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3) 제 1 부

최근 한동안은 ‘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 중에서 ‘내려놓기’에 관한 주제에 대해 교제했다. 너희는 이 주제에 해당되는 각 내용을 묵상해 보았느냐? 우리가 내려놓아야 한다고 교제한 내용을 사람이 내려놓기가 쉽겠느냐? 교제를 다 듣고 난 후 너희는 교제한 내용을 묵상하고 성찰해 보았느냐? 일상에서 드러내거나 나타내는 모습과 대조해 보았느냐? (평소에도 묵상해 보았습니다. 지난번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받은 가정 교육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교제하셨습니다. 저는 평소에도 사탄의 처세 철학에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주입한 ‘사람은 체면으로 산다’와 같은 사상을 받아들여 어떤 일에서든 체면과 지위를 중시하면서 체면이 깎일까 걱정해 정직한 사람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여러 사물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교제한 내용은 주로 여러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의 사상 관점을 겨냥한 것이다. 즉, 여러 사물에 대한 사람의 부정확한 사상 관점을 폭로함으로써 사람이 그것을 분별하고 분명하게 인식하게 한 다음 긍정적인 측면으로 그것을 내려놓아 그것의 속박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사상 관점에 구애받지 않고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준칙으로 삼아 살아가고 생활하는 것이다. 각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려면 각 측면에서부터 인식과 체험이 있어야 한다. 특히 각 사물에 대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사상 관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분별해야만 사람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그것을 내려놓고 더 이상 그것에 미혹되거나 구애받지 않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 추구의 결실을 맺으려면 사람은 항상 자신을 반성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여러 사상 관점이 자기를 어떻게 구속하고 통제하는지 생각해 보거나 일상생활에서 자기가 각 사물에 대해 어떤 사상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늘 묵상하고, 이런 사상 관점이 정확한 것인지, 진리에 부합하는지, 긍정적인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사람의 뜻이나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분별해야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공과이며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매일 진입해야 하는 한 측면의 실제이다. 다시 말해, 일상생활에서 여러 사람과 일, 사물에 직면한 때이든 그렇지 않든 항상 자기가 어떤 사상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그 사상 관점이 정확한 것인지, 진리에 부합하는지 늘 성찰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공과는 무척 중요하다. 네 일상생활에서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이런 측면에 진입하는 시간이 생활의 80~90%는 되어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여러 부정적인 사상 관점에서 벗어나 진리 실제에 진입할 희망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할 수 있어야 희망이 있고 마지막에 구원에 이를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네가 만약 매일의 일상에서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시간 외에 80~90%의 시간을 아무 생각 없이 보내거나 자신의 육적인 삶과 지위, 명예를 위해 머리를 굴리며 고민한다면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며, 진리 추구의 결실을 맺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여의치 않다면 네 구원은 아득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구원은 무엇에 달려 있겠느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어떻게 행사하는지, 성령이 네게 역사하고 있는지에 달려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네가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에 이르는 일에 대가를 얼마나 치렀는지, 노력과 시간을 얼마나 들였는지 등 네 주관적인 노력에 달려 있다. 네가 만약 대부분의 시간에 하는 생각과 행동이 진리 추구와 상관이 없다면 네 행동은 구원과 무관할 것이니 이는 필연적인 사실이자 필연적인 결과이다. 그럼 다음으로 너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느냐? 한편으로는 지금 교제하고 있는 모든 주제를 잘 따라가면서 교제를 다 듣고 나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스스로 묵상하고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주제에 대한 교제가 끝나면 너는 쇠뿔도 단김에 빼듯 스스로 성찰하여 진실하고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진실하게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의 진리에 대한 교제를 갓 마쳤거나 이제 막 부분적으로 깨달은 직후에는 곧바로 이 측면의 진리에 대한 인식을 가져야 하는데, 그 목적은 사람이 자기의 사상 관점에 가장 기본적인 의식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그다음 일상생활에서 관련된 일이 생기면 예전에 진리 원칙에 대해 가지고 있던 네 인식과 이해가 네가 그 일을 경험하는 데 기초가 되는 사상 관점이 될 것이다. 