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2) 제 2 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사역이 과연 사람의 무엇을 바꾸려고 하는지, 하나님이 사람의 패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하나님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온전케 하려고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확실하게 교제해야 할 문제가 아니겠느냐? 간단히 말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거두고자 하는 성과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이 단계 사역은 진리를 선포하여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사역은 사람이 실생활에서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만날 때 반드시 준수해야 할 진리 원칙을 명확히 교제하는 것이다. 사람은 깨닫고 나면 이런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며 일을 처리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패괴 성품을 해결한다. 그리하여 패괴 성품에서 벗어나 진실하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게 된다. 물론 이는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하나의 상징이자 마지막에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구원받은 진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전체 과정에서 해결해야 하는 주된 문제는 무엇이냐? 크게 두 가지 측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첫 번째 측면은 사람의 관념을 해결하는 것이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각종 그릇되고 터무니없으며 편집적인 사상 관점을 모두 사람의 관념이라고 통칭한다. 이런 잘못된 사상 관점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여 이미 사람이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며 일을 처리하는 기본적인 생각과 이론이 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철저하게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사람의 생각 측면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다른 한 측면은 사람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것이다. 패괴 성품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자주 교제하고 이야기하며 해부하는 주제이다. 패괴 성품 중에는 사람의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사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 있는가 하면, 순전히 사탄의 성품인 것도 있다.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이 사람에게서 해결하려는 것은 사람의 관념과 사람의 패괴 성품, 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것과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 두 가지가 해결되고 사람이 진리를 얻으며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면 하나님의 사역은 성과를 거두고 끝난다. 하지만 하나님 사역의 전체 과정에서 하나님이 사역하는 방식이든, 아니면 하나님이 사역하는 구체적인 절차이든, 혹은 하나님이 선포한 모든 진리이든 모두 사람의 성격, 자질, 능력, 본능, 생활 습관, 생활 리듬이나 사람의 흥미, 기호 등의 측면에 관한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 사역의 목표나 목적, 의의가 사람의 본래 자질이나 능력, 사람의 본능, 성격 등을 바꾸는 데 있지 않다는 말이다. 네가 어떤 자질과 사역 능력을 갖추었든, 혹은 네 타고난 성격이나 생활 습관, 본능 등 각 측면이 어떻든, 하나님은 이런 것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오직 네가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인지만 본다. 이를 바탕으로 진리를 공급하고 사람에게 역사한다. 하나님이 어떤 측면의 진리를 사람에게 공급하든,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든, 궁극적으로는 사람의 원래 자질이나 본능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다. 자질이나 본능을 더 낫게, 더 좋게, 혹은 아주 초자연적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은 모두 하나님이 사역하여 바꾸려는 목표가 아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들었든,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든 네 원래 자질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일 것이다. 네가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또 오랫동안 열심히 뛰어다니고 헌신했다고 해서 자질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사람의 성격, 본능, 생활 습관, 흥미나 기호 등 측면도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했다고 해서 바뀌지는 않는다. 사람의 관념 속에서 이 바뀐다는 말은 결코 퇴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향상되고 예전보다 나아지며 좋아진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사역이 어떤 단계에 있든, 어떤 방식으로 하든, 사람의 원래 자질이나 사역 능력 혹은 본능이나 성격 등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만약 네 자질이 떨어지고, 네가 지금 리더 일꾼이나 어떤 사역의 책임자가 될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면 너는 20년, 30년이 흘러도 갖추지 못할 것이다. 설사 네가 결국 진리를 추구하여 구원받는다고 해도 여전히 갖추지 못할 것이다. 네 자질이 변하지 않는다면 네 본능은 변하겠느냐? 