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제 5 부
4. 네 번째 특징, 어리석음
방금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의 세 번째 모습인 흐리멍덩함에 대해 교제했다. 그 외에 또 한 측면의 모습이 있는데, 바로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 역시 지능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이 부류는 어느 정도로 어리석겠느냐? 그들의 어떤 모습을 어리석다고 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머리 둘 곳도 없으시고 얼마나 고심하시는데요! 하나님께서 사역하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대단히 고된 일이라고요!”라고 하면, 이방인은 듣고서 이렇게 말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예요!” 네가 하는 말을 이방인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네 말이 무슨 뜻인지, 네 말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네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어느 부분이 어리석냐? 말하는 대상이 틀렸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흐리멍덩한 사람이 체포되자 악질 경찰들이 묻는다. “당신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던데,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무슨 일을 시키지? 하나님을 믿는 게 불법이라는 걸 알고는 있나? 당신들은 나라의 법률을 어기고 있어. 우리나라는 이런 신앙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사실 이 악질 경찰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정죄할 꼬투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자는 간파하지 못하고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고, 바른길을 걸으며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마귀가 듣고는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면, 당신네 교회 리더가 누구고, 교회의 돈을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말해 봐!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당신의 하나님이 정죄할 거야!”라고 하자, 그 어리석은 자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리석은 짓 아니냐? 어찌 마귀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 있느냐? 어찌 진리를 마귀에게 알려 줄 수 있느냐?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해 주어서는 안 된다. 또 어떤 어리석은 자는 경찰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들은 왜 늘 저희를 체포하나요? 어째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 겁니까? 왜 우리에 관해 헛소문을 퍼뜨리죠?” 왜 그러는지 정말 모르느냐? 그가 답해 줄 거라 생각하느냐? 답을 얻을 수 있겠느냐? 그에게 이유를 묻는 게 황당하지 않으냐? 어리석은 짓 아니냐? 이 어리석은 자는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늘 묻는다. “공산당은 왜 항상 저희를 박해하나요? 어째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를 늘 체포하고, 우리에 관해 헛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하죠? 우리는 분명 박해를 받아서 집에 못 가는 건데, 그들은 우리가 가정을 버렸다고 하죠. 이 마귀는 사실대로 말하지 않아요! 헛소리 아닌가요? 저희가 영상과 문예 프로그램을 만들어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것을 마귀 사탄은 왜 그렇게 증오하는 걸까요? 늘 우리 집에 와서 가족과 친척들을 위협하며 으름장을 놓고, 감시 카메라까지 달아서 감시해요. 왜 그러는 거예요?” 그걸 물어볼 필요가 있느냐? 어리석은 질문 아니냐?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영문을 모르는 거라면 정상이겠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아직도 모르느냐? 알고 있다면 왜 물어보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아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공산당이나 국가에 반기를 들지도, 정치 활동을 하지도 않았고, 정부를 전복하거나 그들의 통치를 전복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렇다고 그들이 통치하는 데 위협이 된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왜 공산당은 항상 저희를 체포하고 박해하는 거죠? 우리는 늘 이렇게 숨어다니느라 집에 가고 싶어도 못 가고, 집에 전화하고 싶어도 못 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중국 공산당은 왜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 걸까요?” 정말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대단히 우매하고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남편을 만났는데, 그 남자는 연애하면서 “나도 당신을 따라 믿을게요. 함께 천국에 가요.”라는 듣기 좋은 말을 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불신파이자 마귀이고, 그녀를 가지고 논 것뿐이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자, 그는 화를 내며 예배고 본분 이행이고 하지 못하게 했고, 하나님 말씀도 읽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이 어리석은 여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예전엔 안 그랬는데. 정말 날 사랑해 주고 아껴 줬다고. 예전엔 나를 이해해 주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 걸 지지해 주더니, 지금은 어째서 딴사람이 된 것 같지? 예전에는 같이 믿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 그녀는 집을 떠나 본분을 이행한 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마음속으로 늘 이 일을 깊이 생각했다. ‘그이한테 다른 여자가 생길 리 없어. 날 제일 사랑하거든. 그이에게 난 유일한 여자이고 첫사랑이야. 그이가 다른 여자를 다시 사랑할 수는 없을 거야. 