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 (속편)

목차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1

하나님의 성품을 요해하려면, 하나님 자신을 요해하려면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떤 일의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먼저 나는 성경에서 일부 장절을 찾았는데, 다음의 이런 자료들이 바로 성경에서 발췌한 장절이다. 이런 장절들은 다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이 주제에 관련되는데, 너희들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을 알아가는 데의 참고 자료로 하도록 특별히 찾아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이런 장절을 내놓고 하나님이 이전에 했던 사역에서 어떤 성품들을 유로하였는지, 하나님의 어떤 실질이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았는지를 함께 나눠보자. 이런 장절들은 비록 이전의 것이지만 우리가 교통하려는 화제는 새로운 내용이고 사람에게 없는 것이고 사람이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다. 아마 일부 사람들은 불가사의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아담, 하와도 내놓고 노아도 내놓는데, 이는 또 옛날로 되돌아가는 게 아닌가?’ 너희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이런 성경 장절은 오늘 교통할 화제에 대해 아주 유익한 점이 있는데, 그것을 오늘 교통할 이 화제의 교재나 기초 자료로 할 수 있다. 내가 교통을 다 끝마치면 너희는 내가 이런 장절을 택한 용의(用意)를 알게 될 것이다. 전에 성경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마 이 몇 단락 말씀을 보았겠지만 정말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 먼저 대략적으로 본 다음 다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교통해보자.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선조이다. 만약 성경 속의 인물을 언급한다면 우선 이 두 사람을 말해야 한다. 그다음은 노아인데, 그는 인류의 두 번째 선조이다. 보았는가? 세 번째 인물은 누구인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다들 알고 있겠지? 아마 일부 사람들은 알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네 번째 인물은? 소돔을 멸한 이야기 속에서 누구를 언급했는가? (롯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롯을 언급하지 않고 누구를 언급했는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 이야기에서 주로 여호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했는지에 대해 언급했는데, 이것을 보았는가? 다섯 번째 인물은 누구인가? (욥입니다.) 하나님의 이 단계 역사에서 하나님이 욥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언급하지 않았는가? 그럼 너희는 이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가? 너희가 많은 관심을 가졌다면 너희는 성경 속의 욥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읽어본 적이 있는가? 욥이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고 있는가? 가장 많게는 몇 번 읽어보았는가? 자주 읽는가? 홍콩의 자매가 말해봐라. (은혜시대 때에 한두 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는 더 읽어보지 않았는가? 그럼, 아주 아쉽구나!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이 단계 역사에서 하나님이 여러 번 욥을 언급하였는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그 속에 있다. 그러나 ‘여러 번 언급’했어도 너희의 주의를 끌지 못했는데, 이는 하나의 사실을 증명한다. 즉 너희는 착한 사람이 되는 데에 대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는 데에 대해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너희는 하나님이 언급한 욥의 이야기에 대해 대략 알고 있는 데에만 만족하고 이야기 자체를 요해하는 데에만 만족할 뿐 욥, 이 사람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과 하나님이 여러 번 욥을 언급한 용의(用意)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요해하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칭찬하는 이런 사람에 대해서도 너희가 관심이 없는데, 그럼 너희는 도대체 무엇을 중요시하는가? 하나님이 언급한 이렇게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도 너희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요해하려고 하지 않는데,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이겠는가? 이것은 슬픈 일이 아닌가? 다수 사람들이 모두 실제적인 것에 힘쓰지 않고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는가, 없는가? 네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칭찬한 사람에 대해, 하나님이 언급한 인물과 이야기에 대해 충분히 중시할 것이다. 네가 닿을 수 있든지 없든지, 더듬을 수 있든지 없든지 너는 즉시 읽어보고 요해할 것이다. 그런 다음 방법을 생각해 본받을 것이고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힘껏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표현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너희들 중 다수의 사람들이 뜻밖에도 욥의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없다니, 이것은 아주 문제가 된다.

