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하나님 경륜의 가장 큰 수혜자이다 (제 1 부)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할 때 본분을 지키고 악을 저지르지 않지만, 그들에게 충성심이 있느냐?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여전히 많이 부족하다. 사람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는지는 인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어떤 것을 갖춰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그리고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참답게 대하고 진지하게 임하며 책임을 다해야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할 수 있다.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느냐? 심혈을 기울이고, 마음을 다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 리더가 너에게 어떤 본분을 이행하도록 배정하고 간단한 원칙만 교제하고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을 때, 네가 어떻게 해야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양심에 따라 이행해야 합니다.) 최소한 양심에 따라야 한다. “양심에 따라야 한다.”라는 말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겠느냐? 이 말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겠느냐?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또한, 어떤 일을 할 때, 여러 번 고민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만약 일을 한 후에 마음이 평안하지 않고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조사를 해 보니 실제로 문제가 발견됐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빠르게 수정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태도이냐? (참답고 꼼꼼하게 일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참답고 꼼꼼하게 하는 것으로, 바로 진지하고 엄격한 태도이다. 본분 이행은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태도를 가지고 “이 사역은 제게 맡겨졌으니 제가 인식하고 이룰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완수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대충 하면 된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항상 건성으로 대충 하려고 생각하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제대로 이행할 수 없습니다.) 건성으로 대충 하려는 태도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 이는 사탄의 패괴 성품 아니겠느냐? 건성으로 대충 하는 태도는 바로 패괴 성품의 한 가지로, 사람이 패괴 성품의 부추김을 받아 건성으로 대충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본분 이행의 성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역을 망쳐 교회의 사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니, 매우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줄곧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것, 이는 무슨 문제이겠느냐? 이것은 인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양심과 인성이 없는 사람만이 일관되게 건성으로 대충 할 수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일관되게 건성으로 대충 하는 사람이 믿음직스럽겠느냐? (미덥지 못합니다.) 매우 미덥지 못하다!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책임감 없는 사람이며, 일을 처리할 때 책임감이 없는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 아니고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건성으로 대충 한다. 인품이 좋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니 결코 정직한 사람이 아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과연 부탁을 맡길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기에 절대 간사한 사람을 본분 이행에 쓰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정직한 사람만을 축복하며, 오직 정직하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역사한다. 간사한 사람의 본분 이행은 다 사람이 안배한 것으로, 이는 사람의 잘못이다. 건성으로 대충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없고 인성이 나쁘니, 신뢰할 수 없고 미덥지 못하다. 그렇다면 성령이 이런 사람에게 역사하겠느냐? 절대 역사하지 않는다. 그러니 건성으로 대충 본분을 이행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께 온전케 되지 못하며, 또 영원히 하나님에게 쓰임 받지 못한다. 건성으로 대충 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간사한 사람으로, 꿍꿍이가 너무 많고 양심과 이성이 전혀 없다. 이들은 일을 처리할 때 원칙과 최저선 없이 그저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할 뿐이라 어떤 나쁜 일도 다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기분에 따라 행동한다. 기분이 좋고 기쁘면 약간 더 잘하고, 기분이 나쁘고 언짢으면 건성으로 대충 한다. 화가 나면 제멋대로 행동해 중대한 일을 망친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전혀 없는데, 그저 그럭저럭 대충 살며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따라서 본분 이행을 일관되게 건성으로 대충 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권면하거나 진리를 교제해도 소용이 없다. 아무리 여러 번 타일러도 고치지 않고 양심도 없으니, 그를 제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가장 적절한 조치이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최저선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겠느냐?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합니다.) 어째서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겠느냐? (양심의 기준, 인성, 최저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맞다. 그는 일을 처리함에 있어 양심의 기준이 없으며, 자신의 선호도에 따라 마음대로 하고 기분 내키는 대로 한다. 그의 본분 이행 성과도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기분이 좋으면 성과가 좋고, 기분이 나쁘면 성과도 좋지 않으니, 이런 본분 이행이 합격할 수 있겠느냐? 그의 본분 이행은 진리 원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분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면 진리를 실행해 내기 어렵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기 어렵다. 육적 선호도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일을 하든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진리와 관련이 있는 일은 사람의 인성이나 인품과 관련이 있으며, 일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사람이 원칙 없이 일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 원칙을 알지 못해서이다. 