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제 2 부

지금까지의 교제를 통해 이제 알게 되었느냐? 항상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하는 부류의 사람이 가진 사상 관점이 과연 올바른 것이냐? (올바르지 않습니다.) 명백하게도, 그러한 이들은 극단에 빠져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긴 것이다. 극단적인 사상 관점 때문에 극단적으로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기면 그는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올바르게 마주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응당 있어야 할 기능을 정상적으로 발휘하지 못하고, 피조물의 본분, 책임,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믿더라도, 포기하고 헌신하며 하나님을 따를 수 있더라도, 지난번에 교제했던 몇 가지 유형의 부정적 정서에 빠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집에서 자유롭게, 거리낌 없이, 편안하게 본분을 이행할 수가 없다. 어째서 그럴 수가 없겠느냐?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사상 관점이 그에게 극단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극단적 정서가 그의 사유 판단과 사유 방식, 그리고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극단적이고 올바르지 않은 각도, 치우친 각도에 머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듯 극단적이고 올바르지 않은 각도에서 문제를 대하고 사람을 대하는 탓에 반복적으로 소극적인 정서의 작용과 영향 아래서 생활하며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한다. 그 결과 어떻게 생활하든 지쳐 보이고, 하나님을 믿으며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도 의욕을 느끼지 못한다. 어떠한 생활 방식을 선택하든 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오래 믿었으면서도 마음과 뜻을 다해 본분을 이행하여 본분 이행에 합격하는 데에 집중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것은 더욱 어림도 없다. 원인이 무엇이겠느냐? 결론은 항상 자기 팔자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극심하게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겼고, 사람 자체가 의욕을 잃었고, 무기력해졌고, 산송장 꼴이 되어 활기라고는 없어졌고, 적극적이거나 낙관적인 태도가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본분을 위해, 자기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자기가 마땅히 바쳐야 할 충성심을 바치겠다는 의지나 끈기는 더더욱 없는 탓이기도 하다. 그러기는커녕 무성의한 태도로 마지못해 살아간다. 무지몽매하고 흐리멍덩하게, 심지어는 지각없이 허송세월을 보낸다. 언제까지 그렇게 대충 살아갈 수 있을지 자기도 모른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이렇게 자신을 타이른다. ‘어휴, 되는대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그냥 이렇게 살자! 언젠가 버티지 못할 때 교회에서 날 출교시키고 도태시키겠다면 그냥 도태시키라지 뭐. 팔자가 이런 걸 어쩌겠어!’ 보아라. 말하는 것조차 이토록 무기력하다. 의기소침이라는 정서는 단순한 기분일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사상, 마음, 추구하는 바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제때에, 최대한 빨리 의기소침한 정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그것이 네 일생에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네 일생을 망치고, 너를 죽음으로 끌고 간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진리를 얻어 구원받을 수 없으며, 결국에는 멸망에 빠진다. 그러니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언제나 팔자의 좋고 나쁨을 자세히 따지고, 운명이 어떤지를 탐구하고, 운명이 어떤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항상 자기 운명에 대해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소한 변동이 생기거나 무엇이 조금만 마음대로 안 돼도, 혹은 실패, 좌절, 난처함이 임하기만 하면 대번에 자기 팔자가 안 좋아서 생긴 일이라고, 자기는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는 팔자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남들처럼 팔자가 좋지 못하다고 반복적으로 되뇌고, 자꾸만 자신을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의기소침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에워싸이고, 결박당하고, 속박당해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자 위험한 일이다. 의기소침한 정서가 너를 더 교만하고 간사하게 만들거나 너로 하여금 사악함이며 강퍅함 등의 패괴 성품을 드러내게 하지는 못할 수도 있다. 의기소침한 정서는 네가 패괴 성품을 드러내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들거나, 패괴 성품을 드러내 진리 원칙을 어기게 하거나, 방해와 교란을 일으키거나, 악을 행하게 만들기에는 역부족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을 보자면, 의기소침한 정서는 사람이 현실에 불만이 있을 때 드러내는 가장 심각한 모습이다. 현실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불만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한 불만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느냐? 그 결과는 아주 심각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 공급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가르침, 권면, 일깨움, 경고를 알아듣지 못하게 되며, 그것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게 된다. 