모든 사람은 생로병사를 겪고, 큰일이 생기면 긴장하고 두려워하며 무서워하기 마련인데, 이런 본능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굉음이 들리면 모든 사람은 머리를 감싸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것이다. 그건 본능이다. 불이나 뜨거운 물건에 손이 닿으면 본능적으로 움츠리고, 혹여 불길한 소식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흠칫 놀라 두려워한다. 위험이 닥칠 땐 본능적으로 ‘내가 안전한가? 이 위험이 내게 닥치려나?’라는 생각부터 할 것이다. 그건 본능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손을 뻗어 때리려고 하면 너는 본능적으로 피해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먼지나 물이 눈에 들어가면 본능적으로 눈을 감으며, 이가 아플 때는 늘 손으로 이를 만진다. 너는 본능에 의해 조건 반사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거나 본능적인 행동을 할 것이다. 이런 본능적인 반응은 사람이 타고나는 것으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하나님도 바꿔 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본능적인 반응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사람에게 마련해 놓은 것으로 사람을 보호해 주는 것이며 피조된 인류가 반드시 갖춰야 하는 것이니, 한편으로 하나님은 빼앗아 가지 않을 것이고 너 역시 진리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이 본능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느냐? 네가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를 많이 깨닫고 하나님에게 진실하게 순종한다고 한들 불길에 휩싸여도 두려워하지 않고 기름 솥에 손을 집어넣어도 뜨거워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증거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그를 어떻게 보겠느냐? 부러워하고 탄복하겠느냐? 너는 어떻게 평가하고 규정하겠느냐? 최소한 그것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준 본능과 관련된 일에서 하나님은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네 이런 본능을 빼앗아 가지 않을 것이고, 네 본능을 다른 초월적인 능력으로 바꿔 주지도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두운 공간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너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더듬고 귀를 기울여 유심히 들으며 주위 소리를 분별하면서 본능적으로 탐색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네가 진리를 추구한다고 해서 육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두운 곳일수록 눈이 밝아져서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있거나 방향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것으로, 하나님은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네가 설령 많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순종하며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게 된다고 한들 이런 측면의 본능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퇴화하지 않기만 해도 다행인데 초자연적으로 변하길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사람이 일을 바라보고 처리하는 능력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역시 하나님이 사역으로 바꾸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일 처리 능력이 어떤지는 한편으로는 사람의 자질에 달려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이 타고난 지능에 달려 있다. 이 지능에는 사람의 은사도 포함된다. 어떤 사람은 외부 업무를 처리하는 데 특별한 능력과 은사를 타고나서 생각하고 사교하는 데 능하다. 선천적으로 일종의 특수한 사교 능력이 있어서 사람을 사귀고 상황을 파악할 줄 알고 일 처리도 잘한다. 머릿속으로 각종 일의 맥락을 무척 분명하게 구분하고 논리적이며, 일을 바라볼 때 핵심을 파악하여 치우치지 않고 그릇됨이 없으며 문제를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처리한다. 이런 부류는 일 처리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이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그저 책을 읽고 화초를 키우고 새를 기르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자를 뭐라고 부르느냐? 한가하고 고상하며, 우아함을 추구하는 부류라고 한다. 그들은 사교적이지 않고 외부 업무를 처리하는 데도 서툴다. 이런 능력이 없어서 외부에서 일을 처리하고, 변호사를 구하거나 어떤 인물을 상대해야 할 때 겁을 먹고 두려워서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 사람이 자기한테 질문하면 우물쭈물하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른다. 머저리가 아니냐? 이런 사람은 일이 생기지 않았을 때는 허풍이 대단하다. “저는 예전에 이런 이런 일을 했고, 이런저런 화려한 이력이 있어요. 한때 아무아무와 왕래했고, 유명인 누구누구와 아는 사이였죠….” 그러다 막상 일을 처리하라고 보내면 꽁무니를 뺀다. 실제로는 허풍만 칠 줄 알지, 실질적인 재능이나 학식은 없고 일 처리 능력도 없다. 진리를 추구한다고 해서 일 처리 능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이 달라지겠느냐? 불행하게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성격이 내성적이라 어려서부터 사람 만나기를 꺼리다가 이삼십 대가 되어서도 남들과 대화하거나 일을 처리할 때 몹시 긴장하고, 중년의 나이에도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할 때 여전히 부끄러워하며 얼굴이 빨개진다. 이런 사람은 평생 큰 무대에 서지 못한다. 이와 달리 어떤 사람은 십 대 때부터 남들과 수다 떨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어떤 인물과 사귀어도 겁먹지 않고 어떤 일을 해도 침착하고 허둥대지 않는다. 