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를 실행해야 생명 진입이 있다 (제 1 부)

생명 진입은 어떤 측면부터 시작해야 하겠느냐? 어떤 조건을 갖춰야만 생명 진입이 있겠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얻는 것이 가장 관건이며 중요하겠느냐? 너희는 이런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생명 진입은 무엇이냐? 생명 진입은 바로 한 사람의 삶, 일 처리, 인생 방향, 추구 목표가 바뀌는 것이다. 예전에는 일할 때 우매하고 식견이 없었으며 늘 육적인 생각이나 관념, 상상에 따라 일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폭로, 하나님의 양육과 공급을 통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일상생활에서 처신의 관점과 방식, 인생의 방향과 목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변화가 생겼다. 이것이 생명 진입이다. 그렇다면 생명 진입의 기초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 생명 진입은 하나님 말씀, 그리고 진리와 떼어 놓을 수 없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다 진리이다. 생명 진입이 있는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다. 행동이나 말, 문제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입장, 시각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의지할 수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생명 진입이 있는 모습이다. 그러면 생명 진입은 주로 무엇과 관련이 있겠느냐? (하나님 말씀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관련이 있고, 진리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이제 생명 진입이 있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생명 진입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의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우리는 어떤 측면을 교제해야 하겠느냐? (진리 추구에 관해 교제해야 합니다.) 진리 추구가 바로 오늘 교제하려는 주제이다. 지금 너희는 생명 진입과 진리 추구의 관계에 대해 그리 분명하고 명백하게 알지 못한 채, 항상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에 대해서만 교제하고 바울이 걸었던 길을 분석하고 있다. 결국 주제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진리 추구이다. 바울이 걸었던 길을 분석하든, 베드로가 걸었던 온전케 되는 길에 대해 논하든, 무엇을 얘기하든 그 궁극적인 목적은 모든 사람이 어떤 길을 걷게 하려는 것이겠느냐? (진리 추구의 길을 걷게 하려는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 살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 말씀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의 추구 목표와 걷는 길이 분명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 추구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며 성품 변화를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할 때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주제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다. 열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이 반드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다. 누구나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지만, 자질이 부족하거나 이해 능력이 떨어져서 진리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어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혼자 하나님 말씀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며 늘 치우치게 이해하고 교조적이다. 이들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다. 교회에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도 있으며, 자질이 부족하고 이해 능력이 없는 사람도 있고 자질이 훌륭하고 하나님 말씀을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도 있으며, 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내적 상태와 모습을 갖고 있는데 이들을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우선 첫 번째 부류, 즉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에 대해 얘기해 보자. 예를 들어, 한 측면의 진리를 교제할 때 그 측면의 진리와 사람의 내적 상태, 태도, 속셈, 행동에 대해 교제했다고 치자. 교제를 다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무엇을 교제했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자신을 비춰 보지 못하고 자기 행동과 모습을 알지 못하며, 자신의 패괴 성품과 본성 본질이 그 교제한 진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것이 자기 생활 속에서 추구하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어째서 이런 설교를 했는지도 모른다. 교제를 다 듣고 이해한 것이라고는 도리와 규례뿐이다. 누가 그에게 무엇을 깨달았느냐고 물으면 “오늘 많은 주제를 교제했지만 주된 내용은 일이 닥치면 기도를 많이 하라는 이 한 가지뿐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또 어떤 이들은 “다 이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선행을 많이 예비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대가를 많이 치러야 한다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으로, 하나님 말씀 중 한 구절만 가지고 아주 단편적으로 이해했을 뿐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리 많은 말씀을 해도 규례 하나, 도리 하나, 이론 하나, 논조 하나, 또는 주장 하나만을 이해할 뿐이다. 실행해야 하는 때가 되면 그는 어떻게 실행하겠느냐? 예를 들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진리에 대해 얘기하면 그는 듣고 나서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너무 단순하지 않으냐? 그는 거기까지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하는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인지도 깨닫지 못한다. 또한, 어떻게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 말씀에 따라 진리를 실행하는지도 깨닫지 못하며, 어떻게 하나님 편에 서서 교회 사역을 지키는지는 더더욱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에게 순종한다는 핵심적인 진리와 관계된 것일수록 더더욱 도달하지 못하고 그저 규례를 지킬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규례를 지키고 융통성이 없을 뿐 아니라 사리도 통하지 않는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의 주된 모습은 무엇이냐?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바로 규례를 지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말 한마디, 일 한 가지를 하나의 규례, 하나의 모델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진리를 대할 때도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오늘 교제한 진리에 관련된 그 측면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 몇 마디 말과 그 측면의 모습을 자기가 실행해야 할 규칙으로 규정한다. 이렇게 각종 규칙을 그때 당시 머릿속에 잘 새겨 두었다가 다음에 다른 상황에 맞닥뜨릴 경우, 교제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계속 원래의 실행 방식과 규칙을 그대로 적용하고 실행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규례를 지킬 때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피곤하다고 느낍니다.) 그는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다. 만약 피곤함을 느꼈다면 규례를 지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자신이 규례를 지키고 있다거나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이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으며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는다. 반면 자신이 진리의 실제적인 면을 깨닫고 그 부분의 원칙을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줄로 착각한다. 만약 규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 분야의 진리 실제에 진입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이며,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부합하겠느냐? 