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6) 제 1 부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11가지 기준
지난번 예배에서는 진리 추구 방면에 관계된 내용으로, ‘하나님과의 간극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내려놓기’라는 큰 주제에 대해 교제했다. 이 큰 주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사역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얘기했는데 사람의 선천적인 조건과 인성, 패괴 성품에 관련된 주제였고, 여기에서 자질 측면에 관한 문제를 언급했다. 지난번에 자질 측면에 관한 문제를 조금 교제하고 사람의 관념들을 일부 해결했는데 교제를 듣고 나서 자질이란 무엇인지 정확한 정의를 알게 되었느냐? 자질이 도대체 무엇이냐? 자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한 사람의 자질이 좋은지, 보통인지, 아니면 부족한지는 어떻게 판단하느냐? 어떤 측면들을 근거로 판단하느냐? 이런 문제들에 대해 구하고 묵상해 보았느냐? (묵상해 보았습니다. 지난번 예배 때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는 그의 일 처리 효율과 성과를 보고 판단한다고 교제하셨습니다. 전에는 이 방면에 대해 그다지 잘 인식하지는 못하다 보니 특기와 자질을 혼동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학업 성적이 아주 뛰어나거나 몇 개 국어에 능통하면 자질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교제를 듣고 비로소 어떤 것이 진정으로 좋은 자질이고 어떤 것이 단지 특기에 불과한 것인지 분명히 판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겉으로는 무척 영리해 보이지만 본분 이행 효율이 낮고 줄곧 진리 원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질이 비교적 부족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람의 일 처리 효율과 성과로 사람의 자질을 판단한다는 것은 포괄적으로 말해서 그런 것이고, 한 사람의 자질을 판단하는 방법에는 그의 일 처리 효율과 성과 이외에도 구체적인 판단 기준이 더 있다. 첫 번째는 한 사람의 학습 능력을 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해 능력, 세 번째는 받아들이는 능력, 네 번째는 수용 능력, 다섯 번째는 인지 능력, 여섯 번째는 판단력, 일곱 번째는 변별 능력, 여덟 번째는 대처 능력이다. 아홉 번째는 집행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의사 결정 능력이고, 열 번째는 감식력, 열한 번째는 창의력이다. 다 숙지하였느냐? (숙지했습니다.) 전부 몇 가지이냐? (11가지입니다.) 한 번 읽어 보아라. (첫 번째는 학습 능력, 두 번째는 이해 능력, 세 번째는 받아들이는 능력, 네 번째는 수용 능력, 다섯 번째는 인지 능력, 여섯 번째는 판단력, 일곱 번째는 변별 능력, 여덟 번째는 대처 능력, 아홉 번째는 의사 결정 능력, 열 번째는 감식력, 열한 번째는 창의력입니다.) 한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는 포괄적으로 봤을 때 그의 일 처리 효율과 성과라는 두 가지 방면으로 판단하고, 그의 일 처리 효율과 성과가 어떤지는 구체적으로 이 11가지 기준에 따라 종합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한 사람의 자질이 과연 어떤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물론, 한 사람의 자질이 어떤지를 보려면 우선은 각 방면의 능력이 어떤지를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그런 다음 그의 일 처리 효율과 성과를 살펴봐야 한다. 만약 그가 각 방면의 자질과 능력을 갖추었다면 그는 분명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일할 것이다. 한 사람이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일한다면, 이 11가지 기준에 따라 가늠했을 때 각 방면의 능력 역시 좋을 것이다. 이 11가지 능력은 어느 것도 그것 하나만으로는 한 사람의 자질이 좋은지 나쁜지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으니,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물론, 11가지 능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가장 중요한 것은 판단, 변별, 그리고 대처, 의사 결정과 같은 능력들이다. 이것은 사람이 한 측면의 이론을 이해한 후 일을 처리하는 능력에 관계되며, 나머지는 모두 받아들이고 학습하는 측면, 즉 사람의 두뇌 차원에 관계된 능력이다. 이제부터는 이 11가지 능력에 대해 하나씩 교제해 보자.
