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8) 제 2 부

3. 자질이 부족한 모습

이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을 정리해 보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은 분명 자질이 평범한 사람보다 떨어진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모습을 보이겠느냐? 스스로 구하거나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하나님 말씀 한마디 한마디, 한 단락 한 단락이 무슨 뜻인지, 하나님의 뜻과 요구가 무엇인지 문자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진리 원칙과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전혀 깨닫지 못한다. 즉,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무엇인지, 여기에서 진리 원칙은 무엇인지 다 모르는 것이다. 자기 혼자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도 이해하지 못하고,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일, 사물을 접한 뒤에도 이해하지 못하며, 교제한 뒤에도 여전히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한 가지 특징이 있는데,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는 깨닫지 못하지만, 감으로 자신이 지켜야 할 규례가 무엇인지는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규례, 즉 형식적이고 교조적인 가르침이나 규칙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어떤 진리 원칙을 교제하면서 그 측면에서 사람의 긍정적인 모습과 부정적인 모습, 순수하고 올바른 이해와 치우친 이해 등 여러 가지 모습을 사례로 들었다고 해 보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마지막에 무엇을 얻었겠느냐?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하지 말며, 이것도 먹지 말고 저것도 먹지 말고, 이런 말도 하지 말고 저런 말도 하지 말며, 그런 단어를 쓰지도 말라고 하십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것들을 기억하고 고집스럽게 지키면서 그것이 바로 진리 원칙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규례와 가르침, 행동 방식을 지키는 것이 바로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규례를 지키는 거라고 아무리 말해 줘도 받아들이지 않고 그 규례를 지키려고만 하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규례를 지키고 싶다면 지키게 내버려두어라. 속셈만 나쁘지 않으면 그만이다. 예를 들어, 내가 한 번은 “기도할 때는 경건하게 임해야지,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된다. 환경이 갖춰져 있다면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게 가장 좋다. 또 기도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평온히 하고 온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경건함이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기도할 때 경건하게 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반드시 무릎을 꿇어야 한다.’라는 규례만 하나 기억했다. 그는 반드시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진리 원칙으로 삼아 지키며, 그것이 진리 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환경에서든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고 한다. 식사할 때 기도하고 싶으면 식탁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밭에서 일할 때도 땅이 얼마나 더럽든, 흙에 뭐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심지어 이방인들 사이에 있을 때 재앙이나 뭔가 큰일이 닥쳐 하나님에게 기도하려 할 때도 반드시 은밀한 장소를 찾아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그는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한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진리 실행이라고, 나아가 자신은 가장 경건하고 하나님의 도를 잘 준행하며 누구보다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보아라, 이것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이다. 이런 부류는 이해하는 측면에서 부족하고 문제가 있어서 늘 원칙을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규례로 규정한다. 그러고는 글귀와 지식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글귀와 규례, 가르침과 형식을 지키는 방식으로 진리를 실행한다. 진리 원칙을 아무리 교제해 줘도 듣고 나서는 그것이 한마디 말이나 한 가지 규례, 행동 방식이나 구호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규칙 하나 지키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진리 실행을 그렇게 간단하게 본다. 어떤 일을 해도 되는지, 어떤 일을 하면 안 되는지만 지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전부 규례로 가늠하고, 규례로 대한다. 외부 환경과 주위 사람, 일, 사물이 어떻게 변하든 그 규례 하나만 변함없이 고수하는 것이다. 그를 가리켜 진리를 사랑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고 하면, 그는 속으로 억울해하며 말한다. “저는 그토록 많은 것을 버리고 그토록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또 그토록 많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실행했지요. 