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8) 제 4 부

자식이 독립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있는 상황이라면 부모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자식의 일, 생활, 가정과 관련해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필요한 보살핌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혹은 만약 자식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돌볼 틈이 없는 상황이라면 적절히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아이를 낳고 나서 부부 둘 다 일이 바쁜데 아이는 너무 어리고 가끔 돌봐 줄 사람이 없다면 네가 대신 좀 돌봐 줄 수 있다. 이는 부모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어디까지나 자신의 혈육이므로 네가 돌보는 것이 다른 사람이 돌보는 것보다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식이 안심하고 너에게 아이를 맡긴다면 너는 대신 돌봐 주면 된다. 만약 자식이 너를 믿지 못해서 네가 돌봐 주기를 바라지 않거나 건강이 좋지 않은 너를 걱정하고 아끼고 배려하는 마음에 너에게 아이를 맡기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트집을 잡아서는 안 된다. 심지어 아예 부모를 믿지 못하고 부모가 손주를 돌볼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식도 있는데, 그는 부모가 그저 손주를 애지중지할 뿐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며 음식을 먹일 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식이 너를 믿지 않고 네가 아이를 보살피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너에게는 오히려 여유가 생기니 더욱 좋은 것이다. 이는 양쪽이 모두 원하는 바이고,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이해할 줄 아는 것이다. 자식이 도움과 관심, 그리고 보살핌이 필요할 때, 감정적인 면이나 여러 방면에서 그에게 적절하게 필요한 관심과 도움을 주고 경제적 지원을 해 주면 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저축해 놓은 돈이 좀 있거나 원래부터 일을 잘하고 수입이 괜찮다면 자식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부모는 능력껏 도와줄 수 있다. 만약 그럴 능력이 없고 전 재산을 털거나 사채를 빌려야만 자식을 도울 수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능력 범위 안에서 혈육 간의 정이라는 틀에 맞는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되지, 자식을 위해 전 재산을 털고 신장과 피를 팔거나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다. 너의 목숨은 오로지 너 자신의 것이고 하나님이 너에게 준 것이다. 너에게는 너만의 사명이 있고, 너의 목숨은 네 일생의 사명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자식의 목숨 역시 그가 그의 인생길을 끝까지 걷고 그 일생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주어진 것이지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자식이 미성년자이든 어른이든 부모의 생명은 그들 자신만의 것이지 자식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부모는 자식이 공짜로 부리는 가정부나 노예도 아니다. 자식에게 어떤 기대를 품든 부모는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식에게 함부로 부림을 당하는 하인, 식모, 노예가 될 필요는 없다. 자식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부모 역시 독립된 사람이다. 그가 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그가 어른이 된 이후의 생활을 당연한 듯 책임져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 없다. 그가 어른이 되었으니 너는 그를 부양하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가 앞으로 잘 살지 못 살지, 부유할지 가난할지, 즐겁게 생활할지 불행하게 생활할지 등은 그 자신의 일이지 부모와는 관련 없다. 부모는 이 모든 것을 바꿔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다. 그의 삶이 즐겁지 않다고 해도 부모는 “너는 불행하게 살고 있구나.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 재산을 팔고 내 평생을 다 걸어서라도 너를 즐겁게 해 줄게.”라고 말할 의무가 없다. 그럴 필요 없다. 너는 그저 책임을 다하기만 하면 된다. 네가 그를 돕고 싶다면 그에게 왜 불행한지 물어보고 그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리적, 사상적 차원에서 문제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는 있다. 그가 받아들인다면 물론 더 좋지만 그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부모는 책임만 다하면 된다. 그걸로 충분하다. 그가 기꺼이 고생하겠다고 한다면 그건 그 자신의 일이니 그것으로 인해 네가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잘 필요는 없다. 다 부질없다. 왜 그렇겠느냐? 