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진리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 1 부)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음식, 옷 등 육적인 즐거움에만 연연하는데, 그런 것이 정신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느냐?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수년간 하나님을 믿고도 잘 모르는 이들도 있다. 어떤 이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주는 것을 보고 속으로 따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어째서 저 사람만 챙기고 나는 안 챙기지? 나도 아직 없는데 말이야.’ 사실 너에게는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하지 않다. 다만 탐욕스러워서 만족을 모르고 다투고 싶어 할 뿐이다. 너희를 돌보는 것은 내 의무도 아니다. 사람됨에 원칙이 있어야 하니, 이익을 다투지 말고, 이득을 다투지 마라. 그런 몸 이외의 것들은 네가 진리와 생명을 얻는 것을 대신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옷을 걸쳐도 진리를 얻지 못하면 마음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이런 것을 말로는 다들 이해한다. 하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이런 일 자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돈 있고 권세 있는 자들이 많다. 그들이 사는 인생은 어떠하냐? 그저 놀고먹고, 매일같이 파티를 즐기고, 향응을 베풀고, 비행을 일삼으며 살아간다. 저들에게 인생이 있느냐? 저들은 인생이 없다. 온종일 잘 먹고 명품을 휘감은 채 으스대며 활개치고 다니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이런 자들은 어떤 인간이냐? 모두 마귀 사탄에 속하는 인간들이요, 짐승이다. 부자들 중에는 즐길 만큼 즐긴 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도 있다. 실컷 놀고먹으며 즐기는데 어째서 목숨을 끊을까? 이걸 보면 명예, 이익, 지위, 금전, 음식, 옷, 향락은 진정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너희는 그런 것을 추구하지 마라. 구제 불능한 정도까지 타락하고 나서 돌이키면 너무 늦다! 슬기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실패를 보고 굳이 본인이 겪지 않아도 직접 거기에서 경험을 얻곤 한다. 반면 미련한 사람은 숱한 실패를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꼭 책망과 훈계를 받아야 겨우 의식하지만, 그땐 너무 늦다. 너무 미련한 사람은 진리를 얻지 못한다. 슬기로운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뒤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사실 모든 인류에게는 진리가 필요하며, 진리를 추구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네가 하나님 선민이든 이방인이든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진리의 공급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정말 비인간적이고,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데, 바로 짐승이다. 비록 따라서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속으로는 죄 속의 즐거움, 놀고먹는 일만 추구하고, 온통 그런 일에만 마음을 빼앗긴다. 그들은 전혀 진리를 구하지 않고, 마음속은 무신론적 관점과 진화론적 관점이 가득해서 네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쇠귀에 경 읽기다. 비록 하나님 믿는 일이 좋은 일이라는 것도 알고 꾸준히 하나님을 믿긴 하지만, 진리 추구라는 길로 들어서지는 못한다. 따라서 진리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정한 구원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 많은 이들이 아주 흐리멍덩하게 하나님을 믿고 있다. 하나님을 믿으며 대체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지도 모르고, 속으로 아무 생각이 없다. 사람이 과연 왜 사는지, 무엇으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인지 그들은 전혀 모른다.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모른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박해받고 고통받는 그 일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과연 무엇을 얻고자 함이냐? 만약 진리와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 사역이 끝나 사람의 결말이 정해질 때 후회하지 않겠느냐? 네가 처음에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한 다짐이 일시적인 충동이냐, 아니면 하나님 믿는다는 게 어떤 건지 정확히 알고 납득이 돼서 내린 결정이냐? 너는 과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느냐? 네 인생의 방향과 목표는 무엇이냐?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고 종국에는 진리를 얻겠다는 의지가 있느냐? 어떤 상황이 닥쳐도, 어떤 환난과 시련, 어려움, 고통이 닥쳐도 충성스럽게 본분을 다하겠다는 의지가 있느냐? 그만한 믿음도 없고,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도 없는 사람은 진리를 얻기 힘들다. 사람이 진리에 관심이 없으면 달갑게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것이 아닌데, 이런 자가 어찌 끝까지 하나님을 따르겠느냐?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나님 믿고 뭘 얻어야 합니까? 어떤 길을 가야 합니까?”라는 네 물음에 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기 위함이 아닌, 기회를 노리며 복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런 자가 어찌 진심으로 본분을 이행할 수 있겠느냐? 