그런데 왜 제가 진리를 사랑하지도, 실행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겁니까? 또 왜 제가 규례를 지킨다고 하는 거죠? 억울합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자질이 부족한 이 부류의 주된 모습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의 자질은 어느 부분이 부족하겠느냐?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에 어떤 측면의 진리를 얼마나 교제하든 결국 그에게는 하나의 행동 방식이자 규칙, 말씀, 형식으로 귀결될 뿐, 하나의 원칙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만약 누가 그의 그 규칙에 어긋나는 말을 하거나 단어를 사용하면, 그에게는 그것이 진리 원칙을 어긴 것이 되어 버리고, 그러면 골치 아프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각종 규례와 형식, 글귀, 행동 방식으로 자신에게 진리 실제가 있다고 규정하는 한편, 또 하나의 문젯거리를 갖고 있다. 바로 자신이 늘 말하는 도리와 늘 지키는 규례, 행동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가늠하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가늠한다는 것이다. 가늠하는 것 외에도 그들은 늘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판단하고 규정한다. 예를 들어, 내가 “나는 보통 찬 것을 잘 먹지 못한다. 위에 부담이 가서 날것이나 찬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라고 말하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 알았으니, 앞으로는 날것이나 찬 음식을 드리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언제든 날것이나 찬 음식을 드시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여름에 기온이 높을 때, 농장의 딸기가 익었길래 가서 두어 개를 먹는 내 모습을 보고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날것이나 찬 음식은 안 드신다면서요? 딸기는 찬 음식 아니란 말인가요? 전에 찬 것을 먹으면 위가 불편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오늘은 왜 딸기를 드시는 거죠? 그럼 거짓말하신 것 아닌가요?’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그가 일을 정확하게 보는 것이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가 정확하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를 규례로 삼아 사물을 가늠하면서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신 배경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른다. 보통 날것이나 찬 것을 먹으면 위가 불편해지지만, 특수한 경우도 있다. 가령 일하느라 몸이 달아오른 데다가 날씨까지 더워서 기온이 30도 정도 되면, 이런 날것이나 찬 음식도 그렇게 차갑지 않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조금 먹어도 된다. 절대 먹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은 보통의 상황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무더운 여름철에는 조금 먹어도 된다. 그런데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듣는 순간 하나의 규례나 공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특수한 상황이 닥쳐도 이 공식에 맞춰 보고, 맞지 않으면 마음속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날것이나 찬 음식을 드시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지금은 왜 또 드시는 거죠? 이건 거짓말 아닌가요?’라고 말이다. 무엇이 부족하기에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느냐? (그는 이해 능력이 없습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환경의 변화나 특수한 상황에 따라 이 일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자질이 충분한 사람이라면, 일을 마치고 몸이 달아오른 데다가 날씨도 더워서 과일이 그리 차갑지 않으니 조금 먹는 것은 문제없다는 것을, 이는 매우 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을 보자마자 알고 이해하며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딱 막혀 마음에 관념이 생긴다. 관념이 한번 형성되면 어떤 결과가 초래되겠느냐?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물론, 이런 사소한 일이 무슨 큰 문제는 아니지만, 그는 시종일관 마음속에서 내려놓지 못한다. ‘그것은 거짓말 아닌가요? 이제 보니 당신도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보아라, 이렇게 사소한 일에서도 쉽게 규정하고 판단한다. 큰일과 관련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관념이 생긴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런 사소한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전혀 분별하지 못하며, 무슨 일을 보든 죽어라 규례에만 맞춘다. 그는 규례를 지켜야 진리가 있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네 언행이 아무리 진리 원칙에 부합해도 그의 관념과 상상에 맞지 않아 그가 인지하고 있는 규례와 상충되는 한, 마음속으로 너를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다.