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7) 제 1 부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11가지 기준

지난번 예배 시간에는 자질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한 사람의 자질을 어떻게 판단하는지에 대해 교제했다.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총 몇 가지를 열거했느냐? (열한 가지를 열거했습니다.) 그 열한 가지를 다시 한번 얘기해 보아라. (학습 능력, 이해 능력, 받아들이는 능력, 수용 능력, 인지 능력, 판단력, 변별 능력, 대처 능력, 의사 결정 능력, 감식력, 창의력입니다.) 이 열한 가지 항목은 각각 사람의 종합적인 자질을 판단하는 요소들 중 하나이다. 지난번에는 총 열 가지를 교제했으며, 감식력 항목까지 교제했다. 그리고 각 항목별로 자질이 좋은 경우, 보통인 경우, 부족한 경우, 자질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는 모습을 교제했다. 자질이 없는 부류는 기본적으로 특기가 없고, 진정한 취미와 기호도 없다.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주관이나 판단력도 없고, 사람과 일, 사물을 변별하는 능력도 없으며,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별다른 수용 능력이 없다. 물론 대처 능력이나 의사 결정 능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부류는 특기가 없기 때문에 감식력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제10조 감식력

감식력에 대해서는 지난번 예배 때 관련 내용을 일부 교제했다. 감식력은 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사람과 일, 사물을 감별하고 감상하는 능력을 말한다. 물론 감별은 사람이 말하는 선별을 뜻하며, 이는 곧 사람과 일, 사물의 사상 관점과 입장, 그리고 그것이 주장하는 주제를 변별하는 일종의 능력을 말한다. 이 감식력은 주로 일부 문제의 사상 관점에 관계된다. 즉 사상 차원의 일부 내용과 관련이 있다. 만약 이런 것들에 대해 변별 능력과 감상 능력이 있다면, 너는 감식력이 있는 사람이다. 반면 사상 관점에 관계된 문제를 볼 줄도 모르고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한다면, 너에게는 감식력이 있다고 할 수 없고, 감식력이라는 영역은 너와는 무관한 것이 된다. 하지만 어떤 사물을 맞닥뜨렸을 때, 네가 그 일의 출처와 목적을 변별할 수 있고, 그 사물이 전달하고 주장하는 사상 관점이 옳은지 그른지 변별할 수 있고, 나아가 이런 사상 관점이 타당한지, 긍정적인 사물에 속하는지 부정적인 사물에 속하는지, 사물의 발전 법칙에 부합하는지, 혹은 하나님이 만든 만물 법칙의 현상에 가까운지 변별할 수 있다면, 만약 너에게 이런 감식력이 있다면, 그것은 네 자질이 꽤 좋다는 증거이다. 만약 그 사물이 주장하는 사상 관점이나 제창하는 방향과 목표가 그릇되고, 치우친 부분이 있고, 인성이나 사고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나 하나님이 만든 만물의 객관적 법칙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는데, 네가 그 부분들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면, 옳은 부분과 그릇된 부분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너에게 감식력이 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네 감식력이 높다는 것은, 너에게 이런 감식력이 있다는 것은 너라는 사람의 자질이 좋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너는 교회 형제자매가 쓴 글을 보면 그가 가진 사물에 대한 인식, 사람의 본성 본질에 대한 인식,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그 안에 담긴 관점이 치우치지는 않았는지, 그가 지닌 시각과 입장이 올바른지와 같은 점들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그 안에 담긴 사상 관점이 올바르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도 있고, 그 안에 담긴 사상 관점이 그릇되고 터무니없다면 그것을 변별해 내고 바로잡을 수도 있다. 너는 이런 사상 관점이 왜 잘못되었는지, 그것이 어떤 사고의 논리에 어긋나고 어떤 긍정적인 사물의 객관적 법칙에 어긋나는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깊게는 그것이 하나님이 인류에게 경고한 어느 방면의 진리 원칙에 어긋나는지도 간파할 수 있다. 이는 네가 자질이 좋다는 뜻이다. 한편으로 너는 그 글에서 배울 만한 긍정적인 부분으로 어떤 것이 있는지 알고, 또한 그것이 사람에게 어떤 긍정적인 방향성, 긍정적인 공급과 도움, 붙들어 줌을 제공하는지를 평가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안에 담긴 어떤 부정적이고, 좋지 않고, 치우친 부분, 어떤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이 사람의 생각을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끄는지, 사람에게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고, 이런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부분들을 어떻게 바로잡고 일부 모자란 점을 어떻게 채워야 사람에게 더 큰 유익이 될 수 있는지도 다 안다. 이것이 바로 감식력이 있는 모습의 한 측면이다. 