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 이행에 관한 말씀 (발췌문 35)

지금 관념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닥친다면, 너의 본분 이행이 영향을 받겠느냐? 예를 들어 보자. 때로 일이 바쁘면 고생을 좀 하고 대가를 좀 치러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데,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 관념과 반발심이 생겨 소극적인 태도로 사역을 게을리할 수 있다. 또 때로 일이 바쁘지 않아 본분 이행이 좀 수월하면, 어떤 사람은 기뻐하며 ‘본분 이행이 늘 이렇게 수월하면 좋겠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냐? 나태하고, 육적인 안락함을 탐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충성심을 갖고 본분을 이행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도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다고 말은 한다. 하지만 그의 순종에는 조건이 있다. 반드시 그의 관념에 부합해야 하고, 또 고통을 겪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래야만 순종할 수 있다. 만약 환난이 닥쳐 고통을 받게 된다면, 그는 몹시 원망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것이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이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한 일이 그의 관념과 바람에 부합하고, 자신이 고통을 받거나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을 때에는 순종할 수 있지만, 만약 하나님의 사역이 그의 관념과 기호에 부합하지 않고, 자신이 고통을 받고 대가를 치러야 하면 순종하지 못한다. 겉으로는 반대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반발하고 기분 나빠하며, 자신이 매우 큰 고통을 겪었다고 생각해 속으로 원망한다. 이는 무슨 문제이냐? 이는 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기도하고, 맹세하고, 다짐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우선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깨닫고, 진실한 순종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또한, 거역과 대적이란 무엇인지를 인식하고, 자신의 어떤 패괴 성품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지 반성하여 이런 것들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육, 특히 육의 기호를 저버릴 수 있다. 그런 다음 하나님에게 순종하기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면, 패괴와 거역을 해결해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이런 것들을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에 자기 내면의 상태를 분별할 줄 모르고,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너는 육을 저버리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육의 기호조차 저버리지 못한다면 충성심을 가지고 본분을 이행하기 어려운데, 이런 자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겠느냐? 사람이 충성심이 없는데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 분명히 도달하지 못한다. 본분 이행에 합격하려면, 최소한 진리를 실행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에게 진실로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 육의 기호를 저버리지 못하면 진리를 실행해 낼 수 없다. 늘 자기 뜻대로 일을 처리하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다. 설령 어쩌다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건 조건적인 순종으로, 너의 관념에 부합하고 네 기분이 좋을 때에만 순종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한 일이 너의 관념에 부합하지 않고, 너에게 안배해 준 본분과 마련해 준 환경으로 인해 네가 많은 고통을 받거나 아주 난감해지거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그때에도 네가 순종할 수 있겠느냐? 순종하기 어렵다. 너에게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할 이유가 많을 것이다. 설령 나중에 자신을 반성한다 하더라도 육을 저버리기 어렵다. 육을 저버리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육을 저버릴 수 있겠느냐? 당연히 진리를 구해야 하고, 자신의 패괴 본질과 패괴 추태를 인식해야 한다. 자신을 증오하게 되고 육의 기호와 본질을 증오하게 되면, 육을 저버리려고 하게 된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육적인 것들을 증오하지 못하게 되고, 증오하지 못하게 되면 저버리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의지해야만 실행 가능한 방법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은 진리가 없으면 힘도 없어서 진리를 실행하고 싶어도 실행해 내지 못한다. 그러니 하나님에게 기도할 줄 모르고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르면 절대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단지 육적인 안락함만을 탐하며, 진리를 얻기 위한 고통을 겪지 않으려 한다. 조금이라도 고통을 겪으면 바로 불만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에게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당신의 신분과 본질은 너무나 고귀하여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당신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께 순종하기를 원하오니 저를 인도해 주시고 빛 비춤과 깨우침을 주십시오. 