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3) 제 3 부
지금 너희의 생명 진입은 어느 단계에 도달했느냐? 너는 이미 네 관점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도 여전히 네 관점대로 살아가고, 여전히 네 관점으로 하나님 사역을 가늠한다. 네 사상 관점으로 하나님이 네게 마련한 상황을 판단하고, 네 사상 관점으로 하나님의 주재를 대한다. 이것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느냐? 황당하지 않으냐? 사람은 고작 그만한 도리를 깨닫고서는 하나님의 행사를 가늠하려 하는데 그건 너무 교만하지 않으냐? 너는 지금 단지 하나님 말씀이 좋은 말씀, 옳은 말씀이라고 인정한 것에 불과하다. 표면적인 행위로 볼 때 너는 명백히 진리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 사역을 판단하는 일을 하지 않고, 또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에 순종할 수 있다. 그러면 너는 한 명의 이방인에서 하나님을 따르며 성도의 품위를 갖춘 한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너는 근본적으로 사탄 철학, 사탄 이념, 사탄의 법칙, 사탄의 지식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이고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 말씀을 생명이 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된다. 바로 이런 과정인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기간에 네 행위, 네 일 처리 방식에는 분명 어느 정도 변화가 발생한다. 그 변화의 크기가 얼마나 되든, 하나님이 보기에 네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단지 행위와 방법의 변화, 내면의 염원과 의지의 변화일 뿐이고, 기껏해야 사상 관점의 변화일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아마 지금 너는 한순간의 열정, 한순간의 충동으로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겠지만 네가 무척 꺼리는 일에서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라고 하면 그러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행위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다. 아마 너는 좋은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모든 걸 버릴 수도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기꺼이 흘리겠습니다. 제 한평생 후회도 원망도 없습니다! 결혼도 포기하고, 세상에서의 앞날도 포기하고, 모든 부귀영화를 다 포기하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과 비방도 다 견디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유독 하나님이 마련한 상황이 네 관념에 맞지 않을 때는 일어나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행위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다. 아마 너는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또는 가장 아끼고 마음에서 가장 내려놓기 힘든 것을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진심을 털어놓고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면 무척 곤란해하며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행위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다. 아마 너는 평생 육적인 안일을 탐하지 않고, 좋은 음식을 먹지도 좋은 옷을 입지도 않을 수 있고, 매일 정말 힘들고 고생스럽게 본분을 이행하며 육체가 가져다주는 온갖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안배가 네 관념에 맞지 않을 때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오해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비정상적으로 변한다. 늘 반발하고 거역하면서 하나님에게 완전히 순종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행위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다. 하나님을 위해 목숨은 바치려고 하면서 어째서 하나님에게 진실한 말 한 마디 털어놓지 못하느냐? 자신 이외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자 하면서 어째서 하나님이 네게 맡긴 부탁에는 충실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을 위해 목숨은 바치고자 하면서 어째서 정에 휘둘려 행동하거나 인간 관계를 지킬 때 너 자신은 돌아보지 못하느냐? 어째서 교회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은 일어나 지키지 못하느냐?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냐? 이미 하나님 앞에서 평생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면서 어째서 한 번 교체된 것 때문에 소극적으로 변해서 몇 날 며칠을 일어나지 못하고, 마음에 반발과 원망, 오해와 소극성을 한가득 품느냐? 그건 왜 그런 것이냐? 네가 속으로는 지위를 가장 아낀다는 뜻이고, 그건 네 치명적인 약점과 관계된다. 그래서 교체된 후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너에게 비록 행위 변화는 있지만 생명 성품 변화는 없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것이 바로 행위 변화와 성품 변화의 차이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좋은 행위는 어느 정도 있지만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주 적고, 진실된 순종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많은 이들이 단지 행위가 변화되고 있고, 사상 관점에 변화가 생겼는데,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고자 하는 염원과 뜻을 가지고 있고, 마음속으로 원망도 없는 정도이다. 너희가 볼 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겪었겠느냐?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너희가 전에 얘기한 그 체험 간증들은 하나님의 심판 형벌과는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도 못한다. 네가 아직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았다면 네 성품에는 변화가 시작되지 않은 것이고, 성품이 변화되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네가 생각하는 변화는 단지 행위상의 변화일 뿐이다. 