왜냐하면 그도 이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모든 일을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모가 만약 그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그건 정인 것이다. 부모가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모가 모질거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어른의 문제를 직면해야 할 뿐 아니라 어른이 견뎌야 할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해야 하지 모든 일을 다 부모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물론 부모 역시 자식이 어른이 된 후 자식의 일이 잘 풀리는지, 사업이 잘되는지, 가정이 화목한지, 그리고 결혼 생활이 순탄한지 여부에 대한 책임을 전부 부모 자신이 짊어져서는 안 된다. 너는 관심을 갖고 물어볼 수는 있지만 모든 책임을 떠맡고 자식을 자기 곁에 묶어 둔 채 가는 데마다 데려가고 어디에 가든 다 지켜보며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늘도 밥 잘 먹고 즐겁게 지내고 있을까? 일은 잘하고 있겠지? 상사가 예쁘게 봐 주려나? 며느리(사위)가 걔를 사랑하겠지? 우리 손주는 말 잘 듣고 있겠지? 학교에서 공부는 잘하려나?’ 이런 것들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자식의 일은 자식 스스로 해결하면 되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다.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왜 물어보겠느냐? 정말로 너와는 상관없다는 뜻이다. 너는 자식에게 책임을 다했고 그가 클 때까지 정성 들여 길렀다. 그러니 너는 이제 물러나야 한다. 물러난다고 해서 네가 할 일 없이 한가한 것도 아니다. 너는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네가 이번 생에 완수해야 할 사명에 있어 자식이 어른이 될 때까지 정성 들여 기르는 것 외에도 완수해야 할 다른 사명이 또 있다. 너는 네 자식의 부모일 뿐 아니라 피조물이기도 하다. 너는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에게 와서 너의 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너의 본분은 무엇이겠느냐? 너는 본분을 완수하였느냐? 전력을 다했느냐? 구원받는 길에 들어섰느냐? 너는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자식이 어른이 된 후 어떤 길을 갈지, 어떻게 생활할지, 형편이 어떨지, 기쁘고 즐거울지는 부모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형식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그는 이미 독립했다. 너도 그를 독립적이 되게 하고, 그만 놓아주어야지 통제해서는 안 된다. 형식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육체적 혈연관계 차원에서든 너는 이미 책임을 다한 것이고, 더 이상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그의 사명과 너의 사명은 서로 관련이 없고 그가 걷는 인생의 길도 너의 기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에 대한 너의 기대와 책임은 거기까지이다. 물론 그 어떤 기대도 품어서는 안 된다. 그는 그이고 너는 너이다. 그가 만약 가정을 이루지 않더라도 그와 너는 운명과 사명이라는 차원에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독립된 두 개체이다. 그가 만약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고 해도 그의 가정과 너의 가정 역시 아무 상관없는 두 가정이다. 그는 그의 생활 습관과 생활 방식이 있고 원하는 삶의 질이 있으며, 너 역시 너만의 생활 습관과 네가 원하는 삶의 질이 있다. 너에게는 네 나름의 인생길이 있고 그에게도 그 나름의 인생길이 있다. 너에게는 너의 사명이 있고 그에게도 그의 사명이 있다. 물론 너에게 너의 믿음이 있고 그에게도 그의 믿음이 있다. 만약 그가 금전과 명리를 믿는다면 너희 둘은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그가 만약 너와 같은 믿음이 있고 그 역시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 길을 걷는다고 해도 너희 둘은 당연히 전혀 다른 두 개체다. 너는 너고 그는 그이니 너는 그가 어떤 길을 걷든 참견해서는 안 된다. 지지하고 돕고 공급해도 되고, 일깨우고 격려해 주어도 되지만 간섭하고 참견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어떤 길을 걷고 어떤 사람으로 살며 무엇을 추구할지는 어느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아라. 나는 무엇을 기반으로 여기에 앉아 너희와 한담하고 이런저런 일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느냐? 바로 너희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너희가 내 진심 어린 잔소리를 기꺼이 듣고자 하기에 나는 말하는 것이다. 만약 너희가 듣고자 하지 않았거나 떠나 버렸다면 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말을 얼마나 많이 할지는 모두 너희가 듣고자 하는지,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려고 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네가 “저는 들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면 나는 네가 깨닫고 진입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좀 더 자세하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를 정상 궤도에 오르도록 붙들어 주고 너를 하나님 앞으로, 진리 앞으로 데려와 네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도록 할 것이다. 