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5) 제 2 부

지난번에 우리는 근심, 염려, 걱정 등 측면의 부정적 정서에 대해 교제하였다. 이어서 교제할 내용은 다른 측면의 부정적 정서로, 그것은 근심, 염려, 걱정 등 측면의 정서와 본질적으로 거의 같지만 근심, 염려, 걱정보다 더 부정적인 성질의 것이다. 이 측면의 정서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상태인 억압이다. 다들 억압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느냐? (들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억압’이라는 단어로 작문을 하거나 예를 들어 보아라. 내가 먼저 말해 보겠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아, 저는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주 억압을 느끼며 해방받지 못합니다.” 이것은 맞는 문장이냐? (맞습니다.) 이제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일이 닥치면 항상 패괴가 드러나고 늘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해야 하니, 억압을 느낍니다.) 자신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 억압을 느낀다면, 이 억압의 배경은 무엇이냐? 억압을 야기하는 원인은 무엇이냐?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하여 장래도, 종착지도, 구원받을 희망도 없는 것 같으니 속으로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누가 또 말해 보아라. (큰 붉은 용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으니 억압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환경에서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본분을 이행할 때 리더의 감독을 받으니 억압을 느낍니다.) 잘 말했다. 억압된 정서를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본분을 이행할 때 항상 실패와 좌절에 부딪히니 억압을 느낍니다.) 좌절과 실패는 너희가 억압을 느끼고 궁지에 몰리게 한다. 너희 사역의 진전 속도가 더디면 억압을 느끼지 않더냐? (억압을 느낍니다.) 이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의미가 있기도 하다. 너희가 또 이야기해 보아라. (본분을 이행하면서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도 억압을 느낍니다.) 이 역시 실제 상황이다. 그렇지 않으냐? (본분 이행의 결실이 좋지 않으면 억압을 느낍니다.) 억압의 원인이 무엇이냐? 진정 결실이 좋지 않기 때문이더냐? 본분이 조정되거나 도태될까 봐 두려운 것은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원인이다. 그리고 또 어떤 억압이 있느냐? 말해 보아라. (주변 동역자가 자기보다 우수하면 억압을 느낍니다.) 이는 질투심의 농간으로 인한 억압이다. 또 어떤 억압의 문제가 있느냐? (업무가 장기간 진전이 없으면 억압을 느낍니다.) 이는 스트레스겠느냐, 아니면 억압이겠느냐? 이는 스트레스에 가깝다. 이런 스트레스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 스트레스를 원동력으로 바꾸면 좋지 않겠느냐? 각 팀원의 본분이 자주 조정되니 너희가 억압을 느끼느냐? (그렇습니다.) 억압을 느끼기도 하는구나. 너희가 만든 문장을 보니 너희는 모두 억압이라는 정서를 가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 매우 불안해 보인다. 마음이 늘 동요하고, 보이지 않는 압박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억압이라는 정서가 생기고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좋은 현상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럼 해결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좋은 현상이 아니니 해결해야만 한다. 사람이 항상 부정적 정서 속에 살 때 어떤 정서이든 상관없이 좁게 보면 그것이 사람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사람의 건강한 삶과 튼튼한 성장을 저해할 것이다. 그리고 넓게 보면 여러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의식주 등 일상생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이 본분을 이행하는 효율이나 진도, 결실에 영향을 미치며,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본분을 이행한 수확과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 수확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사람이 늘 이런 부정적 정서로 인해 괴로워하고 얽매이면 마음이 늘 방해받고 초조, 불안, 충동 등의 느낌에 빠지게 된다. 사람이 이런 느낌에 빠지게 되면 정상적인 양심과 이성, 정상적인 삶과 본분 이행의 상태가 교란되고 영향을 받으며 파괴된다. 그러니 적시에 이런 부정적 정서를 해결하여 다시는 사람의 정상적인 삶과 사역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한 억압과 예전에 말한 여러 가지 부정적 정서의 본질은 동일하다. 사람이 늘 여러 일로 걱정하고 염려하거나 내면 깊은 곳에 불안 요소가 많기 때문에 사람이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만약 억압이라는 정서를 오랫동안 해결하지 않는다면, 사람 내면 깊은 곳은 더욱 불안하고 초조해질 것이며, 나아가 특수한 환경과 배경에서 사람은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이런 국면을 깨게 될 것이다. 특정 부정적 정서를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의 육적 본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한계나 정점에 도달하면 사람은 인성과 이성의 제약에서 벗어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정서를 표출하고, 내면 깊은 곳의 여러 가지 비이성적인 생각들을 표출할 것이다.