우리가 방금 말한 화제로 돌아오자. 구약 율법시대에 관한 이 경문에서 나는 주로 일부 인물들의 이야기를 발췌했다. 이런 이야기는 성경을 읽어본 대다수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야기이다. 그중의 인물은 아주 대표성을 띠고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읽은 후에 하나님이 그들 몸에 한 사역과 그들에게 한 말씀은 지금의 사람들이 더듬을 수도 있고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느끼게 할 수 있다. 네가 이런 이야기를 볼 때, 이런 성경 기록을 볼 때 하나님이 당시에 어떻게 역사했는지, 어떻게 사람을 대했는지를 더욱 요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오늘 이런 장절을 찾은 목적은 너에게 이런 이야기들과 그중의 인물을 요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인물의 이야기에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고 요해하도록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하려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실한 면을 보게 하여 너의 상상을 멈추고 하나님에 대한 너의 관념을 멈추고 하나님에 대한 너의 막연한 가운데의 신앙도 멈추게 하려는 것이다. 너에게 근거없이 하나님의 성품을 요해하고 하나님 자신을 요해하고 알아가라고 하면 너는 늘 무력함을 느끼고 어찌할 방법이 없고 손댈 길이 없음을 느끼기 때문에 나는 이런 방법을 생각해냈는데, 이런 방식과 경로를 통해 사람에게 더욱더 하나님을 요해하고 더욱더 진실하게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게 하려 하며 사람에게 진실하게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게 하려 하고 사람에게 진실하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하려 한다. 이것은 너희에 대해 유익한 점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럼 너희가 지금 이런 이야기와 이런 경문을 다시 보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내가 선택한 이런 경문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여기는가? 나는 방금 너희에게 알려준 것을 다시 강조해야겠다. 너희에게 이런 인물의 이야기를 보게 하는 목적은 너희에게 하나님이 사람 몸에 어떻게 역사한 것인지를 요해하게 하고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요해하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통해 요해하게 하는가? 하나님이 전에 했던 사역을 통해 또 하나님이 지금 하고 있는 사역과 결부시켜 하나님의 세부적인 부분을 요해하게 하는데, 이런 세부적인 부분은 진실한 것이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하고 요해해야 할 바이다.

우선, ‘아담, 하와’에 관한 일부터 얘기하자. 먼저 경문을 읽어보자.

첫째, 아담과 하와

1.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

(창 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 이 경문에서 너희는 뭔가 알아들었는가? 이 경문은 너희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가? 무엇 때문에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 이 경문을 발췌했겠는가? 너희 각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아담에 관한 그림이 있는가? 한번 상상해봐도 좋다. 너희가 직접 체험한다고 할 때 너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한 분의 하나님인가? 이 그림은 너희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가? 이것은 감동적이면서도 따스한 그림이다. 그림 속에 비록 하나님과 사람만 있지만 이 양자의 친밀한 관계는 그토록 사람을 부러워하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득하여 사람에게 값없이 베풀어주고 사람을 둘러싸고 있으며, 사람은 순진무구하고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이 하나님의 눈 아래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걱정하고 사람은 또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살고 있다. 사람이 한 것, 사람의 일언일행은 다 하나님과 밀접히 관련되어 갈라놓을 수 없다.

가히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이래 사람에 대한 첫 번째 부탁이다. 이 부탁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고 인류에 대한 그의 염려도 들어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첫 번째 부탁이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염려이다. 즉,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한 그 순간부터 인류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 그의 책임은 무엇인가? 그는 사람을 보호하려 하였고 사람을 보살피려 하였다. 그는 사람이 그의 말씀을 믿을 수 있고 따를 수도 있기를 바랐는데, 이것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첫 번째 기대이다. 이런 기대가 있게 된 동시에 하나님이 비로소 이런 말씀을 한 것이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간단한 이 한마디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대표하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미 사람을 걱정하기 시작했음을 유로하고 있다. 만물 중에서 아담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고 아담만이 하나님의 생기가 있는 생물이고 그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이다. 이 부탁에는 사람이 해도 되는 것이 있고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였다.

