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8) 제 3 부
영적인 이해력 유무로 사람의 자질 가늠하기
자질의 각 측면 문제를 진리 원칙으로 가늠하면 방금 교제한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 영적인 이해력의 유무로 가늠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자질이 좋은 사람은 분명 영적인 이해력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소위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 원칙을 파악할 수 있으며, 진리를 적용하여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진리 원칙과 관련된 각 측면의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적용하여 하나님 집 내부의 각종 문제도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외부의 각종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겠느냐? 그는 영적인 이해력이 있고 다양한 일을 처리할 능력을 갖추었기에 외부의 일도 비교적 인간적이거나 긍정적인 사물에 가까운 원칙을 적용하여 처리할 것이다. 각종 사물이 아무리 변해도 그 근본은 달라지지 않는 법이며, 그 안의 원칙은 자질이 좋은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에 자질이 좋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는 것은 영계와 통한다는 뜻이 아니라, 각종 사물의 원리와 원칙을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직설적이고 간단한 통속적 설명이다. 외부 사물의 원리나 진리와 관련된 원칙을 모두 이해하는 것이 바로 자질이 좋은 사람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영적인 이해력의 유무로 자질이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가늠하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하지 못하며, 일부는 이해하고 일부는 이해하지 못한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부분은 그의 자질이 도달할 수 있는 부분으로, 하나님을 믿는 각 측면의 진리를 교제함으로써 깨달을 수 있고, 아무도 지적해 주지 않아도 그 안에서 파악해야 할 원칙을 알 수 있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부분은 자질이 도달하지 못하는 부분으로, 지도하고 지적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실행 원칙이 없고, 정상적으로 본분을 이행하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며, 양육과 지도, 지적이 있어야만 어떻게 사역하고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측면의 모습이다.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자질이 좋은 사람보다는 그 수준이 낮아서 반만 이해하는 것과 같다. 어디에서 차이가 나겠느냐? 진리 원칙을 파악하는 정도에서 차이가 난다. 즉, 각종 사역을 독립적으로 완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자질이 부족한 사람을 영적인 이해력의 유무로 가늠한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가늠하기 쉽지 않겠느냐?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게 영적인 이해력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규례만 지키기 때문이다. 자질이 없는 사람은 사실 사람의 영이 없다. 사람의 영이 없으면 짐승처럼 영적인 이해력이 없으니, 이런 부류는 영적인 이해력의 유무로 가늠할 필요가 없다. 영이 없는 사람은 어떤 일을 보든, 어떤 사람을 대하든 가늠할 줄 모르며,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관한 관점도 전혀 없다. 그저 자기 이익을 지키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옹졸한 마음만 있을 뿐이다. 네가 어떤 관점을 말했을 때, 그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면, 즉 네가 자질이 좋으며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긍정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는 너의 관점을 따를 것이다. 하지만 너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너를 무시할 것이고, 네가 제시한 관점이 아무리 올바르고 진리 원칙에 부합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것이 옳은 것이자 사람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그 좋은 관점이 그에게 얼마나 큰 유익과 도움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른다. 반면, 부정적인 인물이 부정적인 관점을 제시했을 때, 만약 그 부정적인 인물이 기가 세고 강압적이며 그가 인정하고 숭배하는 인물이라면, 그는 그 부정적인 관점을 받아들일 경우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일 것이다. 이런 자는 어떤 사람이냐? (자질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질이 없는 사람은 사물을 변별하는 능력이 없다. 어떤 일을 마주하든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자신이 지켜야 할 원칙도 갖고 있지 않은 이 부류는 나쁜 사람이나 악인을 따를 경우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고, 좋은 사람을 따를 경우 좋은 일을 좀 할 수도 있다. 이들은 사물을 변별하는 능력이 없기에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자질이 좋은 사람이나 긍정적인 인물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 좋은 것들을 배울 수 있고, 좋은 규례와 긍정적인 말, 행동 방식, 또는 긍정적인 사상 관점을 지킬 수도 있다. 