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3) 제 1 부

오늘은 관념의 문제에 대해 계속 교제해 보자. 관념의 문제는 전에 두 번 교제한 적이 있는데, 오늘 한 번 더 교제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전에 교제했던 내용은 나중에 너희끼리 다시 교제하며 조금씩 묵상하고 체험해 보도록 해라. 이런 주제는 하루 이틀에 소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겪어 보고 체험해 봐야 차츰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너희가 기억에 의존해서 교제하는 것은 단지 말만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신 후에는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 생활에서 일정 기간 체험해야 비로소 진실된 인식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의 관념은 주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 사역에 대해 가지는 관념이다. 이 두 가지 방면의 관념은 사람의 추구와 일을 바라보는 관점에 가장 크게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인식과 태도에도 영향을 주고, 나아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걷는 길, 사람이 선택하는 인생의 방향과 목표에도 영향을 미친다. 앞서 두 번의 교제를 통해, 너희는 지금 관념이란 과연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한 상상, 이것이 일종의 관념이다. 이런 상상은 주로 언행이라는 외적인 방식에서 드러나고, 또한 일상생활의 의식주 같은 세부적인 일에서 드러나는데, 이것은 가장 초보적인 수준이다. 더 나아가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추구하는 바와 걷는 길에 대한 상상, 그리고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요구와 상상, 오해 등이 있다. 이 오해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이냐? 왜 오해라고 하는 것이냐? 오해라고 하면 분명 정당한 생각이 아니라 사실에 부합하지 않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에 전혀 맞지 않고 서로 위배되는 것, 혹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 지식에서 비롯된 사람의 뜻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는 하나님 자신과도, 하나님의 사역과도 전혀 관계가 없다. 이런 관념, 상상, 오해, 요구가 생겨날 때는 하나님과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이 이미 절정에 달했다는 의미이다. 그때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겠느냐? (간격이 생깁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다면 문제가 심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간격이 생길 때 사람의 관념과 상상은 무척 심해진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생긴다면, 즉 하나님이 하는 몇몇 일에 불만이 생기고, 하나님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싶지도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고 싶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싶지도 않고,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성품에 의심이 생긴다면, 그다음에는 또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반발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구하지 않으면 이 오해로 인해 사람의 마음에 간격이 생기는 동시에 곧바로 반발심이 들게 된다. 진리에 반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발하고, 하나님의 주재에 반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에 불만을 품고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하시는 건 적합하지 않습니다. 저는 찬성하지 않고,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곧 “저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이건 제 선택입니다. 저는 다른 목소리를 내겠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진리, 하나님 요구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겠습니다.”라는 뜻이다. 이건 어떤 행위냐? (대드는 행위입니다.) 반발이 생긴 후에는 곧바로 대들고 맞선다. 수위가 높아진 것이다. 사람의 패괴 성품이 주도권을 잡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단지 하나의 관념으로도 간격이 생기고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얼른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으면 그 간격이 점점 커져서 두터운 벽이 될 것이고, 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진실로 존재함을 보지 못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신성 측면의 본질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입은 육신이 과연 하나님인지 의심이 들면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도 싫어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싫어질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갈수록 멀어진다. 왜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느냐? 하나님이 하는 일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의 존엄성에 상처를 주는 바람에 자신의 인격이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일이냐? (사람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고, 본인에게 생긴 일이 그의 이익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자신의 사치스러운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반발심을 품고,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 관념에 맞지 않게 사역하는 것에 극도로 불만을 품는다. 그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고, 하나님이 하는 일에 관념과 오해를 품는다. 이는 사람의 패괴 성품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런 간격이 생겨난 후, 사람이 관념대로 살면서 드러내는 각종 패괴 성품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구하지도, 기다리지도, 순종하지도 않고, 나아가 경외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다. 먼저 연구하고 판단한 다음 정죄하고, 그런 후에는 반발할 것이다. 이런 행위는 구하고, 기다리고, 순종하고,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이런 긍정적인 모습과 정반대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위는 부정적 사물에 속하고, 패괴 성품의 표출이다. 패괴 성품은 그의 행위를 통제하고 그의 생각을 통제하고, 또한 그가 사람과 일, 사물을 판단하는 태도와 속셈, 관점을 통제한다. 사람이 연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또한 반발하면, 그다음으로 취하는 행동은 무엇이냐? (대항하는 것입니다.) 대항할 것이다. 사람이 대항하는 모습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소극적이 되고, 본분을 내팽개칩니다.) 소극적이 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일을 게을리하고 본분을 내팽개친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관념을 퍼뜨립니다.) (판단합니다.) 판단하고 관념을 퍼뜨리는 것은 모두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하는 행위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하나님을 배반하고 참도를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것이다. 이 지경에 이르면 마귀의 본성이 완전히 드러난 것인데, 철저하게 하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고, 언제든 하나님에게서 떠날 수 있게 된다.