그는 똑똑해서 주눅 들지도 않고 사람이 많을수록 즐겁고 신나 하며 자기를 드러내 보이려 한다. 사람의 성격, 일 처리 측면의 능력이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바뀌겠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이런 것들을 바꾸지 않는다. 자신의 일 처리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인성 측면의 결함이라는 것을 알고 극복하려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중년이나 노년 단계에 이르면 몇십 년의 단련을 통해 얻은 풍부한 경험으로 눈앞에 닥친 일들에 간신히 대처할 수도 있겠지만, 핵심적이고 생사가 걸린 중대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여전히 역부족이다. 특히 노년에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든 엉망으로 하며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자기 집안일조차 감당하지 못하니 어떻게 하겠느냐? 일 처리 능력이 있는 자녀가 있으면 자녀에게 대신 시키고 자기는 숟가락만 얹는다. 그러고는 ‘나도 한몫했어. 나도 일을 처리할 능력이 있다고.’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자녀가 장성해서 가장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어 그 일들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일에 대처할 때 젊었을 때만큼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의 일 처리 능력이 변했다거나 향상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서 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체험을 많이 하고 사물의 규칙을 파악하여 일에 달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위험한 일에 직면해도 겁먹지 않고 ‘어차피 내게 남은 거라곤 이 몸뚱이밖에 없어. 돈은 없어도 목숨은 하나 있다고. 될 대로 되라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에게 발전이 있겠느냐? 발전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여전히 일을 야무지게 처리하지 못한다. 예전에 덤벙대고 조급해했으면 지금도 덤벙대고 조급해하고, 예전에 일을 시작만 하고 끝맺지 못했다면 지금도 변함없이 그 모양이다. 너희 생각에도 실제로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연령대가 다양한데, 지금까지 특수한 일을 겪어 본 적이 있느냐? 다시 말해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네 자질이 완전히 변해서 예전보다 훨씬 나아지거나 본능이 달라진 경험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예전에 전 정말 나약했어요. 말주변도 없고, 별다른 능력이나 재주도 없었죠. 사교적이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언변도 늘고, 사교성도 좋아졌어요. 일 처리에도 지식과 노하우가 생겨서 잘 처리할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더냐? 이런 경험이 있느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일들은 없었지만, 하나님을 믿은 후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면서 제 성격이 변한 것 같긴 합니다. 원래 전 말이 느려서 늙은 소라고 불렸어요. 굼벵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죠.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나서는 반응이 빨라졌어요. 말과 동작이 빨라지고 일 처리 속도도 빨라져서 효율이 올랐죠.” 이런 상황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한 가지 경우는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의 경우 처음 연습할 때는 말이 굉장히 느리다. 한 글자씩 말하다 보니 주위에서는 그 사람의 말이 이렇게 느린 건 천성이 느린 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3, 5년의 세월이 흐르면 남들과 자주 접촉하고 대화하면서 모국어만큼 빠른 속도로 외국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사람 성격이 변했네. 원래 남들이 답답해할 정도로 말을 느리게 했는데, 이젠 매우 유창하게 말하고 성격도 급해졌어. 말을 똑 부러지게 하는 것만 봐도 이 사람이 일 처리가 시원스럽고 성격이 좋다는 걸 알겠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성격이 변한 경우겠느냐? (아닙니다.) 사실 이것은 정상적인 규칙이다. 특정 업무를 배우는 정상적인 성장 과정이지, 성격이 변하는 과정은 아니다. 어떤 측면이든, 자질이나 능력, 본능이 되었든, 아니면 성격이나 습관, 흥미, 기호가 되었든 이는 모두 하나님이 사역하면서 바꾸려는 것들이 아니다. 네가 늘 하나님이 사역하고 말씀하고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는 목적이 사람의 이런 본능적인 것을 모두 변화시키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얘기하는, 진정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다. 그것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다. 사람은 이런 것들을 깨달은 뒤 이 방면의 관념과 상상, 억측, 혹은 느낌을 내려놓아야 한다. 즉,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언제나 느낌 혹은 추측에만 기대어 다음과 같은 것을 종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 자질은 향상되었나? 내 본능은 달라졌나? 내 성격은 아직도 예전처럼 좋지 않은가? 내 생활 규칙은 달라졌나?’ 이런 걸 고민하지 마라. 고민해도 소용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고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은 전혀 이런 것을 겨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사역을 통해 사람의 자질, 본능, 성격과 같은 요소를 바꿀 계획이 없으며, 결코 사람의 이런 요소들을 바꿀 목적으로 말씀한 적도 없었다. 