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념을 해결해야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2) 제 1 부
지난번에 관념이라는 문제에 관해 주로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관념, 두 번째는 성육신에 대한 관념, 세 번째는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이다. 앞의 두 가지는 이야기를 끝냈고, 세 번째 것도 대체적이고 개념적인 내용은 어느 정도 이야기했다. 그 후에 이 부분의 관념이나 이 부분의 관념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 너희는 이 부분의 관념과 관련된 것들, 이 진리와 연관된 것들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자세히 묵상해 보았느냐? 어떤 진리든 단순한 표면적 의미가 아니라 모두 그의 실제적인 내용이 있고, 사람의 생명 진입과 일상생활, 하나님을 믿는 여러 방면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일상생활에서 너희는 이 방면의 진리에 관한 내용을 어느 정도 묵상해 내지 않았느냐? 그 자리에서 이 방면의 진리를 들을 때 너희는 그저 표면적으로만 일부 이해할 수 있고 명확한 관념에 대해서만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 다시 체험과 결부해 묵상하고 기도하고 구하며 형제자매와 교제한다면 더 깊이, 더 실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표면적 의미로 보면 이 세 가지 진리 중 사람의 패괴 성품, 하나님 성품에 대한 사람의 인식, 사람의 실제 진입과 관련 있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무엇이 더 깊이 있겠느냐? (세 번째입니다.) 세 번째가 비교적 깊이 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관념으로, 이런 관념은 비교적 평이하고 피상적이다. 두 번째는 성육신에 대한 관념으로, 일부 사람이 보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 생활 속에서 접할 수 있고 반성할 수 있는 내용과 관련 있다. 세 번째는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으로,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 있기에 더 깊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은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념이 대체 무엇인지,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사람은 이런 관념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해야 하는지, 이런 관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교제해 보도록 하겠다.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이 사람의 추리와 판단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 사치와 욕망, 반발심, 그리고 하나님 사역에 대한 일부 판정이나 판단으로 상승하면 이 관념은 이제 단순한 관점이나 생각이 아니라 사람의 패괴 성품과 관련된다. 패괴 성품과 관련되면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판단하며 나아가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고도 남는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이 상상과 추측에만 머무를 뿐이라면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지만, 하나님 사역에 대한 관점이나 태도로 상승하여 네가 하나님에게 무리하게 요구하거나 하나님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혹은 야심과 욕망, 타산으로 가득 찬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관념이 아니다. 어째서 일반적인 관념이 아니라고 하겠느냐? 왜냐하면 이런 관념과 생각은 너의 생명 진입, 하나님 사역에 대한 너의 인식과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너의 주재자이자 창조주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지와 관련 있으며, 너의 입장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에게 이런 관념이 있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관념을 분석하려고 할 때, 이론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너희가 듣기에는 다소 추상적이거나 일상생활과 조금 멀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생활 속이나 인류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여러 부류 사람의 생존 상태, 혹은 그들의 운명이나 그들이 삶을 대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를 대하는 여러 관점과 태도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그 안에서 사람의 관념을 분석하고, 또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인류를 주재하고 지배하는지, 하나님 사역의 실제 상황이 어떤지를 보여 주도록 말이다. 이는 교제하기 쉬운 주제는 아니다. 너무 이론적으로 교제하면 사람은 공허하다고 느낄 것이고, 너무 세세하거나 실생활에 가깝게 교제하면 사람은 그것이 너무 평이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든 간에 우리는 이야기하는 이런 비교적 평이하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교제해 보자. 사람은 이야기의 줄거리와 인물, 그리고 이야기 자체가 반영하는 인생의 철학 이론, 사람이 본 현상을 통해 그 안에서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과 방법을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다. 또한, 실생활에서 하나님 사역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지배하는 것을 대하는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 또는 사람이 고수하는 일부 잘못된 것들을 이 방식으로 교제하면 비교적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겠다.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 여자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평생 큰 부자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고 그저 의지할 곳만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 소원이 과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높은 요구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가 미성년자일 때 그녀의 아버지는 죽었다. 