그럼 나는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그러나 네가 듣고 나서 실행하고자 하는지, 네가 어떤 길을 걷는지, 네가 어떤 인생을 선택하는지, 네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나의 일이 아니다. 만약 네가 “저는 그 방면의 진리에 대해 질문이 있습니다. 구해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너의 질문에 답해 줄 것이다. 네가 만약 단 한 번도 진리를 구하고자 하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그 일 때문에 너를 책망하겠느냐? 나는 너를 책망하지 않을 것이고, 너에게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며 너를 비웃거나 헐뜯지도 않을 것이다. 냉담한 태도로 너를 대하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나는 예전에 하던 그대로 할 것이다. 네가 만약 본분을 이행하다가 실수하거나 일부러 방해하고 교란한다면 나는 내 나름의 원칙과 처리 방식으로 너를 대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저는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 싶지 않고 그런 관점들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제가 예전에 하던 대로 본분을 이행할 거예요.”라고 말한다면 원칙과 행정 법령을 거슬러서는 안 될 것이다. 네가 행정 법령을 거스른다면 나는 너를 처리할 것이다. 네가 만약 행정 법령을 거스르지 않고 착실하게 교회 생활을 한다면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네 개인의 생활, 무엇을 먹고 입고 싶어 하는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나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고 너에게 자유를 줄 것이다. 왜 그렇게 하겠느냐? 나는 이 모든 일들의 원칙과 내용을 너에게 분명히 말해 주었다. 나머지는 너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 네가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네가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네가 만약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누가 강요할 수 있겠느냐? 결국 모든 사람이 걷는 길과 맺게 되는 결실은 스스로 책임지게 될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다. 진리를 추구하든 추구하지 않든, 모두 네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아무도 너를 가로막지 않는다.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고 해도 네가 은혜와 물질적 축복을 얻을 수 있도록 너를 격려해 주는 사람은 없다. 나는 그저 책임을 다할 뿐이다. 나의 책임을 다하여 너희가 깨닫고 진입해야 할 진리를 모두 너희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너희가 뒤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나는 전혀 묻지 않고 몰래 살피지도 않는다. 나의 태도는 이렇다. 부모로서 자식을 대할 때도 이렇게 해야 한다. 어른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가 ‘옳은 것’을 선택하든 ‘그른 것’을 선택하든, 흑을 선택하든 백을 선택하든, 긍정적인 사물을 선택하든 부정적인 사물을 선택하든, 그것은 그 자신의 일이고 그의 내면의 필요에 근거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의 본질이 악하다면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선을 추구하고, 인성을 갖추고 있으며 양심 지각, 염치가 있다면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선택할 것이고, 조금 느리더라도 언젠가는 바른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필연적으로 그렇다. 그래서 부모도 자식을 대할 때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 자식의 선택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어떤 부모들은 자식에게 이런 것을 요구한다. “자식은 바른길을 걷고 하나님을 믿어야 해요. 세상과 직장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때 자식은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부모와 자식은 흩어지고 말 거예요. 나중에 가족 모두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지상에서 모여 살았으니 천상에서도 모여 살아야 하고 하나님나라 안에서도 헤어지면 안 돼요. 대대손손 함께해야 한다고요.” 그런데 자식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추구한다. 돈 벌고 부자 되는 것을 추구하며, 유행하는 옷을 입고 유행하는 일을 하고 유행하는 말을 하면서 부모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 때문에 부모는 괴로워하며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한다. 한 번 금식했다 하면 일주일, 십 일, 십오 일 동안이나 한다.