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5) 제 3 부

눈꺼풀 떨림 현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제를 마쳤다. 이 외에 일상에서 사람이 꾸는 꿈은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예를 들어, 네가 밤에 이가 빠지는 꿈을 꾸면 어머니가 물을 것이다. “이 빠졌을 때 피 났니?” 피가 나면 어떻게 되느냐고 네가 되물으면 어머니가 말할 것이다. 피가 나면 집에 누군가가 죽거나 다른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속설인지는 잘 모르겠다. 가정마다 이런저런 다양한 속설이 있다. 조부모나 부모 등 육친이 죽는다는 설이 있고, 가까운 친구가 죽는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꿈에서 이가 빠지는 것은 사람에게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일이 아닌 데다가 생사와 관련된 큰일이다 보니 사람들이 무척 신경을 쓴다. 사람은 이가 빠지는 꿈을 꾸고 나면 늘 불편한 마음이 들고, 은연중 액운이나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 무서워하고 불안해하며 두려워한다. 그렇다고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누구라도 찾아가 이 일을 막고 바로잡고 싶지만 달리 길이 없으니 결국 이 일에 속박을 받는다. 특히 이가 빠져 피까지 나는 꿈을 꾸면 더욱 걱정이다. 이런 꿈을 꾸고 나면 며칠 동안 기분이 좋지 않고 불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한다. 애초에 이런 속설을 몰랐다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평상시 이런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과 관점을 갖게 되었거나 조상 대대로 전해지는 무서운 괴담을 들었다면 이 일을 더 신경 쓰게 되고 이런 꿈을 꿀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런 꿈을 꾸고 나면 곧장 기도한다. ‘하나님, 저를 지켜 주시고 위로해 주세요. 제게 힘을 주세요. 제게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해 주시고, 이런 일이 제 부모에게 일어나려 하면 하나님께서 저희 부모에게 사고가 나지 않게 지켜 주세요.’ 사람이 이런 태도를 지니면 이런 사상 관점 혹은 전통적인 속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전통이라는 것에서도 특정 가정이나 특정 사람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쓰는 특수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즉, 무언가를 먹고 마신다거나 어떤 주문을 외운다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닥쳐올 화를 피하는 것이다. 이런 방법이 분명 민간에 존재하겠지만 굳이 이에 대해 논하지는 않겠다. 우리가 교제하려는 것은 꿈이라는 것을 어떻게 대하고 인식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이다. 꿈을 꾸는 것은 육적인 본능이거나 생존 현상의 일부이다. 어찌 되었든 이 역시 신비한 일이다. 사람들이 흔히 “낮에 한 생각을 밤에 꿈 꾼다.”라고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낮에 이가 빠지는 것과 같은 생각은 하지 않으며,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이 일과 마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밤낮으로 이 일을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은 언제나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그러니 이 일은 “낮에 한 생각을 밤에 꿈 꾼다.”라는 사람의 말과는 무관하다. 이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다. 서양의 프로이트나 중국 주공의 해몽이 꿈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든, 꿈이 들어맞고 안 맞고를 떠나 결론적으로 꿈을 꾸는 것은 육의 무의식적 감각이나 의식과 관련되고, 또한 인체 신비의 일부이다. 생물과 신경 분야를 연구하는 서양의 과학자들이 결국 사람의 꿈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밝혀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그들조차 연구로 밝혀내지 못했는데 우리가 연구해야겠느냐? (연구하지 않겠습니다.) 왜 연구하지 않느냐? (연구해 봤자 부질없고 밝힐 수도 없습니다.) 부질없는 것도, 밝힐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간단하다. 그것이 진리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네가 밝혀낸들 어쩌겠느냐? 그것이 진리와 관련되느냐? (관련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육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로서 사람의 삶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사람이 그 영문을 알지 못하니 이 또한 신비의 일부이다. 사람이 이를 연구할 필요가 없고 논할 필요도 없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와 관련되지 않고 사람이 가는 길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밤에 꿈에서 이가 빠지든 말든, 꿈에서 포식하든, 롤러코스터를 타든 그것이 낮에 어떻게 살았는지와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네가 지난밤 남과 다투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낮에 꼭 남과 싸울 것이란 말이냐? 밤에 좋은 꿈, 행복한 꿈을 꿔서 기분 좋게 일어나면 낮에 반드시 일이 잘 풀리고 순조롭겠느냐? 그런다고 낮에 일할 때 진리를 깨닫고 진리 원칙을 찾아낼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꿈을 꾸는 것은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연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가 빠져 피가 나는 꿈이 가족의 죽음과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하는 말마다 어찌 그리 무지하냐? 또 무지하게 굴지 않았느냐? 식견이 없구나. 사람의 육은 신비롭다. 네가 분명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일이 무척 많다. 그저 “없습니다.”라고 해서 될 일이냐? 