그녀에게 이는 삶에서 의지처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생에서 그녀는 첫 번째 의지처, 즉 어린 마음에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잃은 것이다. 그녀는 어린 마음에 아주 고통스럽지 않았겠느냐? 그런 일이 닥쳤을 때 그녀는 분명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녀는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았겠느냐? 분명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그런 상처는 어떻게 생긴 것이겠느냐? 그녀의 어린 마음에 아직 “난 이제 독립할 수 있어. 스스로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 부모님께 기대지 않아도 돼.”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개가 아직 덜 자랐다는 사람들의 말처럼 말이다. 그녀는 생각이 흐릿했는데,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고 부모를 떠나면 스스로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 제대로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아직 이런 의식도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가 죽었는데, 이것은 그녀의 생계원이 사라졌으며 앞으로 더욱 어려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짐작할 수 있듯, 그 후 그녀는 어머니와 어린 남동생과 함께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며 어렵사리 살아갔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삶은 계속되어야 했기에 그녀는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허덕거리며 살아갔다. 몇 년 후 성인이 된 그녀는 독립적으로 생활비를 벌어 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할 수 있게 되었지만 생활은 여전히 그리 넉넉지 않았다. 이때도 그녀 마음속의 소원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녀는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어떤 의지할 곳이 필요했겠느냐? 그녀가 바라는 의지처는 대체 어떤 것이겠느냐? 너희가 설명해 보아라. ‘의지처’의 가장 간단한 개념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그녀가 스스로 노력할 필요도, 아무런 고통을 받을 필요도 없이 그녀에게 음식과 옷 등 삶의 원천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듬직한 어깨처럼 최소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그녀의 의지처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녀를 지원하고 먹여 살리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마음이 괴로울 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그녀가 난관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고 비바람을 막아 줬으면 하는 게 그녀의 소원이었다. 이것이 높은 요구이겠느냐? 이것이 비현실적인 소원이겠느냐? 요구가 높지 않고 소원도 현실적인 편이다. 이 정도로 소박한 소원은 많은 사람이 다 가지고 있지 않느냐? 태어날 때부터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 세상에서, 군중 속에서 살면서 친구나 의지처가 있기를 바란다. 그 여자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여자아이는 혼사를 논할 나이가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의지할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을 찾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은 돈이 그렇게 많을 필요도 없고 그녀를 엄청난 부자로 만들어 줄 필요도 없으며 언변이 좋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가장 힘들 때나 어려움과 병이 생겼을 때 그녀에게 의지처가 되어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설사 그녀에게 그저 몇 마디 위로의 말만 건넬 뿐일지라도 말이다. 이 소원이 이루어지기 쉽겠느냐? 그건 미지수이다. 사람의 소원이 하나님이 주려는 것인지, 하나님이 성취하려는 것인지, 사람의 운명에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이 여자아이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과 다름없이 그 소원을 품은 채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그때 그녀는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어쨌든 그날은 오고야 말았다. 그녀는 자신이 만나려는 그 사람이 과연 남은 반평생 동안 의지할 사람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전히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원했다. ‘그 사람은 분명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일 거야. 지난 20여 년 동안 내 팔자는 사납기 그지없었어. 만약 지금 또 못 미더운 사람을 만나면 남은 생은 더 고통스러울 거야. 내가 또 누구에게 의지할 수 있겠어?’ 그녀는 마음이 괴로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어 이렇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생을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를 때 사람은 생존을 위해 이런 소원과 미지의 기대를 품은 채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순간이 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미래가 어떨지 알지 못했다. 미래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은 법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왜 이렇게 안배하는지 일단 지금은 논하지 않겠다. 하나님이 일부러 이렇게 안배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패괴와 무지로 인해 사람의 소원 및 요구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안배한 운명과 상반되어 흔히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는 일단 논하지 않고, 우선 이야기 자체에만 집중하자.
