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을 때는 먼저 세상의 사악한 흐름을 꿰뚫어 봐야 한다 (제 2 부)

너희는 가장 큰 지혜가 무엇인지 아느냐? 너희의 지금 분량으로 너희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무엇을 가장 중시해야 하는지, 어떻게 추구하고 실행해야 가장 큰 지혜인지 알고 있느냐? 어떤 이들은 겉보기에는 아무 능력도 없고 과묵하여 매일 몇 마디 말도 하지 못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가장 큰 지혜가 하나 있다. 그 지혜는 일반인들은 알아채지 못하고, 설령 알아챈다고 해도 그것이 지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불필요하고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희는 그가 가진 가장 큰 지혜가 무엇인지 생각해 낼 수 있느냐? (항상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하나님께 자주 기도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근접하게 대답했구나.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님에게 의지하기 위함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의지하기 위한 것이다. 매사에 하나님에게 의지하면 하나님이 너를 깨우쳐 주고 인도해 주고 이끌어 준다. 너는 장님처럼 어둠 속에서 더듬을 필요 없이 그냥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훨씬 수월하지 않겠느냐? 쓸데없이 헛수고할 필요 없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간단하고 빠르다. 네가 고생스레 품을 들이며 시행착오를 겪을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해 줄 것이니 너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것이 지혜 아니겠느냐?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었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은 가장 큰 지혜이다. 이는 평범한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는 점이다. 사람은 모두 예배에 자주 참석하고 설교도 많이 듣고 형제자매들과 많이 교제하고 또 많이 버리고 고생하며 많은 대가를 치르면 하나님께 칭찬받고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실행하는 것이 가장 큰 지혜라고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가장 중요한 문제, 즉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간과한 채 사람의 잔꾀를 지혜로 여기고, 그런 행동이 마지막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간과한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진리를 깨달았든, 얼마나 많은 본분을 이행했고 본분을 이행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체험했든, 분량이 크든 작든,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 떠날 수 없는 것은 바로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큰 지혜이다. 어째서 가장 큰 지혜라고 하겠느냐? 사람이 일부 진리를 깨달았다 한들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몇 번의 시련을 겪으면서 어느 정도 실제 체험이 있어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고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인식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의지할 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할지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지혜가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자로, 젠체하는 부류에 속할 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많은 진리를 깨달았고, 진리 실제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을 처리할 때 원칙대로만 하면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며, 어떻게 하나님께 다가가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실행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을 앙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많은 경우, 많은 상황에서 관련된 진리가 무엇인지,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실제 체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닥쳤는데 네가 그 일에 관련된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 측면의 진리를 어떻게 실행하고 적용해야 할지 모른다면, 그럴 때 어떻게 해야겠느냐? 아무리 실제 체험이 있다고 해도 모든 일에서 다 진리 원칙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었다고 한들, 체험한 일과 겪은 책망 훈계, 징계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설령 네가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네가 진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 네가 진리의 근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느냐? 어떤 이들은 “저는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의 명구들을 막힘없이 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거나 앙망할 필요가 없지요. 때가 됐을 때 하나님의 그런 말씀에 의지하면 됩니다.”라고 말한다. 네가 외운 그 말씀들은 죽은 글귀이고,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내적 상태는 살아 있는 것이다. 글귀와 도리를 말할 수 있어도 일이 닥쳤을 때 전혀 적용할 줄 모른다면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글귀와 도리를 아무리 잘 말할지라도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는 없으며, 진리를 실행할 줄 안다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여기에 아주 중요한 공과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무슨 공과겠느냐?