정말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수록 더욱 의욕적으로 본분을 이행한다. 반면,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종종 본분을 이행하며 소극적이 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물러날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와는 다르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점차 진리를 깨닫고 그와 동시에 패괴도 정결케 된다. 진리를 깨달을수록, 하나님을 따르면서 거두는 수확이 크다고 느낄수록,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가면 갈수록 밝아짐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진리를 얻는다. 사람이 정말 진리를 깨달으면, 하나님을 따르면서 믿음이 생기고 끝까지 충성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병을 만나 생사의 고비에서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호소하는데, 이런 과정을 겪은 후 진리를 조금 깨닫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생사의 고비를 겪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필요는 없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체험을 보고 그들의 교제와 느낌을 듣는 것만으로도 수확을 거둘 수 있다. 설령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체험을 통해 어느 정도 터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이들은 죽음에 다다랐을 때 자신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고, 하나님도 잘 모르고, 하나님을 위해 한 일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고 느끼기도 한다. 하나님을 믿는 동안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서 수확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하나님께 죄송한 일이 너무나 많아서 이대로 죽는 게 못내 아쉽고, 회개할 기회도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다. 욥은 시련이 임했을 때 온몸에 악창이 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아내로부터 비웃음을 당했다. 친구들 역시 그를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욥이 분명 나쁜 짓을 저질러 여호와 하나님의 미움을 산 것이라며 그를 판단하고 정죄했다. 그들은 욥에게 대놓고 이렇게 말했다. “어쩌다 여호와 하나님의 미움을 샀는가? 순순히 죄를 뉘우치게.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네.” 하지만 욥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나쁜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련에 그도 고통스러웠다! 고통의 순간에 그는 삶이 아닌 죽음을 바랐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거기서 벗어날 길은 죽음밖에 없고, 죽어야만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속으로 하나님을 찬미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은 이를 수 없는 경지다. 대다수가 고통의 순간에는 찬미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요구만 한다. “하나님, 얼른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숨만 붙어 있어도 돼요. 병만 나으면 저더러 무엇을 하라고 하셔도 좋습니다.” 이런 식으로 거래하기 시작한다. 병이 찾아오면 어떻게 겪어야 하느냐? 하나님 앞에 와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구하고, 자신이 한 어떤 일이 진정 진리에 어긋나는지, 자신에게 아직 해결되지 않은 패괴가 어떤 것이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고통을 겪지 않고서는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없다. 사람은 고통을 통해 단련받아야만 방종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다. 고통이 생기면 늘 기도하느라 옷이나 음식, 즐거움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다. 마음속으로 내내 기도만 하면서 그동안 잘못하거나 진리에 어긋나는 부분은 없었는지 성찰하기 마련이다. 대개 큰 병이나 희귀한 질병으로 크게 고통받는 경우, 그건 우연이 아니다. 네가 병이 나거나 건강한 것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 있다. 평소에 성령이 역사하고 건강할 때는 하나님께 구하다가도, 막상 병이 나서 고통스러울 때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또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병 속에서 살면서 빨리 병을 치료할 생각에만 골몰한다. 그 순간은 병이 없는 사람이 부럽고, 어서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소극적이고 대항적인 정서다. 사람은 가끔 병에 걸리면 생각한다. ‘이런 병에 걸린 것이 나의 무지 때문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일까?’ 속으로 도무지 알지 못한다. 사실 감기나 상초열, 독감과 같은 병에 걸리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무릇 큰 병이 찾아와 너를 쓰러뜨리거나 그것 때문에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산다면, 그건 모두 우연이 아니다. 질병, 고통이 찾아왔을 때, 너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했느냐?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여 너를 인도하고 이끄느냐? 단지 너에게 깨우침과 빛 비춤만 주느냐? 단지 이런 방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또한 너를 연단하고 시련을 준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사람에게 시련을 주느냐? 