방금 얘기한,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하는 행위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느냐? (일을 게을리하고 본분을 내팽개칩니다.)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한다. (그리고 관념을 퍼뜨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해 보자. 관념을 퍼뜨리는 것에 불평이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때로는 원망이 섞이기도 하는데, 그 뜻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것도 공의롭지 않습니다.”, “제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저는 사람은 안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데, 거기에는 원망이 담겨 있다. 일을 게을리하고, 관념을 퍼뜨리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행위들도 비교적 심각하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배반이다. 이 네 가지는 비교적 분명하고 심각하며,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적하는 성질을 띤다. 이 몇 가지에서 또 어떤 구체적인 모습이 너희가 생각나거나 본 적 있거나 혹은 전에 가졌던 모습이냐? (선동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만을 퍼뜨리고 싶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선동합니다.) 이것은 관념을 퍼뜨리는 행위에 해당하는 모습 중 하나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도할 때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세요. 제가 한 일이 옳아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드러날 겁니다. 하나님은 공의롭습니다.” 이 말은 얼핏 듣기에는 맞는 말이고 떳떳한 말 같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복과 불만이 숨어 있다. 이것은 속으로 대항하는 것이고 일을 게을리하고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다른 측면이 또 있느냐? (일을 게을리하는 행위에는 자포자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태도도 있습니다. 어쨌든 자신은 이런 사람이고, 이런 본성을 지녔으니 누구도 구원해 줄 수 없다고, 하나님이 멸하시려면 멸하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건 일종의 소리 없는 대항이다. 사실 진정한 내적 상태는 소극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한 일은 이해가 안 되고, 사람이 간파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하라는 생각이다.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으로는 하나님의 안배에 깊이 반발하고, 무척 불만스러워하고 불복한다. 사람이 하나님이 한 것임을 인정하고, 별다른 요구도 없는데, 여전히 이것을 대항의 정서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어째서 이렇게 규정하겠느냐? 사실, 그의 의식에는 그 일을 정죄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하나님이 하신 그 일은 잘못된 겁니다. 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다른 일은 몰라도 그 일은 순종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일을 게을리하는 건 그 일 때문입니다.”라며 규정하려는 생각도 없다. 그의 잠재의식에 있는 그의 내적 상태는 이렇지 않고, 그에게는 이런 의식이 없다. 단지 속으로 조금 불복하고, 불만스러워하거나 불평하는 것이다. 어쩌면 일부 사람들도 하나님이 한 일이 잘못되었다고 정죄할 수도 있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 그의 주관적인 바람에서 볼 때, 그의 의식에서는 이렇게 정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쨌든 그가 믿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행위를 대항이고, 일을 게을리하는 것이라고 하고, 소극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냐? 소극성 자체는 일종의 반발이자 대항인데, 여기에는 몇 가지 태도가 있다. 우선 사람에게 자포자기하고 일을 게을리하는 내적 상태가 생길 때, 사람은 속으로 이 내적 상태가 잘못된 것이라고 의식할 수 있느냐? (있습니다.) 누구나 다 의식할 수 있다. 믿은 지 2~3년밖에 되지 않아서 설교를 많이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 일을 잘 알지 못하지만, 3년 이상 믿으면서 자주 설교를 듣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면 모두 의식할 수 있다. 사람이 이런 내적 상태가 옳지 않다고 의식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대항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먼저 구해야 한다. 무엇을 구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왜 이렇게 배치했는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구해야 한다. 이는 긍정적인 것이고,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태도다. 또 무엇이 있느냐? (받아들이고, 순종하고,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은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내려놓을 수 없는데, 내려놓기까지는 절차가 있다. 그렇다면 가장 적절하고 합당한 실행은 무엇이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그저 공허한 말 몇 마디로 형식만 거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 저는 순종하기 원합니다. 당신께서 환경을 마련하고 안배해 주셔서 제가 순종하게 해 주십시오. 만약 제가 순종하지 않으면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이런 빈말 몇 마디면 잘못된 내적 상태가 바뀌겠느냐?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스스로를 돌이키기 위해서는 실행법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실행해야 돌이킬 수 있느냐? (적극적으로 하나님 뜻을 구하는 한편,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옳고 자신은 틀렸음을 인정하며 스스로를 부인해야 합니다.) 그건 두 가지 실행법으로, 적극적으로 하나님 뜻을 구하는 것과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옳고 자신은 틀렸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훌륭한 방법이고 전부 맞는 말이지만 한 가지가 가장 실용적이다. 