네 마음이 의기소침한 정서로 가득 차서 하나님의 현실적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현실적인 역사와 성령의 깨우침, 인도, 도움, 붙들어 줌, 공급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역사해도 너는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이 역사하고 성령이 역사해도 너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에게서 온 긍정적인 것과 하나님에게서 온 요구며 공급을 너는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네 마음은 의기소침한 정서로 가득하며 그것에 점령당한 상태고, 하나님이 행한 것이 네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결국 너는 하나님의 역사 단계를 모두 놓치고, 하나님이 시기마다 하는 말씀을 놓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시기별 역사를 놓치고, 너를 위한 시기별 공급을 놓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단계적 사역이 완성되었을 때에도 너는 여전히 네 의기소침한 정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이며,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로 그것에 포위당해 그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너는 하나님의 역사를 완전히 놓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완전히 놓치고 나면 네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공개적인 심판과 정죄다. 그때는 하나님이 인류의 결말을 선포하는 때이다. 너는 그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린다. ‘아, 나는 자신을 반성해야 해.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빠져나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도와주고 붙들어 달라고 구해야겠어. 하나님의 공급을 구하고, 어떻게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여 정결함을 얻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할 수 있을지 구해야 해.’ 늦었다! 이미 모든 것이 지나갔다. 네가 그때에 가서 깨달아 봤자 너무 늦은 것이다. 무엇이 너를 기다리고 있겠느냐? 통회하고 가슴 치며 슬피 울 일만 남았다. 의기소침한 정서는 비록 일종의 정서에 불과하지만, 그 성질이 심각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가 심각하기 때문에 세심하게 성찰해야 한다. 의기소침한 정서가 너 자신을 온전히 점령하게 두지 말고, 네 사상과 네가 추구하는 목표를 좌지우지하게 두지 마라.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길의 걸림돌이 되게 두지 말고,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에 그것이 벽이 되게 두지 마라. 네게 이렇게 심각한 정서가 있다는 것을 네가 확실히 의식하거나 성찰해 낼 수 있다면, 너는 반드시 서둘러 뉘우쳐야 한다. 의기소침한 정서를 내려놓고, 거기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고집스럽게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나는 어차피 팔자가 안 좋은걸. 팔자가 안 좋으면 의기소침한 게 당연하잖아. 팔자가 안 좋으면 당연히 자포자기하게 되지.’ 매사를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하는 것은 고집스러운 태도다. 자신에게 의기소침한 정서가 있다는 걸 의식했다면, 너는 서둘러 그것을 바로잡고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너를 완전히 통제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라. 그때에 가서 깨닫는다면 너무 늦은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운명을 믿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한 태도로 운명을 대해야 옳으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믿고 거기에 순종해야 합니다.) 맞는 말이다. 언제나 자기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에만 집중한다고 무슨 문제가 해결되겠느냐? 자기 팔자가 좋지 않음을 인정하고, 그 또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라고 믿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관점은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으냐? (그의 관점 속에 여전히 팔자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규례냐? 여기에서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가 무엇이냐? (운명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운명적으로 정하신 것은 모두 좋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지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운명은 하나님이 지배하고 안배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지배하고 안배한 것이므로 운명을 두고 좋고 나쁨을 논할 수는 없는 법이다.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사람의 시선, 견해, 선호, 느낌에 기반한 평가일 뿐이다. 이러한 평가는 사람의 상상과 관점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팔자가 정말 좋아요. 하나님을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 이방인 세계 환경의 영향을 안 받았고, 이방인의 풍조에 영향을 받거나 유혹당하거나 미혹되지도 않았어요. 저한테도 패괴 성품은 있지만, 저는 쭉 교회 환경에서 자랐고 비뚤어진 길에는 발도 들여 본 적이 없어요. 제 팔자는 정말 좋다니까요!” 이게 맞는 말이냐? (틀렸습니다.) 어떤 부분이 틀렸느냐? (그가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것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입니다. 사람의 팔자가 좋은지 나쁜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 정확히 핵심을 짚었다. 이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이며,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안배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이는 운명의 한 가지 형식이기에 팔자의 좋고 나쁨을 들어 평가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자기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 팔자가 좋다고 했을 때 이 말을 어떻게 반박해야겠느냐? “당신이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서 팔자가 좋다고 한다면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다 팔자가 안 좋은 것이 되겠군요. 그 말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안배한 운명이 나쁘다는 뜻이 아닌가요?” 이렇게 반박하면 되겠느냐? (맞습니다.) 이러면 옳게 반박한 것이다. 이렇게 반박하면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팔자가 좋다는 그의 말이 성립되지 않고, 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제 너희는 운명의 좋고 나쁨에 대해 조금 더 정확한 견해를 갖게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운명을 믿는 일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갖는 것이 가장 올바르고 적절하고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우선, 세인들이 보는 각도에서 운명의 좋고 나쁨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또한, 모든 인류 구성원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으로 안배됨을 믿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손으로 안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안배하신다는 말인가요?”