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실행해야 생명 진입이 있다 (제 3 부)
진리 추구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일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원래 일을 바라볼 때 수많은 그릇된 관점이 있었던 사람은 진리를 구하지 않을 경우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늘 그래 왔듯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며 교만하고 독선적이다. 네가 그를 책망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기 어렵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교회의 누군가가 예전에 어떤 기업의 사장이었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에 추앙하는 감정이 생겨서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고 탄복하며 우러러본다. 심지어 그 사람을 숭배하기도 하고 마음속에 그 사람이 지위를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너는 진리 원칙에 따라 그 사람을 분별하고 대해야 한다. 그가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인지, 존경할 만한 사람인지 살펴봐야 한다. 가까이 대하며 분별해 본 결과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마음속으로 그를 우러러보지도, 앙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 평상심으로 그를 대하고 접할 것이다. 평상심으로 대한다는 게 어떤 것이겠느냐? 올바르게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마음속에는 자신의 기호, 염원, 추구가 가득하며, 사람의 가치관은 여러 세부적인 행위에서 드러난다. 만약 그가 어떤 사람을 숭배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그는 특히 완곡하고 예의를 차리는 단어를 사용해 말하며 호칭도 유난히 깍듯한 존칭을 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 사람이 그의 마음속 지위를 가졌고 그가 그 사람을 우러러본다는 뜻이다. 이 밖에 그가 자주 하는 말이 또 있다. “그 사람은 원래 한자리하던 사람인데 하나님 집에 와서는 보통 사람 취급을 받으니 억울하겠어요.” 그의 사상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 집에서는 인재를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사람처럼 대단한 인물이 몸을 낮추어 하나님 집에 와서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데 아무도 우러러보거나 발탁하지 않고 상부에서도 특별히 형제자매에게 소개해 주지 않으니 말이다. 그에게 그 사람이 본분을 어떻게 이행하는지 물어보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은 예전에 직원이 몇천 명 되는 회사를 운영했어요. 이 정도 사역을 하는 건 별것도 아니죠. 하나님 집에는 그 사람보다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없어요. 그 사람이야말로 뛰어난 사람이고, 하나님 집에는 뛰어난 인물이 없어요.” 이게 무슨 말이냐? 그는 세상에는 뛰어난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 집에는 뛰어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있는 사람도 하나님 집에 있는 사람처럼 진리를 갖추고 있겠느냐? 세상에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할 거면 그 뛰어난 사람을 믿지 그랬느냐? 굳이 왜 하나님을 믿으러 온 것이냐?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있다면 서둘러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이런 말을 하다니 이는 사탄의 목소리 아니냐? 사탄의 목소리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나님 집에 와서는 여전히 사탄을 높인다. “유명인 누구누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누구보다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 될 거예요. 그 사람이 온전케 되지 못하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 끝장이죠. 우리는 그 사람 눈에 아무것도 아니에요.”라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세상의 유명 인사, 기업가, 관료만 못하고,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뛰어나고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그의 말의 행간을 살펴보았을 때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설교를 얼마나 들었든 그의 관점과 사상, 세상에 대한 견해, 유명인과 뛰어난 사람에 대한 견해와 관점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진리를 얻었겠느냐? 그에게 생명 진입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뭐 하는 인간이겠느냐? (불신파입니다.) 그는 불신파이고 유다이며 반역자이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도, 진리도 지고지상하지 않고, 세상의 권세와 명망, 명리야말로 지고지상한 것이다. 그는 반역자로, 유다의 사상 관점, 사탄의 사상과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설령 진리를 알아들었다고 해도 사상 관점이 변하지 않으며, 명망, 지위, 권세를 추구한다. 이런 사람 곁에 가면 그가 너에게 말하는 태도가 이상하고, 너는 그에게 다가가기 어렵고 평범한 사람은 그의 눈에 들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관념을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리를 얼마나 선포할 수 있든 그는 마음속으로 늘 하나님과 거리를 둔다. 그는 성육신의 정상 인성도 평범하고 조금도 위대하거나 높거나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지식과 은사를 숭배하고 위인을 숭배하는 것이다. 사탄 성품이 충만한 이런 교만하고 잘난 체하는 사람이 정상 인성이 있고 진리가 충만한 그리스도를 보고 어떻게 엎드려 경배할 수 있겠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이에요. 진리만 갖추고 있을 뿐 지식은 갖추고 있지 않아요. 내게는 은사가 있고, 나는 당신보다 더 많은 지식과 더 뛰어난 재능, 그리고 더 훌륭한 일 처리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외부 세계에 대응하는 말주변도 당신보다 출중해요.’ 그는 교회에서 사역을 좀 하거나 밑천이 좀 생기고 기여를 좀 하면 하나님을 더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정말이지 온갖 추태를 다 부리고 조금도 이성적이지 않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과 일, 사물의 표면적인 현상에 얽매이는 일이 잦다. 하나님이 옳다고 생각했다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했다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며,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주재하는 그분이라고 생각했다가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주재하는 일에 대해 의심이 생기기도 하면서 늘 마음속으로 싸우고 다툰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비록 영적인 이해력이 있지만 진리의 가장 얕은 차원의 의미, 즉 글귀와 도리의 의미만을 깨달을 수 있다. 