예를 들어 춤을 배운다고 할 때, 너는 하나의 무용 작품을 보면 거기서 어떤 동작들이 인간적이며 인성에 담긴 사상과 바람을 표현했는지 발견할 수 있고, 그 동작들이 인성의 관점에서 출발하고 인성에서 비롯되었으며,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의 필요에 무척 부합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어떤 동작, 표정, 제스처의 표현 방식 및 그 안에서 주장하는 사상이 긍정적인지, 사람의 정신세계를 채워줄 수 있는지 등을 볼 수 있다. 너는 단지 춤을 추거나 간단한 동작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용 작품에서 그것이 주장하는 사상을 볼 줄 알고, 그 안에 담긴 사상의 함의, 그리고 그 사상의 지도 아래 사용되는 무용 형식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이 무용의 형식과 제스처가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것, 네가 배우고, 받아들이고, 또 거울로 삼아야 하는 것이고, 네가 그런 것을 볼 줄 알고 배울 줄 안다면, 그것의 긍정적인 부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감식력을 갖춘 모습이다. 물론 너는 그 안에서 치우치고 인성에 부합하지 않는 사상이 나타나더라도 알아차릴 수 있고, 그것의 잘못된 점도 변별할 수 있고, 그러한 표현 방식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그 안에 담긴 지도 사상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줄 알고 변별할 줄 안다면 이 역시 감식력을 갖춘 모습이다. 이렇게 두 가지 예를 들어 보니 감식력이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느냐? 자질이 좋고 감식력이 있는 모습을 판단하는 한 가지 기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네가 어떤 사물을 보고 그것이 주장하는 사상 관점, 혹은 그것이 고수하는 관점과 입장은 알지만, 그 안에 담긴 사상 관점의 옳고 그름은 모른다면 너에게는 변별 능력이 별로 없는 것이다. ‘괜찮은 춤이군. 괜찮은 글이야. 영화가 나쁘지 않네. 예술성도 있고, 표현 방법도 좋아.’ 너는 단지 이렇게밖에 느끼지 못하고, 단지 업계의 관점이나 지식의 각도에서만 바라보고 파악할 뿐, 그 사물이 주장하는 사상 관점이 옳은지 그른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확신하지 못한다. ‘이런 사상 관점이 진리에 부합할까? 이런 모습이 인성에 맞을까? 사물의 발전 법칙에 맞을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이런 일이 발생할까? 이것이 긍정적인 사물일까?’ 이렇게 말끝마다 ‘까’라는 글자 뒤에 물음표만 단다면, 이는 변별 능력이 없는 것이다. 너는 단지 그 안에 담긴 기술 업무나 지식 차원의 내용만 알 뿐, 사상 차원의 내용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은 없다. 이는 자질이 어떤 것이냐? 자질이 보통인 것이다. 비록 너에게 감식력은 약간 있지만, 네 감식력은 단지 기술 업무의 각도에서 작가 본인의 사상을 감상하는 수준에만 머물 뿐이다. 너는 단지 작가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깨닫거나 이해할 수 있을 뿐, 그가 주장하는 사상 관점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 긍정적인 사물인지 아닌지는 감별할 줄 모른다. 이런 사상 관점이 나타날 경우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클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지 못한다. 이런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런 부류의 자질은 보통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감상할 줄만 알지 감별할 줄은 모른다. 따라서 감식력을 갖춘 자질에는 이르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변별 능력이 부족하다. 그는 어떻게 하든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그의 관점과 태도는 몹시 모호하고 조금도 뚜렷하지 않다. 누가 뭐라고 하든 다 받아들이고, 정확한 관점과 실행 원칙이 없어서 결국 어떤 본분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어떤 사역을 하든 그는 사역 과정에서 나타나는 각종 사상 관점의 긍정과 부정, 옳고 그름의 경계가 특히 모호하고 불분명하다. 누가 “이런 사상 관점을 가지는 것이 옳은가요?”라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의 사상은 모두 자유로워야 하고 억압되면 안 됩니다. 저마다 다양해야 하고, 어떤 사상이든 드러내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각종 사상의 존재에 대해 이런 관점을 보인다. 즉 어떤 사상 관점이든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모두 허용되어야 하고 다양하게 존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한, 찬성하는 대중이나 개인이 있는 한, 그 사상 관점은 존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런 사상 관점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이방인의 말로 표현하면 언제나 회색 지대에 머물며 경계가 없다. 