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7) 제 2 부
감식력과 관련된 주제는 비록 진리를 추구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는 문제와는 관련이 없지만, 인성 생활 자체를 놓고 볼 때, 만약 네가 감상 능력을 갖추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그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관점이나 사상적 차원의 견해가 없다면, 무엇을 보아도 눈앞에 베일이 드리워진 것처럼 그 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단지 사건 전체가 발생하는 과정이나 관련된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서만 알 뿐,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와 관련된 사람의 사상 관점이 무엇인지는 모른다면, 너는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너는 생활 속 모든 문제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고, 사상적인 차원에서 깊이 사고하거나 생각하거나 정의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너는 자신의 나이와 인성의 성숙도, 혹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이 과연 어떤 유형의 문제인지, 자신이 어떤 것을 배우고 귀감으로 삼아야 하는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교훈을 주는지, 자신이 어떤 각도에서 그런 문제를 바라보고 처리해야 하는지, 비슷한 일을 또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등을 생각하지 않는다. 너는 이런 일에 대한 생각이 없다. 어떤 일이 닥치든 동물처럼 생각이 단순하고 관점이 없으며, 아무리 나이가 들고 얼마나 많은 일을 겪어도 여전히 문제를 생각할 줄 모르고, 자신의 경험과 식견, 자신이 배운 것을 바탕으로 각 측면의 문제를 사고할 줄 모른다. 이런 부류가 바로 자질이 부족한 부류이다. 자질이 부족한 이런 부류는 진리에 진입하는 일은 고사하고, 일상 생활 속 사소한 일에서도 규칙을 정리해 내지 못한다. 설령 40, 50세, 70, 80세가 되어도 여전히 아둔하고, 아무런 체험도 얘기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멍청하고 생각이 없다. 자질이 부족하고 감식력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그 어떤 일도 결코 사상적 차원에서 바라보지 못한다. 일을 바라볼 줄 모르고, 어떤 일도 간파할 줄 모른다. 그러니 한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를 볼 때, 구체적으로 그에게 감식력이 있는지를 볼 때, 나이나 경험을 볼 것이 아니라 무엇을 보아야겠느냐?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러 부류의 사람과 일, 사물을 40, 50년 체험한 후, 그에게 개인 사상적 차원의 깨달음이 있는지, 그의 경험이 인생의 가치나 사람이 걸어가는 길과 관련이 있는지, 사람의 사상 깊은 곳이나 정신 세계의 것과 관련이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만약 그의 경험이 그저 몇 가지 일과 관련될 뿐 사상적 차원에는 미치지 못한다면, 그는 감식력을 갖추지 않은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우리 때는 먹을 게 변변치 않아서 좋은 음식을 먹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 고기는 설이나 명절에만 좀 먹을 수 있었고. 그리고 사람들이 소박해서 옷도 참 수수하게 입었지.” 이런 일이나 얘기하는 정도이다. “당신이 이렇게 자꾸 입에 올릴 만큼 그 시절이 그렇게 가치 있나요? 우리 젊은 사람들이 참고할 만하고 당신과 사상적으로 교류할 만한 일이 있나요?”라고 누가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 때는 전장에 나가 싸우면서 며칠씩 걷느라 잠도 못 잤다네. 어떤 때는 하루 한 끼도 못 먹었어. 부대에 도착하면 신병들은 곯아떨어졌지만 우리 노병들은 밥부터 먹고 잠을 잤지. 밥때를 놓치고 또 걸으면 길에서 배를 곯아야 하니까.” 상대방이 “그러니까 그건 그냥 한 가지 사건이지 사상적 차원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우리 젊은 사람들이 배울 만한 점이라든가, 아니면 우리가 시행착오를 겪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우매함으로 인해 잘못이나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해 줄 수 있는 교훈을 얘기해 주세요.”라고 하면 그는 또 말한다. “우리 때는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게으르고 탐욕스럽지 않았지. 빈둥거리지도 않았고 말이야. 우리 때는 그저 고생하고, 열심히 일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서 상사 눈에 띄고 발탁되기만 바랐어.” 이런 말에 사상적 차원의 요소가 있느냐? (없습니다.) 듣고 나면 이것이 정신적 멘토가 하는 말, 즉 이방인이 말하는 ‘마음의 양식’처럼 느껴지느냐? 네 사상이 넓어지고, 사상의 경지가 높아지고, 사물에 대한 인지 능력이 향상되어 지금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새로운 사물이나 올바른 사상 관점을 발견하게 되었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류에게 감식력이 있겠느냐? 