이렇게 규례를 지키는 실행 방법이 진리를 추구하는 행동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그는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하지 않고 마음을 써서 궁리하지도 않으며, 계속 낡은 관습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부류의 행동이다. 낡은 관습을 고집하고 나태하며,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하지 않고 사고하지도 않고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는다. 그 밖에, 설령 자세히 살펴본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이해할 수 없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결국 그런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어 영원히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 하지만, 추구하는 방식이 옳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주로 규례를 지키고 틀에 박힌 관습을 고집하고 도리를 지키거나,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고, 타인의 말을 따라 한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의 본질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어째서 규례를 지키는 일을 진리 실행으로 여기고, 이렇게 실행하는 것을 진리 추구로 생각하는 것이겠느냐? 어째서 이런 문제가 초래되는 것이겠느냐? 여기에 한 가지 근본 원인이 있는데 너희는 알아낼 수 있느냐? (그는 자신의 생각과 관념, 상상을 진리로 여깁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한 가지 측면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그는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일이 닥쳐도 진리를 구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진리로 삼아 대합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일부 사람들은 그렇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이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규례 지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설교를 들을 때 진지하게 듣기도 한다. 특히 자신의 실행과 관련된 것, 예를 들어 어떻게 본분을 이행할지,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을 어떻게 잘해 낼지 등에 대해서는 귀 기울여 듣는다. 하지만 핵심적인 문제는 그가 설교를 들을 때 자신의 내적 상태와 대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령 사람의 패역에 대해 얘기하면, 그는 다 듣고 나서 ‘패역? 내게는 존재하지 않아! 패역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나중에 그런 상황이 닥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참고 눈치를 보면서 주변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대로 따라 해야겠어. 그러면 패역이 없는 것 아니겠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설교를 듣고 난 뒤 자신 나름의 논리 방식과 실행 방법을 도출해 낸다. 그는 설교 중에 폭로된 여러 가지 내적 상태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자신을 비춰 보지도 못한다. 그의 마음은 혼탁한 것이다. 혼탁한 것이란 무엇이겠느냐? 그는 설교 내용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고, ‘무엇을 교제하는 거야? 왜 간단히 말하지 않는 거지? 오늘은 이렇게 교제하고, 내일은 또 저렇게 교제하잖아.’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진리 실행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설교 중에 폭로된 여러 가지 내적 상태와 패괴 성품에 자신을 비춰 보지 못한다. 다시 말해, 생명 진입의 과정 중에 사람이 각종 환경에서 드러내는 마음과 생각, 온갖 패괴 성품이 그에게는 혼탁하고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그는 세부적으로 구별할 줄도 모르고 비춰 볼 줄도 모른다. 비춰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다 듣고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그것이 남의 얘기이고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깁니다.) 그렇다. 주로 그런 특징이 나타난다. 자신과 대조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패괴된 내적 상태를 폭로하는 말을 들으면 모두 남의 얘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사람의 일반적인 문제나 흔한 문제를 폭로하면 인정하기도 하지만, 패괴 성품이나 사람의 본질과 관련된 말은 일절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치 인정하면 곧 정죄되는 것처럼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모든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존재하는 여러 측면의 내적 상태와 행동, 여러 측면의 본성 본질의 표출을 폭로해도 그는 일절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비춰 보거나 반성하지 않으며, 항상 이런 말씀과 문제들을 타인에게 미루고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정상인의 사고를 갖고 있지 않고, 항상 빙빙 돌려 말하며 동문서답한다. 예를 들어, 그에게 밥을 먹었느냐고 물으면 그는 물을 마시지 않겠다고 대답하고, 졸리느냐고 물으면 목이 마르지 않다고 대답한다. 항상 이렇게 혼탁한 내적 상태와 혼돈의 상태에 처해 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교회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문제가 있지만 조금씩은 차이가 있다. 영적인 이해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지 3년이 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생명 진입, 진리 추구, 성품 변화, 그리고 온전케 되는 일에 대해 아직 모호해한다. 그저 열심히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하며, 힘을 들이고 힘만 쓰는 단계에 있다. 생명 진입에 대해 알지 못하고, 생명 진입과 진리 추구에 대해 약간의 개념조차 없이 그저 외적으로 일하고 열심히 일하기를 좋아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영적인 이해력이 전혀 없다고 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기간이 너무 짧아서 아직 성질을 규정할 수 없다. 아직 열성적인 단계에 있고 하나님 경륜의 근본 취지와 사람이 구원받는 길, 여러 부류의 사람이 어떤 길을 걷는지 등 이런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은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고, 또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이다. 하지만 생명 진입이 무엇인지 이미 깨달았고, 생명 진입과 성품 변화의 여러 가지 진리를 접하기 시작한 사람 중에도 영적인 이해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여전히 존재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전혀 없는 사람은 설령 마음속으로 진리를 추구하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영적인 이해력이 전혀 없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일 수 없고,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을 갖출 수도 없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과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어떤 모습이 다르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교제하는 진리, 하나님이 말씀하는 내적 상태와 배경, 그리고 가리키는 바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 비춰 볼 줄 모른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그와 정반대다. 예를 들어, 내가 사람의 패역을 교제할 때, 패역이라는 것 안에는 강퍅함, 이기적임, 우완함,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오해, 반발심, 반항이 포함돼 있다. 내가 이 주제와 관련된 내적 상태를 얘기할 때, 예를 들든, 한 측면의 진리를 얘기하든, 네 마음속에 존재하는 어느 측면의 내적 상태를 살짝 언급하든, 아니면 진리 원칙이라는 주제를 교제하든 네가 정말로 알아듣는다면 너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다. 만약 네가 알아듣고 실행할 줄도 안다면 너는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듣고 나서 순수하게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 진리를 깨달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어디까지 말씀하든 그는 따라올 수 있고, 자신의 내적 상태에 결부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볼 수 있으며, 실행의 길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모습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읽고 나면 마음이 환해지고 수확을 얻으며 영적으로 특히 해방받고 행할 길이 생겼다고 느낀다. 