최소한 네게 의식이 생기고, 정확하고 틀림없는 인식이 생기고 나면 그 일에 대한 네 태도와 인식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너는 이미 예방 접종을 해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실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네가 실패할 확률과 하나님을 배반할 가능성은 낮아지며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할 가능성은 대폭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전염병이 돌 때 네가 예방 접종을 하지 않으면 외출하지 않고 봉쇄된 집에서 지낼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감염될 리 없겠지만 네가 외부 활동을 위해 외부와 접촉하려면 예방 접종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예방 접종을 하면 감염될 가능성이 없는 것이냐? 그렇지는 않다. 단지 감염될 확률만 낮아질 뿐이다. 그러나 어쨌든 항체는 생긴다.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은 각 진리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각 진리의 정확하고 긍정적인 가르침과 원칙을 인식하고, 아울러 각 진리가 폭로하는 여러 부정적이고 그릇된 사상 관점도 어느 정도 인식하면 이런 일이 또다시 닥칠 때 너는 더 이상 사탄이 주입한 그런 그릇되고 부정적인 사상 관점을 준칙으로 삼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고, 네 태도 역시 사탄이 네게 주입한 사상 관점을 더 이상 고수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때 너는 아직 이런 측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고 네 관점이 중립적일 수도 있겠지만 긍정적인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 후에는 부정적인 사상 관점을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음에 관련된 일이 닥쳤을 때 최소한 너는 그런 종류의 일과 연관된 많은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사상 관점에 대해 분별이 생기고 어느 정도 준칙이 생기게 된다. 이 준칙을 바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 인성을 갖춘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는 데에 더욱 치중할 것이고, 진리 준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고, 네가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이 네게 배치한 사람과 일, 사물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람이 깨달은 진리가 많을수록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가능성이 크고, 부정적인 것을 확실하게 인식할수록 부정적인 것을 저버릴 확률이 크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진리를 추구하길 바라든 안 바라든, 진리를 추구하기로 마음먹었든 안 먹었든, 혹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도중이든 그렇지 않든, 네 자질이 어떻고, 네가 진리에 대한 이해가 어떻든, 결국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준칙을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고 진입하고자 한다면, 여러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는 모두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 지금 교제하고 있는 여러 주제에 대해 늘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주제는 제가 생각해 본 적도, 겪어본 적도 없는 거라 이런 주제를 제게 있는 여러 문제와 패괴 성품, 패괴 표출에 비춰볼 수가 없어요. 당신이 이런 얘기를 하시는 게 제가 진리를 추구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죠? 제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거랑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요? 왜 좀 더 고상하고 사람의 긍정적인 진입에 관련된 얘기는 하시지 않나요? 어째서 늘 이런 부정적인 일상의 사소한 일만 폭로하시는 거죠?’ 이런 생각이 옳으냐? (옳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을 이야기하면, 특히 삶의 사소한 일을 사례로 들면 반감을 갖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생각한다. ‘이야기가 너무 속되고 가벼워요. 고상하지도 않고 말이에요. 들으면 바로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단순해서 너무 쉽단 말이죠. 진리가 이럴 리 없어요. 진리라면 이보다는 심오해야지요. 사람이 반복해서 들어 봐야 알아듣고 한두 마디 겨우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에요. 지금 당신이 이야기하시는 건 일상생활에서의 사소한 일들이자 일상생활에서 보여지는 정상 인성의 모습들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 가벼운 거 아닌가요?’ 이런 관점을 지닌 사람들의 사상 관점이 옳다고 보느냐? (옳지 않습니다.) 어째서 옳지 않으냐? 어디가 옳지 않겠느냐? 우선 사람의 사상 관점이 사람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사람의 여러 모습과 태도는 사람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패괴 성품, 사상 관점, 여러 사물에 대한 사람의 생각과 의도, 구체적인 방식 그리고 머릿속에 언뜻 나타나는 생각들은 모두 일상생활 중 사람의 여러 모습, 표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여러 표출과 모습, 그리고 여러 가지 일이 닥쳤을 때의 사상 관점, 태도는 모두 사람의 패괴 성품에 연관되는 구체적인 것들이다. 진리 추구로 달성하려는 목적은 바로 사람의 이런 잘못된 사상 관점을 바꾸고, 사람의 사상 관점, 여러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사람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게 하고,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거역과 배반, 그리고 하나님과 대립하려는 사람의 본성 본질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면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여러 잘못된 사상 관점을 없애고 바꾸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얕고 일상적인 것을 얘기하더라도 너희는 반발심을 갖지 마라. 