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제 3 부)

또 다른 내적 상태로는 처세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 있다. 대부분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명리와 지위를 추구할 뿐 진리 추구를 중시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자질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사탄의 철학과 인생 법칙을 지니고 있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지, 어떻게 살아야 사람들 가운데서 두각을 드러내고 가문을 빛내어 모두의 동조를 얻을지 등에 대해 자기만의 ‘묘책’을 갖고 있다. 어떤 묘책이겠느냐? 바로 ‘지극히 높은’ 처세 철학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높다’와 ‘처세 철학’이라는 두 가지 표현은 함께 사용할 수 없는 괴상한 조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기에 ‘지극히 높다’라는 말을 사용했겠느냐? 일반적으로 처세 철학이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데 반드시 생존의 법칙, 즉 생존의 비결을 갖춰야 하며, 그래야만 자신의 인생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 생존 법칙, 즉 처세 철학을 최고의 신조로 삼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좌우명처럼 처세 철학을 진리로 삼아 굳건히 고수하는데, 하나님 선민을 대할 때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속세를 떠나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 것 아니었어? 원칙을 지키는 것 아니었냐고. 진리를 깨달았다며? 좋아, 내가 처세 철학으로 당신을 대해 주겠어. 당신은 참답게 대한다며? 진리 원칙을 중시한다며? 난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했지만 똑같이 당신이 내게 호감을 느끼게 할 수 있고, 당신들을 가지고 놀 수도 있어. 내 주변을 맴돌며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뒤에서도 내 욕을 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심지어 내가 뒤에서 당신들을 판단하고 배신하며 농간을 부려도 당신들은 알지 못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처세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의 처세 철학에는 무엇이 있느냐? 음모, 계략, 수법이 있고, 방식과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자기 눈에 지위와 쓸모가 있는 사람한테는 예의 바르게 대하고 굽실거리며 치켜세워 준다. 하지만 상대가 능력이 별로 없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항상 높은 자리에 앉아 내려다보듯이 이야기하여 사람들이 그를 대단하게 여기고 우러러보게 한다. 그는 내면에 사람을 우롱하고 조종하는 수법이 있으며, 어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방법을 다 알고 있다. 또 그는 매우 성숙하고 노련해서 사람을 만나면 첫눈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며, 상대를 어떻게 책망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같이 지내야 할지 등이 바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런 처세 철학을 적용할 때 그는 생각할 필요도, 미리 준비할 필요도, 누군가의 지도를 받을 필요도 없다. 자신만의 수법을 지니고 있는데, 그중에는 자신이 생각해 낸 것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고 보고 영향받은 것도 있다. 어쩌면 상대가 알려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그는 요령껏 그런 처세 철학, 수단, 방식 방법, 음모, 계략을 배웠다. 이런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이 진리를 갖추고 있겠느냐?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 사람들은 늘 그에게 기만당하고 속아 넘어가며, 이용당하고 우롱당한다. 이런 처세 철학은 지식인이나 어떤 특정 무리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라 사실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으로는 또 무엇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말재간이 있어서 남들을 즐겁고 흐뭇하게 한다. 그의 말을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실질적인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감언이설로 남들을 우롱하는 사람이다. 어떤 리더 일꾼은 일정 기간 사역한 후 마음속으로 ‘상부에서 나를 알고 있을까? 하나님께서 나란 사람을 알고 계실까? 문제를 몇 가지 보고해서 내가 사역하고 있다는 걸 알려야겠어. 내가 보고한 문제가 매우 사실적이고 무게감 있는 중요한 문제라는 걸 알게 되면, 상부에서 내가 실제적인 사역을 할 줄 안다고 판단하고 중용할지도 몰라.’라고 생각해서 기회를 봐 문제를 제기한다. 이치상으로 보면 그의 문제 제기는 정당하며 사역에 필요하다. 하지만 개인의 속셈이라는 불순물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너희는 이 사람이 문제를 보고한 속셈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 이런 속셈은 대체 무엇이 문제이겠느냐? 이는 생각하고 분별해야 하는 문제이다. 만약 그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문제를 제기했다면, 이는 정당하다. 이는 그가 책임감 있는 사람이고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지금 일부 리더 일꾼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데다가 기회를 틈타 사리사욕을 채우며 윗사람을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이는 한편, 인기인이 되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싶어 한다. 그가 이렇게 실행하는 것은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만약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어떤 진리를 구해야 할지, 어떻게 인식하고 분별해야 할지 등을 반드시 명확히 해야만 이 패괴된 속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다. 두 사람이 협력해 본분을 이행할 때, 외지 교회에 가서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그런데 그 지역의 생활 환경이 열악한 편이고 치안도 좋지 않고 위험이 좀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그 교회 사람들은 저를 싫어합니다. 제가 간다고 해도 반드시 문제를 해결한다는 보장은 없죠. 하지만 다들 당신을 좋아하니 당신이 문제를 해결하러 가면 성과가 있을 겁니다.”라고 하자 다른 사람은 그 말이 진실하다고 생각해 자기가 갔다. 결론적으로, 이유와 핑계를 대고 가지 않은 그 사람은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의 핑계와 이유가 말이 되든 안 되든 그의 이런 행동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겠느냐? 형제자매를 위해 고려한 것이겠느냐? 아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감언이설로 자기 목적을 이룬 것이다. 이는 수법 아니겠느냐? 너는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했다. 너는 육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여전히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네가 스스로를 저버릴 수 있다면, 사탄 철학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 처음에는 문제를 처리하러 그 교회에 가기 싫었을 테지만, 고민을 좀 해 보고는 ‘아니야, 그런 생각은 내가 나쁜 사람이고 부도덕하다는 의미야. 내가 한 말을 빨리 취소해야겠어. 그에게 사과하고 내가 표출한 패괴를 털어놔야 해. 오늘 나는 반드시 그곳에 갈 거야. 그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말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고 꼭 죽는 건 아니다. 죽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느냐? 생사는 모두 하나님이 정하는 일이다. 요컨대, 이 경우에는 의지가 있고 자기 자신을 저버릴 수 있어야만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다. 두 사람이 협력해서 본분을 이행할 때, 둘 다 책임지는 게 두려워 암투를 벌이는 경우이다. 한 사람이 “이 일은 당신이 하세요.”라고 하자, 다른 사람은 “당신이 하는 게 좋겠어요. 제 자질은 당신만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실 그는 마음속으로 ‘이 일은 잘해도 상을 못 받고, 잘못하면 책망을 받게 돼. 그러니까 안 갈 거야.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당신이 무슨 의도인지 알아. 나한테 가라고 부추기지 마.’라고 생각했다. 암투를 벌이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겠느냐? 아무도 가지 않아서 결국 사역을 그르치고 말았다. 이는 부도덕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역을 그르쳤으니 결과가 심각하지 않으냐? 결과가 좋지 않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은 모두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모두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사탄 철학과 자신의 간계에 속박되고 얽매여 진리 실행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니 그 두 사람이 이행한 본분은 합격할 수 없다. 그것은 조금도 증거하지 못하고 대충 건성으로 임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두 사람이 협력해서 본분을 이행할 때, 그중 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려 하고 늘 자기가 결정하려 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마음속으로 ‘그는 대단한 데다가 나서기 좋아하니 무슨 일이든 나서게 하자. 