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3) 제 5 부

우리는 예전에 양심이라는 측면을 다룬 바 있다. 그때 양심이란 무엇이라고 했느냐? 정상 인성의 정의감과 선량함이라고 했다. 사람이 반드시 정직하고 선량해야만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게 된 뒤에는 어떻게 해야 정상 인성의 정직함과 선량함이 비로소 완전해지고 발전하겠느냐? 이는 반드시 진리를 깨닫는 것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를 깨닫고 나면 사람이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준칙은 올바른 목표가 된다. 이는 그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가치, 의미를 지닌다. 진리를 깨닫고 나면 어떤 사물을 바라보고 처리하든 하나님이 가르쳐 준 진리 원칙에 기대 행동하며, 남들의 눈에 그 사람은 상당히 정직해 보인다. 정직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바르다는 뜻이다. 즉, 어느 쪽으로도, 혈기나 감정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사적인 이익과 인간관계, 개인의 의도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가장 올바르고 정당하며,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경모받고 우러름 받는 목표를 향해 실행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좋다고 여기고 칭찬하는 목표를 향해 실행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는 패괴된 보통 인류가 바라보는 정직함보다 수준이 높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정직함은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진리 원칙에 완전히 부합하고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며 양심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원칙을 갖추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양심은 상당히 완벽하지 않겠느냐? 완전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사람, 진정한 피조물은 이런 양심을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의미의 정직함을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람은 진리에 부합하는 이런 의미의 정직함을 갖춰야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는다거나 광명정대하다거나 ‘사내대장부는 떳떳해야 한다’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것들은 혈기일 뿐 실제 내용은 없으며, 순전히 사람이 꾸며 낸 것이다. 정직함은 진리를 근거로 하고 실제로 살아 내는 것이다. 즉, 정상 인성은 진리를 근원이자 출발점으로 삼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다양한 일을 대하며 처리할 수 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정직하다고 한다. 그러니 선량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최소한 양심과 이성의 기준을 뛰어넘는다. 선량함 안에는 꾸밈이 없고 흉악함은 더더욱 없다. 완전히 사람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며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방식에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며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목표와 준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는 이 세상에서, 온 우주에서 가장 선량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가 생명이 된 사람은 누구보다 마음씨가 착함이 틀림없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에 100% 부합한다. 그가 이런 인성을 갖추었다면 그를 정직하다고, 선량하다고 해도 적절하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으며, 본분을 이행할 때 감정에 치우치거나 야심, 욕망을 품지도 않고, 전통문화의 독소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도덕과 인성에 대한 평가 기준에 그 어떤 사탄의 철학이나 사상 관점도 섞여 있지 않아 완전히 진리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말해 보아라. 이런 양심과 이성을 갖춘 인성은 이미 완전한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진리를 갖추었기 때문에, 그가 살아 내는 생명의 본질이 진리이기 때문에 이런 생명 본질을 갖춘 그의 인성은 완벽하다. 만약 ‘완벽하다’는 말이 듣기 싫다면 ‘완전하다’고 해도 된다. 최소한 하나님이 보기에 그는 완전하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그 얼마 안 되는 양심과 이성, 수치심을 빌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사람 내면에 만든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사람 내면에 만들어질 때 양심의 지각과 이성은 약화되거나 은폐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정상화되고 완전해진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인류이다. 우리는 완벽하다고 하지 않고 완전하다고 할 것이다. 왜 완벽하다고 하지 않겠느냐? 완벽하다고 하면 일부 영적인 이해력이 없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나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니 오해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도록 나는 이 단어를 피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눈에 완전해 보인다면 피조된 인류 사이에서는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완벽함은 사람의 상상 속 완벽함이 아니라, 사람들이 칭찬하고 동경하고 사랑하고 존중하고 아낄 만한 아름답고 선한 사물이자 정의로운 힘이며, 긍정적인 사물이다. 따라서 단순히 인성의 마지노선 수준에 양심이 머물도록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더 민감하고 지각 있게 하고 자신의 이성이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게 하려면 오직 한 가지 길밖에 없다. 그 길은 인성의 여러 흠과 결함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르쳐 준 여러 진리에 공들이고 하나님이 여러 사람, 일, 사물에서 너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그런 사람, 일,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고 처리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은 여러 측면의 일에 다 요구하는 원칙과 기준이 있다. 네 임무는 무엇이냐? 그 기준에 맞추어 그 방향과 목표를 향해 실행하는 것이다. 우선 진리 실행의 기준이 무엇인지 구하고 파악한 다음,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대로 스스로에게 요구해야 한다. 