어느 것이 실용적이고, 어느 것이 빈말이냐?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실용적인 방법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너에게 직접 알려 주지 않는다. 또한 네가 깨닫도록 갑자기 너에게 빛 비춤을 주지도 않고, 마침 네가 깨달아야 할 말씀을 바로 먹고 마실 수 있게 해 주지도 않는다. 이런 방법들은 사람에게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하나님 뜻을 구하는 방법이 너희에게 효과가 있겠느냐? 효과적인 방법은 가장 좋은 방법이고, 가장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방법이다. 효과가 없는 방법은 듣기에는 아무리 그럴싸해도 이론에 불과하고, 말에만 그칠 뿐 성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느 방법이 실용적이냐? (두 번째인 하나님이 진리이고 자신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이성적인 것이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식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이성을 갖추어 자신을 내려놓고 부인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전에 제가 옳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찬성하고 동의했고, 저도 마음속에 별다른 죄책감이 없습니다. 그 외에 제 마음가짐도 옳은데, 어떻게 틀릴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스스로를 내려놓지 못하고 부인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너의 이 ‘옳음’이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고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너는 틀린 것이다. 네가 아무리 순종하는 태도가 있고, 아무리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더라도, 혹은 입으로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하더라도 속으로는 여전히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며 소극적인 상태로 살아간다면, 이 본질은 역시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이는 네가 아직도 자신이 틀렸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틀렸다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오해와 관념이 생겼을 때는 우선 하나님은 진리이고,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으므로 분명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일종의 형식이냐? (아닙니다.) 만약 네가 단지 이런 실행법을 형식적으로나 표면적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잘못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영원히 인식할 수 없다. 자신을 인식하려면 몇 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우선 자신이 하는 일이 진리에 부합하고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봐야 한다. 일단 마음가짐은 보지 마라. 간혹 마음가짐은 옳지만 실행 원칙이 틀릴 때가 있다. 이런 경우가 많으냐, 적으냐? (많습니다.) 네 실행 원칙이 틀렸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어쩌면 네가 구했지만 원칙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전혀 구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좋은 마음과 열정에 따라, 자신의 상상과 경험에 따라 행동해 실수를 저질렀을 수도 있다. 너는 상상할 수 있느냐? 네가 예상하지 못했을 때 실수가 생기게 된다. 그렇다면 너는 드러나지 않겠느냐? 드러난 후에도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한다면, 그건 어디가 잘못된 것이냐?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이 잘못이다. 가장 큰 잘못은 네가 어떤 일을 잘못 처리하고 원칙을 어겨서 손실이나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일을 잘못 처리한 뒤에도 억지를 부리고,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하나님에게 대항하며 하나님 사역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를 부인한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크고 심각한 잘못이다. 사람의 이런 내적 상태를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자신이 한 일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주재가 옳다는 것과 거기에 어떤 의의가 있는지를 인식하고 말고를 떠나, 우선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바로 대항하는 내적 상태다. 이런 내적 상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가장 먼저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방금 얘기했던,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실행 방법은 사람에게 그다지 실제적이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별로 실제적이지 않다면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닌가요? 구해 깨달을 수 있는 것들도 구할 필요 없습니다. 이 단계는 건너뛸 수 있어요.” 그렇게 해도 되느냐?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사람은 구할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 이런 사람은 이해가 치우친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은 조금 요원해서 금방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름길을 가는 비교적 현실적인 방법은 먼저 자신을 내려놓는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이 틀렸고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런 다음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한다. 바로 이런 절차이다. 이 절차는 보기에는 간단하지만 실행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 각종 상상과 요구,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사람이 자신을 부인하고 내려놓는 일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주제는 더 깊이 교제하지는 않겠다. 계속해서 지난 두 차례 얘기했던 관념에 관한 문제를 교제해 보자.

