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2

욥 본인에 관하여

욥이 시련을 겪은 전 과정을 요해한 후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 본인과 관련된 메시지에 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것이고 특히 욥이 어떻게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는가의 ‘비결’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질 것이라 믿는다. 오늘 여기에서 욥, 이 사람에 관해 얘기해보자!

욥의 일상생활 속에서 욥의 온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을 보다

욥 본인을 얘기하려면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는 것에서부터 말해야 한다.

우리 먼저 욥의 온전함과 정직함을 요해하도록 하자.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과 정직함’을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욥이 아주 완벽하고 아주 강직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것은 글자 표면상의 해석과 이해이다. 진정 욥, 본인을 요해하려면 현실 생활을 벗어나서는 안 되며 단지 글자 표면에서, 책에서, 도리상에서는 그 어떤 답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 먼저 욥, 이 사람의 일상생활이 어떠한지, 즉 그의 생활 속의 정상적인 표현이 어떠한지를 보고 이런 것을 통해 욥의 생존 원칙과 그의 인생 목표를 요해하고 욥, 이 사람의 인성 품격과 그의 추구도 요해하도록 하자. 지금 성경 중 <욥기> 1장 3절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 이 말은 욥의 지위와 신분이 그 당시에 아주 높았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사람들에게 그가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 그의 가산이 많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 때문인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어쨌든 욥의 지위, 신분은 사람들의 총애를 받은 것인데, 이것은 성경에서 제시한 욥에 대한 사람들의 첫 인상이다. 즉 욥은 온전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며, 그는 거대한 가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존귀한 지위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생활 환경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일상 음식, 생활의 질과 그의 각 방면의 사적인 생활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성경의 다음 경문을 읽어봐야 한다. (욥 1:4~5)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이 경문에는 2가지 일이 기술되었다. 첫 번째 일은 욥의 자녀들이 늘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고, 두 번째 일은 욥이 항상 그의 자녀들을 염려하고 그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걱정했기 때문에 항상 번제를 드린 것이다. 이 2가지 일은 두 부류 사람의 서로 다른 생활 내용의 기술이다. 한가지는 욥의 자녀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생활이 부유해 늘 잔치를 즐기고 생활이 사치스러운 것인데, 그들은 배불리 먹고 마시는 생활에 빠져 풍부한 물질이 가져다준 우월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이 이런 나날을 보냈으므로 늘 죄를 범하고 늘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성결케 하지 않고 이를 위해서 번제도 드리지 않았다. 보다시피, 이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지위가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욥의 자녀들과 관련된 상세한 상황은 결코 우리가 관심을 가질 내용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려는 중점 부분은 욥이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경문에 기술된 다른 한가지 일인데, 이 일은 욥 본인의 인성 실질과 그의 일상생활에 관련된다. 경문에는 욥의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 욥이 거기에 있지 않았고 욥의 자녀들만 항상 함께 먹고 마셨다고 기술되었다. 다시 말하면, 욥은 잔치를 베풀지 않았고 그의 자녀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면서 진탕 먹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비록 부유하여 갖가지 가산을 소유하고 또 많은 노비도 있었지만 그의 생활은 결코 사치스럽지 않았다. 그는 부유함으로 인해 우월한 생활 환경 속에 빠져있지 않았고 부유함으로 인해 육체의 누림을 탐하지 않았으며 부유함으로 인해 번제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더욱이 부유함으로 인해 마음속에서 점차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지도 않았다. 보다시피 욥, 이 사람의 생활은 바르고, 그는 결코 그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탐욕스러워지거나 누림을 좋아하거나 생활의 질을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또한 일함에 겸손하고 처세함에 떠벌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매우 조심하고 신중했으며 늘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을 그리워했고 또한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의 일상생활에서 그는 항상 일찍 일어나 그의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 말하자면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하지 말기를 바란 것이다. 즉 욥의 마음속에서 풍부한 물자(物資)는 결코 그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했고 그의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지위도 대체하지 못했다. 그가 평소에 행하는 것은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든지 아니면 그 자신을 위해서든지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과 관련된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는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실행으로 옮긴 것인데 일상생활의 세부적인 부분에서 표현되었다. 욥의 이런 실제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욥, 이 사람의 성실함을 보게 하고 정의를 좋아하고 긍정적 사물을 좋아하는 욥의 실질을 보게 한다. 그가 늘 ‘그의 자녀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했다’는 뜻은 그가 그의 자녀들의 행위를 동의하지도 않고 칭찬하지도 않았으며 마음속으로 싫어하고 마음속으로 그들의 죄를 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녀들의 행위가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임을 확신했다. 그러므로 그는 늘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와서 죄를 자백하라고 했던 것이다. 욥의 이 행위는 또 우리로 하여금 욥의 인성의 다른 한 면을 보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여태껏 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그 사람들과 동행하지 않았고 그들을 멀리하고 피한 것이다. 설령 이들이 욥의 자녀일지라도 그는 결코 그들과의 혈연관계로 인해 그의 사람됨의 원칙을 버리지 않았고 또한 감정으로 인해 그들의 죄행을 놔두지 않았고 그들에게 죄를 자백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관용을 얻으라고 권유했으며 또한 그들에게 누림을 탐냄으로 인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욥이 사람을 대하는 원칙과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원칙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것을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혐오하였으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일을 행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행하는 사람을 혐오했다. 그의 애증은 그의 일상생활 속에서 표현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중에 보여진 욥의 정직함이다. 물론 이것도 우리가 요해해야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하는 욥의 진실한 인성의 유로와 살아냄에 관한 것이다.

