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제 3 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며 기꺼이 본분을 이행한다. 그들은 한 가지 사역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자신의 자질을 바탕으로 하나님 집의 규정에 따라 사역을 제대로 해낸다. 물론 처음에는 이런 생활에 적응하는 게 좀 어려워서 몸과 마음이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협력하고자 하는 의지나 정상인, 좋은 사람이 되어 구원받고자 하는 바람이 있다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하고 하나님이 징계하도록 해야 한다.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을 때 그것을 등지고 내려놓아 제멋대로인 성질과 사리사욕을 조금씩 줄여야 할 것이다. 또 중요한 일과 시기, 사역에서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네게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채찍질과 징계를 구하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깨우침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더 좋은 결실을 볼 수 있다. 네게 정말 의지가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간구한다면 하나님은 행사할 것이며 네 내적 상태와 사상을 바꿔 줄 것이다. 성령이 약간 역사하여 네게 감동과 깨우침을 주면, 네 마음은 달라질 것이며 네 내적 상태도 변화할 것이다. 네게 변화가 생기면 이렇게 사니 억압받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낄 것이며, 억압적인 내적 상태와 정서가 다소 바뀌고 해소되어 예전과는 달라질 것이고, 이렇게 사는 것이 힘들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즐겁다고, 이렇게 살고 처신하고 본분을 이행하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며 규칙을 지키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이것이 바로 정상인이 살아야 할 삶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진리에 기대 살고 본분을 잘 이행하면 마음이 놓이고 평안하고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어쩜 그렇게 제멋대로였을까? 예전에는 사탄의 철학과 사탄 성품으로 살아서 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지. 그러다 보니 살아갈수록 고통스러웠고. 이제 진리를 깨닫고 나니 패괴 성품을 어느 정도 벗어 버릴 수 있게 되었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진리를 실행하며 사는 삶이 참으로 평안하고 기뻐!’ 이는 마음이 바뀐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신이 예전에 왜 억압과 고통 속에서 살았는지 깨달으면, 그 근원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면 변화의 희망이 생긴다. 진리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 말씀에 공을 많이 들이며 진리를 많이 교제하고 또한 형제자매의 체험 간증을 들어 보기도 하면 더 분명한 길이 생길 것이다. 그럼 너는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겠느냐? 네 내적 상태가 더 좋게 바뀌고 억압적인 정서도 점점 해소되어 더 이상 너를 옭아매지 않을 것이다. 물론 특수한 환경이나 배경이 닥치면 때때로 억압이나 고통이 찾아오겠지만, 진리를 구해 해결하면 억압적인 정서는 사라질 것이다. 그럼 너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진심을 다하고 온 힘을 기울이고 충성을 바칠 수 있으며, 구원받을 희망이 생길 것이다. 네가 이렇게 변한다면 하나님 집을 떠날 필요가 없다. 이런 변화가 있다는 것은 네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화할 수 있는 희망, 구원받을 희망 말이다. 그런 너는 여전히 하나님 집의 사람인 것이다. 그저 여태까지는 각종 사심과 잡념, 나쁜 습관과 사상에 너무 오래, 그리고 깊게 영향을 받아 양심이 무감각해져 느끼지 못하며 이성이 건전하지 못하고 염치가 없었던 것뿐이다. 네게 위와 같은 변화가 생긴다면 하나님 집에서는 네가 머무르면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하며,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길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물론 부정적 정서가 있는 사람들은 사랑으로 도와줄 수밖에 없다. 시종일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여러 차례 타일러도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보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바뀌고 돌아서고 뉘우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머무는 것을 적극 환영할 것이다. 그가 진심으로 머무르면서 과거 자신의 갖가지 행동과 삶의 방식을 바꾸기 원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차차 변화할 수 있고, 본분을 점점 더 제대로 이행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가 머무르길 환영하며 그가 갈수록 좋아지길 바라면서 크게 축복할 것이다. 그가 부정적 정서에서 벗어나기를, 부정적 정서에 얽매이거나 그 그늘에 뒤덮이지 않고 본연의 일을 하며 바른길을 걷기를, 하나님의 요구대로 정상인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정상인이 살아 내야 할 것들을 살아 내며 하나님 집에서 평화롭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면서 다시는 허송세월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또 훗날 그가 발전성이 있기를, 다시는 제멋대로 굴지 않고 놀고먹는 육의 즐거움만 생각하지 않기를, 본분을 이행하고 인생의 길을 걷고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과 관련된 일들을 더 많이 생각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 밖에도 그가 하나님 집에서 즐겁고 자유로우며 해방된 삶을 살면서 매일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를, 하나님 집에서 살면서 온정과 즐거움을 느끼기를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이것이 최고의 축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내가 축복을 마쳤으니, 너희도 그를 진심으로 축복해 주어라. (그가 하나님 집에서 즐겁고 자유로우며 해방된 삶을 살면서 하루하루가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하나님 집에서 온정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또 무엇이 있느냐? 