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가지 방면의 패괴 성품을 알아야 진실로 자신을 아는 것이다 (제 3 부)
여섯 번째 패괴 성품은 사람에게도 익숙할 텐데, 바로 사악함이다. 먼저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해 보자.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할 때 사악한 성품을 표출한다. 그는 원칙에 따라 전하지 않으며, 누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인성이 훌륭한 사람인지도 모른 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 자기가 좋아하거나 마음이 맞는 이성에게만 전도한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잘 안 맞는 사람에게는 전도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가 복음 전파 원칙에 부합하는지 상관하지 않고 본인이 관심 있는 상대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남들이 그 상대는 복음 전파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알려 줘도 기어코 전도하려 했다. 그의 행동을 지배한 건 그의 내면에 있는 한 가지 성품으로, 그 성품은 그가 복음 전파를 명목으로 자신의 삿된 감정과 사욕을 채우고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게 했다. 이것은 영락없는 사악한 성품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그렇게 하면 하나님에게 죄를 짓고 행정 법령을 거스른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손을 떼지 않는다. 이것이 한 가지 성품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는 사악한 성품에 해당하는 모습 중 하나다. 하지만 삿된 감정과 사욕을 드러내는 내적 상태만을 사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육적인 정욕에만 초점을 두면 사악함의 범위가 너무 좁다. 사악한 성품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한 가지 성품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행동 방식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내적 상태와 모습, 표출이 포함된다. 그래야 비로소 성품으로 규정할 수 있다. (세상의 흐름을 따르며 그것에 관련된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악한 흐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하나이다.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꽉 붙든 채 집착하고,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열심히 좇는 것이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하고 책망과 훈계를 해도 그런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거나 심지어 미련의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것이 사악함이다. 그렇다면 사악한 흐름을 따를 때 나타나는 어떤 모습들이 그 사람의 성품이 사악하다는 것을 뜻하겠느냐? 그는 어째서 그런 것들을 좋아하겠느냐? 세상의 사악한 흐름 중 어떤 것들이 그의 마음과 요구, 기호와 욕망을 채워 주겠느냐? 예를 들어, 그가 영화배우를 좋아한다고 해 보자. 그럼 그는 그 배우의 어떤 점에 빠져들어서 좇게 되었겠느냐? 그런 사람들의 기풍, 분위기, 외모, 명성, 또 자신이 동경하는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진 것이다. 그가 좇는 것들은 전부 사악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과 서로 배치되고, 하나님의 요구와도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리이다. 그 스타와 배우들, 그들의 생활, 스타일, 나아가 사람들이 숭배하는 그들의 외적인 분위기와 차림새 등을 분석해 보아라. 그들은 왜 그런 생활을 하겠느냐?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개인 메이크업 아티스트, 코디네이터를 이용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들이 스스로를 그런 이미지로 보이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사람들을 유혹하고 미혹해서 따르게 만들고, 거기서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명성을 숭배하든, 외모나 생활을 숭배하든 전부 어리석고 황당한 행동에 불과하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어떻게 마귀를 숭배할 수 있겠느냐? 마귀는 하나같이 사람을 미혹하고 속이고 해하는 존재다. 마귀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진리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전부 사탄을 추종한다. 그들이 마귀 사탄을 따르는 목적은 무엇이냐? 마귀를 모방하고 본받아서 언젠가 자기도 마귀가 되고, 마귀나 스타들처럼 예뻐지고 섹시해지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느낌을 즐기길 좋아한다. 어떤 스타를 숭배하든, 어떤 유명 인사나 위인을 숭배하든 결국 그 목적은 하나다. 즉, 사람들을 미혹하고 유혹해서 자기를 숭배하고 추종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사악한 성품 아니겠느냐? 이게 바로 사악한 성품으로,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
