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제 2 부)
조금 전에 특기와 은사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특기와 은사에 지식이 포함되겠느냐? 지식과 특기는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특기는 뛰어난 재주를 지칭하며,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나 사람의 비교적 특출한 자질일 수도 있다. 이는 가장 잘하는 것이거나 비교적 탄탄하고 완벽하게 통달한 기능으로, 이런 것들을 모두 특기와 은사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지식은 무엇이냐? 지식은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겠느냐? 만약 어떤 지식인이 오랫동안 공부를 했고 많은 명저를 읽었다면, 어떤 전공이나 지식을 특별히 파고들어 성과를 거둬 비교적 자세하고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다면, 이는 특기나 은사와 관계가 있겠느냐? 지식을 특기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특기에 의지해 사역한다면, 그는 무식쟁이이거나 농사꾼일 가능성이 있다. 학력도 높지 않고, 명저를 읽은 적도 없으며, 심지어 성경조차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질이 좀 있고 언변이 좋다면, 이는 특기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특기가 있다고 해서 그가 지식이 있다는 의미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지식이란 무엇이겠느냐?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이렇게 말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교육을 전공했다면, 그는 어떻게 교육하는지, 어떻게 지식을 전수하고 어떤 내용을 전수하는지 등등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겠느냐? 그 분야의 지식을 갖췄으니 그는 이 분야의 지식인 아니겠느냐? 그가 바로 이 분야의 지식을 갖춘 인재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것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그가 교육에 종사하는 지식인이라면, 보통 이런 사람은 사역을 하거나 교회를 인도할 때 어떻게 하겠느냐? 상투적인 행동 방식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누구와 이야기하든 선생님이 학생을 대하듯 하지 않겠느냐? 어떤 말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바로 그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입하고 전수하느냐이다. 오랫동안 이런 지식에 의지해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지식은 기본적으로 그의 생명의 일부분이 되었다. 심지어 그의 처세 방식이나 생활 곳곳 모두에서 그가 이 분야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흔적을 볼 수 있으며, 그가 자신이 배운 지식이 내포된 삶을 살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항상 무엇에 의지해 사역하겠느냐? 자신이 배운 지식에 의지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저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줄 몰라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나님 말씀을 읽을 줄도 모르는데 진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하나님 말씀을 읽을 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어요?”라고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할 줄 압니다. 제가 지식이 있으니 당신을 도와드릴게요. 이 편의 말씀은 총 네 단락으로 나뉩니다. 보통 문장이 서술문일 경우, 시간, 장소, 인물, 사건의 원인, 사건의 경과, 결과라는 6개의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이 편의 하나님 말씀이 선포된 시간은 끝머리에 있는 ‘2011년 10월’로, 이것이 첫 번째 요소입니다. 인물의 경우, 하나님 말씀에서 ‘나’를 언급했으니 가장 중요한 인물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또 ‘너희’라고 하셨으니 바로 저희입니다. 그런 다음 또 일부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분석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패역하고 교만한데, 이는 교만하고 패역한 사람,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사람,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피우는 사람, 나쁜 사람과 악인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사건의 경과는 바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다른 측면의 것들입니다.” 이런 사역 방식은 어떠하냐?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도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는 무엇에 근거해 행동하였느냐? (지식입니다.) 내가 왜 이런 예를 들었겠느냐? 바로 지식이 무엇인지를 더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말씀은 읽을 줄 모르지만 학교에 다닌 적이 있고 재학 시절에는 문과 성적이 괜찮았을 수도 있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 한 편을 펼쳐 보고는 “이 편의 하나님 말씀이 매우 좋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하나님께서 매우 직설적으로 말씀하셨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말투에 위엄과 진노가 있으며, 세 번째 단락에서는 구체적이고 명백하게 폭로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말씀이죠. 네 번째 단락에서는 이를 종합해서 실행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완벽해요!”라고 말한다면, 그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종합하고 귀납하는 것은 지식에서 나온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비록 내가 든 예가 그다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너희가 무엇을 깨닫게 하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지식을 적용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추한 모습, 그것이 매우 혐오스럽다는 것을 너희로 하여금 분명히 보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도 지식에 의지해 읽는다. 그런 그가 일할 때 진리에 의지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지식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은 일할 때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 우선, 그는 자신의 장점이 무엇이라 생각하겠느냐? 그는 지식과 학문을 지니고 있으며, 지식 산업에 종사한 적이 있는 지식인이다. 지식인이 일할 때는 지식인의 풍격, 특징, 패턴이 있어서 일할 때 자신도 모르게 위신을 갖게 되어 남들의 부러움을 산다. 지식인들은 일할 때 이런 식으로 항상 위신을 강조한다. 겉으로는 문약해 보이지만, 내면은 결코 그렇게 문약하지 않아서 모든 일에 자신만의 관점을 지니고 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을 뽐내고 싶어 하고 잔머리를 쓰려고 하며, 지식의 관점, 태도, 사고방식으로 분석하고 대하려 한다. 