시련 속에서의 욥의 인성 표현 (시련 속에서의 욥의 온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을 요해)

이상 우리가 말한 것은 모두 욥이 시험을 겪기 전에 일상생활에서 표현해낸 인성의 각 방면인데, 욥의 이 각 방면의 표현이 사람에게 욥의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에 대해 초보적인 인식과 요해가 있게 하고 물론 초보적인 확신도 있게 하리라 믿는다. 내가 ‘초보적’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 이 사람의 인성 품격과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에 대한 그의 추구 정도에 대해 아직 확실히 요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에서 요해하게 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욥이 한 이 두 마디의 말에서 욥에 대해 좋은 인상이 조금 있는 것 외에는 결코 더 깊은 요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하나님의 시련을 받을 때 그의 인성의 살아냄이 어떠했는지를 요해하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이래야 욥, 이 사람의 진정한 인성을 각 사람에게 완전하게 보여줄 수 있다.

욥이 가산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목숨을 잃고 종들이 살해당한 이런 소식을 들은 후 욥의 반응은 이러했다. (욥 1: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 말에는 이런 한가지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욥은 이 소식을 들은 후 당황하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으며 소식을 알린 종을 질책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일이 일어난 경위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가서 현장을 검사하거나 사실의 경과를 조사하지도 확인하지도 않았다. 그는 가산을 잃음으로 인해 그 어떤 아쉬움이나 몹시 상심한 표현이 없었고 또한 자녀와 친족들을 잃음으로 인해 눈물을 줄줄 흘리지도 않았고 도리어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했다.’ 욥의 이 거동은 보통 사람의 거동과 달랐고 그의 이 거동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게 했으며 또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욥을 ‘몰인정’하다고 질책하게 했다. 한 사람의 가산이 순식간에 없어졌을 때 정상적인 사람은 몹시 상심하거나 절망에 빠질 것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생각까지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에서 가산은 사람의 일생 동안의 심혈을 뜻하고 사람 생존의 의탁이고 사람이 살아나갈 희망이며 사람에게 가산이 없어지면 사람의 심혈이 물거품이 되었음을 뜻하고 사람이 희망도 없어지고 심지어 미래까지 잃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산을 대하는 정상적인 사람의 태도이고 가산과 한 사람의 밀접한 관계이자 역시 사람 안중의 가산의 사람에게 있어서의 중요성이다. 그러므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이 가산을 대하는 이처럼 냉담한 처리 태도에 대해 모두 이해할 수 없어한다. 오늘 욥의 속마음을 읽음을 통해 절대다수 사람들의 현혹을 풀어보자!