하지만 또 많은 경우에 사람이 원칙을 알지 못하는 동시에 원칙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조금 알고 있다고 해도 더 나은 방향으로 하려 하지 않으며, 마음속에 그러한 기준도, 요구도 없다. 그래서 일을 제대로 하기가 무척 어렵고, 진리에 부합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사람이 본분 이행에 합격할 수 있는지 여부의 핵심은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자인지,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런 사람은 설령 본분을 이행한다고 할지라도 힘만 쓰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달았든 그렇지 않든, 원칙을 파악할 수 있든 없든, 양심에 기대 본분을 이행한다면 최소한 보통의 성과는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통과할 수 있다. 거기에서 나아가 진리를 구해 진리의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요구에 완전히 도달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이더냐? (마음과 힘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힘을 다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온 신경을 본분 이행에 쏟는 것을 가리켜 마음을 다한다고 한다. 또한, 모든 힘을 본분 이행에 쏟는 것을 가리켜 힘을 다한다고 한다. 마음과 힘을 다하는 것이 쉽겠느냐?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게 마음이 없다면, 생각도 없고 고민할 줄도 모른다면, 또 문제가 생겼을 때 진리를 구하지 않고 아무런 방법도 없다면 이렇게 해서 마음을 다할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 만약 사람이 마음이 있다면, 마음을 다할 수 없겠느냐? (다할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이 마음은 있지만 이를 본분 이행에 쓰지 않고 비뚤어진 방법 궁리와 부당한 일에 사용한다면, 그가 마음을 다해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책망과 훈계를 받고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여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기를 원하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겠다고 맹세했다고 치자. 하지만 어려움이나 시험이 닥치면 마음이 흔들리고 본분 이행을 망설이거나 소극적이 되어 도피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그가 여전히 마음을 다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방금 마음이 있으면 마음을 다할 수 있다고 한 말이 성립하겠느냐? (성립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기분이나 상상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격정에 의존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자신의 느낌대로 하거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도 안 된다. 대신 네가 지속적으로 진리를 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열정이나 느낌, 혹은 격정과 일시적인 기분에 의존한다면 너는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다. 마치 사람이 어릴 때는 모두 커서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자라서 그 소원을 이루려고 할 때, 그것을 막는 어려움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이는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 현실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꿈보다 더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보자. 대학을 졸업하고 돈을 벌기 시작한 후 너는 ‘이제 돈을 벌었으니 먼저 부모님께 좋은 옷과 건강식품을 사 드려야지. 앞으로도 부모님께 효도해 벌어들인 돈을 모두 부모님께 쓰면서 매일 기쁘게 해 드려야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급여를 받고 계산해 보니, 집세, 생활비, 기타 여러 가지 비용을 제외하면 남는 돈이 별로 없는 데다가 본인도 좋은 옷 한 벌은 사야 해서 돈을 모두 쓴 뒤에는 마음이 불안해진다. 자신이 성장한 후 돈을 벌어 부모님에게 효도하겠다는 약속을 어겼으니 말이다. ‘이건 불효야. 다음 달에는 돈을 아껴 써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다음 달에 벌어들인 돈도 여전히 부족해 결국 ‘앞으로도 효도할 시간은 많아.’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너는 배우자를 찾아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게 되고, 수중의 돈은 점점 더 부족해진다. 네 상황과 생활 환경으로 볼 때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이 소망을 이루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너도 가족을 부양하고 먹고 살아야 하고 자녀를 교육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존을 위해 토박이와 탐욕스러운 정부 관리들도 접대해야 하니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부모님에게 효도하려는 마음이 있다 한들 소용이 없다. 다양한 현실적인 어려움이 너를 짓눌러 부모님에게 효도하려는 마음이 점차 현실에 묻히게 된다. 그렇다면 너의 효심이 여전히 유효하겠느냐? (유효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린 시절 부모님에게 효도하고자 했던 네 소원은 진실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거짓이었느냐?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소원은 진실했지만, 동시에 순진하고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으며 믿을 수 없는 것이었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진실한 너 자신이겠느냐? 현실 생활에서 네가 드러내고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너의 진실한 인성이고 가족을 대하는 진정한 태도이다. 네가 부모에 대한 효도를 계속 뒤로 미루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심의 가책과 자책도 없어지고 책임과 의무도 사라지게 된다. 너는 ‘다들 이렇게 해. 다른 사람보다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나도 실제로 어렵다니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너의 모든 구실, 이유, 핑계, 이것들은 다 무엇이겠느냐? 전부 패괴 성품에 있는 것들이다. 현실이 어려워 네가 맡아야 할 책임을 미룰 만한 이유와 구실이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너의 이유와 구실이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고 해도, 결국 네가 보여 주는 모습이 바로 완전히 진실된 너 자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긍정적인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겠느냐? 현실 생활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얻기 전에는 사람이 어떤 것들을 보여 주겠느냐? 정의롭고 긍정적인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네가 아무리 잘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이 또한 패괴 성품이며,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깨닫지 못한다면, 진리를 실천하기 어렵다. 그러면 네가 살아 내는 모든 것은 패괴 성품의 표출이 될 것이다. 네가 아무리 자신이 훌륭하고 위대하고 정직하다고 생각해도, 그 기반 위에서 하는 일은 진리에 부합할 수 없다. 이해하겠느냐? (어느 정도 이해했습니다.) 말해 보아라. 