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6) 제 1 부

지난번에는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에서 ‘내려놓기’의 실행 원칙에 대해 교제하였다. ‘내려놓기’의 첫 번째 항목은 바로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교제했다. 지난번에 억압이라는 측면의 부정적 정서에 대해 교제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억압 측면의 부정적 정서에 대해 우리는 어떤 내용을 교제하였느냐? 무엇 때문에 사람에게 억압이 일어나느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본분을 제멋대로 이행하고, 교회의 규정과 제도를 준수하려 하지 않으며 단속받으려 하지도 않는다고 교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하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아 본분을 잘 이행하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늘 책망과 훈계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반성하지 않고 진리를 구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니 억압이라는 정서에 처한다고 하셨습니다.) 지난번에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생기는 상황 중 하나에 대해서 교제하였는데 제멋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사람이 제멋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 사람이 제멋대로 하고자 하는 일, 사람이 억압이라는 정서 속에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주로 교제한 다음, 억압이라는 정서를 해결하는 길에 대해 교제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이 부정적 정서를 나타내는 모습을 폭로한 것이든,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는 방법을 알려 준 것이든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 내려놓기에 대한 몇 차례의 교제를 통해 너희가 얻은 결론이 있느냐? 부정적 정서 내려놓기 측면에서 주로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겨냥하느냐? 교제를 다 듣고 나서 묵상해 보았느냐? (하나님, 저는 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을 겨냥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 그것이 하나의 측면이다. 일을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을 겨냥한 것이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람이 여러 사람, 일, 사물에 대해 지니는 여러 가지 생각과 관점에 연관되며, 주로 사람이 정상 인성의 생활과 생존 측면에서 직면하는 여러 문제를 겨냥한 것이다. 예컨대, 어떻게 다른 사람과 지내고 어떻게 원한을 풀며 결혼과 가정, 일, 앞날, 질병, 노화, 죽음, 그리고 일상다반사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자신이 이행해야 할 본분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등 다방면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런 것들에 연관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정상 인성의 생활과 생존 측면에 연관되는 여러 가지 큰 문제와 원칙성에 연관되는 문제를 사람이 정확한 생각과 관점 그리고 올바른 태도로 대한다면 이런 인성은 상대적으로 정상이다. 여기서 정상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이성을 지니고 있고, 사물을 바라보는 정상적인 시각과 입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정확한 생각과 관점을 갖춘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야 수월하게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진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정상적인 관점과 시각, 입장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추구해야만 어느 정도의 결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시각과 입장 그리고 지니고 있는 생각과 관점, 태도 등 다방면이 부정적이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극단적이고 고집스러우며 순수하지 않다면, 결론적으로 부정적이고 그릇되며 의기소침한 것에 속한다면 이런 부정적인 생각과 관점을 가진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지금 너희는 도리상 쉽지 않다고 가벼이 말하겠지만 사실 너희는 진정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지금 교제하는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와 관련하여 만약 삶에서, 그리고 인생의 길에서 여러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견해가 모두 잘못되고 부정적인 시각과 입장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늘 부정적 정서 속에 살아간다면 그가 순수하게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가 늘 부정적 정서의 생각과 관점의 지배와 통제, 영향을 받는다면 모든 일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과 입장, 그리고 직면한 일에 대해 생기는 여러 가지 견해가 모두 부정적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먼저 사실과 객관적 규칙에 위배되고, 사람이 순응해야 할 자연법칙에 위배되고, 하나님의 주재라는 사실에 위배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지닌 부정적 생각과 관점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거나 읽는다면 하나님 말씀을 진실로 받아들이거나 순종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너희가 예를 들어 이 일을 설명해 보거라. 너희가 알아들었는지 보겠다. 결혼, 혈육 간의 정, 자녀 등 사람의 삶과 생존에서 직면하는 일이나 병, 앞날, 운명, 인생이 순조로울지 여부, 자신의 가치, 지위, 이익 등의 큰일에서 사례를 찾아보거라. (저는 지난번에 사람이 병에 걸리면 근심, 염려, 걱정 등의 부정적 정서 속에 살면서 죽음을 무척 두려워하고, 본분 이행과 자신의 정상적인 생활에도 영향을 받아 이 객관적 규칙에 순응할 수 없게 된다고 하나님께서 교제하신 게 생각났습니다. 