그래서 매번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항상 수확이 있고, 매번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유익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모습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교제하든 듣고 나면 마음속에 일부 장면이 떠올라서 하나님이 폭로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에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언급하면 그는 자신의 내적 상태에 결부해 보고 ‘나의 이런 요구와 이런 상상이 알고 보니 하나님에 대한 오해였구나.’라는 사실을 발견한 뒤 자신을 비춰 본다. 하나님에 대한 반발심과 반항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에도 그는 그런 정서를 가지고 있고 그런 내적 상태 속에서 살고 있거나 자기 안에 그런 성품과 본질이 있기에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다. 어떤 것들을 비춰 볼 수 있겠느냐? 생각, 의견, 또는 자신이 드러낸 행동 방식, 행위, 이런 것들을 모두 비춰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이 말씀한 게 무엇인지,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있고, 자신의 어떤 행위, 표출, 태도, 내적 상태, 본질이 하나님이 폭로한, 설교에서 언급한 내적 상태와 같은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모습이다. 너희는 자신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지 없는지 느낄 수 있느냐?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만약 조금도 없다면 문제가 된다. 만약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비춰 보지는 못하지만 자신에게도 그 측면의 내적 상태가 있다는 사실을 알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그 측면의 내적 상태를 이미 발견했다면, 그 측면의 진리가 무엇이고 자신이 어떻게 진입해야 하는지 안다면 그것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고 해서 매번 설교를 들을 때마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왜냐하면 생명 진입은 여러 측면의 진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네가 깨닫고 진입한 진리도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진입하지 못한 진리도 있다. 또한, 어떤 진리는 네가 전혀 접해 보지도 못했는데,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것이라서 네가 지금 듣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지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고 심할 경우 관념과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이 역시 정상적인 현상이다. 어떤 측면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 측면에서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이다. 어떤 측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그 측면에서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어떤 측면의 진리에 대해서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고 낯설게 느끼며 심지어 관념까지 생긴다면 그 측면에서는 더더욱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한동안 체험하여 진리를 깨달아야만 그 측면에서 영적인 이해력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오해하면서도 스스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았어. 한 번도 오해한 적 없다고. 하나님을 사랑하기에도 바쁜데 어떻게 오해할 수 있겠어?’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네가 만약 “사람은 하나님을 자주 오해하곤 하는데 이는 모두 사람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튀어나오죠. 하지만 저는 제가 어느 측면에서 하나님을 오해하는지, 하나님과 갈등이 있는지 아직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아요. 더 세세하게 파헤치고 체험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해요. 하나님께 환경을 마련해 드러내 달라고 구해야겠어요.”라고 말한다면 이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주관적으로 이런 염원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 만약 누군가 “저는 한 번도 하나님을 오해한 적 없어요. 이건 다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에요.”라며 황당하기 그지없는 말을 한다면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 주로 표출하는 성품은 무엇이겠느냐? 교만함과 우완함이다. 우완하다는 게 무엇이겠느냐? 우매하고 완고하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모습이겠느냐? (다들 알 수 있는 패괴 성품을 그는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유별나게 독선적이고 자신이 아주 옳다고 여깁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 측면의 패괴가 없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스스로 괜찮다고 여긴다. 즉, 사람 내면이 교만한 성품의 지배를 받아 자신은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이 뭐라고 하든 자기가 발견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거나 겪어 보지 못한 일은 반성하거나 인식할 필요도,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우완한 것이다. 우완하다는 것을 순화해서 말하면 무엇이겠느냐? 사리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또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느냐? (어리석은 것입니다.) 맞다. 우완하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리석은 것과 관련 있다. 우매하고 완고한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조심하세요. 늘 찬물만 마시면 쉽게 위가 차가워져서 배가 아플 수 있어요.”라고 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몸이 튼튼해서 괜찮아요. 괜히 걱정하시는 거예요.” 이는 우완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겪어 보지도 못했으면서 저렇게 독선적이니 매우 우완해 보이는 것이다. 왜 우완하다고 하겠느냐? 왜냐하면 그는 겪어 보지도 못했으면서 감히 겪어 본 사람이 하는 말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말을 사실과 대조해 본 뒤 거기서 교훈을 얻지도 않고, 유달리 독선적이기까지 해서 남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게 바로 우완한 것이자 교만하고 독선적인 것이다. 베드로는 생명 진입에서 다른 사람의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하나님이 이를 두고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앞사람들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교훈으로 삼는다”(<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실제’에 대해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완한 사람은 눈앞에서 발생하는 일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지도 않는다. 사람이 보기에 이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사실 이는 성품의 문제로, 교만한 성품으로 초래된 것이다.

우리 다시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과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라는 주제로 돌아가 보자. 조금 전에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주로 어떤 모습을 보인다고 했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폭로하는 것이 사람의 어느 측면의 내적 상태인지 알아들을 수 있고, 현실 생활에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 행동 방식, 행위를 비춰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주요 내용은 기본적으로 다 언급했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폭로한 말씀을 읽고 나서 자신을 비춰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사람이 진입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어떤 성품을 폭로하는 것인지, 사람의 어떤 내적 상태와 모습을 폭로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을 이런 것들에 다 비춰 볼 수 있고, 이런 것들을 다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조금 전에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의 모습을 교제할 때 우리는 또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었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든 일에서 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폭로하는 내적 상태에 자신을 비춰 볼 수 있는데,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모습입니다. 