사람에게 억압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원인을 방금 너희가 일부 표현으로 작문해 보았다. 오늘 우리가 교제할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가 사람에게 생기는 원인과 근원에는 주로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 측면은 많은 사람이 일상생활에서든,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원인이다.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바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하는 것은 일과 삶에 대한 요구이다. 그러나 법률, 혹은 생활 환경, 혹은 특정 집단의 규칙, 제도, 규정, 규율 등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자기의 바람이나 상상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 깊이 억압을 느낀다. 이런 억압은 정확히 말하면 사람이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다.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억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사람의 성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여러 원인과 객관적 환경 및 조건의 제약으로 인해 사람이 자신의 성격대로 할 수 없고 자유롭게 방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본분을 늘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고 몸을 사리는 사람들이 있다. 가끔 교회 사역을 서둘러야 할 때가 있는데, 그는 제멋대로만 하려 하고, 요즘 컨디션이 안 좋다거나 기분이 좋지 않고 의욕이 없다고 생각되면 수고하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교회 사역을 하려 하지는 않는다. 너무나도 나태하고 안일을 탐하는 것이다. 그는 마음에 의욕이 없어 축 늘어져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리더에게 책망을 받거나 형제자매로부터 게으르다는 평판은 받고 싶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너무나도 원하지 않고, 달갑지 않으며, 내키지 않아 한다. 그리고 억울해하고 서운해하며 분해하면서 사는 것이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성격대로 하고 싶지만, 하나님 집의 요구와 규정을 감히 뿌리치거나 어기지도 못한다. 그렇게 억압이라는 정서가 차차 생기는 것이다. 이런 억압의 정서가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겉모습이 퇴폐적이고 무기력해 보이게 된다. 로봇처럼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어찌 되었든 매일 하라면 하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손발을 멈추지 않고 하면서 본분을 이행하는 환경에서 벗어나지 않지만 마음은 억압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피곤하고 답답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가장 큰 바람은 언젠가 더는 사람의 간섭이나 하나님 집 규정의 제약, 하나님 집의 배정을 받지 않는 것이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고 싶을 때 하고, 기분 좋으면 조금 하고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으며, 그 어떤 질책이나 책망, 훈계도 받지 않고, 그 누구의 감독이나 감시, 간섭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런 날은 얼마나 좋고 자유로우며 해방감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막상 떠나려니, 내려놓으려니 내키지 않는다. 본분을 이행하지 않다가 언젠가 자신이 정말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자유롭고 해방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게 되면 복을 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어떤 사람들은 진퇴양난에 빠진다. 형제자매에게 고충을 털어놓자니 말하기 부끄럽고, 하나님께 기도하자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원망하자니 자신이 옳지 않은 것 같고, 원망하지 않으려 하니 괴롭다. 자기 삶이 어쩜 이토록 답답하고 마음 같지 않을까,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고, 모두와 똑같이 보폭을 맞추기 싫은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싶은데 어쩌면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고민한다. 예전에는 몸이 피곤했는데 이제는 마음마저 힘들다. 