제1조 학습 능력
첫 번째는 학습 능력이다. 학습 능력은 단순히 한 방면의 지식을 배우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언어나 한 방면의 기술 업무를 배우거나 혹은 한 방면의 새로운 사물을 배우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경우도 모두 학습 능력의 범주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한 가지 기술 업무를 배우는 경우,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반년만 배우면 기본적으로 업무를 파악해서 해당 기술 업무를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네가 반년을 배워서 업무를 파악하여 독자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학습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네가 배우는 기간이 보통 사람의 두 배라면, 그러니까 반년을 배워도 파악하지 못해서 반년을 더 배워야 한다면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학습 능력과 관련해서 만약 일반적인 기한 내에 그 기술 업무나 지식을 파악할 수 있다면 자질이 보통이거나 그 이상이다. 하지만 만약 그 기한을 넘겨서 다른 사람들의 두 배, 심지어 세 배의 시간을 들여야 그 방면의 기술 업무나 지식을 배울 수 있다면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보통 사람보다 두세 배의 시간을 더 들이고도 익히지 못할 정도로 학습 능력이 없을 경우, 그 자질이 어떻겠느냐? 학습 능력이 없으면 정상인 자질의 일반적인 기준에 미달하여 자질이 부족하다 못해 없다고 할 수 있다. 자질이 없다는 것은 어떤 범주로 귀결되겠느냐? 아무런 학습 능력이 없는 지적 장애인, 백치인 것이다. 이것이 학습 능력 방면에 관한 내용이다.
제2조 이해 능력
두 번째는 이해 능력이다. 이해 능력은 하나의 사물을 보거나 혹은 주변에서 늘 접하는 사물을 대할 때 사람이 그 안에 담긴 원칙이나 요령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네가 한 가지 업무 기술을 배울 경우, 이론적인 수업도 듣고 실무적인 시범도 보고 난 후, 정상적인 시간 내에 그 안에 담긴 요령과 원칙을 알아낼 수 있다면, 너는 자질이 좋고 이해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춘 셈이다. 그런데 만약 네가 금방 이해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다시 한번 교제해 줘도 알아듣지 못하고, 여러 번 알려 줘도 거기에 담긴 요령과 원칙이 과연 무엇인지 모른다면, 이해 능력이 부족한 것이다. 아마 시간이 흐르면 너 스스로 실제 업무를 통해 서서히 모색해 보면서 조금 알게 될 수도 있지만 단지 그뿐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체험하든, 그게 3년이든 5년이든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범위에 머물고, 일을 처리할 때는 규례나 규정, 제도를 지키며, 그 안에 담긴 원리를 이해해서 그것을 실제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이는 이해 능력이 부족한 것이며, 이런 사람은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 사역을 하는 어떤 사람에게 네가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었는데 그는 교제를 듣고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 내용에 대해 아무런 의혹도 품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에 담긴 원칙도 깨닫지 못한다. 특히 현실 생활이나 본분 이행 과정에서 각종 문제나 일부 특수한 상황에 부딪힐 경우, 어떻게 원칙을 적용해야 하는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어떻게 원칙에 따라 대하고 처리해야 하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진리에 대한 교제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해서 언제나 예를 들어 달라거나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요청한다. 네가 예를 들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면 그제서야 조금 이해한다. 그러나 만약 좀 더 깊게 교제하면 또 알아듣지 못하고, 예를 하나 더 들어 달라고 한다. 그가 자꾸만 예를 들어 달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네가 현실 생활에서 비슷한 상황을 예로 들어 설명해 주면, 이를 통해 행동 방식이나 규례를 기억해 두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바로 이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현실 생활과 본분 이행에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른다. 네가 어떻게 교제하든, 구체적인 사례를 얼마나 소개하고 얼마나 많은 원칙을 분명히 설명하든, 나아가 특수한 상황의 처리 원칙까지 얘기한다 한들 그는 아무리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네가 하는 말을 이론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현실 생활에서 마주하는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른다. 이것이 바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무리 얘기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일 처리의 효율과 성과도 떨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의 이해 능력이 부족하다면 그의 일 처리 효율과 성과도 틀림없이 떨어질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이 어떤 원칙에 관련되는지 모르고 현실 생활에서 원칙을 어떻게 적용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또 한 부류가 있는데, 다른 사람의 교제가 자세하고 구체적일수록 엉망으로 듣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거짓 리더와 적그리스도를 분별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 집의 교제를 듣고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왜 이해가 안 갈까요? 