아직 체험해 보지 못한 일에서는 자신을 비춰 보지 못하는데,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입니다.) 체험해 보지 못한 일에서 자신을 비춰 보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체험해 본 일들이지만 그 안에 담긴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이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역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그럼 그것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이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너희에게는 이런 모습이 있지 않으냐? 예를 들어, 순종의 진리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순종해야 해요. 사람에게는 칭찬할 만한 게 없어요. 순종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자 의무예요.” 너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이게 무슨 진리야? 이런 일에도 순종해야 한다고? 순종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이 일에서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실, 이는 체험의 깊이와는 관련이 없다. 이는 순전히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욥은 시련이 닥쳤을 때 뭐라고 말했느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 1:21)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나서 이 안에 담긴 진리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겠느냐?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럼 이 일에서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이겠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취하는 것과 주는 것, 이 두 가지 일은 모든 사람이 다 체험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이미 체험했지만 이 안에 담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 일에서 네게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욥이 한 이 말에 담긴 진리는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만사 만물을 주재하고 있고, 취하는 것과 주는 것 모두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실행해야 하겠느냐?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다.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하나님의 주재를 찬양해야 한다. 사람이 이런 말들과 이 안에 담긴 진리를 깨닫는다면 이 일에서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 안에 담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 일에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그럼 지금까지 너희는 이 말에서 영적인 이해력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없었습니다.) 만약 네가 도리를 이해하고 “욥은 좋은 체험을 했군요. 하나님께서는 욥이 의인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가 한 모든 일은 분명 진리에 부합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었을 겁니다.”라고 말한다면 너는 도리에서는 통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리는 언제 너의 진리 실제로 바뀔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서 정말로 환경을 마련해 취하실 때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불평하지 말아야 하고, 이 측면의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네가 실행해 낼 수 있다고 해도 네가 실행하는 것이 규례를 지키고 흉내 내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정말로 하나님의 주재를 인식한 것이겠느냐? 이는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어느 것이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이겠느냐? 욥의 선례가 있기 때문에 이제 욥과 똑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들이 그 말을 하는 것은 흉내 내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욥처럼 몇 십 년 동안 체험한 뒤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한다는 진리와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말하는 것이겠느냐? 어느 것이 진리 실제이겠느냐? (체험해 낸 것이 실제입니다.) 체험해 낸 느낌과 인식이야말로 진리 실제이지 남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은 실제가 아니다. 같은 말이라고 해도 욥의 말에는 실제적인 면이 있지만, 말을 따라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구호가 된다. 이는 자신을 포장하고 영적 인물인 척하는 것으로, 종교 사기꾼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리더로 선발되어 책임이 좀 생기고 지위를 얻고 나면 욥이 했던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형제자매에게 자주 교제하는데, 듣는 사람은 어떤 느낌이 들겠느냐? ‘이 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거야. 성령이 깨우쳐 주시고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거야. 정말 실제적인 말이야.’라고 느낀다. 하지만 일 년도 되지 않아 이 리더는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 선민의 생명 진입과 교회 사역의 진도에 지장을 주어 교체되었다. 그 후 그는 소극적으로 변하여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욥과 똑같은 말을 하긴 하지만 욥이 체험했던 일들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이 말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지도, 체험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했다. 그럼 그가 이 말을 할 때는 흉내 내는 것이겠느냐, 아니면 진심으로 말하는 것이겠느냐? (흉내 내는 것입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보면, 그는 개인적인 감정을 담아 진심으로 이 말을 한 것이다. 그에게는 소망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상을 줄 때 자신이 계속해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축복과 상에 감사할 수 있기를, 또 하나님이 거두어 갈 때도 자신이 절대로 불평을 늘어놓지 않고 욥을 본받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인도와 주재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는 한낱 소망일 뿐 그는 아직 체험해 보지 못했다. 지위도, 직함도 사라져서 그가 평신도가 되어도 이 말이 작용하겠느냐? (작용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작용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이 또한 사람에 따라 다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 말로 자신의 행위를 가늠하고, 자신의 체험을 주도하며, 자신을 비춰 볼 수도 있고 여기에서 실행의 길을 찾기도 한다. 그는 그렇게 괴로워하지도, 소극적으로 변하지도 않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 반면 진리는 추구하지 않고 구호만 외치는 사람의 경우 골치가 아프다. 그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너희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모습이 무엇인지 본 적 있느냐? (어떤 리더는 교체된 후 자신을 인식하지 않고 순종하지도 않으며, 그를 교체한 일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여 소극적으로 변하고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다시 선거를 했을 때 그는 권력을 다투다가 결국 적그리스도가 되어 출교되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경우에는 그렇다. 또 어떤 모습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교체되고 나서 일하러 가고 더 이상 본분은 이행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그는 왜 당시에는 큰소리치고 구호를 외칠 수 있었겠느냐? 그는 남이 들으라고 구호를 외친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를 숭배하도록 하려고 이런 구호, 도리,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을 포장하고 다른 사람을 구슬린 것이다. 그게 그의 목적이었다. 또 어떤 모습이 있느냐? (일부 리더 일꾼은 교체되기 전에는 표면적으로 열심히 추구하고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라는 말도 하지만, 교체되고 나서는 소극적으로 변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욕설을 퍼붓기도 합니다. 