상식적인 이치대로 말하면 하나님이 욥에게 풍부한 가산을 베풀어주었으니 욥은 당연히 가산을 잃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죄송하다고 생각해야 하며, 그가 하나님이 준 가산을 잘 보호하지도 보살피지도 못했고 지켜내지도 못했기 때문에 가산을 빼앗겼다는 것을 들은 후 욥의 첫 반응은 마땅히 현장에 가서 갖가지 물건을 철저히 점검한 다음 하나님의 상을 다시 얻도록 하나님께 죄를 자백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욥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택한 것은 당연히 그의 생각이 있는 것이다. 욥은 그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축복에서 온 것이지 그가 고생해서 얻은 것이 아님을 마음속 깊이 인정했다. 그러므로 그는 얻은 축복을 자본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이 지켜야 할 도를 최선을 다해 지키는 것을 생존의 원칙으로 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히 여겼지 결코 더 많은 축복을 탐내거나 요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가산을 대한 그의 태도였다. 그는 축복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았고 축복이 없거나 축복을 잃음으로 인해 번뇌하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기뻐서 날뛰거나 너무 흥분하여 모든 것을 잊은 것도 아니고 늘 축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도를 소홀히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도 않았다. 욥이 가산을 대한 태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욥, 이 사람의 진실한 인성의 유로를 보게 한다. 첫째, 욥은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며 물질 생활에 대한 그의 요구 표준은 매우 낮은 것이다. 둘째, 욥은 여태껏 하나님이 그의 손에서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갈까봐 걱정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는데,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속에서의 순복의 태도이다. 즉 하나님이 언제 거두어가든 혹은 하나님이 거두어가든 거두어가지 않든 그는 요구가 없었고 원망도 없었으며 이유도 묻지 않고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하기만을 구했다. 셋째, 욥은 여태껏 그의 가산이 자신이 고생해서 얻어온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베풀어준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다. 즉 욥의 신심을 가리킨다. 욥에 대한 이상 3가지 개술을 통해 욥, 이 사람의 인성과 평소의 진실한 추구가 아주 분명하지 않은가? 욥이 가산을 잃었을 때 이처럼 냉정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욥에게 이런 인성이 있고 이런 추구가 있는 것과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의 평소의 추구로 말미암아 그에게 하나님의 시련 속에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이런 말을 할 분량과 믿음이 있게 한 것이다. 그의 이 한마디 말은 일조일석에 얻어온 것이 아니고 그가 갑자기 기발한 생각이 나서 꾸며낸 것도 아니라 그의 다년간의 인생 경력에서 본 것이고 얻어온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만 구하고 오히려 하나님이 거두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원망하는 모든 사람에 비하면 욥의 순복은 아주 실제적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존재만 믿고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 비하면 욥은 아주 성실하고 정직하지 않은가?

욥의 이성(理性)

욥의 실제 경력과 그의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은 욥으로 하여금 가산과 자녀들을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가장 이성적인 선택을 하게 했다. 그의 이런 이성적인 선택은 그의 평소의 추구와 평소에 인식한 하나님의 행사와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욥의 성실은 그로 하여금 만물이 다 여호와의 수중에 주재되고 있음을 믿을 수 있게 했으며, 그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을 인식하게 했으며, 그의 인식은 그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기를 원하게 하고 순복할 수 있게 했으며, 그의 순복은 그로 하여금 더욱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게 했다. 그의 경외는 그로 하여금 더욱더 실제적으로 악에서 떠나게 했다. 나중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되었으며, 그의 온전함은 그에게 지혜가 있게 했고 또한 그를 가장 이성있는 사람이 되게 했다.