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해야 하며, 하나님을 앙망함으로써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만이 실행 길을 얻을 수 있고,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일을 옳게 행하고, 진리를 어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사람의 좋은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님은 흡족해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이해한 진리는 얕기 때문에 각기 다른 환경 속에서 늘 동일한 진리로 규례에 맞추고 글귀와 도리를 고수하게 된다. 어쩌면 많은 일을 처리했고, 그것이 대체적으로 진리 원칙에 부합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성령 역사를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바로 많은 일을 할 때 사람이 알고 있는 경험과 규례, 그리고 사람의 일부 상상에 의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며 의지하여 일을 하기 어렵다. 설령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해도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진리 원칙에 근거해 일하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이 가장 큰 지혜라고 말한다.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이도 어리고 분량도 작은 데다가 하나님을 믿은 기간도 얼마 안 돼. 그래서 일이 닥쳐도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하는지 몰라.” 이는 문제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을 믿을 때는 많은 난관에 부딪히며, 수많은 환난과 시련, 고통을 겪어야 한다. 이런 일에서 모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을 앙망하거나 의지하지 못한다면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없고, 하나님을 따를 수도 없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한다는 것은 공허한 도리가 아니며, 하나님을 믿을 때 쓰는 입버릇도 아니다. 그것은 핵심적인 진리,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반드시 갖춰야 할 진리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은 큰일이 닥쳤을 때만 적용돼. 예를 들어 환난과 시련이 닥치거나 체포되거나 박해받을 때, 혹은 본분을 이행하다가 난관에 부딪히거나 책망과 훈계를 받을 때는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해. 하지만 사생활의 사소하기 그지없는 작은 일에서까지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할 필요는 없어. 하나님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쓰시지는 않으니까.”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맞겠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오류가 있다. 큰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 하지만 생활 속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일에 원칙이 없으면 되겠느냐? 옷 입고 밥 먹는 것 같은 일에 원칙이 없으면 되겠느냐? 절대 안 된다. 사람이나 사물을 대할 때 원칙이 없으면 되겠느냐? 역시 안 된다. 일상생활의 일, 사소하기 그지없는 작은 일에서도 최소한 원칙이 있어야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 수 있다. 원칙과 관련된 문제는 진리와 관련된 문제인데 사람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겠느냐? 분명 해결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얻고 진리를 깨달아야만 이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을 앙망하지도 의지하지도 않는다면 원칙과 관련된 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쉽사리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밝히 알지 못하는 일, 진리를 구해야 하는 일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한다. 그것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진리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면 항상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해야 한다. 이는 필수이다. 설령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제한적이고 얕아 하나님을 앙망하거나 의지하지 않는다면 깊이 진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네가 오늘 몸이 안 좋아 본분 이행에 지장을 주었다고 해 보자. 너는 이 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오늘 저는 몸이 좋지 않아 밥을 먹을 수가 없었고, 본분 이행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돌아보겠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병에 걸린 걸까요? 본분 이행에 충성을 다하지 않아 하나님의 징계가 임한 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저를 깨우치고 인도해 주십시오.” 이렇게 부르짖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앙망할 때는 형식만 취하고 규례를 지켜서는 안 된다. 문제가 닥쳤는데 진리를 구해 해결하지 않는다면 일을 그르치게 된다.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한 후에 네가 마땅히 살아야 하는 바대로 살고, 마땅히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지체해서도 안 된다. 병으로 고통스럽다면 병원에 가야 한다. 이는 합리적인 행동이다. 이와 동시에 기도하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진리를 구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실행해야 흠잡을 데 없이 적절하다. 어떤 일에서 어떻게 해야 적절한지를 알았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이는 사람이 협력해야 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온전히 성과를 내고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 여부는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데 달려 있다. 