제가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당신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저의 마음을 감찰해 주시고, 징벌과 심판을 내려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마치고는 뿌듯해한다. 이는 빈말이 아니냐? 기도할 때 늘 빈말만 하고 글귀와 도리를 외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빈말로 기도하는 것은 어떤 성질의 문제이냐? 기만하는 성질이 있지 않으냐?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유용하겠느냐? 그는 나태하고, 고생하기 싫어하며, 육적인 안락함을 탐한다. 진리임을 알면서도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본분인 줄 알면서도 지키지 못하고, 자신이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로 속이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종교 의식의 기도를 가장 혐오한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반드시 진심으로 기도해야 열납될 수 있다.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마라. 또한, 늘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하거나 멋대로 맹세하며 자신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하나님께 충성심을 다하고 싶다는 말로 하나님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 너의 소망은 네가 달하지도 못하고, 또한 그럴 만한 의지도 없고 분량도 안 된다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기도하지 마라. 그것은 조롱이다. 조롱이란 무슨 의미이냐? 비웃고 우롱한다는 의미가 있다. 사람이 만일 그런 성품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가볍게 말하면 기만하는 것이고, 심각하게 말하면 네가 늘 그렇게 할 경우 너라는 사람의 인품은 너무나 비천한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정죄한다면 그것을 모독이라고 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떻게 만족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진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거나 패괴 성품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따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패괴 성품으로 살면서 하나님 앞에 와서 이방인들이 사람을 속이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할 뿐만 아니라 ‘정중하게’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런 말로 하나님을 속이고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고 자신이 한 일의 심각성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함께함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 하나님의 함께함이 없다. 하나님의 함께함이 전혀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에서 빛을 얻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합니다.) 이러면 문제가 된다. 너희는 이런 기도를 많이 하느냐? 자주 하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오래 살다 보면 거기에 물들어 매우 세상적이고 불량기가 가득해지고 사탄의 독소와 철학이 사람에게 깊이 침투된다. 그래서 입만 열면 위선적이고 기만하는 말을 하고, 기도할 때도 늘 빈말과 도리만 말할 뿐 마음속 말과 실제 어려움은 말하지 않는다. 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지만, 진리를 구하는 마음은 별로 없다.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전부 기만과 위장이다. 패괴 성품이 지나치게 심각해서 그야말로 산 귀신이 되었다. 하나님 앞으로 나와 기도할 때도 말 같은 말과 마음속 말을 할 줄 모르며, 오히려 사탄의 기만과 위장을 모두 하나님 앞으로 가져오는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것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이런 기도를 들어주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싫어하며 절대로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기도는 전부 하나님을 기만하고 속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아 마음속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요구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근원을 따져 보면, 이는 사람의 본성으로 초래된 것이지 일시적인 패괴 표출이 아니다. 그는 ‘어차피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어디 계신지도 모르니 그냥 아무렇게나 하나님께 몇 마디 하지 뭐. 하나님께서 들으시는지 안 들으시는지도 모르는데 뭐.’라고 생각한다. 그가 의심하고 시험하는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니 기도를 마치고 나면 어떤 느낌을 받겠느냐? 여전히 공허하지 않겠느냐? 아무런 느낌도 없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기도는 믿음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며, 마음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에게 마음속 말과 속마음을 털어놓고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하나님의 함께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은밀히 듣고 있는 것이다. 매번 이렇게 마음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마치 하나님을 만난 것 같아 믿음이 증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더 밀접해지고 가까워져 마음이 충실해지고 굉장히 편안해진다. 이것이 바로 기도 후의 진실한 느낌이다. 