그런 그에게 진리란 부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가장 먼저 분석하는 태도로 진리를 대한다고 하는 것이다. 분석의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지식이다. 예를 들어 보자. 감독 일을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은 감독 분야의 지식을 갖고 있지 않겠느냐? 책을 통해 체계적으로 배웠든, 아니면 실제로 이런 일을 배우거나 해 봤든, 어쨌든 이 분야의 지식을 파악하고 있다. 그 배움의 깊이가 어떠하든, 이방에서 감독 업무에 종사한다면 네가 배운 감독 분야의 지식이나 경험이 매우 유용하고 가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에게 이런 지식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 집의 영상 사역을 반드시 잘해 낼 수 있겠느냐? 네가 습득한 지식이 진정으로 영화를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과를 얻도록 네게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만약 네가 무턱대고 책에서 어떻게 가르쳤는지, 이 업계의 지식으로는 어떻게 규정하고 요구하는지만 강조한다면,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충돌과 다툼이 있는 부분이 있지 않겠느냐? 진리 원칙과 이 분야의 지식이 충돌할 때, 너는 어떻게 해결하겠느냐? 너는 지식이 주도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느냐, 아니면 진리 원칙이 주도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느냐? 너희가 촬영한 모든 화면과 작품에 너희의 지식이라는 성분이 섞여 있지 않거나 적게 섞여 있다고, 온전히 하나님 집에서 요구한 기준과 원칙에 따라 한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느냐? 보장할 수 없다면, 너희가 습득한 지식은 하나님 집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지식은 대체 어떤 쓸모가 있느냐? 어떤 지식이 쓸모가 있느냐? 어떤 지식이 진리에 위배되느냐? 지식이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사람이 지식을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경건해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되느냐, 아니면 더 교만하고 독선적으로 변하느냐? 지식을 많이 배우면 사람은 복잡해지고, 교조적이 되며, 교만해진다. 그리고 또 사람이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이 많아지면 마음이 혼란해지고 원칙이 없어지며, 알고 있는 지식이 많을수록 혼란해진다는 것이다. 지식을 통해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 사람의 생존 가치와 의의가 무엇인지, 이런 답을 찾을 수 있겠느냐? 사람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이런 결론을 찾아낼 수 있겠느냐? 지식이 너에게 네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고 알려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식이 연구해 낸 것이거나 너에게 주입한 것은 대체 무엇이겠느냐? 물질적이고 무신론적인 것, 사람이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사상과 머릿속의 것이다. 많은 것들이 사람의 머릿속 상상에서 나온 것으로, 전혀 실제적이지 않다. 지식은 또 사람에게 철학, 사상이론, 자연법칙 등을 주입하지만, 많은 일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보자. 천둥과 번개는 어떻게 생기는지, 사계절이 왜 교대되는지, 지식이 너에게 진정한 답을 알려 줄 수 있겠느냐? 요즘 왜 이상 기후 변화 현상이 나타나는지, 지식이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지식은 만물의 근원적인 문제를 알려 주지 못한다. 그래서 지식이 해결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 혹자는 “어떤 사람은 죽고 나서 어떻게 다시 살아났나요?”라고 묻는데, 지식이 답을 알려 주었느냐?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지식은 또 너에게 무엇을 알려 주었느냐? 지식은 사람에게 많은 규율과 규례를 알려 주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녀를 양육하고 부모를 섬기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인성의 생활 측면의 지식이다. 이런 지식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전통문화가 교육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지식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지식의 본질은 무엇이냐?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명저를 읽었고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다. 그럼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길에서 올바른 방향과 목표를 갖고 있느냐? 처신의 마지노선과 원칙을 가지고 있느냐? 나아가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줄 아느냐? (모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이 진리를 한 가지라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지식이란 무엇이냐? 지식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준 것이냐? 어쩌면 사람이 다들 조금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과거 지식이 없었을 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순했다. 하지만 지식이 생긴 후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여전히 단순하겠느냐? 지식은 사람을 복잡하고 더 이상 단순하지 않게 만들며, 더욱 정상 인성이 부족하고 인생의 목표가 없게 만든다. 지식을 배우면 배울수록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게 되며, 지식이 많을수록 고집스러워지고 터무니없어진다. 그 결과가 어떻겠느냐? 세상이 갈수록 어둡고 사악해진다.
조금 전 지식을 적용하는 것이 진리 원칙과 모순이나 충돌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관해 언급하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너희는 어떻게 하였느냐? 어떤 사람은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게 뭐가 어렵고, 내려놓지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라며 도리를 말하지만, 일이 닥치면 여전히 자기 뜻과 관념, 상상에 따른다. 때로는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도리상으로는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으며, 지식은 분명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고, 이 두 가지가 모순되고 다툼이 생길 때는 반드시 우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고 지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겠느냐?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렇다면 실행할 때 어떤 어려움이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진리 원칙에 따라 일 처리를 할 수 있겠느냐? 