자기도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른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는 억압적 정서로 초래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자유와 해방을 맛볼 수 있고, 사는 것이 실로 즐거우며, 평안과 기쁨이 있다고들 하는데, 왜 저는 남들처럼 행복하거나 평안하지 않을까요? 왜 저는 기쁘지 않을까요? 왜 이렇게 억압과 피로 속에 살아가는 걸까요? 남들은 어떻게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 거죠? 저는 왜 이렇게 불쌍하게 살고 있을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는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의 이런 억압이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육이 만족을 얻지 못하고 괴롭기 때문입니다.) 육이 괴롭고 억울한데 만약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육의 괴로움은 그다지 괴롭지 않다고 생각되지 않겠느냐? 마음에 안위와 평안, 기쁨이 있어도 억압을 느끼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억압이 육의 괴로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육의 괴로움이 너무 커서 억압을 느끼는 것이라면, 너희는 괴롭지 않으냐? 너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억압을 느끼겠느냐? 너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억압이라는 정서에 빠지겠느냐?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는 하루 종일 사역으로 분주하지 않느냐? (다소 분주합니다.) 모두가 분주하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한다. 하루에 수면 시간,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낸다. 눈과 머리가 피로하고 몸도 피곤하지만 억압을 느끼느냐? 이 피로가 너희에게 억압을 가져다주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이런 억압은 어찌하여 생기는 것이냐? 분명 육적인 피로로 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이겠느냐? 만약 사람이 늘 육의 안일과 쾌락만을 찾고 추구하며 고생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의 육이 조금이라도 괴롭거나 남보다 더 고생하거나 혹은 평소보다 피로할 때 그는 억압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억압을 야기하는 원인의 하나이다. 만약 사람이 육적인 고생을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해서 육의 안일을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 이행하여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를 추구한다면, 육적인 고생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설령 때로 분주하고 피곤하여 지치더라도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진다. 괜찮아지면 계속 분주히 보낸다. 그의 마음은 본분과 사역에 있으니 육적으로 조금 피곤하더라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람의 생각에 문제가 생겨 늘 육의 안일만 추구하고자 한다면, 육적으로 조금 억울하거나 만족을 얻지 못할 때 부정적 정서가 생겨난다. 그렇다면 이렇게 항상 마음대로 하고 육을 방종하며 삶을 즐기려는 부류의 사람이 만족을 얻지 못할 때 늘 억압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빠지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겠느냐? (안일과 육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부 사람의 경우이다. 또 다른 일부의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육의 안일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일이든 내키는 대로 하고 자기 기분대로 하는 것을 추구한다. 기분이 좋으면 더 고생할 수도 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나서도 그에게 피곤하냐고 물으면 그는 “피곤하지 않아요. 본분을 이행하는데 피곤하다니요.”라고 대답한다. 그가 오늘 기분이 좋지 않은데 네가 그에게 1분이라도 더 시간을 내게 한다면 그는 언짢아할 것이고, 만약 그를 질책하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만 좀 하세요. 제가 억압을 느낀단 말이에요. 계속 잔소리하시면 본분을 이행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면 당신을 원망할 거예요. 나중에 복을 못 받으면 당신 탓입니다. 모두 책임지셔야 할 거예요!” 사람의 내적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으면 변덕을 부린다. 고생하며 대가를 치를 수 있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조금만 고생해도 원망한다. 사소한 일에도 그는 언짢아하고 기분이 상해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도 읽으려 하지 않고 찬양도 부르려 하지 않으며 예배 때 설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한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한다. 누군가 도와준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며칠 지나면 훌훌 털어내고 괜찮아질지도 모른다. 