종교식 기도는 형식적이어서 매일매일 같은 말 몇 마디만 반복하다 보니 자신조차도 말하기 싫을 정도이고, 기도해도 아무런 느낌도 없으며 성과도 전혀 없다. 이런 사람이 진실한 믿음을 지닐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이 없다. 늘 건성으로 대충 하거나 이행하는 본분이 너무 고되고 힘들다고 느껴지면 순종하기 싫어하고, 늘 도망가고 싶어 하며, 늘 거절하고 싶어 하고, 늘 수월하고 비바람 맞지 않으며 안전하고 육이 편안할 수 있는 본분을 이행하고 싶어 한다. 자신이 나태하고, 육적 편안함을 탐하고, 고통을 겪지 못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면서도 다른 사람이 알면 비웃을까 봐 누구에게도 자신의 진실한 생각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또 “본분을 잘 이행해야 해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있어야 해요.”라고 말한다. 어떤 일을 제대로 못 했을 때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저는 인성이 없어요. 본분을 이행할 충성심이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이런 내적 상태일 때, 어떻게 기도해야 이성적인 기도이겠느냐? 예수는 마음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했다. 하나님 앞에서는 네 마음이 정직해야 한다. 꾸미거나 겉과 속이 다르게 굴지 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꾸미며 글을 짓는 것처럼 듣기 좋은 말과 허울 좋은 말을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 결과, 하나님은 네가 마음과 정직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아니며, 마음이 정직하지 않고 지나치게 음험하고 사악하며, 마음이 바르지 않은 것을 보고는 너를 버린다. 그렇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늘 부딪히는 이런 일들과 늘 접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사람은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에게 마음속 말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가 “하나님, 지금 이 본분을 이행하느라 너무 힘들어요. 저는 육적인 편안함을 탐하고, 나태하며, 편한 것만 좋아하고 일하기는 싫어해요.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본분에 저의 충성심을 바칠 수 없고, 힘을 다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늘 도망치고 싶고, 거절하고 싶고, 건성으로 대충 하고 싶어요. 저를 징계해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이는 진실한 말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이렇게 말할 용기가 있느냐? 말을 하고 난 후에는 또 혹시나 언젠가 하나님이 정말로 징계하면 어쩌나 싶어 두려워하고 마음을 졸이며 늘 새가슴으로 살아간다.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은 늘 고생을 덜 하고 싶어 하며, 육적 편안함을 탐한다. 약간의 어려움이 있고 애를 좀 써야 하거나 다소 힘이 들면 바로 뒤로 물러나고 싶어 하며, 늘 이것저것 가린다. 또한, 약간의 고통만 받아도 늘 ‘하나님께서 아실까? 기억하실까? 내가 이렇게 큰 고통을 받는데 나중에 무슨 상이라도 있을까?’라고 궁리하며, 늘 결과를 바란다. 이런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예전에 내가 어떤 사람에게 말을 전하라고 시킨 적이 있는데, 나중에 보고하러 왔을 때 그는 자신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했는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그 사람이 얼마나 다루기 어려웠는지, 자신이 또 그 사람에게 듣기 좋은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등등 한바탕 자신의 공로를 먼저 말했다. 결국에 일을 성사시키자 그는 늘 자신의 공을 내세우며 계속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저를 칭찬해 주셔야 해요. 나중에 어떤 상을 얻을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시고 약속해 주셔야 해요.” 이는 대놓고 상을 달라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게 칭찬할 만한 일이냐? 본분을 좀 이행했다고 늘 칭찬을 바란다면, 이는 어떤 성품이냐? 사탄 본성 아니겠느냐? 이 정도의 일로도 칭찬과 상을 바라는데, 만약 큰일이나 큰 사역을 한다면 엄청나지 않겠느냐? 만약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얻지 못한다면, 반기를 들지 않겠느냐? 셋째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에게 따지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슨 길을 걷고 있는 것이냐? (적그리스도의 길입니다.) 바울과 같은 적그리스도의 길이다. 바울은 늘 하나님에게 상과 지위를 요구했다. 하나님이 상을 주지 않으면 소극적인 태도로 사역을 게을리하고, 주를 대적하고 배반하려 했다. 말해 보아라. 본분을 이행하느라 고통을 좀 받는다고 해서 상을 요구한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악인입니다.) 인성이 너무나도 악하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에게 이런 내적 상태가 없겠느냐? 모든 사람은 다 이런 내적 상태를 지니고 있다. 사람의 본성 본질은 모두 똑같다. 단지 그렇게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람은 이성적이므로 그렇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런 내적 상태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어느 측면의 진리로 이 내적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핵심은 사람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지위에 서야 하는지, 어떤 길을 추구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당연히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것이다. 사람이 이런 것조차 모른다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것은 말할 수도 없다.