원칙도 교제하고, 예도 들고, 특수한 상황도 들어 주었는데, 왜 듣고 있으면 이렇게 혼란스러울까요? 도대체 무슨 소린가요? 어떤 부류를 처리하라는 거죠? 거짓 리더를 처리하라는 건가요, 아니면 적그리스도를 처리하라는 건가요? 그렇다면 우리 교회 리더가 적그리스도인가요? 사람이 좀 악해 보이던데, 그가 보이는 모습은 도대체 패괴 성품인가요, 아니면 인성이 좋지 않은 건가요? 그는 도대체 거짓 리더인가요, 적그리스도인가요? 저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그는 네가 교제한 진리 원칙이 무엇인지도 이해가 되지 않고, 들을수록 혼란스럽기만 하다. 맞춰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네가 얘기하는 주제가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다. 이것이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다 같이 한 가지 주제에 대해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교제를 나누는 자리라고 가정해 보자. 네가 자기 인식을 교제하면 상대도 자기가 이해한 바를 얘기하고, 네가 질문을 던지면 상대도 질문을 던진다. 전부 그 주제에 관한 내용이다. 자질이 없는 사람은 이런 토론을 들으면 이해하지 못하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다들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난 왜 못 알아듣겠지?’ 그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저마다 제기하는 정당한 질문과 그런 질문들을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까닭을 파악하지 못한다. 방관자보다도 못하다. 자질이 있는 사람은 설령 옆에서 지켜보더라도 누가 맞고 틀렸는지, 누군가 제시한 질문의 취지가 무엇인지, 깊이 있는 질문인지 아닌지, 그 질문의 해답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것들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 어떤 일을 교제하면, 그는 다 듣고도 분별할 줄 모른다. 상대가 한 말이 진짜인지, 객관적인지 모르고 그 일의 배경과 본질이 무엇인지도 간파하지 못하는 등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왜 이런 주제에 관해 교제해야 하는지, 그 주제에 관계된 원칙이 왜 자꾸만 강조되는지, 누구의 질문이 그 원칙과 관계가 있고 누구의 질문이 관계가 없는지, 이런 것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 채 듣다가 졸고, 자기를 방관자로 여기며, 머릿속이 흐리멍덩하기만 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진리 원칙을 교제하면 할수록 분명하고 뚜렷해지는데, 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혼란스럽고 생각이 흐리멍덩해진다. 이것이 바로 이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는 자질이 형편없는 것이 아니냐? 이런 부류는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질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지적 장애인입니다.) 지적 장애인, 백치, 바보가 바로 자질이 가장 형편없는 부류이다. 이것이 두 번째 방면인 이해 능력에 관한 내용이다.
제3조 받아들이는 능력
세 번째는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받아들이는 능력은 이해 능력과 비슷하지만, 이해 능력보다 한층 더 깊은 차원의 능력이다. 받아들이는 능력과 이해 능력의 차이가 무엇이냐? 받아들이는 능력은 진리의 원칙과 실행의 길을 이해하고 파악한 다음, 어떻게 현실 생활의 각종 문제에 대입해서 실제로 사역할 때 실천에 옮기는지에 좀 더 무게를 둔다. 바로 이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사물의 원리와 원칙을 깨닫고 나면 속으로 실행의 길과 정확한 범위, 방향과 목표가 생기고, 그 원리와 원칙을 적용하는 방법과 일부 특수한 상황에 관계된 실행 원칙도 알게 된다. 만약 한 사람이 진리 원칙에 대한 교제를 듣고서 일부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고, 그런 다음 현실 생활에서 일부 실제 문제를 진리로 해결할 수 있다면, 즉 원칙을 듣자마자 전에 닥쳤던 그 일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깨닫고, 다시 일이 일어나도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서 대해야 하는지 알아 마음속에 실행의 길이 바로 생긴다면, 원칙과 원리에 대한 그의 이해가 마치 길을 밝혀 주는 등불처럼 생활이나 사역에서 생기는 여러 방면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바로 알려 주고, 실행의 길과 방향, 원칙을 갖게 해 준다면, 이 사람은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물론 이것은 좋은 자질의 한 가지 모습이다. 사람이 진리 원칙에 대한 교제를 듣고 나서 현실 생활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흔한 일이나 본인이 겪어 본 일의 경우에는 어떻게 실행하고 처리하는지 알고 있지만, 일부 특수하고 복잡한 상황이나 돌발적인 상황, 혹은 경험이 없는 흔치 않은 문제와 현상의 경우 진리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몰라 정확한 답이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구하고 물어봐야 어떻게 처리하고 해결하는지 안다면, 그러지 않고서는 설령 진리 원칙을 듣는다 해도 그 일이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이는 받아들이는 능력이 보통 수준인 것이고, 이런 부류는 자질이 보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사역을 한 지 10년, 20년이 되어서 사역 경험도 좀 있는 데다 하나님 집에서 진리 원칙을 명확하게 교제한 뒤로는 흔히 접하는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고, 또 검증도 받았지만, 일부 복잡하고 특수하며 흔치 않은 문제, 사역 경험이 없는 문제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물어보는 것을 통해 명확한 답을 얻고 나서야 처리하기 시작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일에 변화가 생겨서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혹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상황이 더 복잡해지면 그는 멍해져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모르고, 어떻게 실행하고 처리해야 원칙에 부합하는지는 더욱 모른다.