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안배하는 방식, 방법, 경로는 아주 다양하다. 영계에서 복잡하고 섬세한 일이 이뤄지지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대단히 복잡한 일들이 수반되기는 하나, 크게 보면 모두 창조주가 안배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배 중 일부는 하나님이 직접 각 부류의 사람에게 안배하는 것이고, 일부는 하나님이 정한 규정, 행정 법령, 원칙, 제도에 따라 각 부류, 각 집단의 사람에게 저마다 다르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가 속한 유형에 따라서 하나님이 정해 준 운명의 궤적이 영계에서 다 안배되고 정해지면 사람이 태어난다. 여기에는 많은 세부 사항이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말하면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는 나름의 원칙, 법칙, 규율이 있다. 이는 좋고 나쁨과 관계가 없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모두 당연하며 인과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운명을 어떻게 느끼는지 보자면 좋게 느낄 수도, 나쁘게 느낄 수도 있다. 순조로울 수도, 순조롭지 않을 수도, 평탄하지 못할 수도, 마음대로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좋고 나쁨을 따질 수는 없다. 사람은 어떤 태도로 운명을 대해야 하느냐? 창조주의 안배에 순응하고, 창조주가 이 모든 것을 안배한 목적이 무엇이며 그 의의가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열심히 구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안배해 준 일생에서 네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고 피조물의 본분, 책임, 의무를 다하며, 네 삶을 더욱 유의미하고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창조주가 기쁘게 받아들이고 기억하게 해야 한다. 물론 네가 구하고 노력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장 좋다. 요컨대, 지음 받은 인류가 운명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함부로 평론하고 정의하거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게 아니며, 반항하고, 선택하고, 바꾸려 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구하고, 모색하고, 순응한 다음 적극적으로 마주해야 하며,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배치한 생활 환경과 인생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네게 가르쳐 준 처신 방식을 구하고, 하나님이 네게 걸으라고 한 길을 구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네게 안배한 운명을 경험한다면 마지막에 너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주가 네게 안배한 운명을 경험한다면 네가 맛볼 것은 슬픔, 근심, 눈물, 고통, 좌절, 실패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기쁨, 평안, 위안을 체험하고 창조주가 베풀어 주는 진리상의 깨우침과 빛 비춤을 체험하리라는 점이다. 또한, 인생길에서 네가 막막함을 느낄 때, 네가 좌절과 실패를 마주했을 때, 선택을 마주했을 때, 창조주의 인도를 체험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너는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유의미한가에 대한 인식과 경험, 이해를 얻는다. 그때가 되면 너는 살면서 더 이상 막막하지 않을 것이요, 더는 두렵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자기 운명이 안 좋다고 불평하지도 않을 것이며, 팔자가 나쁘다는 느낌 때문에 다시금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만약 네가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이러한 방식으로 창조주가 네게 안배한 운명과 마주한다면 인성 방면에서 더 정상적으로 바뀔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상 인성, 정상 인성의 사유와 관점, 일을 바라보는 원칙도 생길 것이다. 당연히 이방인이 얻을 수 없는, 인생의 의의에 대한 견해와 인식도 얻을 것이다. 보아라, 이방인은 언제나 이런 말을 한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은 왜 사는가?” 반드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의 최종 답안은 무엇이냐? 답은 없고 물음표 하나뿐이다. 답이 없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나마 조금 똑똑한 사람은 운명을 믿지만, 그런 이들도 운명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운명 속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난제, 좌절, 실패, 유쾌하지 않은 일 등의 문제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혹은 운명 속에서 나타나 자기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일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들 모두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다. 언제는 자기 팔자가 좋다고 했다가, 또 언제는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한다. 언제는 자기 삶이 행복하다고 했다가, 또 언제는 삶이 불운하다고 한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이다. 기분이 좋을 때 하는 말이 다르고 기분이 나쁠 때 하는 말이 또 다르다. 잘 풀릴 때 하는 말이 다르고 잘 풀리지 않을 때 하는 말이 또 다르다. 운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도 본인이고 자기 팔자가 좋다고 하는 것도 본인이다. 이렇듯 그들은 뭐가 뭔지 잘 알지도 못한 채로 살아간다. 언제나 안갯속을 헤매느라 삶이 막막하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떻게 운명을 올바르게 대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이러한 인생의 대사를 어떻게 마주할지, 이에 대해 사람은 뚜렷한 인식과 분명한 방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방면의 문제가 해결되면 기본적으로 운명에 대한 사람의 태도와 관점이 비교적 올바르게 자리 잡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게 된다. 이 방면에서는 극단적으로 치달을 일이 없을 것이다.