‘이성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글자 표면으로 해석하면 바로 이지가 있고 사상이 논리에 부합되고 황당무계하지 않으며 적절한 언행과 판단이 있고 적절하고 규범화된 도덕 표준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욥의 ‘이성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런 간단한 해석이 아니다. 여기에서 욥을 가장 이성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의 인성과 하나님 앞에서의 그의 표현과 관계된다. 욥은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수 있었고 순복할 수도 있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남이 얻지 못한 인식을 얻게 했다. 이런 인식은 그로 하여금 닥친 일을 더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고 정의할 수 있게 했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을 더 정확하게, 더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즉 그의 언어, 행위, 일처리 원칙, 일처리 방침은 매우 규범적이고 매우 명확하고 아주 구체적이지 맹목적이 아니고 충동적이 아니고 감정적이 아니다. 그는 어떤 일이 닥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고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의 관계를 어떻게 균형되게 하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고 있었으며 지켜야 할 도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고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의 베풂과 거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이성’이다. 바로 욥이 이런 이성을 구비했기 때문에 그는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었을 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

욥에게 몸의 극통이 임하고 친구들의 만류가 임하고 죽음이 임했을 때 욥의 실제적 표현은 또 욥, 이 사람의 진실한 면을 각 사람에게 나타냈다.

욥의 근본: 진실하고 순박하고 허위적이지 않다

욥기 2장 7~8절을 보자.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이것은 욥의 몸에 종기가 난 다음 어떻게 표현했는가 하는 한 단락의 묘사이다. 그 시각 욥은 재 가운데 앉아 몸의 아픔을 참고 있었는데, 누구도 그를 치료해주지 않았고 누구도 그를 도와 몸의 아픔을 경감시켜 주지 않았으며 그가 스스로 질그릇 조각으로 종기의 상처 표면을 긁었다. 겉/

으로 보면 이것은 단지 욥이 고통받는 기간의 한 장면에 불과하여 욥, 본인의 인성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욥이 이 기간에 결코 그 어떤 말로도 그때의 심정과 그의 관점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욥의 거동과 그의 표현은 여전히 그의 인성의 진실한 유로이다. 앞의 1장의 기술에서 우리는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라”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2장의 이 장면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이 사람이 뜻밖에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보게 했다. 이 앞뒤의 두 묘사는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는가? 이 대비는 우리로 하여금 욥의 근본적인 모습을 보게 한다. ‘욥은 비록 신분과 지위가 대단했지만 여태껏 그의 신분과 지위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이 그의 신분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마음에 두지 않았고 그의 모든 행위와 표현이 그의 신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것인가의 여부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는 지위의 복을 탐내지 않았고 지위와 신분이 가져다준 후광을 누리지도 않았으며 단지 여호와 하나님 안중에서 그의 가치와 삶의 의의가 무엇인가만 마음에 두었다.’ 욥의 근본적인 모습은 바로 욥, 이 사람의 실질이다. 즉 그는 명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명리를 위해 살지 않았으며 그는 진실하고 순박하고 허위적이지 않았다.

욥은 애증이 분명했다

욥과 아내의 대화에서 욥의 다른 한 방면의 인성을 또 모두에게 보여준다. (욥 2:9~10)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욥의 아내는 욥이 그토록 고통받는 것을 보고 욥에게 권고하여 욥을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하지만 아내의 ‘호의’는 결코 욥의 찬사를 얻지 못하고 도리어 욥을 노하게 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순복을 부인한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도 부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욥이 용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는 것을 전혀 용납하지 않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그가 어찌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에 대해 모욕하는 말을 하는 것을 보고 전혀 무관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아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했다. 욥이 아내를 대한 태도에는 노기와 혐오를 띠고 있었고 질책과 훈계도 띠고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애증이 분명한 그의 인성의 자연적 유로이자 역시 그의 정직한 인성의 진실한 표현이다. 욥은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다. 그의 정의감은 그로 하여금 사악한 기풍과 조류를 혐오하게 했고 황당무계한 논리와 그릇된 주장, 괴상한 논조나 터무니없는 이론을 혐오하고 정죄하고 버리게 했으며 또한 그로 하여금 ‘뭇사람에게 버림받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정확한 원칙과 입장을 꿋꿋이 지키게 했다.