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가 상상이나 자신의 야심과 욕망에 따라 처리하든, 아니면 내팽개치고 신경 쓰지 않든, 그가 어떻게 처리하든 관계없이 이런 상황이 생기면 그는 원칙을 어떻게 적용해서 처리해야 할지 몰라 멍해진다. 이것은 그의 자질이 너무나 평범하다는 뜻이다. 만약 일반적인 상황은 처리할 수 있지만 특수한 상황은 처리할 줄 모르는 경우라면, 이것은 자질이 보통이라는 뜻이다. 만약 일부 특수한 상황이 생길 경우 멍해져서 일반적인 상황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조차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는 자질이 부족한 것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받아들이는 능력도 부족하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과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차이가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교제하든 원칙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도리와 규례만 이해하고, 구호나 조금 외칠 수 있을 뿐, 실질적인 사역은 어떻게 하고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모른다. 교제를 들은 다음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가 교제를 아주 잘 이해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막상 구체적인 사역을 할 때가 되면 멍해져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고, 문제가 생겨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며, 여전히 구체적인 사역을 할 줄 모른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과 일을 대하고 처리할 때도 여전히 원칙이 없다. 그는 ‘설교를 들을 때 이미 진리 원칙을 이해했는데, 왜 현실 환경에서는 적용하지 못할까? 내가 이해하고 늘 얘기하던 것이 왜 쓸모가 없어질까?’라는 생각에 곤혹스러워한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도리만 얘기하고 규례만 지킬 뿐, 막상 일이 닥치면 그것을 간파하지 못한다. 그가 얘기할 줄 아는 도리는 전혀 쓸모가 없다. 그는 규례도 지키지 못하고,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며, 어려움을 만나면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누군가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면서 터무니없는 말을 늘어놓아도 그는 그것이 어떤 성질인지 분별할 줄도 모르고, 어떤 일이 교란과 방해에 해당하는지, 그것이 어떤 성질인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더더욱 모른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악인을 분별할 수 있지 않으세요? 어째서 악인을 처리하는 일에 원칙도 없나요?”라고 물으면 그가 대꾸한다. “그런 도리야 저도 알죠. 그런데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적용해야 할지, 어떤 사람에게 적용해야 적합한지 모르겠어요.” 이는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는 원칙을 들었을 당시에는 글자 하나하나 정리도 잘하고, 기억도 아주 정확하다. 심지어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유창하게 암기할 수도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실 생활에서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실행의 길은 전혀 없이 그저 구호만 외치고, 도리만 얘기하고, 규례만 지킨다는 점이다. 현실 생활에서든 본분 이행에서든 어떤 일이 닥치든 그는 진리를 구해 원칙대로 실행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비록 하나님 말씀은 자주 읽지만 말씀에 담긴 진리가 무엇인지, 원칙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일이 닥치면 그것을 분별하고 해결할 관련된 하나님 말씀을 찾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관련 말씀을 찾아 주어야 한다. 그가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는 늘 무엇에 집중하느냐? 이 일을 설명하는 구체적인 예가 있는지 없는지만 찾아본다. 그는 사례가 없으면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사람의 본성 본질을 폭로하는 말씀에서 그것을 설명하는 예가 없으면 그는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내적 상태에 비추어 분별하지도 못한다. 누군가 그의 실제 내적 상태를 바탕으로 진리를 교제하면서 분별하고 해부해야 알아듣는 것이다. 이렇게 교제하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 이런 부류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 늘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는다. ‘왜 구체적인 예가 없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맞춰 보냐고. 이 말씀은 너무 어려워서 아무리 봐도 맞춰지지가 않아!’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니,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말씀을 현실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가 깨달은 것은 그저 간단한 도리와 규례에 불과하며, 그 도리와 규례는 현실 생활에서 아무 소용도 없고, 일이 닥쳤을 때 실행의 길도 없다. 이것이 바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자질이 부족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자질이 가장 형편없는 사람이 바로 자질이 없는 부류이다. 