조금 전 운명에 관해 교제한 것이 진리에 부합하느냐? (네.) 진리에 부합하는 말에는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 알고 있느냐? (듣고 나면 비교적 분명한 느낌이 들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꽤 실제적이며 실행 길이 있습니다.) 그렇다. 꽤 실제적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더 정확하게 말해 볼 사람이 있느냐? (현시점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이는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성과다. 실제적이기 때문에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이 운명을 믿기는 하지만, 팔자가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하는 논조가 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깊은 내면은 해방되어 자유롭겠느냐, 아니면 결박당한 상태겠느냐? (결박당한 상태입니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언제나 이러한 논조에 결박당하게 된다. 네가 진리를 깨달은 이후에는 실제적이고 길이 있다는 느낌 외에 또 무엇을 느끼겠느냐? (해방감입니다.) 그렇다. 자유로워지고 해방된다. 네게 실행 길이 생기고 더는 묶여 있지 않게 되면 네 마음이 해방과 자유를 얻지 않겠느냐? 치우치거나 터무니없는 관점이 네 생각을 결박하지 못하고 네 팔다리를 결박하지 못한다. 너는 실행 가능한 길을 얻고 더 이상 치우치거나 터무니없는 관점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사람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교제를 들은 후, 너는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며 이렇게 말한다. ‘알고 보니 그런 거였구나! 어휴, 예전에 가지고 있던 운명에 대한 인식은 전부 치우치고 극단적인 거였어! 이제 알았으니까 팔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잘못된 말 때문에 곤혹스러울 일도 없을 거야. 걱정도 사라졌어. 이걸 알지 못했다면 어느 순간에는 팔자가 좋은 것 같았다가 금방 또 나쁜 것 같고, 내 팔자가 도대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항상 고뇌하겠지.’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고 나면 실행 가능한 길이 생긴다. 이 일에 대해 정확한 견해가 생기고 정확한 실행 길이 생긴다. 그러면 자유로워지고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하는 말이 과연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진리가 맞는지 분별하려면 그의 말이 실제적인지 들어 봐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다 듣고 난 후 네 어려움과 문제가 해결되었는지 봐야 한다. 만약 해결되었다면 너는 자유롭고 해방된 느낌일 것이고, 홀가분한 기분이 들 것이다. 한 방면의 진리 원칙을 깨달을 때마다 그와 관련된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진리를 어느 정도 실행해 낼 수 있으며, 이는 너에게 해방감과 자유를 안겨 준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냐? (네.) 진리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이제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진리는 어떤 작용을 하느냐? (사람의 마음에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줍니다.) 진리가 하는 작용이 딱 그것뿐이냐? 단지 그런 느낌이 전부냐? (주요하게는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잘못되고 편향되게 일을 바라보는 관점을 해결합니다. 사람에게 순수하고 올바르며 진리에 맞게 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생기면 마음이 해방되고 자유로워집니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부정적인 것들에게 결박당하거나 교란당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해방되는 것 외에, 핵심은 네가 해당 방면에서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더는 잘못되고 치우친 사상 관점에 얽매이거나 그것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러는 대신 진리를 실행하는 원칙이 생기고, 그 방면에서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게 된다. 자기 팔자가 안 좋다는 생각 탓에 의기소침한 정서가 생긴 사람들의 모습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교제하겠다.

의기소침한 정서를 일으키는 또 다른 원인은 자기 팔자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지만, 늘 운이 나빠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행운의 신은 항상 나를 비껴간다.”라는 이방인의 표현처럼 말이다. 그는 자기가 가진 조건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키로 보나, 얼굴로 보나, 학력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사역 능력도 좋다. 그런데 어째서 행운의 신은 항상 나를 돌봐주지 않는 것인가?’ 그는 이 점이 늘 불만이고, 자기는 언제나 운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대입 시험을 보던 해부터 이야기하자면, 간절한 바람을 안고 응시 원서를 냈으나 시험 당일 감기로 인한 고열 탓에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 했고, 2~3점 차이로 대입에 실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운이 안 따라 줄 수가 있는가? 공부를 못한 것도 아니고 평소에 노력도 많이 했는데, 하필이면 다른 날도 아니고 대입 시험 날에 열이 나다니, 이건 운이 나빴던 거야. 하아! 