게 크게 노한다. 즉, 사탄을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 배신자, 탈영병을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 “저는 일시적으로 연약해져서 본분을 이행할 마음이 사라졌지만, 사실 하나님을 떠나려는 것도, 속세나 사탄 진영으로 돌아가려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연약해졌어도 좋고,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어도 좋다. 너의 그런 연약함을 대할 때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 너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널리 긍휼을 베푼다. 패괴 성품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특정한 상황 속에서 연약해지고, 소극적이고 나태해지기가 쉽다. 하나님은 그것을 전부 감찰하며, 상황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네가 탈영병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너를 탈영병 취급 하지 않을 것이고, 네가 연약해졌다면 하나님은 네 연약함에 근거하여 너를 대할 것이다. 네가 일시적으로 패괴를 드러내거나 연약해지거나 방향을 잃은 거라면, 하나님은 너를 깨우치고 인도하고 붙들어 줄 것이며, 네 미약한 분량과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태에 맞춰 너를 대할 것이다. 이는 본성 본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을 왜 버리지 않겠느냐? 그들은 그저 한때 연약해져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을 뿐, 하나님과 진리를 버리고 사탄을 따르고자 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준다. 그럼 이렇게 일시적으로 연약해져서 본분을 이행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돌아와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어떻게 처리해야겠느냐? 받아 주어도 된다. 이는 탈영병이 된 것과 성질이 다르니 천편일률적으로 일괄 처리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연약해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탈영병에 해당하는데, 네가 그를 받아 준다 해도 언젠가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는 여전히 탈영병이 된다. 그는 한 번 탈영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런 인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들을 단번에 차 버리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전혀 지나치지 않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모두를 구원해도 그를 구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구원할 사람들 중 한 명이 적어지면 하나님이 즉시 한 명을 메우면 그만이지만, 그런 사람은 원치 않는다. 하나님은 그를 영원히 잘라내고 원치 않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파 과정에서 종종 복음 사역을 교란하고 망치는 모습을 보이지만, 얼마간 사역을 하고 사람을 좀 얻기도 한다. 이를 선행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일단 그들이 선행을 한 것인지는 잠시 차치하고, 먼저 복음 전파 과정에서 수시로 복음 사역을 교란하고 망치는 그들의 모습에 관해 말해 보자. 일례로, 복음 사역을 책임지면서 늘 남들과 지위와 권력을 놓고 다투거나 수시로 분쟁을 일으키며 복음 사역을 교란하고 망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공과(功過)를 서로 상쇄시키겠느냐, 아니면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은 그의 과오를 기록하실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그가 몇몇 사람에게 전하고 일부 사역을 했으며, 얼마간 성과를 내기는 했지만, 끊임없이 악을 행했다. 큰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지만 작은 잘못은 수시로 저질렀다. 작은 잘못을 수시로 저질렀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진리를 실행하지는 않고, 명리와 지위를 놓고 다투며, 말에 조금의 경건함도 없고, 진리 원칙을 전혀 구하지 않으면서 늘 제멋대로 굴고, 자제하지 않고, 조금도 변화하지 않아 이방인과 같다는 의미다. 이는 교회 생활과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을 넘어뜨렸다. 이것이 악행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악을 행한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하면서 힘은 많이 썼겠지만 정말 책임을 다한 것이겠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보겠느냐? 그들이 사역을 조금 했다고는 하나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할 수 있는데, 그들이 본분을 이행하고 있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그들은 왜 그렇게 거리낌 없이 악을 행하느냐? 한 가지 이유는 패괴 성품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요행 심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복음을 전하고 많은 공을 세웠어. 모 교회의 신자 백여 명을 다 내가 전했지. 그들이 하나님께 구원받는다면 내 공이 얼마나 크겠어? 그러니 하나님도 나를 기억해 주셔야 하지 않겠어? 그 사람들을 봐서라도 나를 정죄하지는 않으실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는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 아니겠느냐?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것이겠느냐? 그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상과 면류관을 얻고자 했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다. 또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모른 채 감히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했다. 이는 그가 진리 실제를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은 몇 년간 복음을 전했고 어느 정도 경험도 있었다. 복음 전파 과정에서 숱한 고생을 하고, 징역 판결을 받아 몇 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출소 후에도 계속 복음을 전했는데, 수백 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중에서 인재도 여럿 나왔고, 리더 일꾼으로 발탁된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자신이 대단한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한 그는 그것을 밑천으로 여기저기 떠벌리면서 자신을 과시하고 증거했다. “저는 예전에 8년이나 옥살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굳게 서서 증거했죠. 또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중 일부는 리더 일꾼이 되었고요. 저는 하나님 집에 공을 세우고 기여를 한 거죠.”라고 말이다. 그는 어디에서 복음을 전하든 그곳 리더 일꾼에게 우쭐거리면서 “여러분은 제 말을 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윗선 리더도 저한테 말할 때는 예의를 좀 차려야 하고요. 저한테 무례하게 구는 자가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자는 악질 아니겠느냐? 이런 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고 사람들을 얻지 않았어도 감히 그렇게 거들먹거렸겠느냐?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거들먹거릴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본성 안에 그런 것이 들어 있다는 의미이며, 그의 본성 본질이 바로 그런 것이고,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교만하다는 의미이다.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얻자 교만한 본성이 커져서 더더욱 거들먹거리게 된 것이다. 