실수하면 그가 책망 훈계를 받는 거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잖아! 난 나서지 말아야겠어. 나는 자질도 부족하고 마음 쓰는 것도 싫어하니까. 그는 나서기 좋아하잖아? 그가 하도록 일을 남겨 줘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자는 무골호인이나 졸개 노릇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게 어떠하냐? 이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이냐? (처세 철학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만약 내가 그보다 돋보이면 나한테 화를 내지 않을까? 그럼 앞으로 우리 둘이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는 거 아냐? 우리 둘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면 함께 지내기 힘들어질 테니까 그냥 그의 말대로 하자.’라는 생각이 있다. 이는 처세 철학 아니겠느냐? 이렇게 살면 번거롭지 않고,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하라는 대로 따라 하면 되고, 남들 앞에 나설 필요도 없으며, 무슨 문제를 고려할 필요도 없다. 무슨 일이든 다른 사람이 앞에서 버티고 있으니 힘들지 않다. 졸개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그에게 책임감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는 처세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지도 않는다. 이는 졸개이고 무골호인이지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협력하는 게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고, 마음과 뜻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힘을 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진리가 아닌 처세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더 들어 보겠다. 어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나쁜 짓을 해서 하나님 집 이익에 손실을 줬는데, 네가 그것을 보고도 마음속으로 ‘저 일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내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야. 게다가 내가 책임자도 아닌데 쓸데없는 일에 뭐 하러 간섭해? 다른 사람 보고 신경 쓰라고 하자. 원하는 사람이 신경 쓰면 되지. 난 내 사역만 지키면 돼. 다른 사람이 어떤 나쁜 짓을 하든 나와는 상관없어. 내 눈으로 봤어도, 그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난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교회 사역에 손실이 생겨도 나와는 무관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처세 철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씨가 어떠냐? (나쁩니다.) 이는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쩌다 한 번 이렇게 하지만, 어떤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하면서 전혀 진리를 구해 자신을 반성하거나 자기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법이 없다. 이 두 유형의 사람은 상황이 다르다. 한 가지 일을 이렇게 하든, 아니면 모든 일을 다 이렇게 하든 이는 패괴 성품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는 단순한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자주 보고 접하는 처세 철학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작은 선심을 써서 다른 사람을 매수하거나 다른 사람의 기호에 영합하고 칭찬해 주고 아첨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남들의 기호에 영합하는 것은 하나의 수법으로, 처세 철학의 일종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다른 사람이 원칙을 어기며 일하는 것을 보고도 감정이 상할까 봐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고 항상 에둘러 말하며, 듣기 좋은 말, 원칙이나 본질 문제와 관련이 없는 말만 골라서 한다면, 이 또한 처세 철학의 일종이다. 또 있느냐?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면 아첨과 아부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이 또한 처세 철학의 일종이다.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특히 간사해서 늘 남을 음해하고 이용하려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어디를 가든 인기인이 되는데, 사람 봐 가면서 말을 골라 하고, 머리 회전이 무척 빨라서 눈만 마주쳐도 상대방을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를 안다. 이런 사람은 지나치게 교활해서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수 없다. 처세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문제를 발견하고도 잘못 말해서 책임지게 될까 봐 말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대다수가 말하고 난 후에야 자기 관점을 표현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종종 대세를 따르면서 틀려도 다수가 틀리면 처벌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문제이고 어떤 성품이냐? 이는 간사한 성품 아니겠느냐? 늘 무골호인이 되고 싶어 하고 남에게 밉보일까 두려워 진리 원칙을 고수하지 못하고, 또 진리를 실행하지 않아 폭로되고 도태될까 두려워하니 정말 진퇴양난이다! 이것이 무골호인의 불쌍한 모습이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이런 추한 몰골로 살아가게 된다. 모두가 사탄의 귀신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데, 음험하고 간사하고 비열하며 야비하고 비천하고 불쌍하다. 너희는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누가 리더가 되면 그에게 아첨하고, 어느 리더가 교체되거나 도태되면 아는 척도 하지 않으며, 누가 리더로 뽑히기만 하면 그에게 아부하면서 온갖 낯간지러운 말을 다 쏟아 낸다. “아, 정말 예쁘네요. 키도 딱 적당하고요. 미인이세요. 말할 때 목소리는 아나운서 같고, 노래할 때는 꾀꼬리 같아요.”라고 말이다. 이렇게 온갖 방법을 동원해 비위를 맞추고, 기회를 틈타 아부하고 아첨하며, 또 작은 선심을 베푼다. 평소에도 늘 상대방의 눈치를 살펴 리더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온갖 방법을 생각해 충족시켜 준다. 너희에게 이런 수법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때로는 리더 일꾼에게서 문제나 결점을 발견하고도 리더 일꾼이 저를 책망하고 제게서 안 좋은 인상을 받을까 봐 말을 못 합니다.) 그것이 바로 원칙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발견한 그 문제들이 옳은지 그른지, 그것을 밝힐 때 교회 사역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알고 있느냐? (약간은 알고 있습니다.) 약간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진리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만약 네가 문제를 발견했다고 확신한 다음 마음속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사역을 그르치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밉보일까 봐 원칙을 고수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떤 문제이겠느냐? 너는 어째서 원칙을 고수하지 못하는 것이냐? 이는 매우 심각한 성질의 문제로, 진리를 사랑하는지, 정의감이 있는지 여부와 관련된다. 네 견해가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해도 말을 해야 한다. 너에게 이런 견해와 생각이 있다면 그것을 말해서 다 같이 분별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너도 도움을 얻고 문제 해결에도 이롭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난 그런 일들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내 말이 맞아도 공을 인정받을 수 없고, 내 말이 틀리기라도 하면 책망받아야 하잖아. 그럴 가치는 없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이기적이고 비열한 것 아니겠느냐? 항상 자기 이익을 고려하면서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람의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다. 너희 내면에는 이런 처세 철학과 꿍꿍이수작이 매우 많지 않으냐? 사람은 누구나 사탄 철학에 속하는 것을 많이 지니고 있으며, 마음속은 일찌감치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몇 년 동안 설교를 들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 실제 진입도 매우 더디며, 분량이 늘 지나치게 작은 것이다. 이 패괴된 것들이 방해하고 교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 사람은 어떤 것에 의지해 살아가느냐? 바로 이런 패괴 성품, 관념, 상상, 처세 철학, 그리고 은사에 의지해 살아간다. 사람이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짐이 지나치게 많고, 멍에가 지나치게 무겁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면 진리와 동떨어지게 되며, 이런 것들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것을 방해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이 깊어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분명 깊어지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는 매우 슬프고 두려운 일이다.

