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1) 제 1 부

최근에는 무척 폭넓은 주제를 교제하고 있는데, 얼마나 기억하고 이해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교제가 끝나면 어떤 건 조금 기억할 수 있습니다. 마침 비슷한 상황을 체험하고 있어 어느 정도 인상이 남는 것도 있고, 그런 상황을 체험해 보지 않아서 조금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상황이 닥치면 교제했던 내용이 좀 기억이 나느냐? (조금 납니다. 상황이 닥치면 하나님께서 이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신 적 있으시다는 게 생각나고, 관련된 말씀 한두 마디가 떠오릅니다. 그다음 다시 그 말씀들을 찾아서 먹고 마시면 길이 생기는 듯합니다.) 원칙은 파악했느냐? (그 부분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고 아직 원칙을 파악하지 못합니다. 제 상황에 대조할 수 있고, 약간의 인식이 있을 뿐입니다.)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는 것이 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고 있느냐? 어떤 사람에게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다고 할 때, 흔히 “이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거나 “이 측면의 진리 원칙을 파악하지 못했다.”라고 말하지 않느냐? 너희도 자주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냐? 진리 측면의 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냐? (아닙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서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과 대조하고 인식할 수 있고, 진리 실행의 원칙도 찾을 수 있습니다.)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는 것은 주로 사람이 진리 원칙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즉, 어떤 진리를 교제할 때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내용이 무엇이든, 예를 얼마나 들고, 얼마나 많은 일, 얼마나 많은 내적 상태를 언급하든 그 안에는 한 가지 진리 원칙이 담겨 있는데, 네가 이 측면의 진리 원칙을 깨닫고 파악했다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바로 진리 원칙을 깨달을 수 있고 일이 생겼을 때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두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아무리 많은 예와 내적 상태를 제시하고 아무리 구체적으로 얘기해 줘도 여기에서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며, 일이 생겼을 때도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지도 못하고, 스스로에게 대조해 보지 못하고 응용할 줄도 모른다. 글귀와 도리는 몇 시간씩 늘어놓으며 이치에 맞게 말할 줄 알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 말씀을 응용할 줄 모르고, 진리 원칙을 응용해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한 것이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도리를 얘기할 줄 안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진리 원칙은 진리에 관계된 모든 일, 모든 종류의 일에 관한 구체적인 실행 준칙이다. 구체적인 실행 준칙이니 그건 분명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일에서 하나님이 너에게 제시하는 요구 기준이요, 네가 갖추어야 할 구체적인 실행의 길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 원칙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다. 진리 원칙을 파악했다고 하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너에게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면 일이 생겼을 때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할 것이고, 하나님 뜻에 맞게 행하고 하나님 요구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하면, 즉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하든 진리 원칙과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처리하지 못한다. 너는 일을 할 때 근거와 준칙이 없기에, 즉 일정한 기준이 없기에 하나님의 요구에도 이를 수 없다. 한 사람이 실제적인 사역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할 때는 그에게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된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으면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많은 도리를 얘기할 줄 알아도 소용이 없다. 글귀와 도리만 읊어 대기 좋아하며 실제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않는 자가 바로 전형적인 바리새인이다. 하나님 말씀 서적을 몇 권씩 외울 수 있어도 소용이 없다. 바리새인은 성경 구절을 달달 외울 수 있었고,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를 했다. 무슨 일을 하든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지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은 온갖 영적인 것, 모두가 동조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고차원적이고 심오한 일부 지식, 도리, 글귀, 구호 등을 수집하고 그것을 도처에 전하는 데 열을 올린다. 심지어는 좋은 외적 행위를 갖춰 사람들을 미혹함으로써 우러름과 숭배를 받는다. 하지만 막상 실제적인 문제를 맞닥뜨리면 규례를 지키고 글귀와 도리를 읊어 대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실제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의 내적 상태와 본질은 물론이고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대하고 해결해야 하는지 그들은 아무것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한 채 무의미하게 글귀와 도리만 읊어 댄다. 이런 자를 전형적인 바리새인이라 한다. 바리새인이 글귀와 도리만 읊을 줄 알고 그 어떤 실제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늘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 틀린 말만 하고 그릇되고 황당한 관점만 내놓는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일의 본질도 꿰뚫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들은 이해 능력이 전혀 없다.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듣고 아무리 많은 도리를 얘기할 수 있더라도 그들은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빈곤하고 가련한 주제에 진리를 깨달았다고 착각하고, 영적인 사람을 자처하니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가련하고도 역겹다. 