사악한 성품에는 또 하나의 모습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 집에서는 예배드릴 때 늘 하나님 말씀을 읽고, 진리를 교제하고, 자신을 인식하는 얘기를 하며, 본분을 잘 이행하고 원칙대로 일하는 법,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법,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법 등 온갖 진리를 교제한다. 그렇게 몇 년을 듣다가 점점 싫증이 난 그는 불평을 해 댔다. “하나님을 믿는 건 복을 받기 위해서 아닌가요? 왜 맨날 끝도 없이 진리만 얘기하고, 하나님의 말씀만 교제하는 겁니까? 정말 지겹다고요!” 하지만 그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건 참 따분하고 재미없는 일이야. 어떻게 해야 재미있을까? 재미나는 일을 좀 찾아보자.’ 그래서 그는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녔다. “교회에 신자가 몇 명쯤 되나요? 리더 일꾼은 전부 몇 명인가요? 교체된 사람은 얼마나 되고요? 젊은 대학생, 대학원생은 몇 명이죠? 이걸 아는 사람 없나요?” 그는 이런 일이나 정보를 진리처럼 대했다. 이건 어떤 성품이냐? 이것을 사악함이라 하며, 쉽게 말해 비정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무리 많은 진리를 들어도 어느 것 하나 주목하거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지만, 누군가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교회 내부 정보를 좀 얘기하면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웠다. 이것이 비정상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비정상적인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냐? 진리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으면서 외적인 일에만 흥미를 느낀다. 지치지도 않고 집요하게 그 항간의 소문들을 파고드는가 하면 자신의 생명 진입이나 진리와 무관한 여러 방면의 일들을 수소문하고 다닌다. 그는 그런 일, 그런 소식들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잘 알고 있으면 그게 바로 진리 실제가 있는 거라고, 그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 집의 사람이고, 틀림없이 하나님께 인정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희 생각에 정말 그렇겠느냐? (아닙니다.) 너희는 이 일을 간파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 중 많은 이가 간파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런 정보를 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 정보들을 다 알면 하나님 집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그런 자는 누구보다 허영심이 많고 무지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말세에 성육신으로 와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는 사역을 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성과는 사람에게 생명이 되는 진리를 베풀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일은 중시하지도 않고 늘 온갖 잡다한 항간의 소문만 알아보며 교회 내부의 일을 많이 알고 싶어 한다. 이런 자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본연의 일에 충실한 사람이겠느냐? 내가 보기에는 사악한 사람이고 불신파이다. 이런 사람 역시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늘 그렇게 떠도는 소문에만 관심을 가지면 호기심은 채워지겠지만 하나님께 혐오받는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순전히 사탄의 심부름꾼에 속하는 사람, 교회 사역을 교란하러 온 사람이다. 특히 늘 하나님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큰 붉은 용의 심부름꾼이자 앞잡이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가장 역겨워하고 증오한다. 너는 하나님을 믿고 있으면서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느냐? 하나님을 연구하고 조사하는 것이 진리를 구하는 것이냐? 진리를 구하는 일이 그리스도가 태어난 가정이나 성장 환경과 관계가 있느냐? 늘 하나님을 연구하는 사람은 너무나 역겹지 않으냐? 네가 그리스도의 인성 방면에 대해 언제나 관념을 품고 있다면, 하나님 말씀을 인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진리를 깨달아야 관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네가 그리스도의 가정과 출생 환경을 조사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그리스도의 신성 본질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완전 불가능하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공을 들이며, 그래야 그리스도의 신성 본질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늘 하나님을 연구하는 그 사람들은 왜 항상 이상한 짓을 하느냐?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그 천한 것들은 한시라도 빨리 하나님 집에서 사라져야 한다! 진리를 그렇게나 많이 선포하고, 예배 때 설교도 그렇게나 많이 했는데, 너는 왜 아직도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냐? 네가 늘 하나님을 연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너무나 사악하다는 뜻이다! 더 심한 경우, 그 떠도는 소문을 듣고는 본인에게 밑천이 생겼다고 여겨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으스댄다. 그러면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에게 혐오와 미움을 사게 된다. 그런 자가 사람이겠느냐? 살아 있는 마귀 아니겠느냐? 그런 자가 어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겠느냐? 비뚤게만 생각한다. 마치 떠도는 소식을 많이 알면 하나님 집 사람이 되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도 되는 줄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자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그런 사람이 가장 역겹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비현실적인 것을 중시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늘 하나님나라가 어떤지, 셋째 하늘은 어디에 있는지, 음부는 어떻고 지옥은 어디 있는지 등을 연구한다. 