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추구의 중요성과 길 (제 2 부)

자신을 알려면 반드시 자신의 패괴 표출과 패괴 성품, 치명적인 약점, 본성 본질을 알아야 하며,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드러내는 모든 면면을 알아야 한다. 집에서나 외부에서 예배드릴 때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때, 또는 매번 일이 임할 때마다 너의 마음가짐과 관점, 그리고 각각의 일을 대하는 태도 등 측면에서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자기 자신을 더 깊게 인식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성과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 말씀의 심판을 받아들일 때, 고생스럽지 않을까, 고통스럽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마라. 나아가 하나님 말씀이 너희의 마음을 찌르지 않을까, 추태를 폭로하지 않을까 겁낼 필요도 없다.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은 너무나 유익하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말씀, 특히 하나님이 인류의 패괴된 본질을 폭로한 말씀을 많이 보아야 한다. 또한, 자신의 실제 내적 상태에 많이 결부하여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많이 비추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폭로한 여러 내적 상태가 각 사람에게 적지 않게 존재하므로 전부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해 볼 수 있다. 믿지 못하겠으면 체험해 보아라. 체험할수록 자신에 대한 인식이 더 많아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정확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도 그것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지 못하며, 일부 말씀은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사람을 음녀, 기생이라고 폭로했는데, 이를 두고 어떤 자매들은 자신은 남편에게 충실하니 그 말씀은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자매들은 자신은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음란한 짓도 한 적이 없으니, 그 말씀은 자신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편, 어떤 형제들은 그 말씀이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니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폭로하는 말씀이 너무 엄하고 실제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에도 틀린 부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올바른 태도겠느냐?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다. 사람은 모두 외적인 행위로 남을 평가하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자신을 반성하여 사람의 패괴된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다. 위에서 말한 ‘기생’, ‘음녀’란 패괴되고 불결하며 음란한 인류의 본질을 의미한다. 네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결혼했든 하지 않았든 사람은 모두 음란하고 패괴된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너와 아무 관계가 없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폭로한 것은 사람의 패괴 성품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패괴된 정도는 모두 같다. 이것이 사실 아니더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다 진리이고 사실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심판하고 폭로하는 말씀이 얼마나 엄하든, 진리를 교제하며 사람을 권면하는 말씀이 얼마나 부드럽든, 심판이든 축복이든, 정죄이든 저주이든, 괴롭게 느껴지든 달콤하게 느껴지든 사람은 다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마땅히 지녀야 할 태도이다. 이것은 어떤 태도겠느냐? 경건한 태도겠느냐, 독실한 태도겠느냐, 인내하는 태도겠느냐, 아니면 고통을 감내하려는 태도겠느냐? 너희는 약간 혼란스러워하니 내가 알려 주겠다. 전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이 진리라고 확신해야 한다. 진리인 이상, 사람은 마땅히 그것을 이성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것을 알 수 있든 없든, 인정할 수 있든 없든, 가져야 할 첫 번째 태도는 하나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이 너나 너희를 폭로한 것이 아니라면, 누구를 폭로한 것이겠느냐? 너를 폭로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면 어떻게 너에게 받아들이라고 하겠느냐? 이는 모순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패괴된 인류를 폭로하는 것이니, 모든 사람에게 몫이 있다. 물론 너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의 표면적인 현상이나 내적 상태를 다루는 것도, 더욱이 외적인 규례나 단순한 행위에 대해 폭로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네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사람의 단순한 행위나 표면적인 현상을 폭로한 것으로 여긴다면, 너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며,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심오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점이 심오하겠느냐?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폭로하는 것은 사람의 패괴된 성품과 사람의 생명 안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본질적인 것이다. 이는 본질적인 것이지 표면적인 현상도 더욱이 외적인 행위도 아니다. 겉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은 악령이고 어떤 사람들은 더러운 귀신이라고 하겠느냐? 이것이 바로 네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사람의 관념과 상상, 떠도는 말을 근거로 하나님 말씀을 대해서는 안 되며, 집권당의 주장을 근거로 하나님 말씀을 대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다. 사람의 말은 전부 궤변이다. 이렇게 교제하고 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너희의 태도에 약간의 변화가 생기지 않았느냐? 그 변화가 얼마나 크든, 적어도 앞으로 너희는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폭로하는 말씀을 볼 때 더 이상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려 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폭로하고 심판하시는 말씀은 너무 엄해. 이 페이지는 보지 말고 넘어가야겠어. 축복의 말씀, 약속의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아야겠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는 이렇게 자기 뜻대로 하나님 말씀을 골라 읽지는 않을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야 패괴 성품이 정결케 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

