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7) 제 3 부

제11조 창의력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열한 가지 기준 중 마지막 하나는 창의력이다. 창의력은 한 분야의 사물이 지니는 원리와 원칙, 법칙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해에 따라 갖게 되는 창작 능력을 말한다. 이 창작 능력은 바로 사물 기존의 바탕 위에서 그것을 개선하고, 발전시키고, 그 영향 범위를 확대시키거나, 혹은 그것을 새로운 세대의 사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창의력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물의 객관적 법칙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전제하에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그것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고 개척함으로써 사물의 발전 법칙에 부합하는 원리, 원칙이 더 많은 사람에게 기여하도록 하고, 더 많은 사람이 거기서 유익과 도움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 방면의 원리와 원칙을 지속하여 그것의 영향 범위, 수용자 범위를 부단히 확대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더욱 실제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문자적인 표현 방식에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혜택을 주는 일종의 실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의력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기존의 가정 환경, 성장 배경,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어떤 사물의 원리와 원칙, 발전 법칙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아가 그런 원리와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어떻게 그것을 이론에서 실물로 바꾸는지 안다면, 글귀와 도리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한다면, 그것이 생활의 일부나 성과로 바뀌어 사람에게 기여하게 한다면, 그로써 사람들이 거기서 유익과 도움을 얻고 더욱 빠르고 편리한 생활을 하도록 한다면, 이 정도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창의력이 있는 사람이고, 자질이 좋은 사람이다. 즉, 사물 발전 법칙의 원리와 진리 원칙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사물을 추진하고, 지속하고, 확장하고, 새롭게 바꿀 수 있다면,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거나 이 중 한 가지를 해낼 수 있다면, 한 분야의 긍정적 사물의 원리와 규칙, 혹은 진리의 원칙을 사람들 가운데서 시행하고, 실현하고, 확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질이 좋다는 뜻이다. 설령 그것을 더욱 심화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을 지속, 확장, 실현할 수 있고, 그 긍정적인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네가 창의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만약 이 능력은 갖추지 못하고 긍정적인 사물의 법칙을 받아들이는 능력만 갖추었다면, 그리고 그 받아들이는 능력이 단지 문자적 이론에만 머물 뿐, 그것을 사람에게 시행하거나 실현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기여하지 못해 사람들이 유익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창의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원리와 원칙, 법칙과 규칙을 실제적으로 다루고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창의력이 있는 것이며,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야 자질이 좋은 사람이다. 예를 들면, 어떤 리더 일꾼이나 책임자는 하나님 집의 원칙과 규정을 이해한 후, 곧장 시행할 수 있고, 각 사역의 진리 원칙을 하나님 선민들에게 시행하여 더 많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교회 사역이 질서 있게 진행되도록 한다. 즉, 원칙 범위 내에서 선순환이 일어나 사역이 끊임없이 발전하고 추진되며, 편차가 생기지 않게 한다. 사람들은 어떤 결과를 보게 되느냐? 누구나 이 사역 범위 내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원칙을 깨달아 원칙대로 일을 처리한다. 사역에는 편차가 없고, 해당 사역에서 새로운 성과나 새로운 작품이 계속해서 생겨난다. 설령 중간에 특수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책임자가 사역 원리와 규정, 원칙에 따라 유연하게 처리하며, 그의 인도 아래 해당 사역은 기본적으로 중단되지 않고 계속 질서 있게 진행된다. 즉, 어떤 상황이 닥쳐도, 누군가 나타나 교란하거나 어떤 황당한 논리를 퍼뜨려도 사역의 질서 있는 진행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해당 사역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이 방면의 사역 원리, 이 방면의 진리 원칙이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사역 원리와 원칙을 시행하고, 지속하고, 추진함으로써 해당 사역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해서 질서 있게 시행되고 지속된다. 또한 시기마다 좋은 사역 성과가 나타나는데, 그 사역 성과의 영향력은 끊임없이 확대되고, 유익을 얻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진다. 