이 역시 이해 능력을 조금은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진리를 조금 깨달을 수는 있지만 전혀 실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사역하는 것을 추구하고, 복받는 것을 추구하며, 자신의 막연한 신앙과 정신적 지주를 충족시키는 것을 추구하고, 명예와 지위를 추구한다. 이런 사람이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이 폭로하는 여러 내적 상태에 비춰 보고 자신의 내적 상태가 어떤 문제에 속하는지 인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춰 볼 수 있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비춰 본 후 실행하고 진입한다면 너는 바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을뿐더러 깨달은 하나님 말씀 원칙을 기반으로 진실한 진입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할 때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을 대할 때 진리를 구하여 순종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여러 방면의 내적 상태와 표출을 성찰하기를 중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비춰 보아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각종 일을 대할 때 원칙과 실행의 길이 있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번에 바울의 7가지 죄를 교제하고 해부했는데, 너희는 자신을 비춰 보고 진실하게 인식하여 실행하고 진입할 수 있어야 한다. 비춰 보는 것과 생명 진입은 긴밀하게 관련된다. 비춰 볼 수 있다면 이는 생명 진입에 입문하는 것이다. 입문한 뒤 어떻게 진입할지는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달았는지에 달려 있다. 한 방면의 진리를 깨달으면 한 방면의 실제에 진입할 수 있고, 두 방면의 진리를 깨달으면 두 방면의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만약 도리만 이해하고 진입의 원칙이 없다면 실제에 진입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핵심은 우선 진리를 많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깨달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묵상해야 한다. 자신의 현실 생활, 그리고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에 결부하여 실행 원칙과 실행의 길을 찾는다면 실제에 쉽게 진입할 수 있다. 만약 실제적인 문제들이 있으면 관련된 하나님 말씀에 따라 비춰 보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나 오해가 있다면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비춰 보아야 한다. 이 관념과 오해가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떤 성질의 문제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반드시 해부할 줄 알아야 하며, 그런 다음 상응하는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생명 진입의 길이다. 바울은 사역을 그토록 많이 했지만 생명 진입의 길이 있었느냐? 전혀 없었다. 바울의 7대 죄 중 첫 번째는 무엇이냐? 면류관을 추구하는 것과 복받기를 추구하는 것을 정당한 추구 목표로 삼은 것이다. 복받기를 추구 목표로 삼은 것은 무엇이 잘못되었겠느냐? 이는 진리를 완전히 위배한 것이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복받는 것이 정당한 추구 목표가 아니라면 정당한 추구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겠느냐? 진리를 추구하고, 성품 변화를 추구하여 하나님의 모든 배치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사람이 갖추어야 할 추구 목표이다. 예를 들어, 너는 책망과 훈계가 닥쳤을 때 관념과 오해를 가지며 순종하지 못한다고 하자. 어째서 순종하지 못하겠느냐? 네 종착지나 복받으려는 꿈이 도전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고 괴로워하며, 본분을 내팽개치고 이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이겠느냐? 네 추구에 문제가 있어서이다. 그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서둘러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진리를 구해 패괴 성품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급선무이다. 너는 “나는 본분을 내팽개칠 수 없어. 피조물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복받으려는 욕망을 내려놓아야 해.”라고 말해야 한다. 복받으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걸으면 한결 홀가분해지는데 소극적인 상태에 빠질 리 있겠느냐? 설령 가끔 소극적인 상태에 빠진다고 할지라도 그 일에 속박받지는 않을 것이며,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기도하고 싸우면서 네 목표를 복받는 것과 종착지를 추구하는 것에서 진리 추구로 바꿀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진리 추구는 피조물의 본분이야. 오늘 나는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으니 가장 큰 수확을 얻은 거야. 이건 무엇보다 큰 복이야. 하나님께서 나를 원치 않으신다고 해도, 좋은 종착지가 없고 복받을 희망이 사라진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거야. 이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 무슨 이유든 내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는 데 지장을 줄 수는 없어. 이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내 원칙이라고.’ 이러면 육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그런데도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면 어떻게 하죠?”라고 말하는데, 그럼 또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소극적인 상태에 몇 번을 빠지든 계속 진리를 구해 해결하는 데 신경 쓰고, 진리에 공을 들이면 소극적인 상태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게 된다. 그러면 언젠가 너는 복받으려는 욕망이 사라지고 종착지나 결말에 속박받지 않으며, 이렇게 사는 것이 한결 홀가분하고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는 온종일 복과 종착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피곤하게 살았을 것이다. 매일 복을 받기 위해 말하고 사역하며 머리를 쥐어짰는데, 그렇게 해서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가장 좋은 시간을 의미 없는 일에 낭비했으니 결국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하고 어떤 체험 간증도 말하지 못해 웃음거리가 되고, 철저히 창피를 당하고 실패하게 될 것이다. 그 원인은 대체 무엇이겠느냐? 복받으려는 속셈이 너무 강하며, 종착지와 결말이 네 마음을 점령하여 너를 강하게 얽매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앞날과 운명의 결박에서 빠져나오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겠느냐? 