그 숨은 뜻은 곧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조건을 바탕으로 사람에게 진리를 공급하고, 이로써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네가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든, 네 성격과 본능이 무엇이든, 결국 하나님이 하려는 것은 진리를 네 내면에 만들어 주어 네 낡은 관념과 패괴 성품을 바꾸려는 것이지, 네가 원래 가지고 있는 자질과 본능, 성격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역을 통해 바꾸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알겠느냐? (하나님께서 사역을 통해 바꾸려는 건 사람 내면의 낡은 관념과 패괴된 성품입니다.) 사람이 이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런 초자연적이고 실제에 맞지 않는 관념과 상상을 내려놓아야 하고, 그런 관념과 상상을 가지고 스스로를 판단하거나 스스로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네게 준 각 방면의 원래 조건을 바탕으로 진리를 구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목적이 무엇이냐? 바로 네가 본인의 원래 조건을 바탕으로 진리 원칙을 깨닫고, 또 여러 상황에 직면했을 때 실행해야 할 여러 방면의 진리 원칙을 깨닫고, 네가 이런 진리 원칙에 따라 사람과 일을 바라보며,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고 사역하는 목적은 진리를 사람의 내면에 만들어서 실행 원칙과 준칙이 되게 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며, 처신하고 일을 처리하는 근거가 되게 하며, 사람의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지, 사람을 슈퍼맨이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슈퍼맨, 초자연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본능이나 사람 능력의 한계, 사람의 자질을 뛰어넘는 것, 심지어 성별을 뛰어넘고 성별을 초월하여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언어를 전문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는데도 몇 개 언어 혹은 십여 개 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능력은 사람의 자질과 능력, 본능을 뛰어넘은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에 더해 몇 개 언어를 하면서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바꿔 가며 말하기까지 한다면, 더욱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몇 개 언어를 하든 헷갈리지 않고, 얼마나 오래 이야기하든 지치지 않으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도 갈증이 나지 않는 데다가 말하면 말할수록 눈빛이 밝아지고, 얼굴에 붉은빛이 돌면서 온몸에서 빛이 난다면, 초자연적인 게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심지어 말하다가 총을 한 발 맞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이야기한다면, 더더욱 초자연적인 게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가 총알을 보고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서 총알이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면, 그리고 머리카락 한 가닥조차 상하지 않고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다면, 본능을 뛰어넘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갖가지 현상들은 모두 사람의 본능을 뛰어넘은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초자연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사람으로서 정상인의 자질과 능력을 뛰어넘고 정상인의 본능도 뛰어넘어 다방면에서 보통 사람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굉장히 초자연적인 사람 말이다. 이러면 큰일이다. 이게 정상인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악령입니다.) 이게 바로 악령이다. 너희는 이런 것을 추구하길 원하느냐? (원치 않습니다.) 너희도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 사역이 사람을 그 정도로 변화시키겠느냐? 하나님 사역의 목적이 사람을 초자연적인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네가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을 체험하게 해서 그로부터 하나님이 고심하며 사역한다는 것을 인식하든, 자신의 부족함과 결함을 인식하든, 자신의 패괴 성품을 인식하든 그 인식을 바탕으로 진리를 구하고 진리를 실행하여 차츰차츰 진리에 진입하게 한다. 이는 전혀 초자연적이지 않은 더딘 과정이다. 어떤 사람은 소극적 상태에 빠지면 이런 말을 자주 한다. “하나님을 이렇게 오래 믿었는데, 제가 얻은 게 뭐가 있죠?” 얻은 게 없다고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많은 일을 분명하게 알지 않았느냐? 믿으면 믿을수록 마음이 평안하고 든든해지지 않았느냐? 또 믿을수록 이것이 인생의 바른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만약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네게 수확이 있다는 뜻이다. 비록 돈, 지위, 명예와 이익과 같이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과 물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지만, 너는 마음속으로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고,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었다. 또 너는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도 깨달았고, 무엇이 피조물이고 어떤 본분을 이행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이제는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면 괴롭고 삶이 공허하다고 느끼게 되었으니, 이는 네가 하나님을 믿고 이미 수확이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냐? 