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갖은 애를 쓰는데 늘 배가 고파서 머리가 어질어질하기 일쑤이고,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목 놓아 울며 기도할 때도 많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하고 애를 써도 자식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자식은 각성하지도 않는다. 자식이 믿지 않을수록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아이고, 아이한테 빚을 지고 말았어. 아이를 볼 면목이 없어. 아이에게 복음을 전하지도 못했고 아이가 나와 함께 구원받는 길로 나아가도록 하지도 못했어. 이건 복을 받는 길인데, 너는 어찌 그리 어리석니!’ 그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부모가 이렇게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그가 필요하다면 네가 먼저 말할 필요가 있었겠느냐? 그가 스스로 편지를 보내왔을 것이다. 부모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내 아이에게 미안해. 일찍 대학에 보냈더니 대학에 가자마자 돌이킬 수 없게 돼 버렸어. 세상을 추구하느라 여념이 없고, 집에 돌아오면 일하고 돈 버는 얘기만 해. 누가 승진하고 차를 샀다느니, 누가 부자에게 시집갔다느니, 또 누가 유럽에 가서 연수하고 유학 갔다느니 하면서 남 사는 것 좀 보라는 얘기만 해. 집에만 오면 하는 이런 얘기들을 나는 듣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아이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아.’ 결국 자식과 사이가 틀어져서 만나기만 하면 얼굴을 찌푸리고 얘기만 나누면 얼굴을 붉힌다. 어쩔 줄 몰라 이렇게 생각하는 자식도 있다. ‘우리 부모님은 대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 안 믿으면 안 믿는 거지 왜 늘 저런 태도로 나를 대하시는 거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믿을수록 훌륭해져야 하는 거 아니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왜 가족애가 없어진 거야?’ 너무 애가 탄 부모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한다. “쟤는 제 자식 아니에요. 쟤랑 모자 인연 끊을 거예요.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을 거라고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부모는 어리석지 않으냐? (어리석습니다.) 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하고 자식의 미래와 신앙, 그리고 자식이 걷는 길마저 지배하려 하니 이는 너무도 어리석다! 적절하지 못하다. 특히 자식이 세상을 추구해서 매니저로 승진도 하고 임금도 올라 부모에게 줄 인삼, 금귀고리, 금목걸이를 한 보따리 사오면 이렇게 말하는 부모도 있다. “이런 건 필요 없어. 나는 너희가 건강하게 나랑 같이 하나님을 믿었으면 좋겠어. 하나님을 믿으면 얼마나 좋으니!” 그러면 자식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승진했는데 축하는 못 해 주실망정 그런 말씀은 왜 또 하시는 거예요? 다른 부모님들은 자식이 승진했다고 하면 샴페인을 터뜨리면서 축하해 주고 푸짐하게 먹으러 레스토랑에 간다는데 두 분은 참, 제가 사온 목걸이랑 귀걸이를 보고 기뻐하지도 않으시네요. 제가 대체 뭘 잘못했죠?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짜증을 부리시다니 너무하세요!” 부모가 이렇게 짜증을 부리는 게 옳겠느냐? 사람은 각자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걷는 길도 서로 다르다. 사람은 스스로 길을 선택하는 것이니 이 일을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자식이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너는 그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억지로 하는 일은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없다. 자식이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면 네가 자주 언급할수록 그는 너를 더 짜증 나게 할 것이고 너도 그를 짜증 나게 할 것이니 결국 그도 너도 모두 짜증이 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너희 모두 짜증이 날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를 혐오하고 네가 감정에 너무 치우쳐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라는 점이다. 자식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너는 이토록 큰 대가를 치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그가 세상을 추구한다고 너는 이토록 괴로워한다. 그렇다면 만약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앗아 가려고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느냐? 네 마음속에 자식은 네 전부이다. 너의 미래이자 희망이며 너의 목숨이나 마찬가지다. 이런데도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느냐? 네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혐오하지 않겠느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너무도 현명하지 못한 것이고 원칙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하나님도 못마땅해할 것이다. 그러니 네가 현명하다면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자식이 만약 믿지 않으면 그대로 내버려두어라. 