더군다나 그이는 점잖은 사람인걸. 그리고 그이처럼 별 능력도 없는 사람과 누가 사귀려고 하겠어?’ 사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계속 자기를 기다려 주기를 바랐지만, 사실 그녀가 집을 나오기 전부터 그는 하나님을 믿고 매일같이 본분을 이행하는 그녀를 보고 진작에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럴 리 없다면서 ‘그이가 누구랑 바람이 나겠어. 그이는 그런 사람이 아닌걸. 내가 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믿겠다는 말도 했다고!’라고 생각한다. 여간 어리석은 게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집을 비웠다. 남편의 외도는 둘째 치고 자녀, 부모도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진작에 그 집 식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녀를 뭐라고 욕하고 어느 정도로 미워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녀는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니, 어리석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로 어리석냐? 정상인의 지능을 가지지 못해 정상인의 사고로 사람과 일을 바라볼 줄 모르고, 그저 자신의 유치하고 치우치며 미련한 사상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한다. 결국 항상 스스로 곤경에 빠져 수동적으로 변하고, 우매하게 행동하고 만다. 어리석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가 일부 있다. 어리석다는 것은 정상 인성의 지능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일을 처리할 때 좋은 성과에 도달하도록 뒷받침할 기본적인 원칙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결론적으로, 진리를 기준으로 판단해 보면,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의 주된 특징은 대체로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높은 기준이다. 정상 인성의 지능을 기준으로 판단해 본다면, 그는 일상에서 직면하는 사람과 일, 사물, 환경도 정상 인성의 사고로 바라보지 못한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부류는 일상의 의식주조차 자기 힘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대응하지 못하며 해결하지 못한다. 설사 굶어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남는다고 해도 각 측면의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이런 사람은 미련하고 우둔해 보이니 진정한 정상 인성과는 거리가 멀다. 먹이를 먹을 때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모르는 동물을 보아라. 이런 동물은 사람이 때에 맞춰 적당량을 먹여야 건강하게 먹을 수 있다. 개의 경우처럼 말이다. 개에게 얼마를 먹든 괜찮다며 마음대로 먹게 놔둔다면, 그 개는 너무 많이 먹을 것이다. 더는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불러야 그만 먹는다. 그러니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본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을 혼자 힘으로 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째서 혼자 힘으로 해내지 못하겠느냐? 그들은 시종일관 일을 할 때의 원칙과 기본 조건, 마지노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동물이 먹이를 먹을 때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사람이 관리해 주지 않고 알아서 먹으라고 한다면, 동물은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을 것이고, 사람이 관리하고 사육한다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는 이 특징이 매우 뚜렷하다.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픈지 부른지 모르고, 잠을 자도 밤낮이 바뀌는 걸 모른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 부류가 인간의 지능을 갖추고 있겠느냐? 분명 갖추고 있지 않다. 사시사철 몸에 어떤 증상이 나타날 때 음식으로 어떻게 조절하는지, 어떤 계절에 어떤 음식이 몸에 좋고 어떤 음식이 몸에 해로운지, 어떤 게 건강한 생활이고 어떤 게 건강하지 않은 생활인지 정상인이라면 20대에는 모르다가 30대에는 조금 알게 되고, 40대에는 더 많이 알게 되며, 50대에 이르러서는 자기 몸의 실제 상태를 토대로 자신에게 맞는 생활 규칙을 도출해 낸다. 이 규칙은 거의 확정적이고 틀이 잡혀 있어서 여기에 큰 변수는 없다. 하지만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는 80대가 되도록 규칙을 도출하지 못한다. 과식하거나 소식하고, 먹고 나면 배탈이 나거나 소화 불량에 걸린다. 몸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어떤 생활 습관이나 어떤 음식 때문인지도 모른 채 아무렇게나 먹어 버린다. 자기 체질에 맞는 음식과 안 맞는 음식을 찾아 다방면의 정보를 근거로 자신에게 적합한 식습관이나 섭취 방식을 정리해 보라고 해도 그러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인터넷에서 어떤 사람이 달걀 껍데기에 칼슘 함량이 높으니 달걀 껍데기를 먹으면 칼슘을 보충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키가 작은 건 칼슘 부족 때문이야. 그러니 달걀 껍데기를 먹어서 칼슘을 보충하자.’ 결국 한동안 달걀 껍데기를 먹지만, 먹어도 칼슘이 보충되는 것 같지 않다. 치우친 행동 아니냐? 인터넷에서 달걀 껍데기에 석회질이 많아 칼슘을 보충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으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달걀 껍데기를 먹는 부류는 치우친 사람이 분명하다. 그는 올바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치우치고 극단적이며 미련하게 행동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겠느냐? 달걀 껍데기는 칼슘 함량이 많지만 먹을거리는 아니다. 그것에 칼슘 보충 효능이 있을지는 알 수 없고, 칼슘을 보충할 수 있다고 해도 먹은 후에 몸에 흡수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더군다나 달걀 껍데기를 먹어서 칼슘을 보충할 수 있다는 말에 근거가 있느냐? 그것이 검증된 견해더냐? 사실 의학적으로 검증된 칼슘 보충 방법도 많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황당한 것이다. 가장 간단하게는 칼슘제를 먹으면 보충되지 않겠느냐? 