과거의 선지자와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도 기이한 꿈을 꾼 적이 있다. 그런 기이한 꿈에는 뜻이 있다. 하나님이 꿈으로 사람에게 계시하는데, 너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의 꿈속으로 들어가느냐? 이 모든 것이 신비이다. 하나님도 꿈을 통해 사람에게 어떤 일들을 알려 주고 계시하여 미리 알게 한다. 이런 일들을 너는 어떻게 해석하겠느냐? 너희는 이런 쪽에 무지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지금 네가 일상에서 나타나는 해석 불가능한 신비에 해당하는 여러 현상을 덮어놓고 부인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똑바로 인식하고 대하라는 것이다. “이런 일은 존재하지 않아, 그럴 리 없어, 말도 안 돼.”라며 끊임없이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올바로 대하라는 것이다. 올바로 대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느냐? 세상 사람들처럼 미신적이거나 과격한 사상 관점으로 그 일을 대하는 것이 아니고, 무신론자나 아무런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그 일을 대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양극단을 향해 가지 말고,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이런 일을 올바른 입장과 관점으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의 관점이나 불신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관점을 갖는 것이다. 그럼 이 일에서 네가 가져야 할 관점은 무엇이냐? (무슨 일이 생기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연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연구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이 측면의 식견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이 “아무개가 이가 빠져 피가 나는 꿈을 꿨는데 얼마 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네요.”라고 하면 너는 바로 부인한다. “그럴 리가요! 그건 미신이에요. 우연의 일치라고요. 미신이란 게 미혹되면 믿고 미혹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일이잖아요.”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겠느냐? (육에는 신비로운 일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가 빠져 피가 나는 꿈을 꾸고 뜻하지 않은 일을 당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일이 일어나든 말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해야 합니다.) 방금 눈꺼풀 떨림과 관련된 일에서 너희는 깨우침을 얻었다. 이가 빠져 피가 나는 꿈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너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 일은 우리가 밝히 알 수 없어요. 현실 생활에서 이런 현상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것이 정말 맞아떨어지는지,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예고하는 것인지 규정할 수는 없죠. 하지만 현실 생활에서 이런 안 좋은 일은 분명 일어나거든요. 영계의 일을 우리는 꿰뚫어 볼 수 없고 함부로 떠들어서도 안 돼요. 제가 만약 그런 꿈을 꾼다면 이런 태도를 가지겠어요. 무슨 꿈을 꾸든 그것의 속박을 받지 않는 거예요. 남들 말처럼 그 꿈이 정말 맞아떨어진다고 해도 저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알려 주셔서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거죠. 저는 가족이 죽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충격을 받지 않을지, 본분 이행에 영향은 없을지, 연약해지지 않을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전혀 없거든요. 그런데 오늘 이 일을 통해 깨우침을 얻고 제 실제 분량을 보게 되었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그것에 속박받아 의기소침해질 거예요. 제 분량이 아직 작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이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턱없이 작다는 것을 불현듯 알게 된 거죠. 오늘부터 저는 이런 일에 속박받지 않고 더더욱 진리로 무장해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것 같아요. 정말 가족이 죽거나 떠난다고 해도 속박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달라고, 힘을 더해 달라고 구할 준비를 하는 거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든 제가 본분 이행을 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거고, 하나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택한 것을 끝까지 붙들고 내려놓지 않을 거예요. 한결같이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할 겁니다.” 그런 후 너는 항상 하나님께 인도해 달라고, 힘을 더해 달라고, 다시는 그 일에 속박받지 않게 해 달라고 속으로 기도한다. 가족이 죽는 일이 일어나든 말든 너는 이를 위해 자신의 분량을 갖춰서 이 일이 일어나도 연약해지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는 의지와 바람이 변치 않게 해야 한다. 이것이 네가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가 빠지는 등의 꿈을 꿨을 때 너는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무시해서도 안 되고, 물론 경계하거나 다른 어떤 괴상한 방식으로 대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마땅히 진리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지배를 받아들여야지 의미 없는 희생이나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마라. 