지금까지는 주로 사람이 관념 때문에 하나님을 오해하고, 그 오해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그 간격으로 하나님에게 반발심을 갖게 된다고 교제했다. 반발심은 어떤 성질이냐? (대항하는 것입니다.) 대항하고 거역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대드는 것은 하루 이틀 만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뿌리가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고, 게다가 삼각한 상태라면 병세가 어쩌면 이렇게 빨리 악화되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사실, 그 병은 몸속에서 일찍부터 생긴 것이며 뿌리까지 있었던 것이다. 밝혀진 그날에 병이 생긴 게 아니라 밝혀진 그날에 병이 발견된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대들게 되는 것은 사람이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 예상할 수 있느냐? 절대 아니다. 그럼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초심이냐? “나는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야. 그저 하나님을 만난 뒤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하고, 그런 다음 입신양명해서 내 인생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나님을 믿는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멍청하고 바보 같고 악한 사람이라 해도 이렇게 계획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제대로 하나님을 믿으며 좋은 사람이 되려 하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자 한다. 비록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하나님의 최소한의 요구에는 도달하려 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고 한다. 이 얼마나 훌륭한 바람이냐? 그런데 어쩌다 끝에 가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하나님에게 대항하게 되었느냐? 사람 스스로도 속으로 내키지 않고 또 어찌 된 일인지도 모른다. 하나님에게 대들고 대항하는 얘기를 할 때면 기분이 좋지 않고, 괴롭다. ‘사람이 어쩜 그럴 수 있나? 다른 사람이 그런다고 해도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것은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한 것과 같다. 베드로가 한 말은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지만 그가 드러낸 모습은 그의 소망과 지향하는 바에 이르지 못했다. 사람의 연약함은 본인이 예상하지 못한다. 일이 닥치면 사람의 패괴가 드러난다. 사람의 본성 본질, 사람의 패괴 성품이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생각과 행위를 주도한다.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으면 각종 관념이 생기고, 각종 욕망과 요구가 생기고, 또 각종 패역 행위가 생겨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사람의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 하나님 믿을 때의 초심도 아니고, 사람이 속으로 원하고 바라던 일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은 이런 결과를 빚어낼 수 있다. 이 관념들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앞날, 운명, 종착지가 모두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품는 오해를 해결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관념, 하나님 사역과 하나님 본질, 하나님 성품에 대한 관념을 해결해야 한다. 이 관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들을 이해하고, 알고, 인식해야 한다. 그럼 이런 관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겠느냐? 그러면 본론으로 돌아오게 된다. 역시 몇 가지 실제 사례를 얘기해 사람의 그 관념과 태도를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 이런 사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은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살펴보고, 반면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상상하는지를 살펴보자. 이 두 가지를 구분해서 확실하게 이해하고, 서로 대조해 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 하나님이 사람을 주재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는 방식과 하나님의 사역을 확실히 인식하고 나면, 사람은 하나님에게 더 이상 관념을 갖지 않게 되고, 하나님과의 간격도 사라지고, 마음속에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대드는 내적 상태도 생기지 않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그런 문제는 직접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어느 방면의 관념 문제든 그 해결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떤 일이든 진리와 연결시켜야 하는데, 어떤 일이든 다 진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관념은 무엇이냐? 역시 하나님의 사역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자. 일부 사례를 근거로 그 안에 담긴 하나님 사역의 원칙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고 주재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방식은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아보자. 한 가지 사례가 어쩌면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과 관련될 수 있고, 또 어쩌면 하나님이 한 사람을 규정하는 방식, 한 사람의 결말을 규정하는 것과도 관련될 수 있고,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과도 관련될 수 있다. 사람에게 이런 것들을 알게 하려면, 내용 없이 그저 하나님이 어떻고, 하나님이 6천 년 사역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말한다면,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면 너희가 보기에 적절한 것 같으냐? 받아들이기 쉽겠느냐? 예를 들어, 하나님이 6천 년 사역을 하는데, 두 번째 단계 사역은 유대에서 했고, 하나님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대했고, 거기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이라고 얘기했다고 하자. 이렇게 얘기하면 잘 이해가 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재하면서 세상의 여러 인종을 어떻게 대하고, 속으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들의 땅은 어떻게 경계를 짓고, 왜 그들을 각각 다른 땅으로 구분했고, 특히 어떤 좋은 사람들이 사는 곳은 사람의 바람대로 되지 않지만 어떤 악인이 사는 곳이 훨씬 좋은 이유는 무엇이고,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분배하는 원칙은 무엇인데, 여기서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는 방식을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면 이해하기 쉽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건 사람의 일상생활 가운데서의 성품 변화, 생명 진입과 비교적 요원하고, 게다가 비교적 추상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요원하고 추상적이라고 하는 것이냐? 