이것들은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차지하고 모든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너의 사상 관점을 통제한다. 네가 이런 일상 중의 잘못된 사상 관점을 고치거나 없애지 않는다면 네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 실제가 생겼다고 하는 말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마치 사람이 암에 걸리면 적극적인 측면으로부터 치료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암세포가 어느 장기에 있든, 혈액 속이든, 피부이든, 겉으로 드러나 있든 깊숙이 숨어 있든, 어쨌든 사람 몸속에 있는 암세포부터 해결해야 한다. 암세포가 해결되어야 네가 섭취하는 여러 영양소가 흡수되어 몸속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인체의 각 기관이 제 기능을 되찾아 병이 낫고 네 몸이 점점 건강해지며 정상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병이 완치되는 사람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과정이자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과정은 사람이 여러 잘못되고 부정적인 사상 관점을 고치고 거기서 벗어나는 과정임과 동시에 여러 정확하고 긍정적인 사상 관점을 갖추는 과정이기도 하다. 긍정적인 사상 관점이 무엇이겠느냐? 바로 진리의 실제, 원칙, 준칙에 해당되는 것이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사람의 생활,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사람의 생존과 관련된 여러 잘못된 사상 관점을 진리를 구함으로써 반드시 일일이 해부하고 인식해서 해결하고 없애야 한다. 결론적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잘못되고 부정확한 사상 관점을 모두 없애고, 여러 사물에 대해 정확하고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사상 관점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모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고 진리를 준칙으로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여 궁극적으로 맺게 되는 결실이자 사람이 마지막에 구원받아 살아 낼 수 있는 진리 실제인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지난 예배 시간에 우리는 ‘내려놓기’ 측면 중 가정에 해당되는 주제를 교제했다. 가정에 해당되는 주제 중 지난번에 교제한 내용은 무엇이었느냐? (가정이 우리의 진리 추구에 초래하는 불편과 방해에는 무엇이 있는지, 또 가정이라는 문제에서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추구와 이상, 바람에는 어떤 게 있는지 교제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가정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신분을 내려놓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가 받은 가정 교육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가정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신분을 내려놓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교제를 다 듣고 나서 내가 구체적으로 정리해 주지 않았다면 너희가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겠느냐? 이런 내용을 교제하고 다시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교제한 다음 이런 측면의 진리와 관련해서 사람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는지 정리해 보았느냐? 네가 정리할 줄 안다면 너는 실행할 수 있을 것이고, 정리할 줄 몰라 그저 흩어져 있는 빛 비춤에 머물러 있고, 여기에 연관되는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모르면 너는 실행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실행하지 못한다면 너는 이 측면의 진리 실제에 영원히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설령 네가 자신의 문제를 발견한다고 해도 네가 대조하지 못하고 상응하는 원칙을 찾아 실행하지도 못할 것이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을 내려놓는 측면의 주제를 교제하는 주된 목적은 네가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가정이 네게 부여하는 다양한 신분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존귀하다면 너는 그 신분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자신이 존귀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가 남보다 가치 있다거나 신분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훈계하는 원칙에 따라 남들과 올바르게 지내면서 각 사람을 똑바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존귀한 가정적 배경을 밑천으로 삼고 어딜 가든 자신을 드러내거나 남들에게 우러름을 받으려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만약 가정으로부터 부여받은 신분을 내려놓지 못하고, 가정 배경을 밑천으로 삼아 몹시 건방을 떨고 제멋대로이고 큰소리친다면,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서 늘 자기를 드러내고 뽐내면서 자기 가족의 배경과 가정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한 신분을 과시한다면, 또 마음속 깊이 매우 거만하고 고자세를 취하면서 남들과의 대화에서도 기고만장하고 아주 방종하다면, 그리고 항상 이를 밑천으로 삼아 남을 질책하고 억압한다면, 사람이 보기에 이런 사람의 이성은 비정상이다. 그는 누구든 서민으로 보고, 특히 사람을 접하거나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그보다 신분이 낮고 비천한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대화할 때는 몹시 건방을 떨고 위협적이고 난폭하게 굴며, 늘 남을 질책하려 하고, 노예라도 되는 것처럼 부리고 고함치려 한다. 