무엇을 이해하였느냐? (사람은 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자 하지만 패괴 성품에 지배되어 양심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려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도 말해 보아라. 또 무엇을 이해하였느냐? (사람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든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이 한 일은 모두 진리를 실천한 것이 아닙니다. 설령 사람이 보기에는 잘한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리를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아주 잘 말했다! 이 기간에 너희 모두가 성장한 것 같구나. 진리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사람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육을 저버리고 진리를 찾고 실천하는 것 외에도 많은 고통과 연단을 받아야 한다. 또한, 사탄의 핍박과 해침을 겪어야 한다. 죽지는 않더라도 온갖 고초를 겪어야만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사람이 진리를 얻는 것은 심판과 형벌을 겪어 정결함을 얻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네가 자신에게 패괴 성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또 진리를 인정해도, 진리를 실천할 때 너의 패괴 성품이 방해하고 교란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 경우 사람의 마음에 어떤 것들이 생기겠느냐? (이치를 따지고 핑계를 대며,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체면과 허영을 고려하기도 합니다.) 이는 사람의 성품에 관한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아도, 그의 성품을 관찰하면 그의 마음속에 패역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패역은 패괴 성품의 일종이다. 이치를 따지거나 핑계를 대는 것은 모두 자신의 이익, 체면, 지위, 허영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어떤 속셈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이러한 패역한 성품이 있다면,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적대하는 각종 패괴된 내적 상태가 생겨난다. 패역이란 무엇이냐? 간단히 말해, 마음속에서 반발심이 생겨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이다. ‘당신이 하시는 말씀이 왜 제 생각과 다를까요? 왜 제 마음에 안 들까요? 제 마음에 안 들면 받아들일 수 없으니 당신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아요.’라고 마음속으로 하나님과 대립하며 복종하지 않는다. 심지어 현실과 맞서고, 하나님의 행사와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항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패역으로,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데 가장 큰 난관이다. 핑계를 대든 여러 가지 객관적인 이유와 조건을 찾든, 어찌 되었든 이는 사람 내면의 패역 성품이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네가 이 패역 성품을 해결하고, 이러한 내적 상태를 바꾸어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 일이 저에게 임했는데, 저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모르니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 실행의 길을 찾거나 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 조언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실행해야 진리에 부합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족스러워하시는지를 알게 되면, 그렇게 실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이런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면 옳은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진리를 추구하면서 불굴의 의지로 노력하며 소극적이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욥에게 시련을 줄 때, 욥이 그 당시 깨달음 수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나타낸 것은 무엇이었느냐? 순종이냐 아니면 거역, 반발, 원망이었느냐? (순종이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겉모습까지 어떤 상태였느냐? 조금이라도 싫어하고 대항했느냐? 전혀 없었다. 사람이 성경 기록에서 단순한 묘사만 보았을 뿐, 욥의 패역한 내적 상태는 전혀 보지 못했다. 그러한 기록을 통해 너는 욥이 많은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느냐? (알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욥은 그때 어떤 진리를 깨달았느냐? 하나님이 순종의 진리를 이야기하였느냐? 하나님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였느냐? 이러한 것들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욥의 내적 상태는 어떠했느냐? 당시 그는 지금과 같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위와 그가 한 일을 통해 그의 내면의 생각이 무엇인지, 그의 내면이 어떤 내적 상태였는지는 사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알 필요는 없다. 그가 겉으로 어떻게 했는지 네가 보았을 테니 말이다. 시련에 직면해 그는 겉옷을 찢고 엎드리는 행동을 했는데, 이는 어떠한 거역도 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이 하는 대표적인 동작이다. 그의 엎드림은 그의 내심에서 나온 것으로, 그 당시 그의 생각 및 그가 표현하려는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는 그의 추구와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는 무엇이었느냐? 하나님이 그에게 행한 일에 대해 그는 어떻게 반응했느냐? 첫 번째 반응은 바로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두말없이 수용하고 순종하는 것이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나요? 이런 사람은 성인 아닌가요? 가짜겠죠?”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실제로 욥 같은 사람이 진짜 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욥이 있을 뿐, 두 번째 욥은 없을지도 모른다. 욥과 같은 내적 상태가 바로 이방인들이 말하는 “사심과 욕심이 없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련이 그에게 임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행동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나타냈다. 그가 엎드린 것은 시련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에 대한 그의 진실한 수용과 순종, 어떠한 대항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쇼나 연기가 아니었으며,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에게 보여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욥은 어떻게 그렇게 순종하게 되었겠느냐? 욥의 그런 순종은 단 한 번의 시련으로 순종할 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땅에 살고 있는 패괴된 인류는 모두 다 사탄에 의해 패괴되어 패역 성품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다 이기적이고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다. 이는 사탄에 의해 패괴된 본성으로, 패괴된 인류는 모두 이러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욥은 그 정도까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다.