그가 다시는 억압된 정서 속에서 살지 않기를 진심으로 축복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이는 나의 축복이었다. 너희는 그에게 또 어떤 축복을 해 줄 것이냐? (그가 본연의 일을 하고 본분을 갈수록 더 잘 이행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이 축복이 좋지 않으냐? (좋습니다.) 또 어떤 축복을 할 수 있겠느냐? (그가 하루빨리 정상 인성을 살아 내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이 축복은 대단하지는 않아도 매우 실제적으로 보인다. 사람이라면 정상 인성을 살아 내야지 억압적인 느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남들이 견뎌 내는 고통을 우리라고 왜 견딜 수 없겠느냐?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염치가 있고, 정상인이라면 가져야 할 추구나 생존 방식, 올바른 추구 목표가 있으면 억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는 무척 좋은 축복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또 무엇이 있겠느냐? (그가 형제자매와 조화롭게 협력하며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 집의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것이 높은 요구더냐? (높지 않습니다.) 높지 않으니 이루기 쉽지 않겠느냐? 하나님 집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사실에 부합한다. 이는 그에게 필요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 대한 요구치는 높지 않다. 먼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갖추되, 빈둥대고 허송세월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법, 본연의 일을 하는 법, 자신의 책임과 본분을 감당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 어떻게 살지, 어떻게 정상 인성을 살아 내면서 책임과 본분을 다할지를 배운다면 하나님 집에서 위안과 평안, 기쁨을 느낄 것이며, 하나님 집에서 생활하고 본분을 이행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억압의 부정적 정서에서 벗어나 조금씩 진리를 추구하며 사람들과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 이 부류의 사람에 대한 요구이다. 나이를 불문하고 이들에 대한 우리의 바람과 요구는 그렇게 높지 않으며, 그저 이 정도이다. 먼저 본연의 일을 하는 법을 배우고 한 명의 성인으로서, 정상인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는 것, 그 후 규칙을 지키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 집의 관리, 감독,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여 본분을 잘 이행하는 것, 이것이 양심과 이성을 갖춘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올바른 태도이다. 다음으로는 정상 인성의 양심, 이성과 관련된 책임과 의무 그리고 생각과 관점에 대해 정확한 이해와 인식이 있어야 하며, 네 부정적 정서와 억압을 없애고 삶에서 직면하는 여러 고충을 올바로 마주해야 한다. 그것들은 네게 추가적인 것도 아니고 부담이나 결박도 아니라 한 명의 정상적인 성인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다. 즉, 성별과 자질, 능력과 특기를 떠나 성인이라면 누구나 적응해야 하는 생존 환경, 감당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 사명 그리고 짊어져야 할 사역 등을 너는 반드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이러한 것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남들의 피땀 어린 결실을 거저먹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규정과 제도, 관리에 적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법과 하나님 집의 행정 법령을 받아들이는 법, 사람들과 함께 생존하고 생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지니고 주변 사람과 일, 사물을 올바로 대하며, 직면한 여러 문제를 올바르게 처리하고 해결하는 것 등은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직면해야 할 부분이다. 또 이는 한 명의 성인으로서 직면해야 할 삶과 생존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한 명의 성인으로서 삶이 아무리 곤궁해도 자기 힘으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 이는 네가 감당해야 할 고통이자 다해야 할 책임이며 완수해야 할 의무이다. 너는 성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얼마나 고생하든, 얼마나 대가를 치르든, 얼마나 가슴이 아프든 너는 그것을 속으로 삭여야지, 부정적 정서를 품거나 누군가를 원망해서는 안 된다. 이는 성인이라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는 한 명의 성인으로서 이런 일을 반드시 감당해야 하며 원망도, 저항도, 나아가 도피나 거부도 하지 말아야 한다. 허송세월하거나 빈둥대면서 자기 맘대로, 제멋대로, 내키는 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 것은 성인이 가져야 할 생활 태도가 아니다. 모든 성인은 성인으로서의 책임을 짊어져야 한다. 고난이나 병, 나아가 갖가지 어려움 등의 압박감이 얼마나 크든 그것은 모두가 겪고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인의 삶이다. 그 압박감과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너무 연약하고 못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 살면서 이런 고통을 피할 수 없으며 감당해야만 한다. 사회에서든, 하나님 집에서든 모두가 똑같다. 이것은 네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자 한 명의 성인으로서 짊어져야 할 중임이고 감당해야 할 일이니 피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항상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벗어나려 한다면 억압적인 정서가 찾아와 너를 계속 옭아맬 것이다. 