이 몇 마디 간단한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았는데, 하나님의 어떤 마음을 보았는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 걱정이 있는가, 없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걱정은 이 경문에서 사람에게 느낄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이 확실히 더듬게 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을 통해 너희가 느끼기에 이 몇 마디 말씀이 간단한가, 간단하지 않은가? 간단하지 않겠지? 그럼 전에는 너희가 볼 수 있었는가? 만약 하나님이 친히 너에게 이런 말씀을 몇 마디 한다면 너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느끼겠는가? 네가 만약 인성이 없는 사람이라면 너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디찰 것이고 너는 어떠한 느낌도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네가 만약 양심있고 인성있는 사람이라면 너의 느낌은 다를 것이다. 너는 따스함을 느낄 것이고 걱정과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것이며 행복하다고도 느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네가 이런 것을 느끼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해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에 대해 마음속에 공경과 사랑이 생기지 않겠는가? 너의 마음이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겠는가? 보다시피,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 대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더욱더 중요하다! 사실상, 하나님의 이 단계 역사에서 하나님이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한 것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지금의 사람을 놓고 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너희는 내가 방금 말한 하나님의 뜻을 느낄 수 있는가? 이렇게 구체적이고 진실하고 현실적인 하나님의 뜻도 너희는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과 요해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 아닌가? 이 단락 말씀은 이만큼 교통하자.

2. 하나님이 하와를 만듦

(창 2:18~20)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창 2:22~23)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하나님이 하와를 만듦’, 이 경문에는 몇 마디 관건적인 말씀이 있는데, 거기에 밑줄을 그어라. “그 사람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이 각 생물에게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누구인가? 아담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이 말씀에서 사람에게 하나의 사실을 알려주는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사람에게 지혜를 주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데, 이것은 확실한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이 아담을 만든 후 아담이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가? 글을 아는가? 하나님이 각종 생물을 창조한 후 그가 이 각종 생물들을 보고서 알았는가? 하나님이 그에게 그것들을 뭐라고 부르라고 알려주었는가? 물론 하나님이 그에게 각종 생물들에게 어떻게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지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럼 그가 이런 생물들에게 어떻게 이름을 지어줘야 하는지, 어떤 이름으로 지어야 하는지를 어떻게 알았는가? 이것은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무엇을 더해주었는지, 이런 문제에 관련된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더해주었다. 이것이 관건적 부분인데, 너희는 다 알아들어야 한다! 또 하나의 관건적인 부분이 있는데, 너희가 알아야 할 바이다. 즉 아담이 그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후 그 생물들의 이름은 하나님 편에서 확정된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가? 여기에 또 하나님의 성품이 있는데, 반드시 설명해야겠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고 사람에게 생기를 주고 사람에게 그의 얼마간의 지혜와 능력과 소유소시도 주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런 것을 준 후 사람은 독립적으로 얼마간의 일을 할 수 있었고 독립적으로 얼마간의 일을 생각할 수 있었다. 만약 사람이 생각해낸 것과 사람이 해낸 것이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이라면 하나님은 열납하고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 사람이 한 것이 옳은 일이면 하나님은 이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고 한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각종 생물들의 이름을 하나님은 그 어떤 정정도 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아담이 뭐라고 부르면 하나님이 “그래”라고 말씀하면서 그것을 뭐라고 부를지를 확정하였다. 하나님께 의견이 있었는가? 없었다. 이것은 틀림없다! 너희는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혜를 주었고, 사람은 하나님이 준 지혜로 일을 했다. 만약 하나님이 보기에 사람이 한 것이 긍정적인 일이라면 이 일은 하나님 편에서는 확정된 것이고 인정된 것이고 열납된 것이니 하나님은 결코 그 어떤 평가나 비판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 어떤 인류나 그 어떤 사탄 악령도 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 성품의 유로를 보았는가? 만약 사람이라면, 패괴된 사람이나 사탄이라면 다른 사람이 자기의 눈앞에서 자신을 대신해 일을 하도록 허락하겠는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 혹은 그와 다른 세력에게서 이 지위를 쟁탈하지 않겠는가? 꼭 쟁탈할 것이다! 그때 만약 패괴된 사람이나 사탄이 아담과 함께 있었다면 틀림없이 아담이 한 것을 부인했을 것이다. 그에게 독립적인 사고 능력이 있고 독특한 견해가 있음을 실증하기 위해 그는 아담이 한 모든 것을 부정했을 것이다. “네가 이것이라고 부르면 나는 기어코 그것이라고 부를 것이다. 네가 장삼(張三)이라고 하면 나는 기어코 이사(李四)라고 불러 나의 뛰어남을 보일 것이다.” 이것은 무슨 본성인가? 오만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런 성품이 있는가? 하나님은 아담이 한 그 일에 대해 그 어떤 비정상적이고 반대적인 행동이 있었는가? 확실히 말해서 없었다! 하나님 성품의 유로에는 분쟁이나 오만과 독선적인 것이 조금도 없는데, 이 점은 여기서 아주 분명히 표현되었다. 비록 아주 작은 일이지만 네가 만약 하나님의 실질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네가 마음속으로 만약 하나님이 어떻게 하였는지,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없고 하나님 성품의 발표와 유로를 볼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럼 내가 방금 해석한 이런 것을 너희는 인정하는가? 하나님이 비록 아담이 한 이런 일에 대해 “네가 잘했구나, 제대로 했다, 내가 찬성한다!”라고 기세당당하게 말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 마음속에서는 인가한 것이다. 그는 아담이 한 일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칭찬하였다. 이것은 창세 이래 인류가 하나님의 분부대로 하나님을 위해 한 첫 번째 일인데, 이 일은 하나님을 대신해 한 것이자 하나님을 대표해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안중에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준 지혜에서 온 것이고 하나님이 보기에 그것은 좋은 것이고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때 아담이 한 것은 인류 몸에서의 하나님 지혜의 첫 번째 창현(彰顯)인데, 그때 창현은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너희에게 알려주고 싶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부분 소유소시와 지혜를 사람에게 더해준 까닭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창현하는 생물이 될 수 있게 하고 이런 생물로 하여금 그를 대표해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인데, 바로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바란 것이다.