그가 예전에 했던 헌신과 노력은 다 헛수고였다고 생각하고 마치 하나님 집이 그에게 빚을 진 것처럼 굽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심각한 문제다. 우선, 그가 그 말을 한 것이 어떤 성질인지 분별해야 한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욥의 말을 따라 하며 스스로에게 아름다운 왕관을 만들어 씌우고, 영적인 체하면서 자신을 과시하고 남을 미혹한다. 이는 진리를 우롱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모습이 아니겠느냐? 너희가 보기에 어떤 부류의 사람이 명리와 지위를 잃었을 때 특히 크게 반응하고 일순간에 소극적으로 변하며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는 데다가 심지어 믿음까지도 저버리겠느냐?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과 악인이 그렇습니다.) 그 말도 맞다.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과 악인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성이 좋은 사람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겠느냐? 그도 분명히 이런 모습을 보일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악인 외에도 또 있다. 이는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어떤 길을 걷는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인성이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도 마찬가지로 악의 본질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어기며 하나님을 대적할 뿐 아니라 일단 지위가 생기면 악행까지 저지를 수도 있다. 여기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이 특히 지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지위를 갖지 못하게 하거나 리더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가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는 지위가 있을 때는 아무리 큰 고생도, 아무리 억울한 일도 다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이런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거나 고생하며 대가를 치른다고 해서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건 잘못됐다. 그는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고 지위의 복을 추구한다. 이는 바울의 어느 측면에 비춰 볼 수 있겠느냐? (면류관을 추구한 것에 비춰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 면류관, 그것도 의의 면류관을 추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 같은 부류의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다. 면류관을 추구하는 것을 정당한 추구로 여기고 진리 추구로 여긴다. 앞으로 너희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조금은 분별할 수 있지 않겠느냐? (분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체되어 지위를 잃고 나서 욕설을 퍼붓고, 형제자매를 만나도 상대하지 않고 말도 하지 않으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저는 전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위해 봉사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필요할 때만 저를 떠올리고 필요 없을 때는 한쪽으로 걷어차고 교체해 버리잖아요. 저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무슨 말이냐? 분별하기 쉽지 않겠느냐? 이게 어디 하나님을 믿는 것이겠느냐? 이는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그도 좋은 인간이 아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이 교체되고 나서 가장 크게 반응하겠느냐? (명리와 지위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조금 전에 이 부류의 사람이 인성이 좋지 않거나 진리와 생명 진입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이 문제의 본질과 관련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 말은 듣기에는 일리가 좀 있는 것 같지만 이 문제의 본질과는 관련이 없다. 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조금 전에 너희는 교체되고 나서 불평을 늘어놓고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은 인성이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왜 이것을 두고 그저 도리라고만 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인성도 그런대로 괜찮고 진심으로 노력하고 헌신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늘 명예와 지위만 추구하여 결국 교체되고 나면 아주 크게 반응한다. 이는 그가 단순히 인성이 좋지 않은 문제만이 아니라 성품에도 문제가 있어서 그런 모습들을 보이는 것임을 말해 준다. 패괴 성품이 너무도 심각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하기도 한다. “이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이 말은 너무 두루뭉술하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모습은 다양하다. 불평을 늘어놓고 본분 이행에 충성심이 없는 등 이런 것들이 모두 그에 해당한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문제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두루뭉술하고 구체적이지 않은, 도리를 말하는 표현 방식이다.

이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모습에 관해 교제하겠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어떤 태도로 진리를 대하느냐? 그들은 자신의 내적 상태, 모습, 그리고 드러낸 패괴를 어떻게 대하느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어느 측면의 내적 상태와 모습을 폭로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자신을 비춰 보지 못합니다.) 주로 비춰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비춰 보지 못하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네가 질문을 하면 그는 늘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대답을 한다. 그는 늘 너와 밀고 당기며 논쟁을 벌이는 데다가 논쟁하는 문제는 초점도 같지 않고 전혀 다른 일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없는데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진리를 추구할 수 없으면 생명 진입이 있을 수 있겠느냐?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생명 진입이 있을 수 없다. 이는 필연적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몇 년 동안 믿었는데도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는 깨닫지 못했지만 특히 열의가 넘치며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 관점이 옳으냐?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가늠할 때는 단순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지 여부만 봐서는 안 된다. 가장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그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중시하는가이다. 만약 그가 마음속으로 중시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에 진입하며 진리를 얻는 것이고, 생명 진입에서 성과에 이르렀다면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만약 그가 버리고 헌신하는 것이 면류관과 상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몇 년 동안이나 버리고 헌신하며 수많은 고생을 했는데도 진리를 깨달아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인식하지도 못했다면 그가 그렇게 버리고 헌신한 것이 과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겠느냐? 그는 분명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버리고 헌신한 것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성과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버리고 헌신한 것은 진리를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바울과 똑같다. 바울은 반평생 주를 위해 전도 사역을 했지만 진리를 얻지 못했고 주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너는 바울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하는지 그 관건은 그가 추구하는 목표와 그의 속마음이 진리를 얻는 것을 중시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정말로 진리에 공을 들이기를 중시하고, 진리를 실행하여 실제에 진입하는 성과에 이르렀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해 내는 사람만이 생명 진입이 있는 사람이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진리를 실행할 줄 모른다면 너희가 보기에 그 사람에게 생명 진입이 있겠느냐? 