유익을 얻는 그 사람들은 사실 책임자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역지침의 각 원칙과 원리, 나아가 엄격한 규정으로부터 유익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의력이다. 즉, 자질이 좋은 사람은 본인이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역 원칙과 진리 원칙을 자신이 맡은 사역에,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끊임없이 시행함으로써 사역이 질서 있게 진행되거나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고, 또한 사역 성과가 정기적으로든 비정기적으로든 나타나게 할 수 있다. 이방인들은 이를 두고 ‘작품을 내놓는다’라고 한다. 다시 말해 계속해서 사역 성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사역 성과가 나타남으로써 영향력이 더 커지고, 수용자가 더 많아진다. 이런 능력을 갖춘 사람은 결국 사역 성과를 끊임없이 확대할 수 있어서 유익을 얻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이런 사람이 바로 자질이 좋은 사람이다. 창의력으로 한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려면, 사역 원칙, 사역 규정, 진리 원칙을 이해한 뒤 시행 능력, 추진 능력, 확장 능력이 어떤지를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해당 사역을 지속하는 능력이 어떤지를 보아야 한다. 그다음으로 이 사역을 할 때 수용자가 몇이나 되는지, 그들의 범위가 얼마나 큰지,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사역 효율과 성과가 어떤지를 보아야 한다. 사역 효율이 높고, 성과가 좋고, 수용자의 범위가 부단히 확대된다면, 자질이 좋은 것이다. 반면 수용자가 적은 데다 사역 효율도 낮고 성과가 떨어지며 늘 재작업이 필요하거나, 일이 중단되거나 문제를 보완해야 한다면, 자질이 보통인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역 원칙과 지침 등 각 방면을 빠르게 잘 이해하지만, 시행할 때 진도가 느리고 효율이 낮다면,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한 달이면 낼 수 있는 성과를 석 달, 심지어 반년이 지나야 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성과도 보통 수준밖에 되지 않고, 수용자도 적고, 사람들이 얻는 유익도 크지 않다면, 자질이 보통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한 방면의 원칙이나 원리를 깨달은 당시에 글귀만 이해할 뿐, 자신의 사역에서 이 방면의 원칙이나 원리와 관련된 사람과 일, 사물을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그는 단지 원칙과 원리를 일종의 규례나 도리로 생각하며 듣고, 듣고 난 뒤에도 속으로 계획이 없다. 어떻게 시행하는지, 해당 사역지침이나 자신이 깨달은 원리, 혹은 원칙을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하는지 모른다. 실생활이 해당 원리나 원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실생활이나 사역에서 원칙, 원리, 사물의 발전 법칙은 모두 제쳐 놓은 채 적용하지 못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그의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 인품이 어떤지, 그가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인지 혹은 하기 싫어하는 것인지는 접어 두고, 자질만 놓고 본다면 이런 부류는 자질이 부족하다. 그는 어디를 가든 많은 도리를 얘기할 줄 알고, 원리도 좀 얘기할 줄 안다. 이른바 사물의 발전 법칙에 대해서 사람들과 토론도 할 수 있다. 마치 사상 경지가 매우 높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것 같고, 자질도 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 사역을 하나 분배해 주면 한두 달이 지나도 성과가 없고 소식도 들리지 않는다. 당시 다짐을 나타낼 때는 말을 아주 잘하더니 막상 실제로 가서 할 때는 어떻게 할지 모른다. ‘상부에서 원칙을 아주 명확하게 설명해 주었는데, 그럼 이제 난 어떡하지? 책임자 역할은 누구에게 맡기고, 설교자 역할은 누구에게 맡기고, 외부 업무는 또 누구에게 맡긴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큰소리치며 다짐했는데 안 할 수야 없지!’ 그는 속을 끓이느라 입가에 물집이 잡히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다. 그래서 몰골도 추레해지고 애를 먹지만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가 사역을 안배할 때 굳은 맹세로 각오를 다지고 대단한 기개를 보이며 호언장담한 것을 볼 것이 아니라, 사역을 할 수 있는지, 절차와 계획이 있는지, 사역지침을 시행하고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줄 아는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그가 그런 것을 알지도 못하고 할 줄도 모른다면 그것은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도리만 이해하고 원칙을 적용할 줄 모르며 마구잡이로 행동하는 것도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원칙이나 원리, 혹은 사물의 발전 법칙을 실제 상황에 적용하지 못하고 실생활에 적용하지 못한다면, 속을 끓이든 제멋대로 굴든 그것은 모두 자질이 부족한 모습이다. 이렇게 말하면 정확하지 않겠느냐? (정확합니다.) 어떤 사람은 함부로 행동하고, 어떤 사람은 할 줄도 모르고 할 엄두도 내지 못하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른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창의력 면에서 보이는 구체적인 모습은 원리와 원칙을 적용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고, 그저 말이나 도리, 규례만 외우는 것이다. 도리와 규례만 외우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것이 창의력이 있다는 의미는 되지 않는다. 