동시에 자신의 관념과 상상 속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여러 사상 관점, 규율과 관례 등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이 조금씩 네 실행 원칙이 되게 해야 한다. 내려놓는 것을 배우는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내려놓는 목적은 너를 속 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실 있게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실’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각 측면의 일에 대해 요구하는 원칙이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이 여러 측면의 실행 원칙을 공허한 이론으로 만들어 그저 입으로만 떠들 뿐 실행하지 않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런 진리 원칙을 공고히 생명의 일부로 만들고 하나님 말씀을 실생활에 적용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보자. 본분 이행이라는 일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착실하고 성실하게 처신하는 것이다. 즉, 본분을 착실히 이행해야지, 건성으로 대충 임하고 얼렁뚱땅 해치우며 형식만 차리거나 남들에게 보여 주려 하고 자신을 뽐내서는 안 된다. 물론 더욱 중요한 점은 진리 원칙대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 횟수를 줄이는 것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사욕과 기호를 저버리며 점차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러면 쉽게 실행해 낼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구원받는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폭로하는 여러 패괴 성품은 모두 해결하고 내려놓을 수 있다. 물론 내려놓는 것은 최종 목적이 아니다. 최종 목적은 내려놓는 전제하에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것은 기분을 전환하거나 존엄 있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최종 목표이다. 패괴 성품을 벗어 버려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패괴 성품이다. 소양이 부족하고 나이가 많거나 말주변이 없고 표현 능력이 떨어지는 것 등은 구원받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니다. 본분을 이행할 때 업무 능력이 떨어지거나 이해력이 부족한 것도 구원받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아니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것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네 패괴 성품이다. 물론 하나님 말씀이 폭로하는 사람의 여러 패괴 성품을 사람이 해결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사람이 패괴 성품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도, 사람의 사상 관점이 진부하기 때문도 아니다. 당연히 사람이 가진 인성 측면의 결함이나 흠 때문은 더더욱 아니고, 사람이 무감각하고 반응이 느리기 때문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품이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 벗어 버리고 싶다고 벗어 버릴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본분 이행 과정에서 패괴 성품이 수시로 튀어나와 교란하고 농간을 부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교회 리더인데 잘못을 저질러 책망과 훈계를 받았다면 받아들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며, 회개하고 잘못된 행동 방식을 바로잡아 진리 원칙대로 해야 한다. 이는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고민한다. ‘이렇게 책망하고 훈계하는 건 내가 못마땅해서 나를 교체하려는 거 아닐까?’ 속으로 원망하고 오해하며 심지어 하나님에게 이치를 따지기까지 한다. ‘제가 못마땅해서 저를 교체하고 도태시키려는 것이라면, 좋아요. 분명히 따져 보자고요. 저는 열여덟 살 때부터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어요. 지난 세월 계속 리더 역할을 하며 가족과 생계를 버렸고 결혼과 가정도 포기했죠. 이런 것들은 다 어떻게 계산하실 거죠?’ 너는 계산할수록 기가 산다. 이게 단지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냐? 아니다. 너는 왜 그런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여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책망과 훈계를 받았을 때 너는 억울해하며 속으로 원망하고 불복하며 이치를 따지고 변명도 한다. 심지어 남들에게 네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요구한다. 네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와 근본 원인은 오직 하나, 네게 해결되지 않은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제가 선천적으로 자질과 능력이 부족해서 사역을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라고 말하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자질이 부족해서 사역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고 진리도 깨닫지 못해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단지 자질이 부족하기 때문이겠느냐? 그것은 한 가지 측면에 불과하다. 근본적인 문제는 양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양심에 문제가 있는 것은 패괴 성품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저질러 책망과 훈계를 받는다면 너는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자신이 사역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네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면 그런 것들은 다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올바르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그런 일을 맞닥뜨렸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이치를 따지고 원망하며 소극적인 상태에 빠진다. 심지어 혈기를 가지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제가 자질이 부족하고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자질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거잖아요? 그러면서 사역을 못한다고 저를 탓하시다니요! 제가 못마땅하면 진작 말씀하지 그러셨어요!” 책망하는 말이 더 엄하기라도 하면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복받을 희망이 없는 것 아닐까? 이번 생에서는 지위를 못 지켰고, 다음 생에서도 희망이 없겠지.’ 그에게 진리를 구하려는 뜻이 있느냐? 그가 속으로 순종할 수 있겠느냐? 순종하기 쉽지 않다. 이 모든 모습은 결국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자질이 부족해서 사역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인성 고유의 흠과 결함일 뿐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설사 고유의 흠과 결함이 너무 커서 사역을 감당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네게 반감을 품거나 너를 혐오하지 않는다. 