분명 있을 리가 없다.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생명 진입이 있겠느냐? 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그가 자신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며 생명 진입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이렇게 물어야 한다. “당신이 생명에 진입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단순히 그의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증거가 없으면 설득력이 없다. 네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너는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느냐? 진리를 얼마나 실행해 냈느냐? 어느 측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했느냐? 너는 자신의 체험 간증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 네가 체험 간증을 이야기할 수 없다면, 네가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을 속이고 미혹하는 것이다. 왜 바울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겠느냐? 왜냐하면 바울이 쓴 서신에는 생명 체험의 간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을 이야기할 수 없었고 예수에 대한 사랑과 순종에 대해서는 더더욱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패괴 성품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괴수라는 말만 했다. 이는 그가 예수를 대적하여 징벌받은 사실에 근거해 말한 것이다. 그가 자신이 괴수라고 말한 것은 그저 그가 미친 듯이 예수를 대적하는 죄를 저지른 사실을 인정한 것일 뿐이다. 그것이 그가 자신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진실로 인식했다는 뜻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인지, 어떤 사람이 생명 진입이 있는지는 그가 진리를 깨닫고 실행했는지 여부에 따라 확정해야지 단지 그 자신이 어떻게 말하는지에 따라 확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깨달았느냐? 우리는 왜 이렇게 자세하게 교제하겠느냐? 이렇게 자세히 교제할 필요가 있느냐? (있습니다.) 어떤 필요가 있느냐? 이렇게 교제하는 것은 너희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관점을 해부하고 너희가 옳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을 해결하여 너희가 그 안에서 나오고 자신이 옳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을 내려놓은 다음 진정한 진리 추구의 길에 진입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정말로 생명 진입이 있게 되고,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생명 진입이라는 일과 성품 변화라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많은 부분이 이미 변화했고 자신에게 생명 진입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그는 일부 나쁜 습관을 이미 고쳐서 이제 탐식하지 않고 늦잠을 자지도 않으며 게으르지도 않고 전에 비해 좀 더 부지런해졌다. 그는 이것이 생명 진입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예전에는 남을 욕하기 좋아했는데 이제는 남을 욕하지 않고 사람을 만나면 듣기 좋은 말, 이로운 말을 하며 때로는 타인을 돕기도 한다. 이런 것을 한다고 해서 그는 자신이 이미 진리를 실행했고 변화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명리, 지위, 육적 향락에 대한 추구를 포기하면 생명 진입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이다. 자신이 깨달은 것과 자신이 관념으로 옳고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실행해 냈고, 하나님을 믿기 위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이미 육의 결점과 나쁜 습관을 많이 극복했거나 생활 규칙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육적 이익도 많이 포기했고 가정과 일을 버렸으며 결혼과 세속도 포기했으니 그는 자신이 변화했다고, 자신이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토록 큰 변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진 가장 잘못된 인식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있든 없든 모두 이런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왜 이것이 잘못된 인식이라고 말하겠느냐? 왜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존재한다고 말하겠느냐? 주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이 도대체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기대어 가정, 일, 감정, 세속, 그리고 육적 얽매임, 심지어 재산까지 내려놓는 것이 생명 진입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인식이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제를 해결하며 죄짓는 근원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실로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런 사역을 함으로써 어떤 목적과 성과에 이르려는 것인지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진리를 대체하고, 사람의 추구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의 뜻이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라고 여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갖는 잘못된 인식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이런 일들은 그의 열의를 의미할 뿐이다. 사실 그가 버리는 것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고 상과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는 이런 거래를 하는 것이 아주 가치 있고 덕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그가 버렸다고 해서 그에게 진리 실제가 있고 그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가 버리고 헌신하면서 정말로 진리를 깨달았겠느냐? (깨닫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그가 버리고 헌신하는 데 불순물이 들어 있지는 않겠느냐? 분명 불순물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럼 그가 이렇게 헌신하고 고생하며 추구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항상 진리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늘 이런 것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며, 그가 마음속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 좋다고 생각하는 것, 생명 진입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실행한다. 실행해 낸 후에 그는 하나님에게 기억되었다고 생각하고, 이런 것들을 조건과 밑천으로 여긴다. 이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의 잘못된 인식이자 생명 진입을 오해하는 사람의 인식 방법이다. 그럼 그의 이런 모습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 생명 진입이 없는 것임을 어떻게 가늠하고 입증하겠느냐? 실제로는 그의 이런 주장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어떻게 검증할 수 있겠느냐? (그는 일을 처리할 때 진리 원칙이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는 일을 처리할 때 자신의 상상에 기댄다. 겉보기에는 정말로 믿는 것 같고 버리고 헌신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일을 처리할 때 원칙이 없다. 왜 원칙이 없겠느냐? 왜냐하면 그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그가 일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전히 기존의 관념과 상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가장 큰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가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에 순종하겠느냐? 그것을 이해하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이것으로 그에게 진정한 생명 진입이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검증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결점과 나쁜 습관을 많이 고쳤고 대가도 많이 치렀지만 마지막에 검증이 닥쳤을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불평을 늘어놓고 순종하지 못한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이것은 바로 생명 진입이 없는 것이다. 생명 진입이 없는 사람은 진리 실제가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일이 닥치면 오로지 자신의 관념과 상상, 천연적인 기호에 기댄다. 