여자아이는 결혼 후 소원을 품은 채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그 인생 단계에서는 무엇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겠느냐?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었지만 두렵다고 해서 피할 수는 없다. 억지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했고, 하루하루 삶은 살아가야 했다. 그녀의 인생이 바뀌는 중대한 단계, 즉 하나님이 그녀를 위해 안배한, 그녀의 뜻과는 맞지 않는 운명이 드디어 찾아왔다. 그녀가 기대했던 핵가족 생활, 소박한 침대, 작은 책상, 단순하고 깔끔한 방, 남편과 아이, 이런 평범한 생활은 끝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결혼 후 남편은 일 때문에 다년간 타지에서 생활해야 했고 그녀는 남편과 따로 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삶을 사는 여성은 어떤 상황을 마주하겠느냐? 괴롭힘 당하고 차별받는다. 이런 생활 환경을 마주한 그녀는 생활적으로, 운명적으로 또 한 번 타격을 입었다. 이는 그녀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고 보고 싶지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현실은 그녀의 소원,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가 보고 싶지도, 겪고 싶지도 않았던 일이 공교롭게도 전부 그녀에게 발생했다. 남편이 오랫동안 타지에서 일했기 때문에 생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그녀는 반드시 독립해야 했고 스스로 밖에 나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아무도 그녀의 삶을 도와주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혼자서 해야 했다. 이런 생활 환경에서 그녀는 의지할 곳을 얻었겠느냐, 아니면 전혀 얻지 못했겠느냐? (얻지 못했습니다.) 결혼 후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졌느냐, 아니면 물거품이 되었느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그녀의 생명 중 두 번째로 중요한 단계에서 그녀의 소원은 또다시 물거품이 되었고, 그녀는 여전히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녀가 인생에서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그녀의 곁에 없었기에 전혀 의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든든한 조력자이자 지지자요, 의지처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었고 모든 일을 직접 하고 혼자서 처리하며 마주해야 했다. 가장 힘들 때도 하소연할 사람이 없어 혼자 몰래 이불 속에 숨어 울 수밖에 없었다. 체면과 승부욕, 자존심 때문에 그녀는 겉으로 아주 강한 척했다. 그래서 그녀는 강한 여자처럼 보였지만 사실 마음속 깊은 곳은 여리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의지할 곳이 필요했고 의지할 곳을 얻길 기대했지만 그 소원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몇 년 후 그녀는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일정한 거처도 없이 여기저기 다니며 셋방을 구해 살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삶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요구도 조금씩 닳아 없어졌다. 원래 그녀는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 있는 작은 집을 원했을 뿐이다. 주방에서 요리하면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병아리나 몇 마리 기르는 단출한 살림을 꾸리고 싶었다. 큰 부자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저 평범하고 평안하고 단란하게 사는 것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태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근근이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이 의지할 곳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아이들에게 의지할 곳이 되어 주어야 했다. 그녀는 인간 세상에서 사는 게 이토록 고통스러우니 이런 고통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자는 생각도 해 봤다. 예를 들어,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거나 어딘가로 수행을 떠나 속세와 이 고통을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에게 의지할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의지할 곳이 되어 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 삶은 너무도 피곤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 살아가도록 그녀를 지탱해 준 것은 무엇이었겠느냐? (아이입니다.) 