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네게 관념이나 편견을 품을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듣고 어떤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든 전부 하나의 가르침이나 행동 방식, 규례로 귀결시키고, 그런 가르침과 행동 방식, 규례를 기꺼이 즐겁게 지키면서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진리에 매우 순종하고 하나님을 몹시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때로는 스스로 감동하여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세상에 자신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실 그가 지키는 것은 하나의 규례이자 행동 방식일 뿐인데, 그는 이렇게 실행하면서도 계속 그것을 지키고 변치 않으며 자신이 진리를 얻었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었다고 여긴다.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규례를 지키는 것을 자주 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밥하는 사람에게 이제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했으니 매일 시원한 차와 음료를 준비하고, 식사할 때는 찬 음식, 즉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샐러드를 곁들이면 입맛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한다고 해 보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날씨가 더울 때 찬 음식과 차가운 음료를 먹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아주 잘 지킨다. 하지만 어느 날 기온이 떨어졌는데도 그는 날씨가 춥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지금은 여름이니까 찬 음식과 음료를 준비해야지. 매일 실컷 먹고 속까지 시원하게 해 줄 거야. 기온이 떨어지든 말든 상관없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찬 반찬을 준비하는 것으로 모자라 국수도 찬물에 헹구고, 식사 후에는 찬 음료에 얼음까지 띄워서 내어 온다. 어떤 사람이 이를 보고 “어째 오늘 같이 추운 날에도 찬 음식을 준비한 겁니까? 게다가 차가운 음료에 얼음까지 띄우다니, 나보고 얼어 죽으라는 겁니까?”라고 하면 그는 상처를 받는다. ‘내 심보가 그렇게 못됐나? 날씨도 더운데 다들 더위도 좀 식히고 더 많이 먹으라고 이렇게 한 거잖아. 이게 다 원칙을 지키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 아닌가? 내가 뭘 잘못했지? 나 때문에 얼어 죽겠다니, 내가 그렇게 부도덕한가? 내 인성이 그렇게 형편없나? 정말 사람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그의 그런 행동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겠느냐? 여기에서의 원칙은 무엇이냐? 계절과 기온에 맞춰 식단을 조절하는 것이다. 여름철에 더울 때는 시원해서 잘 넘어가는 음식이나 음료를 섭취하는 것이 원칙 아니겠느냐? 이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지금은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으니, 이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야겠느냐? (갑자기 기온이 떨어졌으니 전처럼 찬 음식이나 샐러드를 만들지 말고 날씨에 맞춰 따뜻한 음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규례를 지켜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 여름이라도 간혹 기온이 떨어지면 ‘여름철에는 반드시 찬 음식과 음료를 준비해야 한다’라는 행동 방식과 규례를 지켜서는 안 된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 음식도 즉시 바꿔서 찬 음식과 음료는 준비하지 말고 얼음은 더더욱 넣지 말아야 한다. 따뜻한 요리와 국수를 준비하는 등 날씨와 기온에 맞춰 식단을 조절하는 것이 바로 원칙이다. 그런데 그는 날씨와 기온을 고려하지 않고 여름에는 무조건 찬 음료와 반찬을 준비하는 행동 방식을 고수한다. 이는 어떤 문제겠느냐?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는 규례를 지키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일을 처리할 때 바로 이런 모습을 보인다. 한마디 말을 기억하면 그것을 규례로 여겨 지키며, 환경과 사람, 일, 사물이 어떻게 변하든 융통성 있게 원칙을 적용해 처리하지 못한다. 사실 음식에 관한 원칙을 정해 이루려는 성과는 그 음식을 먹고 속이 편하게 하는 데 있으며, 이런 원칙은 규례가 아니다. 그런데 규례를 지키는 사람은 날씨나 기온이 어떻든, 먹고 속이 편하든 불편하든 신경 쓰지 않고 여름이면 무조건 찬 반찬과 음료를 고집하니, 이를 가리켜 규례를 지킨다고 한다. 원칙대로 실행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 모든 일이 행해지는 것이지만, 규례를 지키는 것은 성과가 어떻든 형식과 행동 방식만 중시하는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문제를 처리할 때 이런 행동 방식을 취하고, 어떤 일이 닥치든 이런 식으로 처리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일이 닥치든 꿰뚫어 보지 못한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그의 이해는 얼마간 치우치며,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는 규례나 행동 방식, 의식을 지키는 것이며, 이것은 진리 원칙과는 완전히 다른 일이기에 여기에는 치우친 것들이 많이 생겨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무슨 일을 이해하든 치우치는 성질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간단하고 쉬운 일에서는 말을 잘 듣고 순종하며 치우치지 않을지 몰라도 원칙적인 일이나 비교적 복잡한 일에서는 진리 원칙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규례만 지킬 뿐이다. 