그토록 많은 글귀와 도리를 떠들고, 또 몇몇 규례를 지킬 줄 알지만 막상 구체적인 문제를 만나면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그저 남들 말만 따라 한다. “이런, 여기 무슨 일이 생겼는데 사건의 경과가 이렇게나 복잡하고 특이하고 기이하네요. 하아, 그 사람은 양심도 이성도 없는 데다가 인성도 별로군요. 주제 파악도 못 하고요. 일만 생기면 그렇게 제멋대로 군다니까요.” 네가 그에게 “그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당신은 어떻게 대하고 처리할 건가요? 어떤 원칙에 따라 그 사람을 처리할 건가요? 그런 모습에 담긴 본질은 뭔가요? 그런 사람은 적그리스도인가요, 아니면 적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건가요? 거짓 리더인가요, 아니면 그냥 인성이 안 좋은 건가요, 그것도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토대가 약해서인가요?”라고 물으면 “그건 간파하지 못했는데요.”라고 답한다. 그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른다. 어떤 종류의 일이 닥치면 겉에 드러난 현상이나 상태, 구체적으로는 개인의 태도, 표출, 말, 행위만 보고, 이런 것들을 형용하고 표현하거나 간단하고도 가장 평이한 규정만 내릴 수 있을 뿐, 문제의 본질은 꿰뚫어 보지 못한다. 그 부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처리해야 할지, 어떻게 진리를 교제하여 그들이 자신을 반성하고 인식하고,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자신을 대조하도록 해야 할지, 생명 진입에서 어떻게 그들을 도와줘야 할지, 행정 및 인사와 관련해서 그들을 어떻게 적절하게 배치해야 할지 모른다. 그저 이런저런 사람들의 각종 태도나 상태만 얘기할 줄 알 뿐이다. 네가 “그 사람들을 전부 처리했나요?”라고 물어도 “아직이요. 지금 지켜보는 중이에요.”라는 대답만 돌아온다. 이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은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설교를 적게 들어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고,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평소에 어떻게 그리 말도, 설교도 잘하겠느냐? 들은 것이 많고 식견이 넓으며, 이론적인 것을 모두 마음에 새겨 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귀와 도리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리더 일꾼을 몇 년 하면서 단련되었다. 즉, 여러 가지 글귀와 도리를 얘기하고 말할 수 있게 되었고, 많이, 길게 늘어놓으며 무척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에게 분량이나 실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며, 진리 원칙을 깨달았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너희는 분별력을 키워서 이런 사람들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배 시간에 중복되는 내용도 없이 하루 이틀 연달아 설교하는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절로 고개가 숙여질 만큼 감탄하는 것은 분별력이 없는 것 아니겠느냐?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가 얘기하는 내용 중에 어떤 내적 상태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행 원칙이 하나라도 있는지 없는지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들어도 그의 말에 사람의 현실적인 내적 상태나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내용이 하나도 없고 그저 구호나 글귀, 도리만 가득하다면, 원칙도, 구체적인 해결 방안도, 구체적인 실행의 길도 없고 이틀, 사흘을 얘기해도 공허한 도리만 늘어놓을 뿐이라면 들을 당시에는 도움이 되고 뭔가를 얻은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 ‘이 일은 어떻게 해결하지? 아까 그 얘긴 하지 않았던 거 같아.’라고 생각되어 다시 질문하면 또 도리만 잔뜩 늘어놓는다. 사람들이 듣고도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면, 이는 속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속으로 그에게 감탄하고 그를 앙망한다면, 이런 걸 두고 속았다고 한다. 너희는 늘 이렇게 기만당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리더 일꾼인 너희는 늘 이렇게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제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다는 것이 무엇이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조금 이해가 되느냐? (네, 조금 이해가 됩니다.) 진리 원칙이 무엇이냐? (진리 원칙은 구체적으로 일이 닥쳤을 때의 실행 원칙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또한 실행해야 할 몇몇 기준과 길이 있습니다. 진리 원칙을 파악하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생깁니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생기면 진리 원칙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관계다. 진리 원칙을 깨달으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생기면 진리 원칙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대부분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 내가 교제하는 모든 내용에서 그 안에 담긴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느냐? 만약 깨달을 수 있다면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있는 것이고,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다. 반면, 교제를 듣고 몇몇 사안이라든가 교제 중에 언급했던 한 부류의 사람, 일부 사람의 태도와 행동들은 기억하지만 거기에서 교제한 진리 원칙이 대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일이 닥쳤을 때 교제 중 언급한 구체적인 사실에 대조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할 줄 모른다면, 이는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것은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진리 원칙을 알지 못하고, 일이 닥치면 어리둥절하고 그저 겉으로 드러난 상황이나 모습 등만 볼 수 있고 문제의 본질은 간파하지 못해서 실행의 길이나 문제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다. 이는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했고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문제들을 천천히 곱씹고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되는대로 넘기기만 한다면 진실한 인식을 얻을 수 없다.