창의력이 있는지 여부는 그 원리와 원칙, 규칙을 실생활에 시행할 줄 아는지, 그 원리나 원칙과 관련된 사역을 잘 해내는지를 봐야 한다. 그 원리와 원칙이 글귀와 도리, 규례, 공식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사람과 그 삶에 적용하여 사람들이 활용하게 해야 하며, 사람들이 거기에서 유익과 도움을 얻게 하고, 그것이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실행의 길이 되게 하거나 생존의 지침, 방향, 목표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창의력을 갖추지 못한 채, 글귀와 도리만 늘어놓고 구호만 외치며, 본분을 이행할 때 이런 원칙과 원리를 전혀 활용하지 못하는 그런 리더나 책임자를 따른다면, 이 부분 진리의 실행 원칙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이런 리더나 책임자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며 사역을 감당하지 못할 테니, 이런 사람을 발견하면 고발하고 파면시켜야 한다. 한 사람이 어떤 사역을 담당할 수 있는지를 심사하려면 우선은 그가 사역지침을 읽고 진리 원칙을 깨달은 후, 사역을 안배하고 시행할 수 있는지, 사역을 해낼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교회에 사람이 얼마나 되든 교회의 각 사역을 해낼 수 있다면, 자신이 몇 명의 사역을 책임지든, 그 수가 오십이든 백이든 사역을 불길처럼 일어나게 하여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진리 원칙대로 사역하고 본분을 이행하게 한다면, 이런 사람은 리더나 책임자로 선출하는 것을 고려해 볼 만하다. 물론 그의 인품이 어떤지, 그가 옳은 사람인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도 보아야 한다. 이런 것은 반드시 알 필요가 있다! 리더 일꾼은 최소한 이런 방면의 자질과 분량을 갖추어야 하나님 선민들을 진리 실제로 이끌 수 있고, 사람들이 사역지침, 혹은 진리 원칙대로 사역하고 본분을 이행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 선민들이 그에게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만약 이런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그를 선출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를 선출한다면, 매일 그를 따라 한가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육은 아주 편안하겠지만, 영적으로 충만함을 느낄 수 있겠느냐? 매일 몇 시간씩 예배를 열어 그가 이야기하는 도리만 듣고 실질적인 사역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가 매일 도리를 이야기해 주니 네 귀는 충만하겠지만,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그저 그를 따라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아간다면, 그에게 미혹되고 지장을 받게 된다. 그가 말하는 무미건조한 글귀와 도리만 듣다 보면, 결국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고 충성을 다하지도 못한다. 진리와 관련한 실제적인 체험과 경험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이 부탁한 일에 충성도 바치지 못하며, 사역을 일으키지 못 해서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성과를 요구할 때 아무것도 내놓지 못한다면, 너는 손해를 입은 것 아니냐? 그러니 네가 만약 예전에 이런 사람을 리더 후보로 생각했다면 이제는 얼른 관점을 바꾸고, 이런 사람을 후보 명단에서 지워라. 그를 리더로 선출해서는 안 된다. 자질이 부족하고 창의력이 없는 이런 부류는 어떤 점에서 부족하겠느냐? 탁상공론만 할 줄 알지 결코 현실 사역에 적용하지 못하고 실질적인 사역을 할 줄 모른다는 점에서 부족하다. 이런 사람이 리더가 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겠느냐? 사역을 엉망으로 할 수밖에 없다. 만약 중국 본토에서 교회 리더가 되었다가는 교회를 전멸시키고 말 것이다. 그 자신만 진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끄는 사람들도 생명에 손해를 입을 것이다. 만약 제때 발견해서 그를 파면할 수 있다면, 일부 재난을 피할 수 있고 교회 사역도 손실을 입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이런 사람 아래 있으면서 따르는 자가 되어 그의 인도를 받아들인다면, 구원받을 희망이 그에 의해 끊기고 구원받을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창의력은 리더 일꾼이나 책임자에게 매우 중요한 능력이다. 네가 사역을 위한 최소한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매우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열정에 따라 앞으로 달려가려고 하지 말고, 항상 나서려 하거나 리더, 책임자가 되려고 하지 마라. 그러면 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까지 지장을 주게 된다. 너 자신에게 지장을 준다면 너 혼자 죽겠지만, 형제자매들에게까지 지장을 준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을 해치는 것 아니겠느냐? 너는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긴다. 게다가 네가 스스로 삶을 꾸려 나가고 돈 버는 데 지장을 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교회 사역에 지장을 주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네가 정말 양심이 있는 사람이고, 이 일이 큰 책임이라고 여기며 교회 사역에 지장을 준 것을 책임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든 자신을 과시하려고 애쓰면서 리더 자리를 다투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네게 그런 자질과 분량이 없다면, 늘 나서려고 해서는 안 된다. 