만족스럽지 않은 일만 있으면 그는 억압을 느낀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너무 제멋대로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무 제멋대로이다. 예를 들어, 그는 잠을 자고 싶으면 꼭 자야 한다. “제가 지금 졸려서 자고 싶어요. 의욕이 없으니 자야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10분만 참을 수 있겠어요? 일이 곧 끝날 거예요. 마무리하고 다 같이 쉬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하면, “안 돼요. 지금 자야 한단 말이에요!”라고 대꾸한다. 누가 타이르면 마지못해 참아 보지만 속으로는 억압과 반감을 느낀다. 그는 이런 일로 자주 억압을 느끼고 형제자매들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도, 리더의 감독을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잘못을 저질러도 남들이 책망과 훈계를 하지 못하게 하면서 그 어떤 단속도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인데, 어째서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걸까? 삶은 왜 이렇게 힘든 걸까?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해. 이런 규정, 저런 제도 같은 걸 따질 게 아냐. 열심히 지켜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할 거야. 당신들은 잠자코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너무 제멋대로이고 방탕하고 단속받지 않는다. 그 어떤 사역 환경에서도 그 어떤 단속도 받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의 규정, 원칙을 지키려 하지 않고, 처신하면서 지켜야 할 원칙 역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양심과 이성으로 해야 할 최소한의 것도 지키지 않는다. 그저 기분 내키는 대로 하고 즐거울 수만 있으면, 자기에게 득이 되거나 편한 일이면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런 단속을 받는 것은 자기답게 사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자학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그렇게 살면 안 되고 자유와 해방 속에서 자신의 육체와 욕망, 자신의 이상과 소원,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방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며 뒷일이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 하나님을 믿으면 이행해야 하는 본분 혹은 지키고 살아 내야 하는 진리 실제, 걸어야 하는 인생의 길 역시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사회에서나 사람들 속에서 항상 제멋대로 하려 하지만, 어딜 가든 바라는 대로 이루지 못한다. 그는 하나님 집에서 인권을 중시하고 사람들에게 충분한 자유를 주며 하나님 집에서 인성과 인내, 관용을 중시하니 하나님 집에 오면 육체와 욕망을 마음껏 방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 집에도 행정과 규정이 있기에 그는 여전히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이런 억압의 부정적 정서는 하나님 집에 오고 나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이 사는 것은 그 어떤 책임이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진정한 사람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피조물로서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사명을 완수하여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어떤 무리 속에 있든, 어떤 환경에 처하든,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상관없이 최종 목적은 자아를 찾고 자기만족을 실현하는 것이다. 처신의 취지도 이것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자기만족이 그들 평생의 소원이자 추구 목표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접대할 때 형제자매에게 식사를 대접한다면, 형제자매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하나님 집의 원칙과 요구는 무엇인지 물어보고 이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접대해야 한다. 만약 네가 접대하는 사람이 북부 사람이라면 대부분 찐빵, 꽃빵, 만두 등 밀가루 음식을 준비하고 이따금 쌀밥도 조금씩 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남부 사람이 좋아하는 쌀국수도 괜찮을 것이다. 만약 네가 접대하는 사람 중 상당수가 남쪽 사람이면, 그들은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지 않고 쌀밥을 즐겨 먹는다. 한 끼라도 쌀밥을 먹지 않으면 식사를 거른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남쪽 사람을 접대할 때는 쌀밥을 많이 준비하고 요리도 남쪽 사람의 입맛에 맞게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접대할 사람 중에 남쪽 사람도 있고 북쪽 사람도 있다면, 두 가지 식사를 모두 준비해서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게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 이렇게 접대해야 원칙에 맞는 것이다. 