사실 사람의 생사존망이나 사람이 언제 병에 걸려 얼마나 고생할지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기에 사람은 올바르고 적극적인 태도로 그런 환경을 마주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치료가 필요하면 치료를 받고 이행해야 할 본분은 이행해야 합니다. 병에 빠져 있지 않고 적극적인 생활 상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부정적 정서 속에 살면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못하고 사람의 생사를 모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믿지 못한 채 질병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염려하면서 갈수록 두렵고 불안해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신다는 진리가 내면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무척 좋은 사례를 들었구나. 이것은 생사존망의 큰일을 대할 때 사람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연관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주제를 너희는 다들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느냐? 이것은 생사에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가 정상 인성 범위에 연관되겠느냐? (연관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직면해야 할 큰 문제이다. 설령 네가 아직 젊고 몸이 아주 건장할지라도, 그리고 아직 생사의 문제에 직면하거나 그것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이런 문제에 부닥치게 될 터이니, 모든 사람이 직면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마주할 때 당장 그 상황에 처했든 아니면 아직 멀었든 결론적으로 이것은 정상인으로서 인생에서 부닥치게 되는 가장 큰 사건이다.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이 큰일에 대하여 사람은 이 일이 임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인위적인 방법을 취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한 관점을 가져야 하겠느냐? 이것이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만약 부정적 정서 속에 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느냐?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예전에 교제한 바 있다. 만약 사람이 부정적 정서의 생각이나 사상과 관점에 의지해 살아간다면 사람의 행동과 모습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정상 인성의 사고에 부합하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 (정상 인성의 사고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정상 인성의 사고에 부합하지 않을뿐더러 진리에는 더더욱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객관적 사실과 객관적 법칙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주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 내려놓기를 교제함으로써 결국 어떤 성과에 도달하겠느냐? 이 ‘내려놓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고 어떻게 실행해야 정상 인성의 사고와 이성을 갖출 수 있으며, 정상 인성의 이성에 갖춰져야 할 생각과 견해 혹은 관점을 갖추었다 할 수 있겠느냐? 이 ‘내려놓기’의 구체적 실행 절차나 실행 방법은 무엇이냐? 우선 직면한 일에 대한 네 관점이 정확한지, 부정적 정서를 품고 있지는 않는지 인식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첫걸음이다. 예컨대 방금 우리가 들었던 병이나 죽음을 대하는 사례의 경우, 먼저 이 일에 대한 네 관점이 무엇인지, 네 관점에 부정적 정서를 품고 있지는 않는지를 해부하는 것이다. 즉, 이 측면의 일에 대해 네가 근심, 염려, 걱정을 품고 있는지, 너의 근심, 염려, 걱정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 문제의 근원을 파헤치고 뒤이어 해부하면 자신이 이 측면의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주재가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설령 병에 걸렸거나 죽음에 직면했다고 해도 그 속에 빠지면 안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해야 한다. 병이나 죽음 때문에 쓰러지거나 이 일에 압도되어서도 안 되며,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그로 인해 자신의 정상적인 삶과 정상적인 본분 이행이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투병 중에도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재를 경험하고 체험하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 필요시에는 치료를 받으면서 적극적으로 마주하고 경험하며 체험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일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람은 그저 할 수 있는 바를 다한 후 하늘의 뜻에 따라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의 생사존망을 하나님이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설령 사람이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의 마지막 결과는 사람의 의지에 의해 바뀌지 않으며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더냐? (그렇습니다.) 병에 걸리면 먼저 자기 마음속에 어떤 부정적 정서가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마음속에는 어떤 관점이 있으며 부정적 정서의 통제나 속박을 받고 있지는 않는지, 이런 부정적 정서는 어떻게 생긴 것인지 살펴보고 네가 병으로 인해 무엇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불안해하고 내려놓지 못하는지 등을 해부해야 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는 것이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살펴본 후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결해야 한다. 