사람은 어떤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가, 이는 사람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관련이 있으며, 사람의 성품과도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이 항상 꿈과 욕망을 위해 분투한다면, 이는 꿈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늘 욕망에 의지해 살아가는데, 욕망에는 무엇이 포함되겠느냐? 사역의 욕망과 자기를 뽐내려는 욕망, 그리고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망이 있다. 예를 들어 보겠다. 어떤 사람들은 지위를 좋아한다. 지위가 없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무것도 할 마음이 들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그는 지위를 추구하는 욕망에 의지해 살아가며,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본인이 어떤 지위를 가졌든 굉장히 소중하게 여긴다. 무슨 일을 하든 오로지 지위만을 위해서 일한다. 지위를 지키고 공고히 하고, 지배 구역을 확장하는 등 어디에서나 이 욕망을 위해 일한다. 이것이 바로 욕망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매우 불쌍하게 살았다. 사람이 온순해서 늘 업신여김을 당하고, 가정 환경도 좋지 않으며, 별다른 사회적 배경도 없었다. 의지할 만한 사람도 별로 없어 외롭고 쓸쓸했던 그가 하나님을 믿고 나서 드디어 의지할 곳을 찾았다고 느꼈다. 그는 한 가지 바람이 있었고, 그 바람에 떠밀려 하나님을 믿었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바람은 변함이 없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존엄성 있고 기개 있게 살기 위해서야. 하나님을 믿으면 남들보다 뛰어날 수 있고, 남들보다 우월하게 살 수 있어. 나중에 내가 천당에 가면, 다들 나를 우러러보게 될 거야. 더 이상 아무도 나를 우습게 보지 못할 거야.’ 그의 이런 생각은 매우 공허하고 막연한 바람이자 기대이다. 가정 환경이나 다른 원인 때문에 그는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불쌍하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집에서 살면서 의지처가 생기고 형제자매도 그를 업신여기지 않으니 더 이상 불쌍한 사람도 아니고, 의지할 대상이 생겼다. 또한, 그에게는 죽은 후나 현생에서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어 기를 펴고 사는 큰 희망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목표이다. 이런 바람에 의지해 살면서 어디서나 어떤 일에서나 이런 생각과 소원을 원동력으로 삼았으니 그가 진리에 의지해 살기는 매우 어렵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삶이 매우 불쌍하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연기하거나 뽐내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탓에 무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무리 속에서 이런저런 일을 해서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으면서 그의 허영심을 채운다. 그는 ‘리더는 아니지만 사람들 속에서 내 특기를 발휘해서 화려해 보이고 후광이 비친다면, 하나님을 믿을 가치가 있어. 이걸 위해 사는 것도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그는 이를 위해 살아간다. 매일매일, 한 해 한 해를 이렇게 살아가며 자기의 초심을 바꾸지 않는다. 이것이 진리에 의지해 사는 것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그는 이방인처럼 꿈과 욕망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관련된 문제이자 패괴 성품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진리를 깨닫거나 실행할 수 없고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기 매우 어렵다.