이는 실제적인 문제 아니겠느냐?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첫째는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어 때로는 순종하지 못하고 “저더러 순종하라는 것은 소에게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하는 것 아닙니까? 지식에 의지해 행하는 게 뭐가 나쁜가요? 반드시 진리 원칙에 따라 하라고 하시면 저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패역 성품이 방해할 때 너는 어떻게 하느냐? (기도합니다.) 때로는 기도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네가 기도하고 나면 태도와 마음가짐이 좀 나아지고 내적 상태가 일부분 돌아설 수 있지만, 만약 네가 이 측면의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하고 명백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의 순종은 그저 형식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때 진리를 깨닫고 이 측면의 진리를 구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집 사역과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 하나님 말씀 전파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하고, 마음속으로 명확히 알아야 한다. 어떤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든, 어떻게 하든, 우선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 전파나 너의 본분 이행으로 이루려는 목표를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우선순위로, 어떤 순간에도 소홀히 하거나 에누리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때 네가 에누리한다면 이는 참된 본분 이행이 아니며, 진리 실행이 아니다. 더 심각하게는 네가 개인의 경영을 하고 있으며, 너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사람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장 먼저 깨닫고 실행해야 하며, 이런 이상(異象)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본분 이행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며, 너 자신의 경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너 자신을 증거하고 치켜세우거나 너 자신의 명리와 지위를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너의 목표는 이것이 아니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며, 자신의 책임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함이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살아 내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내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함이다. 이런 올바른 마음가짐이 있으면, 지식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 고비를 매우 쉽게 넘길 수 있다. 여전히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과정에서 점차 바뀌어 상황이 점점 좋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는 어떻게 체험하고 있느냐? 나날이 좋아지고 있느냐, 아니면 정체되어 있느냐? 만약 너희가 시종일관 지식과 자기 두뇌에 의지해 행하고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는다면 생명이 자랄 수 있겠느냐? 너희는 이를 정리해 본 적이 있느냐? 보아하니, 너희는 생명 진입이라는 이 일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고 구체적인 원칙이 없는 것 같구나. 즉, 마음속에 진리 실행의 원칙과 길에 대한 더 심도 있고 참된 깨달음이 없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일이 닥치든 늘 지식에 의지해 행한다. 그저 눈에 띄거나 간단한 일에서만 진리 원칙을 좀 지킬 뿐이다. 바로 이렇게 줄곧 지식이 주도하고 진리 원칙은 종속되도록 조율하고 에누리해 가면서 실행할 뿐, 완벽한 순종과 절대적으로 진리 원칙에 따른 일 처리를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게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는 대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이런 식으로 실행하면 어떤 위험이 있겠느냐?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쉽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쉽지 않겠느냐? 이는 사람이 가장 잘 헤아려야 할 일이다. 지금 너희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세상에서 일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느냐? 마음속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느냐? 너희는 이 문제를 항상 고려하고 고민해야 한다.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냐? 알고 있느냐?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진리를 얻어 패괴 성품이 변화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일하는 것은 육적인 생활을 위한 것입니다.) 거의 정확하지만 한 가지가 빠졌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경우에는 성품이 변화해 결국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너라는 피조물을 얻을 수 있고 그가 너를 창조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일할 때 사람은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겠느냐? (사탄 철학입니다.) 사탄 철학에 의지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사탄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명리와 지위를 위해서든, 재물을 위해서든, 세속적인 삶이나 생존을 위해서든 모두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간다. 세상에서 일할 때는 머리를 쥐어짜 가며 돈을 벌어야 하고, 명리와 지위를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은 경쟁, 다툼, 약탈, 무자비함, 독기, 살생과 같은 것에 의지해야만 발붙일 수 있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사탄의 부정적인 것을 쓸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것을 벗어 버려야 한다. 사탄의 것은 어느 하나 발붙일 수 있는 것이 없다. 사탄의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하고, 누가 사탄의 것에 의지해 살아가면서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도태되고 버림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세상에서 일하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사람이 지식에 의지해 살아갈 때, 어떤 내적 상태 속에서 살고 있겠느냐? 가장 깊은 깨달음은 무엇이겠느냐? 일단 어떤 분야의 지식을 배우면 너는 자기가 능력이 생겼다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지식에 얽매이게 된다. 