욥의 선함과 진실함

욥의 여러 가지 표현에서 모두 욥, 이 사람의 인성 유로를 볼 수 있다면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이 일에서는 또 욥의 어떤 인성을 볼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내가 교통하려는 다음 화제이다.

앞에서 내가 욥이 무엇 때문에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는가의 근원을 말했는데, 이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는가? 욥이 만약 마음이 강퍅하고 사랑이 없고 냉혹하고 무정하고 인성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함으로 인해 자기의 생일을 혐오할 수 있었겠는가? 다시 말해서 욥이 만약 마음이 강퍅하고 인성이 없다면 그가 하나님의 아픔 때문에 슬퍼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아파하는 것 때문에 자기의 생일을 저주할 수 있었겠는가? 답은 당연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은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었고,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욥은 마음이 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낌으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웠고,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기 때문에 자기의 생일을 혐오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것이다. 외인이 보기에는 시련 속에서의 욥의 모든 표현이 다 사람이 따라배울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단지 욥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한 이 일만은 사람으로 하여금 욥의 온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물음표를 찍거나 서로 다른 평가를 하게 하였다. 사실상, 욥의 이 거동이야말로 욥, 이 사람의 인성 실질의 가장 근본적인 유로인 것이다. 그의 인성 실질에는 숨김이 없고 꾸밈이 없고 사람의 가공도 거치지 않았다. 그의 이 거동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마음 깊은 곳의 선함과 진실함을 보게 했는데, 그는 맑은 샘물처럼 바닥까지 보이고 순수하고 투명하다.

욥, 본인의 여러 방면을 요해한 다음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 이 사람의 인성 실질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있는 동시에 하나님이 말씀한 ‘온전함과 정직함’에 대해서도 깊고 진일보하고 실제적인 요해와 터득이 있으리라 믿는다. 이런 요해와 터득이 사람을 도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들어서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겨준 것과 하나님의 역사 취지와의 관계