이런 부류는 가는 곳마다 자기 밑천을 내세우고 공을 내세우며, 각급 리더들을 협박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윗선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부류 사람들의 행위와 태도에 근거하여 그들의 본성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악마가 하나님 집에 섞여 들어와 힘을 좀 쓰면 저절로 본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누가 책망하고 훈계해도 듣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 집과 대항하는데, 그들의 이런 행동은 어떤 성질이겠느냐? 하나님이 보기에는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야 적절할 것이다. ‘죽음을 자초한다’라는 말에는 실제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어떤 것이겠느냐?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은 본디 좋은 일이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은사가 있는데, 이는 복받은 것이지만, 그가 바른길을 걷지 않는다면 아주 곤란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말재간이 있어서 누구를 만나든 상대에 따라 말할 수 있고, 누구와도 말이 통한다. 이 또한 하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능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일단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차치하고, 핵심은 사람의 본성을 보고, 바른길을 걷는지 아니면 그릇된 길을 걷는지를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 사역이 확장되는 동안 재능을 바치고, 적잖이 애를 써서 많은 사람을 얻은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너는 복음 사역에 작은 힘이나마 일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 기억될 만하다. 만약 네가 묵묵히 그 본분을 제대로 해낸다면, 형제자매들은 그것을 눈여겨보고 너를 존중할 것이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너를 찾아와 구하고 가르침을 청할 것이다. 또 네가 인성을 갖추고 진리를 추구한다면 사람들도 너를 좋아하고, 하나님 또한 너를 축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바른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이 준 그 은사를 밑천 삼아 어딜 가든 자신이 한때 옥살이했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녔다. 사실 옥살이한 것이 뭐 대단한 일도 아니다. 큰 붉은 용의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거나 교회 사역을 하다가 잡혀가 옥살이한 사람은 적지 않다. 그것은 무슨 밑천이 아니라 사람이 마땅히 겪어야 할 고난이다. 고난을 겪고 나서 간증이 있다면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할 수 있을 것이고, 박해받는 동안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해 사탄을 이겼는지, 어떤 고난을 겪고 어떤 수확을 얻었는지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른길이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이 바른길을 걷지 않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다. “저는 한때 몇 년이나 옥살이하면서 적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저한테 잘해 줘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건 어리석고 무지하고 비양심적인 겁니다.” 이것이 바른길을 걷는 것이겠느냐? 옥살이를 하고 고초를 겪으면서도 형제자매를 팔아넘기지 않고 판결을 받은 후 굳게 서서 증거했다면 이는 좋은 일로, 하나님이 보기에 기억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한사코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가는 곳마다 자신의 공을 과시함으로써 존경과 동정을 얻어 내려 했으며, 심지어는 물질적인 것까지 받아 내려 했다. 이것이 바로 공을 내세우는 행위이다. 그가 사람들에게 공을 내세우는 속뜻은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에게 공을 내세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에게까지 공을 내세울 수 있겠느냐? 공을 내세워 사람들에게서 지위와 명리, 체면, 육적인 즐거움까지 충분히 얻어 낸 후에는 하나님에게 요구할 것이다. 이런 자는 바울 아니겠느냐? 한편, 그는 그 본분을 이행하며 적잖은 사람을 얻었다. 하나님 눈에 그가 깨달은 진리를 기초로 계속 본분을 이행하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보였다면 하나님은 계속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는커녕 자신이 큰 공을 세우고 자격을 갖췄다고, 모두에게 떠벌려도 된다고 생각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떠벌리고 밑천을 늘어놓으며 공로를 따진 것이다. 또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몇백 명, 몇천 명을 얻었다고 뽐낼 뿐,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거나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증거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이는 죽음을 자초한 것 아니겠느냐?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바른길을 걷지 않았다. 그럼 그는 어떤 태도로 설교와 교제를 듣겠느냐?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안 들어도 돼. 옥살이하면서도 유다가 되지 않았으니까 나한테는 간증이 있어. 게다가 내가 복음을 전해 얻은 사람도 누구보다 많지. 치른 대가도 가장 많다고. 온갖 고생을 다 겪었지. 덤불도 헤치고, 산속 동굴에서도 지내 봤으니까. 내가 견디지 못하는 고통도 없고, 안 가 본 곳도 없어. 당신들 중 누가 나랑 비교가 되겠어? 그러니 어떤 설교를 듣든 너무 잘 이해할 필요는 없어. 설교를 듣는 건 실행하기 위해서잖아? 나는 다 실행해 냈고, 다 살아 냈다고. 성육신 하나님이라 해도 마찬가지일 거야.’ 이는 어떤 부류가 하는 말과 비슷하냐? (바울의 말과 비슷합니다.) 그는 그야말로 바울의 복사판이다. 그는 또 “당신들은 저만 한 능력이 없죠. 만약 있다면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을 필요도, 매일 하나님 말씀을 받쳐 들고 적고 베끼고 외울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저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언제 당신들처럼 그렇게 공부했나요? 저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무엇이든 갖추게 되니까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몹시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교만하기 짝이 없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일을 어떻게 여기느냐? 장난으로 여긴다. 그는 사람이 얼마간 좋은 행위를 갖추고, 사역을 하고,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싸워야 할 싸움을 마치면 마지막에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고, 만약 하나님이 면류관을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는 종교인들과 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다. 또 그는 “지금 저는 모든 고난을 겪고 모든 대가를 치렀습니다. 하나님이 겪으신 고난을 저도 거의 다 겪었죠. 그러니 마땅히 하나님께 상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바울과 같은 부류 아니겠느냐? 그는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언제나 자격과 서열을 따진다. 만약 그가 정말 그리스도가 되려고 한다면 곤란해진다. 이런 자가 바로 두 번째 바울이다. 이런 길을 걷는 사람에게 되돌릴 여지가 있겠느냐? 없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막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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