사람에게 고통을 겪게 함으로써 시련을 주지 않느냐? 시련에는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시련을 받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고통을 받겠느냐? 사람이 고통 없이 어떻게 변화하겠느냐? 시련에는 고통이 뒤따르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 역사다. 하나님은 가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데, 그러지 않으면 사람은 세상 모르고 나댈 것이다. 패괴 성품 문제는 진리 교제만으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문제를 지적해 줄 경우, 너는 알면서도 변화하지 못한다. 네가 아무리 의지로 극복하려 애쓰고, 심지어 제 뺨을 때리거나 머리를 쥐어박거나 벽에 찧는 등 육을 손상시키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내면에서 사탄 성품이 사람에게 온갖 궁리와 생각을 주어 계속 사람을 괴롭히고 교란하기 때문에 패괴 성품은 자연스레 흘러나오기 마련이다. 그럼 해결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바로 병을 통해 연단받아야 한다. 연단 속에서 고통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기도하며 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너는 병에 걸리지 않았을 때는 무척 방종하게 굴며 나대다가도 병이 나면 얌전해진다. 병이 났는데도 나댈 수 있느냐? 말할 때 힘이 하나도 없으면서 남을 꾸짖고 교만하게 굴 수 있느냐? 그럴 때 너는 그 어떤 요구도 없고, 고통만 없앨 수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먹고 입고 즐길 생각이 완전히 없어진다. 너희 대부분은 그런 기분을 느껴 보지 못했을 텐데, 직접 겪어보면 알 것이다. 지금, 지위만 다투고, 육적인 즐거움, 이익만 다투는 자들이 있는데, 이건 다 그들이 너무 안일하고, 고생을 덜해서 함부로 나대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고난과 연단을 각오해야 한다!
하나님은 가끔 환경을 마련하여 주변 사람을 통해 너를 책망한다. 네가 고통받고 공과를 배워 진리를 깨닫고 일을 간파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금 이런 사역을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네 육을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네가 공과를 배우고, 나아가 패괴 성품을 해결하여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 바울이 항상 자기 몸에 가시가 있다고 했는데, 그 가시는 무엇이냐? 그것은 병을 말하는 것으로, 바울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병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 바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바로 그의 성품과 본성 때문이었다. 만약 그의 몸에 박힌 가시가 없었다면, 그를 따라다니는 그 병이 없었다면, 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독립왕국을 세우는 짓을 저지를 수 있었다. 하지만 병의 고통 때문에 그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따라서 많은 경우 병은 사람에게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병이 없으면 기운이 넘쳐 악행을 저지르거나 화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이 건방을 떨고 방종하면 이성을 잃기 쉽다. 그러다 악을 행하고 후회하지만 그때는 이미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다. 따라서 병을 앓는 것은 좋은 일로, 그것은 사람에 대한 보호이다. 너는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도 쉽게 해결해 주고, 자신이 안고 있는 사상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유독 질병 앞에서만은 속수무책이다. 병이 나는 것은 정말 자기도 어쩔 수 없다. 병이 났을 때 어떤 방법을 써도 낫지 않는다면 그것은 네가 받아야 할 고통이다. 그러니 벗어나려 하지 말고 우선은 순종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패괴되고 본성도 좋지 않습니다. 당신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일, 당신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습니다. 제게 이런 병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당신 뜻이 무엇인지, 당신께서 저의 어떤 면을 변화시키고 온전케 하시려는지 알 수 있게 저를 깨우쳐 주십시오. 부디 제가 진리를 깨닫고 바른 인생길을 가도록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얼렁뚱땅 넘기지 말고, 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받는 징계가 아닐 거라고 쉽게 결론짓지 마라. 정말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는 자라면, 어떤 일이 임하든 쉽게 넘기지 말고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 뜻을 모색해야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네게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확인하면 하나님은 네 고통을 덜어줄 것이다. 하나님은 고통과 연단을 통해 이런 효과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역대 경건한 기독교인, 제자들, 사도들, 선지자들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거나 말에 끌려다니다 죽거나 톱에 잘려 죽거나 끓는 기름 솥에 던져지거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등 갖은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따르면서 편안함이 뒤따를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 걸 요구하지도 말고, 아예 바라지도 마라. 