이는 아주 단순한 일이다. 그저 많은 사람이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만족하지 않는 특이한 사람이 조금 있다 한들 너무 신경 쓸 것 없다. 그렇지만 접대하는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줄 모른 채 늘 자신의 기호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서 사람들이 그 음식을 좋아할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럴 경우 무엇이 문제겠느냐? 이는 너무 제멋대로이고 이기적이다. 어떤 사람은 접대할 사람 다수가 북쪽 사람인데도 본인이 남쪽 사람이라 매일 쌀밥만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식습관은 고려하지 않는다. 네가 만약 그를 책망하고 그에게 조언을 해 준다면 그의 마음속에 어떤 정서가 생길 것이고, 거부감이 생기면서 수긍하지 못하고 원망 가득한 목소리로 말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밥하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요? 이 사람들 참 까탈스럽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생 고생해서 당신들 밥을 준비했는데 투정이나 하다니요. 쌀밥이 어때서 그래요? 삼시 세끼 먹는 게 쌀밥 아닌가요? 이 정도면 잘 사는 거죠! 당신들보다 건장하고 힘도 세잖아요. 당신들은 대체 뭐가 좋아서 늘 국수나 찐빵만 먹는 거죠? 배가 부르긴 해요? 국수는 아무리 먹어도 맛도 없고 배도 안 부르던데요? 어쩔 수 없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려면 감내하고 자제해야죠. 자제하지 않으면 교체되거나 도태될 테니까요. 그냥 하죠 뭐!” 그는 매일 불만을 품은 채 음식을 하며 속으로 생각한다. ‘쌀밥 한번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네. 끼니마다 쌀밥 먹고 싶은데, 난 쌀밥 없이는 못 살아. 쌀밥을 먹어야겠어!’ 비록 그는 매일 억지로 국수와 만두를 만들지만 기분은 극도로 침울하다. 어찌하여 극도로 침울해 있겠느냐? 그가 억압을 느끼기 때문이다. ‘당신들 대접한다고 밥도 내 마음대로 못 하고 당신들 뜻에 따라야 하다니. 어째서 늘 당신들만 만족시켜야 하고 나 자신은 만족하면 안 되냐고?’ 그는 분하고 억압을 느끼며 사는 게 힘들다고 생각한다. 사역이 조금이라도 많아지면 하지 않고, 해도 건성으로 대충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교체되거나 제명당할까 봐 두려워하고,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본분을 이행할 뿐이다. 한순간도 즐겁지 않고 자유와 해방감도 느끼지 못한다. 다른 사람이 “접대하면서 식사 준비를 하니 기분이 어떠세요?”라고 물으면 “피곤하지는 않은데, 억압을 좀 느끼네요.”라고 대답한다. “억압을 느낄 게 뭐가 있어요? 쌀, 밀가루, 채소 뭐든 다 있는 걸요. 사비를 털 일도 없고요. 가끔 피곤하고 남보다 많이 일해서 그런 거죠. 그런데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자원해서 하는 건데 왜 억압을 느끼나요?”라고 하면, “제가 비록 자원하긴 했지만 항상 쌀밥을 먹을 수 없고, 제가 좋아하는, 제 입맛에 맞는 것을 마음대로 먹을 수 없거든요. 혼자 맛있는 것을 해 먹고 싶어도 남들이 보고 나무랄까 봐 억압을 느끼고 항상 즐거울 수가 없는 거죠.”라고 말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음식에 대한 욕구 불만으로 인해 억압의 정서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농장에서 채소를 재배한다면 어떻게 채소를 심어야겠느냐? 계절, 기후, 온도, 사람 수에 따라 적정량의 채소를 심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 집에는 각종 채소를 심는 데에도 규정이 있는데, 그 규정으로 적지 않은 사람이 힘들어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이 즐겨 먹는 채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채소도 있다. 그리고 규정된 양만큼 먹어야 하는 채소도 있고, 계절에 따라 먹어야 하는 채소도 있으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에 제한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한다. ‘아, 항상 실컷 먹을 수가 없고 몇 입 못 먹고 끝나 버리니 양이 너무 적어! 방울토마토만 해도 매번 조금씩 나누어 먹다 보면, 맛을 느낄 사이도 없이 다 먹어 버려. 사발째 먹으면 얼마나 좋아!’ 그래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그들 십여 명이 방울토마토 이백 그루를 심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밤에 잠들기 전까지 사발째 먹는 것이다. 방울토마토와 토마토는 사발째, 오이는 소쿠리째 먹으니 ‘얼마나 신나! 이거야말로 천국의 삶이지! 너무 행복해!’라고 생각했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하나님 집의 규정을 따를 수도, 과학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도 없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앞세우며 모든 일을 자기만 생각하면서 제멋대로 한다. 결과 하나님 집의 통제와 감독, 관리하에 과일을 한껏 먹으려던 그 사람들은 제재를 받게 되었는데 책망과 훈계를 받은 사람도 있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지금 그들 심정이 어떻겠느냐? 이들에게 상실감이 크지 않겠느냐? 