그 밖에 외모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항상 자기는 아름다워서 어디를 가든 남들이 좋아해 주고, 우러러보고, 인정해 주고, 어디를 가든 남들이 칭찬해 주고 웃어 준다고 생각하며, 행복해하고 자신감을 갖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밑천이 있고 가치가 있다고, 최소한 많은 사람이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한다. 남자도 외모에 의지해 살아가지 않느냐? 예를 들어, 네가 잘 생기고, 자매들 사이에서 말을 재미있고, 시원하고, 로맨틱하게 해서 남들이 우러러보고 네 주위를 맴돈다면 너는 우쭐할 것이다. ‘누구랑 사귀지도 않고 이렇게 사는 게 얼마나 좋아! 진리를 실행하는 게 얼마나 따분한데!’ 또 어떤 사람은 일종의 밑천에 의지해 살아간다. 밑천이라고 하면 당연히 본인이 어떤 진실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진실한 것이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50년 넘게 믿었으니 그걸 밑천이라고 생각한다. 형제자매를 만나 “하나님을 몇 년 믿으셨나요?”라고 물었는데 상대방이 “5년이요.”라고 대답하면,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그 10배인 것을 알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네가 나만큼 오래 하나님을 믿었어? 나이도 이렇게 어린데 나한테 얌전히 굴어. 넌 아직 멀었어!’ 이것이 밑천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또 어떤 밑천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각급 리더 일꾼으로 일하면서 오랫동안 외지에서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교회들을 순방했다. 경험이 풍부하고, 상부의 사역지침, 교회 내 여러 부류의 사람들, 여러 측면의 사역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는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베테랑 리더라 오랜 밑천을 갖고 있어. 오랫동안 사역하여 경험이 있지. 너희가 뭘 알겠어? 다들 애송인데, 사역을 며칠이나 해 봤겠어? 너희는 미숙하고 아무것도 모르니 내 설교만 잘 들으면 돼!’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참을 얘기해도 그의 설교에 실제적인 것은 전혀 없고 전부 글귀와 도리였다. 그러고도 “오늘은 기분이 별로 안 좋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방해하고 교란해서 제 마음이 영향을 받았어요. 다음에는 제대로 하겠습니다.”라며 핑계를 댔다.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느냐? 오랜 밑천에 의지해 살면서 득의양양해하다니 정말 구역질이 나고 낯간지럽다! 이것은 일종의 밑천이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옥살이한 적이 있거나 특별한 체험을 했거나 특별한 본분을 이행하며 고난을 겪은 적이 있는데, 이 또한 밑천의 일종이 되었다. 어째서 사람은 항상 밑천에 의지해 살아가겠느냐?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그가 이런 밑천을 자기의 생명이라고, 밑천에 의지해 살아가기만 하면 수시로 자기만족과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다고, 그런 다음에 이런 밑천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면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자기가 이 밑천의 기초 위에서 또 진리를 추구하거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선행을 좀 하면, 바울처럼 그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될 수도 있으니 분명 살아남을 수 있고 아름다운 종착지가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점이다. 밑천에 의지해 살 때, 그는 항상 우쭐거리고, 득의양양하고, 자만자족하는 내적 상태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밑천을 열납하고 그를 기뻐하니 최후까지 그를 남겨두리라 생각한다. 이는 밑천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곳곳에서 이런 생각을 드러낸다. 그가 드러낸 것, 그가 의지해 살아가는 것, 그가 곳곳에서 남들에게 이야기한 것을 통해 그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보살핌을 받은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은 다들 받지 못했는데 오직 그만 받았다면, 그는 자기가 특별하고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는 “당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건 저와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당신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시어 당신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당신들이 조금씩 진리를 깨닫게 되고 나서는 또 당신들에게 책망, 훈계, 심판, 형벌을 주셨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이렇게 체험했지만, 저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특별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이 특별한 은총이 바로 저의 밑천이며, 제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근거이자 입장권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그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알고 있느냐? 그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느냐?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며, 자기는 진리를 추구하거나 구하지 않아도,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내적 상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냐? 바로 이상(異象)을 본 적이 있는 사람, 특별한 보호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 큰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 또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그리고 일부 특수한 간증이나 체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생명이자 살아가는 근거로 삼고, 이런 것들로 진리 실행을 대신한다. 게다가 이런 것들을 구원의 징표이자 기준으로 여기는데, 이것이 바로 밑천이다. 너희는 이런 것들을 갖고 있느냐? 어쩌면 너희에게는 이런 특별한 체험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희가 오랫동안 한 가지 특별한 본분을 이행해 성과를 거뒀다면 자기도 밑천이 생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오랫동안 감독이라는 본분을 이행해 좋은 작품 몇 편을 만들어 냈다면, 그에 해당하는 밑천이 형성된 것이다. 어쩌면 네가 아직 작품을 내놓지 않았거나 너 자신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두 편 찍기는 했지만 아직 밑천으로 삼을 용기가 없어서 지금은 밑천이 없을 수도 있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자신이 아직 경력과 밑천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신중하고, 자제하며, 낮은 자세를 취하고,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건방을 떨거나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더더욱 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항상 우쭐거리고 자기만족을 하며,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이것이 패괴된 인류의 불쌍한 모습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생김새가 특히 흉악하고 덩치도 큰 데다가 힘도 세서 늘 다른 사람을 괴롭히려 했다. 또한, 말을 지나치게 거만하고 오만하게 하며, 누구에게도 승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보고 무서워서 공손하게 굴고 아첨하면, 그는 득의양양하고 살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것도 능력이라고, 이렇게 살면 아무도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리 속에서 굳게 서려면 반드시 혼자 서고, 강해져야 하며, 주먹이 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삶의 신조였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굳게 서고, 괴롭힘이나 우롱을 당하지 않기 위해 또는 기만당하거나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잘 살기 위해서는 주먹이 세야 해. 셀수록 좋아. 그러면 어디를 가든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 그 결과 이렇게 몇 년을 살고 나니 정말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져 드디어 그의 목적을 이루었다. 어떤 무리에 가든 늘 엄숙한 표정과 진지한 모습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냉정한 태도를 보이니 감히 말을 거는 사람도 없고, 아이들은 그를 보면 울음을 터뜨렸다. 이는 악귀가 환생한 것 아니겠느냐? 주먹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흉악한 성품이다. 그는 어디를 가든 사람을 우롱하고 이용하는 것을 가장 먼저 배웠다. 또한, 사람을 통제하려 했으며, 사람을 제압할 수 있었다. 누가 그에게 공손하게 굴지 않으면 본때를 보여 줄 방법을 찾았으며, 그에게 예의 없게 말하거나 날이 선 말을 하면 기회를 틈타 괴롭혔다. 이런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이는 악독하지 않으냐? 주먹에 의지해 일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아 많은 사람이 그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세상에서 형통하였다. 하지만 혈기와 악독한 성품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이는 그가 사탄 철학과 무력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오직 사탄 철학과 무력에만 의지해 살아가면서 남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면, 그는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그에게는 평판이 안 좋을 게 걱정이 아니라 평판이 나쁘지 않을 게 걱정이다. 이것이 그의 원칙이다. 이렇게 해서 목적을 이룬 후 그는 ‘이제 하나님 집과 이 무리 속에서 굳게 섰어. 다들 날 무서워해 건드리지도 못하고 공손하게 대해.’라며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용기가 없어 그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겠느냐? 겉으로는 용기가 없어 건드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사람은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이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의문의 여지 없이 싫어하고, 역겨워하고, 증오하고, 멀리하고, 피할 것이다. 