우매하고 완고한 사람은 자기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 닥쳤을 때 간파하지 못하면 “아니요.”, “괜찮아요.”,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요.”, “미신입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저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믿지만 귀신이 있다는 건 믿지 않아요.”, “저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믿지만 사탄이 있다는 것은 믿지 않아요. 사탄은 없습니다!” 그는 이런 말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진실한 믿음을 입증한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믿지만 귀신, 사악한 영, 귀신 들림 같은 일은 믿지 않고, 영계의 존재는 더더욱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불신파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는 이방 세계의 전통 사상에 관한 속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미신의 속설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미신으로 일어난 그런 사실 역시 믿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금 너더러 믿지 말라고, 그런 일을 회피하고 부인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이 닥쳤을 때 올바른 사상 관점, 올바른 선택과 태도를 가지고 마주하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네 진실한 분량이며, 네가 진입해야 할 바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머리카락이 빠지는 꿈을 꿨는데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도 불길한 일이다. 그것에 해당하는 속설이 무엇이고 그것이 맞아떨어지는 일이 무엇이든 사람은 이런 꿈 역시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이런 꿈은 나쁜 일,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평소에 꾸는 사소한 꿈 외에 그런 기이한 꿈은 모두 속설들이 있다. 그 속설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한다. 사람에게 예시, 경고, 예고함으로써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임을 알리거나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의식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너희는 회피, 거부, 경계, 반발, 나아가 인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 상황일수록 곧장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곧 일어날 일에서 거부하거나 대항할 것이 아니라 굳게 서서 증거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실행해야 한다. 이런 실행이 너더러 그런 일을 중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이런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때 너는 그것을 어떤 태도로 마주하고, 어떤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이런 일을 중시하지 말라고 한들 그 일이 일상에서 일어나지 않겠느냐? (일어납니다.) 네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일이 일어난다면 너는 생각할 것이다. ‘아, 믿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일이 진짜로 맞아떨어지네!’ 사전에 준비를 하지 않고 올바른 태도를 갖지도 않았으니 이런 일이 생기면 미처 손쓸 겨를이 없다. 아무런 예비가 안 되어 있어서 하나님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나 진실한 순종도 없어 결국 두려움만 남는다. 두려워할수록 하나님의 함께함을 잃게 되고, 하나님의 함께함을 잃으면 너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고 사람의 온갖 방법으로 머리를 쥐어짜 떨쳐 버릴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도 떨쳐 버리지 못하면 너는 하나님이 더 이상 미덥지 않고 하나님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고, 사람만을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악화일로다. 너는 그것이 미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무서운 일, 통제 불능의 상태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때 가서 너는 말할 것이다. “어쩐지 이방인 중에 불교 신자들, 향을 피우고 불상에 절하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절에서 향도 피우고, 복도 빌고, 감사의 예참도 하고, 재계하고 염불하더라니. 정말 그게 현실로 일어나는구나.” 너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순종과 믿음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악령 사탄을 무서워하게 된다. 두려움이 생기면 너도 어쩔 수 없이 그것들에게 어느 정도 복종하며 말한다. “이 악령은 만만치 않아요. 믿지 않으면 안 돼요. 악령은 피해 가야 해요. 뒤에서 함부로 뭐라 말하면 안 되고, 말할 때도 금기를 지켜야 해요. 악령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된다고요!” 이런 일의 이면을 통해 너는 물질세계 이외에 네가 생각지도 못한 세력이 움직이고 있음을 불현듯 알게 된다. 네가 이런 것을 느끼게 되면 네 내면 깊은 곳에 두려움과 하나님을 피하는 마음만 가득하게 되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점점 작아진다. 그러니 이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등의 꿈을 꾸면 너는 올바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런 일이 네게 일어났을 때 그 속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혹은 무엇을 예고하든 네가 할 일은 단 하나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네가 이 모든 일을 마주할 때 가져야 할 태도이자 입장이다. 그리고 이것이 네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증거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일어날 거라고 믿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믿는 것, 이것이 네가 가져야 할 태도이다.