생명 진입이 점점 깊어져서 성품 변화가 생길 때 완전히 내려놓게 된다. “저는 내려놓겠다고 마음먹으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 자연법칙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저는 하룻밤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는 단순한 사람이라서 당신들처럼 그렇게 복잡하지도, 또 연약하지도 않습니다. 당신들은 야심과 욕망이 너무 큽니다. 그건 당신들이 저보다 더 깊이 패괴되었다는 의미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정말 그렇겠느냐? 그렇지 않다. 인류의 패괴 본성은 모두 같으며, 깊고 얕음의 차이는 없다. 그저 인성의 유무와 유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패괴 성품을 비교적 깊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두고 너무 깊이 패괴되었다고 착각한다. 반면, 진리를 사랑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사람은 늘 자신에게 이렇다 할 패괴가 없다고, 좋은 행위만 좀 갖추면 성결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단언컨대, 이런 관점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얕게 패괴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패괴 본질과 진상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실행하고 실제에 진입해야 하며, 반드시 생명 성품의 변화를 이뤄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추구 방향과 길을 바로잡을 수 있으며, 복받기를 추구하는 것과 적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문제를 철저히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 구원받고 온전케 될 수 있다.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하여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는 것은 다 이 목적을 위한 것이다.
지금, 너희 중에 아직도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감히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냐, 아니면 희망도 없고 적절한 배경이나 환경도 갖춰지지 않아서 그런 욕망이 없는 것이냐? 이는 정확히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우선 확실한 점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한 배경하에 몇몇 사람이 너를 숭배하고 추어올리거나 자주 치켜세우고 칭찬한다면, 네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지위를 가지게 되고 어느새 사람들이 너를 완벽하고 고상하고 위대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으로 내세운다면, 비록 너를 하나님이라고 증거한 적 없고 네가 사람인 것도 알지만 하나님을 대하듯 너를 숭배하고 너에게 순종한다면 마음속으로 어떤 느낌을 받겠느냐? 매우 즐기며 만족스럽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너에게 여전히 그런 욕망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패괴 성품이 있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저 아무도 너를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을 때는 너 스스로도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나 네가 그럴 자격을 갖추었고 그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고 여건도 충족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자신을 높은 자리에 앉힐 것이다. 혹은 가만히 있는 너를 다른 사람이 기어이 떠받들면 네가 사양하겠느냐? 너는 ‘도의상 거절할 수 없다’며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사탄의 본성이 사람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채 아직 해결되지 못해 늘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원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될 수 있겠느냐? 사탄은 늘 하나님이 되고 싶어 했지만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 하늘에서 땅으로 내던져졌다. 그것이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는 자의 말로이다. 너희가 보기에 나는 자신의 신분과 지위, 본질에 대해 어떤 느낌일 것 같으냐? 너희는 당연히 모를 것이다. 나는 어떠한 느낌도 없고 모든 게 다 정상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은 아주 실제적이고 정상적이다. 초자연적인 일도 없고 특별한 느낌도 없다. 너는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는지, 나이는 몇이고 공부는 얼마나 했으며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안다. 그러나 네 내면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네가 아는 것이 정상이겠느냐, 아니면 모르는 것이 정상이겠느냐? (모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는 게 정상이다. 느낌이 있다면 그것은 초자연적이다. 그러면 육신도 아니고 정상 인성도 아니다. 초자연적이면 정상이 아니다. 항상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과 느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악령이지 육체를 지닌 평범한 존재가 아니다. 나에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는데, 너희가 보기에는 내가 아는 것 같으냐? 내가 알아야 하겠느냐? 나는 정상 인성의 사고 논리, 의견을 가지고 있고 정상적인 생각과 정상적인 육의 생활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정상 인성의 양심, 이성, 판단, 그리고 정상 인성으로 처신하고 사람을 사귀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은 다 명확한 사실이다.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남을 돕고 누구를 도와야 하는지 등 이런 원칙도 다 가지고 있고, 정상 인성으로 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이것이 바로 정상 인성이다.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것은 정상이다. 내가 그것을 안다면 아주 골치 아플 것이다. 왜 골치 아프겠느냐? 만약 그것을 알게 되면 부담이 생길 것이고 관련된 일이 너무 많아서 서로 충돌할 것이다. 알게 되는 부분은 육체나 물질세계에 속하지 않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이 세상의 일과 충돌한다. 마치 어떤 사람이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육 안에서, 그리고 물질세계에서 살면서 인간과 물질 모두에 속하지 않는 세계도 본다. 그는 두 가지 세계를 볼 수 있고 이상한 말도 좀 하는데 이는 정상이 아니다. 이러면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사역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영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하지만 그중에는 사람이 알 수 없는 일이 아주 많다. 