하지만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은 긍정적인 사상 관점, 좋은 행동 방식과 규례, 좋은 생각이나 긍정적인 생활 방식, 생활 상식조차 배우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니, 혼자 살게 되면 그 우둔한 자의 생활 상태가 완전히 드러난다.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인다.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사람은 최소한 자질이 평범하다. 만약 진리에 이르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면 그런 자는 자질이 좋은 사람일 것이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분명 자질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두 부류로, 이 두 부류는 틀림없이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 자질이 좋은 사람만이 완전히 영적인 이해력이 있다고 할 수 있고, 자질이 평범한 사람은 영적인 이해력도 보통이다. 즉, 많은 일에서 자질이 부족하여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그저 일반적인 일에 대해서만 영적인 이해력을 보이고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뿐, 복잡한 일이나 여러 가지 사역이 닥치면 관련된 진리 원칙에 이르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해서 독립적으로 처리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의 영적인 이해력은 매우 평범하다. 자질이 부족한 부류의 특징은 진리 원칙에 미치지 못하고 규례만 지킨다는 것이다. 그는 진리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진리 원칙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진리 원칙이 곧 규례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이 부류는 확실히 영적인 이해력이 없다.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이 부류의 주된 특징은 바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이해할 때 드러내는 사상 관점이 모두 치우치다는 것이다. 이 치우침을 어떻게 이해해야겠느냐? 정상 인성의 사고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정상 인성의 필요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바로 치우침이다. 그가 말할 때의 사고와 논리를 들으면 기이하다는 느낌이 들고, 그가 어떤 관점이나 어떤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늘 의아해진다. 의아해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느냐? 들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고, 마음속으로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어째서 정상인과 다르게 생각할까? 저런 생각은 너무 이상하잖아. 왜 약간 허황되게 느껴지지?’라고 생각하게 되며, 마음이 아주 거북해지고 터무니없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말할 때마다 듣는 이를 의아하게 하는 사람은 치우친 사람, 그것도 몹시 치우친 사람이다. 예를 들어, 네가 그에게 “식사하셨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오늘 꽤 춥네요.”라고 대답한다. 이 두 문장이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네가 “오늘은 왜 이렇게 얇게 입으셨어요?”라고 하면 그는 “저는 오늘 생강차를 한 잔 마셨답니다.”라고 한다. 이것이 네 질문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느냐? 그의 대답에 정상적인 사고와 논리가 있느냐?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고와 논리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실내가 따뜻한 데다가 밖에 햇살도 좋고 기온이 높은 편이길래 옷을 얇게 입었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방금 운동을 했거든요. 몸에 열이 나서 옷을 적게 입었어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만약 누가 “왜 그렇게 옷을 얇게 입었나요?”라고 물었는데 그가 “오늘 방한화를 신어서요.”라고 대답한다면, 이 대답은 질문과 아무 관계가 없다. 즉, 그의 그 생각과 논리는 정상 인성의 사고와 논리에 맞지 않고, 정상 인성의 사고를 지닌 어떤 사람도 생각해 내지 못할 아주 이상한 말이자 생각이다. 그래서 듣고 나면 거북해지는 것이다. 대화하려고 해도 그와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는 늘 동문서답을 하니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옷 만들기를 배우고 있길래 내가 “옷 만들기는 얼마나 배웠느냐? 패딩도 만들 줄 아느냐?”라고 물었다. 정상적인 사고와 논리에 맞는 대답은 무엇이겠느냐? (만들 줄 안다거나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사고와 논리다. 또는 “가끔은 잘 만들어서 선생님이 그 정도면 괜찮다고, 그럭저럭 기준에 맞다고 하시는데, 복잡한 부분은 불합격이라 다시 손봐야 합니다.”라고 말해도 된다. 이런 것들이 정상적인 사고와 논리를 가진 사람의 대답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사고와 논리가 없는 사람은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내가 “이제 이런 패딩을 만들 줄 아느냐?”라고 물으면 그는 “처음부터 이런 옷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그럼 이제 만들 수 있느냐?”라고 하면 그는 여전히 “저는 처음부터 이런 옷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못 알아듣겠다. 처음부터 그런 옷 만드는 법을 배웠다면 이제 만들 줄 아는 것이냐? 왜 나는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는 것이냐? 나는 그 말을 들으니 거북했다. 