너희는 이런 사람과 교류하고 싶겠느냐? (싫습니다.) 어째서이냐? 항상 너를 괴롭힐 생각을 하는데, 네가 견딜 수 있겠느냐? 때로는 무력을 사용해 너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 수단을 써서 속인 후 너를 위협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용서를 빌고 사탄에게 투항했다. 악인은 일하거나 말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 악인에게 투항해 악인을 따르며 말하고 행동하는데, 이는 악인과 한패가 아니겠느냐? 너희는 이런 악인을 보면 어찌하느냐? 우선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그를 책망하고 폭로해야 한다. 또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형제자매와 연합해 그를 고발할 수도 있다. 두려움은 소용이 없으며, 두려워할수록 그는 더욱 너를 괴롭히고 성가시게 굴 것이다. 연합해 그를 고발해야만 악인이 두려움과 수치를 느끼게 할 수 있다. 겁이 너무 많고 지혜마저 없다면 악인에게 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사람의 믿음이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다! 사실, 악인이 아무리 악하다 한들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그가 제멋대로 주먹을 휘둘러 사람을 때려죽이겠느냐? 지금은 법치 사회라 그도 그런 담력은 없다. 또한, 흉악무도한 사람은 그저 몇몇 소수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감히 사람을 괴롭히고, 교회에서 제멋대로 하려 한다면 두세 명만 연합해도 그를 고발하고 폭로해 해결할 수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하나님 선민 몇 명만 뜻을 합치면 쉽게 악인을 해결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이 공의롭고 전능한 하나님임을, 하나님이 악인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하나님 선민을 뒷받침해 주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악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거기에 더해 지혜와 방법을 발휘해 연합할 수 있다면, 악인은 자연히 고개를 숙이게 된다. 만약 네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고, 악인을 두려워하며, 악인이 너를 장악하고 너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끝이고, 아무런 간증도 없다. 너는 변변치 못하고, 무능하고 구질구질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늘 자기의 잔꾀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난 몰라. 상부에서 이 일을 알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 만약 내가 고발했는데 악인이 그걸 알게 되면 나를 더 괴롭히지 않겠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두려워져 탁자 밑으로 숨어들어 가고 싶을 지경이 된다. 이런데도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을 고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자는 무능한 사람 아니겠느냐? 너희 대부분이 다 이렇다. 얼마 전에 적그리스도가 일부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그들이 그렇게 무능하니까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사람이 보기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좀 억울하기도 하고 고통스럽지만 공과를 배우고 도움을 얻는다면 그때는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은 지혜가 모자라고 무골충이어서 누가 그를 괴롭히고 업신여기면, 자기가 옳아도 반항하지 않으며,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임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고, 반박하거나 폭로하지도 못한다. 이런 자가 바로 못난이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눈치를 보는 것에서 사람의 분량이 지나치게 작고, 사람의 믿음이 너무나 보잘것없고,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르고, 교회 사역을 수호할 줄 모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선민에게는 악인이나 적그리스도와 투쟁할 권리가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는 일이다. 네가 사탄과 싸울 줄 모르고, 사탄을 이기지 못하면 불쌍하지 않으냐? 분명 그는 악을 행하는 자로, 부정적인 세력이고, 사탄, 마귀, 악령, 더러운 귀신인데, 오히려 네가 괴롭힘을 당한다. 게다가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많은 사람이 모두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다니 이는 무능한 것 아니겠느냐? 너희는 어째서 몇 명이 연합해 그와 싸우지 못하는 것이냐? 총명과 지혜가 너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을 몇 명 찾아 그 사람의 행동을 분석하면, 대부분의 하나님 선민이 실상을 분명히 알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겠느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일어나 적그리스도와 싸울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가 얼마나 많은 적그리스도를 해결하고 처리할 수 있는지 보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이긴 자의 증거이다. 너희가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일이 닥쳤을 때 원칙을 고수할 수 있겠느냐? 자칫 잘못하면 또 놀라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 갈지도 모른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일이 닥쳤을 때의 그 불쌍하고 슬픈 모습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너무나 불쌍하다! 괴롭힘을 당해도 말도 못 하고, 그 일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고, 간이 콩알만 해졌다. 악인조차 꿰뚫어 보지 못하고, 분량도 너무 작고 진리도 전혀 깨닫지 못하니 불쌍하지 않으냐? 악인은 주먹에 의지해 살아가며, 남을 억압하고, 착한 사람을 괴롭히고, 남을 등쳐먹으면서 살아가고, 악독한 본성과 흉악한 성품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아첨하며 재물을 갖다 바친다. 그는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매우 좋다고 느낀다. 그건 산적 두목이 아니냐? 토적이나 강도가 아니냐? 너희가 악인은 아니지만, 너희에게도 이런 내적 상태가 있지 않으냐? 너희 또한 이런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아니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협력할 때, 상대방이 나이 어리면 ‘넌 아무것도 몰라. 내가 너를 괴롭혀도 나를 어쩌지 못해. 내가 너보다 대단하고, 우위에 있어. 키도 더 크고, 주먹도 더 세니까 난 널 괴롭힐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는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주먹에 의지해 살아가고, 흉악한 성품에 의지해 살아가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상대방이 온순한 사람이면 괴롭히고, 독한 사람이면 피하는데,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이다. 어떤 악인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멀리하는 것을 보고는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 온순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을 골라 함께 지내고 친구로 삼아 자기의 세력을 확장한다. 그런 다음에 온순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을 이용해 좋은 사람을 괴롭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공격하며, 자기에게 승복하지 않고 불만을 품는 모든 사람을 괴롭힌다. 이를 통해 악인이 몇 명의 온순한 사람과 교분을 맺는 것 또한 속셈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네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또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만약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의 행위가 악을 행한 것인지 아니면 선을 행한 것인지 반성하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회개할 수 없다. 설령 네가 성품이 흉악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갈 뿐이라 해도, 비록 악을 행하지 않았거나 선행을 했더라도 네가 여전히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지 않는다면 너는 진리와 상관없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네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상관없이 사탄의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다면, 너는 진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게 된다. 이런 것들은 형태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형태가 없는 것일 수도 있으며, 네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네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외부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성품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것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런 것들은 모두 진리가 아니며, 모두 패괴된 인류 자체에서 생겨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로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의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갈 때, 사람은 대체 어떤 길을 걷겠느냐?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겠느냐? 분명 아니다. 만약 사람의 행위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엄밀히 말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겉으로는 본분 이행으로 보이지만 본분 이행의 기준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으며, 주로 속셈과 거래라는 불순물이 있다. 비록 본분을 이행했어도 충성심과 원칙이 없고, 당연히 실제 성과도 없다. 이는 그의 본분 이행이 사실은 진리와 무관한 일을 많이 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건 모두 진리 원칙과 관련이 없는 일이고, 모두 자기의 상상과 취향에 의지해 한 일이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느냐?