네가 지식을 생명으로 여기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지식이 곧바로 튀어나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너를 지배하게 되며, 네가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는 지식이 이미 네 마음속에 각인되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는 선입견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어떤 분야의 지식은 아예 안 배우는 것만 못해서 배워 봤자 짐이고 골칫덩이이다. 지식에는 교육, 법률, 문학, 수학, 의학, 생물학 등 많은 분야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지식은 모두 사람이 실천을 통해 종합해 낸 것으로, 실용적인 지식이며, 사람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 당연히 배워야 하는 지식이다. 하지만 어떤 지식은 인류에게 해악을 가져다주는 사탄의 독소로, 사탄에게서 유래되었다. 예를 들어, 무신론, 유물론, 진화론과 같은 사회 과학 지식, 그리고 유가 학설과 공산주의 이론, 봉건 미신 사상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탄의 부정적인 지식에서 나왔으며, 그 역할은 주로 사람의 사상을 잠식하고, 부식시키고, 변화시켜 사람의 사상을 속박하고 통제함으로써 사람을 패괴시키고, 곤경에 빠뜨리고, 망치는 결과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를 잇는 것,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가문을 빛내는 것, 그리고 “먼저 몸과 마음을 수양하여 집안을 안정시킨 후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라는 것, 이러한 것들은 전통문화 교육이다. 이러한 지식 이외에도 민간 사회에서 전해지는 불교, 도교, 현대 종교의 각종 신학 이론 역시 지식의 범주에 속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들이 목사나 설교자였거나 또는 신학을 공부했었다면 이런 지식을 배운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복이 되겠느냐, 아니면 화가 되겠느냐? (화가 됩니다.) 어째서 화가 되겠느냐? 입을 열지 않으면 몰라도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종교 도리를 말하는데, 항상 영적 도리를 말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그런 행동 방식을 남들에게 주입하여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한다. 신학 지식은 주로 신학 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신학 이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매우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남들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거짓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면 이것이 선입견이 되어 설령 네가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을 듣더라도 한동안은 깨닫지 못하며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바리새인의 지식 이론에 속박받게 되니 이는 매우 위험하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지 않겠느냐? 결국, 네가 도리와 지식에 의지해 살아간다면, 은사에 의지해 본분을 이행하고 일을 한다면 비록 남들이 보기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내적 상태로 살고 있을 때 너 자신은 이를 알고 있느냐? 그것이 지식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임을 의식할 수 있겠느냐? 지식에 의지해 살아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느낄 수 있겠느냐? 결국, 마음속이 텅 빈 느낌이 들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이는 대체 무엇 때문이겠느냐? 이런 문제들을 전부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지식에 관한 문제이다.
조금 전 은사와 지식 이 두 측면을 이야기했다. 또 다른 측면이 하나 있는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진리란 무엇인지, 어떻게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늘 어떤 신념이나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의지해 살아간다. 간단히 말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지해 살아가며, 줄곧 그것을 집요하게 고수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진리로 여겨 끝까지 실행을 고수하면 이긴 자가 되고 살아남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관념에 의지해 하나님을 믿는다. 고난을 겪을 수도 있고, 가정과 직장도 버릴 수 있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도 포기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또 몇몇 규례를 도출해 내 진리로 삼아 실행한다. 예를 들어 보자. 누가 어려움에 처했거나 누구네 집이 형편이 안 좋으면 자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도와주고, 물어봐 주고, 관심을 가져 주고, 보살펴 준다. 더럽고 힘든 일이 있는 곳에도 자발적으로 가서 일하고, 더럽거나 힘들다고 피하지 않으며, 고르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도 다투지 않으며, 되도록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함께 지내려고 한다. 이것저것 시시콜콜 따지지 않으며, 선의로 남을 돕고 양보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그와 함께 지내는 모든 사람이 그가 좋은 사람이며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하나님이 가라는 대로 가며, 반항하지 않는다. 이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열의입니다.) 이는 그저 단순한 열의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며, 또한 진리 실행이란 무엇인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진리 원칙이란 무엇인지를 전부 알지 못한다. 심지어 정직한 사람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정직한 사람이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렇게 살고 계속 따를 거야. 하나님 집에서 어떤 도를 전하든 나 자신의 이런 행동 방식을 고수할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시든 하나님을 믿는 걸 포기하거나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거야. 무슨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셔도 난 다 이행할 수 있어.’ 그는 이렇게 실행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비록 그의 태도에 큰 문제는 없지만, 그는 그렇게 오랜 세월 설교를 들었어도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했다. 