위나 치아가 상하지 않고, 맛도 괜찮은 데다가 효험도 볼 수 있다. 이것이 올바로 받아들이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치우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고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는 ‘달걀 껍데기가 칼슘을 보충해 준다는 설이 있다면, 달걀 껍데기는 먹을 수 있는 거야. 칼슘을 보충하려면 꼭 먹어야 해.’라고 생각한다. 먹으면 흡수되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이는 치우치고 극단적인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바나나 껍질은 비타민 함량이 높아서 먹으면 미용 효과가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먹겠느냐? (먹지 않을 것입니다.) 왜 먹지 않느냐? (하나님께서 지으신 먹을거리 중 일부는 정상적인 법칙대로라면, 껍질을 벗겨 먹어야 합니다. 기어이 껍질을 먹으려 하는 것은 극단적인 행동입니다. 비타민을 보충해서 미용 효과를 보려면, 정상적으로 먹을 수 있고 미용 효과도 있는 먹을거리를 먹으면 됩니다.) 이것이 올바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이지 않는 저 극단적인 멍청이를 보아라. 그는 기어이 억지로 먹으면서 “전 육을 저버리고 바나나 껍질을 먹어서 특정한 영양소를 보충하겠어요.”라고 한다. ‘바나나 껍질은 맛없어. 먹을거리가 아니니 안 먹을래. 대신 그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는 다른 먹을거리를 먹으면 되잖아?’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해야 올바로 받아들이는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판별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의 지능을 갖추었다는 증거이다. 만약 이렇게 판별할 줄 몰라서 바나나 껍질에 특정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기어이 먹으려 하고, 먹기 거북해도 먹으려 한다면, 이런 사람은 멍청이고, 동물에서 환생한 자로서 정상 인성의 사고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다. 그 어떤 그릇된 주장과 황당한 논리에도 미혹되는 그는 각종 정보의 옳고 그름이나, 진위를 분별할 줄 몰라 늘 기만당한다. 이것이 바로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가 각종 구체적인 일을 대하는 한 측면의 모습이다. 여간 어리석지 않으며, 치우치고 황당하게 받아들이고 극단으로 치닫는다. 어떤 사람이 연구 결과 먹어도 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말도 아니다. 진리를 대신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고 한다면, 이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말이지만, 이런 영양소는 물질적인 것이니 대신할 수 있는 게 없을 리 없다. 하나님이 지은 먹을거리는 종류가 다양하다. 각종 영양소가 함유된 먹을거리가 많으니, 규례를 지킬 필요 없이 저마다 체질과 연령, 몸 상태에 따라 정확하게 취사선택하면 된다.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부류는 하나의 정보를 들으면, 올바르게 대할 줄 모르고, 분별할 줄도 몰라서 항상 미혹되어 결국 “인터넷에 떠도는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사실이라고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라고 한다. 보아라, 그는 또 다른 극단으로 치닫는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보는 건 괜찮지만, 사람의 지능과 올바른 사고방식을 활용해서 그것을 변별하고, 올바로 취사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유익한 것은 취해도 되지만, 유익도 없고 적합하지 않다면, 참고만 하거나 상식으로 대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사고를 갖춘 실행법이다. 사람의 사고를 갖추지 못한 실행법은 좌우 둘 중 한쪽으로 치우치고, 속아 넘어가거나 절대로 믿지 않는다. 그는 마음을 들여서 일을 분별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런 부류는 각종 정보를 대하거나 실생활에서 실제적인 일을 처리할 때 굉장히 편집적이고 터무니없으며 흐리멍덩하고 미련해 보인다. 이런 미련한 사람, 옳고 그름이나 시비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매일 일상을 어떻게 보내겠느냐?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걱정이 되는데, 어찌 그들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어떤 여자는 건달에게 시집가서는 ‘우리 그이는 나를 무척 사랑해. 난 진정한 사랑을 얻었고 사랑에 빠졌어.’라는 생각에 더없이 행복해한다. 남들이 보기에 그녀의 남편은 사람이 아니라 마귀인데, 그녀는 왜 그렇게 빠져서 즐거워하겠느냐? 다들 그녀 대신 속을 태우고 걱정하는데 말이다. 결국 그녀는 아이까지 낳고도 그자에게 버림받아 의지할 데도 없어졌으니, 그 얼마나 힘든 나날들이겠느냐!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가 하는 이런 어리석은 짓들을 통해 이런 부류가 살아가고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하나님의 은혜 덕분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해 주어서 살아갈 수 있고, 먹고살 길을 주어서 그 음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새와 땅 위의 작은 동물들, 심지어 개미조차 먹이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느냐? 사람으로 환생하면 하나님은 먹고살 길을 주거나 먹여 살릴 사람을 준비해 주고, 혹은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을 만한 특기를 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이 굶어 죽지 않게 하고 살길을 마련해 주면, 늙어 죽을 때까지 살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이런 부류는 타고난 자질로 보아 정상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문제를 처리할 능력이 전혀 없으니 밥벌이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도 제법 복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갖춘 각 측면의 재능과 지능으로 보면, 이토록 복잡하고 사악한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푼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에서 환생했든, 사람에서 환생했든 결국 하나님이 보기에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숨을 붙여 주었다면, 생활하고 생존하는 데 필요한 것을 정상적으로 공급하여 생명을 유지하며 계속 생존하게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 밖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서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소박했지만 꽤 잘 살았잖아요? 