특정 숫자나 날짜를 기피하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장기간 장사하는데, 돈 버는 것을 너무 중시해서 장사로 돈을 버는 것과 관련된 숫자는 유난히 좋아하고 중시하지만 장사에 안 좋을 것 같은 숫자는 기피한다. 숫자 6, 8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숫자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매장 번지수가 168이고 상호는 ‘이루파(一路發, 168의 중국어 발음과 유사)’이다. 이는 중국의 민간 전통에서 행운의 숫자이다. 반면 4, 5는 중국인의 전통에서 불길한 숫자이다. 4는 죽음, 5는 ‘없다’, ‘아니다’, ‘비다’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없다’는 말은 돈을 벌지 못하고 밑천을 날린다는 뜻이다. 자동차 번호판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어떤 중국인의 자동차 번호판은 모두 6으로 되어 있다. 숫자 6으로 배열되어 있으면 거의 중국인의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게 많은 6으로 돈을 대체 얼마나 벌었는지 모르겠다. 한번은 주차장에서 모든 자리가 거의 꽉 차 있는데 유독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그 자리의 번호는 64였다. 사람들이 왜 그곳에 차를 대지 않는지 아느냐? (아마도 64가 죽는다는 의미라서 불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64는 길에서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때는 왜 다들 그 자리에 차를 대지 않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이방인에게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6은 길, 4는 죽음을 의미하니 64는 길에서 죽는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 자리에 차를 대지 않았던 것이다. 추측건대 나중에 그 자리의 번호는 68, 이루파로 바뀔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돈에 미치고 돈에 환장했다. 숫자 하나로 바꿀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느냐? 숫자에 대한 중국인의 이런 속설은 외국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집을 보러 다닐 때 어떤 부동산 중개인이 물었다. “기피하는 숫자가 있나요? 예를 들어 번지수가 14라면 여기에서 4라는 숫자가 싫지는 않으세요?” 내가 “생각지도 못했는걸요? 그런 말은 금시초문입니다.”라고 하자 그가 말했다. “그 집을 본 많은 중국인들이 번지수에 4가 들어갔다고 거절하던데요.” 내가 말했다. “숫자는 꺼리지 않고 방향, 입지, 채광, 통풍, 집의 구조나 상태 같은 것만 봅니다. 숫자는 상관없어요. 기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해 보아라. 이방인이 기피하는 일이 꼭 일어나리라는 법이 있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중국 외의 다른 국가, 예를 들면 한국, 일본, 필리핀 혹은 동남아 일부 국가들이 숫자에 대해 어떤 관습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각국의 사람들은 숫자에 대해 일부 관습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인은 6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서양인이 6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하나의 종교 문화인데, 성경 계시록에서 6은 안 좋은 의미라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인들은 13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13층이 없는 곳이 많은데 이는 그들이 불길한 숫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인은 6, 8을 길한 숫자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떤 쪽이 진리이겠느냐? (모두 아닙니다.) 너희는 꺼리는 숫자가 있느냐? 자기만의 행운의 숫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중국 남부 사람들은 이런 쪽으로 무척 따진다. 숫자가 길하다거나 길하지 않다는 둥, 무슨 일을 하든 날짜부터 봐야 한다는 둥, 명절마다 가려서 먹고 마셔야 한다는 둥, 이런 쪽에서 매우 심각하다. 숫자에 관한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사람들이 일부 특정 숫자에 금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사람의 신앙, 사람의 상상과 사상, 관념과 어느 정도 관련된다. 이는 모두 어리석은 사상 관점이다. 만약 네 가정이 네게 이렇게 주입했다면 너는 그 사상 관점을 내려놓아야지 믿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은 미신도 아닌 터무니없는 말이다. 이는 다 사회에서 돈에 미친 그 사람들의 황당무계한 괴담이다.