순종의 진리를 깨닫지 못해 실행할 줄 모르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진리도 깨닫지 못했으며,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진리도 깨닫지 못했고, 건성으로 대충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지, 간사한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그는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가 ‘내 마음은 하늘과 땅만 알지 사람은 잘 모르고 보지도 못해. 하지만 하늘과 땅은 알고 있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이 너무나 ‘진심’이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며 평범한 사람은 이 수준에 이를 수 없다. 어째서 이를 적자지심이라고 하겠느냐? 그는 정서와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개인의 감정이나 일방적인 바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이해하고, 본분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또한, 이런 감정을 하나님의 요구에 적용해 ‘하나님께는 사실 사람이 무엇을 할 필요가 없고, 사람이 뭐 얼마나 큰 능력이 있거나 많은 진리를 깨달을 필요도 없어. 사람에게 적자지심만 있으면 돼. 하나님을 믿는 일이 얼마나 간단해. 바로 적자지심에 의지해 계속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거짓말하고, 반발하고, 거역하고, 관념이 생기고, 배반하며, 자신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아무도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갈라놓을 수는 없으며, 아무도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단념시킬 수 없고, 아무도 하나님에 대한 나의 충심에 영향을 줄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심리이냐? 무척 황당무계하지 않으냐? 매우 황당무계하고, 또 매우 가련하다. 이런 사람의 영 안에는 메마르고 가난하고 초라한 내적 상태가 있다. 어째서 메말랐다고 하겠느냐? 간단한 일이 닥쳤을 때, 예를 들어 그가 거짓말했을 경우, 스스로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며, 자책하지 않고, 어떤 느낌도 받지 않는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따르면서 무슨 일을 하든 엄격한 잣대를 대지 않아 자기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간사한 사람인지 아닌지, 정직한 사람이 되기는 했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전부 알지 못하니 이 정도로 불쌍하고 영적으로 메마른 것이다. 어째서 영적으로 메말랐다고 하겠느냐?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어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왜 하나님을 믿는지 알지 못하며, 어떤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어떤 일들이 비이성적이고 진리 원칙을 어기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악인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좋은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고 가까이 지내야 하는지, 자기가 소극적으로 변하면 어떤 내적 상태에 빠지는지, 이런 것들을 전부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메마른 것이다. 너희가 이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니 내 마음도 괴롭구나. 하지만 너희는 바로 이런 내적 상태이고, 늘 감정적이다. 언제 변화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감정적이란 어떤 것이냐?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무척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말세에 태어나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여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사역을 경험할 수 있으니 무척이나 영광스럽고 행복스럽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의 적자지심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표현했겠느냐? 감정이 고조되고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고 이성을 잃고 감정이 비정상적이 되어 추태가 드러난 것이다. 예전에 중국에서 하나님을 믿을 때는 환경이 너무 열악해 억눌려 살았다. 그때는 피가 끓어올라 “전능하신 하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치고 싶어도 적당한 장소가 없었고, 잡혀갈까 봐 두려워 외칠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해외에 있고 신앙의 자유가 있다. 마침내 그의 적자지심을 발설할 장소가 생겼으니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표현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큰길에서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은 곳을 찾아 외치려 했다. 하지만 외치기 전에 왠지 자신이 없어 다시 한번 주변 환경을 둘러보고는 결국 외치지 못했다. 이때, 그는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안 돼. 적자지심만으로는 아직 안 돼. 아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어쩐지 외칠 수가 없더라니.’ 그래서 그는 고통스럽고 괴로워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께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 예전에는 환경이 적합하지 않아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칠 용기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환경이 갖춰졌는데도 제가 아직 그런 믿음이 없어서 외칠 수가 없어요. 저의 분량과 믿음이 지나치게 작아 생명이 없나 봅니다.” 그 후로 그는 그 일을 위해 기도하고, 예비하고, 공을 들였다. 늘 하나님 말씀을 보고, 하나님 말씀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으로 그런 감정과 열정을 준비하고 모았다. 이렇게 모아 가던 어느 날, 수천 명을 수용하는 광장에서 사람들을 향해 “전능하신 하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감정이 비교적 충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광장에 도착해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 것을 보고는 여전히 외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지금까지도 외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외쳤든 아니든,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이런 외침이 진리 실행이겠느냐?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굳이 그렇게 외치려고 했겠느냐? 그가 마음속으로 그 외침이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어떤 행동 방식보다 힘이 있고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적자지심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이런 감정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정상 인성의 범주 안에 분류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본분을 이행하게 하고,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이나 본분을 이행하는 감정이 더 고조되도록 하기 위함이겠느냐? (아닙니다.) 