이치는 설명할 만큼 다 설명했고, 해야 할 말도 다 했으니 그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두어라.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가 어떻든 지금껏 유지해 온 대로 유지해라. 그들이 너에게 효도하고 너를 아끼며 보살피려고 한다면 거절할 필요 없다. 그들이 너를 데리고 유럽으로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만약 본분을 이행하는 데 지장을 주어 가기 싫다면 너는 가지 않아도 된다. 만약 네가 가고 싶고 갈 시간이 있다면 가거라. 식견을 넓히는 것도 나쁠 것 없다. 이는 나쁜 사람과 어울려 못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은 정죄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너에게 좋은 것과 맛있는 음식, 좋은 옷을 사 주는데 네가 보기에 성도가 입고 쓰고 착용하기에 적합하다면 그냥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라. 만약 네가 이런 것들을 경멸하고 이런 것들을 누리고 싶지 않다면, 이런 것들이 성가시고 역겹게 느껴져 누리고 싶지 않다면 너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해도 좋다. “돌아온 너희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쁘단다. 뭘 사오지 않아도 돼. 돈도 쓸 필요 없어. 나는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아. 그저 너희만 평안하고 즐거우면 돼.” 이 얼마나 좋으냐! 입으로도 이렇게 말하고 마음속으로도 이렇게 생각하며, 네가 덕을 볼 수 있게 너에게 물질적인 향락을 제공하도록 정말로 자식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진심으로 너에게 탄복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들의 일과 생활상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네가 도울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돕되, 만약 그들을 돕는 것이 본분 이행에 영향을 준다면 너는 거절해도 된다. 그것은 너의 권리다. 왜냐하면 너는 이미 그들에게 빚진 것이 없고 아무런 책임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 독립했고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챙길 수 있으니 네가 무조건적으로, 언제든 그들을 위해 봉사할 필요는 없다. 그들이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더라도 만약 네가 원하지 않거나 본분 이행에 지장을 준다면 너는 거절해도 된다. 이는 너의 권리다. 비록 너는 그들과 혈연관계가 있고 그들의 부모이지만 이는 그저 형식적, 혈연적, 감정적인 차원의 관계일 뿐 책임적인 차원에서 너는 이미 그들과의 관계에서 벗어났다. 그래서 만약 네가 현명한 부모라면 자식이 어른이 된 후에는 그들에게 아무런 기대도, 아무런 요구 기준도 가져서는 안 된다. 부모의 관점이나 위치에서 그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무엇을 하라고 요구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독립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독립했다는 것은 너는 책임을 다했다는 뜻이다. 여건이 허락하는 상황에서 네가 그들에게 무엇을 하든, 그들에게 관심을 갖든, 그들을 보살피든 그것은 그저 정인 것이고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혹은 그들이 자식으로서 너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부수적인 것이지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너는 이 점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이 이제 명확해지지 않았느냐? (명확해졌습니다.)

“저는 늘 제 아이가 마음에 걸려요. 걔는 태어나길 약골로 태어났어요. 선천적으로 야무지지 못하고 겁도 많죠. 자질도 떨어져서 사회에서 늘 괴롭힘을 당해요. 그래서 마음이 안 놓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네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네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네 감정이 작용했을 뿐이다. 너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저는 아이가 늘 마음에 걸리고 걱정돼요. 밥은 잘 먹는지, 속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식사를 규칙적으로 안 한 지 오래되고 늘 배달 음식만 시켜 먹으면 위장병이 생기지는 않을지, 병에 걸리지는 않을지, 아플 때 보살펴 주고 챙겨 주는 사람은 있는지, 배우자가 관심을 갖고 돌봐 주는지 말이에요.” 네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은 그저 감정과 혈연관계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너의 책임은 아니다. 하나님이 부모에게 부여한 책임은 그저 자식이 미성년자일 때 그를 부양하고 보살피는 것뿐이다. 자식이 어른이 되고 나면 부모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책임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측면에서 본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네가 얼마나 감정에 휘둘리든, 어느 시점에 너의 모성애가 크게 표출되든, 그건 책임을 다하는 게 아니라 그저 감정의 작용일 뿐이다. 