알아들었느냐? (네.) 자질이 부족한 부류는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전혀 없어서 규례만 지키는데, 이런 부류도 골칫거리가 된다. 그는 규례를 꽤 열심히, 그리고 단호하게 지킨다. 네가 그와 교제하면서 “당신은 지금 규례를 지키는 것이지, 진리 원칙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면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각한다. ‘나는 원칙을 굳게 지키는 거야. 그래서 다른 사람과 타협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은 원칙을 지키지 않아서 정죄받는다지만, 나는 원칙을 지켰는데도 정죄받다니, 이건 불공평해!’ 그의 완고한 모습을 보면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너희도 이런 부류를 만난 적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일부 사람에게 “춤을 배우고 싶다면 사역이 바쁘지 않을 때 매일 틈을 내서 두 시간씩 연습해라. 한동안 꾸준히 하다 보면 배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니, 그는 ‘매일 두 시간씩 연습을 계속하라’는 말만 기억한다. 그러고는 매일 두 시간씩 연습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후로는 본분이 아무리 바빠도 매일 두 시간씩 춤 연습을 고수한다. 최근 교회 사역이 바빠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느라 하루에 두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한데도 그는 계속 두 시간씩 춤 연습을 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면 교회 사역에 지장이 생긴다고 일러 주어도 그는 듣지 않고 “두 시간씩 춤 연습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일이니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말씀을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죠.”라고 한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 싫어하고, 사역이나 환경의 필요에 따라 융통성 있게 처리하고 적용할 줄도 모른다. 그는 왜 두 시간씩 연습해야 하는지, 두 시간씩 연습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그로 인해 얻으려는 성과가 무엇인지 등을 전혀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다. 그에게 있어서 진리 실행은 한마디 말, 하나의 규례, 한 가지 형식을 지키는 것으로 끝이며, 그것이 곧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성과를 냈든 내지 못했든, 그 성과가 어떻든 상관하지 않고 한 길만 고집하는데, 소 열 마리로도 되돌릴 수 없을 정도다. 치우치게 실행하고 있어도 계속 그렇게 하려고 하며, 그렇게 하는 것은 터무니없고 잘못되었다고 알려 주어도 계속 그렇게 하려고 한다. 이런 사람은 골칫거리 아니겠느냐? 누가 교제해 주든 소용이 없는데, 네가 간신히 알아듣게 얘기하면, 오늘은 그 일을 이해해도 내일은 또 다른 일에서 규례를 지키고, 한번 지키면 끝이 없다. 그래서 네가 늘 바로잡아 줘야 하는데, 그는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치우치고, 이 일 아니면 저 일에서 치우치는 등 끝도 없이 치우친다. 지켜보고 있으면 분통이 터지지만 도무지 바로잡을 수가 없다. 어째서 그렇겠느냐? 자질이 형편없기 때문이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 시(是)와 비(非), 옳고 그름, 진리와 규례를 영원히 분별하지 못한다. 구분하는 기준도, 구분할 능력도 없고, 구분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규례적인 사역이나 일, 진리 원칙에 관련되지 않은 단일 사역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 기계적으로 몇 시 몇 분에 무엇을 하고 몇 시 몇 분에 또 무엇을 하는 식이다. 즉 시간과 형식, 행동 방식만 지키면 잘할 수 있는 간단한 사역만 할 수 있을 뿐, 좀 더 복잡한 사역은 하지 못하며, 진리 원칙에 따라 어떤 성과를 내야 한다고 요구하면 도달하지 못한다. 만약 그에게 어떤 사역을 맡기면서 진리 원칙에 따라 융통성 있게 적용해서 각종 문제를 상황에 맞게 처리하고,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라고 하면, 그는 머리가 멍해져서 하지 못하고, 반드시 누가 도와주고 지적해 줘야만 가능하다. 그러니 그가 혼자 사역을 잘 해내기를 바라지 마라. 그럼 이런 부류를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그는 매일 정해진 대로 본분을 꾸준히 이행할 수는 있지만, 돌발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고, 본분 이행을 중단할 수 있다. 이런 부류에게는 자주 물어보고 사역을 검사해야 한다. “최근 교회 사역을 교란하고 방해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처리하기 힘든 복잡한 문제가 있었나요?” 하고 물어보면,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최근에는 다 좋았습니다. 모두가 본분을 이행하고 정상적으로 예배하며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셨지요.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사람도 없었고, 누가 황당한 논리를 퍼뜨려 사람들을 미혹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는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고, 무엇을 보고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문제를 제기할 줄도 모른다. 그러니 현실 생활에서나 본분 이행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가 스스로 처리하고 해결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고, 본인이 처리하지 못할 때는 윗선에 구하고 질문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라. 