내가 왜 사람이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느냐? 사람의 사소한 요구라도 그것은 가져서는 안 될 지나친 욕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좋은 옷을 입게 해 주십시오. 저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 본분을 이행하기 시작했으니 당신이 제게 축복을 베풀어 저를 건강하게 해 달라고 요구할 이유가 있습니다.” 지나친 욕망을 갖고 이렇게 말하지 마라. 만약 어느 날 몸에 병이 난다면 소극적으로 변하겠느냐? 하나님을 믿지 않겠느냐? 몸이 안 좋아도 본분을 이행하겠느냐?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그것은 천직이요, 거부해서는 안 되는 책임이다. 남들은 본분을 이행하지 않더라도 너는 꼭 이행하겠다는 그런 의지가 있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면, 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따르는 거지? 복 받으려고 하나님을 따르는 건데, 복을 못 누리면 난 그만 따라야지!’ 이건 잘못된 관점이 아니냐? 너희는 지금껏 숱한 체험을 통해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서 사람이 상상하는 명백한 축복을 볼 수 없음을 알았다. 매일 기분 좋고, 신나고, 옷도 좋은 것만 입고, 무슨 일이든 잘 풀리고, 세상 일이 순조로운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누구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타지에서 일하면서 차별과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 늘 병을 달고 사는 사람, 장사도 잘 안 되는데 하나님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 버림받기까지 하는 사람, 다들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많은 고통이 따른다. 반면,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안락한 삶에 무탈하고 모든 게 순조로워서 부러움을 자아내지만, 생명 진입이 전혀 없어 이방인과 꼭같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핍박과 환난이 따른다. 핍박과 환난이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이 너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계속 너를 붙잡고, 그 손을 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손을 놓아서 네가 사탄의 그물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위험하지 않겠느냐? 매일 죄 속에서 살면서 명예, 이익을 추구하고, 즐거움에 연연하고, 주색과 노름에 빠지고 음란을 저지른다면 하나님은 너를 포기하고 내버려 둘 것이다. 그러면 너는 틀림없이 도태될 것이다. 너는 세상의 돈과 재물, 지위를 얻었겠지만 사실 가장 소중한 것, 즉 영원한 생명인 진리를 잃어버렸다. 너는 아직도 이것을 모르고 있구나!
어떤 이들은 말한다. “하나님은 왜 나만 징계하시지?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건강한데 왜 나만 병에 걸렸을까? 왜 나만 고통받아야 할까? 왜 우리 집은 이렇게 가난하고 돈도 못 벌까? 왜 나는 좋은 옷도 못 입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째서 잘 입고 다니는 거지?” 다른 사람이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시샘하지 마라. 어쩌면 그의 분량이 작아 그의 연약함을 헤아린 하나님이 그가 누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고, 차츰차츰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여 서서히 하나님의 행사를 알게 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너에게는 하나님이 특별히 엄격하게 요구한다. 사람 눈에 너는 전혀 행복하지 않고 계속 고통만 받는 것 같지만, 그 대신 꽤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많이 감사하고, 하나님을 많이 찬양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행사를 아는 사람이다. 어떤 고통을 받는가를 떠나, 진리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이다. 하나님의 잦은 징계와 잦은 시련 덕분에 수시로 공과를 배우고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늘 방종한데도 징계가 없다면, 아무리 오랫동안 방종하게 지내도 징계가 따르지 않고, 누구 하나 너를 책망하거나 간섭하지 않는다면, 너는 끝장이다. 하나님이 너를 포기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별다른 본분도 없고, 달리 맡은 책임도 없이 여유롭고 한가한 생활을 하며 무척 편하게 지낸다. 그러면서 아무런 공과도 배우지 못하고, 아무런 수확도 거두지 못한다. 그것이 행복이겠느냐? 스스로가 방종한 삶을 원하고, 자유로움과 육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단 말이냐? 네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힘들고 고단하지만 모두가 네게 관심을 둔다. 때로는 책망 훈계도 받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고, 너를 책임진다는 뜻이다. 열심히 구하고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면 여러 가지 일에서 하나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절대 제멋대로 하지 말고, 방종하게 굴지 말고, 건성으로 하지 말고, 고집부리지 마라. 문제가 있으면 서둘러 진리를 구해야 한다.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맛볼 것이다. 지나치게 제멋대로이고, 방종하고, 징계도 받아들이지 않고, 거기다 고집까지 세다면 그건 위험하다. 한번 도태되면 다시는 기회가 없고, 후회해도 그땐 이미 늦은 것이다. 병에 걸린 어떤 사람이 있다. 초기에는 늘 기도했지만, 나중에는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으니 병 속에서 살면서 늘 속으로 이렇게 원망했다. ‘하나님을 믿어도 좋을 게 없어. 병이 났는데 하나님은 고쳐 주지도 않는구나!’ 이것은 진실된 믿음이 아니다. 