현실 생활 속에서는 이상(異象) 방면의 진리만 아는 것, 이를테면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주재하고 이끄는지와 같은 진리의 세부적인 내용만 아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현실 생활 속 문제와는 조금 거리가 있고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역시 생활 속에서 사람이 보고 듣고 느낀 사례부터 얘기하고, 그런 후에 너희가 거기서 식견을 넓히도록 해야 한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혹은 그 이야기의 내용이 어떤 사람, 어떤 일에 관계되든 상관없다. 심지어 그 이야기는 네가 전에 했던 일들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이야기 자체가 가져오는 효과는 사람에게 오늘 얘기한 주제와 관계된 한 방면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얘기하는 것은 모두 나름의 목적이 있고, 모두 그 일 자체가 지녀야 하는 가치, 그 일에서 나타나는 진리와 관계가 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첫 번째 사례다. 오래전, 한 교회에서 “하나님께서는 늘 저희에게 말씀하시고 설교하십니다. 말씀을 많이 하시다 보면 어떤 때는 기침도 하시게 되죠. 하나님께서 설교도 순조롭게 하시고 기침도 덜하시라는 뜻에서 저희가 시럽형 기침약을 보내 드립니다.”라며 시럽형 기침약을 보내왔다. 그 약을 가져온 것을 보고 어떤 형제가 말했다. “이게 기침약이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어디에 쓰는 약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함부로 하나님께 마시라고 드리면 안 됩니다. 마셨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약입니다. 독성 없는 약은 없으니까 마시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죠!” 옆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생각했다. ‘사려 깊은 생각이야. 그렇다면 하나님께 마시라고 드릴 수 없지.’ 당시에는 나도 그 약이 필요 없어서 우선은 두기로 했는데, 나중에 사용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이 일은 그렇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일이 그걸로 끝이겠느냐? 아직 끝이 아니다. 이 이야기, 그 약 사건은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누군가 그 형제가 그 약병을 들고 마시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발견 당시에는 반쯤 남은 상태였다.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했다. 그 형제는 그 약을 몽땅 마셔 버렸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이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이 일이 오늘 얘기하려는 관념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우선 이 이야기가 너희에게 어떤 울림이나 충격을 주었느냐?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느낀 점은 무엇이고, 어떤 충격을 받았느냐? 대개 충격을 받은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한다. ‘아니, 그건 하나님께 바친 건데 어떻게 사람이 마실 수가 있지?’ 이것이 첫 번째 충격이다. 두 번째 충격은 이렇다. ‘계속 마시더니 다 마셔 버렸네!’ 충격 외에 또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너희는 그 형제가 한 일, 그의 이런 모습들, 즉 이야기 전체에서 발생한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하나님이 어떻게 할지,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등을 생각하지 않겠느냐? 여기에서 사람의 관념이 생겨나지 않겠느냐? 우선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는 제쳐 두고, 그 충격이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지부터 얘기해 보자. 사람은 단지 양심에 불편한 느낌이 좀 들 수 있지만, 그 사건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지도 못한다. 그다음에는 도의나 도덕, 신학 이론, 글귀와 도리에서 비롯된 질책과 비난이 생기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진리가 아니다. 진리에 관련되는 얘기를 하자면, 이 사건 자체에 대해 사람이 품게 되는 관념이나 하나님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요구 등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관해 사람이 품는 관념과 생각이다. 네가 충격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패역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어느 날 하나님의 제물 중에서 네가 무척 좋아하거나 아주 필요한 물건을 발견하여 너에게 아주 큰 유혹이 되는 상황에서 네가 하던 대로 횡령한다면 그 순간 너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충격은 단지 양심의 작용, 인성의 도덕적 기준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진리가 일으키는 작용이 아니다. 네가 이 일에서 생긴 관념을 해결하고, 이 일에서 진리를 깨닫는다면, 그런 일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과 오해가 해결되고, 그런 일에서 진리를 깨닫고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잘 생각해 보아라. 이 일에서 사람은 어떤 관념을 갖게 되고, 또 어떤 관념 때문에 네가 하나님을 오해하고, 너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생기고, 심지어 하나님에게 대항하겠느냐? 우리는 이런 내용을 교제해야 한다. 그 일이 발생했을 당시 그 형제는 속으로 가책을 느꼈을지 대답해 보아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약을 몽땅 마셔 버린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석하기 매우 쉽다. 그렇지 않으냐? 첫 모금부터 마지막 모금을 마실 때까지 전혀 거리낌도 없었고, 중간에 멈추지도 않았다. 한 모금 마셔 보곤 더 마시지 않았다면 가책을 느낀 셈이다. 그것은 중간에 멈추고, 결국에는 자제해서 더는 마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형제는 그러지 않고 끝까지 다 마셨고, 만약 더 있었다면 그것도 마셨을 것이다. 이로써 그에게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일을 어떻게 바라보겠느냐? 이것은 너희가 알아야 하는 점이다. 하나님이 이 일을 어떻게 대하는지, 어떻게 평가하고 정의하는지를 보면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일하는 원칙과 방식도 알 수 있다. 동시에 사람의 관념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는데, 사람이 “하나님은 사람을 이런 태도로 대하시고, 이런 방식으로 처리하시네요. 