사실 알지 못해도 별 손해는 없다. 알든 모르든 다 괜찮다. 하나님은 이미 육체를 지닌 평범한 존재가 깨닫고 알고 느낄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해 놓았다. 하나님은 네가 알아야 하는 것을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너에게 모두 말해 주고 남김없이 전부 알려 줄 것이다. 너에게 알려 줄 필요가 없는 것은 철저히 봉쇄해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니 너의 사고와 생각을 어지럽히지도 않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육체를 지닌 평범한 존재인 사람에게 영계의 일은 일종의 비밀이자 기이한 현상, 혹은 또 다른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은 마음속으로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네가 그걸 알아서 또 무엇 하겠느냐? 네가 입증할 수 있겠느냐? 거기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 영계의 일 중에는 비밀, 누설해서는 안 되는 중대한 기밀이 아주 많다. 이는 그 누구도 참여할 수 없는 일이니 제한돼 있는 일이나 조금 알면 충분하다.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류를 주재하는 데는 비밀이 아주 많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사람이 접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재하는 모든 것에 순종하고 그것을 깨닫고 인식한 다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너의 창조주이며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결국 욥이 했던 그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 이 성과에 이르려면 사람은 어떤 것들을 체험해야 하겠느냐?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 그리고 하나님이 마련한 여러 환경을 체험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행사와 성품을 인식하고 창조주의 본질을 이해하며 자신이 읽었던 하나님 말씀이나 들었던 설교에 자신을 비춰 본다면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든, 취하든 주든, 사람은 하나님의 행사를 공정하고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피조물의 이성에 맞게 순종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루려는 일이다.
오늘 교제할 주제로 돌아가 보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과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세 부류로 나뉜다. 이 세 부류의 사람을 모두 세세하게 구분해 보았다. 첫 번째 부류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 두 번째 부류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 세 번째 부류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 세 부류의 사람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세 번째 부류의 사람입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여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으로 발전하고 변화할 수 있겠느냐? (두 번째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사형 판결을 받은 것이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거나 영적인 이해력이 절반만 있게 변할 수는 없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절반만 있어도 희망은 있다.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럼 이 세 부류의 사람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이 구원받을 희망이 조금 더 크겠느냐? (세 번째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럼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어떻겠느냐? (개인의 추구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돌아서고 회개하며 진리를 추구한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너희는 아직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을 간파하지 못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비록 영적인 이해력이 있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는 아주 치명적인 부분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든 없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첫 번째 부류, 즉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다. 만약 영적인 이해력이 없지만 인성이 좋고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로 따를 뿐 아니라 순종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면,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깨닫는다면 그는 자신을 비춰 볼 수 있고 실행과 진입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이렇게 한동안 체험하면 점차 영적인 이해력이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볼수록 성령의 깨우침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만큼 자신의 내적 상태를 비춰 보고, 하나님의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을 받아들이며, 이를 위해 대가를 치른다. 그리고 나중에 그에 상응하는 성품의 변화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사람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면 구원받을 희망도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희망이 있을 것이니 이런 사람에게 사형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반대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을 비춰 볼 수도 있지만 전혀 진입하지 않는 사람들의 결말은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이 문제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겠느냐?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는 진리를 경시하고 하찮게 여긴다. 하찮게 여긴다는 게 무슨 뜻이겠느냐? 받아들이지 않고 무시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들은 것을 얼마나 깨달았든 그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얼마나 비춰 보았든 회개하지 않고,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알게 되더라도 회개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믿을 때 진리 실행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긴 하지만 ‘실행’이라는 두 글자는 그와 무관하다. 이 부류의 사람은 구원받기가 쉽지 않다.