너희는 때때로 또는 자주 이런 감정을 갖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감정이 생길 때, 너는 이 감정이 매우 갑작스럽고, 비정상이거나 억제가 잘 안 된다고 느끼느냐? 억제가 잘 안 되어도 억제해야 한다. 어쨌든 이는 그저 감정일 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거나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나서 거두는 성과가 아니다. 이는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를 편집증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겠느냐? 이는 상황과 정도에 따라 다르다. 어떤 것은 편집증의 범주에 들지만, 어떤 것은 황당해지기도 한다. 사람이 간혹 이런 심정을 표출하는 것은 정상이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 비정상이겠느냐? 바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일을 하며, 매일 이 일만을 위해 살아가고 동분서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복음 전파 또한 이를 위한 것이며,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모두 이를 위한 것으로, 모든 것이 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이는 그의 생존이나 삶의 가치와 의미가 되는데, 그러면 문제가 된다. 목표와 방향이 빗나가 버린 것이다.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은 추태가 좀 있고, 집요한 것도 좀 있고, 또 비정상적인 감정도 좀 있다. 사람이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며, 늘 이런 내적 상태 속에서 살고 있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설교를 듣겠느냐?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겠느냐? 항상 적자지심과 종교 의식에 의지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진리를 깨닫고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이냐?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종교 이론, 관념과 상상에 근거하며, 또한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진리란 무엇인지, 하나님 말씀에서 어떻게 얘기했는지를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마치 하나님을 믿을 때 적자지심만 있으면 되고, 자기가 여전히 교회에서 일을 하고 힘을 쏟을 수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다는 식으로 생각해 이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또 무엇을 추구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때로는 마음속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생각해도 밝히 알지 못해 마음속으로 줄곧 ‘열의가 있고 감정이 고조되기만 하면, 끝까지 고수할 수만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감정이 고조되어 이성을 잃고 온갖 어리석은 짓과 진리 원칙에 어긋나는 짓을 하여 결국에는 드러나 내쳐진다. 보아하니 감정이 고조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에는 또 하나의 비교적 심각한 내적 상태가 있다. 즉, 어떤 사람들은 항상 열의에 의지해 하나님을 믿으며 마음속의 불꽃이 언제나 꺼지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을 때 적자지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진리를 깨달을 필요도 없고, 자기를 성찰할 필요도 없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자백하고 회개할 필요도 없으며, 어떤 심판, 형벌, 책망, 훈계 또는 누군가의 질책과 비난은 더더욱 받을 필요 없다고. 이런 것들은 필요치 않아. 그저 적자지심만 있으면 돼.’라고 말이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믿는 원칙이다. 그는 ‘나는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 그저 내가 느끼기에 괜찮으면 돼. 내 생각에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뻐하실 거야. 내가 기뻐하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니 그러면 되는 거야.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을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너무 유치하지 않으냐? 너희도 예전에는 이런 내적 상태 아니었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너희가 줄곧 이런 내적 상태로 살면서 전혀 바로잡지 못했다면, 너희는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해 진리와 무관하며,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종교를 믿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이 관념으로 사람은 살길이 막막하거나, 집안에 어려움이 닥치거나, 기댈 곳이나 정신적인 의지처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종교를 믿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라고,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베풀라고, 선의로 남을 대하라고, 좋은 일을 많이 해 덕을 쌓으라고, 살인과 방화를 하지 말라고, 법을 위반하거나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라고, 훔치거나 뺏지 말라고, 남을 속이거나 기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관념 속에 있는 종교를 믿는 것의 개념이다. 종교를 믿는 것의 개념이 현재 너희 마음속에 얼마나 존재하느냐? 종교의 그런 것들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대체 어디에서 유래된 것이겠느냐? 너희는 이를 분별할 줄 아느냐? 만약 종교를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겠느냐?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옳겠느냐? 종교를 믿는 내적 상태와 하나님을 믿는 내적 상태가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종교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이겠느냐? 어쩌면 네가 처음 믿을 때는 종교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같은 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몇 년간 하나님을 믿었는데, 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종교를 믿는 것과 차이가 있지 않으냐? 종교를 믿는 것은 종교 의식을 지키는 것으로, 정신적 즐거움과 위안을 얻기 위함이다. 그것은 사람이 어떤 길을 가는지, 그리고 사람의 삶의 방식과는 관련이 없다. 너의 내면세계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너는 여전히 너이고, 너의 본성 본질은 줄곧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서 온 진리를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지 않으며, 너는 그저 좋은 일을 했거나 의식과 규례를 좀 지켰고, 종교를 믿는 활동에 좀 참여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무엇을 지칭하느냐? 