네가 얻은 것은 그 어떤 물질적인 것보다도 가치 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거두는 성과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람에게 인성과 본능이나 육의 정상적인 필요와 정상적인 모습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변화가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정상 인성의 범위 안에서 여러 가지 환경을 체험하게 하여 그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그리고 천천히 여러 인식과 체험을 얻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점진적이고 더딘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의 생각과 관념이 조금씩 변하고, 사람과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며, 각종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한 관점과 방식이 변하고, 사람의 일부 패괴 성품도 더 이상 예전처럼 뚜렷하지 않게 되며, 사람의 양심과 이성이 어느 정도 회복된다. 실질적인 수확은 바로 이런 것이지, 비현실적이고 허무맹랑하며 공허하다 못해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 사역을 순차적이고 점진적으로 해 나간다. 물론 그보다 더 주요한 한 가지 원칙은 순리대로 사역하는 것이다. 이 순리대로라는 말을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무엇을 순리대로라고 하느냐?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사역하거나 말씀할 때 강요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너에게 환경을 배치하고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처럼 너에게도 진리를 공급한다.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을 네가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관점과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말씀으로 모두 명시하였고 명확한 진리 원칙도 알려 주었다. 어떻게 대할지는 네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너는 진리를 받아들여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고, 진리를 거부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또 하나님이 환경을 배치해 너를 드러내는 것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하나님 사역을 거들떠보지 않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에 너는 선택의 자유가 있으니, 자유롭게 택하면 된다. 예를 들어, 네가 이행해야 하는 본분을 마음과 힘을 다해 이행하는 것을 택할 수도 있고, 건성으로 이행하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는 완전히 네 개인의 선택에 달린 일임은 물론 네 개인의 자질과 능력, 본능 등의 측면에 달린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추가적으로 사역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보통의 경우 하나님은 추가적으로 독촉하거나 강요하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겠느냐? 하나님이 네게 환경을 배치한 것은 네게 잔칫상을 차려 준 것이나 다름없어서 찬요리, 익힌 요리, 밥이며 국이며, 과일에 음료까지 온갖 음식이 다 차려져 있고 하나님은 네게 선택할 자유를 주었다는 의미이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모두 네 자유고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오직 진리를 선포해 사람에게 공급할 뿐이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잔칫상을 대충 훑어보고는 잔칫상의 진수성찬이 어떤 맛인지 직접 맛도 안 보고 품평만 한다. 그리고 한바탕 도리를 늘어놓고는 가 버린다. 또 어떤 사람은 구경하는 것을 택한다. 이 진수성찬을 방치한 채 아무런 태도나 관점도 보이지 않고 그냥 가 버린다. 반면 어떤 사람은 직접 맛보고 진수성찬을 체험하며 한 음식의 조리법도 배운다. 하나님이 배치한 이런 환경에서 네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순응하든 아니면 거절하고 부인하든, 혹은 업신여기고 적대시하든 하나님에게는 모두 하나의 태도이다. 사람의 여러 가지 태도를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고 처리하겠느냐? 사람에게 수많은 진리를 공급하고 나면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관찰하고 기록하는 태도만 가질 뿐이다.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과 상관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과 관계되겠느냐? 네가 어떤 길을 택하느냐와 관계되고, 네가 결국 무엇을 수확하느냐와 관계되며, 네 마지막 결말과도 관계된다.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은 더 많은 보조적인 사역을 추가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이 다해야 할 책임과 의무만 다할 뿐이다. 하나님이 네게 진리를 공급하고 각종 사람과 일, 사물을 처리하는 원칙을 알려 주고 나서 네게 환경을 배치해 줄 수는 있지만, 네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길을 갈지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게 한다. 예를 들어, 리더 일꾼으로 뽑히면 너는 진리 원칙과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대로 할지, 아니면 제멋대로 굴며 자기 입맛대로 할지 스스로 택할 수 있다. 네가 만약 모든 일을 진리 원칙대로 처리하고 사역지침에 따라 본분을 이행하는 것을 택한다면 하나님이 지켜보고 기록할 것이니, 결국 너는 진리를 얻게 되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결말이다. 그런데 만약 네가 네 뜻에 따라 하고 제멋대로 굴면서 하나님 집의 사역지침과 진리 원칙을 어긴다면 이것 역시 사람이 가는 길을 나타내는 하나의 선택이니, 이 또한 하나님이 지켜보고 기록할 것이다. 물론 네 결말이 어떨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네가 진리와 생명을 얻는다면, 하나님에게 칭찬도 받고 네게 좋은 종착지도 주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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