늘 비밀만 캐려 할 뿐, 생명 진입은 중시하지 않는다. 이것이 비정상적인 것이고 사악함이다. 어떤 사람은 설교 교제를 아무리 많이 들어도 진리가 대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가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글귀만 파고들며 느낌을 찾으려 하고, 또 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는지 연구한다. 만약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행사라고 믿고,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행사임을 부인한다. 완전 그릇된 자 아니냐? 이상하지 않으냐?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졌을 때, 사람이 전부 볼 수 있겠느냐? 어떤 말씀들은 이루어졌더라도 사람 눈에 꼭 보인다고 할 수 없고, 또 어떤 말씀들은 사람이 보기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님에게는 이미 이루어졌다. 사람은 이런 것을 간파할 수 없으며, 10~20% 알 수 있어도 괜찮은 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늘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지만 진리를 실행하고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중시하지 않는다. 이는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 아니겠느냐?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많은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언제나 예언이 이루어진 증거만 찾으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생명과 동력으로 삼는다. 예를 들면,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제가 가서 하길 원하신다면 내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만약 제가 가는 걸 원하시지 않는 거라면 일곱 시까지 자게 해 주십시오.” 그는 늘 이런 식이다. 이런 행동 방식을 원칙으로 삼고 진리로 여겨 실행한다. 이게 바로 비정상이다. 일을 할 때도 늘 느낌대로 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중시하며, 근거 없는 헛소문 같은 얼토당토않은 것에 의지하고, 이상한 것을 파고든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그는 진리는 통하지 않는다고, 느낌에 의지하거나 어떤 일을 찾아 맞춰 보고 검증하는 것만큼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비정상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안배한다는 사실을 그는 믿지 않는다. 비록 입으로는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고 인정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 한 번도 하나님 말씀을 통해 일을 바라보지 않는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뭐라고 한마디 하면 그는 그것을 진리로 믿고 그 말을 따르며, 점쟁이나 관상가가 이듬해에 과장으로 승진할 거라고 하면 그걸 그대로 믿는다. 이는 이상한 짓을 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점이나 사주팔자에서 하는 말, 초자연적인 것을 믿는데, 오로지 이상한 것만 믿는다. 마치 어떤 사람들이 “저는 무슨 진리든 다 깨달았지만 단지 실행해 내지를 못합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문제는 이제 결론이 났다. 즉, 비정상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소용이 없다. 그에게는 결코 통하지 않고, 어떤 성과도 볼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단순히 진리를 싫어하는 것을 넘어 사악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의 중요한 특징이 무엇이냐? 진리를 깨닫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듣고 싶어 하지 않고, 반발하고, 반감을 품으며, 진리가 옳은 것, 좋은 것임을 알지만 실행하지 않는다. 그 길을 가려 하지 않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고,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은 더욱 원치 않는다. 사악한 사람은 이렇지 않다. 그는 사악한 것을 진리로 생각하며, 그 길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따르고 모방하면서 계속해서 안으로 파고든다. 하나님 집에서 자주 교제하는 기도의 원칙은, 시간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속에 있는 말을 털어놓고 진리를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수시로 들었을 것이고, 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악한 사람은 어떻게 실행하느냐? 매일 새벽 첫닭이 울 때 반드시 남쪽을 향해서 무릎을 나란히 꿇은 다음, 두 손을 나란히 바닥에 대고 최대한 크게 절을 하며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는 그때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어줄 거라고 믿는다. 그때는 하나님이 바쁘지 않고 여유가 있으니까 기도에 귀 기울여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건 그릇되지 않으냐? 이상하지 않으냐? 또 어떤 사람은 새벽 한두 시, 인적 없는 깊은 밤에 기도하는 것이 가장 영험하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말하겠느냐? 그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때는 사람들이 다 자고 하나님이 바쁘지 않으니까 그의 일을 처리해 줄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그릇되지 않으냐? 