이러한 다양한 내적 상태를 교제하면, 너희는 자기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가늠할 수 있지 않으냐? 본분 이행이나 일상생활에서 너희가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때가 많으냐? (많지 않습니다.) 너희에게 교제해 줄 때 늘 너희의 내막을 폭로하니 너희는 삶이 불명예스럽다고, 자신감을 잃었다고,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고 느낀다. 또 많은 일을 입에 담기 부끄러워하게 되고, 나중에 복을 받거나 좋은 종착지가 생겨도 그렇게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내막을 폭로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니냐?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내막을 폭로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자기가 대체 어떠한 내적 상태로 살아가는지, 어떤 내적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지, 사람이 가는 길은 무엇인지,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어떤 비정상적인 모습들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일들을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 것인지, 네가 이렇게 살아가면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는 “저는 이렇게 사는 게 마음이 편해요. 한 번도 불안하거나 불쾌함을 느껴 본 적이 없고, 공허함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라고 하지만 결과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걷는 길은 진정한 인생길이 아니고,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 준 인생길도 아니라 네가 일방적으로 상상에 의지해 찾아 걷는 길이다. 비록 네가 즐겁게 일하고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최종 결과는 어떠하겠느냐? 너의 속셈과 욕망, 그리고 네가 간 길이 너를 곤경에 빠뜨리고 망쳤으니 너는 하나님을 믿는 데 분명 실패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결말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보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얻지 못해 초래한 결과이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으면서도 진리를 얻는 것을 중시하지 않아 결국 어느 날 무슨 일 때문인지도 모르게 드러나고 도태될 것이다. 후회해도 늦을 것이다. 너는 “저의 이런 삶의 방식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이렇게 사는 데 자신감이 있고, 마음이 특히나 충만하고 풍요롭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길을 어떻게 갔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에 의지해 살아갔어야 옳은 것인지, 이는 결과를 봐야 한다. 즉, 네가 최종적으로 진리를 얻었는지, 참된 간증이 있는지, 생명 성품의 변화가 있는지, 인생의 가치를 살아 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다 있다면, 너는 하나님의 인정과 하나님 선민의 찬성을 받을 것이다. 이는 네가 바른길을 갔다는 증거이다. 만약 이런 긍정적인 결과가 없다면, 참된 체험 간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생명 성품 변화도 없다면 그것은 네가 잘못된 길을 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결국, 네가 어떻게 살아가든, 네 삶이 얼마나 윤택하든, 남들이 얼마나 찬성하든 이는 모두 중요하지 않다. 너는 “저는 이렇게 살아가고 이렇게 실행하니 특히 즐겁습니다. 무척 행복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증거도 있어요.”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를 속이는 것 아니겠느냐? 다른 사람이 너에게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실행했나요?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실행할 때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요? 어떤 상황에서 정직한 사람이 되기 어려웠나요? 체험이 있다면 이야기 좀 해 주세요.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갖고 있나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한 체험이 있나요?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인 후 성품이 변화한 체험이 있나요? 생명 성장의 과정에서 어떤 특별한 일을 체험했기에 끊임없이 당신 인생의 전환점이 만들어졌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정해 주신 목표와 달성하라고 요구하신 목표에 끊임없이 접근할 수 있었나요?”라고 물었을 때, 이런 것들을 네가 마음속으로 짐작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잘못된 길을 갔다는 증거이다. 이는 자명한 일이다.

위에서 교제한 내용은 그저 간단하게 말한 것일 뿐이다. 이 밖에도 세부적인 부분이 있지만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의지력, 선의, 고난을 겪겠다는 다짐, 관념과 상상 등에 의지해 일을 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방적인 바람, 패괴 성품, 인위적인 선량함, 사탄의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며, 더 나아가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에 의지해 살아가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원하지 않으니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다. 이것이 진리 실행이 아니라 사탄 철학과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지 참된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저는 이런 행동 방식들이 단지 사람의 선의일 뿐 결코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으니 이렇게 실행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네가 마음속으로 진정으로 깨닫고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낀다면 이는 인식이 생기고 관점이 변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결과를 원한다. 너는 자신의 치우친 부분을 인식하고 관점을 바꾸고 관념을 버림으로써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깨달은 후에는 점점 이 측면을 향해 실행하여 정확한 길을 가야만 하나님이 너에게 부여한 목표에 도달할 희망이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이 요구한 방법대로 실행하거나 진입하지 않으며, “저는 그냥 이렇게 하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한가하지는 않으니까요. 본분을 계속 이행하고 있으니 저는 피조물이 분명하고, 창조주 또한 제가 굳게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이 말이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다. 이는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고, 강퍅한 것이다! 지금은 인생길을 선택해야 하는 때이다. 네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네게 요구한 길을 갈 수 있는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둘째, 사람의 뜻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셋째, 사람의 취향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넷째, 사람의 감정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패괴 성품에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빨리 벗어 버려야 한다. 너에게 어떤 밑천이 있든 하나님에게는 모두 가치 없는 싸구려이며, 전혀 실제에 도달할 수 없으니 일일이 밖으로 던져 전부 버려야 한다. 그러면 진리 실행을 통해 얻은 것만이 가치가 있으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부합한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모두 가치가 없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결국에는 다 소용이 없으니 전부 폐물이고 쓰레기이다. 오직 하나님이 베풀어 준 진리만이 보배이자 생명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너는 늘 자기의 것을 고수하며 ‘이 재간은 내가 오랫동안 어렵고 힘들게 공부해서 배운 거야. 부모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고 많은 돈을 쓰며 심혈의 대가를 치렀는데, 어떻게 내가 함부로 그걸 분석하고 정죄할 수 있겠어? 이건 엄청난 일이고, 목숨이 걸린 일이야!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난 무엇으로 살아야 하지?’라고 생각하는데, 지나치게 어리석다. 네가 그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면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너는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 살아가야 한다. 