행위상의 변화에는 너 자신이 협력한 공도 있고, 네 좋은 인성의 일면도 있고, 또 하나님이 역사한 효과도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데 여기까지만 사역하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이후로는 어떻게 하겠느냐? 사람을 구원할 때 하나님은 주로 어떤 사역을 하느냐? (심판과 형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주된 방식은 심판과 형벌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 하나님이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는 사역은 아직 정식으로 시작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왜 정식으로 시작되지 않았느냐? 하나님의 이 사역이 아직 사람에게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사람에게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냐? 현재 사람의 내적 상태와 분량, 현재 사람이 이를 수 있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한참을 못 미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역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사역할 수 없다는 말이 하나님이 더 이상 사역하지 않는다는 뜻이냐? 아니다. 하나님은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은 무얼 하느냐? 교회를 정결케 하고 있다. 교란하고 방해하는 자, 적그리스도, 악령, 악인, 불신파,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는 자, 힘쓰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자를 모두 정리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정돈이라고 하고 키질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정돈은 이 기간에 하는 주된 사역이냐? 아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은 그것 말고도 말씀을 통한 일깨움, 양육과 목양, 책망과 훈계, 책벌과 징계 등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너희들에게 역사한다. 어느 정도까지 하느냐? 사람이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기본 조건을 갖추었을 때, 하나님은 심판 사역을 시작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너희 추측과 판단에 의하면 사람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나님이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시작하겠느냐? 하나님이 하는 일은 다 때가 있다. 그는 일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의 경영 사역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가 하는 일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 모두 절차가 있다. 그 절차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각 단계 사역은 모두 이뤄야 할 효과가 있고, 하나님은 그 효과를 확인하면 다음 단계 사역을 시작한다. 어떻게 해야 효과를 낼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일을 할지 하나님은 속으로 다 생각이 있다. 하나님은 함부로 하지 않고 사람의 필요에 따라 한다. 사람에게서 효과를 낼 수 있는 일만 하고, 효과와 무관한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 선민들의 분별력을 키워 줄 반면교사가 필요할 때는 교회에 거짓 그리스도, 적그리스도, 악령, 악인, 그리고 교란하고 방해하는 자를 나타나게 하여 사람에게 분별력을 키워 준다. 하나님 선민이 진리를 깨닫고 분별력이 생긴다면, 그 사람들은 봉사를 다한 것이고, 그들의 존재 가치는 사라진다. 그때는 하나님 선민들이 일어나서 그들을 폭로하고 고발하고, 교회는 즉시 그들을 정리한다. 하나님의 사역은 다 절차가 있고, 이 절차는 모두 사람 생명의 필요에 따라, 사람의 분량에 따라 하나님이 안배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게 과연 무엇인지, 교회에 왜 적그리스도, 악인이 나타나는지, 사람은 어리둥절해서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른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관념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교회에 어떻게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내버려두십니까?” 그러다 그게 다 사람에게 공과를 배우고 분별력을 키워 주기 위한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 뜻을 깨닫는다. 처음에 사람은 악인에 대해 분별이 없어서 교회에서 악인을 출교시키면 관념을 갖는다. 그 사람은 헌금도 많이 하고, 고생도 많이 했으니까 출교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한 일에 대해 반감을 품는다. 그러다 한동안 체험이 쌓여 진리를 깨닫고 악인에 대해 분별이 생기면, 또다시 악인이 출교되어도 관념을 품지 않고 반감도 갖지 않는다. 다시 악인이 악행을 저지르는 상황을 마주하면 분별할 수 있게 돼서 악인이 커다란 악행을 저지르기 전에 모두가 힘을 합쳐 그를 고발하고 제명시킨다. 그러면 악인은 하나님 집에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사람의 이런 분별력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하나님이 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지 않으면 사람은 그런 일을 깨달을 수 없다. 하나님이 일할 때는 절차가 있다. 이 절차는 사람 생명의 필요에 따른 것이지만, 정작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한 게 과연 무엇인지 잘 모르고, 어리벙벙하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속 사역하며 사람에게 많은 공과를 마련해서 배우게 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효과에 이르게 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해하든 말든 인내심 있게 일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을 책망하고 훈계할 때, 한 번 잘못해서 책망했는데 다음번에 또 잘못하면 또 책망하고, 또 드러나면 또다시 책망한다. 사람이 인식이 생기고 더 이상 무감각하지 않으며, 비슷한 일을 다시 만나면 전기에 닿은 듯 예민해져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때까지 인내심 있게 역사한다. 그러면 된 것이다. 하나님도 더는 역사하지 않는다. 다시 이런 일이 닥쳤을 때는 너 스스로 처리하고, 원칙에 맞게 처리할 수 있으니 하나님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는 네가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마음속으로 받아들여서 그것이 네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역하는 절차다. 네가 그걸 체험하면 하나님의 본질, 하나님의 지혜를 알 수 있다. 이는 부인할 수 없으며 100% 확실한 사실이다.