그는 조금도 순종하지 않다가 결국 원망을 쏟아 낸 뒤 죽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육체를 끝장낸 후 지옥에 떨어지게 할 것이란 의미다. 이러면 완전히 끝장이다. 이번 생에 구원받을 기회는 얻지 못했기에 영혼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마지막 단계로, 여기서 도태되면 영원히 기회가 없다! 네가 하나님이 구원 사역을 하는 기간에 죽는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징벌받아 죽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 구원받을 기회란 없다. 바울은 음부에서 계속 징벌받고 있지 않느냐?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거기서 징벌받고 있다! 알고도 죄를 짓는다면 더욱 큰일이다. 더 무거운 벌을 받을 것이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나는 항상 병에 시달리며, 늘 고통스럽고, 힘들고, 상황도 안 좋았어. 성령 역사도 느끼지 못했지.” 맞는 말이다. 성령 역사는 대부분 이런 식이어서 너는 그것이 연단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성령이 너를 깨우칠 때는 교제를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할 때도 있고, 환경을 통해 너 스스로 깨닫게 할 때도 있다. 환경 속에서 시련을 내려 너를 연마하고 단련시켜서 성장하게 하는 식이다. 과거에 너희가 일을 겪고도 인식하지 못한 것은 마음속으로 진리를 구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사람은 어떤 일도 간파하지 못하고 항상 치우치게 이해하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병이 나면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사실 어떤 병은 불규칙한 생활에 기인한 것으로, 사람이 자초한 것이다. 무분별한 식생활에 보건 상식이 없어서 생겨난 온갖 병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하는데, 사실 그것은 자신의 무지로 초래된 것이다. 어찌 됐든 본인이 자초한 병이든, 성령이 내린 병이든, 모두 하나님이 너를 매우 후대한 것이요, 네가 공과를 배우게 하기 위함이니 불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한 번 불평할 때마다 오점이 하나 남을 것이며, 이는 씻을 수 없는 죄가 될 것이다! 불평을 한 번 하면 내적 상태가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 회복되겠느냐? 네가 조금 소극적이면, 어쩌면 한 달 지나 회복될 수 있다. 네가 부정적인 말을 뱉으며 한 번 불평하면, 일 년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을 수 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네가 늘 불평하는 것은 심각한 일이다. 성령 역사를 얻기가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사람은 많은 노력을 쏟고 기도해야 마음가짐을 바로잡아 성령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 마음가짐을 완전히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반드시 진리를 구해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어야 해결이 가능하다. 사실 너희는 체험하는 가운데 성령 역사를 얻기도 한다. 대개는 핍박과 환난, 혹은 질병과 고통이 닥친 경우다. 그럴 때 사람은 비로소 병을 고쳐 달라고, 믿음과 힘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오로지 그 한 가지를 간구하고자 많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 뜻을 구하려 하나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고, 하나님께 속마음을 털어놓으려 해도 할 말이 없다. 사람의 분량이 너무나 작다. 하나님은 가끔 네 주변 사람을 이용해 어려운 문제를 던지며 너를 힘들게 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너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 와서 반성하기 시작한다. ‘제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제가 깨닫도록 깨우쳐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저를 깨우쳐 주지 않으시면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해도 모르면 계속 구하겠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찾아서 구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일이 닥쳐도 진리를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글귀와 도리를 조금 아는 것을 진리를 깨달은 것으로 착각하며 스스로를 속인다. 이런 것을 두고 미련하다고 하며, 이런 사람이 가장 우매하고 무지한 사람이다. 이런 자는 결국 스스로를 해치고 망칠 뿐, 그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한다.
너희는 평소 기도를 거의 안 하는 것이냐? 기도를 적게 하면 구하는 것이 적고, 구하는 것이 적으면 진리를 깨닫기 어렵고, 순종하지 않게 된다. 구하려는 태도가 없다면 어찌 순종할 수 있겠느냐? 어찌 하나님의 행사를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어떻게 행하려는지도 모르고, 누구에게 순종하고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지도 모른다면, 순종을 논할 수 있겠느냐? 순종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순종이라고 하면 그 목표와 대상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왜 진리를 선포하는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순종하겠느냐? 네가 순종하겠다고 해도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기도하고 마음을 털어놓으며 구해야 하는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등을 잘 알고 있어야 진실된 기도를 할 수 있다. 기도할 때는 다른 사람의 말을 따라 해서는 안 되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는 예수의 이 말은 더더욱 따라 해서는 안 된다. 