이런 사람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엄격한 기준과 준칙이 없다. 별다른 입장이나 진정한 사상 관점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참으로 장담하기 어렵다. 자질이 부족한 것은 골치 아픈 일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두 가지 사상 관점을 동시에 마주하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모르고 강경한 쪽을 따른다. 이것이 바로 입장이 없는 것이고, 이런 자가 바로 머저리이다. 그의 인간적인 추구와 인품이 어떤가에 관한 얘기는 접어 두고, 감식력만 놓고 본다면 이런 부류는 자질이 보통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의 자질은 사상 차원의 것을 감상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지만, 그에게는 사물의 진위를 감별하거나 옳고 그름을 변별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의 자질을 보통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는 사물을 감별하는 사상 관점과 입장이 혼탁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근거나 준칙으로 삼지 않으므로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나쁜 일을 할 수도 있다. 상대적으로 올바르고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나 인성에 보조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일을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람에게 해가 되거나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니 이런 부류 역시 자질이 보통밖에 안 된다. 예를 들어 한 영화에서 감독이 주장하는 사상이 상대적으로 긍정적이고 인간적이라면, 인성의 필요에 비교적 부합한다면, 지금 이 사회에서 그 필요성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지는 민주, 자유, 인권 같은 긍정적인 것들이라면, 감독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인간의 사상 깊숙이 존재하는 이런 것들을 발굴하여 사람들에게 인식시킬 때 자질이 보통인 사람은 이 영화를 보고 이것이 좋은 것이고 옳은 것이며 지금 사회에서 비교적 유행하고 사람들이 떠받드는 사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감독이 주장하는 사상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이 영화에서 감독이 비교적 소수에게 통하는 사상도 함께 주장한다면, 그것이 대다수 성인이나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생각하기 힘든 극단적인 사상이고, 심지어 사물의 정상적인 발전 법칙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거나, 혹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 일이라고 해도 감식력이 보통인 사람은 이를 보고 분별할 줄 모른다. 그는 생각한다. ‘감독이 주장하는 이 사상도 괜찮은걸. 좋아하고 공감하는 사람은 소수이지만 이 사상도 지금 사회에서 존중받아야 해. 공개적으로 모두에게 알리고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고.’ 보다시피 한 영화에서 감독이 주장하는 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든 그는 다 받아들이고, 심지어 무척 마음에 들어 한다. 그에게는 옳고 그름에 대한 뚜렷하고 명확한 구분이 없다. 따라서 그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긍정적인 요소도, 부정적인 요소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받아들인 다음에는 활용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사상 관점을 표현하는 일부 작품에 이를 적용하거나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주입하며 영향을 끼친다. 물론 긍정적 요소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부정적 요소는 사람에게 틀림없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이런 부류는 좋은 일을 하는 동시에 나쁜 일도 저지를 수 있다. 말하자면, 네가 굶주렸을 때 그는 너에게 죽 한 그릇을 가져다주지만, 그 안에 지저분한 모래가 섞여 있어서 오래 먹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 그가 가져다준 음식에는 파리나 모기 같은 것들이 섞여 있어서 맛은 괜찮지만 몸에 해로운 병균이 섞여 있다. 비록 그는 너를 배불리 먹여서 배고픔을 해결해 주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네 몸에 병폐를 몰고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분별력이 없으면, 작품 한 편을 본 다음 그로부터 잘못된 사상 관점을 받아들여 미혹되고 해를 입을 수 있다. 