이어서 요즘 계속 교제하고 있는 내용에 대해 얘기해 보자. 지난번 예배 때는 ‘사람의 추구와 이상, 바람을 내려놓기’ 중 네 번째 항목인 ‘사업’에 관해 구체적인 내용을 교제하였다. 사업에 포함된 구체적인 내용에는 사람이 사업에 대해 지녀야 할 올바른 이해, 혹은 하나님이 사업 방면에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구체적인 실행의 길과 실행 준칙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를 네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네 가지가 무엇이었느냐? (첫째는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 둘째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 셋째는 사회의 각종 세력을 멀리하는 것, 넷째는 정치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중 두 가지에 대해 얘기했다. 첫째는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었다. 이 네 가지의 세부적인 말 하나하나가 ‘사업 내려놓기’의 구체적인 실행 원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네 가지 구체적인 실행 원칙은 바로 ‘사업 내려놓기’ 측면의 주제에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제시하는 요구 기준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시하는 요구 기준은 당연히 ‘사업 내려놓기’ 측면의 주제와 관련된 진리 원칙이자 이런 일이 닥쳤을 때, 구체적인 실행의 길이다. 즉, 네가 이 범주 내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을 한다면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겠지만, 만약 이 범주를 벗어난다면 그것은 원칙과 진리, 하나님의 요구에 위배되는 것이다. 사업이라는 주제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실행 원칙을 교제했다. 첫째는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었다.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구체적인 예도 몇 가지 살펴보고 몇몇 특수 상황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그렇다면 거기에 주로 관계되는 문제는 무엇이냐? 바로 사람이 직업 선택이나 일 측면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점인데, 적어도 자선 활동과 관계된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생활이나 생계와 관련 있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 첫 번째이다. 만약 어떤 자선 기관이 있는데, 네가 그 기관에 지원해 근무하며 재직한다면 이것은 자선 활동으로 볼 수 없다. 이는 일종의 특수 상황이다. 너는 거기 재직하면서 급여를 받겠지만 단지 일을 하고 급여를 받는 일꾼에 불과하다. 기금 조성, 사회 복지에 관계된 일을 한다든가, 유기된 아동이나 동물을 입양한다든가, 수해 지역이나 빈곤 지역 사람들을 구제한다든가, 난민들을 받아들인다든가 하는 등등 그 기관의 주요 업무는 다 너와 관계가 없다. 너는 주요 책임자도 아니고, 이런 자선 사업을 위해 네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별도로 다루어야 한다.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선 기관에서 일하는 것이라면 그 성질이 다르지 않겠느냐? (다릅니다.) 성질이 다르다. 이런 특수한 상황은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 이 밖에도 자선 활동은 규모가 크든 작든, 어떤 분야의 일이든 모두 너와 관계가 없다. 그 일은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한 것이 아니므로 하지 않아도 진리에 위배되지 않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는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기를 추구하기로 한 이상 구원받는 것, 진리를 추구하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과 아무 관계도 없는 일에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서는 안 된다.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은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겠느냐? 네가 누굴 구제하고 도와주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어느 누구의 운명도 바꾸지 못하고 그 누구의 운명적인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일은 결국 아무 가치도, 의미도 없는 헛수고일 뿐이다. 예를 들어, 늑대를 데려다 키우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처음에는 한두 마리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백 마리, 천 마리가 넘었다. 그는 이 일을 사업으로 생각하며 모아 둔 돈을 몽땅 털어 넣고, 자기 가족들도 모두 그 일에 동원하며, 인생의 후반부에는 그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자신의 에너지와 인생이 전부 그 일을 향해 있었다. 결과적으로 늑대들은 구제되어 보호받았지만 그는 그 일에 막대한 시간과 세월을 낭비했고,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데 쓸 시간과 에너지가 남지 않았다. 따라서 본분을 이행하고 구원받는 일에 비하면 그 어떤 일도, 설령 많은 이에게 인정받고 사회적으로 칭찬받는 일이라 해도 사람이 구원받는 것과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이행하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고, 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없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만약 네가 하나님이 택한 사람, 하나님의 선민이라면, 하나님은 절대 너에게 세상 사람들과 사회의 인정을 받는 자선 사업을 해내라고 부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절대 네게 그런 일을 부탁하지 않는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선민이라면, 하나님이 너에게 거는 가장 큰 희망은 무엇이겠느냐? 이 세상이나 사회의 사람들이 중요하거나 의미 있고 영광스럽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구원받아 살아남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마음을 최대한, 최고로 흡족게 하는 일이다. 