정말로 그에게 진지하게 따질 때, 순종하라고 요구할 때 그는 조금도 순종하지 않고 개인의 이유, 핑계, 상상에 기대어 온갖 수단을 찾아 그 자신을 위해 궤변을 늘어놓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으려는 목적, 하나님 사역을 부인하려는 목적을 달성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순종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갖은 방법을 동원해 그 자신의 관념과 상상, 그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과 길은 옳고 하나님이 하는 것과 마련하는 것이 반드시 옳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검증하려고 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이것이 그에게 생명 진입이 없고, 그가 행한 것, 노력한 것, 바꾼 것은 생명 진입이 아니며 그저 일부 나쁜 습관이 사라진 것일 뿐이라는 사실, 개인의 생활 습관, 생활 규칙, 생활 방식이 조금 바뀐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성격도 고치고 말을 부드럽게 하고 교양이 갖춰지며 외적인 행위가 모범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일을 처리할 때는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고 전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근거하지 않으며 오로지 개인의 상상과 뜻에만 근거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인식이 조금도 없고 그저 영적 이론만 좀 말할 줄 알며 사람의 관념과 상상, 그리고 느낌에만 머물러 있다. 너희가 보기에 이런 부류의 사람은 불쌍하지 않으냐? (불쌍합니다.) 그럼 이런 부류의 사람이 많지 않겠느냐? (많습니다.) 너희가 많다는 걸 어떻게 아느냐? (저 자신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느끼는 바가 크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너희가 이 측면의 체험에 대해 얘기해 보아라. (제 체험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한 형제가 많은 형제자매 앞에서 저의 결점을 언급했는데, 그때 저는 체면이 깎였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설명하고 변명하면서 형제가 일러 준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체면에 휘둘린 것이다. 사람은 왜 늘 체면에 휘둘리겠느냐? 존엄이 있는 사람은 다 낯가죽이 얇은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이 이렇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 완벽한 이미지를 지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는 지위욕이 있고 자신을 특히 완벽하고 결함 없는 모습으로 포장하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완벽한 이미지를 남기고 싶어 하고, 그에 대한 사실과 진실을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는다. 이는 교만한 성품으로 인한 것이다. 이 문제는 이제 해결되었느냐? (해결되지 않았고, 자주 드러냅니다.) 만약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발견할 수 있다면 변화하는 건 쉽다. 그러나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발견하지 못하며 이런 문제에 대해 무감각하고 지각이 없으면 변화하기 어렵다. 만약 이미 의식하였고 자신의 교만한 성품이 심각하며 자신의 추구가 치우치고 진리 추구에 아직도 멀었다고 느끼지만, 책망 훈계가 닥치면 여전히 며칠 동안 소극적으로 변하고 늘 갖은 방법을 동원해 여러 상황에서 다시 체면을 살리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변화할 수 있겠느냐? 변화하기 어렵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반성한다면 아직 문제를 해결할 희망은 있다. 반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해결할 방도가 없다. 핵심은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와 염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이 커지면 진리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진리를 실행하고 육을 저버릴 힘도 생긴다.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패괴 성품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고, 패괴 성품을 해결하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있다. 그러면 생명 진입이 있는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고 진리와 생명 진입을 늘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기가 아주 쉽다고 생각한다. 그저 나쁜 습관과 결점을 고치거나 소소한 이익을 잠시 포기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악을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끝까지 믿기만 하면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상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런 관점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닌데 생명 진입이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생명 진입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 그들은 힘을 좀 들이고 본분을 좀 이행하며 결점과 나쁜 습관을 약간 고치고 어느 정도 말을 듣고 순종하면 생명 진입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생명 진입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데, 그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생명 성품의 변화가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겉으로만 변화할 뿐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이제 조금 변화하였는데, 그것은 외적인 행위가 변화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생명 성품이 변화한 것이겠느냐? 너희는 생명 진입에 대한 잘못된 관점에서 벗어나 생명 진입을 하기 시작했느냐? 자신의 어떤 면이 변화했고, 어떤 면이 아직 변화하지 않았는지 가늠할 수 있느냐? 만약 네게 본분 하나를 이행하게 한다면 원래는 순종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느냐? 예를 들어, 형제인 너에게 매일 형제자매를 위해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게 한다면 너는 순종할 수 있겠느냐?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잠깐은 순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랜 기간 네게 이 본분을 이행하게 한다면 순종할 수 있겠느냐? (가끔은 순종할 수 있겠지만 기간이 길어지면 순종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불순종이다. 그러면 어째서 불순종하게 된 것이겠느냐? (사람의 마음속에는 바깥일은 남자가,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는 전통 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밥을 하는 것은 여자의 일이고 형제가 밥을 하면 체면을 구긴다고 생각하므로 쉽게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역할 분담에 성차별이 있는 것이다. 남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 남자들은 밖에서 열심히 일해야 해. 요리나 설거지 같은 건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이잖아. 우리 남자들에게 시키면 안 되지.’ 하지만 지금처럼 특수한 환경에 처해서 너에게 시킨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어떤 어려움을 해결해야만 순종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너는 성차별을 타파해야 한다. 남자가 할 일, 여자가 할 일 같은 건 없다. 이렇게 먼저 역할을 분담해 놓아서는 안 된다. 어떤 본분을 이행할지를 성별에 따라 구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집에서 살림살이하면 그렇게 역할을 분담해도 되겠지만 지금은 본분에 관련된 것이니 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이해하고 이 본분을 받아들여서 네 안의 옳지 않은 관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저는 남자이긴 하지만 교회의 일원이고 하나님에게는 피조물입니다. 성별을 따지지 않고 교회에서 저에게 안배한 일을 하겠습니다.” 우선 잘못된 관점을 내려놓은 뒤 자신의 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기만 하면 진실로 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누군가 음식이 짜거나 싱겁다고 한다면, 또는 어떤 음식이 맛없어서 먹기 싫다고 하거나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면 너는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러면 너는 기분 나빠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내대장부인 내가 이렇게 많은 형제자매에게 밥을 해 주는데 지적질이나 당하다니 정말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이럴 때면 순종하기 싫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모든 불순종은 네가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도록 패괴 성품이 드러나 말썽을 일으킬 때 나타난다. 