예전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말하게 할 수도 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와 하나님 사이에 간격이 있고, 네가 하나님에게 오해를 품을 수 있고, 이 방면에서의 하나님 사역과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에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일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그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약입니다. 독성 없는 약은 없으니까 하나님께 마시라고 드리면 안 됩니다. 마시면 부작용이 있을 수 있죠!” 그가 이렇게 말한 속셈과 목적은 무엇이냐? 그 말은 진심이냐, 거짓이냐? 그건 진심이 아닌 사람을 속이는 거짓말이고, 진실된 말이 아니다. 그 후에 그가 취한 모든 행동, 그가 드러낸 모든 것을 보면 그의 속내를 알 수 있다. 그러면 그의 그런 거짓말, 그런 행동에 대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했느냐? (아무것도 안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 그가 그 말을 했을 때는 진심이 아닌 거짓이었다. 하나님은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고 긍정적으로 인도하거나 소극적으로 나무라는 방면으로 일을 하지 않았다. 사람 내면에 간혹 양심의 가책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건 하나님이 일하는 것이다. 이 형제가 당시 가책을 느꼈느냐? (못 느꼈습니다.) 그는 가책을 느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말까지 그럴싸하게 했다. 하나님은 그를 나무라지 않고 그저 옆에서 지켜보았다. 왜 그랬겠느냐? 사실이 전개되는 과정을 보려고 그랬겠느냐? (아닙니다.) 꼭 그렇지는 않다. 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막 일어나서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사실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일 때 하나님은 이 사람을 알고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선한지 악한지, 진실한지 거짓된지, 속으로는 과연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하는지,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진실된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하나님은 이미 파악하고 있고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하나님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형제가 그 말을 한 뒤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첫째, 하나님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둘째, 하나님은 그것은 제물이니 사람이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점을 그에게 깨우쳐 주지도 않았고, 그 점을 의식하게 해 주지도 않았다. 그럼 이 의식을 하나님이 직접 사람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정상 인성에 이러한 의식이 마땅히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누군가는 말한다.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에게 알려 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면 그 사람들은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모르고 한 짓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몰라서 그러는 거고, 알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지요. 이것이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겠느냐? 먼저 그는 ‘이것은 하나님의 제물이니 사람이 손대면 안 된다’는 도리를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가 만약 몰랐다면 왜 하나님은 이런 결과를 막기 위해, 그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그 일을 그에게 알려 주지 않고 모르게 했겠느냐? 그에게 알려 주는 것이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진심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았겠느냐? (사람을 드러내려고 그러셨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네게 어떤 일이 생길 때 그런 일은 모두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이 너에게는 구원일 수도 있고, 파멸일 수도 있다. 그동안 하나님은 지켜보고 있으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너를 일깨워 줄 어떤 상황도 마련하지 않는다. 또 깨우침의 방식으로 너에게 그런 짓을 하면 상상 못할 결과를 빚을 테니 그래서는 안 된다거나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비인성적이라고 알려 주지도 않았다. 사람에게는 그런 의식이 전혀 없었다. 사람에게 이런 의식이 없는 건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당시에 일깨워 주지도 일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만약 양심이 있고, 어느 정도 인성이 있다면 하나님이 이를 바탕으로 일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그에게 베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왜 그 일에 모른 체했겠느냐? 여기에는 한 가지 원인이 있는데, 바로 그 사람이 양심과 이성을 갖추지 못했고, 존엄성과 인격, 정상적인 인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것을 추구하지도 않고, 마음속에 하나님도 없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 일에서 그를 드러내려 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 때로는 구원의 방식일 때도 있고, 그러지 않을 때도 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은 다 의도적이다. 네가 만약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드러냄은 네게 시련이자 구원이지만, 양심과 이성이 없다면 하나님의 드러냄은 네게 도태이자 파멸이다. 그렇다면 지금 볼 때 이 형제에게는 하나님의 드러냄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도태를 의미하는 것인데, 복이 아니라 화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건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그런데 애당초 그가 약을 몰래 마셨을 때 하나님이 상황을 빌려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했으면 그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 게 아닌지요? 그가 도태될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했느냐? (그저 순리에 맡겼습니다.) 하나님은 순리대로 일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그가 병을 따서 마신 첫 모금과 마지막 모금의 성질에 차이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그는 본질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그의 인성, 그의 추구, 그리고 그의 믿음이 철저하게 드러난 것이다.