네가 하나님의 선민이라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부탁은 바로 네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본분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 교회 사역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교회 사역과 하나님의 경영 이외의 일은 모두 너와 무관하다. 네가 무얼 하든, 설령 그것이 네가 좋다고 여기고 원하는 일이라 해도 무가치하다. 그것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고 하나님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랜 세월 전해져 후세에 명성이 남든, 당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제아무리 많은 이에게 인정받는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네가 한 일을 인정하고 기억한다는 뜻이 아니며, 네가 한 일이 의미 있고 가치 있다는 뜻도 아니다. 이 세상과 사회의 여론과 평가가 하나님의 평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람은 사업과 관련해서 무의미한 일을 하느라 자신의 유한한 시간과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 반면 너의 에너지와 시간을 하나님이 네게 맡긴 본분에 사용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는 일에 써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게 살아야 네 일생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이 된다. 어떤 이는 천 마리가 넘는 개를 데려다 기르는 바람에 매일 그 개들 위주로 일하고 생활하느라 먹고 자는 시간도 부족하고 심지어는 빨래할 시간도,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하는 일이 자신의 능력 범주를 넘어섰기 때문에 그의 삶은 무척이나 딱하고 고달팠다. 이건 미련한 일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구세주가 아니며, 구세주가 되려고도 하지 마라. 세상을 구하고 바꾸려는 생각, 혹은 자신의 힘으로 현재 상황을 바꾸고 이 세상을 바꾸려는 생각은 전부 미련하며, 당연히 그런 행동은 더더욱 미련하다. 결국 너는 그것 때문에 된통 애를 먹고 등골이 휘고 말도 못 하게 고통을 겪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는 에너지도, 무언가를 바꿀 만한 능력과 재주도 별로 없다. 얼마 안 되는 너의 에너지와 시간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데 바치고 써야 한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고 구원받는 데 그 에너지와 시간을 쓰고 바쳐야 하는 것이다. 이외의 모든 일은 무의미하다. 경제 활동이라는 건 사람의 육적인 생활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단지 육적인 생활과 생존에 필요한 일일 뿐이다. 생활하고 생존하기 위해 너는 반드시 직업에 종사해야 하지만 그 직업은 네가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직업이 이 사회에서 저소득 직종에 속하든 고소득 직종에 속하든 그건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므로 고상하고 저속하고를 논하지도, 의미가 있고 없고를 논하지도 못한다. 또한 직업에 의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 하나님이 인류에게 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구원받는 길을 가고자 한다면 직업을 선택할 때 생계를 유지하는 기준은 바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다. 과도한 에너지와 시간을 소모해 가면서 의식주를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지 마라. 입을 것과 먹을 것만 해결되면 된다. 배를 채울 수 있고, 몸을 가리고 따뜻하게 지낼 수만 있으면, 이런 기본적인 생존 여건만 채워지면 그것을 기반으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 네 소중한 에너지와 시간을 본분과 하나님이 네게 부탁한 일에 바치며, 네 마음을 바쳐야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본분을 이행하는 동시에 진리에 공을 들여야 하고,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그럭저럭 되는대로 살지 말고 진리 추구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칙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생존과 생활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네가 근사하게 살면서 그 근사함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원치 않고, 이 세상에서 어떤 성취를 이루고 기적을 만든다든가, 인류를 위해 공헌한다든가, 많은 사람을 구제하고 사람들의 취업 문제를 해결해 준다든가 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큰 사업을 해 세상에서 이름을 알리고 그것으로 하나님 이름을 영예롭게 하는 것도, 세상을 향해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도 필요 없다. 하나님은 그저 네가 이 세상에서 보통 사람, 평범한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무슨 기적을 만들어 낼 필요도 없고, 어떤 직종이나 분야에서 베테랑, 유명 인사나 위인이 되고, 사람들에게 추앙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네가 어떤 분야에서 획기적인 일을 하거나 성취를 이루는 것도 원치 않고, 나아가 다양한 직종에서 어떤 공헌을 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바라는 것은 그저 네가 네 삶을 충실히 살아가고, 입을 것 먹을 것이 있어서 배를 곯지 않으며, 겨울에도 여름에도 제대로 입을 수 있는 것,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생존 능력을 갖추는 것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너에게 요구하는 바다. 네게 어떤 은사나 특기,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은 네가 그런 것을 이용해 세상에서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떤 은사나 자질을 갖추었든 그것을 본분 이행, 하나님이 네게 부탁한 일,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사용해서 마지막에 구원받기를 바란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 외에 더 요구하는 게 없다. 