감정의 작용은 인성의 이성이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원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진리에 대한 사람의 순종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며, 사람의 책임에서 비롯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감정이라고 한다. 모자간의 정, 혈연의 정이 그 안에 약간 섞여 있는 것이다. 그는 너의 자식이기 때문에 너는 늘 그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가 밖에서 고생하지는 않는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는지, 밖에서 일은 잘 풀리는지, 밥은 제때 먹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아플 때 병원비는 댈 수 있는지 염려하는 것이다. 너는 이런 것들을 자주 생각하지만 이는 부모의 책임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만약 네가 자식에 대한 이런 걱정들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너는 감정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것이자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너는 감정에 사로잡혀 살고 감정적으로 자식을 대하는 것이지 부모의 책임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감정에 따라 이 모든 것을 느끼고 바라보고 처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명백히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 준 책임은 자식이 어른이 되고 나면 모두 끝난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 준 이 실행법은 수월하고 간단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면 헛수고할 일이 없고 자식에게 어느 정도 자유와 단련할 기회를 줄 수 있다. 그들을 번거롭게 하거나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기분을 상하게 하지도 않는다. 어른으로서 그들이 어른의 시선으로, 어른의 독립적인 일 처리 방식이나 일을 바라보는 방식, 독립적인 세계관으로 자신의 인생을 마주하고 자신의 생활과 생존 과정에서 부닥치는 여러 문제를 마주하도록 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의 자유이자 권리이며 더욱이 그들이 어른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다. 너와는 관련이 없다. 만약 네가 늘 참견하려고 한다면 그건 상당히 역겨운 것이다. 늘 인위적으로 참견하고 간섭하려 한다면 그것은 교란하고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식에게 너에 대한 반감마저 불러일으켜 너는 아주 피곤하게 살고 말 것이다. 종국에는 잔뜩 억울해하면서 자식이 효도도 하지 않고 말도 듣지 않으며 부모 마음을 헤아리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고 배은망덕하며 은혜를 모르는 인간이라고 불평하게 될 것이다. 또 목매달아 죽겠다고 울고불고 난리 치는데 갖은 수를 다 쓰며 억지 부리는 비이성적인 사람들도 있다. 이는 더욱 역겹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순리대로 홀가분하게 살아가며 부모의 책임을 다하면 그만이다. 만약 네가 정 때문에 좀 보살펴 주고 관심을 갖는 것이라면 필요한 관심을 주는 것은 괜찮다. 자식이 어른이 되고 부모가 책임을 다했다면 아예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다. 자식에게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그가 세상을 혼자 살아가도록 내버려두고, 그가 얼마나 큰 어려움에 처해 있든 상관하지 않고, 어려움에 무너질 정도라도 모르는 체하고, 자식이 너를 필요로 할 때마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이 역시 옳지 않다. 이는 극단적인 것이다. 자식이 너에게 하소연하고 싶어 하면 너는 수신기가 되어 그의 말을 들어 주고, 그런 다음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할 계획인지 물어보고 네 의견도 제시할 수 있다. 그가 만약 나름의 생각과 계획이 있어 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그래. 기왕 네가 결정을 내렸으니까 앞으로 어떤 결과가 생기든 아무도 너 대신 책임져 줄 수 없는 거야. 이건 네 인생이니까 네 인생길은 네가 알아서 걸어가고 완주해야 해. 아무도 네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어. 네가 결정을 내렸다면 난 너를 지지해. 돈이 필요하면 내가 어느 정도 지원해 줄 수 있어. 내가 힘을 보태야 하면 내 능력 범위 안에서 도와줄게. 부모로서 달리 할 말은 없구나. 물론 네가 만약 나는 힘을 보탤 필요도, 돈을 지원해 줄 필요도 없고 그저 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경우라면 나야 더 편하긴 하겠지.” 너도 그렇고 자식도 그렇고 이제 각자 할 말은 다 했다. 자식은 가득했던 고통도 다 쏟아 냈고 불만도 다 털어 냈을 것이다. 자식은 눈물을 닦고 제 할 일을 하러 갈 것이고 너 역시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게 될 것이다. 이는 정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이라고 한다. 왜 그런 것이겠느냐? 