이 외에도 띠를 무척 신경 쓰는 사람들이 있다. 띠는 미신과 관련된다. 이제는 서양인도 띠를 따질 정도니 띠라는 것이 아시아인만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서양인도 토끼, 소, 쥐, 말, 그리고 뱀, 용, 닭, 양을 알지 않더냐? 예를 들어, 선조나 부모에게서 전해 오는 말 중에 양띠면 팔자가 사납다는 말이 있다. 네가 양띠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내 팔자가 사나우니 별 재수 없는 일이 다 있네. 배우자도 별로지, 자식도 말 안 듣지, 직장도 안 풀려서 승진 길이 막혔지, 성과금에 내 몫이라곤 없지. 이렇게까지 재수가 없을까. 난 절대 양띠 애는 낳지 않을 거야. 가족 중에 양띠는 나 하나로 족해. 양띠가 한 명 더 늘어나서 고생길이 쌍으로 열리면 어떻게 살겠어?’ 그리고 생각할 것이다. ‘절대 양의 해에 아기를 낳아선 안 돼. 그럼 어느 해가 좋을까? 용? 뱀? 호랑이?’ 용의 해에 태어났다고 진짜 용이겠느냐? 진정 황제라도 될 수 있다는 소리냐? 헛소리가 아니냐? 너희는 원하는 띠가 있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토끼띠는 닭띠랑 안 맞대요. 제가 토끼띠라 닭띠인 사람이랑은 왕래를 잘 안 해요. 그 사람이랑은 상극이라 잘 안 맞거든요. 부모님도 이런 사람이랑은 닮은꼴 부부 모습이 없고 같이 있어 봤자 안 맞으니 웬만하면 만나지 말고 말도 걸지 말고 교류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상극끼리 같이 있다가 제가 눌리면 단명하지 않겠냐고요. 이런 사람이랑은 거리를 둬야 해요.” 이런 속설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어리석지 않으냐? (어리석습니다.) 결론적으로 네가 어떤 띠와 상극이건 이 일이 네 운명에 영향을 주겠느냐? 올바른 인생길을 가는 데 영향을 주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띠가 잘 맞는 사람과 함께 어울리고 협력하기를 원한다. 심지어는 함께 생활해야 한다고까지 한다. 은연중에 속으로 띠에 관한 속설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부모나 조상에게서 전해지는 이런 속설이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인은 띠를 따지고 서양인은 별자리를 따진다. 이제는 동양인 중에도 유행에 민감한 사람은 전갈자리니, 처녀자리니, 사수자리니 하며 별자리를 따진다. 예를 들면, 사수자리 사람은 성격이 어때서 어느 별자리 사람이랑 잘 어울린다고 한다. 그 별자리인 사람만 있으면 그 사람과 왕래하고 싶어 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며 호감을 갖는다. 이 역시 가정에서 교육한 전통 측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동양인의 띠이든 서양인의 별자리이든, 상극이나 좋은 궁합의 존재 여부를 떠나 네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지, 네가 어떤 관점을 지녀야 하는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네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한 사람의 사주팔자, 태어난 해, 태어난 달과 시간대는 모두 사람의 운명과 관계가 있다. 점쟁이나 관상가가 네 운명이 어떻고, 네 별자리가 무엇이며, 띠가 좋은지 안 좋은지 얼마나 정확하게 말하든, 그래서 어쩌겠단 말이냐? 이것은 무얼 의미하느냐? 네 운명을 하나님이 이미 안배해 놓았다는 것을 한층 더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 인생에서 결혼이 어떻고, 어느 지역에 살면서 어떤 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될지, 평생 물질적인 것들은 얼마나 누리게 될지, 가난할지 부유할지, 고생은 얼마나 하고, 자녀는 몇 명일지, 재운은 어떨지 모두 정해져 있다. 네가 믿든 말든 이것은 사실이다. 점쟁이가 점을 봐 주든 안 봐 주든 사실인 것은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겠느냐?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너무 알고 싶어 한다. “앞으로 운세가 어떤가요? 가난한가요, 아니면 부유한가요? 귀인은 만날 수 있을까요? 저랑 상극인 사람은 없나요? 살면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나요? 전 몇 살에 죽나요? 죽을 때 병으로 죽나요, 아니면 지쳐 죽나요? 목말라 죽나요, 아니면 굶어 죽나요? 전 어떻게 죽나요? 죽을 때 고통스럽거나 힘들지는 않을까요?” 이걸 안들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습니다.) 요컨대, 너는 이 일에서 한 가지만 확실히 하면 된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는 것을 말이다. 네가 무슨 띠이고, 네 별자리가 무엇이든, 네가 태어난 시간, 태어난 해와 달이 언제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았다. 이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네 평생의 부귀영화와 삶의 환경도 네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정해 놓았기 때문에 너는 미신의 방식이나 세상 사람의 관점으로 이 일을 대할 필요가 없다. 운세가 나쁠 때는 어떤 방법으로 회피하고 운세가 좋을 때는 어떤 방법으로 지키고 유지하느냐는 네가 운명을 대할 때 취해야 할 방식이 아니다. 