즉, 어느 측면의 원칙을 듣더라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왜 그런 예를 드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왜 사람에게 그런 모습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며, 이르지도 못한다. 설령 그에게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더라도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옛날이야기나 우스갯소리를 듣는 것처럼 흥미롭고 재미있어한다. 만약 누군가가 이해했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해했다고 대답하고 그 사람이 얼마나 웃겼는지, 어떻게 다른 사람을 꾸짖었는지 흉내 내기까지 한다. 네가 만약 그에게 “여기에 관련된 사람이 지켜야 할 원칙을 아시겠어요?” 하고 물으면 그는 “네? 원칙도 있었나요? 몰랐어요.”라고 대답한다. 이런 사람에게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는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고,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매일 기계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 말씀을 몇 단락, 혹은 몇 편 먹고 마시고, 또 정해진 시간에 찬양을 배우고 예배를 드리지만 책을 덮고 찬양을 끄고 나면, 먹고 마신 내용 중 기억나는 것은 단지 영적인 용어 몇 개나 죽은 글귀 몇 마디뿐이다. 사람들이 늘 얘기하듯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재하십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순종합니다.”라는 말이나,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가, 막상 일이 닥쳐 고통을 받으면 그때는 정에 시달린다느니, 육에 시달린다느니 하는, 영적인 체하는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됨의 원칙, 생활의 원칙, 사역의 원칙 등 각 방면의 진리 원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의 마음에는 이런 것이 없고 담아 두지도 못한다. 어째서 담아 두지 못하느냐? 그의 자질로 볼 때, 그는 이런 진리 원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르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마음에 뿌리내릴 수 없다.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있고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그 사람이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에 이를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사람이 내면에 자질을 전혀 갖추지 않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 말씀의 정확한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설령 그를 천국에 데려다 놓고 셋째 하늘에 데려다 놓는다 한들 그가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그가 하나님에게 순종하겠느냐? (그러지 못합니다.) 그는 여전히 그 모양 그대로이고, 자질도 그대로이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은 자기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반면 자질이 좋으면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더 많고, 더 깊고, 더 높다. 자질이 보통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자질이 좋은 사람보다는 많이 부족해서 단지 평범한 범위에 머물 뿐 그보다 높을 수는 없다. 자질의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가장 형편없는 부류는 바로 자질이 없는 부류이다. 이 부류는 그 자질로 볼 때, 받아들이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현실 생활과 본분 이행에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나님을 10년, 20년을 믿고 심지어 늙을 때까지 믿어도 그가 입으로 내뱉는 하나님 믿는 도리나 영적인 용어는 여전히 하나님을 처음 믿었을 때 깨달았던 낡은 것들뿐이다. 하나님을 몇 년을 믿든 발전이 없다. 왜 발전이 없느냐?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몇 년을 믿어도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그 죽은 글귀들뿐이다.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그의 학습 능력, 이해 능력, 받아들이는 능력 등 각 방면의 능력은 자라지 않는다. 이런 부류는 어떤 사람이냐? 자질이 형편없는 사람이다. 자질이 부족하고 각 방면의 능력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이런 부류는 나이가 40, 50세 혹은 60, 70세가 되어도 자립 능력이 부족하다. 그의 생존 능력, 자립 능력을 보면 그의 자질이 어떤지 알 수 있다. 이런 부류가 바로 지적 장애인, 백치, 바보이며, 그들은 자립 능력이 매우 부족하다. 왜 자립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겠느냐? 바로 학습 능력과 이해 능력이 부족하고 받아들이는 능력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살면서 얻은 경험과 상식, 규칙, 요령은 무척 제한적이며, 60, 70세가 되어도 여전히 그 모양이다. 자질이 좋은 사람은 서른 남짓한 나이에도 삶과 인생길에서 마주하는 온갖 문제에 대해 인지하고 체득한 바가 있고, 식견이 있고 경험이 있으며,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이 여러 가지 문제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해야 더 나은 삶을 살고 자신을 더 잘 보호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자질이 부족한 부류는 모든 방면의 능력이 부족하므로 나이가 몇이 되든 생존 능력이 여전히 부족하다. 어느 정도로 부족하겠느냐? 독자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보시다시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몸도 건강한데 어째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없다고 하십니까?” 