비록 지금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온전함과 정직함을 인가하고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는 것도 인가하지만 사람이 결코 욥에 대한 인가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더 요해하게 된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욥, 본인의 인성과 추구를 부러워하는 동시에 하나님께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욥이 이처럼 온전하고 정직하며 이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좋아하고 사모하게 하는데,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그렇게 많은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까?” 이와 비슷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다 존재하리라 믿는다. 다시 말해서 이 의문은 다수 사람들의 마음속의 문제이다. 이 문제가 다수의 사람들을 모두 곤혹스럽게 하는 이상, 우리는 이 문제를 내놓고 명확히 해석하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하나님이 하는 매사는 다 매우 필요하고 또한 다 비범한 의의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 몸에 하는 것은 다 그의 경영에 관련되고 인류가 구원받는 데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물론 욥이 하나님 안중의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이 욥의 몸에 한 사역도 예외가 아니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어떤 것을 대가로 하든지, 어떤 것을 목표로 하든지 그가 하는 일의 취지는 불변하다는 것이다. 이 취지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요구,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사람 안에 만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여기는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다 하나님의 절차에 따라 사람 안에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실질을 깨닫고 요해하게 하며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게 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데에 달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는 일의 한 방면의 취지이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사탄이 하나님 역사 중의 안받침물이고 효력품이기 때문에 사람은 늘 사탄에게 넘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사탄의 시험과 공격에서 사탄의 사악함, 추함, 비열함을 보게 하고, 이로써 사탄을 혐오하고 부정적 사물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고 어느 정도 분별이 있게 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사탄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참소와 방해와 공격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순복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에 의해 완전히 사탄의 공격을 이겨내고 사탄의 참소를 이겨내는 데에 도달하면 사람은 철저히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구출될 수 있다. 사람이 구출될 수 있는 것은 사탄이 실패를 선고함을 뜻하고 그 사람이 더는 사탄의 먹잇감이 아니고 더는 사탄이 삼키려는 대상이 아니라 사탄이 포기한 대상임을 뜻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정직하고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있고 순복이 있고 경외가 있으며 사탄과 철저히 결렬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사탄을 간담이 서늘케 하고 또한 사탄을 철저히 실패하게 한다. 하나님을 따르는 그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경외가 사탄을 물리쳐 사탄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철저히 손을 떼게 하는데,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 얻은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최종 목표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각 사람마다 만약 구원을 받으려면, 만약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지려면 반드시 사탄에게서 오는 크고 작은 시험과 공격에 직면해야 한다. 여기에서 걸어나와 완전히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여러 번 하나님의 시련을 겪고 사탄의 무수한 시험과 공격을 겪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를 깨닫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고 사탄의 시험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성실하고 선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고 이성이 있어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보애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사탄의 매임과 엿봄, 참소, 참해가 없으며 완전히 자유를 얻은 사람이고 완전히 해방과 해탈을 얻은 사람이다. 욥이 바로 이런 자유인이었는데, 이것도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욥을 사탄에게 넘겨주려 하였는가 하는 의의가 있는 부분이다.

욥이 비록 직접 사탄의 참해를 겪었지만 그는 영원한 자유와 해방을 얻었고, 영원히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고 사탄의 참해와 참소를 받지 않고 아무런 근심 걱정도 우려도 없이 하나님의 얼굴빛 속에서 살 수 있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 수 있는 그런 권리를 얻었다. 이 권리는 누구도 박탈할 수 없고 누구도 파괴할 수 없고 누구도 차지할 수 없다. 이 권리는 욥이 스스로 자신의 믿음과 의지력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경외에 의해 바꿔온 것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대가로 땅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하나의 진정한 피조물로서 땅에서 당연하게 조물주를 경배하는 아무런 방해도 없는 자격과 권리를 얻었는데, 이것도 욥이 시험을 겪은 후의 최대의 성과이다.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사람의 생활은 늘 사탄에게 방해받고 심지어 사탄에게 통제받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사탄에게 구금된 사람이고 자유가 없는 사람이며 사탄의 손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자격과 권리가 없는 사람이며 사탄에게 끊임없이 뒤쫓기고 가차없이 맹타당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행복이라고는 말할 여지가 없고 정상적인 생존 자격이라고는 말할 여지가 없으며 존엄이라고는 더욱 말할 여지도 없다. 사람이 혼자 나서서 사탄과 싸우고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무기로 하여 사탄과 결사전을 벌이고 철저히 사탄을 물리쳐 사탄으로 하여금 너를 보기만 하면 피하게 하고 너를 보기만 하면 간담이 서늘케 해야만 사탄이 철저히 너에 대한 공격과 참소를 포기할 것이다. 그때면 너는 구출되어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만일 너에게 사탄과 철저히 결렬할 결심만 있고 사탄을 물리칠 유리한 무기를 갖추지 못했다면 너의 처지는 여전히 매우 위험하다. 이렇게 오래 나가다가 네가 사탄에게 시달려 기진맥진해도 여전히 간증을 해낼 수 없고 여전히 너에 대한 사탄의 참소와 공격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면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아주 막연하다. 최종에 즉 하나님의 사역이 끝났음을 선포할 때에도 네가 여전히 사탄에게 단단히 붙잡혀 벗어날 수 없다면 너는 영원히 기회와 희망이 없다. 그 뜻은 바로 이런 사람은 완전히 사탄에게 노략당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검증을 받아들이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전인(全人)을 얻게 하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장기적인 공급과 부축의 사역 기간에 하나님은 그의 뜻과 그의 요구를 일일이 사람에게 알려주고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도 사람에게 나타내 보여주는데, 목적은 사람에게 분량을 장비하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르는 기간에 하나님에게서 각 방면의 진리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진리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사탄과 싸울 예리한 무기인데, 사람에게 이런 장비가 있게 되면 하나님의 검증에 직면할 것이다. 하나님의 검증에는 여러 가지 방식과 여러 가지 경로가 있지만 매 하나의 경로와 방식은 다 하나님의 원수━사탄으로 하여금 ‘협력’하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탄과 싸울 예리한 무기를 준 후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주어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의 분량을 ‘검증’하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사탄이 배치한 진영에서 빠져나오고 사탄의 포위 공격에서 살아서 빠져나온다면 이번 검증을 통과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사탄의 진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탄에게 항복한다면 사람은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어떤 방면을 검증하든지 검증하는 표준은 바로 사람이 사탄의 공격 하에 간증을 굳게 섰는가의 여부와 사탄의 올무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무기를 던지고 투항하여 사탄에게 귀순했는가의 여부이다. 가히 말해서,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사람이 사탄을 이기고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렸고, 사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의 여부는 사람이 하나님이 준 무기를 갖고 독립적으로 사탄의 결박을 이겨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에 대해 철저히 단념하고 포기하게 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달렸다. 한 사람에 대한 사탄의 단념과 포기는 사탄이 더는 하나님과 이 사람을 쟁탈하지 않고 더는 이 사람을 참소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며 더는 이 사람을 제멋대로 학대하거나 공격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사람이라야 진정 하나님께 얻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얻는 전 과정이다.