그리고 항상 자기 신분이 존귀하다 자부하면서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을 똑바로 대하지 못한다. 이는 모두 패괴 성품이며 사람이 벗어 버려야 할 것들이다. 이런 측면으로 드러나는 패괴 성품은 사람이 존귀한 가정 배경, 존귀한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되면 생겨나고 야기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신의 언행을 반성하고 자신의 사상 관점, 특히 가정의 신분에 대한 자신의 사상 관점을 반성해야 한다. 이런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특별한 사회적 지위로 인한 자신의 여러 인성의 살아 냄을 바로잡아야 한다. 즉, 이런 부류의 사람은 가정이 그에게 부여한 신분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낮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회에서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차별과 업신여김을 받는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신분이 미천하고, 특수한 가정 환경 때문에 갖게 되는 수치심으로 인해 자신이 무척 비천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감정은 그를 자주 열등감에 젖게 하여 남들과 잘 어울리거나 대등하게 지내지 못하게 만든다. 물론 이런 부류 사람의 모습도 가지가지다. 어떤 사람은 지위나 신분이 존귀한 사람을 추앙하면서 아부하고 아첨을 떤다.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면서 늘 부화뇌동하는 것이다. 원칙도 없고, 존엄도 없이 기꺼이 그 사람의 졸개가 되어 그 사람의 지시나 놀림을 받으면서 노예 취급을 당한다. 이런 부류 사람의 일 처리 원칙도 마찬가지로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신분이 미천하고 태어날 때부터 천민이기 때문에 부자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과 대등하게 지낼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다. 태어날 때부터 남들의 노예가 되어 그들의 눈치를 보며 행동하고 남의 지시를 받는 것은 굽실대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며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사상 관점이겠느냐? 스스로 기꺼이 타락하고자 하는 사상 관점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또 한 부류는 오만 방자하고 제멋대로이며 막무가내에 건방지게 사는 부자를 보면 무척 부러워하고 추종한다. 그러면서 기회가 되면 자기도 부자처럼 제멋대로 오만 방자하게 살아 보고 싶어 한다. 그는 그렇게 오만 방자하고 제멋대로인 것을 문제가 아닌 멋이자 낭만이라고 여긴다. 이런 사람의 사상 관점 역시 옳지 않으니 내려놓아야 한다. 네 신분이나 지위가 어떻든, 결국 그것은 하나님이 정한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어떤 가정과 가정의 배경을 정해 놓았든, 네게 주어진 신분은 수치도 영광도 아니다. 네가 신분을 바라보는 원칙은 영광이나 수치를 따르는 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너를 어떤 가정에 두든, 너를 어떤 가정 출신으로 정하든, 하나님 앞에서 너는 피조물이라는 오직 하나의 신분만을 갖는다. 하나님 앞에서 너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 눈에 너는 사회에서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가 다른 그 누구와도 평등하다. 모두 패괴된 인간 중 하나이고 하나님이 구원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할 동등한 기회가 있으며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에 이를 동등한 기회도 있다. 이런 측면을 바탕으로, 하나님이 네게 베풀어 준 피조물의 신분을 바탕으로 너는 네 신분을 중시하지 말고, 네 신분을 경시하지도 말며,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피조물의 신분을 올바로 대하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치고 훈계하는 원칙을 똑바로 지켜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고 평등하게 지내야 한다. 그의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 신분이 무엇이든, 너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 하나님 집에 와서는, 하나님 앞에 와서는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단 하나의 신분만을 갖는다. 그러니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비천한 사람도 열등감을 갖지 마라. 네게 재능이 있든 없든, 네 자질이 높든 낮든, 네 역량이 어떻든, 너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고 가정 배경, 가족사에 따라 사람의 등급이나 귀천을 나누는 사상 관점도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비천하다고 열등감을 갖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너는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비록 자신의 가정 배경이 그다지 막강하거나 눈부시지는 않아서 자기에게 부여된 신분이 비천한데도 하나님은 너를 버리지 않고, 거름 더미와 먼지 속에서 일으켜 세워 다른 사람과 똑같은 피조물이라는 신분을 네게 부여하였으니 말이다. 하나님 집과 하나님 앞에서 너와 하나님이 택한 다른 모든 사람들은 신분과 지위가 평등하다. 이 점을 알았다면 너는 열등감을 더 이상 갖지 말고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사회적 지위가 존귀하고 높은 사람이나 너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굽실거리거나 웃어 보일 필요도 없고, 더욱이 그들을 우러러볼 필요도 없다. 그들을 같은 눈높이로 똑바로 바라보면서 올바로 대해야 한다. 설사 그들이 늘 기고만장하고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자부하더라도 너는 그들을 똑바로 대해야 하지, 그들에게 위축되거나 기가 죽는 것을 기꺼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이든, 그가 어떤 방식으로 너를 대하든,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와 똑같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구원하려고 택한 인간임을 알아야 한다. 