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6) 제 3 부
조금 전까지 인성 중에서 시비에 밝은 것과 관련된 모습, 즉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변별할 줄 아는지에 관해 교제했다. 이런 측면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은 사람이 생활 속에서 늘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사람의 정상적인 희로애락은 긍정적인 사물이냐, 부정적인 사물이냐? (긍정적인 사물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긍정적인 사물이냐, 부정적인 사물이냐? (부정적인 사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사치스러운 욕망은 긍정적인 사물이냐, 부정적인 사물이냐? (부정적인 사물입니다.) 일상에서 사람은 자기가 접할 수 있는 많은 일을 사실 지각하지 못하고 있다. 일부 긍정적인 사물은 사람의 생활, 생존과 함께하면서 사람의 생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사람의 생존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그 어떤 부정적인 사물로도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이런 긍정적인 사물을 자주 등한시한 채 오히려 많은 부정적인 사물들이 사람과 함께하면서 사람의 생활을 지탱하고 사람이 생존하는 데 동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많은 사람이 사실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 무감각하다. 무감각한 건 문제가 안 된다. 그것이 긍정적인 사물임을 알고 나서 그것에 반감을 품지 않고 내면 깊이 그것을 동경하며 사랑할 수만 있다면, 인성이 긍정적인 사물을 동경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런데 만약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알고, 무엇이 부정적인 사물인지 아는데도 여전히 긍정적인 사물은 좋아하지 못하면서 부정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속으로 호감을 품는 것도 모자라 대단히 흥미를 느낀다면, 더 나아가 여건과 기회가 되면 꼭 그것을 좇으면서 얻고자 한다면, 이는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대한 성향이 긍정적인 사물은 사랑하지 않고 부정적인 사물을 사랑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는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 아닌 부정적인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양심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비인류이다. 사람이 아닌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토마토를 심었는데, 토마토가 자랐을 때 화학 약품을 발라 주면, 하루 만에 색이 붉어져서 바로 팔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정말 좋은 방법이다. 다들 그렇게 파니 나도 그렇게 팔아야지. 그러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거야. 게다가 토마토를 일찍 먹을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없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토마토를 팔았고 자기도 먹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화학 약품으로 숙성을 촉진한 토마토는 사람 몸에 해롭기 때문에 그걸 파는 것은 다른 사람을 해치는 행위라고 일러 주었다. 그런데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게 왜 사람을 해치는 행위죠? 이건 과학 연구의 성과예요. 긍정적인 사물이라고요. 과학은 사람을 위한 거예요. 과학이 이런 걸 만들어 냈으니, 사람의 생활에 보급해야죠. 사람은 과학을 떠나서 살 수 없어요. 과학에 의지해야 한다고요.” 심지어 과학을 진리로 여기고 사람들에게 과학을 사랑하고 배우며 이용하라고 하면서 모든 것은 다 과학을 근거로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과학이 항상 옳지만은 않으며 과학적으로 발명된 것 중에는 사람에게 해로운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화학 무기나 첨단 무기는 인류를 학살할 수 있다. 특히 유전자 변형 식품은 인간에게 끝도 없는 재앙을 불러오지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기는커녕 이런 말을 한다. “과학이 틀릴 수 있나요? 만약 과학이 틀렸다면, 국가가 지원하겠습니까? 전 인류가 과학을 배우고 이용하고 있는데, 설마 인류 전체가 틀렸을까요?” 이게 맞는 말이냐? 그는 전 인류가 과학을 숭상하고 이용하고 있으며 사회의 흐름이 바로 이렇다 보니 아무리 부정적인 사물이라도 긍정적인 사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시비에 밝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의 말은 무엇이냐? (황당한 논리입니다.) 황당한 논리와 그릇된 주장이고 억지스러운 논리이다. 사악한 인류 중 대다수 사람이 이런 주장에 대해 동조하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주장을 인정하고 수긍하든 틀린 것은 영원히 틀린 것이고, 부정적인 사물은 언제까지나 부정적인 사물이며, 억지 논리는 끝까지 억지 논리일 뿐, 긍정적인 사물이 될 수 없고, 진리가 될 수도 없다.