우리가 말하는 생존 능력은 먹고 자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때가 되어도 밥을 먹을 줄 모른다면 그것은 정상인이 아니라 저능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질을 논할 것도 없다. 우리가 사람의 자질을 평가하는 범위는 주로 겉보기에 정상적인 사람들, 그러니까 장애인과 저능아, 정신병자, 또는 자립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제외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의식주에서도 아무 규칙이나 원칙, 요령을 못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나이가 몇이든 생활에서의 의식주와 같은 일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원칙에 맞고 인성에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어느 계절에 어떤 옷을 입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도 모르고 그저 남들만 따라 할 뿐이다. 추운 날씨에 너무 얇게 입어서 감기가 들어도 그 이유를 모르고, 음식을 먹을 때 위생을 소홀히 해서 병이 나도 그 이유를 모른다. 그는 이런 일에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다. 이는 지적 장애인 아니겠느냐? 독자적인 생존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나이가 몇이든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모른 채 그냥 되는대로 살아간다. 정상적인 사람의 경우 첫 아이를 낳았을 때는 경험이 없지만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아이를 어떻게 돌보고 먹이는지에 대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어떤 여자는 아이를 둘셋이나 낳아도 경험이 없다. 아이를 어떻게 키웠느냐고 물어보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몰라요. 얼떨결에 지나갔어요. 그냥 아이가 배고파하면 먹여서 배만 불리면 되죠.” 아이가 그 여자 손에 키워지면 살아 있는 것만도 다행이다. 만약 여자의 그런 생존 능력으로 키운다면 살아 남는 아이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활하거나 생존하면서 닥치는 각종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은 생존 능력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시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나면 그는 멍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떤 일을 먼저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저 당황하고, 긴장하고, 겁내고, 원망할 뿐이다. “왜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생기는 거야? 어떡한담?” 걱정하느라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한다. 30대에도 그랬는데, 6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같은 분량이라 일이 닥쳤는데 별수가 없으면 울음을 터뜨린다. 누군가 말한다. “뭘 울고 그래요? 무슨 큰일도 아니고, 흔해 빠진 일이잖아요. 사안이 심각한지, 시급한지 구분할 줄만 알면 돼요.” 만약 누군가 이런 일을 처리할 줄 몰라서 그 일로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며, 그냥 다 끝내 버리려고 죽을 생각까지 한다면 너무 못난 것이 아니냐? 그는 이런 원망까지 한다. “왜 하필 다른 사람이 아닌 저한테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너한테 생겼으면 네가 처리하고, 만약 잘 처리하지 못하겠으면 주변에 그런 일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확실히 물어보면 처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 아무 일 없을 때는 말도 잘하고, 도리도 차근차근 잘 얘기하더니 일이 닥치니까 당황하고 멍해져서 훌쩍이고, 머릿속이 하얘지고, 생각이 뒤죽박죽이 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짧아서 경험이 없다면 일이 닥쳤을 때 긴장하고 겁내는 것도 정상이다. 하지만 30, 40세가 넘으면 세상사도 많이 겪고 경험도 쌓여서 성숙하고 노련해지니, 일 처리도 갈수록 듬직해지고 노하우가 생기기 마련이다. 젊은 사람들이 보면 속으로 감탄하면서 의지할 사람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만약 자질이 없고 생존 능력이 없어 이런 자립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또한 주변에 체크해 줄 어른이나 경험 있는 사람이 없다면 그는 어떤 일이든 엉망으로 처리한다. 그러면 이런 부류는 자질이 형편없는 것이다. 일부는 자질이 어느 정도로 부족하겠느냐? 예를 들면 한 가정의 주부가 집안 식구 몇 명이서 한 끼에 밥을 얼마나 먹고 반찬을 얼마나 먹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20, 30년 밥을 하고도 매끼 밥을 얼마나 해야 하는지, 반찬이 짠지 싱거운지도 모르고, 음식이 익었는지조차 확실히 모를 때도 있다. 그 정도로 자질이 부족하다. 이 사람에게는 생각이란 게 없는 것 아니겠느냐? 그야말로 닭대가리이다! 이런 부류는 독자적으로 생존할 능력이 없고, 무슨 일을 하든 길이 없어 잘못을 저지르기 십상이다. 일이 닥쳤을 때 체크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일을 뒤죽박죽 엉망으로 해 놓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백치이고 지적 장애인이다. 받아들이는 능력이 가장 형편없는 이런 부류는 진리 원칙을 아무리 교제해 줘도 도리밖에 이해하지 못하고, 그 원칙들을 현실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모른다. 즉, 그가 깨달은 도리는 그의 현실 생활에 그 어떤 목표나 방향, 길도 제시하지 못한다. 이런 자가 바로 받아들이는 능력이 가장 형편없는 사람이다. 세 번째 기준인 받아들이는 능력에 대한 교제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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