너희는 지금 하나님 말씀이 모두 진리임을 알고, 또 진리를 추구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여전히 자신의 취향과 선택이 있고, 여전히 본인 뜻에 따른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가장 읽기 좋아하고, 특히 약속의 말씀은 절대 잊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말씀을 보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거나 기대가 생긴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 약간 의욕과 동력을 느낀다.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폭로하는 말씀은 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람을 폭로하는 말씀, 심판하고 형벌하는 말씀만 보면 마음이 찔려 하나님 믿을 의욕이 사라진다. 그러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겠느냐? 지금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이 비밀을 밝히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너무 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축복의 말씀은 너무 요원하게 느껴진다.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 성품을 폭로하는 말씀은 그나마 조금 이해가 된다. 그런데 어떤 말씀은 자신과 대조해 볼 수 있고 속으로 그것이 맞다고 인정하면서도 받아들이려고는 하지 않는다. 사람이 얼마나 까다로우냐! 진리임을 알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축복받기 원하지만 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먹고 마셔야 적합할까? 우선 비밀을 밝히는 말씀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런 말씀을 읽으면 하나님이 삼층천에 있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이 무척 위대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마땅히 경외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며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당신은 너무도 위대하십니다! 당신은 지극히 높으십니다! 당신은 만물의 주재자십니다. 제 운명을 결정하실 수 있으십니다! 당신께서 안배하신 제 주변의 모든 일에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께 경외심이 조금 생겨난다. 사람은 누구나 위대한 하나님을 믿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기 전에 첫째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사람들을 향해 말씀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마음이 생기고, 쉽게 관념을 갖지 않는다. 둘째는 하나님이 약속하고 축복하는 말씀을 찾아 먹고 마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축복하는 말을 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감격한다. “하나님, 당신은 너무나 사랑스러우십니다! 당신은 저희에게 경배받아 마땅하십니다! 당신이 저희에게 내리신 축복을 받아들이기 원하고, 당신이 저희에게 내리신 약속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원합니다. 다만 저희가 지금 분량이 작고, 생명이 아직 자라지 않아서 당신의 약속과 축복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습니다. 부디 많이 공급해 주십시오!” 축복의 말씀을 보니 얼마나 좋으냐! 그리고 또다시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축복일까? 하나님은 그때가 되면 모든 재난이 절대 사람에게 닥치지 않고, 세끼 먹고 씻는 번거로운 일상에서도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시겠다고, 이런저런 약속의 말씀을 하셨지.’ 사람은 읽을수록 신이 난다. 하지만 아무리 신이 나더라도 진리 추구를 잊지 마라. 셋째는 하나님이 인류의 패괴 성품, 패괴 본질을 폭로하는 방면의 말씀을 읽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 본질을 폭로하는 방면의 말씀은 매번 많은 분량을 먹고 마시기보다는 한두 항목 정도만 먹고 마시면 된다. 그런 다음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 자신과 대조가 안 되는 부분은 제쳐 두고, 대조할 수 있는 부분을 잘 생각해 보면 서서히 자신의 내적 상태를 인식하게 된다. 네가 자신의 패괴 성품을 진정으로 인식하고, 깨달은 진리가 점점 늘어나면, 어느새 자신의 본성 본질을 간파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떠냐? (좋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약을 먹일 때 우선은 맛있는 것으로 아이를 달랜 다음 아이가 부주의한 틈을 타서 약을 한 입 먹인다. 아이가 쓰다고 하면 다시 사탕 두 개로 달래면, 마저 약을 먹게 된다. 하지만 아이가 크면 그럴 필요가 없다. 아이는 약이 쓴 걸 알면서도 스스로 먹을 것이다. 이는 분량의 문제다. 네게 그런 분량이 없다면, 하나님 말씀 중에 사람의 패괴 본성을 폭로하는 방면의 말씀과 관련된 진리를 찾아서 본인에게 대조해 보게 하고, 하루 종일 그런 말씀을 먹고 마시라고 할 경우, 시간이 지나면 그 일이 싫어진다. 아직은 너의 체험이 이르지 못하고 무르익지 않은 까닭에 중간에 사탕 같은 보상이 필요하다. 분량이 작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이런 식으로 먹고 마셔야 한다. 자주 연약해지고 소극적인 사람이라서 진실한 믿음과 바람이 없다면, 얼른 하나님이 축복하고 약속하는 방면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이 비밀을 밝히는 방면의 말씀을 찾아 먹고 마셔라. 그러다가 의욕이 생겨나고 하나님과 좀 더 가까워지는 것 같으면,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듯, 얼른 심판 형벌 방면의 말씀을 찾아 먹고 마셔라. 이렇게 하면 쉽게 효과를 볼 수 있고, 생명 성장이 지체되지 않을 것이다. 분량이 작을 때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려면 조절이 필요하다. 기분이 좋고 빨리 자라는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대로 먹고 마시면 되고, 본인이 닿을 수 있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먹고 마시면 된다. 닿지 못하는 부분은 우선 제쳐 두고, 먹고 마셔서 이해되는 부분은 실행하고 체험해라.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체험할 수 있고, 네가 깨달은 진리를 실행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다.