이제 진리 추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하겠느냐? 진리 추구란 도대체 무엇인지 누가 말해 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을 반성하며 비춰 볼 뿐 아니라 생명 진입도 있어야만 진리 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해야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반성하지 못하면 생명 진입이 없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진리 추구와 생명 진입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이다. 만약 글귀와 도리는 많이 말할 줄 알지만 진리는 전혀 실행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도 없다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이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순종하지 않고 반발하고 판단한다면, 무턱대고 거역하고 여전히 사탄 철학에 기대어 살아가며 자신의 기호에 따라 일한다면 이런 자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지만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지만 자질이 너무 떨어져서 진리에 닿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믿었는데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그럼 이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주로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가장 자주 보이는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하나님에게 기도하려 하지도 않으며 진리는 더더욱 교제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예배하거나 설교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설교를 들으면 모두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고 자신을 폭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만 되면 졸려고 하거나 잡담을 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도 적지 않다. 그들은 그저 복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얻어서 패괴를 벗어 버리고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문제의 주된 근원은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을 때 그저 복받기만을 바란다. 이는 그들이 유일하게 바라는 것으로, 그들은 복받기 위해 힘쓰고 버릴 수 있지만,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에 흥미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도리를 이해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악행을 덜 저지르면 변화가 생기고, 게다가 힘쓰고 버리며 고생까지 하면 복받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런 관점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몇 년 동안 믿었든, 얼마나 많은 도리를 이해하고 말할 수 있든, 진리에 부합하는 말을 입에서 얼마나 많이 내뱉든 한결같이 진리를 실행해 내지 못하며, 여전히 제멋대로이고 방종한 성품을 드러낸다. 그들은 단속받지 않고 모든 면에서 자신의 체면과 이익을 지키며 유독 이기적이고 비열하다. 심지어 지적과 책망, 훈계가 닥쳐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조금도 순종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고, 일할 때 어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으며, 설령 상의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을 때 형식적으로만 상의한다. 빙빙 돌리며 에둘러 말하면서도 결국 다른 사람이 그의 말을 듣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행동 방식은 어떤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겠느냐? (간사한 성품을 드러냅니다.) 이는 단순히 간사한 것만이 아니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다. 다른 사람을 타이를 때 그는 다른 사람이 순종하게 하기 위해 별의별 듣기 좋은 말은 다 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안배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같은 일이 닥치면 그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강퍅하고 패역하며 순종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도 순종하지 못한다. 그 밖에 그는 다른 사람과 사귈 때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처세 철학에 기대어 여기저기서 잇속을 차리려 하고 사적인 관계를 지키려 한다. 이 부류의 사람은 아주 간사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간사함은 무엇으로 귀결되겠느냐? 사악함으로 귀결된다. 보통 사악한 성품은 사람이 인식하기 쉽지 않다. 사악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 말할 때 늘 시험하고 떠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설령 그가 마음을 연다고 해도 그 목적은 네가 진심을 실토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절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니요? 그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표출한 패괴 성품에 대해 자주 교제합니다.” 그 정도 교제하는 게 대수이겠느냐? 그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속의 진실한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게다가 갖은 수단과 방식, 또는 여러 말을 사용해 한사코 감추고 위장하며 남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인다. 만약 누군가 그의 속내를 알아내고 그가 했던 나쁜 일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자신이 회개하고 변화했다고 그 사람이 착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위장하고 뉘우치는 말이나 좀 하면서 사람을 미혹하는 방식을 취한다. 