너무나 이상하지 않으냐? 네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가장 터무니없는 사람으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없다. 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좋은 일을 하고, 착한 사람이 돼야 해요. 살생도 육식도 하면 안 되죠. 육식은 살생이고 죄를 짓는 거라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원치 않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게 근거가 있는 말이냐?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그건 누가 한 말이냐? 이방인이나 그릇된 놈들이 한 말이다. 사실 그런 말을 한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고기를 안 먹는 것도 아니다. 아마 사람들 앞에서는 안 먹어도 뒤에서는 꽤나 먹을 것이다. 더군다나 시치미 떼는 능력도 탁월해서 여기저기 궤변을 퍼뜨리고 다니는데, 이게 바로 사악함이다. 이런 사람은 너무나 비정상이다. 그는 이런 사설과 궤변을 계명이나 규례로 여기는가 하면 심지어 진리 또는 하나님의 요구라고 생각해 실행하고 고수한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끈질기게 뻔뻔스럽게 가르친다. 사람의 그런 행동과 말, 추구 방식을 왜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그런 것들은 모두 진리와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무관하면 사악한 것이냐? 만약 그렇게 이해한다면 곤란하다. 사람의 일상생활 중 어떤 일들은 진리와 무관하다. 그런데 그걸 전부 사악하다고 한다면 사실 왜곡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정죄하지 않은 일은 사악하다고 하면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이 정죄한 것만 사악하다고 할 수 있다. 진리와 무관한 일을 모두 사악한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건 단단히 착각한 것이다. 사람의 의식주와 같은 세세한 일, 예를 들면 먹고, 마시고, 자고, 쉬는 일들은 진리와 무관하지 않으냐? 이런 것이 사악한 것이냐? 이는 인체에 당연히 필요한 일, 생활 규칙에 부합하는 일로, 사악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방금 말한 그런 행동 방식들을 사악한 것으로 분류하겠느냐? 그런 행동 방식들은 사람을 잘못된 길, 터무니없는 길, 종교의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실행하고, 또 남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다면 사람을 사악한 길로 이끌게 된다. 이는 필연적인 결과다. 사람이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숭배하고 사악한 길을 걷는다면 종국에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겠느냐? 타락하고, 이성을 잃게 되고, 수치심이 없어지고, 결국 세상의 흐름에 완전히 사로잡혀 이방인들처럼 멸망을 향해 가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설과 궤변을 규례와 계명으로 여기고 지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진리로 여기며 지키는데, 이들은 누구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그릇된 놈으로, 마지막에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 진리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치우친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겠느냐?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악령이 역사할 것이다. 그가 걷는 길이 사악한 길이고 그는 악령의 길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악령이 원하는 바에 꼭 맞아서 결국 악령이 들러붙게 되어 있다. 전에 “사탄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쁜 길을 걷는 자는 필연적으로 악령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너를 악령에게 넘길 필요도 없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보호받을 수 없고, 하나님도 너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얻지 못하면 그냥 내버려둘 것이고, 그러면 악령이 그 틈을 타서 들어와 너에게 들러붙을 것이다. 이것이 결과 아니겠느냐?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늘 성육신의 사역을 정죄하며 세상의 흐름을 좇는 것, 대놓고 성경과 하나님 말씀을 곡해하며 사설과 궤변을 퍼뜨리는 것은 모두 사악한 성품에서 표출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추구하지만 이해가 치우친 탓에 그럴싸한 궤변을 만들어서 사람을 미혹하고, 공상가나 이론가가 된다. 이 역시 이상한 짓을 저지르는 것으로, 그런 자는 사악한 사람에 해당한다. 바리새인과 같다. 바리새인들은 외식하기만 하고 자신은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미혹해서 우러름과 숭배를 받았고, 예수가 나타나 사역할 때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했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에게 저주받았다. 지금 종교계는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가증스러운 건, 그들이 큰 붉은 용의 편에까지 서서 사악한 세력에 영합하고 그들과 손잡고서는 하나님 선민들을 박해하고 하나님에게 맞서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종교계는 지금껏 사탄의 사악한 세력을 증오해 본 적도, 큰 붉은 용 국가의 사악함을 증오해 본 적도 없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축복한다. 이것이 바로 사악함이다. 무릇 사탄, 악령과 관계를 맺거나 연합하는 행위를 모두 사악하다고 일컫는다. 