방금 하나님의 사역 절차가 사람의 성품 변화와 관계가 있다고 얘기하였다. 사람이 행위가 좀 달라지고 규칙을 좀 알고 좀 사람다워지게 하면 하나님 사역이 큰 성공을 거두는 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은혜시대에 사역은 이미 끝났을 것이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의 성품 변화입니다.) 그렇다. 성품 변화야말로 진정 구원받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행위상의 변화만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성품상의 변화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기준이다. 방금 전 행위 변화를 나타내는 모습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위해 버리고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 등은 명백히 행위상의 변화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탁에 충성심이 없고, 건성으로 대하고 속이기까지 한다면 그것은 성품 면에서 아직 변화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이제 사람은 그저 행위에서만 꽤나 바람직할 뿐이다. 비교적 성도의 품위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고, 비교적 인성적으로 행동하고, 존엄성과 인격을 어느 정도 갖춘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좋은 행위를 얼마나 많이 하든, 그것이 진리 실행과 무관하고, 양심과 이성,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면 성품 변화와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그건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아무리 규칙에 맞게 행동하고, 아무리 말 잘 듣고, 아무리 목숨을 바치고 의지가 크다고 한들 너희가 지금 나타내는 그런 모습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 요구가 너무 높아서 그런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사람이 지금 이렇게 말을 잘 듣는데 어째서 아직도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한 것일까?’ 너희가 볼 때 지금 이렇게 말을 잘 듣는 것이 순종이냐? (아닙니다.) 그렇다. 지금 말을 잘 듣는 건 단지 이성이 조금 있는 것일 뿐이고, 그건 다 하나님의 징계 덕분이다. 이는 완전히 하나님이 징계로 도달한 효과다. 하나님이 간곡하게 거듭 얘기해서 사람의 양심을 깨우고, 도덕성을 환기시킨 결과, 약간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기 시작하고, 개념 있게 행동하고, 무슨 일을 할 때 물어볼 줄도 알고, 원칙에 위배되게 행동하면 약간의 가책을 느끼게 된 것이다. 요컨대 행위의 변화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는 조건에 미치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상 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 하나님은 사람의 성품 변화를 원한다. 성품 변화에 해당하는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냐? 여러 가지 면에서 어느 정도까지 변화되어야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을 자격이 되느냐? 하나님이 반드시 그 사람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 특히 본분 이행에 합격해야 하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고, 범사에 진리를 구해야 하고, 환난과 시련이 닥쳤을 때도 하나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하고,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뭐라고 하든 무조건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설령 감독하는 사람이 없거나 시험을 만난 상황이라 해도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악행을 조금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눈에는 합격이고, 정식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는 하나님이 한층 더 나아가서 그들을 구원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을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어떤 신호, 어떤 기준이 있는지 너희는 아느냐? (제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의 책벌과 징계를 통해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조금씩 회복하고, 아울러 행위에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기고, 궁극적으로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시작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너희는 이 말에 동의하느냐? (동의합니다.) 훌륭하다. 하지만 이건 단지 그중 하나다. 사람에게 심판과 형벌의 사역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 사람을 평가할 것이다.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하나님에게는 몇 가지 기준이 있다. 우선 하나님의 부탁을 대하는 태도가 어떤지, 즉 사람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본분에 마음과 힘을 다하는지, 충성스럽게 이행할 수 있는지를 본다. 요컨대 사람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삶, 사람이 일상에서 종사하는 일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어째서 이것을 하나의 조건, 하나의 평가 기준으로 삼겠느냐? 너희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평가한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일을 부탁할 때, 사람이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이 부탁한 것인데, 사람이 양심이 있을 때 이를 대하는 방식과 양심이 없을 때 대하는 방식, 사람이 이성이 있을 때 대하는 방식과 이성이 없을 때 대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양심과 이성, 이것은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야 하는 것이다. 