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

다음으로 은혜시대에 예수가 말씀한 한 가지 비유를 보자.

3. 길 잃은 양의 비유

(마 18:12~14)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이것은 한 단락의 비유이다. 이 단락 말씀은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가? 여기에서 비유한 표현 방식은 인류의 언어와 문자에서는 한 가지 수사적 방식이고 인류의 지식 범위 안의 것이다. 만일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한다면 사람은 이런 말씀이 하나님의 신분과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지만 이 말씀을 은혜시대에 인자가 발표해 내니 사람은 매우 편하고 매우 온화하고 또한 매우 가깝다고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었기에 그는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인성에서 아주 적절한 비유로써 그의 마음의 소리를 표현하였는데, 이 마음의 소리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대표하고 하나님이 이 시대에서 하려는 사역을 대표하며 또한 은혜시대에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 자신의 하나의 태도도 대표한다.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이 태도에서 보면, 하나님이 각 사람을 한 마리의 양에 비유했는데 만일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는다면 그는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고 그 양을 찾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때 말씀이 육신 되어 사람 몸에서 역사한 하나의 원칙을 대표한다. 하나님은 이런 비유로써 그때 역사의 결심과 태도를 묘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된 ‘우세’한 점이다. 그는 사람의 지식을 이용해 인성의 언어로써 사람에게 말씀하여 그의 염원을 표현할 수 있으며, 그는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신성의 언어를 인성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에게 해석해 주거나 ‘통역’해주는데, 이러면 사람에게 그의 뜻을 요해하고 그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를 알게 하는 데에 유리하다. 그 외에 그는 또 사람의 각도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의 언어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이 알기 쉬운 방식으로 사람과 대화하고 심지어 사람의 언어 지식으로 말씀하고 역사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이 친절하고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사람에게 하나님의 마음도 보게 한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는가? 하나님께 있어서 말씀을 하고 일을 하는 데에 금기가 있는가? 사람이 보기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지식과 사람의 언어 또는 사람이 말하는 방식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하려는 말씀을 하고 하려는 사역을 하며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이것이 바로 사람의 잘못된 상상이다. 하나님이 이런 비유를 사용했는데, 이 비유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실함을 느끼게 하였고 하나님의 진심도 느끼게 하였으며 그 기간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도 보게 하였다. 이 비유는 율법 아래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사람들을 꿈속에서 깨어나게 했고 동시에 한 세대 또 한 세대 은혜시대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도 격려해 주었다. 이 단락의 비유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 마음속에서의 사람의 가치도 요해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마지막 한 마디를 보자.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예수의 이 말씀은 그 자신이 말씀하고 있었는가 아니면 하늘 위의 아버지가 말씀하고 있었는가? 겉으로 보면 예수가 말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의 뜻은 하나님 자신의 뜻을 대표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였다. 그때의 사람들이 하늘 위의 아버지만 하나님으로 시인하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이 사람은 단지 하늘 위의 아버지가 보낸 분이지 결코 하늘 위의 아버지를 대표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예수가 반드시 이런 한 마디 말씀을 추가하여 사람에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느끼게 하고 이 말씀의 진실성과 정확성도 느끼게 해야 하였다. 이것은 비록 간단한 한 마디 말씀이지만 아주 마음에 와 닿고, 그것은 예수의 낮춤과 숨김을 유로(역주: 흘러나옴)해 냈다.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든지 아니면 영계에서 역사하든지 그는 사람의 마음속을 가장 분명히 알고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장 잘 요해하고 있으며 사람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무엇으로 인해 곤혹스러워하는지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한 마디 말씀을 추가한 것이다. 이 말씀은 사람 몸에 숨겨진 문제를 두드러지게 나타냈는데, 인자가 한 말씀에 대해 사람은 모두 반신반의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말씀하는 동시에 반드시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는 이런 전제를 더해야만 말씀하는 효과에 달할 수 있고 사람에게 그의 말씀의 정확성을 믿게 하여 말씀의 신뢰도를 제고하는 데에 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평범한 인자로 되었을 때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난처하고 인자의 처지도 얼마나 난감했는지를 알 수 있고, 그때의 예수가 사람들 가운데서의 지위가 얼마나 미소했는지도 알 수 있다. 그가 이 말씀을 한 것은 사실 사람들에게 “너희는 안심하거라, 나의 이 뜻은 나 자신의 뜻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속의 그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알려 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사람에 대해 말하면 매우 풍자적이 아닌가? 비록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어 역사함에는 하나님의 본체가 구비하지 않은 많은 유리한 조건을 구비했지만 사람에게서 오는 의심과 저버림을 참아야 했고 사람의 마비와 둔함도 참아야 했다. 가히 말해서, 인자가 역사하는 과정이 바로 사람의 저버림을 체험하는 과정이자 역시 사람의 그와의 겨룸을 체험하는 과정이고 더욱이 그가 몸소 실천하면서 자신의 소유소시와 자신의 실질로써 부단히 사람의 신임을 얻고 부단히 사람을 정복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어 사탄과 실제적으로 싸운다고 말하기보다 하나님이 하나의 평범한 사람이 되어 그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과 한 차례 승부를 펼친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 이 한 차례 승부에서 인자는 그의 낮춤, 그의 소유소시, 그의 사랑과 지혜로써 그의 사역을 완성하고 그가 얻으려는 사람을 얻고 그에게 있어야 할 신분과 지위도 얻었으며 그의 보좌 위로 ‘회귀’하였다.