바로 삶의 방식이 변하고, 생존의 가치와 평생 살아가는 목표가 이미 변한 것이다. 원래 너는 가문을 빛내기 위해, 남들보다 뛰어나기 위해, 부유한 삶을 살기 위해, 명예와 이익을 좇기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너는 그런 것들을 버렸고, 사탄을 따르지 않으며, 사탄과 그런 사악한 흐름을 저버리고자 한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며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게 되어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즉, 하나님을 믿은 후로 삶의 방식이 달라져 다른 삶의 방식으로 바뀌고, 창조주를 따르며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창조주의 구원을 받아들여 진정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는 삶의 방식이 바뀐 것 아니겠느냐? 이는 원래 네 삶의 방식, 추구, 모든 일을 하는 동기 및 의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서로 다른 별개의 일이다. 종교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의 차이점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겠다. 조금 전에 ‘적자지심’이라는 내적 상태에 대해 말했는데, 너희는 자신과 대조할 수 있느냐? (대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지금 대부분 시간을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면 가끔 이런 내적 상태가 있느냐? 만약 가끔 있다면, 이는 네가 이미 이런 내적 상태에서 벗어나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만약 네가 대부분 시간을 여전히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며, 어떻게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또 어떻게 적자지심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런 내적 상태에서 빠져나올지 알지 못한다면 이는 네가 아직 하나님 앞에 살고 있지 않으며,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진리를 구할 줄 모른다는 증거이다. 차이점이 크지 않으냐? (큽니다.) 만약 네가 여전히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며 전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매우 위험하고, 조만간 도태될 것이다. 이런 적자지심은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진리를 구해 이런 내적 상태를 분석하고 바꿔야 한다. 어째서 이런 적자지심이 있는지, 열의에 의지해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이 더 커지게 할지, 이런 문제들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는 자신과 대조해 보고 반성하여 해결을 구해야 한다.
어떤 부류의 사람은 열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며 어떤 본분도 다 이행하고 고난도 참아 내지만, 성품이 불안정하고 감정적이며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데다가 오직 기분에 따라 일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수중의 일을 매우 잘하며, 누구와 협력하거나 함께 지내든 잘 어울리고, 본분도 더 많이 이행하고 싶어 하고, 어떤 본분이든 책임감을 갖고 이행한다. 이는 내적 상태가 좋을 때의 모습이다. 그의 내적 상태가 좋은 데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본분을 훌륭히 이행해 칭찬을 받았거나 모두에게 우러름과 인정을 받았을 수도 있고, 또는 많은 사람이 그가 만든 작품을 마음에 들어 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바람을 가득 넣은 풍선처럼 점점 더 고조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날마다 똑같은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결코 하나님의 뜻을 모색하거나 진리 원칙을 구하지는 않고, 늘 경험에 의지해 일한다. 경험이 진리겠느냐? 경험에 의지해 일하는 것이 믿을 만하겠느냐? 진리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경험에 의지해 일하는 것은 원칙에 부합하지 않으니 반드시 실패할 때가 온다. 그 결과, 어느 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많은 문제가 생겨 책망을 받고 다들 그에게 불만을 느끼게 되면, 그는 소극적으로 변해 “저는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으니 그만두겠습니다. 누가 하든 저보다 낫겠죠. 저만 못 하는 것일 테고요. 그러니 하고 싶은 사람이 하세요!”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귀담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일에 교제할 만한 게 뭐가 있나요? 자꾸 진리가 어쩌고저쩌고하는데, 기분 좋으면 하고 기분 나쁘면 안 하는 거지 뭐가 그렇게 복잡합니까? 저는 안 하겠습니다. 나중에 기분이 좋을 때 할게요.”라고 말한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본분 이행이든,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든, 남들과 교제하는 것이든, 삶과 관련된 모든 면에서 그는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밝아지고, 고조되었다가 갑자기 침체되고, 열의에 차 있다가 갑자기 식어지고, 적극적이다가 갑자기 소극적으로 변하는 등의 모습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그의 내적 상태는 좋든 나쁘든 특히 두드러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꾸준히 하는 법 없이 자기 성질대로 한다. 기분이 좋으면 좀 제대로 하지만, 기분이 나쁘면 제대로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일을 하지 않고 내팽개치기도 한다. 그는 어떤 일을 하든 모두 자기 기분과 요구, 그리고 환경을 따라야 하며, 고난을 겪을 의지는 전혀 없다. 귀하게만 자라 버릇이 없고, 억지를 부리고 난폭하게 굴면서도 자제하지 않으며, 아무도 자기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그 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노발대발한다. 그러고 난 후에는 바로 소극적으로 변하고 기분이 가라앉는다. 이 밖에도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자기 기호를 따른다. “이 일이 좋으면 하겠지만, 싫으면 안 할 거예요. 어떤 경우에도 안 할 겁니다. 하고 싶은 사람이 하세요. 저랑은 상관없으니까요.”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기쁘고 내적 상태가 좋고 마음이 감동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말하며 감격해서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겠느냐?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정상적인 내적 상태지만, 그의 이런 성품, 모습, 표출을 보면, 남들은 그가 열 살 정도 되는 아이인 줄 알 것이다. 그는 성품도, 삶의 방식도 제멋대로여서 무슨 일을 하든 꾸준함과 충성심, 책임감, 부담이 없다. 고난을 겪는 법도 없고 책임을 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가 기분이 좋으면 어떻게 하든, 고난을 좀 겪든, 자기 이익이 손실을 보든 다 괜찮지만, 기분이 나쁘면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런 내적 상태가 정상이겠느냐? (비정상입니다.) 