먼저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자기에게 있는지 파헤쳐 보고 해부하고,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없는지 해부하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진리에 부합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아 차근차근 진리를 구하여 해결해야 한다. 또 이런 부정적인 것들에 시달리거나 영향 혹은 구속을 받아 네 정상적인 삶과 일,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거나 네 삶의 규칙을 방해하지 않도록, 물론 네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는 더욱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컨대, 최종적으로 이성적이고 올바르게, 객관적이며 정확하게 네가 직면한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 문제들을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려놓기의 과정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다. 너희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이 무엇인지 정리해 보거라. (먼저 자신이 직면한 일을 꿰뚫어 보고 이 과정에서 자기에게 부정적 정서가 없는지 해부한 다음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 진리를 구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런 부정적 정서에 시달리거나 삶,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하고, 또한 자신이 직면한 일이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서 비롯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런 인식이 있어야만 사람이 순종할 수 있으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실행이 가능할 것입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일반적으로 사람이 부정적 정서 속에 살다가 병에 걸리면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네게 부정적 정서가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먼저 무척 두려워하며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병이지? 치료를 못 하면 엄청나게 고생하지 않을까? 결국 죽는 거 아닐까? 앞으로 본분은 이행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걱정하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몸조리에 신경 쓰면서 본분 이행에는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가를 덜 치르면 병세가 좋아질 거라 생각하는 것이죠. 이것은 모두 부정적 정서입니다.) 부정적 정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파헤칠 수 있다. 한 측면으로는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너 자신이 알 수 있다는 점이다. 병에 걸리면 너는 생각할 것이다. ‘아, 어쩌다 이런 병에 걸렸을까? 다른 사람한테서 옮은 거 아냐? 아니면 피곤해서? 이러다 더 피곤해지면 병세가 심각해지는 거 아냐? 더 고통스러워지지 않을까?’ 이것이 한 측면이다. 생각하는 것을 네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 측면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면 너는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 사람은 생각이 생기면 행동도 그에 따라서 영향을 받는다. 사람의 행동, 모습, 행동 방식은 모두 사람의 여러 가지 생각에 지배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부정적 정서가 생기면 여러 가지 생각이 들 것이고 그런 생각에 지배되어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의 태도나 행동 방식이 다소 바뀌게 된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일찍 일어나 본분 이행을 시작했다면 지금은 일어날 때까지 고심한다. ‘이 병이 피곤해서 생긴 것 아닐까? 좀 더 자는 게 좋겠어. 그동안 너무 힘들게 고생했어. 이제 병세가 심해지지 않도록 몸조리 좀 해야겠어.’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지배되어 일어나는 시간이 늦어진다. 먹을 때도 고민한다. ‘내가 병에 걸린 건 아마 영양 결핍과 관련이 있을 거야. 예전에는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었지만 이젠 가려 먹어야 해. 달걀이나 고기를 좀 많이 먹어야겠어. 그래야 영양도 괜찮아지고 몸이 건강해져서 병 때문에 고생을 안 하지.’ 본분을 이행할 때도 그는 어떻게 몸조리해야 할지 골몰한다. 예전에는 한두 시간 연속으로 사역해도 기껏해야 허리 스트레칭을 하거나 잠깐 일어나서 몸을 풀어 주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예 30분 몸을 풀어 주는 것으로 정해 놓고 몸이 힘들지 않게 한다. 예배 시간에 교제할 때는 최대한 말을 아끼면서 ‘몸조리하는 법을 배워야 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누가 질문을 하면 언제라도 답해 주었지만 이제는 말수를 줄이면서 체력을 아낀다. 누구든 질문이 길어지면 그는 “이제 좀 쉬어야겠어요.”라고 말한다. 예전과 달리 자기 몸을 무척이나 아끼는 저 변화된 모습을 보아라. 평소에 신경 써서 영양제를 먹고 정기적으로 과일도 챙겨 먹으면서 운동한다. 그는 ‘예전에는 너무 무식했어. 몸 챙길 줄도 모르고 먹고 싶을 때마다 폭식했어. 지금은 몸이 성치 않으니 몸조리에 소홀하면 안 돼. 병이 악화해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면 복을 받을 수 없잖아? 앞으로 몸조리에 신경 좀 써야겠어. 몸에 또 다른 증상이 나타나게 할 순 없어.’라고 생각한다. 그가 몸조리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서 본분 이행에는 온 힘을 쏟지 않으며 심지어 예전에 본분을 이행하며 치렀던 대가를 달가워하지 않으며 후회한다. 이것은 부정적 정서의 영향으로 생긴 생각과 행동이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과 행동은 부정적 정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의 부정적 정서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갈수록 커지게 하고 갈수록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게 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 충성심 없이 본분을 건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그럼 그가 일을 처리할 때 진리를 구하고 진리 원칙대로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런 부정적 정서에 지배되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진리는 한쪽에 제쳐 둔 채 진리를 사랑하지도, 실행하지도 않을 것이다.