자식에게 있어 부모는 무해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을 해코지하지도, 음해하지도, 비웃지도 않을 것이며 그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비웃는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자식은 부모 앞에서 거리낌 없이 눈물을 흘리고 감정을 분출하며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다. 아이처럼 어리광을 피우고 토라지고 제멋대로 굴어도 괜찮다. 그러나 토라지고 감정을 분출하고 제멋대로 굴고 나서도 할 일은 해야 하고 눈앞의 일은 스스로 처리해야 한다. 부모가 힘을 보탤 필요도, 도울 필요도 없다면 꽤 좋은 일이다. 그럼 부모도 상당히 여유롭지 않겠느냐? 기왕 자식이 그렇게 말했으니 부모도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자식은 이제 커서 독립했다. 그들은 단지 그 일에 대해 너에게 말만 했을 뿐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만약 네가 이성적이지 않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큰일을 나에게 말했다는 건 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지. 그럼 내가 조언을 좀 해 주어야 하지 않나? 결정하는 걸 도와주어야 하지 않나?’ 이는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자식은 그저 너에게 그 말을 좀 했을 뿐인데 네가 스스로를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적절치 않다. 자식은 네가 부모이니 너를 존중하고 신뢰해서 너에게 말한 것이다. 그는 사실 이미 다 생각이 있는데 네가 늘 간섭하려고 하니 이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그가 너를 신뢰하면 너도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어 그의 결정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참견하지도, 간섭하지도 마라. 만약 그가 네가 참견하길 원한다면 너는 참견해도 된다. 만약 네가 참견하고 보니 ‘아이고, 꽤나 골치 아픈 일이구나. 내가 본분을 이행하는 데 영향을 받겠어. 난 발을 빼야겠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이런 일들은 하면 안 돼.’라는 생각이 들면 서둘러 빠져나와라. 그런데도 그가 네가 개입하길 원한다면 너는 이렇게 생각해라. ‘난 네 일에 개입 안 할 거야. 네가 알아서 처리해. 내가 네 하소연과 쏟아 내는 쓰레기들을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해. 부모가 다해야 할 책임은 이미 다했어. 내가 개입하길 원해도 어쩔 수 없어. 나는 그 불구덩이에 뛰어들지 않을 거야. 뛰어들고 싶으면 너나 뛰어들어.’ 이것이 적절하지 않겠느냐? 이런 것을 바로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언제든 원칙과 입장을 잃어서는 안 된다. 부모라면 그럴 줄 알아야 한다. 알아듣겠느냐? 쉽게 행할 수 있겠느냐?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사실 쉬운 일이지만 네가 늘 감정에 휘둘려 감정 속에 빠져 있다면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너는 마음을 졸이며 내려놓지도, 제대로 짊어지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이다.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걸렸다’이다. 너는 거기에 걸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실행하고 싶지만 감정을 내려놓지 못한다. 아이를 애지중지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큰일이다. 너는 선택을 해야 한다. 후손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고 그들을 신경 쓰지 않으며 어른이 되어 독립한 그들을 자유롭게 날아가도록 두든지, 아니면 그들을 따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선택하여 그들에 대한 걱정과 감정을 내려놓았다면, 너는 부모가 해야 할 일을 잘하고 너의 입장과 원칙을 잘 지켜야 하며, 하나님이 역겨워하거나 혐오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는 행하기 쉽다. 그 알량한 정을 내려놓기만 하면 바로 행할 수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참견하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가 만약 너에게 그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한다면 너는 들어 주어라. 무슨 일인지 알기만 하면 된다. 그가 그 일에 대한 얘기를 마치면 너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알겠어. 또 다른 일도 있니? 밥 먹고 싶으면 밥해 줄게. 먹고 싶지 않으면 이제 돌아가렴. 돈이 필요하면 돈을 좀 주고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울게. 내가 도울 수 없는 일이면 네가 알아서 해라.” 그가 만약 기어코 너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너는 이렇게 말하면 된다. “난 책임을 다했어. 아빠, 엄마 능력은 여기까지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너처럼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 네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그건 네 일이야. 우리는 끌어들이지 마. 우리는 이미 나이도 많고 그럴 나이는 지났어. 너에 대한 우리의 책임은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정성껏 기르는 거야. 너 스스로 어떤 길을 걸을지, 어떤 고생을 감수할 것인지에 관한 일이라면 우리는 끌어들이지 마. 