부정한 수단에 속하는 과격하고 극단적인 실행 방법 역시 사악함이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을 오해하는데,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오해를 풀지 못하고, 늘 자신의 이치를 말하며 그릇된 논리를 고집한다. 이 역시 좀 사악하지 않으냐?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진리를 여러 번 교제해 주면 다 깨달았다고, 관념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여전히 관념을 고수하며 계속 소극적으로 지내고 자신의 이유를 내려놓지 않는다. 이것이 사악함 아니겠느냐? 이 역시 일종의 사악함이다. 요컨대,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고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모두 비정상인 사람이고, 얼마간 사악한 성향이 있는 사람이다. 사악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구원받기가 쉽지 않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악한 이론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실로 구제할 방법이 없다.
지금까지 강퍅함, 교만함, 간사함, 진리를 싫어함, 흉악함, 사악함 등 전부 여섯 가지 성품에 대해 교제했다. 이 여섯 가지 성품에 대한 해부를 통해 너희는 성품 변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해했느냐? 성품 변화가 대체 어떤 것이냐? 일종의 결점이라든가 행동, 혹은 성격을 고치는 것이냐? 결코 그런 게 아니다. 그렇다면 성품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제 좀 명확해지지 않았느냐? 이 여섯 가지 성품을 모두 사람의 패괴 성품이고, 사람의 본성 본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여섯 가지 성품은 긍정적 사물이냐, 아니면 부정적 사물이냐? (부정적 사물입니다.) 영락없는 패괴 성품이라고 할 수 있고, 사람의 패괴 성품은 주로 이 몇 가지로 구분된다. 이 여섯 가지 패괴 성품은 하나같이 하나님과 진리에 적대적이고, 어느 하나도 긍정적 사물에 해당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여섯 가지, 즉 여섯 측면을 패괴 성품이라고 통칭한다. 패괴 성품은 바로 사람의 본성 본질이다. ‘본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 본질은 사람의 본성을 말한다. 사람의 본성은 곧 사람이 살면서 의지하는 것이고, 사람의 삶의 방식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누구나 본성에 의지해 살아간다. 네가 살아 내는 것이 무엇이든, 너의 목표와 방향이 무엇이든, 너의 생존 법칙이 무엇이든 너의 본성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따라서 너에게 진리가 없고 네가 이런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간다면 네가 행하는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알 것이다. 성품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느냐?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면 만약 성품이 변화되지 않으면 사람이 하나님과 합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 여섯 가지 패괴 성품 중 어느 것이든, 네가 그 내적 상태를 어느 정도로 나타내고 드러내든 어쨌든 네가 이런 패괴 성품들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네 행위의 속셈과 목적이 무엇이든,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행위의 성질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정죄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결과다. 하나님에게 정죄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누구나가 최종적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결과이냐? (아닙니다.) 사람이 보고 싶은 결과가 아닌 이상 사람이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냐? 자신의 패괴 성품과 패괴 본질을 인식하고, 진리를 깨닫고, 그런 후에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마련한 상황을 통해 서서히, 조금씩 이런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과 합하고 진리와 합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의 과정이다.
과거에 성품 변화를 아주 쉽고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하거나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짓을 하지 않도록 자제하면, 내 관점을 바르게 하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그런 다음 진리를 깨닫고, 많이 노력하고, 많이 고생하고, 대가도 많이 치르면, 몇 년 뒤에는 분명 성품 변화에 이를 수 있을 거야.’ 이것이 맞는 말이냐? (아닙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자신의 패괴 성품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변화의 결과는 무엇이냐? 진리를 얻는 것이다. 네 성품에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 가늠하려면 네가 하는 행동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위배되는지를 보면 되고,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려는 데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보면 된다. 