반면, 네가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 네 삶과 인생의 일부로 여긴다면 이 문제들은 네게 부정적 정서가 생겨나는 이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성인으로서 갖고 감당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감당하는 법을 배우는 한편, 자기가 처한 삶과 사역의 환경에서 정상 인성으로 타인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법을 배워야지, 제멋대로 굴면 안 된다. 조화롭게 어울리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한 명의 성인으로서 완수해야 할 사역과 이행해야 할 의무, 책임을 더 잘 완수하기 위해서이며, 사역에서 직면한 문제들로 초래되는 손실을 최소화하고 네 사역이 이뤄야 할 성과와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다. 정상 인성을 갖추고 사람들 속에서 사역할 때 너는 이것을 해내야 한다. 사역으로 인한 압박감의 경우, 그 압박감이 상부에서 오든 하나님 집에서 오든, 아니면 형제자매로부터 오든 그것은 네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다. “압박감이 있어 못 하겠어요. 하나님 집에서 이행하는 본분과 사역은 한가롭고 자유로우며 즐겁고 쾌적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통하지 않는다. 이는 정상적인 성인이 가져야 할 생각이 아니며 하나님 집은 네 안일을 도모하는 곳이 아니다. 모두가 삶과 일에서 어느 정도의 부담과 위험을 감수한다. 어떤 사역이든, 특히 하나님 집에서 이행하는 본분은 모두 최고의 성과를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이자 요구이고, 미시적으로 보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태도이자 관점, 기준, 원칙이다. 네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한다면 하나님 집의 규정과 제도를 준수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준수하는 법과 규칙을 배워 착실하게 처신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사람이 처신할 때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이다. 이방인처럼 무위도식하고 악행을 일삼으며 허송세월하거나 자신의 삶의 방식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너를 싫어하게 만들지 말고, 모두의 눈 밖에 나서 눈엣가시가 되지 마라. 또 모두가 너를 멀리하거나 버리게 하지도, 그 어떤 사역의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되지도 마라. 이는 역시 정상적인 성인이 갖춰야 할 양심과 이성이며,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감당해야 할 책임이다. 또한, 이는 그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네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만약 네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 정상 인성으로 해야 할 일, 성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추구의 근본 취지이자 목표로 삼고 자신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든, 어떤 고통을 겪든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요구이자 뜻임을 확신하는 순간 어떤 고통도 견뎌 낼 수 있고,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네 심경은 어떻겠느냐? 전과는 달라진다. 마음이 평안하고 안정되며 즐거움이 생길 것이다. 보아라. 그저 정상 인성을 살아 내는 것을 추구하고, 정상 인성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 그리고 짊어져야 할 사명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에 평안과 기쁨이 생기고 즐거움을 느낀다. 아직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 진리를 얻는 데 이르지도 않았는데 사람에게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고 떳떳한 사람이니 어떤 고충이 생겨도 극복할 수 있고, 어떤 사역이든 감당할 수 있다. 이런 자가 바로 훈련을 거친 그리스도의 정예병이니 이겨 내지 못할 고충이 없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렇게 처신하는 것이 어떤 것 같으냐? 강건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탄복스러울 정도로 강건하다. 이런 사람이 억압을 느끼겠느냐?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그는 무엇으로 그 억압적인 정서를 바꾸었느냐? 무슨 이유로 억압의 정서가 그를 옭아매지 않고 그를 찾지도 않겠느냐? (마음속으로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며 본분 이행에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것이 본연의 일을 하는 것이다. 마음속에 올바른 일이 있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 그리고 책임감과 사명감이 역할을 한다면 이런 사람은 어디에서든 훌륭히 해낼 것이다. 억압이니 근심이니 우울이니 하는 것도 없이 어떤 일이든 성취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겠느냐? 이런 양심과 이성,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정상 인성의 추구와 관점, 생존 방식 측면에서 보면 진리를 추구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사람이 이 정도에 도달하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며 진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도 머지않았다. ‘머지않았다’는 말은 무슨 의미겠느냐? 그가 처신하는 관점과 선택한 생존 방식이 완전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하나님이 요구하는 정상 인성에 거의 부합함을 의미한다. 이러면 기준에 도달했다. 기준에 도달하면 진리를 알아들을 수 있고 진리 실행의 어려움이 훨씬 줄어드니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과 진리 원칙에 따라 일하는 것이 무척 수월하다. 정상 인성으로 해야 할 일에는 총 몇 가지 측면이 있느냐? 대략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어떤 세 가지 측면이냐? 말해 보아라. (첫째, 성인으로서 갖추고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배우는 것입니다. 