그렇다. 아이가 없었다면 그녀는 매일매일을 더욱 고통스럽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생긴 후 그녀에게는 책임이 생겼고 아이에게 의지할 곳이 되었다. 아이가 ‘엄마’라고 부를 때 그녀는 어깨 위에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고, 이렇게 무책임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곳이 되어 줄 수는 있었다. 그 역시 삶의 낙이자 태도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아이를 위해 또 십여 년을 버텼다. 긴 세월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왜 긴 세월이라고 하겠느냐? (그녀의 삶이 고달팠기 때문에 세월이 길게 느껴진 것입니다.) 경험이 있구나. 듣자마자 경험자가 하는 말이라는 게 바로 느껴진다. 삶이 고달프고 견디기 힘들면 세월이 유독 길게 느껴지고, 겪은 일 하나하나가 마음속 깊은 곳에 고통으로 남는다. 그래서 그녀는 손가락을 꼽아 가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견디기 쉽지 않은 나날이었다. 아이들이 조금 컸을 때도 그녀의 소원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이런 소원이 있었다. ‘아이들이 다 커서 보살피는 게 그렇게 힘들진 않네. 그래도 남편이 곁에 있고 온 가족이 모여 살면 더 좋을 텐데.’ 삶에 대한 희망의 돛을 올린다는 이방인의 말처럼 그녀는 또다시 아름다운 상상을 했다.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이런 생각을 했다. ‘애가 커서 대학에 합격하고 나중에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돈을 벌 테니 삶에 여유가 생기겠지. 지금보다 더 잘 먹고 잘 입고 더 좋은 집에 살겠네. 게다가 남편까지 돌아오면 삶은 훨씬 더 나아질 거고, 나도 의지할 곳이 생길 거야! 예전에 의지할 곳을 둘이나 잃었는데 이제는 더 많이 생기다니, 하느님도 내게 꽤 잘해 주시네! 이제 좋은 날이 오려나 보다.’ 그녀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좋은 일이겠느냐, 아니면 나쁜 일이겠느냐? 아무도 알 수 없다. 사람의 한평생 운명이 어떤지, 앞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사람은 모두 이렇게 비틀거리면서 아름다운 소원을 품은 채 살아간다.
10년이 흘렀고 남편의 전근으로 드디어 온 가족이 모이는 좋은 일이 생겼다. 그렇다면 그녀의 남편은 과연 그녀의 의지처가 될 수 있었겠느냐? 그녀의 삶 속 고통을 어느 정도 나눌 수 있었겠느냐? 같이 생활한 적도, 깊이 어울린 적도 없기에 그녀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후 그녀와 남편은 생활 속에서 손발을 맞추며 서로를 깊이 이해해 갔다. 그녀의 소원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그녀의 의지처가 되어 어떤 일이 닥치든 그녀를 위로하고 그녀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여전히 일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가 깊이 어울려 본 적 없는 남편이자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그 남자는 결코 그녀가 의지할 곳이 될 수 없었다. 생존 능력, 인품,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자녀와 가정,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그들은 끊임없이 다투고 사소한 일로 계속 언쟁했다. 여자는 남편이 그녀의 선량함과 인내, 어려움을 알고 감동받아 태도를 바꿀 수 있도록 마음속 깊이 자신이 계속 참아 낼 수 있길 바랐다. 그럼에도 그녀의 소원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과연 남편이 마음속 깊이 의지할 곳이겠느냐? 그녀의 의지처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위로하여 고통을 덜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더 실망시켰으며 막막하게 했다. 이때 그녀가 인생에 대해 마음속 깊이 이해하고 느낀 것은 무엇이겠느냐? 실망과 고통이다. 이는 그녀의 마음속에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님이 있긴 한가? 이번 생은 왜 이렇게 힘들지? 난 의지할 곳을 찾으려던 것뿐이잖아? 이 나이까지 살았는데 왜 고작 이 정도 소원도 이룰 수 없는 거지? 난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별다른 야심도 없어. 그저 일이 닥쳤을 때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뿐인데 어째서 이 정도 소원도 채워지지 않는 거지?’ 그녀는 그렇게 몇 년을 살았다. 분명히 알 수 있듯, 이 가정의 생활은 그다지 화목하지 않았고 자주 다툼이 일었다. 자식들의 삶은 기쁘지도 즐겁지도 않았으며 부모도 마찬가지로 즐겁지 않았다. 이 가정에는 평안과 즐거움이 없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전전긍긍하며 겁을 낼 뿐이었고, 마음속 깊은 곳에는 고통과 불안함만 있었다.