그는 이런 것들을 할 수 없다. 자질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부류가 윗선에 문제를 보고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는 일반적인 문제도 발견하지 못하고,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어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머리가 달렸고, 머리에 두 눈과 두 귀도 달려서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말할 줄도 알지만,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다. 바로 자질이 없고, 문제를 발견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똑똑한 것 같아도 소용이 없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머리에 집어넣은 다음, 그것이 문제인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사고하거나 변별하지 못한다. 또 진리 원칙과 관련된 문제를 처리하지 못해도 윗선에 보고할 줄 모른다. 이런 것들을 하나도 할 수가 없다.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게 “요즘 사역에는 문제가 없었나요? 원칙을 깨닫지 못한 부분은 없었나요?” 하고 물으면, 그는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다들 바쁘게 지내고 있고, 다들 잘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좋다. 리더 일꾼으로서 네가 만약 ‘잘하고 있다’라고 하는 그의 말을 믿는다면 너무나 어리석다. 너는 그와 마찬가지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문제를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으며, 문제에 맞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얘기하다 보면 문제를 찾아낸다. 네가 문제를 발견한 후 어떻게 처리했는지 물으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무슨 문제요? 저는 발견하지 못했는데요?”라고 한다. 그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니 네가 사역하면서 문제를 파악하고 발견하는 데 능숙해야 하고, 문제를 놓치지 말아야 하며, 그런 다음 처리하고 해결하도록 도와줘야 한다. 너는 그와 대화를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상담하고 물어보는 등 대화하는 방식을 통해 문제를 발견해야 한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가 자기도 모르게 문제점을 말하게 되는데, 이렇게 대화하지 않으면 그런 문제들을 발견할 수 없다. 네가 이렇게 대화하면 그는 깨우침을 얻고 문득 그런 문제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이런 방식으로 알아내지 않으면, 그는 사실 이런 일들을 봐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를 얘기할 때는 치약 짜듯 조금씩 조금씩 분명히 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어야 그는 부끄러움을 조금 느낀다.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문제가 있어도 발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니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해결하지도 못한다. 말해 보아라,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는데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규례를 지킨다고 사역을 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 잘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모습이다. 네가 그에게 자질이 부족하다고 하면 그는 오히려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자질이 아주 훌륭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 대해 말씀하시면 나는 듣자마자 바로 행동 방식과 규례를 파악해서 그걸 평생토록 지킨다고. 그러니 자질이 좋은 것 아니겠어? 당신들은 모두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지만, 나는 할 수 있어. 여름에는 더워서 시원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하면, 나는 계속 찬 음식과 음료를 준비하면서 그걸 잘 지킬 수 있어. 당신들은 지키지도 못하면서 늘 원칙만 내세우는데, 원칙이 곧 규례 아냐? 그 규례만 지키면 원칙을 지키는 것 아니냐고.’ 그는 오히려 자신의 자질이 좋다고, 문제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고, 긴 설교 중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하나의 가르침, 행동 방식, 규례, 나아가 말 한마디, 한 단어를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아라, 이것은 골칫거리 아니겠느냐? 이런 부류의 사람이 꽤 많은데, 네가 진리의 각 세부 사항을 교제하면 그는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성가시게시리! 말을 한번 시작하면 끝이 없군. 그런 말을 하지 말고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는 거잖아? 그 말만 지키면 그만인데, 한마디면 될 일을 왜 저리 번거롭게 얘기하지? 내적 상태에 따라 나누고, 환경에 따라 나누고, 각 부류의 인성에 따라 나누고, 이해가 치우쳤느니 올바르니 하면서 구분하고 있잖아. 그렇게 세세하게 나눌 필요가 있나? 그렇게 따질 필요가 있냐고. 정말 쓸데없는 짓이야!” 그는 도리어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 이것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이냐?