만약 또 나쁜 일을 한 것이 탄로 나서 사람들이 그의 실체, 즉 그가 악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다른 사람이 계속 그를 형제자매로 대하도록 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이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 실상을 다시 덮어 감춘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악한 성품이다. 이런 사악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위장에도 능하고 늘 자신을 위해 궤변과 설명을 늘어놓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다. 이런 사람은 누군가 진리를 교제하는 것, 누군가 마음을 열고 자신을 인식하고 해부하는 것, 누군가 사실의 진상을 폭로함으로써 자신이 폭로될까 봐 가장 두려워한다. 누군가 진리를 교제하기만 하면 그는 유달리 싫어하고 들으려 하지 않으며 마음속으로 반발하고 반감을 가지는 등 진리를 싫어하는 추태를 남김없이 드러낸다. 이 부류의 사람에게는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 외에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긍정적인 사물, 올바른 관점, 특히 진리에 부합하는 말을 거부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긍정적인 사물이나 진리에 부합하는 말이라고 해도 그가 생각하기에 좋지 않은 것,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이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어떤 성품이냐? 우매하고 완고하며 강퍅하고 어리석은 성품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주로 평소에 일하고 본분을 이행할 때 그의 표출과 태도를 보면 된다. 그의 표출과 태도를 통해 그의 성품을 알 수 있고, 그의 성품을 통해 그에게 변화가 있는지, 생명 진입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하면서 전부 패괴 성품만 드러내고 진리 실제는 조금도 없다면 그는 분명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생명 진입이 있겠느냐?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매일 일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헌신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 등 그가 무엇을 하든 전부 힘만 쓰는 것이며, 그는 힘쓰는 자다. 하나님을 몇 해나 믿었는지를 떠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사랑하는지 여부이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추구하는지를 알려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보면 된다. 만약 그가 행한 일들이 대부분 진리 원칙과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한다면 그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면 그가 매일 하는 일은 전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며, 그는 생명 진입이 있고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다. 설령 어떤 일을 부적절하게 처리하고, 진리 원칙을 그다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거나 편집스럽다고 할지라도, 때로는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자기 뜻을 고수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그 후에 회개하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 이는 그에게 생명 진입이 있고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만약 사람이 본분 이행 과정에서 표출하는 것이 전부 패괴 성품이라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뿐이고 오만하며 방종하다면, 안하무인 격으로 굴면서 독단적이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고 얼마나 많은 도를 들었든 결국 그 패괴 성품이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다. 이런 자는 분명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세월이 길고, 겉으로 볼 때는 악인이 아니며, 얼마간 좋은 행위가 있고, 또 하나님을 힘 있게 믿지만, 생명 성품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고, 약간의 체험 간증조차 말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가련하지 않으냐? 하나님을 오랜 세월 믿었는데 체험 간증을 조금도 말하지 못한다면 이는 순전히 힘만 쓰는 자이니 참으로 가련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생명 진입이 있는지를 판단할 때는 그가 표출하고 나타낸 것을 통해 그의 성품과 본질이 어떤지를 보고, 그에게 과연 성품 변화가 있는지를 보면 된다. 늘 글귀와 도리만 읊어 대며 꾸미고 기만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저 자신만 해할 뿐 남을 속일 수 없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는 사람은 언젠가 드러나 도태될 것이다. 오직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사람만이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를 이룰 것이다.
생명 진입이 무엇인지, 진리 추구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여러 모습에 대해 교제를 마쳤다. 사람은 자신을 비춰 보아야 하고, 진리를 깨닫고 나면 실행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대부분 사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겠느냐?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서 자신을 비춰 보고 어느 정도 인식할 수 있음에도 어째서 진리를 실행해 내지는 못하는 것이겠느냐? 대다수 사람은 그 원인을 찾지 못한다. 예를 들어, 사람은 모두 교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매우 교만하고 독선적이다. 이는 대부분 사람이 다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 교만한 성품을 표출하지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나 이는 쉽지 않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나서 비춰 볼 수 있고 자신이 교만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실행의 길도 있지만, 어려움은 바로 자신의 기호와 속셈,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경우가 잦고 그것이 패괴 성품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해결해야 할 것은 해결하고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내려놓아야 한다. 