3. (창 3:20~21)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세 번째 단락을 보자. 여기서 아담이 하와에게 지어준 이름은 의의있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은가? 이는 아담이 피조된 후 생각이 있는 사람이고 그가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가 무엇을 알고 얼마를 아는지에 관해 지금 연구하지 않고 토론하지도 않겠다. 이런 것은 내가 말하려는 세 번째 단락 경문의 중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단락 경문의 중점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는 이 경문을 보자. 만약 오늘에 내놓고 교통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아마 평생 이 말 속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먼저 너희에게 힌트를 좀 줄 테니, 너희의 상상을 펼쳐도 좋다. 에덴 동산을 상상해보라. 아담, 하와가 그 속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찾아가니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숨어버렸다. 하나님이 그들이 보이지 않아 부르니 그들은 “우리가 벌거벗었으므로 당신을 만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감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원문은 이러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무엇으로 옷을 지어주었는지 알겠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혔는데, 말하자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지어준 이 옷은 가죽옷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지은 첫 번째 옷이다. 가죽옷은 지금 놓고 말하면 고급 옷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입을 수 있는 옷은 아니다. 만약 누군가 너에게 “인류의 선조가 입은 최초의 옷이 무슨 옷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너는 “가죽옷입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이 가죽옷은 누가 만들어줬습니까?” 너는 다시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 된다. 중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데, 이 옷은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할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내가 방금 이렇게 묘사하니 너희의 머릿속에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르는가? 하나의 대략적인 윤곽은 있을 것이다! 오늘 이 말을 하는 목적은 너희에게 인류가 입은 최초의 옷이 어떤 옷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 말의 중점이 어디에 있는가? 중점은 가죽옷에 있지 않다. 내가 말하려는 중점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할 때 유로한 성품과 소유소시를 사람이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이 그림에서 우리가 본 하나님은 어떤 신분으로 아담, 하와와 함께 있었는가? 오직 둘만의 세상에서 하나님은 어떤 신분으로 나타났는가? 하나님의 신분으로 나타났는가? 홍콩의 형제자매들이 대답해봐라.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한국의 형제자매들은 하나님이 어떤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생각하는가? (가장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타이완의 형제자매들이 말해봐라. (아담, 하와의 일가족의 신분, 친족의 신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담, 하와의 친족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가장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며, 또 어떤 사람은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났다고 말하는데, 이런 것은 다 아주 타당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이 두 사람을 만든 후 그들을 동반자로 삼고 그들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그들의 생활을 보살펴주고 그들의 의식주행도 보살펴주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담, 하와의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한 이 일에서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높고 큼이 보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지고지상함도 보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신비함도 보이지 않았고 더욱이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도 보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낮춤, 자애만 보였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 책임과 보호만 보였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대한 태도와 방식은 마치 사람의 부모가 자기 자녀를 걱정하는 것처럼, 또 인류의 부모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처럼 실제적이어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높은 지위로 행세한 것이 아니라 친히 가죽으로 인류에게 옷을 지어 입힌 것이다. 