특별한 본분이나 고통스럽고 힘든 본분을 이행할 때, 사람은 한편으로는 이 본분을 어떻게 이행해야 하는지, 어떤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본분을 굳게 지켜야 하는지,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가짐에 어떤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본분 이행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사람은 천성적으로 고통을 받기 싫어한다. 고통을 받을수록 힘이 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육은 고통을 받으면 우울하고 괴로워지는 것이 본성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가 이런 본분을 이행하면서 받는 고통이 뭐 얼마나 되느냐? 그저 육이 좀 힘들고 고생할 뿐이다. 만약 네가 이 정도의 고통도 견딜 수 없다면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러면 안 된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할 때는 아무도 너를 감독하지 않으니 전부 네가 자발적으로 해야 하며, 하나님 집에 사역지침과 제도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은 믿음, 양심, 이성에 따라야 한다. 네가 행한 것이 좋은지, 아니면 안 좋은지는 하나님만이 감찰한다. 만약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또는 자신이 처해 있는 사람과 일, 사물 속에서 자신이 어떤 패괴 성품을 드러내도 전혀 지각하지 못하고 가책을 받지 않는다면, 이는 좋은 일이냐, 아니면 나쁜 일이냐? (나쁜 일입니다.) 왜 나쁜 일이라고 하느냐? 사람의 양심과 이성은 최저 기준이 있다. 만약 양심조차 지각이 없어서 네가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너를 단속하거나 너의 행위를 단속하지 못한다면, 네가 행정 법령과 원칙을 거스르는 일을 하고 인성이 없으며 마음속으로 가책도 받지 않는다면, 이는 도덕적 최저선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양심 지각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일을 잘못했을 때, 또는 원칙을 어겼을 때, 또는 오랜 시간 동안 충성심 없이 본분을 이행했을 때, 너희는 이를 지각하느냐? (지각합니다.) 그렇다면 너의 양심이 네가 양심과 이성에 따라 일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일하도록 단속할 수 있느냐? 만약 네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양심에 따른 일 처리에서 진리 원칙에 따른 일 처리로 발전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있다면 너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본분을 이행하면서 고통을 받는 것,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 측면의 일을 제대로 하는 것, 이 또한 간단하지 않다. 분명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가 그의 내면에 작용한 것이다. 그가 선천적으로 고통과 힘듦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 모든 것이 동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담긴 진리가 그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본분이 닥쳤을 때 그의 관점과 입장이 바뀌어 본분을 수월하게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육이 고통을 좀 받고 좀 힘든 것은 별것 아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지 않은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관념, 사욕, 개인의 기호에 따라 살아가며, 본분을 이행하더라도 기꺼이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보자. 똑같이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하고, 교회의 안배대로 본분을 이행합니다. 그것이 더러운 일이든 힘든 일이든, 영예로운 일이든 보잘것없는 일이든, 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모두 본분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부탁하신 일이니 좀 더럽고 힘들어도 제가 받아야 하는 고통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사역할 때 그다지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은 더럽고 힘들다고 느껴도 그는 수월하다고 느낀다. 이는 그의 마음이 편안하고, 하나님을 위해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있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더럽고 힘든 일 또는 눈에 띄지 않는 일을 하면, 자신의 신분과 인격에 대한 모욕이자 자신을 존중하지 않고 괴롭히고 얕잡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같은 사역, 같은 업무량인데도 그는 매우 힘겹게 일한다. 무엇을 하든 그의 마음속은 원망으로 가득하며, 무엇을 하든 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무엇을 하든 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그의 내면은 소극적인 것과 반발심으로 가득 찬다. 그가 소극적이고 반발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 근원은 무엇이냐? 대부분은 본분 이행이 월급을 받지 않고 무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상을 준다면 그것도 괜찮은데, 상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본분을 이행할 가치가 없으며 공짜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분을 이행할 때 항상 소극적이고 반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적나라하게 이야기하자면, 이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기 싫어한다. 그렇다면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데 그들은 어째서 굳이 본분을 이행하러 오는 것이냐? 그건 바로 자신이 자신에게 강요한 것으로, 복을 얻기 위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는 매우 무력한 모습이다.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바로 그런 마음가짐이다. “그럼 그들 마음속의 소극적인 것과 반발심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진리를 교제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들이 불신파인 것이 드러난다. 그들은 거래하려 하고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만약 하나님이 그들에게 상을 약속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는 보증서를 써 준다면, 그들은 분명 의욕에 차서 본분을 이행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약속은 공개적인 것이라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얻을 수 있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얻을 수 없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막막한 느낌이 들고 자신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는 공수표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믿지 못하고 진실한 믿음이 없다면 어쩔 수 없다. 그들은 현실의 것을 원한다. 만약 그들에게 월급을 준다면 그들은 분명 의욕이 넘칠 것이다. 하지만 양심과 이성이 없는 그런 사람들도 반드시 의욕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건달기가 너무 심해 세상에서 일한다고 해도 제대로 일할 리가 없고, 또 몸을 사리고 농간을 부리기 때문에 분명 또 해고될 것이다. 