삶의 방식을 바꿔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낡은 그것들을 깨끗이 비워 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석하고 인식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아 다른 사람들이 분별력이 생기게 해야 한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것들을 혐오하게 되고, 예전에 사랑했던 것들, 생존을 위해 의지했던 것들, 너의 생명이자 지극히 귀중한 보물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혐오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야 네가 그것과 완전히 차단되고 단절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행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물론 이는 매우 복잡하고 험난한 과정이자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사람은 반드시 이 과정을 체험해야 한다.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은 병을 치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종양이 생겼으면 반드시 수술대에 올라 절개해야만 해결할 수 있고, 수술대에 오르지 않고 절개해서 그 종양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 병을 치료받지 못해 건강해지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정직한 사람을 바보 취급하며,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행해서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면 정말로 정직한 사람이 되어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는데, 이건 바보 아닌가? 정직한 사람이 되더라도 최소한 손해를 보거나 손실을 입지는 않아야 하잖아. 뭐든지 다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 속사정을 다 말해 버리면, 그건 바보 아냐?’라고 생각한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겠느냐? 이런 사람이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이는 그가 ‘하나님 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진리야.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어. 그러니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할 거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면 언제까지라도 순종하겠어. 누군가가 나를 어리석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시기만 하면 돼.’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가장 똑똑한 사람 아니겠느냐? 그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정확하게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속내를 숨기며 ‘뭐든지 다 순종하는 거는 바보 아냐? 이러면 자주권이 없어지는 것 아냐? 자아도 없는 사람에게 존엄이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자기 존엄은 남겨 놔야 하잖아? 완벽하게 순종할 수는 없잖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충 적당히 순종하는데, 이러면 진리 실행의 기준에 이를 수 있겠느냐? 차이가 너무나 많이 나니 이르지 못한다! 만약 네가 원칙에 따른 진리 실행을 하지 않고 항상 절충안을 선택하려 한다면, 진리 쪽으로 기울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탄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용의 길을 간다면 이것이 진리 실행이겠느냐? 이는 사탄의 철학으로, 하나님이 가장 증오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혐오하며, 사람이 항상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을,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늘 의혹을 품거나 경시하고, 멸시하고, 단정하지 못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혐오한다. 일단 사람이 그런 태도를 갖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의혹을 품고, 의문을 제기하고, 분석하고, 오해하며, 항상 연구하고 늘 머리로 가늠한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모습을 감춘다. 하나님이 너에게 모습을 감추면, 네가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저는 얻을 수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항상 예배에 참석하고, 매주 설교를 듣습니다. 듣고 난 후에는 매일 묵상하고 필기합니다. 또 찬양을 부르고 기도합니다. 저는 제 내면에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느낍니다.”라고 말한들 소용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이런 방식이 틀리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너라는 사람과 마음이 바른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너에게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에게 모습을 감추지 않고, 항상 너를 깨우쳐 주고 인도해 주며, 모든 일에서 네가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깨닫게 하여 최종적으로 진리를 얻게 한다면, 이는 네가 큰 복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너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면, 네가 늘 너의 잔꾀와 관점 또는 너의 지식과 사탄 철학을 이용해 하나님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시험하고, 오해한다면 문제가 된다. 어떤 사람은 경계하고, 시험하고, 의심하고, 오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반발하고 하나님과 대립하는데, 이는 사탄이 된 것이다. 이러면 더 문제가 된다. 네가 진리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해서, 간단한 도리를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오해를 하고 있으며, 여러 번 강조해도 여전히 각성하지 못하고 ‘난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며, 해마다 본분 이행을 계속하고 있어. 마치 땅에 심어진 농작물처럼 말이지. 물이나 비료를 주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비가 내리면 천천히 자라다가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람의 협력하는 성분과 방식, 사람의 마음,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가장 관건이며, 지극히 중요하다. 이런 것들은 또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와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늘 사람의 취향과 사탄의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고, 항상 하나님을 경계하며,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데, 네가 또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창조주가 너를 상대하지도 않으면 너는 그의 피조물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마귀나 사탄으로 여기는데, 네가 여전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있겠느냐? 네가 여전히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겠느냐? 여전히 네가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너의 가정 환경과 자질이 어떠하든, 너에게 얼마나 큰 은사가 있든, 또는 네가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하고, 어떤 본분을 이행하고, 어떤 역할을 하든, 네가 예전에 어떤 과오를 범했든, 지금 너의 내적 상태가 어떠하든, 생명이 어느 정도로 성장했든, 분량이 얼마나 크든 이런 것은 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한가이다. 네가 시종일관 하나님을 의심하고 오해하거나 연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너의 마음이 올바른지 이런 것들이 특히나 중요하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이런 중요한 것들을 알 수 있겠느냐? 항상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 멋모르고 이방인처럼 한가할 때 이방의 동영상을 보거나, 놀거나, 장난을 쳐서는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없는데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겠느냐? 네가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않으면 하나님도 네게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한 것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진리를 받아들이겠느냐? 만약 사람이 늘 수동적이며, 하나님을 찾지 않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성령이 어떻게 사람에게 역사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 이것이 관건 아니겠느냐? 이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 믿는 일을 부업과 취미로 여긴다면 문제가 된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믿으면서 설교도 많이 들었지만 여전히 하나님 믿는 일을 종교를 믿는 것이자 취미라고 생각한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일을 얼마나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냐!