인생의 첫 번째 중대사에서부터 좌절을 맛보았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앞으로는 부디 운이 좋기를 바랄 수밖에.’ 그러나 그 후에도 생활 속에서 갖가지 난관과 문제를 맞닥뜨린다. 한 예로, 직원을 모집한다는 곳이 있어서 막 지원하려는데 인원이 다 찼다며 필요 없다고 한다. ‘어쩌면 이렇게나 운이 안 좋을 수가 있는가? 왜 좋은 일은 항상 나를 비켜 가는가? 정말 운도 없지!’ 출근 첫날, 남들은 부장으로, 차장으로, 과장으로 승진한다. 자기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 봤자 소용없다. 다음 승진을 기다려야 한다. 일을 잘해서 상사에게 인정받고, 다음 승진은 드디어 자기 차례가 오겠구나 했더니, 난데없이 낙하산 부장이 내려오는 바람에 또 승진에서 제외되고 만다. ‘아아! 정말이지 운이 나쁜가 보다. 좋은 기회는 절대 내게 오지 않고, 행운의 신은 언제나 나를 돌보지 않는구나.’ 그 이후 하나님을 믿게 되는데, 글쓰기를 좋아해서 문서 본분을 이행하길 원하지만, 심사에서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해 떨어진다. ‘평소에는 글을 잘만 쓰면서 왜 심사에서는 실력 발휘를 못 한 것인가? 하나님도 깨우쳐 주시거나 인도해 주시지 않는구나! 원래는 문서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면서 진리도 많이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운이 나빴어. 계획은 좋았지만, 이루지 못한 거야’. 어떤 일을 할지 고르고 고르다가 마지막에는 ‘복음팀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라고 한다. 막 복음팀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꽤 좋다고 생각한다. 드디어 자기 자리를 찾은 느낌이고 재능을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머리도 좋고, 사역 능력도 있고, 실제적인 일을 하고 싶은 의욕도 있다. 그리하여 노력 끝에 어렵사리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책임자가 된다. 그런데 잘못을 하나 저질렀다가 리더에게 들켜 그렇게 하는 건 원칙을 어기고 교회 사역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란 소리를 듣는다. 책망 훈계가 임하자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오기 전에는 우리끼리 잘하고 있었어요. 당신이 오고서 처음으로 책망을 받아 본다고요.” 그는 생각에 잠긴다. ‘역시 내가 운이 안 좋은 거겠지?’ 얼마 후, 복음 사역에 변동이 생겨 인원 조정이 이루어진다. 그는 책임자에서 일반 구성원으로 조정되어 새로운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어휴, 승진은커녕 좌천됐어. 내가 오기 전까지는 조정도 없었다더니, 왜 내가 오니까 대규모 조정에 들어가는 거야? 이번 조정으로 발탁될 희망이 또 사라지겠네.’ 새로운 지역에 가 보니 교회도 적고, 인원도 적고, 사역을 펼치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경험이 부족해서 한동안 모색할 시간이 필요하며, 말도 통하지 않는다. ‘이 일을 어쩌면 좋지? 본분을 팽개치자니 엄두가 안 나고, 잘해 내자니 어렵고 힘들 것 같다. 하아, 역시 난 운이 나빠! 운은 대체 어떻게 바꿔야 하지?’ 그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벽에 부딪쳤고, 줄곧 운이 안 따라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장애물을 만나는 탓에 쉽게 내디딘 걸음이 없었다. 가까스로 성과를 좀 내고 희망이 좀 보인다 싶으면 생각지도 못한 환경 변화가 찾아와 희망이 사라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점점 의기소침해지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성과 좀 내서 인정받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야? 한 집단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인가? 남들의 인정과 호감을 받는 사람이 되기가 왜 이렇게나 힘들지? 매사 원하는 대로 잘 풀리기가 왜 이렇게 힘들지? 살면서 생각대로 안 되는 일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삶이 왜 이렇게 험난하지? 왜 번번이 벽에 부딪치는 거야?’ 특히 어디에 배정되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해 교체되거나 도태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대단히 의기소침하고, 항상 자기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내가 천리마이면 뭐 해. 그 사실을 알아볼 백락을 만날 수가 없는걸. ‘천리마는 많지만 백락은 흔치 않다.’라는 속담도 있잖아. 내가 바로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천리마야. 결국은 내 운이 나쁜 거지. 어디를 가도 성과를 내지 못하고 업적을 이루지 못해. 내 강점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멋지게 실력을 보여 주지도 못하고,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없어. 어휴, 무슨 운이 이렇게 나쁘담!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는 항상 자기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며 매일 안절부절못한다. ‘어휴! 본분 조정하면 안 되는데.’ ‘어휴! 무슨 일 생기면 안 되는데.’ ‘어휴! 변동이 있으면 안 되는데.’ ‘어휴! 또 무슨 큰 문제가 터지면 안 되는데.’ 의기소침하기만 한 게 아니라 속으로 특히나 조마조마하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애를 태운다. 그는 항상 자기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면이 대단히 의기소침하다. 그 의기소침함은 운이 나쁘다는 그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인한 것이다. 그는 자기가 운이 나쁘고, 늘 발탁되지 못하며, 늘 팀장이나 책임자가 되지 못하고, 늘 앞에 나서지 못하고, 그러한 좋은 기회가 자기한테는 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도대체 어째서 그런 것인지 이해하지를 못한다. ‘나한테 특별히 부족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어딜 가든 다들 못마땅하게 여기지? 