그러나 네가 사역을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원망하며 반항한다면, 결국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고 사역을 내팽개친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패괴 성품이니 그 패괴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패괴 성품을 해결하고 나면 너는 자신의 자질과 인성의 조건이 감당할 수 있는 사역에서 쓰임 받기에 합당해진다. 그러나 만약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고 진리대로 실행하지 못하며 책망과 훈계, 폭로에 순종하지 못한다면 자질이 아무리 좋고 인성 측면의 조건이 아무리 뛰어나도 쓰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말해 보아라, 방금 교제한 말이 무슨 의미겠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는 것이고, 중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도 패괴 성품이지, 표면적인 인성의 결함이나 부족함이 아닙니다. 저희는 어떤 환경을 맞닥뜨렸을 때 늘 일의 표면에서만 맴돌고 본질적인 문제는 결코 해결하지 못하며 책망과 훈계, 하나님이 마련한 환경에 순종하지도 못합니다.) 패괴 성품이 해결되고 맞닥뜨린 일에서 진리 원칙을 파악할 수 있으며,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는 방법도 알게 된다면, 너는 본분 이행에서 쓰임 받기에 합당해질 것이다. 너의 자질이 뛰어나든 부족하든, 재주가 얼마나 많든 패괴 성품이 해결되지 못하면 너를 어느 자리에 놓아도 쓰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 반대로 자질과 능력이 제한적이더라도 여러 진리 원칙과 사역 범위 내에서 깨닫고 파악해야 하는 진리 원칙을 깨달았으며 패괴 성품이 해결됐다면 너는 쓰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다. 알겠느냐? 이런 말들은 한동안 곱씹어야 완전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대다수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여전히 은사에 기대고 규례를 지키면서 죄를 범하지 않고 악을 행하지만 않으면 본분을 잘 이행한 것으로 생각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스스로를 반성하여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일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다수가 단지 행동 방식과 행위에서만 맴돌고 얽매이지만 진리를 구해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으로 만족하며 가급적 방해하지 않고, 교란하지 않고, 파괴하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대다수가 아직 책망과 훈계를 받거나 폭로되지 않았고 형벌과 심판을 겪지도 않았으며, 호된 시련이라는 단계는 더더욱 겪지 않았기에 그들의 패괴 성품이 아직도 변화되기 시작하지 않았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지만 사실이다. 내가 예를 들면 너희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보아라, 지금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평범하게 따르는 자들로, 지위가 없다. 지위와 권력이 있는 상태에서 어떤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대다수가 실행하는 기본 원칙은 바로 말씀을 잘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다. 어쨌든 리더 역시 상부의 사역지침에 따라 교제하는 것이므로 리더가 시키는 일을 하고, 리더가 시키는 방법대로 하면 된다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필요도 없고, 진리에 부합하는지 따져 볼 필요도 없이 그저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 원칙이 생명이 된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너에게 진리가 생명이 되었는지를 증명할 수 있느냐? 바로 네가 리더로 선출되어 교회 사역을 할 때이며, 이때가 사람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다. 네가 일 처리에 원칙이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네가 드러내는 패괴 성품이 얼마나 되는지를 보면, 네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 없는지, 리더 일꾼을 하기에 적합한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만약 너에게서 패괴 성품이 표출되면 너는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 솔직하게 털어놓고 진리를 교제해야 하느냐, 아니면 감추고 위장해야 하느냐? 이때도 사람이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이다. 교회의 대다수 사람은 진리 원칙을 근거로 일을 바라볼 줄 모르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사람의 기호에 따라 일을 바라보고 평가한다. 대다수가 이렇게 생각한다. ‘본분 이행은 큰 잘못만 하지 않으면 되고, 사역이 이렇게 계속 앞으로 진행되기만 하면 돼. 만약 큰 잘못을 저질러서 격리되어 반성해야 하거나 B조로 분류되면 내가 재수가 없는 거지.’ 이런 상황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네가 비록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말씀을 잘 따르고 순종하며 시키는 대로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너에게 진리가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며, 네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아니다. 네가 리더로 선출되어 리더의 자리에 있게 되면 너는 드러난다. 왜 그런 것이냐? 네게 지위가 생기면 너는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모든 일을 도맡아 할 수 있고,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독립 왕국을 세울 수 있다. 혈기와 패괴 성품에 따라 행동할 수 있고, 자신의 욕망과 야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러니 네가 아직 쓰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99%에 달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와 상황이 이렇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대다수가 오랫동안 본분을 이행하면서 겉으로 볼 때는 비교적 말도 잘 듣고 착실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에게 패괴 성품이 없음을 뜻하겠느냐? (아닙니다.) 행위가 방탕하지 않고 겉모습도 착실해서 성도의 품위가 조금 있어 보이지만 사람의 패괴 성품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네가 자발적으로 진리를 구해서 자신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역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리더로부터든 상부로부터든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너는 기껏해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좋아, 고치라면 고쳐야지. 