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부정적 정서가 야기한 생각대로 행하고 실행할 것이다. 그럼 이런 사람이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이런 생각이 정상 인성으로 가져야 할 생각이겠느냐? (아닙니다.) 정상 인성으로 가져야 할 생각이 아니라면 너희 생각에는 어디가 틀렸느냐? (사람에게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습니다. 사실 이런 병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이 받아야 할 고통이 얼마나 되는지도 하나님의 정하신 바와 안배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부정적 정서 속에 살면 잔꾀를 부리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생각과 관점에 지배되어 인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육체를 아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토록 육체를 아끼는 것이 올바른 것이더냐? 사람이 늘 육체를 돌보면서 토실토실 건강하게 몸을 관리하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느냐? 그렇게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한 사람의 삶의 가치는 무엇이겠느냐? 그저 육적으로 놀고먹기 위함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너희가 말해 보거라.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면서 최소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맞다. 한 사람이 평생 병과 죽음을 모면하려 하거나 몸을 잘 보살펴서 병에 걸리지 않고 장수하려는 생각밖에 없다면, 이것이 사람이 살면서 가져야 할 가치이겠느냐?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 살면서 가져야 할 가치가 아니다. 그럼 사람이 살면서 가져야 할 가치는 무엇이겠느냐? 방금 누가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구체적인 부분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평소 너희가 기도하거나 뜻을 세울 때 가졌던 소망을 말해 보거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정해 놓은 역할 가운데 자신의 역할을 잘 감당하여 자신의 사명과 책임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또 무엇이 있느냐? 한편으로는 피조물의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힘이 닿는 것,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다. 최소한 양심에 참소가 없고, 본인의 양심에 떳떳하며,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는 정도까지는 되어야 한다. 조금 더 나아가서는 태어난 가정, 교육 수준, 자질을 떠나 사람의 생존에서 알아야 할 도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 예컨대 사람이 걸어야 할 길, 사람이 살아야 할 삶, 의미 있는 삶 등 인생의 참된 가치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한 번 사는 삶을 헛되이 살아서는 안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네가 사는 동안 너는 네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대단한 사명과 본분,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최소한 한 가지는 성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회의 복음 전파 사역에 온 힘을 기울이며 평생을 쏟아붓고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많은 사람을 얻은 사람이 있다.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의 삶이 헛되지 않고 가치 있다고 위안을 느낀다. 그가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하거나 생을 마감할 때 그가 한 이 모든 일과 걸었던 길을 돌이켜 보면서 마음에 위로받고 참소가 없으며 아쉬움도 없다. 그리고 교회 리더를 맡거나 한 측면의 사역을 담당할 때 여력을 남기지 않고 자기 역량의 최대치를 발휘하며 온 힘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해야 할 사역에 모든 심혈을 기울이며 대가를 치르는데 많은 사람이 연약하고 부정적일 때 그의 양육과 인도, 도움과 붙듦 덕분에 강건해지고 일어서며,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증거하게 된다. 이 외에도 그가 리더를 맡는 동안 여러 중요한 사역을 완수하여 많은 악인을 제명하고 적지 않은 하나님의 선민을 보호하며 일부 막대한 손실을 만회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그가 리더를 맡은 기간에 이룬 것이다. 자신이 걸었던 길과 그동안 감당했던 사역, 치렀던 대가를 돌이켜 보면 아쉬움도, 참소도 없으니,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고, 가치 있게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마음이 편안하고 위안을 느낀다. 이러면 얼마나 좋으냐! 이것이 성과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편안하고 위안을 느끼고, 아쉬움이 없는 것은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를 추구하여 얻게 되는 효과이자 수확이다. 우리는 사람에게 높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저 사람이 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하기 좋아하는 일에 직면하게 되는 상황을 얘기해 보자. 자신의 위치를 찾은 후 자기 본연의 위치에 제대로 서서 그 본연의 위치를 지키면서 모든 심혈을 기울이고 대가를 치르며 온 힘을 다해 자기가 해야 할 일, 완수해야 할 일을 잘해 낸다면,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얘기할 때 스스로 마음에 참소나 아쉬움 없이 상대적으로 만족감을 느끼고, 위안과 수확이 있으니 값진 삶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목표가 큰 것이냐? 