우리는 너를 따라 고생할 생각 없어. 너에 관한 한 우리는 이미 사명을 완수했으니까. 우리에게는 우리의 일과 삶의 방식이 있고, 우리의 사명도 있어. 너 대신 일을 하는 건 우리의 사명이 아니란다. 너도 우리가 사명을 완수하는 걸 도울 필요 없어. 우리 스스로 완수하면 되니까. 그러니 우리에게 너의 생활과 인생에 개입해 달라고 하지 마. 그건 우리와 상관없어.” 이렇게 명확하게 말하면 그만이다. 필요할 때는 왕래하고 연락하며 회포도 풀 수 있다. 얼마나 간단하냐! 이렇게 하면 어떤 좋은 점이 있겠느냐? (홀가분하게 살 수 있습니다.) 너는 최소한 육체적 혈육 간의 정에 관한 일은 적절하고 타당하게 처리하게 된다. 생각과 정신세계가 편안해지고, 의미 없는 희생과 부질없는 대가는 전혀 치르지 않게 되며,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게 되며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도록 하게 된다. 사람이 다해야 할 책임은 조금도 남김없이 다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도 하지 않게 된다. 하지 말아야 하는 일에는 손을 뻗지 않고 하나님이 알려 준 대로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이 알려 준 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길로, 사람이 홀가분하고 행복하며 즐겁고 평안하게 살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렇게 살아가면 너는 자신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본분에 충성심을 다하는 데 들일 시간과 에너지가 더 많아질 뿐 아니라 진리에 공을 들일 시간과 에너지도 더 많아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약 너의 에너지와 시간이 모두 감정, 육체, 자식, 혈육 간의 정에 얽매이거나 점유되면 너는 진리를 추구할 여력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사업을 하면 머릿속으로는 온통 세상의 흐름, 명리, 육적 향락을 추구하는 일들만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너의 에너지, 시간, 청춘이 모두 이런 것들에 의해 점유되고 소모된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결국 무엇을 얻겠느냐? 명리를 얻는다고 해도 공허할 것이다. 그럼 삶의 방식을 바꾸면 어떻겠느냐? 너의 시간과 에너지, 생각이 진리와 원칙에 점유되어 있다면, 네가 어떻게 본분을 잘 이행할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지 등 긍정적인 사물들만 생각한다면, 너의 에너지와 시간을 모두 이런 긍정적인 사물들을 위해 쓴다면 너는 다른 것을 얻게 될 것이다. 너는 가장 실속 있는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지, 어떻게 처신할지, 어떻게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할지 알게 될 것이다. 어떻게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할지 알게 되면 너는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자연스럽게 순종할 줄 알게 되면 너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이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어쩌면 너는 알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살아가는 과정에서, 네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 원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너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게 되고, 너는 너도 모르게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들이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좋은 일 아니겠느냐?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 에너지와 시간, 세월을 쏟으면 결국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네가 늘 감정, 육체, 자식, 일, 명리를 위해 살아간다면, 늘 이런 일들에 얽매여 있다면 너는 최종적으로 무엇을 얻겠느냐? 공허함이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것이며 결국 하나님께 철저히 혐오받아 버려질 것이다. 너의 이번 생은 그냥 그렇게 끝나 버리고 더 이상 구원받을 기회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로서 자식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든, 자식이 어른이 된 후에는 자식에 대한 그 어떤 감정적인 걱정, 애착, 또는 감정적인 갈등을 전부 내려놓아야 한다. 절대로 부모라는 신분과 위치를 이용해 자식에게 감정적인 차원에서 그 어떤 기대도 품어서는 안 된다. 네가 만약 이 점을 행할 수 있다면 아주 훌륭한 것이다! 최소한 하나님 앞에서 너는 부모로서 해야 할 책임을 다한 것이고, 너는 부모라는 신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의 어느 방면의 관점에서 보든 사람이 행해야 하는 것, 견지해야 하는 관점과 입장에는 모두 원칙이 있고, 하나님에게는 다 기준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후손에 대한 부모의 기대, 자식이 어른이 된 후에 부모가 실행해야 할 원칙에 관해서는 여기까지 얘기하도록 하겠다. 다음에 보도록 하자!

2023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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