인간 세상이 삭막하고 하나님 집에 사랑과 온정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들이 억압을 느끼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들은 항상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어때서? 내가 과일 좀 좋아하면 안 되나? 고작 방울토마토 가지고 실컷 못 먹게 하는 건 너무 인색한 거 아냐?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지도 않고 방울토마토 좀 먹겠다는데 사람 수대로 심으라고 하네. 200, 300그루 좀 심는 게 어때서? 다 못 먹으면 동물들 먹이면 되지.’ 네가 사발째 먹는 것이 적절한 것이냐? 무엇을 먹든 정도와 절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준 여러 가지 먹거리를 먹는 비율은 그것의 생산량과 계절을 따라야 한다. 생산량이 많아야 주식이 되고, 생산량이 적거나 계절이나 자라는 기간이 짧고 생산량이 제한되어 있는 것은 적게 먹어야 한다. 심지어 일부 특수 지역에서는 그런 것을 먹지 않아도 별로 부족하지 않다. 이것은 합리적인 것이다. 사람은 항상 욕망이 있어서 식탐을 부리는데 이는 올바른 것이냐? 항상 욕망을 가지고 식탐을 부리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하나님 집에는 하나님 집 규정이 있다. 각 측면의 사역마다 규정과 관리가 있고 적절한 제도가 있다. 네가 하나님 집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면 너는 철저하게 하나님 집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 큰소리쳐서는 안 되고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주변 사람들을 만족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양심과 이성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만든 모든 규정은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집의 모든 사람을 위해 세운 것이다. 이는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이 규정과 제도는 모두 정당한 것이며 양심과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켜야 한다. 그러니 네가 어떤 일을 하든 한편으로는 하나님 집의 규정과 제도를 따라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을 보호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다. 매사에 사적인 이익이나 개인적인 시각으로 임할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만약 하나님 집에서 생활하고 사역하면서 억압을 느낀다면 이는 하나님 집의 어떤 규정이나 제도, 관리 방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네 개인적인 문제이다. 예를 들어, 네가 하나님 집에서 늘 자아를 찾고 자기 욕망만 채우려 하며 늘 억압을 느끼고 자유와 해방감, 평안과 기쁨을 맛보지 못한다고 하자. 또한 늘 마음이 편치 않고 억울한 것 같고,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같다. 밥을 먹든, 옷을 입든, 유행하는 옷을 입거나 섹시하게 화장하는 것도 안 된다는 생각에 날마다 이런 일로 고통스럽고 괴로워한다. ‘이 사람들은 나랑 자꾸 진리를 교제하니 귀찮아 죽겠네!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 난 즐겁고 자유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즐겁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것 같아. 누구에게도 속박받고 싶지 않아. 근데 나를 단속하고 속박하는 사람이 꼭 있으니 억압을 느껴.’라고 생각하며 형제자매와 함께 지내는 것을 늘 불편해한다. 그는 이런 생활 환경을 싫어하고 이런 생활 환경에 반감을 갖지만 복을 받으려 어쩔 수 없이 그런 환경에 몸담고 지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불만을 표출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며 소리 지르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항상 마음속으로 억압을 느낀다. 이런 사람을 처리하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방법은 그에게 이렇게 알려 주는 것이다. “이곳을 떠나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입고 싶은 옷을 입으며 당신이 원하는 시간을 보내면서 원하는 일을 하고 당신이 하고 싶은 사업을 하며 추구하고 싶은 목표와 방향을 추구하세요. 하나님 집에서는 당신을 말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손과 발 그리고 마음은 해방되어 자유로우며 아무도 당신을 구속하지 않습니다. 당신 스스로 어떤 목적을 위해 하나님 집에 머무는 것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당신에게 이런 규정을 들이밀면서 당신이 반드시, 꼭 하나님 집에 머물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집에서 어떻게 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을 알려 주겠는데 하나님 집에서 너를 어떻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언제든 떠나도 상관없다. 하나님 말씀 책을 교회에 반납하고 맡고 있는 사역만 잘 인계하면 너는 언제든 떠나도 된다. 하나님 집에서는 너를 막지 않는다. 하나님 집은 너의 감옥이나 교도소가 아니다. 하나님 집은 자유로운 곳이고 그 문은 활짝 열려 있다. 