사람이 밝히 알지 못하는 일, 혼자 처리할 수 없는 일이라면 더더욱 하나님을 앙망하고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이는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데는 배워야 할 많은 공과가 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과정에서 성령이 깨우쳐 주어 길이 생길 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 어떻게 협력해야 할지 알게 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이 환경을 마련하여 네가 공과를 배우게 할 수도 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다. 너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인도하고 이끌어 준 덕에 수많은 공과를 배우고, 하나님에 관해 더 많은 인식을 얻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앙망하여 얻은 성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 시시각각 배워야 할 공과이다. 이는 평생 체험해도 끝나지 않는다. 너무 얕게 체험하여 하나님의 행사를 보지 못한 채 ‘사소한 일은 대부분 스스로 처리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을 앙망할 필요는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작은 일이 큰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다. 많은 사람이 작은 일을 간과했다가 결국 작은 일에서 큰 좌절을 겪는다.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고 이끄는지 본다. 이렇게 체험한다면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으며, 체험하면 할수록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말이 더없이 실제적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앙망해도 하나님이 네게 어떤 느낌이나 명확한 뜻을 주지 않을 수 있고, 더욱이 분명한 가르침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네가 그 일과 정확히 관련 있는 한 가지 뜻을 깨닫게 한다. 이는 바로 하나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너를 인도하고 네게 길을 주는 것이다. 네가 깨닫고 이해할 수 있다면 도움을 얻을 것이다. 혹은 이번에는 뭔가 깨닫지 못했더라도 계속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 이는 틀림이 없으며, 언젠가는 깨우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실행하는 것은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영이 필요로 하는 일이며,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실행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할 때마다 깨우침과 인도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은 반드시 이렇게 실행해야 한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이렇게 실행해야 한다. 이는 생명 영 안에 마땅히 갖춰져야 할 정상적인 내적 상태이다. 이렇게 해야만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사람 마음과 하나님의 정상적인 교제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를 얻을 수 있든 없든 매사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 이 또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필연적인 경로이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이는 정상 인성에 갖춰져야 할 마음 상태이다. 때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명확한 말로 하나님께 어떤 것을 해 달라고, 인도해 달라고 구하거나 지켜 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닥쳤을 때 진심으로 부르짖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겠느냐? 사람의 마음이 동요되어 ‘하나님, 저는 이 일을 할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연약하고 소극적입니다….’라고 생각할 때,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바로 알지 않겠느냐? 이러한 생각이 들 때 사람의 마음은 진정성이 있지 않겠느냐? 사람이 이렇게 진정성을 가지고 부르짖는다면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겠느냐? 때로 사람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더라도 진심이 움직였다면 하나님은 응답한다. 어려움이 닥쳐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아무 데도 기댈 곳 없을 때, 매우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 사람은 유일한 희망을 하나님께 건다. 그럴 때 사람의 기도는 어떠하겠느냐? 사람의 마음가짐은 어떠하겠느냐? 진심이 아니겠느냐? 거기에 불순물이 있겠느냐? 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도와주기를 바랄 때 비로소 네 마음에 진정성이 생긴다. 말은 몇 마디 하지 않았을지라도 네 마음은 이미 움직인 것이다. 네가 참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들어준다. 네 기도를 들었을 때 하나님은 네 어려움을 보고 너를 깨우치고 인도하며 도와줄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언제 가장 간절하겠느냐?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이 가장 간절한 것이다. 하나님을 앙망할 때 무엇보다 갖춰야 할 것은 간절한 마음, 진실로 하나님을 원하는 내적 상태이다. 최소한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지 무성의하게 대하거나 마음은 움직이지 않고 입만 놀려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입으로만 대충 하나님께 이야기할 뿐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나는 일찌감치 계획해 뒀어. 하나님께는 통보만 하는 거야. 하나님이 동의하시든 안 하시든 나는 그대로 행동할 거야. 지금은 그냥 형식만 따르는 거라고.’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문제가 있다. 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기만하고 우롱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경시하는 태도이다. 그럼 하나님은 너를 어떻게 대하겠느냐? 틀림없이 너를 외면하고 한쪽에 내버려둔 채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며, 너는 더없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진리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면 너는 내쳐질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런 내적 상태이다. 대부분 시간을 아무 생각도 인식도 없는 상태에서 산다. 