또 너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려고 교회 사역에 지장을 주거나 하나님 선민들이 진리에 진입해 좋은 종착지를 얻는 것을 그르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죄악이다! 너는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되, 항상 리더가 되려고 하지 마라. 리더 말고도 할 수 있는 본분은 많다. 리더가 되는 것은 너의 특권도 아니고 네가 추구해야 할 것도 아니다. 네게 자질과 분량이 있어 리더가 될 수 있고 또 부담도 있다면, 모두가 너를 선출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렇게 실행하면 교회 사역에도, 모두에게도 유익이 된다. 하지만 만약 네게 리더가 될 만한 자질이 없다면, 조금이라도 좋은 마음을 갖고, 다른 사람의 앞날에 조금이라도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항상 리더가 되려고 다투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지장을 주지도 마라. 자질이 부족한데도 리더가 되어 교회 사역을 책임지려고 하는 것은 좀 비이성적이다. 그런 자질과 분량이 없다면 네 본분을 잘 이행하면 된다. 정말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성이 있는 것이다. 네 능력만큼 사역하되, 야심과 욕망을 갖지 마라. 사욕만 채우기 위해 교회 사역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너 자신은 물론이요, 교회까지 해를 입히는 일이다. 이것이 창의력 면에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모습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도 창의력에 이를 수 없으니 자질이 없는 사람은 더더욱 창의력을 갖출 수 없다. 이런 부류는 사물의 원리, 사물의 발전 법칙, 진리 원칙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는 설령 그것이 진리 원칙임을 알아차리더라도 그 적용 범위가 어떻게 되는지, 어떤 사람, 어떤 일에 관련되는지 맞춰 볼 줄 모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진리를 교제하면 내용이 너무 세세하고 많아. 이런 말씀들을 듣고 있으면 그것이 원칙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원칙의 정의가 무엇이고 원칙이 규정하는 범위가 무엇인지 모르겠어.’ 원칙의 정의도 모르니, 어떻게 시행하고 실행하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일이 생겨서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원칙대로 실행해야 합니다.”라고 하면 그는 “저는 어떻게 원칙대로 실행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 일이 어떤 원칙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라고 한다. 상대가 그 일을 할 때 실행해야 할 원칙을 설명해 주었는데도 그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자질이 형편없다. 사람이 하는 말도 알아듣지 못하니 쓰기에는 더더욱 합당하지 않다. 이런 사람은 벽을 세울 수 없는 진흙과 같이 쓸모없지 않겠느냐? 이런 쓸모없는 사람은 정상 인성의 사고와 이해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사고의 논리는 더더욱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진리 원칙이나 각종 원리, 규칙을 깨달은 사람은 자질이 없는 이런 부류와는 소통할 수가 없고, 공감대를 이룰 수 없으며, 당연히 공통된 화제도 없다. 어째서 소통할 수 없겠느냐? 한 가지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이 두 부류가 각종 사물을 인지하고, 변별하고, 판단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같은 수준이나 같은 궤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두 평행선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좀 추상적이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부류의 자질은 천지 차이이고 전혀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에 한 가지 사물에 대해 영원히 같은 판단력, 변별력, 인지 능력을 보일 수가 없다. 즉, 자질이 좋은 사람이나 자질이 보통인 사람은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자질이 없는 사람은 속으로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거기에 이르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는 영영 이르지 못한다. 마치 그런 기능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암탉은 다 자라면 자연스럽게 알을 낳는데, 설령 적게 낳더라도 낳을 수는 있다. 암탉에게 그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탉은 아무리 잘 먹어도 알을 낳지 못한다. 수탉에게는 그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수탉은 “비록 나는 알 낳는 기능은 없지만 새벽에 울 수는 있지!”라고 하겠지만 아무리 몇 번이고 우렁차게 울더라도 알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 암탉은 울지는 못하지만 알을 낳는 기능이 있다. 내가 왜 너희에게 이런 예를 들겠느냐? 자질이 없는 사람은 이런 치우친 이론, 그릇된 이론, 논리에 어긋나는 이론을 얘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질이 좋은 사람이나 자질이 보통인 사람은, 심지어 자질이 부족한 사람조차 자질이 없는 사람과 함께 어떤 일에 대해 소통하고 토론할 때 어색함을 느낀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과는 어떤 평이한 일에 대해서는 그나마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질이 없는 사람과는 그 누구도 소통할 수 없다. 