둘째, 정상 인성으로 자신이 처한 생활, 사역 환경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공존하며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셋째, 정상 인성과 이성의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준수하는 법, 처신할 때 가져야 할 태도와 관점, 기준, 원칙을 준수하는 법, 즉 규칙을 준수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측면은 정상 인성에 마땅히 갖춰져야 할 부분이다. 사람이 만약 이런 측면으로 생각하고 신경을 쓰며 노력한다면 본연의 일을 하기 시작할 텐데 부정적 정서가 생길 리 있겠느냐? 억압이 느껴질 리 있겠느냐? 본연의 일을 하고 중요한 일을 하며 성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까지 감당하면 해야 할 일과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나니 너무 바빠 정신이 없을 것이다. 특히 지금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에게 억압을 느낄 겨를이 있겠느냐? 그럴 틈이 없다. 그러니 마음 같지 않은 일에 조금 부닥치면 억압을 느끼거나 기분이 가라앉거나 의욕이 없고 의기소침해지는 사람은 뭐가 문제겠느냐? 밥 먹고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태평하게 허튼 생각이나 하다가 궁지에 몰려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어찌할 방법이 없으며 길도 보이지 않으니, 생각할수록 삶이 가치가 없는 것 같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으며 괴롭기만 하다. 스스로 뿌리쳐 벗어날 힘이 없어 결국 억압이라는 정서 속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사실 이것은 쉽게 해결되는 문제다. 해야 할 일, 생각하고 고려해야 할 중요한 일이 너무 많아 한가하게 그런 쓸데없는 일이나 놀고먹을 생각을 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생각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태평하게 놀고먹으며 빈둥거리면서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다.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늘 억압적인 정서에 빠진다. 그런 사람은 밥 먹고 할 일이 없기에 중요한 일이 한가득 쌓여 있어도 생각하지도 행하지도 않고 틈만 나면 쓸데없는 생각만 한다. 자기 육 때문에 불평하고 앞날 때문에 염려하며 자기가 받은 고통과 치른 대가 때문에 걱정한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데 분출구가 없으니 억압을 느낀다. 하나님 집을 떠나자니 복을 받지 못할까 두렵고 악을 행하자니 지옥에 떨어질까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도 싫으니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이 본연의 일을 하고 바른길을 걸으면 이런 정서가 생기지 않는다. 한때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가끔 억압적인 정서가 생긴다고 해도 일시적인 마음에 불과하다. 사람이 올바른 생활 방식과 생존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곧 이런 부정적 정서를 대신할 테니 억압의 정서에 자주 빠지지는 않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 억압적인 정서는 결코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어도 그 안에 갇히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 추구의 중요성이다. 네가 본연의 일을 하기를 추구하고 성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을 감당하며 정상적이고 좋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존 방식을 추구한다면 이런 부정적 정서가 생기지 않을 것이며 억압의 정서가 너를 찾아오거나 옭아매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억압을 해결하는 문제와 이 측면의 고충에 대해서도 교제를 마쳤다. 방금 말한 세 가지 측면이 그것이다. 우리는 한때 억압의 정서에 휩싸였던 사람, 억압의 정서에 빠졌지만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억압의 정서에 지배되지 않고 하루빨리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에서 벗어나기를, 정상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정상적이고 올바른 생존 방식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는 좋은 축복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도 축복해 보거라. (억압의 정서에 휩싸였던 사람, 억압의 정서에 빠졌지만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이 억압의 정서에 지배되지 않고 하루빨리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에서 벗어나 정상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정상적이며 올바른 생존 방식을 갖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는 매우 현실적인 축복이다. 우리가 축복하고 나서 그 사람들이 억압의 정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이는 매우 단순한 일일 것이다. 사실 이는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것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추구하고자 하는 뜻과 의지가 충분하다면 억압의 정서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며, 무척 쉽다. 하지만 만약 그가 진리나 긍정적인 사물을 추구하는 것을 꺼리고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면, 억압의 정서에 빠져 있으라고 하자.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굳이 축복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느냐? (좋습니다.) 이 역시 하나의 처리 방법이다. 어떤 일이든 해결법이 있으며 진리 원칙과 사람의 실제 상황에 따라 바라보고 해결할 수 있다. 오늘은 축복도 마쳤고 몇 가지 상황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교제하였다. 이 부류의 사람에 대해 언급해야 할 주제는 여기까지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2022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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