사상적 차원에 관계된 것을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을 들을 수 없는데, 그는 정말 말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50, 60살이 될 때까지 아무런 사상 관점도 없고, 그저 흐리멍덩하게 살아갈 뿐이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앞날을 추구하고, 좋은 가정과 직장, 좋은 생활을 추구하는 것 말고도 마음 깊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끊임없이 정리해야 할 사상 차원의 것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는 인생의 길에서 수많은 미지의 사건을 만나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어떻게 대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를 겪거나 잘못된 길을 가지 않도록 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생각하고 고민하지도 않는다. 또한 전에 겪었던 일에서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런 행동이 옳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앞으로의 길을 어떻게 걸어야 자신이 행복하고 마음 편하게 살지, 이번 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가치 있게 살지 알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나이가 60세가 되어도 그 자리에 앉아 옛날 생각만 한다. ‘내가 젊었을 때는 예쁘고, 재능도 많아서 쫓아다니는 사람도 많았지! 아휴, 내가 젊었을 때는….’ 하면서 계속 왕년에 잘나갔던 일,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만 언급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인생에 관계된 문제, 사람이 걸어가는 길과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계된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 여러 종류의 일을 대할 때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살든 사상의 경지가 높아지거나 사상에 깊이가 생기지 않고, 정신 세계가 풍부해지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참된 경험이 없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직접 접해 보면, 그는 스무 살 때는 무척 미숙하고, 단순하며, 혈기가 왕성하고 성격도 꽤 거칠다. 서른 살이 되어도 여전히 그 모양이고, 쉰 살이 되어도 말하는 수준이 여전히 그대로라서 간단한 말 몇 마디밖에 못 한다. 얼굴에 검버섯과 주름이 늘고 흰 머리도 늘어나는 등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지만, 무슨 사상 관점이랄 것도 없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도 늘 할 말이 없다. 그는 세월을 헛되이 살았고 성장하지 않았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의 생활은 이렇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의 모습은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을 것이다. 이십 대에 막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을 때나 서른 살, 쉰 살이 되어서나 똑같다. 전혀 성장하지 않고, 하는 말도 여전히 그 말이 그 말이다. 단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얼마간 일을 체험하고 글귀와 도리를 좀 깨달으며 영적 용어도 비교적 완전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될 뿐, 진정한 체험적 인식도 거의 없고, 사상도 여전히 깊이가 없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하지 않고,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인식도 늘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인식도 늘지 않는다. 이것은 달라지지 않은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기억에 기대, 혹은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글귀와 도리, 영적 용어를 좀 축적하더라도 그것은 변화도 아니고, 성장도 아니며, 더 나아가 수확도 아니다. 자질이 부족한 부류는 바로 이런 모습을 보인다. 커다란 변화와 굴곡, 실패와 좌절을 아무리 많이 겪더라도 아무런 교훈이나 경험도 얻지 못하며, 유익이 되는 것을 전혀 거두지 못한다. 일이 지나가면 그냥 지나간 것이고, 단지 하나의 과정을 겪었을 뿐,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다. 이런 부류는 정말 가련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감식력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이런 부류는 자질이 형편없다고 할 수 있으며,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어떠한 변화도 없다.