몇 년 후 드디어 변화의 기회가 찾아왔다. 예수의 복음이 그녀에게 임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아버지에게도, 남편에게도, 주변의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 없어. 예수님께 의지하기만 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어. 진정한 의지처가 생기고 진정으로 평안하고 즐거워질 거야. 그럼 삶이 그렇게 힘들진 않겠지.’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서 이 여자는 훨씬 즐거워졌고, 삶도 물론 훨씬 안정됐다. 그녀를 대하는 남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아 원래 그랬듯 여전히 모질었고, 그녀를 무시했으며,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고, 관심을 갖지도, 보살피지도, 나아가 인내하고 감사하고 양보하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예수의 구원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전과는 다른 태도로 이 모든 것을 대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과 언쟁을 벌이거나 시비를 따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게 사람이 다툰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예수에게 얘기하면 마음이 탁 트였다. 그렇게 그녀의 가정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도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됐다. 그러나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생활에는 또 변화가 발생했다. 예수를 믿은 이후로 그녀는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 생활을 하며 형제자매를 붙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동의하지 않았고 그녀를 핍박하며 자주 꾸짖었다. “살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살림하기가 그렇게 싫으면 그냥 이혼해!” 그녀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주에게 기도하며 견딜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날은 힘들고 고통스러웠지만 예전에 비하면 마음의 상처는 훨씬 줄어들었고, 기도를 통해 어느 정도 위로도 받았다. 고통스러울 때 주에게 기도하자 그녀의 마음은 의지할 곳이 생겼고 일시적인 만족도 얻었으며 삶도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아이들도 점점 어른이 되어 갔다. 어릴 때부터 그녀와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살아왔기에 아이들은 그녀와 사이가 좋았다. 그녀는 ‘이제 자식들이 다 컸으니까 남편에게 의지하지 말고 아이들에게 의지하면 되겠네.’라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그녀가 이미 예수에게 의지하여 자신의 마음과 가정, 나아가 미래와 앞길까지 모두 예수의 손에 맡긴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마음속 깊이 그녀는 눈에 보이는 사람,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에게 여전히 한 가지 소원을 품고 있었고, 이런 소원이 언젠가 이루어지길 바랐다.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가 사람의 곁에,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고 했지만 그녀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기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는 중대한 일과 심각한 문제만 예수에게 의지하면 되고 실생활에서는 여전히 자식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변함없이 이런 소원을 가지고 있었고 내려놓지 않았다. 예수를 믿는데도 왜 그 소원은 변하지 않았겠느냐?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진리를 깨닫지 못해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를 잘 이해하지도, 깨닫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객관적인 이유이다. 주관적인 이유는 그녀가 나약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토록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도 하나님을 믿는 의미와 사람의 운명, 하나님의 지배, 그리고 창조주의 사역 방식을 여전히 간파하지 못했다. 어떤 일에서 그녀가 간파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느냐? 우선 그녀는 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행복과 마음속 깊은 곳의 아름다운 삶에 대한 기대를 걸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나 지원의 손길 덕에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랐다. 이는 인생과 운명에 대한 잘못된 관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관점은 옳지 않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희망을 좀 거는 것, 자식이 커서 효도하고 부모를 모시기를 바라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잘못이라고 할 수 없고 지나치지도 않다.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무엇이 문제이겠느냐? 그녀는 항상 자식에게 의지하려 했고, 자식에게 기대어 남은 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길 바랐으며, 자식에게 기대어 무언가를 누릴 수 있길 기대했다. 여기에서는 무엇이 잘못된 관점이겠느냐? 왜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겠느냐? 그녀의 그런 관점은 어디에서 비롯됐겠느냐? 사람은 늘 특정한 삶의 방식과 기준에 과욕을 부리는데, 그것은 바로 아직 하나님이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정했는지, 자신의 운명이 어떤지 알지 못할 때부터 자신의 삶의 기준은 행복해야 한다고, 평생 평안하고 즐거워야 한다고, 큰 부자가 되어야 하고 자신에게 도움을 받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계획해 놓은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삶의 길과 목표, 종착지 등 모든 내용을 이미 계획해 놓았다. 여기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믿음이 없다. 이 여자는 늘 삶에 이런 관점을 품고 있었다. ‘누구누구에게 의지하면 내 삶은 더욱 평안하고 즐겁고 풍족해질 거야. 