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런 관점이라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했다면, 하나님 또한 네가 그를 따르는 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희망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정상적인 관계는 어떤 기초 위에서 맺어지는 것이겠느냐? 사람이 협력해야 한다. 그럼 사람이 어떤 입장과 관점을 지니고 있어야 하겠느냐? 어떤 내적 상태여야 하겠느냐?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겠느냐? 너의 마음이 어떻게 진리를 대해야 하겠느냐? 의심하겠느냐? 연구하겠느냐? 의혹을 품겠느냐? 저버리겠느냐? 이런 것들이 있다면 너의 마음이 올바르겠느냐? (올바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올발라지려면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하겠느냐? 반드시 순종하는 마음을 갖춰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어떤 요구를 하든 진심으로 순종해야 하며, 의심하거나 이치를 따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태도이다. 너는 에누리 없이 믿고,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 에누리 없다고 해서 금방 이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진입하고자 시도해 봐야 한다. 하나님이 “너는 병에 걸렸다.”라고 했을 때, 네가 “저는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네가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네 병이 심각하니 약을 먹어라.”라고 했을 때, 네가 “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약을 먹는 것도 괜찮아요. 어쨌든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만약 병에 걸렸다면, 약을 먹고 나을지도 모르니 먹어 보죠.”라고 말하고, 약을 먹고 나서 몸이 예전과 다르다고 느껴져 일정 분량을 계속해서 먹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몸이 점점 좋아졌다고 느끼면, 그때 너는 하나님이 말한 그 병이 어쩌면 진짜였을 거라고 믿게 된다. 이렇게 실행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느냐? 네가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병이 치유된다. 비록 처음 약을 먹을 때는 하나님이 말씀한 양만큼 먹지 않고 좀 줄여서 먹었으며, 약간은 의혹을 품었고, 달갑지 않았고,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그래도 하나님 말씀대로 약을 먹었다. 먹고 나서는 효과가 괜찮다고 느껴져 계속해서 먹었고, 먹을수록 믿음이 커져 점점 하나님 말씀이 옳고 자기가 틀렸다고 믿게 되었으며, 점점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의심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너는 하나님이 먹으라고 요구한 약을 다 먹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때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이 점점 진실해지지 않았느냐? 너는 하나님 말씀이 옳으니 에누리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예는 무슨 의미이겠느냐? 사람의 병은 주로 패괴 성품을 말하고, 약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주된 의미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면 패괴가 정결함을 얻을 수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 얻는 성과이다. 너희는 실패를 두려워하느냐? 네가 “저는 완벽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에누리 없이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처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때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이번에 절대적으로 할 수 없다면, 이번에는 아예 실행하지 않고 다음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진리 실행에는 과정이 있으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 사람이 패괴된 내적 상태를 지니고 있을 때, 하나님은 “너는 에누리를 두고 순종하지 않았다. 너에게 패역이 있다.”라고 폭로한다. 그렇다면 폭로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네가 점점 덜 에누리하고, 점점 더 순종하게 하며, 네가 점점 더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점점 더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너를 폭로하는 동안 너를 징벌하였느냐? 하나님이 네게 책망, 훈계, 시련을 준 것은 그저 너를 징계, 처벌, 폭로, 질책하여 약간 아프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너의 목숨을 앗아 가기라도 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의 목숨을 앗아 가지 않았고, 너를 사탄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려 한다는 것이다. 때로 사람은 약간의 고난도 겪기 싫어해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난 희망이 없어.’라고 생각한다. 네가 항상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오해하면 문제가 심각하다. 이러면 생명 성장이 너무나 지체된다. 그래서 언제든, 네가 나약하든 강인하든, 내적 상태가 좋든 나쁘든, 너의 생명 성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든 우선은 이런 것들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에만 신경 써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시험 삼아 실행해 보는 것이라도 괜찮다. 열심히 협력해 자기가 이룰 수 있는 것을 이루어 내고, 하나님 말씀에서 언급한 내적 상태에 진입하여 네가 하나님이 선포한 이런 진리를 실행할 때 어떤 느낌인지, 자기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생명 진입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진리에 공을 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생명 성장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늘 첫술에 배부르려 한다. 늘 ‘나는 절대적인 순종은 할 수 없으니 순종하지 않겠어. 절대적인 순종을 할 수 있을 때만 순종할 거야. 난 뻔뻔한 사람이 아니야. 이러면 내가 얼마나 기개 있고, 인격과 존엄이 있어 보이겠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무슨 기개냐? 이것은 패역이고 강퍅함이다!

조금 전 교제한 이런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있었는가?”의 네 가지 소제목에 대한 교제를 마쳤다. 은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지식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너희는 이 네 가지 내적 상태를 듣고 이해하지 않았느냐? 자신과 비춰 볼 수 있느냐? 이해할 수 있느냐? 예전에 이런 주제로 교제한 적이 있느냐? 어쩌면 어떤 내적 상태는 사람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진리 실행과 관련이 없으며, 또 우리가 오늘 교제한 이 주제와도 관련이 없다. 오늘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있었는가?”라는 주제와 관점으로 이런 내적 상태들에 대해 교제하였다. 이로써 진리 실행과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에 좀 더 가까워졌다. 문제가 하나 더 있으니 너희도 적어 놓아라. 그것은 바로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네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천천히 교제하겠다. 오늘은 주로 사람이 의지해 살고 있는 몇몇 부정적인 내적 상태를 폭로하였을 뿐 그런 부정적인 내적 상태를 겨냥해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는 교제하지 않았다. 비록 교제하지는 않았지만, 너희는 그런 내적 상태들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겠느냐?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하였겠느냐? 무슨 성품이겠느냐?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겠느냐? 그런 일이 닥치고, 그런 내적 상태와 행동 방식이 있을 때 어떻게 진리로 대체해야 하겠느냐? 어떤 진리를 실행해야 하겠느냐? 지금 중요하고 기초적인 것은 바로 네가 먼저 그런 내적 상태를 파악하고 자기를 분석하여 자기가 그런 내적 상태 속에서 살아갈 때 적어도 네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다음 단계에서 바로잡을 수 있다. 만약 너 자신조차 그것의 옳고 그름과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바로잡겠느냐? 그래서 우선 첫 단계에서는 그런 내적 상태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다음 단계에서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오늘 사람 내면의 다양한 패괴된 내적 상태 문제에 관해서만 교제했는데도 이렇게 많은 말을 했으니 대체 어떻게 해야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일들을 너희가 많이 생각해 본다면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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