이 가죽옷이 부끄러움을 가리는 것이든, 추위를 막는 것이든, 어쨌든 하나님이 친히 만들고 손수 이 일을 한 것이지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하나님이 생각으로 또는 표적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옷을 지어 사람의 몸을 가려준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으로 인류가 하나님이 할 리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여기는 일을 한 것이다. 이 일은 비록 간단하고 심지어 사람이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을 따르고 전에 하나님에 대해 막연한 상상으로 가득찬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실함과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게 하였고 하나님의 신실함과 낮춤도 보게 하였다. 스스로 높다고 여기며 거만을 부리는 그 오만한 따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실함과 낮춤 앞에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들의 높이 쳐든 머리를 숙이게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진실함과 하나님의 낮춤은 더욱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게 했다. 그것과 비해 사람 마음속의 ‘높고 큰’ 하나님, ‘사랑스러운’ 하나님, ‘무소불능한’ 하나님은 오히려 그토록 미소하고 추하고 취약하게 되었다. 네가 이 말을 보았을 때, 이 일을 들었을 때 너는 하나님이 이런 일을 했다 하여 하나님을 경시할 수 있는가? 일부 사람들은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부 사람들은 전혀 반대이다. 그는 하나님이 진실한 분이고 사랑스러운 분이라고 여기는데, 바로 하나님의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이 그를 감동시킨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진실한 면을 볼수록 하나님 사랑의 진실된 존재를 느끼고 사람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가치를 느끼고 하나님이 시시각각 사람의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까지 말하고, 우리는 마땅히 현재와 연결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시초에 그가 만든 사람을 위해 이렇게 아주 작은 일, 심지어 일부 사람들이 지금까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나 예상치 못한 일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럼 하나님은 이런 일을 지금의 사람 몸에 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어떤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데,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하나님의 실질은 꾸며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도 꾸며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실질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지 외인(外人)이 더해준 것이 아니고 더욱이 시간, 지점, 시대의 변화로 인하여 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는 사람이 보기에 하잘것없는 일에서, 미소하다고 여기는 일에서, 심지어 사람이 하나님이 전혀 할 리가 없다고 여기는 한가지 아주 작은 일에서라야 진정 하나님의 진실함과 사랑스러움을 체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위선적이 아니고, 그의 성품과 실질에는 과장이 없고 가장이 없고 거만이 없고 오만이 없다. 그는 큰소리친 적이 없으며 그가 창조한 사람을 신실하고 진실한 태도로 아끼고 걱정하고 보살피고 인도하고 있다. 사람이 얼마나 체험할 수 있든지, 사람이 얼마나 느낄 수 있든지, 사람이 얼마나 볼 수 있든지, 하나님은 확실히 이런 일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런 실질을 요해하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사랑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경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가? 나는 네가 하나님의 진실한 면을 요해하게 될 때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고 더욱 진실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 질투와 의심도 가지지 말고 마음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묵묵히 매 한가지 일을 하고 있다. 그는 그의 진실함과 신실함, 그의 사랑으로써 묵묵히 모든 것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한 이 모든 것에 대해 여태껏 어떠한 고려나 후회도 없었고 여태껏 사람이 그에게 무엇을 보답하는 것도 필요치 않았으며 사람 몸에서 무엇을 받아내려고 바란 적도 없었다. 그가 이 모든 것을 하는 유일한 목적은 바로 그에 대한 사람의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얻으려는 것이다. 첫 번째 화제는 여기까지 얘기하자!