누구누구에게 의지하면 내 삶은 더 안정되고 보장되고 행복해질 거야.’ 이런 관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을 겪으며 이미 예수를 믿는 단계에 도달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인생이란 무엇인지 분명히 파악하지 못했고, 여전히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가진 채 자신의 미래의 길을 궁리하고 미래의 삶을 계획하고 있었다. 지금 보면 이런 삶의 태도와 계획은 올바르겠느냐, 아니면 올바르지 않겠느냐? (올바르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느냐? (그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것이 아닌 자신의 이상과 소원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정한 바와 관련 없는 것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자신이 먼저 의지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단계에서는 이 사람에게 의지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저 사람에게 의지하면서 이리저리 의지하다 보니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게 됐다. 즉, 하나님에게는 의지하지 않고 사람에게만 의지하게 된 것이다. 항상 그런 소원과 계획을 품고 있으니 그녀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관점에서 보면 그녀가 아등바등하며 받은 이 모든 고통은 무엇에서 비롯되었겠느냐? (그녀의 소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맞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그런 소원을 가지게 되었겠느냐?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녀는 사람의 운명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하나님의 주재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것이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이야기를 이어 가겠다. 이 여성의 자식들은 어른이 되어 누구는 일하느라, 누구는 가정을 꾸리느라 분명 다들 부모를 떠나 독립해 살고 부모와 자주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여성은 또 어떤 문제에 직면하겠느냐? 자식에게 의지하겠다는 소원이 또다시 물거품이 되어 그녀는 인생에서 또 한 번 가슴 아픈 비극을 맞이하고 또 한 번 타격을 입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자식들은 그녀의 곁에서 함께 살아갈 수도, 그녀를 자주 찾아뵙거나 보살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자식이 곁에서 효도하고 자신을 보살펴 주길 바라고, 자식에게 의지해 좀 더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던 그녀의 이런 소원은 그녀에게서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리하여 자식에 대한 그녀의 근심과 걱정, 그리움은 갈수록 커졌다. 이는 또 다른 고통이 아니겠느냐? 나이가 들고, 세월이 조금씩 쌓이면서 그녀는 더욱더 고통스러워졌고 자식에 대한 그리움도 깊어져만 갔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났다. 이 여성이 단계별로 의지하려 했던 대상은 달랐지만 그들 모두 어김없이 그녀를 떠나면서 그녀의 소원과 환상은 산산이 조각났다. 그녀는 마음이 너무도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이것이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이냐? 인생에 대한 사색이냐? 아니면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안배하는지에 대한 사색이냐?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의 경우 설교를 좀 듣고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고 나면 창조주에 대해, 인생과 사람의 운명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주인공인 본인의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그녀는 지금까지 인생의 각 단계에서 체험하고 맞닥뜨린 문제와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어떻게 된 일인지도 알지 못했다. 마음속 깊이 그녀는 여전히 의지할 곳을 갈망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녀의 의지처이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의 의지처가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사람에게 의지처가 되어 주는 것만은 아니다. 그게 다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창조주와 함께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은 단순히 의지하고 의지처가 되어 주는 관계가 아니다.
자식에게 의지할 수 없게 된 이 여성은 나이가 들자 다시 늙은 남편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녀의 배우자는 그녀가 잡을 수 있는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먹고 입는 것도 그렇고, 계속 살아가려면 배우자에게 의지해야만 했고 어떻게든 배우자를 좀 더 오래 살게 해야 했다. 그러면 자신도 덕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배우자는 곧 그녀가 의지할 대상이었다. 이 연로한 노인은 나이가 지긋해 서릿발을 이고 있었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으며 이도 거의 다 빠지고 없었다. 얼굴은 그렇게 변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여러 번 난관에 부딪혔지만 의지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다. 이 밖에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을 주는 것에 대한 환상, 자신과 인류, 운명과 앞길에 대한 일부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이런 환상은 점점 모호해지고 아득해졌지만 아마 그녀는 마음속 깊은 곳에 여전히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살아생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면, 혹은 하나님 사역이 끝나 영광 얻는 날을 볼 수 있다면 인생을 헛산 건 아니겠지.’ 이 여성은 이렇게 일생을 살았다.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이 이야기의 제목을 뭐라고 지을 수 있겠느냐? (‘내 의지할 곳은 어디에’입니다.) 사색에 잠기게 하는 훌륭한 제목이구나.