가령 네가 몇 살에 큰 병을 앓는 것으로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데 관상가가 네 별자리나 띠, 사주팔자를 토대로 점을 봐 주었다면 어쩌겠느냐? 너는 두려움에 떨겠느냐, 아니면 그 일을 막기 위해 방법을 강구하겠느냐? (순리를 따르고 하나님의 지배에 순종하겠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이다. 네 운명에 있는 것이 무엇이고 없는 것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은 일찍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좋든 싫든, 네가 받아들이기를 원하든 원치 않든, 그 일을 마주할 능력이 있든 없든, 결국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진작에 정해 놓았다. 네가 가져야 할 태도는 피조물의 신분으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일어난 일이든 일어나지 않은 일이든, 네가 마주하길 원하는 일이든 아니든, 너는 피조물의 신분으로 받아들이고 마주해야 한다. 띠, 별자리 혹은 관상 따위에 공을 들이고 점술가를 찾아다니거나 갖은 자료를 찾아보고 최대한 빨리 자신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내서 피할 게 아니다. 이런 태도로 하나님이 안배한 운명과 일생을 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부모는 자식의 점을 보고 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네 별자리랑 띠, 사주팔자를 보니 네 인생에 불이 있으면 안 된다더라.” 그는 이 말을 믿고 명심하게 되고, 나중에는 그 일이 그의 일상생활에서 금기로 지켜야 할 하나의 일상이 되어 버린다. 예를 들면, 이름에 ‘화(火)’ 자가 들어 있는 사람이랑은 교류하지 않는다. 왕래하더라도 깊게 사귀지 않고 가까이하지 않는다. 속으로 그 일을 두려워하면서 피하는 것이다. 가령 이름이 리찬(李灿)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찬’ 자에는 ‘화’ 자랑 ‘산’ 자가 있잖아. 망했다. ‘화’ 자가 들어 있으니 왕래하지 말고 거리를 좀 둬야겠다.’ 속으로 그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평소 집에 있을 때 주방에서는 되도록이면 불 근처에도 가지 않고, 분위기가 좋은 레스토랑도 촛불이 있으면 가지 않는다. 캠프파이어에도 가지 않고 벽난로가 있는 집도 마찬가지다. 모두 불이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고 싶어도 화산이 있는 지역이면 가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러 가서도 일단 상대방의 이름을 물어봐야 한다. 이름에 ‘화’ 자가 없어야 되는 것이다. 상대방 이름에 ‘화’ 자가 없더라도 주철과 관련된 일을 하는 집이면 절대 가지 않는다. 그는 의식적으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믿고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이런 금기에 저촉되는 일이 생기면 속으로 염려하고 두려워하면서 금기를 깰 엄두를 내지 못한다. 사고라도 날까 걱정하고,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화를 입을까 걱정한다.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는 것이다. 다른 일에서는 순종도 하고, 고생하며 대가도 치를 수 있지만 유독 이 일만큼은 견뎌 내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에게 “당신은 평생 다리를 건너선 안 돼요. 만약 건넌다면 사고를 당할 거예요. 여러 다리를 건넌다면 더 위험하겠죠.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어요.”라고 말하면 그는 이 말을 명심하고는 출근을 하든, 친구를 만나든, 예배에 참석하든 다리를 건너는 길은 피해서 돌아간다. 금기를 어길까 봐 두려운 것이다. 그도 그렇게 쉽사리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이 일로 곤욕을 치른다. 이따금 부득이 다리를 건널 때도 있는데, 다 건너고 나면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게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믿어요. 하나님이 죽지 않게 하시면 제가 죽을 리 없죠.” 하지만 속으로는 이런 속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곤욕을 치른다. 또 자기 팔자에 물이 너무 많다고 해서 개울이나 우물은 근처에도 안 가는 사람이 있다. 어떤 자매의 집 정원에 수영장이 있는데 그 자매 집에서 예배 모임이 있으면 가지 않는다. 장소를 바꿔도 그 집에 어항이 있으면 가지 않는다. 물이 있는 장소는 어디든 가지 않는 것이다. 물이 흐르든 고여 있든 물에 닿으면 안 된다. 일상에서 가정의 교육에서 비롯된 이런 황당한 속설은 모두 전통문화, 미신과 연관된다. 이런 속설은 일부 일에 대한 사람의 견해, 일상생활에서의 규칙이나 생활 방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는 일정 부분 사람의 사상을 속박하고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 올바른 방식을 통제할 것이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