늘 사회의 흐름을 좇고 황당한 논리를 늘어놓기 좋아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물을 특히 좋아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가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는데, 사실 그 병은 운동하거나 일과와 휴식 시간만 조정하면 낫는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오늘날의 첨단 과학 기술 수단과 방법으로 치료받으려 한다. 네가 “의학이 발전했고 그런 방식으로 치료하면 효과가 분명한 건 사실이지만, 후유증이 있습니다. 후유증이 생기면 돌이킬 수 없어요. 자연적인 방식으로 치료해야 해요. 운동을 하거나, 일과와 휴식 시간을 조정하고, 식습관을 개선하고 규칙적으로 식사하면, 서서히 몸이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돌아올 거예요. 그러면 증상들도 조금씩 호전될 거고요.”라고 말하면, 이런 사상 관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지만, 그러지 못하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다.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군. 그건 수천 년 전의 치료 방식이고 치료 철학이야. 치료는 3할이 약, 7할이 요양이라는 것도 옛말이지! 지금은 의학이 발전해서 첨단 과학 기술로 치료해야 효과가 빨라. 약만 먹으면 병이 바로 낫는다고!’ 그의 사상 관점대로라면 인류의 온갖 병을 치료해서 사람이 장수할 수 있을 정도로 의학이 발전하기만 한다면, 의학은 긍정적인 사물이 될 것이고, 사람은 의학과 과학을 믿어야 하며, 과학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아무리 많은 병에 걸려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첨단 과학 기술만 있으면 어떤 난치병도 치료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설사 후유증이 있더라도 걱정 없을 것이다. 이런 주장이 정확하냐? 이것은 황당한 논리다. 말해 보아라,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인지에 관해 이런 부류와 이야기한다면 말이 통하겠느냐? 그가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받아들이지 못할 겁니다. 그와 말이 통하지 않을 겁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자신이 긍정적인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 세계 사람이 한 명도 빠짐없이 이런 사악한 흐름에 휩쓸려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을 내면 깊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사람과 일을 바라보지 않는다. 여전히 사탄의 사상 관점, 사탄의 사악한 흐름을 근거로 모든 일을 바라보거나 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부류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고 설교를 제법 들었으며 본분도 이행하고 있고 말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싶다고 하지만, 실생활에서 일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부정적인 사물과 긍정적인 사물에 대한 취사선택도 변하지 않았다. 받아들인 부정적인 사물이 이미 마음에 뿌리내려서 그는 진리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고수하려 한다. 이는 그가 속으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가 아닌 부정적인 사물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설령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고 진리에 관한 설교를 들었으며 도리상 그 말씀이 옳으며 진리라는 것을 깨닫더라도 그는 이미 오래전에 내면 깊이 받아들인 부정적인 사물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하지도 않는 것이다. 구체적인 일이 닥치면, 그는 속으로 여전히 기존의 잘못된 관점을 고수하고, 계속해서 부정적인 사물을 긍정적인 사물로, 잘못된 관점을 올바른 관점으로 간주한다. 반면 긍정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물이라고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부정적인 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긍정적인 사물은 세력이 너무 작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도 너무 적은 것 같아. 사회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건 객관적 사실이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이 사람의 마음이 시비에 밝지 않고,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부류는 긍정적인 사물에 흥미가 없고, 늘 자연을 바꾸고 싶어 한다. 자연의 생존 법칙, 사람의 생리 법칙과 생존 법칙을 바꾸고 싶어 하고, 늘 자연과 각종 생물을 마음대로 다루고 싶어 한다. 예를 들면, 그는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하면 개 유전자 속에 고양이 유전자가 생기게 해서 개도 고양이처럼 쥐를 잡게 할 수 있을까? 고양이가 쥐도 잡고 개처럼 집도 지킬 줄 알면 정말 좋지 않을까?’ ‘암탉이 알도 낳고 울기도 한다면 암탉만 키우면 되니 얼마나 좋아!’ 보아라, 그는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시비에 밝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동물은 참 훌륭해! 때맞춰 울 줄 아는 수탉은 암탉의 짝이 되어 주고, 암탉은 알을 낳고 병아리를 길러 내지. 게다가 인간은 수탉 고기도 먹을 수 있고 암탉 고기도 먹을 수 있어. 개를 키우면 개는 집을 보면서 주인 옆을 지켜. 고양이를 키우면 고양이는 쥐를 잡아 주고 눈에 띄진 않지만 때로는 가족이 되어 주기도 해. 정말 훌륭해. 저마다 역할이 있잖아.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건 다 좋다고!’ 