이는 단순히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 문제에 그치지 않는, 지나치게 제멋대로이고 무지몽매하며 유치한 모습이다. 제멋대로인 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어떤 사람은 “성품이 불안정한 것입니다. 너무 어리고 고난을 너무 조금 겪은 데다가 변덕스러워서 종종 제멋대로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사실, 제멋대로인 것은 나이와는 상관없다. 마흔이 넘은 성인도, 일흔이 넘은 노인도 제멋대로일 때가 있다. 그럼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제멋대로인 것은 사실 성품 문제로,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만약 그가 중요한 본분을 이행한다면 본분과 사역 진도에 지장을 주어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실을 끼칠 수 있다. 평범한 본분을 이행한다 해도 때때로 본분에 영향을 주고 일을 망치니 타인과 자신에게, 그리고 교회 사역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가 얼마간 일을 하고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지나치게 제멋대로인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이런 사람은 적지 않다. 제멋대로인 것은 패괴 성품 중 가장 흔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물론, 패괴 성품은 다 사탄 성품의 일종이며, 제멋대로인 것 또한 패괴 성품 중의 하나이다. 그것을 가볍게 말하자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심각하게 말하자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제멋대로인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는 기분이 좋고 이익을 얻었을 때만 잠깐 순종할 수 있지 기분이 나쁘고 이익이 없으면 부끄러운 나머지 화를 내고, 대적하고, 배반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진리니 뭐니 하는데, 중요한 건 내 기쁨과 만족이야. 내가 기분이 안 좋으면 누가 뭐래도 다 소용없다고! 진리는 뭐고, 하나님은 또 뭔데? 내가 대장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이냐? (진리를 증오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증오하고 싫어하는 성품이다. 여기에 교만함과 방자함이 있지 않겠느냐? 강퍅함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그것 외에도 심각한 내적 상태가 하나 더 있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누구에게나 잘하는 데다가 본분도 책임지고 이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매우 훌륭하고 순종적이며,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진리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는 순간, 책임을 내팽개치고 원망하며, 심지어는 말이 통하지 않기도 한다. 그 흉악한 모습이 드러나면 누가 책망해도 소용이 없다. 또 그는 “저는 모든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저 실행하지 않을 뿐이죠. 저만 편하면 그만이니까요.”라고 말한다. 이는 무슨 성품이겠느냐? (흉악한 성품입니다.) 이런 악인을 누가 책망하기라도 하면, 그는 반항할 뿐만 아니라 마치 악귀처럼 상대방을 상처 입히고 해치기에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이는 지나치게 제멋대로이고 흉악한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나이가 어려서 생긴 문제겠느냐? 나이가 많으면 제멋대로 굴지 않겠느냐? 나이가 들면 철이 들고 이성이 생기겠느냐? 아니다. 이는 사람의 성격이나 나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패괴 성품이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숨어 있는 것이며, 패괴 성품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는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패괴 성품 속에서 살아가는데 순종하겠느냐? 진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요소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전부 없다. 너희는 누구나 제멋대로인 내적 상태를 갖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교제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했겠느냐?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교제를 마치고 나니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간혹 약간 제멋대로 구는 것은 객관적인 원인에 의한 것으로, 성품 문제가 아니다. 성품 문제라면 일할 때 패괴 성품을 표출해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오늘 어떤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위통이 무척 심했다고 해 보자. 그는 너무 괴로워서 말할 힘도 없고 그저 눕고만 싶었다. 이때, 누군가 다가와 그와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그의 말투가 좀 딱딱했다면, 이것이 성품 문제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병 때문에 괴로워서 그랬던 것이다. 만약 그가 평소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서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성품 문제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말투가 좋지 않은 것이니 이는 정상적인 현상이다. 만약 객관적인 원인이 있고 다들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말하거나 그렇게 일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경우에 들어맞는다고, 인지상정이라고 공인한다면, 그것은 정상 인성의 모습이자 표출이다. 마치 가족이 죽었을 때 고통스러워 우는 일이 지극히 정상인 것처럼 말이다. “이 사람은 너무 감정적이에요.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가족에 대한 정을 놓지 못하고 가족이 죽었다고 울기까지 하다니 정말 어리석습니다!”라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막상 자기 어머니가 죽을 때 그 누구보다도 많이 운다. 이 일은 어떻게 봐야겠느냐? 함부로 규례에 맞춰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은 객관적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정상 인성의 모습이자 표출이다. 무엇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자 표출이고, 무엇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나 표출이 아니겠느냐? 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는 한편으로는 사람의 성품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의 관점, 추구하는 방식, 추구하는 길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코 성질이나 성격 또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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