네 성품이 어느 정도 변화했는지를 알려면 패괴 성품을 드러낼 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지, 육을 저버리고 네 속셈과 야심, 욕망을 저버리고 진리에 따라 실행할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네가 진리에 따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어느 정도로 실행할 수 있는지, 또 진리의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보면 네 성품이 변화한 정도를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정비례 관계이다. 강퍅함이라는 성품을 예로 들어 보자. 처음에 성품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을 때,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에게 강퍅한 측면의 성품이 있는지도 몰랐다. 너는 진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진리는 어쩜 사람의 상처만 들추어 낼까?’ 진리를 다 듣고 난 뒤에는 하나님 말씀이 다 맞다고 생각했지만 1, 2년이 다 되도록 한 마디도 제대로 새겨듣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았다면 이것이 강퍅함이 아니냐? 2, 3년이 지났지만 전혀 못 받아들이고, 내면의 상태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면, 비록 본분도 차질 없이 이행하고, 고생도 꽤 했지만 강퍅한 내적 상태가 전혀 해결되지 않았거나 10분의 1도 줄어들지 않았다면 이 방면에서 너는 성품이 변화했겠느냐?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무엇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한 것이냐? 그 이유가 무엇이든 무턱대고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한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고 그렇게 사역을 많이 했건만 네 성품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간증을 전혀 얘기하지 못할까? 생명 성품에도 전혀 변화가 없고 말이야.’ 그때 너는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정말 패역하고 강퍅하구나! 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야.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도 않은 거야! 이걸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거라 할 수 있겠어? 몇 년씩 하나님을 믿고도 아직까지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마음이 하나님과 가깝지도 않구나!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도 않았고, 잘못을 저질러도 아무런 가책도 못 느끼고, 회개하려는 마음도 없었어. 이런 게 강퍅함 아닌가? 난 패역한 자식이 아닌가?’ 마음이 괴로웠다. 괴롭다는 건 무슨 의미냐? 회개하고 싶다는 뜻이다. 너는 자신의 강퍅함을 의식하고, 자신의 패역을 의식했다. 이때부터 성품은 변화되기 시작한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의 의식에는 변화하고자 하는 생각과 바람이 조금씩 생겨난다. 더 이상 하나님과 대치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하고, 더는 강퍅하게 굴지 않고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현실 생활로 가져와 실행하고, 진리 원칙으로 여겨 실행하고자 한다. 이런 의식이 생긴다. 이렇게 의식이 생기는 건 좋은 일이지만 의식이 생긴다고 바로 달라지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몇 년의 시간을 체험해야 한다. 이 의식이 마음속에서 점차 선명해지고, 강렬한 요구로 바뀌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안 돼. 세월을 낭비할 순 없어. 진리를 추구하고 바른 일을 해야 해. 전에는 본연의 일은 하지 않고 먹고 입는 것만 생각하고, 명예와 이익만 추구하다 결국 아무런 진리도 얻지 못했어. 후회스러워. 회개해야겠어!’ 이러면 하나님 믿는 정상 궤도로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이 진리 실행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그건 성품 변화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몇 년을 믿었든 관계없이, 자신이 흐리멍덩하고 늘 허송세월을 보내느라 몇 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여전히 텅 비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서글퍼진다. 그래서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하는데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때에야 하나님이 한 권면의 말씀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양심과 이성이 너무나 없는 자신을 미워하게 된다! 뉘우치는 마음이 들면서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 앞에서 참되게 살아가고 싶어진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할 순 없어. 하나님께서 하신 그 많은 말씀은 구구절절 사람에게 좋은 말씀이고 사람에게 바른길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야.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정말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하신 분이야!’ 이것이 바로 변화의 시작이다. 이런 깨달음이 생긴 것은 좋은 일이다! 만약 네가 이런 것도 모를 만큼 무감각하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이제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관건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 진리를 깨닫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을 인식했고, 나아가 진리를 실행해 내고 진리를 자신의 실제로 바꿔야 하나님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너희가 볼 때 마음속에 이런 인식과 생각이 자리 잡으려면 몇 년을 체험해야 하느냐? 