네가 만약 억압을 느낀다면 그것은 네가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곳은 네게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네가 속으로 찾고자 하는 안식처도 아니고 네가 머물러야 할 곳도 아니다. 만약 네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너는 떠나야 한다. 알겠느냐? 불신파나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 집에서는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다. 네가 장사를 하고 싶거나 큰돈을 벌고 싶거나 사업을 하고 싶거나 세상에 나가고 싶다면 그것은 네 개인적 추구이니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 집에서는 한 번도 사람의 자유를 제한한 적이 없다. 하나님 집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불신파,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든 하나님 집을 떠나도 된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려 하지도 진리를 교제하려 하지도 않는다. 교회 생활에도 적응이 안 되고 적응하지도 못해 항상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며 무력감을 느낀다. 그럼 알려 주겠다. 속히 떠나 세상으로 가서 네 개인적 목표와 방향을 추구하고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라. 하나님 집에서는 한 번도 사람에게 강요한 적 없다. 교회의 모든 규정과 제도 혹은 행정 법령은 너 개인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다. 네가 만약 괴롭고 지키기 힘들고 몹시 고통스럽고 억압을 느낀다면 떠나도 된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원칙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교회에 머물기 적합한 사람이다. 물론 너 스스로가 하나님 집에 머물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네게 적합한 곳이 없겠느냐? 있다. 세상은 이렇게나 넓으니 네게 적합한 곳이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네가 만약 이곳에서 해방감을 느끼지 못하고 억압을 느끼며 항상 불만을 표출하고 싶고 본성이 폭발할 가능성이 있다면 너는 위험하며 하나님 집에 머물기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세상은 넓어 네게 적합한 곳이 있을 것이니 직접 천천히 찾아보거라.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으냐? 이렇게 하는 것이 이성적이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그토록 괴로워하는데도 네가 만류하려 한다면 어리석지 않으냐? 그저 그를 떠나보내고 꿈을 이루길 바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의 꿈이 무엇이더냐? (방울토마토를 사발째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시 세끼, 1년 내내 쌀밥과 생선, 고기를 먹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꿈이 있더냐? 매일 저절로 깰 때까지 자는 것이다. 원하는 시간에 일하고, 일하기 싫어해도 누구 하나 간섭하거나 감독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꿈이 아니더냐? (그렇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꿈이냐! 이 얼마나 웅대한 꿈이더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부류의 사람은 앞날이 유망한 것 같으냐? 본연의 일을 하는 사람인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이 늘 억압을 느낀다는 것은 정확히 말해 자기의 육체를 방종하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그들의 바람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사심이 너무 커 무슨 일이든 제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만 하려 하고 규칙이나 원칙을 지키면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며 자기 생각과 기호, 욕망, 사적인 이익에 따라 일을 처리하고자 한다. 정상적인 인성을 갖추지 못한 이런 부류의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다.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어디에 가든 억압을 느끼고 혼자 살아도 억압을 느낀다. 좋게 말해서 이런 사람은 앞날이 유망하지 않고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인성이 정상적이지 않고 머리가 약간 아둔한 사람이다. 본연의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더냐? 그는 의식주를 무척 단순하게 여겨 이런 일은 보통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인생의 길, 사람의 사명, 인생관, 가치관이다. 앞날이 유망하지 않은 사람은 하루 종일 무엇에 골몰하느냐? 항상 어떻게 하면 게으름을 피우고 요령을 피울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잘 먹고 잘 놀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육의 안위를 확보하고 몸이 편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중요한 일은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 집의 본분을 이행하는 장소와 환경에서 그는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는 사람이 본분을 더 잘 이행할 수 있도록 본분 이행에 연관되는 일부 상식과 업무 지식을 배우기를 요구하고, 더 많은 진리를 깨달아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모든 일을 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사람이 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기를 요구한다. 