네가 아주 잘 살아간다고 해도 하나님은 너를 두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네가 평범하게 지내는 사회 저소득층이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집은 좀 가난해도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기준에 부합한다면 이 역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 및 생존과 관련하여 네가 추구하는 목표가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라면, 하루 세끼 먹고 일상에 필요한 것들이 충족되는 등 입고 먹으며 정상적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네가 거기에 만족한다면 하나님도 만족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너더러 무슨 대단한 부자나 유명 인사,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지가 되라는 것도 아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종일 밥만 구걸하는 거지는 애처롭기만 하다. 음식도 남은 것만 먹고, 옷차림도 허름해서 기운 옷만 입고, 심지어 마대 조각을 걸치고 다니는 등 삶의 질이 무척이나 형편없다. 하나님은 너에게 거지처럼 그렇게 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육적인 삶에서 하나님은 너에게 그를 영화롭게 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또 어떤 일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거라고 규정한 적도 없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삶이 궁핍하거나 풍족하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를 평가하지 않는다.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서, 하나님이 요구한 그 원칙에서 네가 어떻게 실행했는지,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했는지를 근거로 할 뿐이다. 사업에 관계된 이 두 가지 실행 원칙을 잘 파악하고 이해했느냐? 첫째, 자선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있으면 만족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교회에는 아직도 자선 활동을 하는 것을 좋은 일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어려운 곳이 있으면 우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지요. 저는 개인 신분으로 옷과 현금을 기부하고, 재해 지역에 가서 자원봉사도 했어요.” 너희는 이것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말리겠느냐? 간섭하겠느냐? (간섭하지 않습니다.) 또 이런 사람도 있다.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참 불쌍해요. 특히 어린아이가 굶는 걸 보면 정말 가엽죠.” 그래서 그런 사람을 얼른 집에 데려가 맛있는 것도 먹이고, 옷도 주고, 물건도 주고, 또 가끔 보러 가기도 한다. 이런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하며,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이렇게 처신해야 의로우며 하나님이 기억하고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을 말리느냐? 간섭하느냐? (간섭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설교를 해 주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 원칙을 교제해 준 다음, 만약 그가 다 알아듣고 이해했는데도 여전히 고집을 부리면서 자기 뜻대로 행동하려 한다면 우리는 간섭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져야 하고, 마지막에 어떤 결과를 얻고, 하나님에게 어떻게 규정될지 등은 모두 사람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다른 사람이 책임질 필요도, 그 대가를 치를 필요도 없다. 만약 도리를 다 알면서도 기어이 자선 활동을 하겠다고 나오는 부류를 만난다면, 우리는 그의 사상 관점을 바로잡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간섭도 하지 않고, 정죄는 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 하나님을 믿은 후에도 세상을 추구하고 재산 형성, 관직 생활, 사업 경영 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간섭하겠느냐? (간섭하지 않습니다.) 관련된 진리를 그에게 교제해 주되, 교제가 끝나면 선택은 그의 몫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그가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우리는 간섭하지 않는다. 우리의 책임은 그에게 하나님의 뜻과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이해하고 알아들었지만 네가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세요? 언제부터 복음 전도를 시작할 건가요?”라고 물을 때, 그가 “나중에 얘기하죠. 물건도 들여야 하고, 업무도 하나 처리해야 하고, 또 프로젝트도 하나 맡아야 하거든요. 다 되면 돈이 좀 될 것 같아서요. 그러니 복음 전도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라고 대답하고, 또 “얼마나 걸릴까요?”라고 물을 때 “2, 3년은 걸려요.”라고 말한다면 그대로 작별을 고해라.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상대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해결하면 된다. 간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걸 두고 참도인 줄 뻔히 알면서도 죄를 짓는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속죄 제물이 없다. 하나님은 이런 자를 말리지도 않고 간섭하지도 않는다. 즉, 당장은 어떤 평가나 판단도 내리지 않고 그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둘 것이다. 너희도 이 원칙을 배우도록 해라. 그가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든 관계없다. 어쨌든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려 주는 것이며, 이후 어떤 선택을 내리고 다음 단계에서 어떻게 할지는 그의 일이고, 그의 자유다. 어느 누구도 간섭할 필요가 없고, 이해관계를 분명히 짚어 주며 그를 압박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으냐? (적절합니다.) 적절하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라. 원칙을 어기지 말고 무리하게 강요하지도 마라. 이것이 사업 내려놓기의 첫 두 가지 원칙이다. 이 두 가지는 상대적으로 이해하기도 깨닫기도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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