영리한 사람, 이해력이 있는 사람, 간절히 하나님을 원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1~2년이면 바로잡고 진입하기 시작할 것이다. 똑똑하지 못한 사람, 무감각하고 우둔하고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흐리멍덩하게 3~5년이 그냥 흘러가고, 별 수확이 없어도 의식하지 못한다. 열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면 흐리멍덩하게 10년이 또 흘러도 여전히 확실한 수확이 없고, 여전히 체험 간증을 얘기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돌려 보내지거나 도태되면 그제서야 깨닫기 시작한다. ‘역시나 진리 실제가 전혀 없구나. 나는 정말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때 깨닫는다면 좀 늦은 것이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멍하니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날이 오기만을 기대하지만 진리는 조금도 추구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10여 년이 지나도 아무런 수확을 거두지 못하고, 간증도 전혀 얘기하지 못한다. 그러다 호된 책망과 훈계, 경고를 받고 나서야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가슴을 찌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 것이냐! 책망과 훈계, 징벌이 없으면 되겠느냐? 엄한 징계가 없으면 되겠느냐? 어떻게 해야 사람이 지각하고 반응하게 만들 수 있느냐?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관을 봐야만 눈물을 흘린다. 기어이 못된 짓을 하고, 숱한 악행을 저지르고 나서야 이렇게 의식한다. ‘하나님 믿는 내 삶은 이제 끝인가? 하나님이 나를 원하지 않으시는 건 아닐까? 내가 정죄된 건 아닐까?’ 그러면서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소극적일 때는 그 긴 세월을 헛되이 믿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원통해하고, 한술 더 떠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생각하다가 깨닫는 순간 이렇게 의식한다. ‘이건 스스로를 망치는 거잖아? 다시 일어서자. 내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어떤 일 때문에 내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일까? 내 어떤 점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어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뿐이겠어. 깨달은 진리도 실행하지 않았어. 이건 진리를 싫어하는 모습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후회도 되고 두렵기도 하다. ‘계속 이대로 가다가는 분명 징벌받게 될 거야. 안 돼, 얼른 회개해야겠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러서는 안 돼.’ 그 순간 강퍅한 정도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겠느냐? 마치 마음이 바늘에 찔리듯 지각이 조금 생긴 것이다. 지각이 생기는 순간, 너는 마음이 움직이고 진리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관심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이냐? 진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으면 책망과 훈계를 받았을 때 순종하지 못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련이 닥쳤을 때 굳게 서지 못한다. 리더가 된다면 거짓 리더가 되지 않고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지 않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네게 지위가 생겨서 다른 사람들이 너를 높이 받드는데, 그걸 이겨 낼 수 있겠느냐? 너에게 상황을 마련하고, 시험이 닥치게 하면 이겨 낼 수 있겠느냐? 너는 자신을 너무 잘 알고, 너무 잘 파악하고 있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나는 이 모든 걸 이겨 낼 수 없어. 난 폐물이고 아무것도 못 해.” 이것이 어떤 생각이냐? 진리가 필요해진 것이다. 진리가 필요할 때, 네가 가장 무기력할 때 너는 진리에 의지하고 싶어진다. 그 어떤 사람에게 의지해서도 안 되고 진리에 의지해야만 네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책망과 훈계, 시련, 시험을 이겨 낼 수 있고, 어떤 환경도 극복할 수 있게 된다고 느낄 것이다. 네가 진리에 의지할수록 진리가 좋고 유용하고, 너에게는 가장 크게 도움이 되고, 네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때 너는 비로소 진리를 갈망하기 시작하게 된다. 사람이 이 정도가 되면 패괴 성품이 조금씩 줄어들고 변화하지 않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해서 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이 바뀌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성품도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하나의 더딘 과정이다. 초반의 작은 변화는 스스로가 느끼지 못하지만,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게 될 때, 본질적인 변화가 생기고, 사람은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처음에 진리를 갈망해서 진리를 얻고자 갈망하는 마음,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에서부터, 일이 닥쳤을 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진리를 실행해서 하나님 뜻을 충족게 하기까지, 나아가 자기 뜻대로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속셈, 자신의 교만과 패역, 강퍅함, 배반의 마음을 극복하기까지, 이런 과정을 이겨 내게 된다. 그러면 진리는 조금씩 사람의 생명이 되지 않겠느냐? 진리가 네 생명이 되면 교만과 패역, 강퍅함, 배반의 성품은 네 내면에서 더 이상 네 생명이 아니고, 너를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럴 때 네 처신을 인도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네 생명이 되었다면, 이것이 변화된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 뒤로는 점점 좋아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성품 변화의 과정이며, 이런 효과는 기나긴 시간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