감식력은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갖추기 어려운 능력이다. 그러니 자질이 없는 사람은 아예 감식력이 없어서 감상할 줄도 모르고, 감별은 더더욱 할 줄 모른다. 어떤 사물에 대해 네가 자신의 사상 관점을 밝히면,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멍하니 듣기만 하고 반응이 없다. 그는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도 사상 관점이 있다고? 나는 왜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 설령 조금 알아들을 수 있다 해도 그는 그것을 단순히 글귀와 도리, 공식으로 간주하고 듣는다. 그러나 자질이 없는 사람은 누군가 거기에 담긴 사상 관점, 문제의 본질, 사람이 가져야 할 입장을 교제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저 조금 심오하다고만 느낄 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사상과 인식을 교제하면 할수록 그는 ‘이 평범한 일이 어쩌다 이렇게 복잡해졌지? 나는 왜 어떤 사상 관점, 어떤 입장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거지? 무슨 입장이라는 거야?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이 칭찬해 주실 텐데 왜 믿을수록 복잡해지는 거지? 당신 말대로라면 아무도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가는 거잖아!’라며 어리둥절해한다. 네가 볼 때 이런 부류와 소통할 수 있겠느냐? (소통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부류는 소통이 안 될 뿐만 아니라 터무니없는 말을 하기도 한다. “당신은 그 사상 관점이 그렇게 훌륭하고 옳다는 건가요? 제가 보기에는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아요! 사람은 언제나 돈이 없으면 안 되고, 당연히 잘 먹고 좋은 걸 누려야 해요. 돈도 없고 맛있는 것도 못 먹으면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나요?” 무슨 이런 논리가 다 있느냐? 그는 말한다. “당신은 왜 맨날 인생 얘기, 사람의 가치관, 사상 관점, 사람이 가는 길 얘기만 하고, 먹고 입는 얘기는 안 하나요? 어떻게 몸을 관리해야 본분을 잘 이행할 수 있는지는 왜 얘기하지 않죠?” 그는 속으로 이런 것만 생각하는데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이런 부류와는 소통할 수 없다. 그와 소통하면 그는 돈 버는 얘기만 한다.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일, 세상을 추구하는 일, 평생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누리는 것을 인생의 큰일로 여기며, 인생에서 걸어가야 할 길로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으며 무엇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는 그의 사상과 의식 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을 몇 년 믿든 결국 밥은 먹고 살아야 하며, 잘 살려면 돈 없이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돈이 있어야 잘 지낼 수 있고, 돈이 없으면 잘 지낼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이런 사람은 치우친 사람이다. 치우친 사람은 올바른 사상 관점이 없으며, 마치 영혼이 없는 사람과 같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부류의 삶이 개, 돼지와 무슨 차이가 있느냐? (차이가 없습니다.) 네가 강아지와 고양이를 교육해서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으라고 하면 그것들이 알아들을 수 있느냐? (알아듣지 못합니다.) 개는 기껏해야 무슨 말을 알아듣느냐? “앉아.”라고 한 다음 고깃덩이를 하나 주면 개는 그것을 기억한다. 그랬다가 다음에는 “앉아.”라고 외치기만 하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잽싸게 앉으며 고기를 주기를 기다린다. 개는 이런 기계적인 동작을 기억할 수 있으므로 앉으면 보상이 있다는 것만 알게 하면 말을 잘 듣는다. 개의 생각은 이렇게 단순하다. 너희가 볼 때 자질이 없는 사람의 생각은 동물의 생각과 얼마나 차이가 있느냐? (별 차이가 없습니다.) 동물은 매일 먹이만 먹고 나면 나가서 놀다가 밥때가 되어 부르면 곧바로 돌아온다. 묶어 두든 앉혀 두든 상관없다. 왜 그렇겠느냐? 먹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은 단지 그 먹이를 위해 명령을 기꺼이 따른다. 동물의 생각은 이렇게나 단순하다. 자신에게 유리한 규칙이나 공식 하나만 지키면 충분하고,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동물에게 부여한 본능이 바로 이런 것이고, 동물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으며, 별다른 부탁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이나 미래도 고려할 필요가 없고, 종착지나 자신의 책임과 의무도 고려할 필요가 없으며, 어떤 길을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등도 고려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다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여러 가지 본능을 부여하고 생명이 되는 진리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요구 기준이 있다. 그러니 사람은 그런 문제를 생각해야 하며, 그래야 진리를 얻어 생명이 되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것이 사람이 가져야 할 책임과 의무이며, 물론 사람의 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네가 만약 이런 권리를 활용할 줄 모르거나 문제를 생각하는 이런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네 자질이 형편없다는 뜻이다. 