특별한 일이나 큰 어려움이 없으면 하나님에게 기도하거나 의지할 줄 모르고, 일반적인 일이 닥쳐도 진리를 구할 줄 모르고 지식과 도리, 자기 뜻에 따라 살며,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 의지하고 주변의 유리한 조건, 환경, 사람, 일, 사물에 의지할 때가 많다. 이것이 사람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사람이 가장 못하는 일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일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을 너무 귀찮아 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지 못하며, 곧장 답을 얻을 수도 없기 때문에 편하게 하려고 사람을 찾아가 해결한다. 따라서 사람은 이 부분에서의 공과가 가장 부족하고 진입도 가장 얕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이 너에게 한 사역, 인도, 깨우침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을 보지 못하면 너의 마음속 깊은 곳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하나님이 사람의 모든 생활을 인도하는지에 대해 마침표도 느낌표도 아닌 물음표가 남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든 생활을 인도하실까?’, ‘하나님이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감찰하실까?’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된다. 너는 어찌하여 여기에 물음표를 붙이느냐?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의지와 앙망이 없다면 너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길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너는 하나님이 행한 모든 것에 대해 영원히 물음표가 남게 될 것이며 종지부를 찍을 수 없을 것이다. 너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주재하신다고 믿는데 이 말 뒤에 붙은 것이 물음표일까, 마침표일까, 아니면 느낌표일까?’ 속으로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대체 어떤 내적 상태인지 선뜻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다가 몇 가지 일을 체험하고 나면 분명히 알고 “하나님이 분명히 만물의 주재자셔!!!”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게 된다. 문장 끝에 느낌표를 세 개나 붙이면서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어떤 의심도 없이 정말로 인식이 생긴 것이다. 너희는 어떤 내적 상태이냐? 너희의 지금 분량과 내적 상태를 보면 물음표가 다수를 차지하는 데다가 또 물음표가 여러 개나 있다. 이것은 너희가 진리를 조금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아직도 의구심이 남아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의구심이 많아지면 이미 위험의 경계선에 이른 것이며, 언제든 넘어져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어째서 사람의 분량이 작다고 하겠느냐? 무엇을 보고 사람이 가진 분량의 크기를 확정할 수 있느냐? 바로 네가 하나님에게 진실한 믿음을 얼마나 가졌는지, 진실한 인식을 얼마나 가졌는지에 달려 있다. 너희는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검증해 보았느냐?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와 함께 하나님을 믿고, 부모에게서 하나님을 믿는 도리를 이해하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은 일이고 긍정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깨달아야 하는 진리는 아직 참으로 깨닫지 못했고, 체험하지도 검증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물음표가 너무 많고 관념도 너무 많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말은 긍정문도 감탄문도 아닌 의문문이다. 이것은 부족함이 너무 많고, 아직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 것이며, 굳게 설 수 있는지조차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다. 20~30대 연령층에 있는 너희에게 이런 물음표가 많은 것은 정상이다. 하지만 너희가 한동안 본분을 이행한다면 이 물음표들을 얼마나 없앨 수 있겠느냐? 이 물음표들을 느낌표로 바꿀 수 있겠느냐? 이것은 너희의 체험에 달려 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조금 전에 내가 사람의 가장 큰 지혜가 무엇이라고 했느냐? (매사에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무 단순하고 저속한 말이에요. 요즘은 아무도 그런 상투적인 말을 하지 않아요.”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이 너무 평범한 실행 방법처럼 들리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평생에 걸쳐 배우고 진입해야 하는 공과다. 욥은 일흔 살이 넘어서도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았느냐? (앙망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했느냐? 그가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이냐? 그가 재산과 자식을 빼앗겼을 때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했느냐? 그는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겉으로도 행동을 했다.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욥 1:2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몸을 굽혀 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앙망하는 행동이다! 매우 경건한 것이다. 너희는 그럴 수 있느냐? (아직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그런 경지에 다다르길 원하느냐? (원합니다.) 욥과 같은 경지에 다다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면 완전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완벽하다! 하지만 본분을 이행하는 기간 동안 너희는 고통받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하고, 진리를 향해 계속 노력해야 한다. 진리를 깨닫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것만 기억하면 된다.

2015년 1월 1일

성경은 개역한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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