이는 순전히 본성의 문제이다. 그러니 일관되게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제명하고 도태시켜 해결할 수밖에 없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들의 핑계와 이유가 모두 말이 안 되는 것들이니 그들의 인품이 대체 어떨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현재 대부분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했다. 본분이란 무엇인가, 본분은 어떻게 생기고 누가 주는 것인가에 대해 너희는 분명히 알고 있느냐? (본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부탁입니다.) 맞다. 네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집에 와서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다.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안배한 일,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 준 준행해야 하는 도, 하나님이 너에게 한 부탁, 이러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 너에게 맡긴 너의 본분이다. 너는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셨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하나님 집의 안배를 듣고 이해했다. 마음속으로 자신이 이행해야 할 본분이 무엇인지, 책임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여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하면, 너는 하나님 집의 일원이 되고, 복음을 확장하는 일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하나님 사역을 확장하는 일원으로 삼으면, 네가 이행할 본분이 생긴다. 네가 해낼 수 있는 것과 닿을 수 있는 것이 모두 너의 책임이자 본분이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부탁이자 남에게 미룰 수 없는 너의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분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긴 책임이자 부탁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느냐? ‘내 본분이고 하나님께서 내게 부탁하신 일이니 바로 내 의무이자 책임이야. 그러니 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해. 내게 주어진 일은 마땅히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니 사양하거나 거부해서도, 고르거나 선택해서도 안 돼. 선택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선택해서는 안 되는 거야. 이건 피조물이 갖추어야 할 이성이야.’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태도이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늘 이것저것 고르고, 늘 쉬운 일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려 하면서 하나님 집의 안배에 순종하지 못한다. 이는 그들이 분량이 너무 작고 정상인의 이성을 갖추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만약 젊은이라면, 집에서 오냐오냐 받들어 키워 고생해 본 적이 없으니 조금 멋대로여도 용서할 수 있다. 진리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점차 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30~40대 성년이 여전히 그런 꼴이라면, 그것은 나태함의 문제이다. 나태함은 선천적인 병으로,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본성의 문제이다. 반드시 특별한 환경과 배경 속에서 강요를 당해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약간의 고통과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마치 일부 거지들이 사람들의 경멸과 차별을 받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게을러 일하기 싫으니 체면 따지지 않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거지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요컨대,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본분을 이행할 수 없다면 조만간 도태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없는 것, 이는 가장 큰 과오이다. 만약 네가 본분 이행을 거절하거나 늘 고통과 힘듦을 꺼린다면, 너는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다. 너는 본분 이행에 적합하지 않으니 떠나도 된다. 어느 날, 본분을 이행하지 않는 것은 창조주가 너에게 한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이자 양심과 이성이 없는 자라는 것을 네가 의식하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마땅히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하며, 이것이 필수적인 것이라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면, 너는 착실하게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순종하는 것이다. 본분에 패역과 소극적인 것이 있다면, 즉 하나님에게 전혀 순종하지 않는다면, 이런 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본분을 기꺼이 제대로 이행하는 것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최소한의 태도이다. 그렇다면 본분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본분은 하나님에게서 오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책임입니다.) 본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책임이다. 그렇다면 이방인은 본분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없다고 하는 것이냐? (그들은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맞다. 이방인은 단지 육적 생활을 위해 분주할 뿐이고, 그들이 한 것은 본분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고 사탄에게 속한다. 하나님은 단지 그들이 언제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며, 성장한 후에는 어떤 일을 하고, 언제 죽는지와 같은 일생의 운명을 안배할 뿐,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구원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르다. 작게 보면, 하나님 집에서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은 다 사람이 이행해야 하는 본분이다. 크게 보면, 하나님의 전체 경륜에서 모든 피조물이 이행하는 본분은 전부 다 하나님의 사역에 협력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네가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것이든 아니든, 이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사실상, 사람이 만약 정말로 자신의 본분을 이행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과를 거두어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다면, 그제야 하나님의 백성이자 합당한 자격을 갖춘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너에게 준 모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합격한다면, 너는 하나님 집의 일원이자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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