그는 너보다 특별한 것이 없다. 소위 특별한 신분이나 지위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니 너는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의 속박을 받을 필요가 없고, 이 문제로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또 네 사회적 지위가 비천하다고 다른 사람과 평등하게 지낼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거나 하나님 집,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네게 부여한 권리, 책임, 의무를 포기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네가 구원받을 권리와 희망을 포기하는 일도 더더욱 없어야 한다. 하나님 집, 하나님 앞에서는 부자와 가난뱅이라는 말이나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의 구분이 없다. 더욱이 가정 배경이 특별한 사람을 특별 대우하거나 특별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피조물이라는 단 하나의 신분만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본성 본질은 똑같다.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간은 패괴된 인간 오직 하나의 부류이다. 그러니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의 귀천을 떠나 모두가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간인 것이다.

만약 누군가 네게 “집이 가난해서 제대로 된 옷 한 벌 없구나. 집이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나오고 중학교는 못 갔구나. 집이 가난해서 초콜릿, 피자, 콜라는 먹어 보지도 못하고 입에 풀칠만 하는구나.”라고 한다면 너는 그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열등감을 느끼겠느냐? 의기소침하겠느냐? 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겠느냐? 그의 이런 말 한마디에 위축되겠느냐? (이젠 안 그럴 것입니다.) 이제는 그러지 않겠지만 예전에는 그랬다는 말이구나. 그렇지 않으냐? 예전에는 돈 많은 집의 부유한 사람만 보면 ‘아, 남들은 양옥에 살면서 차도 있고 해외를 얼마나 다니는지 셀 수 없을 정돈데, 나는 마을 밖조차 나가본 적 없고 기차는 구경도 못 했네. 남들은 고속 열차, 1등석, 크루즈도 타고, 프랑스 명품을 입고, 이탈리아 액세서리로 치장한다는데 어째서 나는 들어 본 적조차 없는 걸까?’라고 생각하면서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작아지는 것 같았다. 만약 진리를 교제하고 믿음에 대해 교제하면 그나마 의욕이 조금 생기지만 가족, 가정 생활 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자기는 남들보다 못하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난 왜 하필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까? 뭐라도 본 게 있어야지. 남들은 손에 핸드크림을 바른다는데 난 바세린이나 쓰고 있고. 남들은 얼굴에 크림 같은 거 안 바르고 그냥 메이크업 샵을 간다는데 난 그런 데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어. 남들은 자가용 타고 외출하는데 난 자동차는커녕 자전거라도 있으면 다행이지. 수레나 달구지를 탈 때도 있는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남들과 대화할 때 적극적이지 않고 자기 신분이 부끄러워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다. 속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투정을 부린다. ‘다 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좋은 것을 누리게 하시나요? 어째서 저 사람은 저런 가정, 저런 사회적 지위로 정해 놓으신 거죠? 왜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한가요? 왜 우리 부모님은 아무런 재능이나 능력도 없는 사회 하층민이죠? 생각할수록 화나요. 이 얘기만 나오면 부모님을 언급하기도 싫다고요. 부모님은 아무런 수완도 없고 무능하단 말이에요! 자가용이나 양옥은 둘째 치고, 저를 데리고 버스나 고속 열차를 타거나 시내 공원에 놀러 몇 번 갔어도 좋았잖아요. 단 한 번도 없었다고요. 견문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거죠. 맛있는 걸 먹어 본 적도, 좋은 차를 타 본 적도 없어요. 비행기는 더더욱 꿈도 못 꿉니다.’ 생각할수록 열등감만 느끼고 항상 이 일로 속박을 받으니 언제나 자신의 신분과 지위가 비슷한 처지의 형제자매와 어울린다. 속으로는 ‘유유상종이라더니 저쪽 무리 좀 봐, 죄다 부자, 정부 관료, 갑부, 재벌 2세, 거물 사업가, 유학생, 대학원생, 그룹 임원, 호텔 경영자네. 우리를 보면 농민이나 백수에 집은 시골 산골이고, 초졸이라 식견이랄 것도 없어. 소를 키우거나 노점상을 하거나 신발을 수선하지. 우리는 어떤 사람이야? 오합지졸 아니겠어? 저 사람들 럭셔리한 것 좀 봐.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억울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오래 하나님을 믿었어도 이것을 내려놓은 적이 전혀 없고 항상 열등감과 억압만 느낀다. 이런 사람의 사물을 바라보는 사상 관점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똑바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데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상 관점은 사회 조류와 사회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물론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악한 인류, 전통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상 관점이다. 그것이 패괴되었고, 사악한 조류에 속한 것이라면 너는 이런 사상 관점에 시달리거나 속박당하지 말고 내려놓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제가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건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에요. 