계속해서 다음의 두 단락 경문을 보자.

4.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5. 주의 사랑

(마 22:37~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구절의 경문에서 하나는 용서를 논하고 하나는 사랑을 논했는데, 이 두 방면의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할 사역의 내용을 아주 두드러지게 언급했다.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될 때 그는 따라서 한 단계 사역을 가져오고 그 시대에 발표할 성품과 구체적인 사역 항목을 가져온다. 그 시기에 인자가 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그 시대에서 할 사역 범위를 둘러싸는데, 그는 많이 하지도 않고 적게 하지도 않으며 그가 하는 매 한 마디 말씀과 하는 매 한 가지 사역은 모두 그 시대와 관련된다. 그가 사람의 방식과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든지 아니면 신성의 언어로 표현하든지, 어떤 방식과 어떤 각도이든지 그의 목적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 그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그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서로 다른 각도로 사람에게 그의 뜻을 깨닫고 알고 요해하게 할 것이며 사람을 구원하는 그의 사역을 요해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시대에 우리가 보다시피 예수는 많은 경우에 인성의 언어로써 사람에게 그가 설명하려는 문제를 표현했고 동시에 더 많은 경우에 한 평범한 길잡이의 각도에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의 필요를 공급하고 사람의 원하는 바를 도와주었다. 이런 역사 방식은 은혜시대 이전의 율법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인데, 그에게 사람과의 친근함이 많아지고 사람에 대한 이해도 많아져 형식과 방식에서 더욱 실제 효과에 달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비유는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비유 중의 숫자가 달하는 목적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이 말씀에서 예수가 그때 이 비유를 한 용의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한두 번이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남을 용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의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는 하나의 어떤 개념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과 자신의 필수 과목으로 삼고 또한 ‘도’로 삼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하나의 비유일 뿐이지만 화룡점정의 역할을 일으켰다. 그것은 사람에게 예수의 뜻을 깊이 터득하게 하였고 이 말씀 속에서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도 얻게 하였고 실행의 원칙과 표준도 얻게 하였다. 이 비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히 요해하게 하였고 사람에게 하나의 정확한 개념도 주었다. 즉, 사람으로 하여금 용서를 배워 남을 용서하는 데에 조건도 없고 횟수 제한도 없도록 하며 다른 사람을 양해하고 관용할 수 있는 이런 심리 상태로 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한 동시에 마음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겠는가? 그가 정말로 생각한 것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인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데에 횟수가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말하는 ‘횟수’에 대해 매우 흥미를 느끼며 이 횟수의 출처와 그것의 함축된 뜻을 요해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가 이런 숫자를 말씀했는지를 요해하고 싶어하며 이 숫자에 꼭 어떤 더 깊은 함의가 있을 거라고 여긴다. 사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이 인성에서 말씀한 하나의 비유일 뿐이다. 그 어떤 함축된 뜻이나 함의가 있는 말씀이라고 해도 어쨌든 사람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떠날 수 없다.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한 많은 말씀을 사람은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은 완전한 신성에서 오고 그가 말씀한 각도와 배경은 사람이 볼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는 것이고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발표해 낸 것이고 육체 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꿰뚫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된 후 하나님은 인성의 각도에 서서 사람과 대화를 하기에 영계의 범위를 벗어났고 초월했다. 그는 사람의 관념 속에서 상상한 것이나 사람의 생활 속에서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얼마간의 일 또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사람이 터득할 수 있는 언어나 인류가 장악하고 있는 지식으로써 그의 신성에서의 성품과 뜻 그리고 그의 태도를 표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달할 수 있는 정도에서 하나님을 요해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요구 표준을 이해하고 터득하게 하는 데에 달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비록 하나님이 육신 중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원칙은 더욱 많게는 인성에 의하거나 인성을 통해 달하지만 오히려 신성이 직접 역사하여 달할 수 없는 효과를 얻었다. 하나님의 인성에서의 역사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진실하고 더욱 겨냥하는 바가 있으며, 방식상에서도 융통성이 많아졌고 형식상에서도 율법시대를 초월했다.