이때 마음속에서는 싸움이 벌어지는데, 너는 자기 사상에 지배되어 체면을 잃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진리를 구해야 합니다.) 진리를 어떻게 구해야 하겠느냐? 너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남들이 어떻게 요구하든 저는 그것을 저의 본분으로 여기겠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누군가를 위해 서비스하고, 일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본분이니 순종해야 마땅합니다. 체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집에서는 본분에 우열이나 귀천이 없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오직 제대로 이행하는지, 충성을 다하는지만 있을 뿐입니다.’ 네가 자신의 체면, 지위, 신분, 존엄을 모두 내려놓는다면 그것으로 완전히 내려놓은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반응이 남아 있다. 때로 너를 존중하지 않고 어리숙하게 여겨 무시하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내가 밥하면서 이렇게 싱글벙글하다니 당신 참 못났네요! 저라면 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너를 잘못 이끌고 너에게 올바르지 않은 사상과 관념을 주입하여 너의 실행에 지장을 줄 것이다. 그는 네가 생명 진입을 중시하고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며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등의 긍정적인 사물을 수치로 여기기 때문에 너를 무시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를 견뎌 내지 못한다면 너는 곧바로 소극적인 상태에 빠져서 그 본분을 이행하면 늘 웃음거리가 되고 무시당하며 졸개 취급만 당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또 불순종하게 되지 않겠느냐? 만약 너를 무시하고 판단하는 사람이 없을 때 네가 순종했고 생명 진입이 생겼으며 진리 실제와 분량도 조금 생겼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이 옳겠느냐? 그럼 어째서 누군가 너를 판단할 때는 네 분량에 도전을 받아 소극적으로 변하고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밥을 해야 하는 거야? 저 사람은 항상 나를 깔보는데, 그건 아니지. 용납 못 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또 골칫거리가 생긴 것이다. 너는 용납하지 못할 뿐 아니라 불평도 늘어놓지 않겠느냐? ‘리더는 나한테 왜 이런 본분을 안배해 준 거야?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나를 택한 거야? 내가 만만해 보이나? 사람들이 날 괴롭히고 리더도 날 얕보는데 하나님조차 나를 지켜 주지 않으셔.’ 이렇게 패역 성품이 또 드러난다. 이는 무슨 문제겠느냐? 분량이 너무 작은 것 아니겠느냐? 이 정도 타격조차 견디지 못한 채 소극적으로 변하고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진리 실제가 있는 것이겠느냐? 진리 실제가 조금도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장 쉬운 방법은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누가 나를 깔보고 무시하든 나는 내 본분을 이행해야 해. 하나님의 부탁을 포기할 수는 없어. 내가 일하는 건 다른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고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도 아니야.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해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해.’ 너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밥을 할 의욕이 생기지 않겠느냐?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겠느냐? 사실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결국, 너는 이렇게 계속되는 싸움과 연약하고 소극적인 상태에서 넘어졌다가 일어나고를 반복하며 단련하면서 여러 내적 상태를 성찰하게 되는 것이다. 너는 스스로도 늘 이렇게 힘들게 살고 싶지 않고 이런 어려움에 얽매여 교란당하고 휘둘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홀가분하고 단순하게 본분을 잘 이행하기만 하면 그만이길 바란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너는 계속해서 진리를 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신념을 다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면 항상 옳으니 이렇게 말하여라. “아무도 저를 교란할 생각은 마세요. 이게 제 본분이고 하나님께서 제게 맡기신 부탁이며 저의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누가 저를 비웃든, 도발하든, 아니면 시험하든 다 소용없어요. 저의 본분을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 저는 영광스럽습니다. 제가 감당해 낸다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고,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저의 수치겠지요. 저를 비웃고 이런 본분을 무시하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사실이 아니겠느냐? (사실입니다.) 이는 사실이다. 욥이 시련을 겪을 때 사탄은 그를 교란하고 시험했지만 그렇다고 욥이 의심을 품었느냐?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진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환경과 시련에 처했을 때 네가 진리를 지키고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부탁을 지킬 수 있을지는 네가 진리를 얼마나 인지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에 달려 있다. 어떤 사람들은 늘 진리에 대해 의심을 품고 마음을 다잡지 못하거나 자신의 본분에 대해 이렇게 해야 하는지,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늘 확정하지 못한다. 또한, 옳은 일이더라도 지속하지 못하고 항상 사람과 일, 사물에 교란을 받는다. 나쁜 사람, 악인, 마귀 사탄이 그의 곁에서 시험하고 교란하는 말을 하면 그는 바로 연약해지고 미혹된다. 이는 분량이 작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분량이 작은 것이 쉽게 해결되겠느냐? 이론적으로는 해결하기 쉽다. 이는 네가 걷는 길이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라고,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실행해야 하는 것이 진리이며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다만 걱정스러운 점은 네가 이행하는 본분에 대해 너 스스로 마음속에 편견을 가지고,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이 창피하고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너 스스로도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까지 교란하면 더 골치 아파진다. 그러면 너는 생각이 혼란스러워져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게 된다. 욥에게 시련이 닥쳤을 때 주변에서 교란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의 아내가 뭐라고 말했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믿지 말아요. 당신이 믿는 분이 진정 하나님이라면 어째서 이런 일이 닥치겠어요?”라는 뜻이다. 욥은 뭐라고 말했느냐?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욥 2:10)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아내를 정죄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은 참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이렇게 한 것이며 이는 하나님의 주재이고 하나님의 손길이 임한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욥은 그렇게 확신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왜 진리를 깨닫고 나서도 참도를 지키지 못하고 굳게 서지도 못하는 것이냐? 바로 사람 마음속에 불순물이 너무 많아서 진리를 깨닫기는커녕 진리를 사랑하지도 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귀와 도리를 얼마나 이야기하든, 우렁찬 구호를 얼마나 외치든 사람은 결국 굳게 서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다른 목소리가 조금만 있으면, 사람을 교란하고 미혹하는 말이나 정죄하고 모욕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조롱과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해서 완전히 무너진다.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 끊임없이 속으로 싸우고 관점을 바로잡음과 동시에 부단히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진리를 깨달아 차츰 다른 차원의 진리에 진입하고 모든 진리에 진입하며 결국에는 온갖 사람과 일, 사물의 교란과 영향, 통제를 받지 않게 되며 자신이 실행하는 진리 원칙이 올바르다는 생각을 고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품이 변화한 것이다.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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