이런 사상 관점이 수시로 제 마음을 옭아매니 내려놓기가 쉽지 않아요.” 내려놓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네가 늘 잘못된 사상 관점에 머물러 있는다면 너의 그런 사상 관점을 영원히 내려놓을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만약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너는 이런 잘못된 사상 관점을 점차 내려놓게 될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쉽게 말해, 네가 그것을 단숨에 내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란 말이다. 네가 단번에 부자나 지위가 높고 이름값이 높은 사람과 대등하고 정상적으로 지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네가 이 일에서 해방될 수는 있을 것이다. 네게 비록 여전히 열등감이 있고 마음 깊은 곳이 너도 모르게 그것의 방해를 받겠지만 너는 어느 정도는 이미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물론 그 후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너는 점차 더 많은 해방과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실이 드러나면 너는 여러 사람과 일, 사물의 본질을 점점 꿰뚫어 보게 될 것이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 정도도 점점 깊어질 것이다. 또 이 측면의 일을 점점 확실하게 보게 될 것이고 네 이력, 네 식견이 늘어나는 동시에 진리를 대하는 네 태도는 더욱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할 것이며 네가 부정적인 사물의 속박을 받는 정도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되면 네가 변화한 것이 아니겠느냐? 또다시 네 신분과 지위와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을 만나 대화하고 왕래하게 되면 너는 적어도 속으로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올바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속박을 받지 않고 그가 정말 대단하고 존귀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패괴 본질을 알고 나면 여러 부류의 사람을 똑바로 대할 수 있고 원칙에 따라 그들을 대하며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왕래할 수 있게 된다. 우러러보지도, 얕잡아 보지도, 경시하지도, 추앙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진리 추구로 맺어야 할 결실에 점점 도달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결실에 도달하면 너는 더욱 진리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사물과 진리에 마음이 더 쏠리고, 하나님과 진리를 앙모하는 것에 마음이 더 쏠리게 된다. 사회나 세상에서 존귀한 신분과 지위를 가진 사람을 앙모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앙모하고 우러러보는 대상, 네가 따르고 숭배하는 대상이 달라진다. 부정적인 사물에서 긍정적인 사물로, 진리로 점점 바뀌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는 이런 측면에서 점차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측면의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사탄의 결박에서 점점 벗어나 차츰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인 것이다. 어렵다고 할 수는 없다. 길은 네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네가 진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너는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결국 어떤 실제에 진입하게 되겠느냐? 바로 네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이 어떻든, 그것이 존귀한지 비천한지 신경 쓰거나 시달리지 않고 피조물의 신분으로 네 본분을 잘 이행하고, 피조물의 신분으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거나 처신하고 일 처리하며, 피조물의 신분으로 하나님 앞에서 현재의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인데, 이런 결실을 맺도록 추구하는 것이다. 이 결실이 좋지 않으냐? (좋습니다.) 사람이 이 측면의 실제에 진입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은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적어도 가정이 네게 부여한 신분에 관한 일에서는 더 이상 시달리지 않을 것인데, 그 신분의 높고 낮음에 더 이상 개의치 않게 된다. 만약 네 신분이 존귀하여 널 추앙하는 사람이 생기면 너는 거북할 것이고, 만약 네 신분이 비천하여 널 무시하는 사람이 있어도 너는 속박받거나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고 의기소침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는 자기가 고속 열차를 타 봤는지, 메이크업 샵에 가 봤는지, 외국에 가 봤는지, 양식을 먹어 봤는지, 부자처럼 특별한 물질생활을 누려 봤는지로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열등감을 느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이 일로 인해 속박받거나 시달리지 않고 여러 부류의 사람, 일, 사물을 올바로 대하고, 네 본분을 정상적으로 이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유와 해방을 얻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러면 마음에 해방을 얻게 된다. 네가 이 측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게 되면 너는 이 일에서 너에 대한 사탄의 결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피조물이 되고, 하나님이 원하는 피조물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교제했으니 가정이 사람에게 부여한 신분과 지위를 내려놓는 측면의 길을 사람은 분명히 알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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