누구한테 미움받을 짓을 한 적도 없고 누구를 못살게 굴 생각도 없는데, 어째서 운이 나쁜 거야?’ 항상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탓에 내면에서 의기소침한 정서가 시시각각 그에게 주의를 환기한다. ‘너는 운이 나쁘니까 의기양양하게 굴지 말고 오만 방자하게 굴지도 마. 두각을 나타내겠다는 생각을 버려. 너는 운이 나쁘니까 무슨 리더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마. 너는 운이 나쁘니까 본분을 이행할 때 조심해야 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둬. 혹시라도 언젠가 드러나서 교체될 수도 있잖아. 혹시라도 누가 뒤에서 고자질하고 네 약점을 잡을 수도 있잖아. 항상 앞에 나서다가 혹시라도 뭔가 잘못해서 책망받을 수도 있잖아. 너는 리더가 되더라도 언제나 칼날 위를 걷듯이 신중하게 행동하고 조심해야 해. 설치지 말고 조용히 있어.’ 이러한 부정적 정서가 조용히 꼬리를 내리고 있으라며, 당당하게 처신하지 말라며 시시각각 그에게 주의를 환기한다. 운이 나쁘다는 생각이, 이러한 사상 관점 혹은 의식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말고 나서지 말라며,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쭉 지금처럼 의기소침하게 있으며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엄두를 내지 말라며, 다들 한 방에 모였을 때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앉고, 우쭐거리거나 설치지 말라며, 설쳤다가는 불운이 찾아올 거라며 시시각각 주의를 환기한다. 이렇게 의기소침한 정서가 언제나 곁을 맴돌기 때문에, 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의 주의를 환기하기 때문에,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우물쭈물하고 조심스럽다. 가슴속에 언제나 불안감이 있고, 자기 자리가 정확히 어디인지 도통 찾지 못한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자기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건만 그러지 못한다. 그는 무언가를 경계하는 것 같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불운이 찾아올까 봐 경계하고, 좋지 않은 운이 자기에게 나쁜 일과 모종의 곤란을 가져다줄까 경계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마음속으로 발버둥을 치는 것은 둘째 치고, 의기소침이라는 정서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그의 방식과 방법을 주도한다. 그는 늘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로 자기 행동을 가늠하며, 자기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옳은지 가늠한다. 그래서 자꾸만 의기소침한 정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가 말하는 소위 운이 나빴다고 하는 일들을 올바른 사상 관점으로 마주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이른바 ‘악운’을 처리하고 해결하지 못한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그는 내내 의기소침한 정서의 통제와 영향을 받는다. 어렵사리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 내적 상태와 마음속 생각을 교제했다가도, 예배에서 형제자매가 교제한 말이 고의든 아니든 자기 내적 상태에 꼭 들어맞아 정곡을 찌르는 바람에 자기 체면과 존엄이 상하면, 전처럼 운이 나빠서라고 여긴다. ‘이것 봐. 어렵사리 속마음을 털어놨더니 약점만 잡혔잖아. 진짜 운도 없지!’ 그는 이게 바로 운이 안 좋은 것이며, 운이 안 좋은 사람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생각한다.

항상 자기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문제점은 대체 무엇이겠느냐? 그는 언제나 운이 좋은지 나쁜지를 기준으로 삼아 자기가 한 일의 옳고 그름을 가늠하고, 자기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가늠하며, 마땅히 겪어야 할 일과 직면한 모든 문제를 가늠한다. 이것이 옳은 태도냐? (옳지 않습니다.) 나쁜 일은 재수가 없었다고 표현하고 좋은 일은 행운이라든지 이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관점이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물을 가늠하는 관점은 틀린 것이다. 이는 극단적이고 올바르지 않은 가늠 방식이자 기준이다. 이러한 가늠 방식은 사람을 늘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없고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사람의 심리는 항상 애타고, 초조하고, 불안하다. 이와 같은 부정적 정서가 해결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점점 더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져 하나님마저 자기를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남은 선대하면서 자기는 선대하지 않고, 남은 보살피면서 자기는 보살피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왜 나는 항상 불안감을 느끼고 애가 타는 거지? 왜 나쁜 일은 꼭 나한테만 일어나지? 왜 좋은 일은 항상 내 몫이 아니지? 한 번쯤이라도 나한테 좋은 일이 일어나면 좋을걸!’ 이렇게 잘못된 사상 관점으로 일을 바라보면 너는 행운과 불운이라는 굴레에 얽매이게 된다. 이 굴레에 점점 더 단단히 얽매일수록 네 정서는 계속해서 의기소침해진다. 그렇게 계속 의기소침해지는 과정에서 너는 네게 임한 일이 행운인지 불운인지에 대해 아주 민감해진다. 네가 그렇게 민감해졌다는 것은 이미 행운과 불운이라는 관점 혹은 논조에 지배당했다는 뜻이다. 