좀 더 고생하고 시간을 들여서 얼른 다시 하면 되잖아.’ 그저 이런 태도와 마음가짐이다. 이것은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참된 순종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런 마음가짐은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일종의 긍정적인 지향점을 갖게 되는데,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고 기준에 맞는 피조물이 되고자 한다. 이런 소망은 그 사람의 일상생활에서의 마음가짐, 본분을 이행할 때의 마음가짐을 형성한다. 사람의 말로 표현하자면 ‘말썽 일으키지 말고 잘해 보자’는 것이다. ‘잘해 보자’는 말이 무슨 뜻이냐? 그것이 진리 원칙이냐? 그것은 단지 말을 잘 듣고, 규칙을 지키고, 말썽 피우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일 뿐 진리 원칙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리 원칙은 무엇이냐? 너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너에게서 패괴 성품이 표출되고 사욕과 혈기가 나타날 때, 패괴 성품으로 인해 어떤 내적 상태가 생길 때 자발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대조해 보고, 하나님의 깨우침과 인도, 도움과 붙들어 줌, 심지어 하나님 말씀의 엄한 심판과 형벌 아래 너는 조금씩 하나님 말씀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하나님 말씀을 점점 많이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점차 인정하고 그 말씀에 아멘 해야 한다. 그런 후 하나님 말씀을 내면에 받아들이고,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을 내려놓고, 더 이상 사람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고수하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하여 네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을 처리하고, 사람과 일, 사물을 대하는 네 관점과 입장, 견해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지금 이렇게 자발적으로 실행하고 있느냐? 내가 볼 때는 99%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들이 쓴 체험 간증문은 모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겪고 행동 방식에서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속으로 뿌듯해하면서 자신에게 진리 실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네가 간증문을 쓰긴 했지만 사실은 본인을 치켜세우고 증거하거나 본인을 내세우는 것이다. ‘보세요, 저는 간증이 있잖아요. 저는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고, 안 좋은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본분을 지켰다고요!’ 또 어떤 사람들은 책망과 훈계를 받으면 본인을 반성하고 인식하는데, 자기가 건성으로 임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지 못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회개하고자 한다. 비록 한동안은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며 건성으로 임하지 않는 듯하지만 그렇다고 패괴 성품이 달라졌느냐? 그렇지 않다. 뒤에서는 여전히 교만하고, 건방을 떨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리하는 입장과 관점, 견해가 전혀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 네 패괴 성품은 지금까지도 변화되기 시작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말하는 변화는 무엇이냐? 단지 행위가 달라지고 생활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아마 사람을 대하는 말투와 어조, 스타일에도 조금은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다. 또 네 믿음도 강해졌는데,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번 책망과 훈계를 겪고 난 뒤 진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진리도 많이 깨닫고, 하나님을 따르려는 의지도 전보다 확고해졌다. 이런 면에서 모두 변화가 생겼다. 이런 변화로 인해 사람은 구원받는 일에 대해 더욱 믿음을 갖게 되고,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도 더욱 강해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대해서도 더욱 큰 희망을 품고 낙관적이게 된다. 그 어떤 환난과 시련이 닥쳐도 소극적이 되어 믿음을 포기하고 물러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것은 그저 겉으로 살아 내는 정상 인성의 모습에 변화가 생긴 것일 뿐이다. 비교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이런 사상 관점이 점차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 이는 사람의 마음이 깨어나고 소생하고 있다는 징후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비교적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변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비교적 동경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비교적 믿음을 가지고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행하려는 가장 중요한 사역인 인류를 구원하는 사역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이런 조건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들이 본분을 이행할 때 예전보다 착실하고, 예전보다 고분고분하고 말을 잘 듣고, 본분 이행의 효율도 좀 더 높아졌는데 특히 기술을 요하는 사역의 진행이 전보다 상대적으로 빨라졌다. 2, 3일 걸리는 일을 7, 8일이 되어도 해내지 못하던 전처럼 그렇게 지지부진하지 않아서 지금은 2, 3일이면 성과를 낸다. 물론 이것도 좋은 소식이다. 그렇다면 나쁜 소식은 무엇이냐? 그것은 너희가 표출하고 나타내는 것이 그저 행위상의 변화, 생각과 의식 형태상의 변화에 불과하고, 잠재의식에서 비교적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것이 깨어나는 징후일 뿐, 이런 징후가 너희의 패괴 성품이 변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비록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지만 패괴된 인류가 구원에 이르려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은 정말이지 이토록 가련하고 곤궁하며, 이토록 어리다. 생명 진입과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는 속도도 정말이지 이렇게나 느리다. 속도가 느린 원인은 결국 인류에게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이 없어서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 이토록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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