그는 받아들이는 능력이 전혀 없고,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사상 관점이 없기 때문이다. 자질이 없는 사람에 대한 묘사와 해석은 바로 이렇다. 자질이 없는 사람과 어떤 일에 대해 소통할 때는 네가 명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해 주었고 그도 알아들었다고 말하지만 막상 다음번에 다시 그 일이 생기면 그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치우친 이론, 그릇된 이론을 내세울 것이다. 너희가 볼 때 이런 부류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물을 변별하는 능력, 사물을 인지하는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헛소리다. 자질이 없는 사람은 창의력이 없으므로 창의력 측면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다. 그는 원리나 원칙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계획이 없다. 머릿속에 계획도 없고, 절차도 없으며 어떤 원리나 원칙을 시행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고, 무슨 일이든 뒤죽박죽 엉망으로 해 놓는다. 이런 부류는 몸 쓰는 일만 할 수 있고, 그나마 간단한 단일 작업은 간신히 할 수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이라 한 가지 일에는 종사할 수 있지만, 만약 그것이 하나의 사역으로 확대되면 감당할 수 없다. 이런 부류는 가치 있는 사역, 기술이 필요한 사역은 할 수 없고, 그저 단순 작업, 이를테면 수작업, 농사, 양식과 같은 일만 좀 할 수 있다. 그것도 책임자가 옆에서 감독하고 붙들어 주어야 하는데, 가끔 기분이 좋지 않으면 누군가가 타일러 주어야 하고, 가끔 치우치거나 소극적으로 변하면 또 누군가가 북돋워 주어야 한다. 일을 조금 하는 것마저도 누군가 검토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거나 차질이 생겨서 다시 작업해야 한다. 재료를 낭비하거나, 에너지를 낭비하고, 그러지 않으면 물이나 전기, 가스를 낭비하며, 서양 국가에 가면 늘 신고를 당하거나 경찰에게 걸려 벌금이 부과되는 등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단순 작업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토록 골치 아프고, 이토록 가련하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런 부류는 폐물이자 바보가 아니냐? 그러고도 그를 사람으로 간주하고 쓸 수 있겠느냐? 사실 하나님 집에서 이런 사람은 그저 힘만 조금 쓸 수 있을 뿐, 교회 사역에 관련된 일은 하지 못하고, 제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설령 몸을 쓰는 일이라도 혼자서는 완수하지 못하고 누군가 지적하고 감독하고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는 조금만 몸 쓰는 일을 해도 자신이 과소평가됐다고, 재능을 썩혔다고 생각해서 속으로 불만을 품고 원망한다. “남들은 컴퓨터 기술 사역도 하고, 글도 쓰고, 노래하고 춤도 추고, 연기도 하면서 저렇게 멋지게 사는데 저는 섬기면서 밥이나 하네요. 하루 종일 기름, 연기와 씨름하다 보니 몇 년 만에 폭삭 늙었어요. 불쌍한 내 신세!” 그는 그 일을 하는 것이 늘 못내 서럽기만 하다. 하지만 왜 자기가 그 일밖에 할 수 없는지는 생각해 보지 않고, 자기가 과연 다른 사역을 할 수 있는지 가늠해 보지도 않는다. 이렇게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몸 쓰는 일을 조금 하는 것만으로도 늘 마음이 괴로운 것이다. 그가 만약 정말 자질이 좋다면 괴롭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자질이 부족해서 몸 쓰는 일밖에 할 수 없는 것인데도 과소평가됐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이냐? 그는 참으로 어리석다. 이런 부류는 몸 쓰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밥을 할 때도 많이 하거나 적게 하기 일쑤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법칙을 모른다. 그러면서도 계속 자기가 과소평가됐다고, 재능을 썩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는 이런 몸 쓰는 일을 할 게 아니라 사무실에 앉아 서기나 비서를 해야 하고, 하나님 집에서 특정한 사역을 맡거나 최소한 교회 리더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비이성적이지 않으냐? 네 생각에는 네가 어떤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어떤 사역도 감당하지 못해서 네게 몸 쓰는 일이나 좀 시키고, 하나님 집에서 너를 부양한다면, 이것은 높여 주는 것 아니냐? 그래도 만족을 모른다면, 이성이 너무 부족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성과 자질이 관계가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자질이 어느 등급인지 모르면서 늘 자신은 자질이 높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자질이 부족한 모습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판단할 줄 알고, 판단이 끝나면 자기 자질이 높은지 낮은지 알며, 자기 자질이 어떤지 확신한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고, 무엇을 하든 마음이 편하고, 자신이 이행하는 본분을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다. 설령 몸 쓰는 일을 시켜도 마음속으로 편안해하고, 내면 깊은 곳에서 순종하고 복종하며 그 일과 임무를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것을 두고 이성적이라고 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 늘 마음속으로 불편해하고 억울해하며 무엇을 시키든 능력이 과소평가됐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이성이 없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