그 밖에 양심 지각이 좀 있고, 이성이 좀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회복하면 사람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느냐? 진리 실제를 갖추게 되느냐? 여전히 부족하다. 하나님은 또한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어떤 길을 가는지를 본다. 그렇다면 사람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에 다다를 수 있느냐? 우선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악을 행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최소한의 기준이다. 만약 악을 행한다면 완전히 끝장이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구하려는 사람이 아니다. 그 밖에도 하나님의 부탁을 대할 때 너는 양심과 이성으로 그것을 대하는 것은 물론, 더 많게는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뜻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네게 닥친 일이 네 관념과 상상에 맞든 안 맞든, 너는 순종하는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너의 순종하는 태도이다. 단지 하나님이 한 말씀이 모두 진리이고 옳다고 인정하기만 하면 이것이 순종하는 태도이냐? 결코 아니다. 순종하는 태도의 실제적인 일면이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너는 생명 진입도 깊지 않고, 분량도 아직 너무 작고, 진리 실제라는 부분에 대한 인식도 아직 충분히 깊지 못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따를 수 있고,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면,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이다. 너는 완전한 순종에 다다르기 전에 반드시 순종하는 태도를 먼저 갖춰야 한다. 즉,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옳다고 믿고, 그것을 진리이자 네 실행의 원칙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네가 원칙을 잘 모른다고 해도 규례로 여겨 지켜서라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일종의 순종하는 태도이다. 아직은 네 성품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먼저 순종하는 마음가짐, 순종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무조건 순종하겠습니다. 진리를 많이 깨닫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볼 때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다.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제 순종이 잘못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틀릴 수가 있느냐? 하나님은 진리요, 공의다. 하나님은 잘못할 리가 없다. 다만 하나님이 하는 많은 일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을 뿐이다.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제 관념에 맞든 안 맞든 무조건 말 잘 듣고, 순종하고,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이것이 피조물인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설령 남들이 바보같이 순종한다고 너를 판단해도 개의치 말고, 속으로 하나님은 진리이고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고 확신해야 한다. 이것이 옳은 것이고, 순종하려면 당연히 이런 태도가 있어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지녀야 사람은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이 없고 “저는 눈에 티끌 하나도 용납 못 하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저를 속일 수 없죠. 전 꽤 머리가 좋다고요. 저더러 무조건 순종하라고 하는데, 어림없는 소리죠! 뭐든 저한테 오면 우선 연구하고 분석해야 합니다. 제 뜻에 맞을 때라야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게 순종하는 태도이냐? 이건 순종하는 태도가 아니다. 이는 순종하려는 마음가짐도, 순종하려는 의사도 없는 것이다. “설령 하나님이라 해도 연구해야죠.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와도 저는 연구해야 합니다. 당신이 말씀해도 저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제가 피조물인 건 맞지만, 바보는 아닙니다. 절 바보로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네가 말한다면 끝장이다. 이건 진리를 받아들이는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이성도 없다.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짐승이 아니냐? 사람이 이성을 갖추지 못하면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느냐? 순종하려면 먼저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갖추어야 하고,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이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이성이 없는 것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창조주를 측량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생각 하나를 온 인류가 6천 년 동안에도 제대로 짐작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할지 사람이 한순간에 알 수 있겠느냐? 너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해 온 많은 일을 이미 인류에게 밝혔다. 하지만 명확하게 얘기해 주지 않으면 사람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아마 네가 지금 문자적으로는 이해했을 수도 있지만 20년이 지나야 진정으로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한 바와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은 마땅히 이성을 갖추고 순종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개미나 구더기에 불과한 사람이 창조주를 측량하고자 한다면 그건 가장 비이성적인 일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비밀을 알려 주지 않는다고, 진리를 직접 알기 쉽게 얘기해 주지 않고 늘 구하게 만든다고 원망을 늘어놓는데, 그런 말을 하는 건 옳지 않고 비이성적이다. 