그러한 관점에 지배당하면 네가 사람, 일, 사물을 대하는 관점과 태도가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범위를 벗어나 일종의 극단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극단에 빠지면 너는 의기소침한 정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의기소침해진다. 평소에는 전혀 의기소침함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일단 무슨 일이 생기면, 불운한 일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면 너는 곧바로 의기소침해진다. 이러한 의기소침함은 네 정상적인 판단과 결단에 영향을 주고, 더 나아가 네 희로애락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네 희로애락에 영향이 가면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와 염원이 전체적으로 교란되고 파괴된다. 이렇게 긍정적인 것들이 파괴되면 네가 깨달은 얼마 안 되는 진리가 연기처럼 사라져 아무런 작용도 못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악순환에 빠졌을 때 너는 네가 깨달은 얼마 안 되는 진리 원칙을 실행하기가 어렵다. 너는 행운이라고 느낄 때만, 의기소침한 정서에 억눌리지 않았을 때만, 가까스로 네가 하고 싶은 일에서 약간의 대가를 치르고 고생을 조금 한다. 아주 조금이지만, 진심이 있기는 있다. 그러다가 행운이 너를 떠나고 불운이 다시 네게 임했다는 느낌이 들면 의기소침한 정서가 빠르게 너를 다시 지배한다. 진심, 충성심, 그리고 고생하려는 의지가 그 즉시 너를 떠난다. 그러므로 자기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는 운을 유달리 따지는 사람은 자기 팔자가 안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극단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특히 그들은 의기소침과 같은 부정적 정서에 잘 빠진다. 또한, 지극히 소극적이고 연약하며, 더 나아가 감정의 기복이 지나치게 큰 경우도 흔하다. 운이 좋다고 느낄 때,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하고 온몸에는 힘이 넘친다.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으며, 밤에 잠을 덜 자도 괜찮고 낮에 밥을 덜 먹어도 괜찮다. 그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흥분하면 자기 목숨도 바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자기가 운이 나쁘다는 생각이 들고 하는 일마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으면, 의기소침한 정서가 바로 그의 마음을 점령한다. 그는 이전에 했던 맹세와 다짐을 몽땅 부정하고 대번에 바람 빠진 고무공처럼 맥을 추지 못하며, 진흙 덩어리처럼 축 처져서 아무 일도, 아무 말도 하려 하지 않는다. ‘무슨 진리 원칙, 진리 추구, 구원받는 것,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전부 나하고는 상관없어. 나는 운이 나쁘니까 진리를 얼마나 실행하든, 대가를 얼마나 치르든 소용없을 거야. 구원받지도 못할 거야. 다 끝장이라고. 나는 재수 없는 놈이고 불운한 인간이야.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난 운이 나쁘니까!’ 보아라, 언제는 터질 만큼 부푼 공 같더니 금방 또 바람 빠진 공처럼 된다. 아주 골치 아프지 않으냐? 그렇다면 어쩌다가 이렇게 골치 아픈 상황이 된 것이냐? 근원이 무엇이냐? 그는 언제나 자기 운세에 주목한다. 마치 주식 시장을 보듯이 상승하는지 하락하는지, 강세장인지 약세장인지, 불 마켓인지 베어 마켓인지 보면서 종일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는 운에 대해 유독 민감하고, 또 고집스럽기도 하다.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은 소극적인 정서에 빠질 때가 많다. 자기 운세에 너무 관심이 많고 기분에 따라 살아가는 게 그 이유다. 아침에 깨서 기분이 안 좋으면 이렇게 생각한다. ‘어휴! 아마 오늘도 운이 안 좋겠어. 왼쪽 눈꺼풀이 며칠째 떨리고 혀도 굳은 느낌인 데다가 머리도 잘 안 돌아가는 것 같아. 밥 먹다가 혀를 깨물었고 밤에 좋은 꿈도 못 꿨어.’ ‘오늘 만난 사람의 첫마디가 아무래도 나쁜 징조인 것 같아.’ 종일 이것저것 의심하느라 제정신이 아니고, 그런 일만 연구한다. 그는 자신의 매일 또는 매 시기의 운세와 추세, 기분에 관심을 아주 많이 기울인다. 교회 형제자매 한 명 한 명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관찰하고, 심지어는 말투까지도 관찰한다. 그는 마음이 이런 것들에 점령당해 항상 의기소침하다. 자기 내적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진리를 구해 해결할 생각도 없다. 어떠한 패괴 성품을 드러내든 아랑곳하지 않고 별것 아니라는 듯 넘긴다. 이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항상 운이 좋은지 나쁜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부류의 사람들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은 과연 옳으냐? 운이 좋고 운이 나쁘다는 게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근거가 무엇이냐? (매일 만나는 사람들과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재하고 안배하신 것입니다. 운이 좋으니 나쁘니 하는 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일은 일어나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고, 의의를 지닌 것입니다.) 맞는 말이냐? (맞습니다.) 이 말은 맞는 말이고, 이는 이론적 근거이다. 좋은 일이 임하든 나쁜 일이 임하든 그 모든 것은 정상이다. 각 계절의 날씨처럼, 매일이 맑은 날일 수는 없다. 너는 맑은 날만 하나님이 안배한 날이고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폭풍이 몰아치는 날은 하나님이 안배한 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전부 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 것이며, 자연환경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자연환경은 하나님이 안배하고 제정한 법칙과 규율에 따라 생긴 것이다. 