함부로 적용하지 마라. 너에게 그저 깨우침과 빛 비춤을 주는 것일 뿐, 하나님 뜻을 이룬다고 할 수는 없다. 간혹 책망과 훈계를 받거나 고통받은 것을 두고 하나님이 너를 온전케 한다거나, 그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런 말은 옳지 않고,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네가 잘못된 자리에 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자는 예수의 기도를 따라 한다. ‘제 뜻대로 마시고 오직 당신 뜻대로 하소서.’ 네가 하나님과 대등해지려는 것인데 큰일 아니냐? 그리스도는 육신의 입장에서 하늘의 영에게 그렇게 기도했다. 그 둘은 단지 입장만 달랐을 뿐, 서로 대등하고 지위가 같은 한 분의 하나님이다. 그리스도가 그런 기도를 했다고 해서 사람도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비이성적인 것으로, 성령이 조금도 깨우쳐 주지 않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다! 너의 그 말은 흉내 낸 말일 뿐, 네 속마음이 아니어서 너무나 공허하고 실제적이지 않다. 이는 네 분량이 너무 작아 하나님 말씀, 하나님 요구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증거인데, 성령이 어떻게 너를 깨우쳐 준단 말이냐? 사람이 얼마나 바보 같으냐! 이만한 일도 구분하지 못하면 진리를 깨닫는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기도는 아무렇게나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관점이 있어야 하고, 간파하지 못하면 진리를 구해야 한다. 어떤 일이 닥치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항상 묵상하고, 혹 길을 발견한다면 형제자매들도 그렇게 기도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떤 일이든 혼자 맹목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자신의 상상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하지 마라. 그러다 만에 하나 교란과 방해가 된다면 하나님 뜻에 어긋나게 된다. 그러면 큰일이다. 너더러 교회 하나를 이끌도록 했다고 하자. 매일 글귀와 도리만 읊고, 정작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먹고 마시는지, 하나님께 기도는 어떻게 하는지 등은 교제해 주지 않는다면, 너는 치우친 길을 가는 것이다. 네가 계속 글귀와 도리만 얘기하고, 내용 없는 텅 빈 기도만 가르치고, 성경 말씀이나 이론적인 말만 외운다면, 결국 아무리 기도해 봐야 효과도 없고, 생명도 자라지 않을뿐더러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도 맺지 못한다. 그러면 사람들을 더욱 잘못 이끌게 될 것이다. 어떻게 기도해야 결실을 맺겠느냐? 마음을 터놓고 하나님과 교제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 말씀, 하나님 요구를 바탕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진리를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려면 정성을 들여야 한다. 정성을 쏟지 않는 사람은 도달하기 어렵다. 성령이 깨우쳐 주는 사람은 모두 어떤 사람들이냐? 생각이 민첩하고 세심한 사람이다. 성령이 어떤 느낌이나 깨우침을 주면, 그는 그것이 성령이 역사한 것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역사하려는 것임을 알아차린다. 혹은 성령의 깨우침과 꾸짖음을 즉시 알아차리고 단속받기도 한다. 성령은 이런 사람을 깨우쳐 준다. 투박한 사람,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성령이 느낌을 주어도 의식하지 못하고, 성령 역사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서너 번 깨우쳐 줘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성령은 다시는 역사하지 않는다. 왜 어떤 사람들은 계속 믿다 보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성령 역사를 느끼지 못하고, 내면이 어두워지고, 의기소침해지고, 맥이 빠질까? 성령의 깨우침은 조금도 없고 그저 죽은 것, 죽은 이치만 있는데, 어떻게 힘이 나겠느냐? 열정에만 의지하면 오래 버틸 수 없다. 반드시 진리를 깨달아야 힘이 생긴다. 따라서 하나님 믿으면 세심해야 하고, 반드시 하나님 말씀 읽는 일, 자신을 인식하는 일,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인도를 얻을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은 있지만 성령 역사에 대해서는 잘 살피지 않는다. 너희는 앞으로 가장 미세한 느낌, 가장 미세한 빛 비춤에 주의를 기울이고, 일이 생길 때마다 진리를 근거로 그 일을 바라보고 대해야 한다. 그러면 서서히 하나님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무슨 일이든 육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치와 논리, 규례를 들어 분석하거나 사람의 머리로 사유하여 분석하고 대한다면, 그것은 진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이런 식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어도 너는 하나님 말씀 밖의 사람이자 문외한일 뿐,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서서히 이쪽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진리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 몇 년을 체험하면 분량이 생기고 진리를 조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늦게 믿었어도 별문제 없을 거라고, 남들이 다 진리 실제에 들어가면 그때는 너도 들어갈 수 있고 절대 뒤떨어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되며,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반드시 뒤떨어질 것이다. 하나님을 늦게 믿었다면 걱정해야 하고, 분발해서 바짝 좇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갈 수 있고, 뒤처져 도태되는 일을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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