따라서 변별 능력을 갖추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이것이 보통 자질을 갖춘 사람이 감식력 분야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다음 등급은 바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감식력이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일을 보든 어떤 사상 관점을 갖추어야 올바른지도 모르고, 어떤 각도와 입장에 서야 맞는지도 모르며, 심지어 그 일에서 사람들이 또 어떤 잘못된 사상 관점들을 지니고 있는지, 사람들이 이전에 어떤 사상에 지배되어 그 일을 대했는지도 모른다. 이는 사고의 논리에 관계되는 부분으로,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이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감상을 논할 수준이 못 된다. 감상할 줄 알아야만 어떻게 감상했는지, 감별 능력이 있는지를 뒤이어 논할 수 있는데, 감상조차 할 줄 모른다면 감별 능력이 있고 없고는 말할 나위조차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글을 한 편 읽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은 문체도 화려하고, 표현도 무척 유려하고, 위트가 있네요. 글을 참 잘 썼어요!” 누군가 묻는다. “작가가 이 글을 써서 표현하려는 사상 관점은 무엇인가요? 이런 부류의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그는 어떤 태도를 보이나요?” “아, 태도라고 할 게 있나요? 사상 관점과도 관련이 있어요? 그런 건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어쨌든 제 생각에는 그가 글을 참 잘 쓴 것 같아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상대가 또 “그렇다면 당신은 그가 전하는 사상 관점 중에 어떤 게 마음에 들었나요? 어떤 부분, 어떤 이야기에 그의 어떤 사상 관점이 담겨 있나요? 글의 중심 사상이 무엇인지 아세요?”라고 물으면 그는 말한다. “아직 파악하지 못했어요.” 두세 번을 더 읽어도 글재주가 좋아서 글을 참 잘 썼다고만 느낄 뿐, 글쓴이가 표현하려는 사상 관점이 무엇인지는 파악하지 못한다. 그의 자질이 어떤지 드러나지 않았느냐? 만약 그가 글을 읽고도 글에서 나타내려는 사상 관점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다면, 감식력이 없고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글에서 분명한 말로 올바른 사상 관점을 이미 설명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의 자질이 형편없다는 증거이다. 그는 단지 “글을 참 잘 썼군요. 언어도 유창하고 문체도 괜찮아요.”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른다. 글에서 전달하는 사실이 객관적인지 아닌지, 독자에게 어떤 느낌을 전하는지, 독자가 배우고 귀감으로 삼을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작가 본인에게 물어봐야 한다. 이것은 그가 자질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입증한다. 그의 부족한 자질은 어디에서 드러나느냐? 바로 사상 관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사물을 감상할 줄도 모른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당연히 사물을 감별하는 일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한마디로 감식력이 없다. 감식력이 없는 사람이 자질이 보통인 사람보다 부족한 부분은 바로 그가 단순히 감별 능력만 없는 것이 아니라 감상하는 능력조차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상 관점, 사고 논리, 혹은 인성에 부합하는지, 사물의 객관적 법칙에 부합하는지와 같은 차원에 관계된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감상할 줄도 모른다. 그는 글에서 사상 관점을 밝혔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하니 사상 관점의 옳고 그름은 더욱 분별할 줄 모른다. 단지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글자, 지식, 기술적인 업무와 관계된 것들을 좀 읽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단지 읽고, 보고, 들을 줄만 알지 감상할 줄은 모르는 그런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런 부류는 자질이 부족하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기술적 업무나 지식 차원에 관계된 것에 대해서는 그나마 좀 얘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것이 어느 명사의 저작이고, 어느 명인의 명구를 인용했는지, 혹은 어떤 표현 방식을 참고했는지, 어느 분야의 기술 업무를 응용해서 이룬 것인지 이런 것들은 볼 줄 안다. 하지만 이런 업무 기술, 혹은 지식적 차원을 토대로 주장하고 전달하려는 이념, 그리고 그것을 설계하고 표현하는 이념, 근거, 원리가 무엇인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이런 부류가 지닌 한 가지 특징은 바로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생각할 줄 모르고, 하나의 사물이 일으킨 현상으로 그것의 근원과 본질, 그리고 그것의 미래 발전 방향, 사람과 일, 사물에 미치는 영향을 변별하고, 판단하고, 인식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이런 부류는 정상적인 사고 능력이 없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 그들이 터득할 수 있는 생활 경험은 너무나 제한적이고, 어떤 복잡한 일을 만나든 이해하거나 간파하지 못한다. 