구약 시대에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다. 그는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 몰랐다. ‘장자는 무슨, 그게 뭐 별거라고? 바꾼다고 대수야? 그래도 전과 똑같이 사는 게 아니야?’ 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문제를 무척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렸는데,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교회에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숱하게 많은데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축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것은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성질이 아니냐? 더 심각하지 않으냐?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이번 한 번의 기회뿐인데 이 기회를 놓치면 완전 끝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고작 기침약 때문에 결국 도태되었는데, 파멸이라는 결말과 맞바꾼 것이다. 정말 믿기 힘든 일이다! 사실 믿기 힘들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이 일은 사소한 일처럼 보인다. 만약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훔치거나 남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과 같이 법을 위반하고 범죄를 저질렀다면 기껏해야 죽은 뒤 징벌받고 몇 번 윤회하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한 이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겠느냐? (아닙니다.) 왜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이 일이 거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먼저 그 기침약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자. 사실 그 약이 그다지 값비싼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하나님께 바쳤다면 그 본질은 달라진다. 제물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제물은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으로, 사람에게 속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제물에 손대선 안 됩니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제물이란 무엇이냐? 제물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봉헌한 것으로, 그것이 무엇이든 ‘제물’이라고 통칭한다. 제물은 하나님에게 속하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봉헌한 것이 돈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그 가치가 어떠하든, 그것은 전부 하나님께 속하며, 사람이 처분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 하나님의 제물은 어떤 개념이겠느냐?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 처분 가능하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그것에 손대서는 안 되고, 누구도 그것에 눈독 들여서는 안 된다. 어떤 이는 “하나님이 쓰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써도 되지 않을까요? 시간이 흘러 못 쓰게 되면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데, 그래도 안 된다. 이것은 원칙이다. 제물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것이 크든 작든, 가치가 있든 없든, 사람이 그 물건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 본질은 바뀐 것이다. 그 물건이 제물이 된 순간부터 그것은 창조주의 소유이며 창조주가 지배한다. 제물을 대하는 법은 무엇과 관련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한다면, 하나님이 지닌 물건을 대하는 태도 역시 같을 것이다. 어떤 이는 “어떤 제물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럼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면 그 사람 소유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걸 아는 사람이 있든 없든 어쨌든 손에 넣으면 그 사람 소유가 되는 것이고, 그 물건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주장이 어떠하냐? 잘못된 게 아주 분명하다. 제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이더냐? 사람이 하나님에게 바친 물건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이 제물이라고 정의된 상황에서 사람이 그것에 눈독 들인다면 위험해질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 너희는 다들 이 개념을 알고 있으면서 어째서 이 일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느냐? 이 일을 통해 사람은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것에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제물을 사람이 착복하거나 흥청망청 낭비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 징벌받기 십상이다. 하나님이 노하는 데는 원칙이 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잘못을 저질렀다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핵심적이고 중요한 일에서 하나님을 거스를 때라야 하나님은 노를 발한다. 특히 하나님이 입은 육신과 하나님의 제물을 대할 때는 반드시 신중히 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만 확실히 하나님 성품을 거스르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데, 믿음도 있고, 헌신도 하며, 또 대가도 치를 수 있어 모든 모습이 훌륭하지만 딱 한 가지 안 좋은 점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 집이 물자가 풍부한데, 하나님 선민들이 헌금할 뿐만 아니라 식량이나 옷, 그리고 여러 약재 등도 봉헌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님 선민들이 하나님께 봉헌을 이렇게나 많이 하니 하나님 혼자서는 이 많은 걸 다 쓰지도 못하실 거야. 복음을 확장하는 데 일부 사용한다 해도 역시 다 사용하지는 못해. 이 많은 것을 어떻게 처리하지? 리더 일꾼들이 어느 정도 나누어 가져야 하지 않나?’ 그는 이것 때문에 조바심이 나고 속으로 ‘부담’을 느꼈다. 그는 궁리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이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으니 나도 좀 써야 해. 안 그러면 세상이 멸망할 때 이 많은 제물이 그냥 낭비되는 거잖아? 리더 일꾼에게 나눠 주는 것도 공평한 일이야. 하나님 집에서는 누구나 평등해. 