그 전부가 필요한 것이며,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날씨든지 자연법칙에 따라 생기고 나타나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좋고 나쁘고가 없다. 그저 사람이 느끼기에 좋거나 나쁠 뿐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거나 날이 흐리면, 더 나아가 우박이라도 오면 사람은 기분이 나빠진다. 특히 비가 와서 습한 날은 모두가 싫어한다. 그런 날은 관절이 아프고 몸에 기운도 없다. 하지만 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비 오는 날은 운이 안 좋다고 말할 수 있느냐? 네 운이 좋고 나쁘고는 이 사실 자체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저 날씨가 사람에게 불러일으키는 느낌일 뿐이다. 너는 맑은 날이 좋다고 한다. 그렇다면 석 달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맑은 날씨가 이어진다고 치자. 사람은 좋다고 느낄 것이다. 매일 해를 볼 수 있고 가끔은 바람도 분다. 상쾌하고 따뜻해서 외출하고 싶으면 언제든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식물들은 견디지 못한다. 농작물이 말라 죽게 되고 그 해에는 수확할 게 없어진다. 네 기분이 좋다고 해서 그게 정말 좋은 일이라 할 수 있겠느냐? 가을이 되어 먹을 곡식이 없으면 너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휴, 맑은 날이 너무 오래 이어져도 안 좋네. 계속 비가 안 오면 농작물이 피해를 입고, 곡식을 수확하지 못하면 사람도 굶어야 해.” 그때가 되면 너는 항상 맑은 날인 것도 좋지는 않다고 느낀다. 좋다, 혹은 나쁘다는 사람의 느낌은 사실 자기 사심과 욕망에 기반한 것이요, 자기 이익에 따라 말하는 것이다. 사물 자체의 본질에 근거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떠한 일을 두고 좋으니 나쁘니 할 때, 그의 근거는 정확하지 않다. 근거가 정확하지 않기에 최종적으로 가늠된 결과도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운이 좋으니 나쁘니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제 다들 운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고 좋고 나쁜 게 따로 없음을 알고 있다. 네게 임한 사람과 일, 사물은 좋든 나쁘든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한 것이므로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좋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좋지 않은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은 것이 임했다고 자기 운이 좋다고 할 수는 없으며, 좋지 않은 것이 임했다고 해서 운이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어디에나 자기가 배워야 할 공과가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사람은 이를 거절해서도 안 되고 도피해서도 안 된다. 좋은 것이 임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좋지 않은 것이 임해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안배한 까닭이다. 좋은 사람과 일, 사물, 환경에는 자신이 배워야 할 공과가 있기 마련이고, 좋지 않은 것에는 더더욱 자신이 배워야 할 공과가 있다. 전부 다 살면서 반드시 겪어야 할 체험이며, 빠뜨려서는 안 될 부분이다. 사람은 이를 운이라는 말로 가늠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일의 좋고 나쁨을 운으로 가늠하는 사람은 어떠한 사상 관점을 가진 것이냐? 그러한 사람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는 어째서 그렇게 운이 좋은지 나쁜지에 집중하는 것이냐? 운에 집중하는 사람은 자기 운이 좋기를 바라느냐, 안 좋기를 바라느냐? (운이 좋기를 바랍니다.) 그렇다. 사실 그는 자기가 운이 좋기를, 온갖 좋은 일이 다 자기에게 임하기를 추구한다. 자기만 실속을 차리고 이익을 얻으면 그만이요, 남들이야 어떤 고통을 받고, 어떤 고생을 하고, 어떤 어려움을 겪든 관심이 없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재수 없는 일이 부디 임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쁜 일은 하나도 임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좌절, 실패, 난처함, 책망 훈계, 또는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손해를 보거나 사기를 당하는 등의 일은 임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임한다면 재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누가 안배한 일이든 간에 좋지 않은 일이 임하면 곧 재수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어디 발탁된다든지, 체면이 선다든지, 실속을 차린다든지, 이익을 얻는다든지, 큰돈을 번다든지, 높은 지위를 얻는다든지 등등의 좋은 일은 모두 자기에게 임해야 하며 이는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는 항상 운의 좋고 나쁨으로 자기에게 임한 사람과 일, 사물을 가늠한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나쁜 운이 아니라 좋은 운이다. 무언가가 조금이라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화를 내고 불만을 품는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부류는 이기적인 인간들이다. 자기 실속과 이익만 추구하고, 우위를 점하기를 추구하며, 체면을 세우기를 추구한다. 좋은 일은 자기가 혼자 다 차지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것이 바로 그의 본성 본질이며, 참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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