즉 어떤 사물에 대해 단지 겉으로 들리는 말, 겉으로 보이는 글자, 관련된 표면적 형식과 방식 정도만 생각할 수 있을 뿐, 더 깊은 차원, 예를 들어 여러 사물 사이의 관계, 논리, 상호 영향 등은 생각할 줄 모르고 생각해 내지도 못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잘 만큼 생각하고, 생각하다 우울해질 지경이 되어도 여전히 간파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한 사람에게 감식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려면, 그가 어떤 일을 맞닥뜨렸을 때 여러 가지 사물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연계, 혹은 상호 간에 미칠 수 있는 영향, 이룰 수 있는 후속 효과에 대해 몇 가지 가능성을 판단해 낼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만약 그 사람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다고만 얘기할 수 있고, 자신이 보고 들은 일을 한 번 서술할 수만 있을 뿐,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아무 문제도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정상적인 사고 능력이 없는 것이다. 사고 능력이 없는 사람은 감상 능력이 없고, 당연히 감식력도 없다. 그는 깊이 생각할 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이 점을 짚고 넘어가려 하겠느냐? 물질세계를 감상하는 각종 능력이 없는 부류는 자질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그는 깊이 생각할 줄 모르고 사고에도 논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도 없다. 진리는 한편으로는 현실 생활 속 여러 측면의 문제와 관련이 있고, 동시에 사람이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위해 실행해야 할 여러 측면의 원칙과도 관계가 있는 것은 물론,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각종 단일한 문제 혹은 복잡한 여러 가지 문제 및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는 더욱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진리를 얘기하든 상호 관련된 여러 가지 진리를 얘기하든 모든 진리는 하나의 규례가 아니라 한 가지 사물을 판단하는 하나의 원칙이자 준칙이다. 원칙과 준칙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1 더하기 1은 2’와 같은 규례나 공식이 아니다. 공식이 아니니, 사람이 현실 생활에서 어떤 일을 맞닥뜨릴 때, 이것이 인성의 어느 방면과 관련된 문제인지, 이 방면의 인성이 드러날 때 거기에 패괴 성품의 요소가 있지는 않은지, 같은 방면의 패괴 성품에 어떤 내적 상태의 표출이 있는지, 사람이 어느 방면의 진리를 실행하고 지켜야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묵상하고 구해야 한다. 사람은 이런 것들을 모두 깨달아야 한다. 만약 진리를 글귀로만 알고, 그 방면의 진리가 말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너는 비춰 볼 수도 없고 진리를 실행할 수도 없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다면, 너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 혹은 현실 생활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를 비춰 볼 수 없다. 거기에 몇 가지 진리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실행하고 진입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진리 원칙을 준수하고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는 것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인성 생활과 관계된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감상 능력도 없고, 아무런 사상 관점도 없다면, 사상 차원에 관계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에 대한 감상 능력도 없고, 감별 능력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면, 너는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너는 무엇으로 네 인성의 결함을 고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릴 것이냐? 진리에 대한 이해 능력이 없으면 눈앞에서 맞닥뜨리는 이런 일이 어떤 진리 원칙에 관계되는지도 모를뿐더러, 당연히 어느 방면의 진리 원칙을 준수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마구잡이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규례를 지키거나, 아니면 관념 상상대로 행동하거나 제멋대로 행동할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이런 몇 가지 모습을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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