그런 옷을 만들 줄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는 처음부터 그런 옷 만들기를 배웠다고 하니, 어떻게 그 주제로 넘어간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옷을 만들 줄 아는지 여부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냐? 나는 그의 말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두세 번이나 “그래서 이제는 만들 줄 아는 것이냐?”라고 물었는데도 그는 계속 “저는 처음부터 그걸 배웠습니다. 선생님도 그걸 가르쳐 주셨고, 주로 그걸 만들죠.”라고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답은 여전히 듣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그가 도대체 만들 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모르겠다. 그의 그 말에 어떤 논리가 있는지, 그가 왜 그렇게 말한 것인지 너희가 분석해 보아라. (그의 대답은 질문과 좀 동떨어진 것이어서 듣는 사람이 그의 의도를 짐작은 할지언정 실제로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알려 주고 싶은 것이겠느냐, 아니면 알려 주고 싶지 않은 것이겠느냐? 그가 네게 정확한 답을 알려 주고 싶은 것이겠느냐? 여기서 그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처음 왔을 때 주로 이런 걸 배웠습니다. 이제 일주일이나 됐으니 당연히 할 줄 알겠죠. 제 말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 못 알아듣는 거죠?”라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그의 대답에서 이런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느냐? (파악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의 대답을 통해 정확한 답을 알 수 있어서 그가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파악이 된다면 그의 말은 논리에 맞겠지만, 그의 말은 그저 모호한 의미만 전달할 뿐, 그가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는 실제로 알려 주지 못한다. 이런 말만 하는 사람은 무척 어리석지 않으냐? 만약 그가 의식적으로 이렇게 대답했다면 그것은 인품의 문제이고, 무의식적으로 그런 거라면 그의 대답은 네가 알고자 하는 답과 필연적인 관계가 없으니, 이는 그의 사고와 논리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 사고와 논리에 문제가 있다면 이런 부류의 사람은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치우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치우침의 한 가지 모습이다. 그는 ‘내가 처음 왔을 때 이걸 배웠다고 말했으니, 필연적으로 내가 할 줄 안다는 결과가 나와야지.’라고 생각한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할 줄 안다’라는 답이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그의 말을 듣고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그가 “처음 왔을 때 이걸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한 것과 할 줄 알게 되었다고 알려 주려는 것 사이에는 논리적 관계가 없다. 그러니 그의 대답은 헛소리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헛소리를 하면서도 자기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고, 이미 질문에 답을 했다고 여기는 것은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한 가지 모습이다. 그는 정상 인성의 사고와 논리가 없어서 어떻게 물어도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왜 계속 그 질문을 하는지를 의식하지 못한 채 세 번을 물어도 여전히 같은 대답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짜증을 낸다. ‘왜 끝도 없이 자꾸 물어보는 거야? 진작에 말해 줬는데도 못 알아듣고 또 물어보네!’ 세 번이나 연속으로 물어봤는데도 자신의 대답이 명확하지 않고 상대가 원하는 답이 아니므로 상대가 추측하지 않도록 말하는 방식을 바꿔 자신이 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 명확히 말해 줘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또 그는 자신이 한 말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상대가 들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의식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질이 없는 것이다. 몇 번을 물어도 그는 똑같이 대답하면서 자신이 한 말은 다 진심이고 거짓이 없다며 ‘한 가지 일에 대해 몇 번을 물어봐도 한결같이 대답하고 있으니, 나는 정직한 사람이 되기를 실행하고 있는 거야. 있는 그대로 말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한다.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장 씨의 일을 물어보면 그는 계속 이 씨의 일에 대해 말하고, 이 씨의 일을 물어보면 계속 장 씨의 일에 대해 말하니,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그는 생각이 맑지 않고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이는 자질이 부족한 주된 모습이다. 요컨대, 각기 다른 자질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은 이러하다. 진리 원칙을 깨닫고 적용할 수 있는지로 가늠하든, 영적인 이해력이 있는지로 가늠하든 이런 모습들이 나타난다. 비록 개괄적으로 말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맞아떨어지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질에 대해서는 대략 정리가 되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자질과 관련된 주제는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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