다시 교제하던 주제로 돌아가자. 이 이야기가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어떤 관련이 있겠느냐?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관련 있는 부분은 어느 부분이겠느냐? 모두 어떤 관념과 관련되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기대하고 계획하는 대로 이루어 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내면에는 이런 관념이 있습니다.) 사람의 관념으로는 좋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소원이라면 창조주가 모두 이루어 주어야 하고, 아름다운 삶을 동경할 권리를 사람에게서 빼앗아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일종의 관념이다. 그러나 창조주가 사람의 소원과 기대, 상상에 따라 이루어 주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창조주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누구든, 네가 어떻게 계획하든, 네가 얼마나 완벽하고 그럴듯하고 너의 현실 생활에 부합하게 상상하든 전혀 보지도 않고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그저 하나님이 정해 놓은 방식과 법칙에 따라 이루고 배치하고 안배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다. 어떤 사람은 ‘나는 평생 무수히 많은 고난을 겪었으니 편하게 살 자격이 있지 않나? 창조주 앞에 나아가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종착지를 요구하고 동경할 자격이 있지 않나?’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관념이 아니냐? 사람의 이런 관념과 사람이 갖고 있는 이런 생각은 하나님에게는 무엇이겠느냐? 무리한 요구이다. 이런 무리한 요구는 어떻게 생기느냐? (사람이 하나님의 권병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그건 객관적인 이유이다. 주관적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패역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구하려 하지 않고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대부분 사람에게 힘겨운 일생을 안배했겠느냐, 아니면 행복하고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일생을 안배했겠느냐? (힘겨운 일생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힘겨운 일생을 살아가며 수많은 우여곡절과 고통을 겪는다. 그렇다면 창조주가 사람의 일생에 이런 고난을 안배한 목적과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한편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 권병을 체험하고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로 삶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체험하도록 하여 사람의 운명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주관적인 소원에 따라 변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창조주가 무엇을 하고 사람에게 어떤 일생과 운명을 안배하든, 그는 사람이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고 사람의 운명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이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해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려 줄 때, 사람은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체험한 후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과 현실 생활에서 사람이 체험하는 모든 일이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런 진리의 실제성, 정확성, 진실성을 검증한 사람은 그 진리를 얻음과 동시에 인류가 창조주의 손에 의해 다스려지고 인류의 운명은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사람이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나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 비현실적인 계획, 창조주의 염원, 창조주의 정한 바와 안배에 위배되는 계획은 세우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점점 더 정확하게 판단하고 인식하고 깨닫고 계획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사람의 일생에 수많은 고난을 안배하는 목적이자 의미이다.