지금 하나님이 너에게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해 주는데, 너는 얼마나 깨달았느냐? 하나님 말씀을 너는 얼마나 실행할 수 있느냐? 하나님 사역에는 다 절차가 있다. 만약 하나님이 2천 년 전 당시 사람들에게 말세 사역을 알려 주었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은혜시대에 예수는 죄인의 형상으로 온 인류의 속죄 제물이 되었다. 만약 당시에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느냐? 지금 너희도 그저 개념적인 이론만 조금 이해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 성품의 진정한 일면, 인류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당시 행사의 출발점과 계획 등, 이런 진리는 사람이 절대로,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비밀이고, 하나님의 본질인데 사람이 어떻게 그걸 측량할 수 있겠느냐? 네가 창조주를 측량하려 한다면 그건 너무 비이성적이다. 너는 너무 거만하고 주제넘다! 사람은 하나님을 측량하려 하지 마라. 사람은 그저 진리를 조금 깨달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훌륭하다. 진리를 조금 깨달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는 이미 충분히 얻은 것이다. 따라서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이것이 이성이 있는 것 아니냐? 이것은 절대적으로 이성적인 것이다. 순종하는 마음가짐, 순종하는 태도를 갖추는 것, 이것이 피조물이라면 누구나 최소한 갖춰야 할 조건이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고,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고,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갖추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 정해진 기간이 있느냐? 그렇지 않다. 그건 개개인의 추구와 의지, 진리를 갈망하는 정도에 달려 있고, 개개인이 타고난 양심과 이성, 자질, 그리고 깨닫는 능력에 달려 있다. 순종하는 마음가짐을 갖춘 사람은 곧바로 언행과 행위에 한층 변화가 생긴다. 어떤 변화가 있겠느냐?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다.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라는 건 어떤 뜻이냐? 네가 자기 언행에 일부러 거짓말하는 성분이 줄어서 80%는 진실을 말하게 된다는 뜻이다. 간혹 나쁜 습성으로 인해, 환경이나 모종의 원인으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면, 너는 죽은 파리를 삼킨 것처럼 속으로 여러 날 괴로워한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한 다음 변화가 생겨서 갈수록 거짓말이 줄어들고 내적 상태가 좋아질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볼 때 너는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면 성품이 변화된 것 아닙니까?” 그런 것이냐? 아니다. 그건 단지 행위상의 변화일 뿐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정직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행위상의 변화뿐만 아니라 마음가짐,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본질적인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거짓말하고 속이려는 속셈이 없고 말과 행동에 거짓과 기만이 하나도 없다. 말과 행동이 갈수록 진실해지는데, 갈수록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너에게 어떤 일을 네가 한 것이냐고 물었을 때, 설령 그렇다고 인정하면 뺨 맞거나 벌 받는다고 해도 사실을 말할 수 있다. 설령 얘기하면 큰 책임을 져야 하고, 죽거나 멸망할 수 있다고 해도 사실대로 말할 수 있고, 이렇게 진리를 실행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자 한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굳건해졌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 중 한 가지 실행 기준을 선택하는 일이 너에게 별로 문제 될 게 없고, 모두 자연스럽게 도달하고 실행해 낼 수 있다. 외부 환경의 구속, 혹은 리더 일꾼의 지적, 혹은 하나님이 곁에서 감찰하고 있다는 느낌이 없어도 스스로가 이미 자연스럽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외부 환경의 구속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가 두려워서라거나 양심의 가책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남들의 비웃음 혹은 감독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고 자기 행위의 옳고 그름을 가늠할 수 있고, 자신의 행위가 진리에 부합하는지,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면, 하나님 입장에서 너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기준을 이미 기본적으로 통과했다.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이다.
지금까지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세 가지 조건에 대해 교제했다. 첫째는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것이고, 둘째는 순종하는 태도이고, 셋째는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 조건은 어떻게 판단하느냐? 기준이 무엇이냐? (일부러 거짓말하는 경우는 적고 진실을 말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점, 이 한 가지는 너희가 판단할 줄 알 것이다.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위한 세 번째 조건이다. 두 번째는 순종하는 태도이다. 순종에 포함된 세부 내용 중 주된 것은 하나님 사역에 대해 연구하지도 분석하지도 않고, 오로지 순종하는 태도만 가지는 것이다. 그 밖에도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여 거짓말이 갈수록 줄어들고, 대부분의 경우 진실을 말하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인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관적인 면에서의 협력, 즉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최선을 다해 진리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다. 순종하는 마음가짐은 사람의 주관적인 면에서 이루게 되는 효과이다. 