전에 누가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언제 지상을 떠나는지 연구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이란 것이 밤낮으로 이것만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계속 이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정확한 답을 찾아내기 위해, 하나님이 떠나는 때, 그때 나타날 징조, 교회 사람들이 보일 반응 등, 하나님이 지상을 떠나는 방면에 관한 말씀을 모두 취합하고, 주석 성경을 보듯 차례대로 하나하나 대조해 가며 계속 고민하면서 종합적으로 분석했다. 그가 들인 노력이 대단하지 않으냐? 이 사람이 하나님에게 얼마나 ‘관심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냐! 하나님이 지상을 떠나는 일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이 사실을 안 그는 이 일을 제일 중요한 일로 여겼다.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에 이르는 일보다도 이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 말씀에서 어떤 진리를 구하는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말씀들을 모두 모아서 마지막에 ‘답’을 찾아냈다. 그가 연구한 결과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 하나님을 믿는 그의 추구 관점과 추구 방식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들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냐? 그런 노고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상을 떠나는 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나님은 자신이 올 때도 너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떠날 때도 네가 모르게 떠날 것이다. 하나님은 많은 일을 사람이 모르게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사람이 알 필요가 없어서다. 사람이 알면 나중에 좋을 것도 없고, 사람의 미래 종착지에도 아무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사람이 알게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성육신했다. 그 어떤 비밀도, 그 어떤 방면의 진리도, 그 어떤 일도 모르는 게 없고, 모두 사람에게 말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알 필요도 없고 사람에게 알릴 필요도 없는 일들도 있다. 하나님이 언제 지상을 떠나고, 언제 사역을 끝낼지, 이런 일이 사람과 관계가 있느냐? 아무런 관계가 없다! “어떻게 관계가 없습니까? 제가 진리 추구가 늦어지면 어떡합니까? 저는 하나님의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고 그날에 맞게 추구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이런 자는 어리석지 않으냐?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냐? 전혀 아니다!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런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진리 추구에 도움도 안 되고, 아무런 의의가 없다. 그래서 그런 무의미한 화제에 신경 쓰거나 공을 들이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날이 언제 오는지에만 관심을 쏟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개인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냐? 늘 하나님의 날이 언제 오는지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네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이냐? 네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냐? 네가 하나님을 증거했다는 뜻이냐? 네가 하나님나라의 복음 확장에 공헌했다는 뜻이냐? 네가 선행을 얼마나 예비했는지, 네가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는지, 어떤 진리 실제에 진입했는지와 같은 일이야말로 네가 가장 관심을 두어야 할 일이다. 너는 하나님의 소식에만 귀를 쫑긋 세우고,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만 관심 있고, 비밀만 캐내려 한다. 그런데 그것은 호기심에 불과할 뿐,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도 아니고, 하나님 마음을 헤아리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비밀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진리 추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너희는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존중하겠느냐? 감탄하겠느냐? 부러워하겠느냐? 그가 그런 비밀을 찾도록 도와주겠느냐? 아니다. 너는 분명 그를 멸시하며 말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진리를 추구하고, 자신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알려면 한참 멀었어요.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했어요. 구하고 깨닫고 실행해야 할 여러 측면의 진리가 많으니 굳이 그런 비밀을 연구하느라 애를 쓸 필요가 없죠.” 사실 마음에 하나님이 있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는 한, 정말 그날이 왔을 때 하나님이 네가 모르게 두지 않을 것이고,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에 대한 믿음과 인식이 있어야 한다. 네게 그런 믿음과 인식이 있다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네게 알려 줄 생각이 있다면, 너에게 직접 말하지 않겠느냐? 굳이 돌려서 말하겠느냐? 말 속에 말을 숨기겠느냐? 숨길 필요가 있겠느냐?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진리다. 그의 모든 사역과 말씀, 그의 뜻에서 나타내는 것은 모두 진리로, 사람에게 전혀 숨길 리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은 네가 알아볼 필요도 없고, 골똘히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일에 아무리 공을 들여 봤자 헛수고다. 눈곱만큼도 가치가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 혐오받는다. 하나님이 왜 혐오하겠느냐? 우선 이걸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는 무척 많아 온갖 방면의 진리가 다 있다. 일이 생겼을 때 진리를 구해 자신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너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호기심이 너무 강한 사람, 엉뚱한 것만 파헤치는 사람, 하나님 말씀을 너무 가벼이, 무성의하게 대하는 사람이다. 네 마음에는 하나님의 자리는 없고, 오로지 하나님이 네게 알려 주고 싶지 않은 일로만 가득하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거하는 삼층천은 어떤 곳이고 어디에 있는지, 나중에 하나님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지, 성육신 하나님은 언제 지상을 떠나는지와 같은 일들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너를 혐오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혐오할 만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 자식이 하루 종일 해야 할 숙제도 하지 않으면서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빠는 엄마를 어떻게 만났을까? 