크고 작음을 떠나 참된 것인지 대답해 보거라. (참됩니다.) 구체적이지 않으냐? 충분히 구체적이고 참되며 실제적이다. 네 삶이 값지고 마지막에 이런 수확을 얻기 위해 네 육체가 피로하여 병에 걸리거나 몸이 병들더라도 약간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 의미 있지 않겠느냐? (의미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육적으로 즐기려는 것도 그저 놀고먹는 것을 위한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의 삶의 가치가 아니며 올바른 길도 아니다. 사람의 삶의 가치, 걸어야 할 올바른 길은 가치 있는 일을 해내는 것이고, 한 가지 혹은 여러 가지 가치 있는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업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올바른 길, 올바른 일이라 한다. 네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하나의 가치 있는 일을 완수하기 위해, 의미 있고 값진 삶을 살고 진리를 추구하고 얻기 위해 대가를 치르는 것이 가치 있지 않겠느냐? 네가 만약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는 것을 추구하고 인생의 바른길을 걷기를 원하며,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의미 있고 값진 삶을 살기 원한다면 너는 온 힘을 기울이고 대가를 치르며 시간과 세월을 들이는 것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 기간에 병이 들어도 대수가 아니다. 그것이 너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평생 온종일 빈둥거리며 토실토실 건강하게 관리한 몸으로 장수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둘을 비교하면 어떤 삶이 가치 있고 죽음에 직면했을 때 마음에 위안이 되고 아쉬움이 남지 않겠느냐? (의미 있는 삶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 내면 마음속에 수확과 위안이 있다. 토실토실 살만 찌워 죽을 때가 되어서도 혈색이 좋은 사람은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지 않았으니 죽을 때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헛된 삶이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세 글자로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 헛된 삶이다! ‘헛된 삶’이란 무슨 의미겠느냐? (인생을 허비했다는 것입니다.) 헛된 삶, 허비한 인생, 이 두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이냐? (삶의 끝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을 얻어야 하느냐? (진리를 얻거나 삶에서 의미 있고 값진 일을 하며 피조물이 해야 할 일을 잘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하지 못하면, 평생 육적인 것을 위해 살면 헛된 삶이었다고, 인생을 허비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죽을 때가 되면 한평생 자기가 한 게 무엇인지 고민해 본다. ‘아, 매일 그저 놀고먹을 생각만 하며 몸은 잘 관리해서 병 한 번 걸리지 않은 평안한 삶이었어. 이제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되었네. 죽으면 지옥에 떨어질까 천국에 갈까? 하나님께서 내 결말을 어떻게 안배하셨을까? 훗날 종착지는 어디일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하다. 육의 안일만 즐기면서 한평생 별생각 없이 살다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불안해하는 것이다. 불안한 마음에 만회해 보려 고심하지 않겠느냐? 그때야 만회하려 고심한들 소용 있겠느냐? (이미 늦었습니다.) 걷고 싶어도 걸을 수 없고 말할 기운도 없다. 대가를 치르고 수고도 하고 싶지만 체력이 받쳐 주지 않는다. 밖에 나가 복음을 전하자니 몸이 따라 주지 않고, 더군다나 깨달은 진리도 없다. 진리를 교제하고 싶어도 할 말이 없으니 만회하기에는 늦었다는 것이다. 찬양을 듣자니 듣다가 잠이 들어 버리고 설교를 듣자니 듣다가 졸기만 하고 기운이 딸려 계속 들을 수가 없다.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어디에 힘을 쏟았는지 생각해 보고는 그 나이에 올바른 일을 하려 하지만 몸이 따라 주지 않아 역부족이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어도 배워지지 않고 반응도 무디기만 하다. 많은 진리가 이해되지 않고 다른 사람과 교제하고 싶어도 다들 바빠 그와 교제할 시간이 없다. 무슨 일을 하든 원칙이나 방법이 없다. 결국 어떻게 되겠느냐? 고민할수록 불안해지고 후회되며 아쉬움만 남는데, 결국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별수가 없다. 만회할 방법이 없이 삶이 끝나는 것이다. 이러면 후회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무 늦어서 시간이 없다. 죽음을 마주할 때 육적인 삶을 누리는 것이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게 되면 돌아서서 진리를 추구하며 본분을 잘 이행하고 무슨 일이라도 좀 해 보고 싶겠지만 어느 측면에서도 할 수가 없고 역부족이다. 그렇게 삶은 그냥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아쉬움과 후회, 불안만 안고 가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이 죽음에 직면하면 그 마지막 결과는 어떻겠느냐? 아쉬움과 후회, 불안을 안고 떠날 수밖에 없다. 평생을 헛되이 산 것이다! 육적으로는 조금도 고생하지 않고 안락만 실컷 누렸다. 바람과 햇빛에 노출되지 않고 그 어떤 위험과 대가도 감수하지 않았다. 병치레는커녕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으며 건강을 잘 관리했다. 단지 아무런 본분도 이행하지 않고, 그 어떤 진리도 얻지 못한 채 죽을 때가 되어서야 아쉬움을 느낀 것이 애석할 뿐이다. 아쉬워해 봐야 어쩌겠느냐? 이것이 바로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값지고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먼저, 삶과 인생의 길에서 직면하는 여러 대소사에 대해 올바른 인생관과 생각, 관점을 가져야 하고, 정확한 시각과 입장으로 모든 일을 바라보아야지, 극단적이거나 과격한 생각과 관점으로 인생 혹은 생활에서 직면하는 여러 문제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물론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 이런 일을 바라보아서도 안 되며 이런 부정적이고 올바르지 못한 생각과 관점은 내려놓아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사람의 여러 부정적 생각을 해부하고 폭로하며 인식한 다음 네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를 바꾸거나 고쳐서 부정적 정서를 내려놓고 정확하고 긍정적인 생각과 관점, 그리고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정확한 시각과 입장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면 진리를 추구할 때 갖추어야 할 양심과 이성을 갖추게 된다. 