정직하게 살 수 있어 기본적으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 이 역시 주관적인 면에서 사람이 열심히 추구해 도달하게 되는 효과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또 한 가지 주요 조건이 있다. 우선 너희에게 단서를 줄 테니, 내가 말한 내용에 따라 묵상해 보면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서 끝까지 갔을 때, 일생에서 사람이 잘못한 일이 많겠느냐, 적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한 행위가 많겠느냐, 적겠느냐?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못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거역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회개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회개의 마음이 있는 것은 곧 양심이 있고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양심과 이성, 이것은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사람이 최소한 갖춰야 하는 것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들은 누구도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없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는데 전혀 회개할 줄 모른다면 이것은 어떤 인간이냐? 전혀 회개할 줄 모르는 자가 하나님을 끝까지 따를 수 있겠느냐? 진실로 변화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왜 그런 것이냐? (회개의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조건에 관계된 것인데, 반드시 회개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동안, 사람은 어리석음과 무지 때문에, 또한 각종 패괴 성품 때문에 항상 패역을 드러내고, 때로는 하나님에 대해 오해와 원망을 품고 비뚤어진 길로 나아가게 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게 관념을 품은 나머지 한동안 소극적으로 지내며 사역을 게을리하고, 믿음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사람의 일생 중에는 어떤 단계에서도 패역 행위가 있다.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이 있고, 일이 닥쳤을 때도 하나님이 한 것임을 알면서도 때로는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데, 겉으로는 순종할 수 있어도 내심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내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어디서 알 수 있느냐? 여기에는 한 가지 모습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무엇이든 다 알면서도 자신이 한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나와 잘못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구하고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전에는 말도 잘 안 듣고, 분량도 작고, 어리석고 무지해서 언제나 당신을 거역했습니다. 이 사실을 이제는 인식했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이것은 무슨 태도냐? (뉘우치는 태도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추고, 또한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도 갖추었지만, 잘못한 일에서만큼은 반성할 줄도 뉘우칠 줄도 모르고, 예전 일은 지나갔으니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속으로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면, 이것은 무슨 성품이냐? 어떤 행위냐? 이런 행위의 본질은 무엇이냐? (강퍅함입니다.) 강퍅함이고, 완고하게 외곬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옛날에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서 뭐라고 말했느냐?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욘 3:4)라고 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서둘러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악한 길에서 떠났다. 이것이 바로 회개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회개한다는 것, 이것은 사람에게 크나큰 기회다. 어떤 기회이냐?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기회다. 본분을 이행하든 구원받기를 추구하든, 진실된 회개가 없이는 계속해 나아가기가 힘들 것이다. 각 단계마다 하나님이 네게 징계하고 책벌하든, 혹은 일깨우고 권면하든, 너와 하나님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는데도 네가 뉘우치지 않고 계속해서 본인 생각을 견지하고 본인 관점과 태도를 고수한다면, 비록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가지만 너와 하나님 사이에 발생한 충돌, 하나님에 대한 너의 오해와 원망, 패역이 해결되지 않고, 네가 마음을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를 도태시킬 것이다. 네가 맡은 본분을 내려놓지 않은 채 여전히 본분을 지키고 있고, 하나님의 부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충성심이 있어 사람이 볼 때 그런대로 괜찮겠지만 한 가지, 너와 하나님과의 의견 충돌이 끝까지 풀리지 않았다. 네가 진리로 해결하지 않고, 진실로 하나님 뜻을 깨닫지 못한 결과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날로 깊어지고, 언제나 하나님이 틀리고 너는 억울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뉘우치지 않은 것이다. 너의 패역과 관념,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줄곧 자리 잡고 있어 이로 인해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없고, 계속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과 대립한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사람,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냐? 어째서 하나님은 사람이 뉘우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하나의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마땅히 갖춰야 할 태도는 무엇이냐? 