즉, 더 이상 자신의 속셈, 욕망, 체면, 지위, 이익 등을 위해 행동해서는 안 되고, 악을 행하는 발걸음을 멈추어야 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말하거나 행동해서도 안 된다. 그럴 수 있다면 이미 회개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고, 소극적인 면에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자신을 위해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해부하여 형제자매에게 네 교만한 성품의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다면, 이를 통해 본보기와 교훈, 이점을 얻고 실행의 길을 찾는다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렵겠느냐? 자신의 모든 속셈, 목적, 야심, 욕망, 이익을 내려놓는 것, 자신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 것, 자신을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지 않는 것이 어렵다.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말했는데, 그는 누구를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 것이겠느냐? (자신이 복을 받고 면류관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 것이지 자신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닌 것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뻔뻔스럽게 큰소리치며 자신을 과시하고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분명 자신을 위해 변명하고 설명한 것이자 자기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가장 좋은 근거인 것이다. 그는 분명 자신을 증거하고 진리를 대적한 것이자 진리를 모독한 것이다. 오늘날 바울을 숭배하는 사람이 허다한데, 그들은 마음속에 야심과 욕망이 가득하여 자신을 증거하려고 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 이는 자신의 욕망과 야심이 계속 부풀어 오르도록 내버려두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여러 상황에서 다 드러내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면 완전히 끝장나 버리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 무엇이 이 문제의 핵심이겠느냐? (자신의 속셈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속셈을 버리는 것은 소극적인 측면의 실행이다. 너는 남을 폭로하듯 그것을 적극적으로 폭로해야 한다. 만약 네가 “여러분에게 저의 실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야심이 커서 여러분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어 해요. 이제 여러분에게 털어놓으려고 합니다. 저는 육을 저버리기 원하고 사탄의 앞잡이 노릇도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저 자신을 폭로하는 것은 여러분이 저의 진면목을 분명히 파악하여 저를 숭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하고 그대로 실행한다면 어떤 효과가 있겠느냐? 틀림없이 다들 너에게 탄복할 것이다. 이는 네가 온갖 비열한 수단으로 숭배와 앙망을 얻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최소한 이는 긍정적인 일이다. 다들 너에게 어느 정도 탄복하긴 하여도 너를 앙망하겠느냐? 아마 그러는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너는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네가 늘 자신을 폭로하며 “저 역시 패역합니다. 게다가 그 정도가 여러분보다도 더 심각합니다. 저는 간사하고 사악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때 여러분이 저를 무시하지 않고 우러러보도록 그런 말을 했던 거예요.”라고 말한다면 다들 네 말을 듣고 너를 무시하지 않을 뿐 아니라 더욱 존중할 것이다. 이는 떳떳한 실행 방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도저히 이렇게 할 수 없다. 만약 너희가 이렇게 하는 것이 훌륭하고 영광스럽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하는 것을 동경한다면, 이렇게 해야 하고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즉 떳떳한 사람, 정직한 사람, 입에 거짓말이 없는 사람, 자신의 패괴 성품을 철저히 저버리고 사탄을 저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렬한 염원이 있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광명 속에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동경하고 진실로 사랑한다면 진리를 사랑할 수 있고 진리에 진입할 수 있으며 사탄에 속하는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다. 만약 자신의 속셈, 목적, 야심, 욕망, 이익 등에 흥미를 느끼고 지식, 명리, 지위를 추구하는 데 미련이 남아 있다면, 이런 것들이 네 마음속에서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자. 내 분량이 적절해지면 그때 다시 얘기해야지.”라고 말한다면 이는 자신을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두는 것이고 자신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내버려두면 생명 진입이 더뎌진다. 육적 향락에 연연하고 지위의 복을 탐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완고해진다. 그럼 네 마음속에 있는 사탄에 속하는 것들이 완전히 정결케 될 수 있겠느냐? 생명 체험이 깊어지고 생명이 계속 자랄 수 있겠느냐? 하나님에게 온전케 될 수 있겠느냐? 이미 육적 향락에 빠졌고 지위의 복에 단단히 묶여 버렸는데 여기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너는 벗어나기 싫어지고 서서히 사람을 미혹하는 자가 된다. 그럼 골치 아파진다. 너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다. 바울은 왜 그런 말로를 맞이했겠느냐? 그가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고 늘 자기의 이상과 바람만 추구했고, 하나님 선민을 통제하여 모두 자기를 따르고 본받도록 하려고 했으며, 힘들게 사역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하나님과 거래해 상과 면류관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 만약 사람이 바울과 완전히 똑같은 길을 걷는다면 구제 불능이고 완전히 끝장난 것이다. 바울 같은 부류의 사람은 모두 한사코 회개하지 않는 적그리스도이다. 