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이겠느냐? 분명 아니다. 그가 명확한 추구 목표와 정확한 방법을 가지고 추구해야 했고, 동시에 하나님의 인도, 보살핌, 보호가 있어야 했다. 욥은 바른길을 걷기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 긍휼,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를 지속적으로 보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살핌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야 그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은 어째서 욥이 스무 살 때 그런 시련을 주지 않았겠느냐? (그때 그는 그런 분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마흔 살 때는 왜 그런 큰 시련이 없었느냐? 역시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왜 일흔 살이나 되어서야 하나님이 그에게 시련을 주었겠느냐? (하나님의 시기가 왔기 때문입니다.) 맞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는 일흔 살이 되기를 기다려야 하겠느냐? (아닙니다.) 왜 아니냐? (지금은 저희가 직접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어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명확히 얘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의 사역은 요즘의 사역과 달랐다. 그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았고, 사람도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저 단순하고 대표적인 사역만을 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저 선지자들이 전하는 하나님 말씀만 지켰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되는대로 그저 제사만 드리고 기도나 하며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 당시 욥의 친구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아니었느냐? 그들의 믿음이 욥보다 훨씬 부족했던 것 아니겠느냐? 그들은 욥과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욥의 믿음이 그들보다 훨씬 더 강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큰 차이가 있었겠느냐? (사람의 본성 및 추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맞다. 이는 사람의 추구와 관련이 있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니, 네가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 때가 되어도 결코 아무것도 수확하지 못한다. 그 몇몇 어리석은 자들은 아무런 추구도 하지 않았다. 오늘날 교회의 불신파와 마찬가지로 규례만 지키고 모든 일을 규례에 맞췄을 뿐이다. 또한, 진리를 깨닫지도 못했고, 늘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욥이 시련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당장 죄를 자백하게. 하나님의 징벌이 닥쳤네.”라고 욥에게 말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였느냐? 하나님은 “너희는 이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내 행사와 사람에 대한 나의 태도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내가 어떤 규칙으로 일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너희는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다. 역시 욥이 제대로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났고, 그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럴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현재,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완전한 순종, 절대적인 순종,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심과 두려움, 어떠한 기만, 대적, 거역도 없는 완전히 정결한 마음, 절대적인 충성과 순종이다. 이것은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인 것이며, 시간, 장소, 연령과 관계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다. 이러한 추구 과정에서 너는 점점 하나님을 알게 되고, 점점 하나님의 행사를 알게 되며,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느끼고, 하나님의 실재와 주재를 느끼게 될 것이다. 마침내 너는 하나님이 만물 중에 계시며, 네 곁에 계시다는 것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너는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런 인식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며, 하나님은 무소불능하십니다.”라고 말한다. 너는 마음속으로 이를 완전히 인정하지만, 네가 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겠느냐?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너는 무엇을 했느냐? 너 또한 늘 예배하고 설교를 들었으며, 또 줄곧 본분을 이행해 왔고, 많은 곳을 돌아다녔으며, 복음을 전해 몇 사람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냐? 너는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는 눈뜬장님 아니겠느냐? 참도인 줄 분명히 알면서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예배하고 설교를 들으며 교회 생활을 한다 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전혀 변화가 없으니, 정말로 너무 가련하구나! 이것은 불신파의 내적 상태로, 하나님 집의 일원이 아닌 듯하다. 하나님의 눈에 너는 얹혀사는 사람, 즉 힘만 쓰는 사람일 뿐이다. 너는 “저는 본분을 이행하고 있어요. 하나님, 저를 인정해 주셔야 해요!”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네 마음속에 내가 전혀 없고 진리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니, 너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다.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속 말이다. 너는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진리, 길, 생명이란 이 일에 대해 어떠한 경험이나 체험, 인식도 갖지 못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이 진리, 길, 생명이라는 것을 증거할 어떠한 실제 체험도 제시할 수 없는데, 네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증거할 수 없으며 여전히 사탄의 성품으로 살고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니, 너는 이방인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너는 약간 이기적이고 비열한 잔꾀조차 저버리지 못하고, 관념과 패역 또한 쉽게 해결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환경을 마련해 줄 때마다 아무런 공과도 배우지 못하고, 몇 년을 체험해도 뚜렷한 수확을 얻지 못한다. 그러니 패괴 성품이 정결함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20년, 30년, 또는 그보다 더 오래 믿었더라도, 만약 너의 패역, 반발심, 패괴 성품이 전혀 해결되지 않거나 정결함을 얻지 못한다면, 너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오래된 마귀에 불과하다. 이것만으로도 네가 불신파임이 충분히 증명되어 쉽게 내쳐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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