그런데 이런 긍정적인 사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사탄의 관점으로 긍정적인 사물을 부정하고 정죄하며, 사탄의 관점으로 각 생물의 생존 법칙과 자연계의 각종 법칙을 바꾸려 하기까지 한다. 심지어는 사람의 생존 법칙까지 바꿔서 과학이 권세를 잡게 하는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 이런 사람은 정상 인성을 지니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그의 인성 속에는 시비에 밝은 특징이 갖춰져 있지 않다. 또한, 그는 자연법칙에 따라 자신의 생활을 관리하지 않고, 항상 사람의 뜻대로 행동하고 싶어 하며, 과학 기술이나 인위적인 방법으로 육체의 정상적인 생활 법칙을 바꾸려 한다. 예를 들어, 정상인은 하루에 일고여덟 시간 정도 쉬어야 기력이 충전되고, 하루의 생활과 일과를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부류는 ‘사람이 안 자고 안 먹고도 하루 일과와 생활을 정상적으로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떤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하면 그렇게 할 수 있으려나?’라는 고민을 한다. 그는 머릿속으로 종종 황당하고 기괴한 생각들을 떠올리곤 한다. 정상 인성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런 법칙에 적응하고 그것을 준수해서 각종 육적인 필요와 문제에 올바로 대응할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항상 그 법칙을 바꾸어 평범한 사람과는 달라지고자 하며 자신의 육적인 본능을 뛰어넘어 육의 통제와 제약을 받지 않으려 한다. 너무 끔찍하지 않으냐? 그는 늘 남들과 다르고 싶어 한다. 남들이 하루에 여덟 시간을 잘 때, 그는 하루에 십 분에서 길어야 한두 시간만 자고도 기력을 회복하고 싶어 한다. 이는 정상인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육체의 자연법칙은 하나님이 정해 놓았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다. 한 사람의 식사량이 얼마나 되는지, 오장육부가 어떤 법칙으로 작동하는지, 한 사람의 기력이 얼마나 되는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사람의 뇌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생각할 수 있고, 문제를 얼마나 오래 생각할 수 있는지는 모두 고정되어 있다. 인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법칙들은 사실 모두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사물이다. 인간은 일정한 법칙을 준수해야 이렇게 한 해 한 해 살아갈 수 있고, 대를 이어 번성할 수 있으며, 생존을 이어갈 수 있다. 각종 생물도 마찬가지이다. 일정한 자연법칙과 생활 법칙을 따르면서 움직이기도 하고 쉬기도 해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만약 자연법칙을 어긴다면, 사람이 생명을 이어가는 데에 문제가 생길 것이고, 사람의 생명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사람의 정상적인 생활과 하루 세끼 식사,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 하루에 소화할 수 있는 작업량 등이 지장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생리적 리듬은 인간의 정상적인 생존을 지켜 주는 긍정적인 사물로,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존중하며 준수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사탄에 속한 비인류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인간의 생리적 리듬을 준수하면, 너무 무능하고 못나 보여! 늘 이런 자연법칙에 제한받아 졸리면 자야 하고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해. 안 그러면 말하고 생각하는 게 둔해지고 손이랑 가슴도 떨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지. 귀찮아 죽겠어! 만약에 먹기만 하면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약이 있어서 며칠 쉬지 않아도 로봇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기운이 넘치고, 배고플 땐 어떤 혈만 누르면 바로 허기가 사라져서 며칠을 굶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또 몸도 야위지 않고 기력도 떨어지지 않고, 몸이 정상적이고 건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이 늘 이런 자연법칙을 바꾸려 하는 것은 긍정적인 사물을 부정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사물의 존재는 인간의 정상적인 생존을 지키고 인간의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해 준다. 따라서 사람은 그것을 준수해야 할 뿐 아니라 이성적으로 대해야 한다. 자연법칙을 어기거나 억누르지 말고 맞서지도 말며 더욱이 대항하지도 마라. 반면 인간의 생리적 리듬에서 벗어나는 것들, 사람의 상상, 평범하지 않은 생각이나 초자연적인 행동은 모두 부정적인 사물이다. 모두 부정적인 사물인 만큼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고 분별하고 내쳐야 한다. 네가 만약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을 분별할 줄 알고, 생존 과정에서 그것들을 올바로 대하고 이성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네 인성은 정상이다. 그런데 네가 늘 이런 긍정적인 사물이 네게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느끼지 못한 채 그것에 대항하고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려 한다면, 늘 부정적인 말과 관점에 따라 이런 긍정적인 사물을 바꾸고 객관적 사물의 법칙을 어긴다면, 이는 네 인성이 시비를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교제하니 이제 이해가 되지 않느냐? (이해가 됩니다.)