욥의 간증이 후세 사람에게 주는 경고와 계시

사람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완전히 얻는 전 과정을 깨달은 동시에 또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겨준 목적과 의의도 요해하게 되었다. 욥이 받은 고난에 대해 사람은 더는 연연하지 않고 욥이 고통받은 의의에 대해서도 아주 새로운 터득이 있게 되었다. 사람은 더는 자신에게 욥과 같은 시험이 닥칠까봐 걱정하지 않고 더는 하나님의 시련이 임해도 저촉하거나 항거하지 않는다. 욥의 믿음과 순복, 사탄을 이긴 욥의 간증은 사람들에게 더없이 큰 도움과 격려를 주었다. 욥의 몸에서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을 희망을 보았고, 사람이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경외에 의하면 완전히 사탄을 물리치고 사탄을 이길 수 있음을 보았으며,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할 수만 있으면, 사람이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을 결심과 믿음만 있으면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실패하게 할 수 있음을 보았고, 사람에게 목숨을 버릴지언정 간증을 굳게 설 결심과 의지력만 있으면 사탄이 말만 들어도 겁을 내고 황급히 물러선다는 것을 보았다. 욥의 간증은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의 경고를 주었는데, 이 경고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만약 사탄을 이기지 못하면 영원히 사탄의 참소와 방해에서 벗어날 수 없고 영원히 사탄의 공격과 참해에서도 벗어날 수 없음을 경계하고 있다. 욥의 간증은 또 후세 사람들에게 하나의 계시를 주었는데, 이 계시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이 온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음을 깨닫게 했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만 하나님을 위해 굳세고 드높은 간증을 할 수 있음을 깨닫게 했으며,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굳세고 드높은 간증을 해야만 영원히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에서 살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진정 구원받은 것임을 깨닫게 했다. 욥, 이 사람의 인성 품격과 인생의 추구는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각 사람마다 본받아야 할 것이며, 그의 평생의 살아냄과 시련 속에서의 그의 표현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추구하는 각 사람의 귀중한 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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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안받침물: 한 사물을 통해 다른 사물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

②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