우린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쳤으니까 하나님의 것이 우리 것이고, 우리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도 해. 내가 하나님 제물을 좀 누려도 별것 아니야. 어쨌든 이건 하나님의 축복이니 그냥 쓰지 뭐.’ 이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동했다. 그는 욕망이 조금씩 커지면서 제물에 눈독 들이더니 마음에 죄책감도 없이 물건을 가져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니 제물을 조금 누리는 건 별것 아니야. 설령 하나님이 아셔도 용서해 주실 거야. 우선은 좀 누리고 보자.’라며 자위하기도 했다. 그는 결국 제물을 훔쳐 먹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다. 겉으로 볼 때 그는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 핑계를 댔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건 좀 오래돼서 안 먹으면 상할 거야! 이렇게 많은 건 하나님 혼자 다 쓰지 못하시고,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 주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부족해. 그러지 말고 내가 관리하자! 그것도 그렇지만, 이 많은 돈을 세상 종말의 날까지 다 못 쓰면 어쩌지? 우리 각자 좀 나눠 가지자.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구현되는 거야! 비록 하나님이 그러라고 하지도 않으셨고, 이런 원칙을 주신 건 아니지만, 우리끼리 알아서 해도 되지 않을까? 이건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거야!’ 그는 허울 좋은 온갖 이유를 내세운 다음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번 행동하고 나니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또한 죄책감도 점점 사라졌다. 아마 그는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에게 필요하지 않은 건 내가 써도 별문제가 되지 않을 거야.’ 이러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너희 생각에 이것이 큰일이냐, 사소한 일이냐? 심각하다고 할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왜 이 일이 심각하다고 하는 것이냐? 이 일은 교제할 가치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교제할 가치가 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이 일이 하나님의 성품에 관계된 일이고, 또한 사람의 결말과 종착지에 관계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무척 큰 일이고, 그 성질도 무척 심각하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경고해야 할 건 무엇이겠느냐? 절대 하나님 제물에 눈독 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건 아니죠. 형제자매가 봉헌한 것은 하나님 집과 교회에 바친 것이니 모두의 공동 재산입니다.” 이것이 옳은 말이냐? 이 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이냐? 사람에게 탐욕스러운 마음이 있으면 이런 이론을 만들어 낸다. 이 일은 또 무엇에 관계되느냐? 여기에는 우리가 아직 얘기하지 않은 게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 집은 하나의 공동체야. 여기가 좋은 공동체임을 보여 주려면, 이곳에 사랑과 포용이 있어야 하고,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먹고 마시고 사용하면서 모든 물건을 평등하게 분배해야 해. 예를 들면, 누구나 입을 옷이 있어야 하고, 똑같이 분배하고 똑같이 사용해야지.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도 차별하지는 않으실 거야. 만약 어떤 사람한테는 양말 한 짝도 없는데 하나님께는 많이 있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그를 구제하셔야 해. 또 하나님의 그 제물들은 형제자매들이 봉헌한 거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이 가지고 계시면 당연히 가난한 사람에게 좀 나눠 주셔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 아닐까?’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 이것이 사람의 관념이 아니냐? 사람은 강제로 하나님 물건을 차지하면서 허울 좋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이요, 하나님의 큰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과 똑같이 나눠 가지려 하는데, 어떤 물건이든 똑같이 나누려고 하면서 늘 ‘평균주의’만 외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대동적 세계, 인류의 조화, 아름다운 생활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당연히 나타나야 할 광경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람의 관념이 아니냐? 특히 하나님 집에서라면, 밥을 굶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밥 굶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은 내버려두지 말고 마땅히 하나님의 제물로 그 사람을 구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생각하는 ‘마땅히’라는 것은 관념이 아니냐? 사람이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 이렇게 말한다. “저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요. 집도 여전히 가난해요. 이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에요. 하나님은 마땅히 제게 은총을 베푸시고 복을 베풀어 주셔야죠. 그래야 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죠!” 너는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어서 어려운 집안 형편을 바꾸려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구실로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 한다. 이것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자 사치스러운 욕망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이런 속셈을 품는다면 그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과 거래하는 사람이 양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냐?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냐?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같이 양심과 이성이 없다. 다들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에게 버림받을 사람,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다. 이런 자는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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