성품 변화에 걸리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르며, 정해진 기간이 없다. 만약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7~8년, 10년이면 성품 변화를 볼 수 있다. 자질이 평범하고 진리를 추구하기 원한다면 아마 15년, 20년 정도가 되어야 성품 변화를 볼 수 있다. 관건은 그 사람의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와 이해력이 얼마나 되는지 봐야 하는데, 이런 것들에 의해 결정된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각각의 패괴 성품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모두 사람의 본성이며, 깊이 뿌리내린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성품은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함으로써, 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 시련과 연단을 받음으로써 서로 다른 정도로 변화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성품 변화는 시간에 달린 것 아닙니까? 때가 되면 무엇이 성품 변화인지 알게 되고 진입할 수 있게 되겠지요.”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만약 시간이 지났다고 성품 변화에 이를 수 있는 것이라면, 이론적으로 말해서, 평생 하나님을 믿은 그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성품 변화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이 그러하냐? 그들이 진리를 얻었느냐? 성품이 변화되었느냐? 모두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수히 많지만 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찾아보기 힘들다. 진정으로 성품이 변화된 사람은 모두 진리 추구를 통해 이룬 것이고, 성령 역사에 의해 온전케 된 것이다. 성품 변화는 진리 추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한편으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즉, 진리 추구에 대가를 치르고, 진리를 얻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그 밖에도 옳은 사람, 마음씨가 선량한 사람,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하나님께 검증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성령 역사에 의해 온전케 될 수 있다. 사람의 협력도 없어서는 안 되지만, 성령 역사를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만약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고,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교회 사역에 부담이 없고, 사람들에게 사랑이 없고, 특히 본분을 이행할 때 충성심이 조금도 없다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고, 결코 온전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은 무턱대고 규례에 맞출 게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무슨 일을 하든, 순종해야 하고, 교회 사역을 지켜야 하고, 마음이 올발라야 한다. 그래야 성령이 역사할 수 있다.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춰야 한다. 또 본분을 이행하는 일에서 하나님께 충성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다. 성령 역사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깨우침이 있고, 진리를 실행하는 데 길이 있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원칙이 있고,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인도가 있고, 어떤 고통을 겪어도 마음이 평안하고 즐겁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에 10년, 20년 겪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변화가 빠를수록 평안이 빨리 찾아오고, 행복도 빨리 찾아온다. 성품에 변화가 생겨야 참된 평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고,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없고, 점점 삶이 공허하고 힘들어진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사는 것도 고통스럽고 힘들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진리를 얻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고, 진리는 빨리 얻을수록 좋다. 진리가 없으면 삶이 공허하지만, 진리를 얻으면 평안과 기쁨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고, 성령 역사의 깨우침과 인도, 인솔이 있고, 마음이 갈수록 밝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점점 커진다. 이제 성품 변화에 관계된 진리가 좀 명확해졌느냐? (네, 알겠습니다.) 만약 정말로 명확해졌다면 길이 생긴 것이고,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효과가 있는지 알 것이다.
2017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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