이야기 자체로 돌아가 보자. 이야기의 주인공이 수많은 고난을 겪은 뒤 자신이 삶에서 고난을 겪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창조주의 이런 지배와 안배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이야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느냐? 그녀는 이런 인식을 얻었느냐? (얻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얻지 못했겠느냐?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인생의 모든 전환점에서 자신의 소원이 계속 물거품이 될 때 반성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평생 좇은 꿈이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는 이유를 정리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녀가 반성하고 진리를 구했다면 변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창조주의 주재를 인식하지 못했고 그저 끈기에 기대어 자신의 꿈을 고수하며 언젠가 자신의 운명이 갑자기 바뀌길 기대했습니다.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계속 대항하고 발버둥 쳤기 때문에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렇다. 그녀가 잘못된 길을 선택했지만 스스로 알지 못한 채 그것을 올바른 길이라고, 자신의 정당한 추구이자 정당한 소원이라고 여기며 그 방향으로 노력하고 사력을 다해 발버둥 쳤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소원이 과연 현실적인지, 과연 올바른 것인지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집요하게 추구하며 절대 달라지지도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녀의 인생에 그토록 많은 고난을 준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한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생에 평범하지 않은 체험, 고통스러운 체험을 안배한다. 사실 창조주는 이런 방식과 사실을 통해 그 길은 막다른 길이고 네가 가야 할 길이 아니니 그렇게 가지 말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은연중에 무엇을 확인할 수 있겠느냐? 이는 사람이 잘못된 관념과 집요한 방식에서 나오도록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길을 선택해 주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을 구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네가 선택한 길은 진흙탕이자 불구덩이이고 돌아올 수 없는 길이니 그렇게 걸어가서는 안 된다고, 계속 걸어간다면 줄곧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그건 올바른 인생길이 아니고 네가 걸어야 할 길도 아니며 하나님이 너에게 정해 놓은 길도 아니라고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네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고난을 한 번 겪은 뒤 이렇게 반성할 것이다. ‘왜 이런 고난을 겪은 거지? 왜 벽에 부딪힌 걸까? 설마 이 길이 내게 맞지 않나? 그럼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인생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네가 반성할 때 하나님은 너에게 일부 깨달음을 주고 인도할 것이고 혹은 앞으로 걸어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네가 현실 생활에서 하나님이 너에게 계획해 놓은 앞길을 더 실제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끊임없이 너를 인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방금 했던 이야기 속 주인공은 이렇게 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한 번도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강퍅한 것입니다.) 강퍅하면 문제가 심각하다. 미성년자일 때부터 백발이 무성한 노인이 될 때까지 의지할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소원은 한결같았다. 하나님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창조주가 어떻게 천지 만물을 창조했는지 알지 못한 상황에서든, 아니면 하나님의 복음이 그녀에게 임하고 하나님이 그녀에게 이 모든 진실을 알려 준 때든 그녀의 이 소원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가장 안타까운 부분이다. 사람은 사상과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을 창조해 준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안배한 사람과 일, 사물, 그리고 환경을 느끼고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성과 양심을 가진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모든 피조된 인류는 하나님이 배치한 이 모든 것을 마음으로 이해한다면 많게든 적게든 혹은 깊게든 얕게든, 창조주의 뜻을 어느 정도는 깨달을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 중 하나로, 상당히 실제적이고 진실하다. 그러나 사람은 너무 교만하고 강퍅하기 때문에 진리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고 창조주의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의 강퍅함은 어디에서 드러나겠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사역하든 사람은 여전히 자신의 것을 고수하며 이런 마음가짐을 보인다. ‘내 인생은 내가 계획할 거야. 나는 사상과 생각, 교양도 있으니 내 삶을 통제할 수 있어. 나는 내 삶의 모든 일이 왜 일어나는지 볼 수 있고 이 모든 걸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난 스스로의 행복과 미래, 앞길을 계획할 수 있어.’ 난관에 부딪힐 때 그는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에 다시 해 보자.”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사람이 오기가 없으면 평생 무능하고 나약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는 왜 이렇게 끈질긴 것이겠느냐? 그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그건 바로 반드시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나약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삶에 치여 무너져서는 안 되며 남에게 무시당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사람이라면 독립적이어야 하고 오기와 의지가 있어야 하며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품과 생각, 사상이 그의 행위를 주도하여 그가 하나님이 배치한 어려움이나 곤경, 고통을 거듭 직면할 때 늘 한 가지 방식만을 선택하게 한다. 즉, 자기 생각을 고수하고 뒤돌아보지 않으며, 자신이 생각하기에 좋고, 옳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은 반드시 끝까지 견지해야 하는, 오기를 부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강퍅한 성품으로 인해 그는 어리석고 비현실적인 판단을 많이 내리고 수많은 비현실적인 인식과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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