인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사물도 분별하면서 속으로 혐오하고 내쳐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잘 모르는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긍정적인 사물이냐, 부정적인 사물이냐? (긍정적인 사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은 긍정적인 사물이냐, 부정적인 사물이냐? (긍정적인 사물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은 긍정적인 사물이다. 그렇다면 패괴된 인류는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에 대항할 때 주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 (‘사람의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렸으며, 지식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관점으로, 분명 부정적인 사물에 속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를 사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말이 옳고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도리적으로는 인정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사람의 노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고,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으며,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하지 않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없고, 좋은 직장, 밝은 미래, 윤택한 생활 환경을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시비에 밝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이삼십 년을 살고도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고도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렸고 지식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종착지를 얻으려면, 잘 누리고 잘 살려면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까지 노력해야 이긴다’는 이방인의 말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이 시비에 밝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시비에 어두운 사람이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입으면서 윤택한 삶을 누리고, 사회에서 남들에게 우러름도 받게 되니, 그는 지금의 삶을 자신의 근면한 노력으로 얻어냈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노력해야 이긴다. 사람의 운명은 남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라는 말이야말로 참되고 올바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겠느냐? (아닙니다.) 사람은 지식을 습득하기 전에는 이런 걸 모른다. 그런데 일단 지식을 습득하면,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말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사람의 운명은 자기 손에 달렸어. 자기 손으로 행복을 일굴 수 있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시비에 밝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작자냐? 인성이 없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이다. 양심과 이성이 없는 사람은 시비에 어둡다. 그가 생활 속 일들을 실제로 체험하고 나서도 여전히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긍정적인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느끼지도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시비에 어두운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인성을 지니지 않았고, 결코 사람이 아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도리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의 규칙과 법칙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이고, 모두 긍정적인 사물이며, 인류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준수하고 동경하며 추구해야 할 것이기도 하죠.” 그러다 첨단 과학 기술에 관한 정보나 사물을 접하고 나면, 결국 그런 일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 어떤 논조로 바뀌겠느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생활의 규칙, 만물의 법칙과 만물의 생존 규칙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것들을 긍정적인 사물이라고 생각하는데, 너무나도 시대착오적인 생각입니다! 식견이 없는 거죠. 우물 안 개구리처럼요! 이젠 과학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우리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많아졌어요. 과학 기술 제품들이 대신 해 주거든요. 이런 게 진보죠! 자율 주행 기능이 있는 자동차를 보세요. 차에 타서 목적지를 설정하고 한 마디만 하면 차가 출발해요. 진짜 첨단 과학 기술이죠. 정말 부럽습니다! 첨단 과학 기술을 실현한 덕분에 인간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만물의 주인이 되었어요. 그래서 과학이야말로 절대적인 진리라고 하는 겁니다! 배움과 지식이 없고 과학을 모르면, 뒤처지고 저속해지는 거예요!” 그의 말이 바뀌지 않았느냐? 그는 속으로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의 차이를 분별하지 못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항공 박물관을 한 바퀴 둘러보고는 이렇게 감탄한다. “와! 안목이 엄청 넓어진 것 같아.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했구나! 일반인이 오면 상경한 시골 쥐처럼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 지금 과학이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지 상상도 못 할걸? 이런 최첨단 과학 기술은 난생처음 접해 보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연 규칙이나 법칙 따위나 늘어놓고 있으니, 정말 시대착오적이야!” 현대 사회의 이런 현란한 것들을 보고 나면, 기존에 깨달았던 긍정적인 사물과 부정적인 사물에 관한 이론들이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철저하게 부정당한다. 사람은 무엇이 긍정적인 사물인지 더욱 명확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사물이 시대에 뒤떨어져서 현대 과학 기술과 현대 인류의 발전 속도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런 부정적인 사물들을 특별히 치켜세우고 동경하면서 자신도 현대 첨단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는 일원이 되고 싶어 한다. 이런 부류가 시비를 깨달은 사람이겠느냐? (아닙니다.) 시비에 밝은 것이 인성이 갖추어야 할 한 가지 특징이라면, 그것은 인성 속에서 저절로 생기고 원래부터 있던 것이지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즉, 시비에 밝은 인성의 특징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혹은 지리적 환경이나 사람과 일, 사물이 변한다고 해서 변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아무도 그것을 바꿀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바꾸거나 없앨 수 없다. 이런 부류는 언제나 긍정적인 사물을 마음속 깊이 동경하는 반면, 부정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감과 혐오감을 품는다. 그의 인성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의 육적인 생활 규칙과 육적인 생존에 유익이 되는 것, 자연적인 것, 사람을 차분하고 평온하게 해 주는 것,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적 필요에 부합하는 것이지 화려하고 거창하며 대단한 것 따위가 아니다. 보아라, 똑같이 처신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단순하고 눈에 띄지 않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요란한 것을 싫어한다. 평온한 것을 좋아하고 평안과 기쁨이 있는 것을 좋아하며 조용히 생활한다. 그런가 하면 이런 것을 싫어하고, 요란하고 화려하고 거창하며 대단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자기를 드러내는 것, 출세하는 것, 유명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평범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인성의 차이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