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하고, 어떤 측면의 진리 원칙이든 전부 하나의 규례나 공식으로 삼은 후 기꺼이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도리를 말할 줄 알기에 자신이 진리 원칙을 깨달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네가 리더 일꾼에게 사역의 원칙들을 알려 주면서 이 원칙들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사역하고 각종 문제를 처리하라고 하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절대 그것을 적용하지 못한다. 그는 이러한 진리 원칙들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들을 사역에 적용하지도 못한다. 아래에서 사역할 때는 전부 규례를 지키고 형식을 따르며 맹목적으로 이론을 답습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 원칙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자질이 부족해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에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 어떤 사역을 하든 문제가 닥치면 속수무책이 되거나 심지어 진땀을 빼며 어떤 사역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윗선에서 원칙을 교제할 때는 다 알아듣고, 깨닫고, 이해하고, 기억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생활에서 문제에 부딪히면 머리가 멍해진다. 자신이 깨달은 도리와 규례는 쓸모가 없고, “이걸 어쩌지?”라며 어디서부터 사역을 시작해야 할지, 사역에 어떤 방식을 적용해야 할지, 사역지침을 어떻게 시행해야 할지 모르며, 더구나 교회 사역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당장 어떤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을 하나도 모른다. 결국 아무리 오래 사역을 해도 전혀 성과가 없고, 사역지침은 시행되지 않으며, 어떻게 해야 교회 생활을 잘할 수 있느냐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가장 기본적인 사역도 시행하지 못하며, 어떻게 시행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는 사람들에게 도리를 말하고 규례를 지키라고만 할 뿐, 사역지침을 시행하여 구체적으로 교회 사역을 해야 할 때가 되면 머리가 멍해지고 해내지 못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 사역지침들을 어떻게 시행해야 하지? 어떤 규례들을 지켜야 할까?’라고 생각하며, 이런 것들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에게도 최후의 한 수가 있으니, 예배를 많이 드리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역할 때 무턱대고 예배하고 설교만 한다. 모두가 들떠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 문제가 다 해결되어 더 이상은 없다고 생각하고, 모두가 의욕만 있으면 이 사역은 완전히 제대로 해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며칠 동안 예배를 드려도 실제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본분 이행은 여전히 성과가 없으며, 교회 사역 또한 아무런 진전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설교할 의욕에 넘쳐 있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사역을 해도 성과가 나지 않고, 시간을 아무리 주어도 사역지침을 시행하지 못한다. 효율도 없고 성과도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 이런 모습을 보이니, 자질이 없는 사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듣고 다른 사람이 진리를 많이 교제해 주어도 그는 진리 원칙은 물론이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규례도 파악하지 못한다. 자질이 이 정도로 부족하면 진리 원칙에 이르지 못하니, 다른 사람이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실행의 길을 찾지 못하며, 반드시 누가 구체적으로 지적해 줘야만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안다. 이런 사람은 마치 짐승이 환생한 것 같아서 머릿속이 늘 모호하고, 무엇이 원칙이고 무엇이 규례인지 구분하지 못하며, 속으로 ‘왜 이런 것들을 들으면 머리가 아프고 졸리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나는 진리 원칙에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규례조차 지키지 못해. 앞으로는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능력 되는 만큼 힘을 쓰자. 뭔가를 좀 할 수 있으면 그걸 좀 하면 되지.’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는 규례도 지킬 줄 모르고 진리 원칙도 깨닫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라고 생각한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자질이 이렇게 부족하면 진리조차 깨닫지 못하는데,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자질이 없는 사람은 각 측면의 이해 능력이 전혀 없어서 규례를 지키는 능력조차 갖추지 못했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 중 일부는 그래도 진리를 실행할 때 어렴풋이 알고 있는 원칙이나 규례, 공식을 파악해 진리를 조금이라도 실행할 수 있지만, 자질이 없는 사람은 규례적인 것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다. 이는 더 가련한 부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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