바로 창조주가 어떻게 하든 모두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네가 이 점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창조주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라는 이 말이 너에게는 빈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래도 네가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너에게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너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회개의 마음을 지니고, 뉘우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뉘우치지 못한 일이 많은데, 지금 뉘우치면 늦지 않겠습니까?” 늦지 않다. 한편 또 이런 사람들도 있다. “제가 뉘우칠 게 뭐가 있습니까? 예전 일은 이미 다 지나갔고 잊었는데요.” 하루라도 네 성품에 변화가 없고, 하루라도 네가 본인이 한 것 중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 하나님과 합할 수 없는 부분이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다면, 너와 하나님 사이의 엉킨 매듭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것이고, 이 일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이 성품이 네 내면에 있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생각과 관점, 태도가 네 내면에 있으면, 적절한 상황을 만났을 때 그런 관점이 또다시 튀어나와 너와 하나님 사이의 갈등이 또다시 폭발할 것이다. 그러니 예전의 일을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발생하는 일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뉘우쳐야 하고, 자신의 생각과 의도를 내려놓아야 한다. 너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이것도 일종의 순종하는 태도다. 하지만 좀 더 적절히 말하자면,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고 창조주를 대하는, 일종의 뉘우치는 태도이고, “창조주는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다.”라는 이 사실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네가 뉘우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 혹은 패괴된 인류가 옳은 것이라고 공인하는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자 긍정적 사물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를 지닌다면 그것은 창조주의 신분을 인정하고, 그의 본질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이 뉘우치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만약 사람이 잘못한 게 없으면 뭘 뉘우쳐야 합니까?” 설령 당장 무슨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너는 미리 회개 방면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네가 당연히 갖추어야 할 진리다. 진리를 깨달으면 너는 부적절하게 처리한 일들을 발견할 수 있고, 속셈과 마음가짐, 즉 성품 방면에 관계된 문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부지불식간에 수면 위로 떠올라 너와 하나님 사이가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지만 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사람이 어떤 일에서 자기 위치에 제대로 서지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다하지 못했다면, 그러니까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면 마음에 매듭이 생긴다. 이것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하느냐? 우선은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뉘우치는 마음은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1~2년 리더를 했는데 자질 부족으로 그 사역을 감당하지 못했다. 어떤 일도 간파하지 못하고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줄도 모르고 실제적인 사역도 할 수 없어서 결국 교체되었다. 만약 그가 교체된 뒤에 순종할 수 있고, 또 계속해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고, 뉘우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먼저 이렇게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잘못되지 않았어. 내가 자질이 너무 뒤떨어져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런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고 교회 사역과 형제자매의 생명 진입마저 지체시켰어. 하나님 집에서 날 출교시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야. 난 정말 뻔뻔해. 계속해서 이 자리에서 버티면서 내가 정말 대단한 사역을 한 것처럼 생각했어. 너무 비이성적이야!’ 그가 자신을 증오하고 속으로 후회하는 것은 일종의 뉘우치는 마음을 보여 주는 것 아니겠느냐? 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뉘우치는 마음이 있다는 의미이다. ‘난 그 오랜 시간 리더 자리에서 지위의 복만 추구했어. 도리만 얘기하고, 도리로만 무장하고, 생명 진입은 추구하지 않았어. 이번에 교체되니까 내가 얼마나 형편없고 부족한지 알게 되었어. 하나님은 잘못하시지 않았고 나는 순종해야 해. 전에 지위가 있을 때는 형제자매들도 참 잘해 주고 어딜 가든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지금은 다들 아는 척도 안 해 주네. 사람들한테 버림받았구나. 이것도 당연한 거고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보응이야. 또한 피조물이 하나님 앞에서 지위가 어디 있겠어?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그건 결말도, 종착지도 아니야.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부탁은 나더러 높은 자리에 서서 그 지위를 누리라는 게 아니라 본분을 이행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거야.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 해. 비록 순종이 꽤 어렵지만, 그래도 순종해야 해. 하나님은 잘못 하실 리 없어. 설령 내가 천 가지 만 가지 이유를 댄다 해도 그건 다 진리가 아니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이 진리야!’ 