사람이라는 생물 등급 내에서 너는 자질이 부족한 생물인 것이다.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이 알려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며, 심한 경우에는 대항하거나 비웃고, 빈정대고, 심지어 비판하기까지 한다. 자질이 이 정도로 형편없다면 그것은 자질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질이 없는 사람이 체험 간증문을 한 편 보았는데 누군가 “그 글은 어떤가요?”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주 좋아요. 각 단락이 정확히 나뉘어져 있고, 문장부호도 대체로 맞아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시간과 장소를 설명하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인물과 배경을 소개하고, 세 번째 단락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그 다음 클라이맥스와 결말로 이어져요.” 그에게 작가의 사상 관점을 얘기해 보라고 하면 그는 “사상 관점도 있나요? 그가 인용한 하나님 말씀이 바로 사상 관점이죠.”라고 한다. “그럼 그가 인용한 말씀이 적절했나요?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상 관점이 정확한가요?”라고 물으면 그는 모르겠다고 한다. “글쓴이가 얘기한 인식이 참되고 실제적인가요? 그 인식은 도리인가요, 아니면 실제에 가깝나요? 사람에게 도움이 되거나 가치가 있나요? 읽고 나면 보탬이 되고 유익을 주나요?”라고 다시 물어도 그는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고 볼 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형편없는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사상 관점의 잘못된 점이 무엇인지, 어떤 말이 실제적이고 어떤 말이 실제적이지 않은지 교제해 주어도 그는 모르고, 맞춰 보지 못한다. 이는 자질이 없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교제해 주어도 모르니 자질이 없는 것 아니냐? 어떤 교회 리더는 교회에 악인이나 불신파가 나타나면 처리할 줄 모른다.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해서 예를 들어 달라고 하고, 예를 들어 주어도 여전히 처리할 줄 몰라 이런 말이나 한다. “당신이 좀 가르쳐 주세요. 그 사람을 대체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그를 일반 교회로 보낼까요, 아니면 B조로 보낼까요, 아니면 제명할까요? 어떻게 교제해 주어야 하나요? 당신이 한 마디 한 마디 교제해 주시면 녹음해 두었다가 그대로 가서 처리할게요. 그 정도는 저도 할 수 있어요.” 이런데도 그에게 무슨 원칙을 교제한다는 말이냐! 그는 예를 들어줘도 알아듣지 못하고 처리할 줄 모른다. 이런 사람은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는 끝까지 물어본다. “제가 지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가서 처리할게요.” 그 일을 어디로 가서 처리해야 하는지,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해야 잘 처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해야 철저히 처리하는 것인지 모두 알려 주면, 그는 이해한 것 같다가도 여전히 처리할 줄 몰라서 결국 다른 사람이 그와 함께 협력해서 처리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너무 멍청하고 자질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춤을 배우는 사람에게 어떤 춤의 스텝이 아주 좋으니 영상을 보고 따라 하라고 한 뒤 며칠 지나서 얼마나 익혔는지 물어보면, 어느 멍청한 사람은 어떤 스텝이 좋은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는 설령 교재가 있어도 익히지 못하고, 어떤 동작이 좋은지, 어떤 동작이 유용한지 모르며, 선택할 줄도 모른다. 결국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수를 낸다. “당신이 스텝을 몇 개 지정해 주고 제가 그대로 따라하면 되겠네요.” 그도 요령은 있다. 원칙은 모르지만 잔꾀는 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로봇 아니냐? 지식도 있고 교육도 받았지만 그에게는 감식 능력이 없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없는 것이다. 그는 무엇을 배우라고 해도 왜 그것을 배워야 하는지 모르고, 배우지 말라고 해도 어디가 안 좋은지, 왜 배우지 말라고 하는지 모른다. 알려 줘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자질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물을 독립적으로 인지하는 능력, 옳고 그름을 독립적으로 변별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자질이 없는 것이다. 소나 말처럼 늘 다른 사람이 끌고 가야 한다면 그건 도구나 마찬가지가 아니냐? 자질이 있다면 남에게 끌려다니겠느냐? 도대체 머리는 두었다 어디다 쓰느냐? 네 머리는 쓸모가 없다. 정확히 말해서 너는 자질이 없으니 남의 말을 들어야 하고 남에게 끌려다녀야 한다. 