다음으로 주를 사랑하는 것과 남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을 논했는데, 이 말씀은 신성에서 직접 발표한 것인가? 아주 뚜렷한바, 아니다! 이런 말씀은 다 인자의 인성에서 한 것이다. 오직 사람만이 “남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고, 남을 자기 생명 같이 보살피라”는 이와 같은 말을 하고 또 오직 사람만이 이런 방식으로 말한다. 하나님은 여태껏 이런 방식으로 말씀한 적이 없으며, 최소한 하나님의 신성 안에는 이런 언어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남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라”는 이런 신조로써 인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규범화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소유소시의 자연적 유로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언제 하나님이 “나는 인류를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사랑한다.”라고 말씀하는 이런 표현을 들은 적이 있는가? 사랑은 하나님의 실질 안에, 하나님의 소유소시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는 그의 성품의 자연적인 표현과 유로이다. 그는 일부러 어떻게 하거나 일부러 한 가지 방식, 한 가지 도덕규범을 준수함으로 사람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할 필요가 없으며, 그는 본래부터 이런 실질을 구비한 것이다. 여기에서 너는 무엇을 보았는가? 하나님이 인성에서 역사할 때 많은 방식, 많은 언어, 많은 진리는 인성의 방식으로써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뜻도 이와 동시에 표현해 내어 사람에게 요해하게 하고 인식하게 하였는데, 사람이 요해한 것과 인식한 것은 조금도 틀림없이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신분과 지위에 구비된 실질과 소유소시를 대표한다. 말하자면, 말씀이 육신 된 인자는 최대한도로 가장 정확하게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을 다 발표한 것이다. 인자의 인성은 사람과 하늘 위의 하나님이 교제하고 소통하는 데의 가로막음과 장애이기는커녕 오히려 인류와 조물주가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경로와 다리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너희는 은혜시대에 예수가 한 사역의 성질과 방식의 일부가 지금 이 단계 역사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이 단계 역사에서도 인성의 언어를 많이 사용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였고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자주 하는 말이나 인류의 지식 방면의 언어와 방식을 많이 사용하여 하나님 자신의 뜻을 표현하였다. 하나님이 일단 말씀이 육신 되면 인성의 각도에 서서 말씀하든지 아니면 신성의 각도에서 말씀하든지 많은 언어나 표현 방식은 모두 사람의 언어나 방식을 매개체로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었을 때가 바로 네가 하나님의 전능과 하나님의 지혜를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여러 가지 면을 인식하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었을 때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는 인성에서 사람에게서 온 지식, 상식, 언어나 표현 방식을 얼마간 요해하고 배우고 장악하였는데, 피조된 인류에게서 온 이런 것이 도성육신(역주: 성육신) 하나님의 몸에 갖추어져 하나님이 육신 중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하거나 신성을 발표하는 도구가 되어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람의 각도와 사람의 언어로써 사역할 때 더욱 적절하게, 더욱 진실하게, 더욱 정확하게 할 수 있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쉽게 접근하고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에 달하며 따라서 그가 원하는 역사 효과에 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육신 중에서 이렇게 역사하는 것은 더욱 실제적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가?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었을 때, 하나님의 육신이 그가 할 사역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을 때, 즉,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사역이 곧 실지(實地)로 발표될 때, 이때가 바로 인자가 정식으로 직분을 하기 시작할 때이다. 이것은 사람과 하나님 간에 더는 ‘세 대차’가 없음을 뜻하고, 하나님이 사자가 그를 위해 소식을 전달하던 사역을 곧 정지하고 하나님 자신이 육신 중에서 그가 발표할 모든 말씀과 사역을 친히 발표할 것임을 뜻하며, 동시에 또 하나님이 구원하는 인류가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음을 뜻하고,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음을 뜻하며, 하나의 새로운 시대가 곧 전 인류에게 향할 것임을 뜻한다.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은 다 알다시피, 예수가 강생할 때 많은 일이 발생했는데, 그중 가장 큰 일은 바로 마왕에게 추적을 당하고 심지어 온 성읍의 두 살 아래의 아이가 모두 살해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육신이 사람들 가운데 와서 얼마나 큰 위험을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경영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의 도성육신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였겠는가? 사람이 당연히 좀 요해가 있겠지? 하나님의 마음은 최소한 기뻤다. 그것은 그의 새 사역이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사역을 하며 직분을 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매우 기뻤다. 