나는 어떻게 태어났지? 나를 낳고서 두 분은 나를 좋아하셨을까? 우리 집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부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만 하고 늘 그런 문제를 연구한다면, 너는 이런 아이에게 반감이 들지 않겠느냐? 아이의 이런 행동을 혐오하지 않겠느냐? 네 아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느냐? 바로 열심히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이다. 네가 아이에게 가지는 마음이 이럴진대,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지는 마음은 오죽하겠느냐? 사람이 바른길을 가고 본연의 일을 하길 바라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사람이 그의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관찰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또 사람이 그에게 쓸데없이 공을 들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날이 언제 오는지만 연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건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의심하고 대적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선포한 그 많은 진리는 소중히 여기지 않고, 추구하지도 않는데 이것은 무엇이 문제냐? 경건한 사람이라면 범사에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 말씀을 읽은 뒤 그 말씀이 진리임을 인정하고 실행하고 순종할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진리임을 믿지 않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연구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 자신의 본분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고, 공을 들이거나 대가를 치르지도 않는다. 그러면서 늘 하나님이 지상을 떠날 때는 언제이고, 재난을 내리는 때는 언제인지, 하나님의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와 같은 일에만 관심을 쏟는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지상을 떠난 다음에도 사람과 만날지, 하나님이 떠난 다음에 하는 사역도 지금과 같을지, 지상을 떠난 다음 삼층천에 올라 얼마나 머물지, 하나님이 또 오는지, 미래의 하나님나라시대에는 천사가 있을지, 천사는 사람과 왕래를 할지 등과 같은 괴상한 주제에만 매달린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주제를 연구하는 것을 혐오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중시해야 할까? 성육신한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야 할지, 하나님의 사역을 어떻게 알아야 할지, 하나님이 하는 모든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이런 것이 사람이 해야 할 일이자 우선적으로 이해하고 진입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다. 네가 이런 진리를 깨닫고 진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다.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헛된 구호로, 아무런 실제 내용도 없다. 네가 뒤에서 비밀에 관한 일이나 하나님이 떠나는 때에 관한 일만 생각한다거나 너희끼리 모여 하나님의 육신이 어디에 강생했는지, 하나님이 어떤 가정에서 태어났고 가정 배경은 어떤지, 하나님 육신의 생활은 어떤지, 하나님 육신의 나이는 몇이고 교육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하나님을 믿은 적이 있는지, 성경은 읽어 봤는지, 예수를 얼마 동안 믿었는지 등, 이런 일에 대해서만 연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육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에게 그의 성품을 알고, 그의 본질을 알고, 나아가 그의 뜻을 깨달아 그에게 순종하고, 진리를 실행하여 그를 만족게 하라는 것이지, 너더러 그를 연구하고 뒤에서 그를 놓고 뒷공론하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육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이번 사역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 우리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경건한 태도로 하나님의 소유와 어떠함, 그리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대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이성이자 인성이다. 네가 지금 하나님에 대해 별다른 인식이 없다면 얘기하지 마라. 자신을 인식하는 것,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지, 어떻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하는지 등에 관해서만 얘기해야 한다. 이런 방면의 진리를 갖춰야 한다. 언젠가 네가 하나님에 대한 약간의 참된 인식이 생겼다고 느낄 때, 그때는 같이 교제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육신 방면의 정보나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은 비밀 등은 가급적 언급하지 마라. 자칫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쉽다. 하나님께 정죄받아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이 되면, 성령은 너를 버릴 것이다. 이 일을 간파해야 한다. 늘 하나님을 연구하고 떠도는 소문만 캐고 다니는 일이 진리 추구를 대신할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 도움이 되느냐? 이런 것도 간파하지 못하면 너무나 우매하고 무지한 사람이 아니냐?

진리를 추구하는 데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데 이토록 많은 진리를 선포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이 많은 진리를 깨달으라고 하느냐?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패괴 성품을 해결할 수 있느냐? 이런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느냐?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느냐? 이런 진리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구원받으려면 이런 진리들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느냐? 이런 진리를 깨닫는 것이 간단한 일이냐? 심판과 형벌을 겪지 않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느냐? 책망과 훈계를 겪지 않고 자신을 알 수 있느냐? 자신을 알지 못하면 진실로 회개할 수 있느냐? 진실된 회개 없이 구원받을 수 있느냐? 이 진리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으면서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이고, 구원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깨달아야 할 진리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계속 흐리멍덩하며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믿는 의의를 잃어버리게 된다.

2007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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