물론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이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정확한 관점과 시각, 입장을 갖추었다면 이는 정상 인성을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상 인성을 갖추고, 정확한 생각과 관점을 갖춘다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고 별다른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마치 한 사람이 하나의 목적지까지 가는 것과 같다. 만약 그가 걷는 길과 방향만 옳다면 걷는 속도가 어떻든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걷는 길이 그가 가려는 목적지와 반대라면 속도가 어떻든 목적지에서 점점 멀어질 뿐이다. 남원북철이라는 성어가 있지 않으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구원받고자 하면서도 명예와 이익 그리고 지위를 추구하면 구원받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결국 그의 결말은 어떻겠느냐? 징벌받을 것이 분명하다. 암에 걸린 사람을 예로 들면,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하나님에게 죽지 않고 몇 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한다. 그는 근심과 염려, 걱정 등의 부정적 정서를 품고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는 몇 년이 흘러도 죽지 않고 그의 목적을 달성한다. 그는 죽지 않음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며 자신은 운이 좋다고, 하나님은 정말로 선하고 너무나 위대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의 노력과 계속된 요구로,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으로 그가 죽지 않고 바라던 대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 사랑과 긍휼에 감사한다.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그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찬미를 드린다. 찬양을 부를 땐 항상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 무척 선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의 생사를 주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살리셨습니다.’ 매일 본분을 이행할 때도 그는 항상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죽지 않기 위해 남보다 먼저 수고하고 남보다 나중에 즐긴다. 그리고 모든 일을 남보다 더 잘해 낸다. 그 결과 그는 몇 년을 더 살게 되고, 마음속으로 만족과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병세가 심해져 의사에게서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최후의 통지를 받게 된다. 그가 죽음에 직면하였는데, 정말 죽게 된 것이다. 그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그가 가장 두려워하고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다. 그가 가장 보고 싶지도, 느끼고 싶지도 않은 그날이 결국 도래한 것이다. 그는 순식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기분이 바닥에 떨어진다. 다시는 본분을 이행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말이 없어지며 하나님을 찬미하려 하지도 않는다. 다시는 하나님이 하는 말씀이나 공급하는 진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랑이며 공의이자, 긍휼이며 자비임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다. 여기에 후회까지 한다. ‘그동안 맛있는 음식 좀 많이 먹고 시간 될 때 놀러나 다닐걸. 이젠 기회가 없어.’ 머릿속은 원망과 탄식으로 가득하고 마음속은 고통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증오 그리고 부인으로 가득하다. 그렇게 아쉬움을 품고 세상을 떠난다. 그가 떠나기 전에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었겠느냐?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겠느냐? (더 이상 믿지 않았습니다.) 이 결과는 어떻게 초래된 것이겠느냐? 애초에 그가 생사를 바라보는 잘못된 관점에서 비롯되지 않았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더욱 심각한 것은 그 후로도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따르고 순응하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추구해 나갔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잘못된 길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꿋꿋하게 앞으로 돌진하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다. 믿음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고, 그의 인생은 그렇게 끝을 맺은 것이다. 그가 진리를 얻었겠느냐? 하나님은 그를 얻었겠느냐? (아닙니다.) 결국 그가 죽을 때 죽음에 대해 지녔던 관점과 태도가 바뀌었느냐?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는 위안과 기쁨, 평안을 품고 죽었느냐, 아니면 아쉬움과 달갑지 않은 마음, 원망을 품고 죽었느냐? (달갑지 않은 마음과 원망을 품고 죽었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는 진리를 얻지 못했고, 하나님도 그를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했다. 그가 죽기 전에 열심히 뛰어다녔고 많이 헌신하지도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남들처럼 똑같이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했는데, 겉으로는 다른 점을 찾아볼 수 없다. 병과 죽음을 겪으면서 그 역시 하나님에게 기도하였고 심지어 예전 못지않게 본분 이행을 포기하지 않고 사역하였다. 