왜냐하면 수년간 기다리고 수년간 예비한 후 하나님이 드디어 정상 사람의 육신을 입고 사람들이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피와 살이 있는 하나의 사람의 형상으로 그의 새로운 사역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가 드디어 사람의 신분으로 사람과 대면하여 말씀하고 사람과 대면하여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이 드디어 사람의 언어로, 사람의 방식으로 사람과 대면하면서 사람의 언어로 사람에게 공급하거나 사람을 일깨워 주고 도와주고 사람과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하며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수도 있었고 또한 사람의 방식으로 심지어 사람의 안목으로 인류를 대하고 사물을 대하고 모든 것을 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께 있어서 육신의 사역이 이미 초전 승리를 거둔 것이고 또한 큰 일을 이루었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함에 있어서 처음으로 위로를 느꼈다. 이 모든 것은 그렇게 실제적으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하나님에게 느끼게 한 위로가 또한 그토록 진실하였다. 왜냐하면 인류에게 있어서 매번 하나님의 새로운 한 단계 사역이 성취될 때, 매번 하나님이 기쁨과 위로를 느낄 때는 바로 인류가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할 수 있을 때이자 사람이 구원받는 데에 더 가까워질 때이며, 하나님께 있어서 이때는 역시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이 전개되고 하나님의 경영 계획이 또 앞으로 매진할 때이며 더욱이 하나님의 뜻이 완전한 성취를 얻는 데에 가까워질 수 있을 때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가 임하게 된 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행운인 것이고 지극히 좋은 것이며, 이 일은 하나님께 구원받기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특대 희소식이다. 하나님이 한 단계 새로운 사역을 하였을 때는 하나님께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 있게 된 것이다. 이 단계 새로운 사역과 새로운 시작이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되고 구체화될 때는 바로 이 단계 사역이 이미 결정되고 성취된 것이며, 역시 하나님이 이미 최종 효과와 성과를 보았을 때이다. 이때는 또한 이 효과가 하나님을 만족케 할 때인데, 하나님의 마음은 당연히 기쁜 것이다. 하나님의 안중에서 이미 그가 찾으려는 사람을 보았고 그가 찾으려는 사람을 이미 확정하였고 얻기도 하였으며 그의 사역이 성취되게 할 수 있고 그를 만족케 할 수 있는 한 무리 사람들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은 위로를 얻었고 그는 슬픔을 내려놓았으며 그의 마음은 즐거운 것이다. 즉, 하나님이 자신의 육신이 사람들 가운데서 새로운 사역을 전개할 수 있기 위해 아무런 가로막음도 없이 그가 하려는 사역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가 이 모든 것이 다 성취되었다고 여겼을 때 하나님은 이미 결국을 본 것이다. 그는 이 결국으로 말미암아 만족할 수 있고 그의 마음은 즐거운 것이다. 하나님의 즐거움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가? 너희는 상상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눈물을 흘려도 되는가? 하나님이 눈물을 흘릴 수 있는가, 없는가? 하나님이 손뼉을 쳐도 되는가? 하나님이 춤을 출 수 있는가, 없는가? 하나님이 노래 한 곡을 불러도 되는가? 이 노래는 마땅히 어떤 노래여야 하는가? 하나님은 물론 아름다운 노래, 구성진 노래, 그 자신의 마음속의 기쁨과 유쾌함을 표현할 수 있는 노래를 불러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그 자신에게 들려주고 만물에게 들려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즐거움은 그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할 수 있는데, 이 모든 것은 다 정상적이다. 하나님께는 희로애락이 있기에 하나님의 서로 다른 심정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권리이며 매우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어떤 생각도 있지 말아야 하고, 너희의 진구저우로 하나님을 대하면서 하나님께 이것을 하지 말고 저것을 하지 말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되고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 주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의 즐거움을 제한하거나 하나님의 그 어떤 심정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해도 안 되고 눈물을 흘려도 안 되며 울어도 안 되고 그 어떤 정서를 표현해서도 안 된다. 최근의 몇 차례 교통을 통해 너희가 더는 이렇게 하나님을 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자유와 해방이 좀 있게 할 수 있으리라 믿는데, 이것은 매우 좋은 현상이다. 이후에 너희가 하나님이 슬퍼한다는 말을 들을 때 너희는 정말로 하나님의 슬픔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이 기뻐한다고 할 때도 너희는 정말로 하나님의 기쁨을 느낄 수 있으며, 최소한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요해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슬픔으로 인해 슬퍼하고 하나님의 기쁨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을 때 너의 마음은 완전히 하나님께 얻어지고 하나님과 그 어떤 간격도 없게 되며 너는 사람의 상상과 관념이나 지식으로 하나님을 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하나님은 너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분이고 생생하게 나타나는 분이며 너의 생명이 되는 하나님이고 너의 모든 것을 주재하는 주이다. 너희에게 이런 소망이 있는가? 달할 수 있는 신심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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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요해(了解): 알다.

②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

③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④진구저우(緊箍呪): 손오공의 머리에 씌워져 있는 금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