하나님 집에서 교제하고 언급하는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생활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범위에 속하는 주제나 실제의 일과 관련된 것으로, 사람이 본연의 일을 하고 올바른 길을 걷게 한다.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인 사람은 이런 중요한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제멋대로 해서 이루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육의 안위와 기쁨, 평안이며 구속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으며 먹고 싶은 것을 실컷 먹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성 품격, 그리고 그들이 마음속으로 추구하는 바로 인해 그들은 항상 억압을 느낀다. 그들과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도 그는 바뀌지 않고 자신의 억압을 해결하지도 못한다. 그는 이런 부류의 사람이고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인간이다. 겉으로 보면 그는 단지 원칙이나 규정을 지키지 않을 뿐 그렇게 큰 악행을 저지른 것 같지도,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실 그의 본성 본질은 본연의 일을 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이 없고 정상 인성의 지능에도 못 미친다. 정상적인 인성에 갖춰져야 할 추구 목표, 생활 태도, 생존 방식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고 고심하지도 않으며 추구하지도 않는다. 매일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육의 안일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교회의 이런 생활 환경에서는 그가 육의 기호를 채울 수 없으니 불편함과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그의 이런 정서는 바로 이렇게 생긴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부류 사람의 삶은 피곤하지 않겠느냐? (피곤할 것입니다.) 그들의 삶이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가련하지 않다. 가볍게 말하면 이런 부류의 사람은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회에서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망나니, 멍청이, 얼간이, 깡패, 건달, 무뢰한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기술을 배우거나 역량을 키우려 하지 않고, 제대로 된 직장이나 생계를 도모할 직업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이 사회에서 망나니, 무뢰한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교회로 섞여 들어와 공짜로 무언가를 얻으려 하고 복을 받으려 하는데, 기회주의자에 속한다. 이런 기회주의자는 본분을 전혀 기꺼이 이행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억압을 느낀다. 그리고 늘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그런 삶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그는 고통이라면 조금도 받고 싶지 않아 하며, 그저 놀고먹기만 하려 한다. 이런 사람은 사는 것조차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부정적 정서에 얽매여 있다. 그들은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지치고 곤혹스러워하며 본연의 일이나 중요한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본업이나 본분, 의무나 책임으로 여겨 그것을 잘해서 결실을 맺겠다거나 그것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건성으로 임하면서 본분 이행을 빌어 생계를 유지하려 한다. 압박감이나 통제가 조금이라도 생기거나 그에게 조금이라도 엄격히 대하여 약간의 책임을 지우면 그는 마음이 불편해지고 억압을 느낀다. 또한 그런 부정적 정서가 생기면서 사는 것이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고 괴로워한다. 그들이 삶이 피곤하다고 느끼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은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성이 불건전한 사람으로, 하루 종일 비현실적인 생각에 빠진 채 뜬구름만 잡으며 꿈속에 살면서 기상천외한 생각만 하니 그들의 억압은 해결되기 어려운 것이다. 진리에 흥미가 없는 그들은 불신파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집을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안식처를 찾도록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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