너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부류는 업무를 아무리 오래 배우고, 그 업무와 관련된 원칙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파악하지 못하며, 결국 그런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고 시행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부류가 바로 자질이 가장 형편없는 부류이며, 이는 곧 자질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 사람이 별다른 감식력도 없고, 본분을 이행할 때 항상 당신 말만 들으니까 자질이 부족한 줄 아시겠지만, 사실 그는 진리를 이해하는 측면에서만 자질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이 걸렸다면 어떻게든 손해 보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려 하죠. 그런 일에는 무척 영리해요. 절대 멍청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교회에서는 멍청해 보일지 몰라도 세상으로 돌아가면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생각도 있고, 자기만의 작품도 있고, 어쩌면 약간의 성취를 이루어 낼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제멋대로 행동해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속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더러 자질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바깥 세상에서는 나도 남들처럼 돈 벌어서 먹고 살 수 있고, 남들처럼 성공할 수 있어. 꼭 남보다 못한 건 아니라고!’ 바깥 세상에서 모든 사물을 판단할 때 진리 원칙이 있느냐?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삼느냐? 그렇지 않다면, 설령 바깥 세상에서 네 작품이 인정받는다 해도 네가 자질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화면의 색상, 구도, 빛, 인물 비율 등 여러 면에서 언뜻 보기에 꽤 훌륭하고 괜찮아 보이는 그림을 그리지만, 이들이 하나님 집의 옛 성인들을 그리면 문제가 생긴다. 이 화가가 예전에 세상에서 그린 그림은 꽤 잘 팔리고 사람들도 매우 좋아했는데, 그가 그린 아브라함, 욥, 그리고 노아는 왜 이렇게 어색해 보이느냐? 어째서 그는 서로 다른 세 시기의 인물을 한 집안 사람처럼 그린 것이냐? 이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로 이목구비 골격에는 그 인종의 특징이 있어야 한다. 각 인물의 성격은 모르더라도 최소한 그 인종의 골격 구조와 특징이 어떤지는 파악해야 한다. 어떤 시기의 인물을 그리든 그 인종의 특징이 부각되어야 하고, 모발, 이목구비, 눈동자 색, 얼굴형 등을 통해 식별이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그가 그린 각기 다른 시기의 인물들은 어째서 나이는 다른데 골격이 하나같이 그 인종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냐? 모두 긴 얼굴형에 젊은 사람은 주름이 적고 머리카락이 검으며, 나이 든 사람은 주름도 많고, 피부도 좀 칙칙하고, 흰 머리도 많다. 이 몇몇 인물의 특징은 대체로 모두 크고 긴 얼굴에 키가 크고 근육과 골격이 튼튼하다. 내 말은 이 사람들이 어째서 모두 똑같이 생겼냐는 것이다. 특징이 없고 너무나 비슷하다. 그림 그린 사람 스스로가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마 이런 그림을 많이 그리다 보니 표현 기법이 너무 익숙해지고 스타일이 고정되어 버려서 인물을 그릴 때 남자는 거의 그런 얼굴로 그리고, 각기 다른 인물의 얼굴 특징을 잡아내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감식 능력이 조금 부족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는 다 그리고 나서도 자기가 그린 얼굴이 그 인종의 골격 특징에 부합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그 인종의 골격 특징을 확실히 모른다. 너희가 볼 때 그는 이쪽 방면에서 자질이 보통이냐, 아니면 부족하냐? (자질이 부족합니다.) 다른 사람이 건의하면 바로잡을 수 있겠느냐? 내가 한 번 건의를 했지만 나중에 그가 그린 그림을 봤더니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러면 더 이상 얘기할 수가 없다. 얘기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식력에 관련된 문제에서 각각의 자질에 따른 사람의 모습은 이렇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감상은 물론 감별도 할 줄 안다. 자질이 좀 더 나은 사람은 올바른 사상 관점을 보았을 때 이를 권장하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공급할 줄 알고, 잘못된 사상 관점을 보았을 때는 분별하고 바로잡을 줄 안다. 자질이 보통인 사람은 어느 정도 감상 능력은 있지만 감식력이 없다. 즉 사상 차원의 것을 변별할 줄 모른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사상 차원의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별 능력은 논할 형편이 못 된다. 자질이 없는 사람은 이런 일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설령 누군가 알려 주어도 그 안에 언급된 사상 관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듣지 못한다. 그것은 그에게 마치 외계 행성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아서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감식력 방면에서 서로 다른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내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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