이런 화제는 너희에게 도움이 되는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많은 요해와 인식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교통하여 사람에게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체득할 수 있게 하고 당시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느낌과 의의를 느낄 수 있게 하며 당시의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본 후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더욱 느낀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하나님의 존재가 공허하지 않고 막연하지 않음을 느꼈는가? 이런 느낌이 있은 후 사람은 하나님이 곧 사람 곁에 있음을 느낄 수 있는가, 없는가? 혹시 너희는 지금 느낌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을 것이고 아마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너희의 마음속에 진실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을 때, 진실한 인식이 있을 때 하나님이 곧 너의 곁에 있음을 느낄 것이다. 단지 너의 마음이 여태껏 진실로 하나님을 받아들인 적이 없었을 뿐이다. 이것은 진실한 것이다!

이런 교통 방식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따라올 수 있는가? 너희는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화제를 교통하면 마음이 아주 무겁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너희의 느낌은 어떤가? (좋습니다. 흥분됩니다.) 어디가 좋은가? 왜 흥분되는가? (에덴 동산으로 돌아오고 하나님 곁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이 화제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사실상 아주 생소한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평소에 상상한 것, 책에서 본 것, 또는 교통에서 들은 것을 너는 늘 소경이 코끼리 만지는 것처럼 그저 손으로 더듬기만 했을 뿐 사실상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손으로 더듬는 것’은 너에게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본 윤곽을 전혀 줄 수 없고 더욱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분명한 개념도 줄 수 없으며 오히려 너에게 더 많은 상상을 가져다주어 하나님의 성품이란 무엇인지, 하나님의 실질이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상상해낸 불확실한 이런 요소들이 너의 마음속에 늘 많은 의심이 생기게 한다. 네가 확정할 수 없지만 또 요해하고 싶어하는 일에서, 너의 마음속에 늘 모순이 생기고 늘 충돌이 생기며 심지어 어떤 때는 방해가 되어 너로 하여금 어찌할 바를 모르게 한다. 네가 하나님을 추구하고 싶어하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고 그를 분명히 보고 싶어할 때에도 오히려 도무지 답을 얻지 못한다면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고통스러운 일이 아닌가? 물론, 이 말은 단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추구하고 싶어하고 하나님을 만족케 하기를 추구하고 싶어하는 그 사람들을 겨냥해 말한 것이다. 이런 일에 전혀 아랑곳하지도 않는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실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실과 하나님의 존재가 가장 좋기는 하나의 전설이나 몽상이기를 바라는데 이러면 그들이 제멋대로 할 수 있고 세상에 자기보다 큰 자가 없다고 뽐내고 유아독존할 수 있으며 악을 행해도 그 어떤 결과를 고려할 필요가 없고 징벌받을 필요가 없으며 어떠한 책임도 질 필요가 없고 심지어 하나님이 말씀한 악인에 대한 그런 논법이 그들의 몸에서 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요해하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요해하기를 귀찮아하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일을 요해하기를 귀찮아하면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적대되는 자들이고 도태될 일부분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