다만 사람이 알고 꿰뚫어 봐야 할 것은 그가 품고 있는 생각과 관점이 늘 부정적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본분을 이행하면서 얼마나 많은 수고와 대가를 치렀는지를 떠나 그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과 관점을 품고 추구했다. 항상 그런 잘못된 생각과 관점에 지배되어 부정적 정서를 품고 본분을 이행했는데, 그런 본분 이행으로 자신의 죽지 않는 결말을 맞바꾸어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 한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목표는 진리를 깨닫거나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목표는 이와 정반대이다. 자신의 뜻과 요구대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염원 중에서 추구하는 바를 얻고자 했고, 자신의 운명, 나아가 생사를 스스로 지배하고 안배하고자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결말을 맞은 것이다. 진리를 얻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마저 부인하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었다. 죽음이 임박해서도 그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지배와 안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것이 가장 가련하고 슬픈 부분이다. 그는 죽음이 임박해서도 사람이 일생동안 살면서 모든 일이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 아래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창조주가 너를 살게 한다면 네가 죽을병에 걸려도 죽지 않을 것이며, 창조주가 너를 죽게 한다면 네가 설령 젊고 건강하며 건장하더라도 죽을 때가 되면 반드시 죽게 될 것임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 아래 있다는 것을, 이것이 하나님의 권병으로, 아무도 이를 뛰어넘을 수 없음을 깨닫지 못했다. 이토록 간단한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했으니 가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고, 예배드리며 설교를 듣고 본분을 이행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생사를 포함한 사람의 운명은 사람의 의지에 의해 바뀌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그는 계속 인정하지 않았다. 아무도 자기가 죽고 싶어서 죽는 것이 아니며, 살아 있다고 해도 죽는 게 무서워 살기를 바랐기 때문에 생존하는 것도 아니다. 이토록 단순한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했고, 죽음이 임박해서도 꿰뚫어 보지 못했으며, 사람의 생사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창조주가 정해 놓은 것이라는 점도 알지 못했다. 슬프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비록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사소한 듯 보여도 그런 부정적 정서는 한 사람이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사람이나 일을 어떤 태도로 바라볼 것인가와 연관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만약 정상 인성의 삶과 생존에서 직면하는 다방면의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이 사람의 부정적 정서는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또한 이 사람의 양심과 이성은 상대적으로 정상적이며 그가 진리를 추구하여 실제에 진입하는 데 어려움이나 장애가 적어 수월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한 사람의 마음이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로 가득하다면, 그러니까 삶과 생존에 존재하는 문제를 대하면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하다면 이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장애물과 어려움이 비교적 많을 것이다. 그가 만약 진리를 추구하려는 의지와 의욕이 그리 크지 않고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어려움과 장애가 클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그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 힘들다는 말이다. 그의 패괴 성품의 심각성은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옭아맬 것이다. 어떤 사람은 증오에, 어떤 사람은 분노에,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고통에, 어떤 사람은 그 외 다른 문제에 직면했을 때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생각만 든다. 즉, 매사에 있어서 그의 상태는 기본적으로 부정적 정서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네가 만약 이런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여 부정적 정서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일정한 의지나 근성이 없다면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란 설상가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진리 추구라는 실제에 진입하기 전에 정상 인성에 연관되는 다방면의 문제에 대해 사람은 기본적이고 올바른 생각과 관점, 그리고 입장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진리를 얻고 받아들여 차츰차츰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가 본격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기에 앞서 네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를 먼저 해결하고 이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 단계를 거치고,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관점 그리고 사람이나 일을 바라보는 시각과 입장이 정확해지면 진리를 추구하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 수월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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