그가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이 바로 뉘우치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갖춘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평가하겠느냐? 양심 있고 이성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이 평가가 높은 평가냐? 아직도 그리 높은 평가는 아니다. 단지 양심과 이성이 있는 것일 뿐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는 수준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 입장에서는 이미 대단한 일이고, 순종할 수 있는 것도 아주 잘한 일이다. 그다음 이 사람이 어떻게 추구해야 본인에 대한 하나님의 시선을 바꿀 수 있을지는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달렸다. 만약 진정한 회개 없이 지위를 잃었다고 본분도 충성스럽게 이행하지 않고 건성으로만 임한다면 완전 끝장이다. 바로 도태될 사람이라는 말이다. 속으로 여전히 ‘내가 리더를 하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공은 없어도 내 딴에는 애썼어. 또 내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나도 적지 않게 했어. 성과가 있고 없고를 떠나 어쨌든 빈둥대지 않았다고. 빈둥대지 않은 점을 봐서라도 하나님이 이렇게 마음대로 날 도태시키시면 안 되지. 이젠 지위가 없는데도 아직도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네. 이건 사람을 갖고 노는 거 아냐?’라며 원망한다면, 교체된 후에는 어떤 본분도 이행할 의욕이 없다면 이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것이냐? 충성심도, 순종하는 마음도, 뉘우치는 마음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는 가련하지 않으냐? 너무나 가련하다. 그동안 그는 헛되이 믿은 것이다. 오랜 시간 설교를 들었어도 진리는 전혀 실행하지 못했고, 남들에게 온통 글귀와 도리를 얘기했지만 자기는 전혀 행하지 못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었다. 남들에게는 숱한 도리를 얘기했지만 결국 자기가 안고 있는 그만한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으니 너무나 가련하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으려 하느냐? 교체되고 나서도 거기서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고 시달리면서 전혀 순종하지 않았다. 이건 쓸데없이 시달리는 것이 아니냐? 네가 뭣 때문에 시달리든 전혀 무가치하다! 다른 건 둘째 치고 교회에서 너를 자리에서 교체하자 너는 화를 내고, 겨루었다. 이것만 봐도 너는 사람 될 자격이 없고, 하나님의 피조물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런데도 무슨 이치를 따지려고 하느냐? 네가 아무리 따지고 들어도 소용없다. 이렇게 오래 하나님을 믿었으면서 그만한 순종도 없는데, 지금껏 하나님을 믿은 성과는 어디에 있느냐? 가련하고, 가증스럽고, 역겹다! 본인에게 주어진 자리를 벼슬로 생각했는데, 지위가 생겼다고 그것이 성품 변화를 의미하느냐? 그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냐?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너에게 맡긴 부탁을 벼슬로 생각하다니, 역겹지 않으냐? 하나님 집에 벼슬이 어디 있느냐? 역대 성도 중에도 벼슬을 맡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2천 년 동안 사람들은 바울을 숭배했지만 그를 어떤 벼슬에 앉았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벼슬’이라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건 상도 아니고,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부탁도 아니니 내려놓아야 한다. 벼슬만 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칭찬할 수 있겠느냐? 구원에 이를 수 있느냐? 절대 안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려면 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얘기했다. 이것은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사람이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네가 창조주와의 사이에 구세주와 구속받은 사람의 관계를 맺고 싶다면, 하나님에게 구원받고 싶다면, 반드시 네 위치를 바로잡고 네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위치와 지위를 확실히 해야 한다. 그렇다면 네 위치는 무엇이냐?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은 누구냐? 짐승이 아닌 사람이다. 언제든 너는 자신이 피조물이자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고, 네가 서야 할 위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너에게 은혜와 축복을 좀 베풀어 주면 너는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린다.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고 감춘 채 너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며 위로해 주는 것은 너를 높여 주는 것인데, 너는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등한 위치에 서서 자신을 높이고자 한다. 이건 대체 뭐 하는 인간이냐? 이런 게 사람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 같은 피조물은 인정하지 않으니 한쪽으로 물러나라! 하나님이 너를 인정하지도 않는데, 온전케 할 리가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온전케 하기 위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확실히 이해되지 않느냐? 그러니 뉘우치는 마음을 갖추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건 일종의 마음가짐인 동시에 일종의 태도이기도 하다. 이런 태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구원받고 온전케 되고 싶다면 마땅히 갖춰야 할 중요한 실행 원칙이다. 스스로를 아주 위대하고 존귀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가 올바르고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는 위대하지도, 영예롭지도, 올바르지도 않다. 너는 하찮고 천하며 사탄에게 패괴된 피조물이다. 창조주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존재이다. 너는 벌써 구원받은 사람도, 완벽한 사람도 아니다. 이것이 네가 갖추어야 할 이성이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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