만약 바울과 같은 내적 상태는 조금 갖고 있지만 추구 목표는 바울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면 너는 서둘러 회개해야 한다.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약 네가 바울을 본받고 숭배하며 바울과 완전히 똑같다면, 불신파일 뿐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되려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과 맞먹으려는 것 아니겠느냐? 마음속으로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을 숭배하고 그리스도와 맞먹으려고 한다면, 또한 자신의 은사와 지식을 생명으로 여기고 부당한 추구를 정당한 추구로 여긴다면, 너의 추구 목표와 추구 방식이 갈수록 바울과 비슷해지고 점차 바울의 추구와 완벽하게 일치하게 된다면 너는 문제가 된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고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너는 베드로를 본받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걸으며 육을 철저히 저버리고 사탄에 속하는 것들을 저버려야만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이제 너희에게 구원받을 길이 생기지 않았느냐? (끊임없이 자신을 폭로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선 개인의 속셈, 목적, 야심,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적극적으로 추구하든,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든 이런 것들을 내려놓고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만약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할 계획이 있다면 우선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 만약 체면과 지위를 위해서라면 우선 발걸음을 멈추어야 한다. 행동의 발걸음을 늦추고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저버리고 싶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힘이 없어요. 저에게 힘을 더해 주세요. 저를 지켜 주시고 악을 행하는 저의 발걸음을 막아 주세요.” 그러면 어느새 힘이 생길 것이다. 죄를 이기는 능력, 육을 저버리는 능력, 패괴 성품을 저버리는 능력은 사람의 소망, 의지,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사역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에게 의지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 간혹 진리를 깨닫고 행할 길이 생기면 너는 이제 스스로 독립하여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새로운 환경이 닥치면 또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의지해야 한다. 사람은 일생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러니 영원히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를 아무리 많이 깨닫는다 해도 하나님을 떠날 수는 없다. 소극적이거나 수동적인 순간이 얼마나 많든 결국은 하나님의 인솔과 인도에서 떠날 수 없다. 하나님에게 많이 순종할수록 너의 진리 실제가 많아지고, 진리 실제가 많아질수록 너의 생명 진입이 점점 깊어짐을 의미한다. 생명 진입이 깊어질수록 네 성품에 변화가 많아짐을 뜻한다. 성품에 변화가 많아지면 네 분량이 생긴다. 너의 분량은 네 생명 진입을 의미한다. 분량이 생기면 너는 패괴 성품이 너를 통제하고 결박할 때도 이길 수 있게 되고 죄를 이기는 능력이 강해지며 마음속에 힘이 생긴다. 그저 감성적인 소망, 염원, 포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서서 어른이 되고 진리와 인성을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 추구의 길이자 진리 추구의 성과이다. 너희는 방향이 보이지 않느냐? 희망이 보이지 않느냐? (보입니다.) 이는 좋은 일이다.
생명 진입은 끝이 없는 일로, 반드시 한평생 체험해야만 어느 정도 수확이 있고 변화가 생길 수 있다. 설령 네가 진리 추구의 길을 걷는다 해도 육적 향락에 연연하고 지위의 복을 탐한다면 여전히 넘어지고 실패하고 말 것이다. 지금 너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고 방향을 찾았다. 바람직하지 않은 것, 소극적인 것, 부정적인 것, 나쁜 것은 명확히 분별할 줄 알고 그것들과 분명히 선을 그었다. 긍정적인 것도 많이 이해하고 얻었으며 많이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이제 그릇되고 사악하며 부정적인 사물과 행동 방식을 분별하고 나서 그것을 마음속에서 철저히 제거하고 포기하며 저버린 다음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일만 남았다. 그러면 생명 진입이 있게 된다. 생명 진입은 사실 어렵지 않다. 이는 네가 진실로 진리를 사랑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네가 정말로 진리를 사랑한다면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너를 무너뜨릴 수 없다. 너는 한동안 소극적이고 연약해지더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네가 만약 진리를 사랑하지 않거나 진리를 사랑하는 열의가 그리 크지 않아 그저 겉모습과 형식에만 치우치며 어느 정도 헌신하고 노력하며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본분을 이행하지만 힘쓰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진리를 깨닫거나 실제에 진입하려 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큰 과오를 범하지 않는 데 만족하며 안주한다면 어떤 결과를 불러오겠느냐? 그럼 너는 절대로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성공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진정으로 생명을 얻고자 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반드시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아야 하고 모든 부당한 추구를 포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는 것, 복받기를 추구하는 것, 혹은 면류관과 상을 받고자 추구하는 것 등을 반드시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 네가 정말로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 좋아한다면 생명 진입은 너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리를 깨닫기만 하면 자연스레 길이 생기고 어려움이 사라진다.
2018년 6월 21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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