저한테 어리석다고 하는 건 절 모욕하는 거 아닌가요?”라고 한다면, 그건 틀린 생각이다. 네가 돈을 벌어서 먹고사는 것을 정말 네 능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99%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네가 힘을 써서 일해서 밥값을 벌도록 하나님이 네게 힘을 주었고, 네가 한 가지 직업에 종사하여 돈을 벌고, 가정을 돌보며 생존하도록 하나님이 네게 한 측면의 특기와 더불어 좋은 신체까지 준 것이다. 이는 다 무엇 덕분이냐? 하나님이 네게 가장 기본적인 선천적 조건을 주어서 네가 사람의 정상적인 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먹고살면서 생계를 이어 나가게 해 준 덕분이다. 결론적으로 네가 어리석든 흐리멍덩하든 결국 지금 너는 외관상 사람이라는 피조물로서 자신의 신분과 가치를 알아야 한다. 또 하나님의 베풂과 공급,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올바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네가 가진 특징이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의 몇 가지 특징에 해당해서 자기가 확실하게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라고 생각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어려울 것 없다. 네 유래가 무엇이든, 네가 선천적으로 사람의 지능, 사람의 사고를 갖추었든 갖추지 않았든, 어쨌든 너는 지금 사람의 신분이다. 사람의 신분이니, 너는 사람의 본분을 이행해야 한다. 이행할 수 있는 만큼 이행하고, 가능한 정도까지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최대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해내고 또 제대로 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의 특징이 치우침, 무감각함, 흐리멍덩함, 어리석음이라고 하셨는데, 이 또한 사람의 지능을 갖추지 못한 거잖아요. 절대다수의 사람은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는데, 어떻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적절하게 이행할 수 있겠습니까?” 엄격하게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너는 제대로, 그리고 적절하게 할 수 있다. 지금 너는 어쨌든 사람의 신분이기 때문에 말을 잘 듣고, 그릇된 논리를 펼치지만 않으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이 두 가지조차도 해내지 못한다면, 말하건대 너는 정말 위험한 상태이고, 교회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네가 “이 두 가지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릇된 논리를 펼치지 않고, 옳은 말을 받아들이거든요. 제게 시키는 일은 시키는 대로 이행하죠.”라고 한다면, 네가 정말 이렇게 실행할 수 있다면, 너는 제대로, 적절하게 해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제대로 했고 적절하게 했습니다. 이제 진리 원칙대로 하는 것까지 해내고 싶어요.”라고 한다. 정말 제대로 하고 적절하게 하는 것을 바탕으로 진리 원칙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된다. 이것은 더 요구하지는 않는다. 우기지 않고 그릇된 논리를 펼치지 않으며 자신의 이유를 강조하지만 않으면 되고, 흐리멍덩한 짓을 하지 않으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나서 부인하지만 않으면 된다. 진리 원칙대로 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해라. 이런 부류에 대한 요구는 높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 원칙에 이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의 선천적인 조건을 고려해서 그에게 반드시 진리 원칙대로 하라고 엄격하게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 요구하지 않겠느냐? 그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억지로 요구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무리하게 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마치 동물에게 끼니마다 너무 배불리 먹지 말고, 적당히 먹으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동물이 그럴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한다. 동물은 한 끼에 최대한 먹을 수 있는 만큼 다 먹어 버린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말이다.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가 바로 이렇다. 그에게 진리 원칙대로 하라고 요구해도 그는 그러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런 부류를 포기하는 것이겠느냐?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이 곧 진리 원칙을 깨닫고 파악하라고 요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올바르게 대해 주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말이지, 본분 이행 자격을 박탈한다거나 진리 추구 자격을 박탈한다는 말이 아니며, 구원받을 자격을 박탈한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진리 원칙대로 실행할 것을, 범사에서 진리 원칙에 이를 것을 엄격하게 요구하지는 않겠다는 의미일 뿐이다. 즉,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하라는 것이다. 고의로 교란하지만 않으면, 그리고 핵심적이고 원칙적인 문제에서 그릇된 논리를 펼치거나 제멋대로 행동하지만 않으면 된다. 이런 부류에 대한 요구는 높지 않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우리는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의 본질적인 모습들을 교제했다. 물론, 그다지 자세히 교제하지 않은 모습도 일부 있다. 더 구체적으로 교제하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되어 다소 개괄적으로 교제하면서 여지를 남겼다. 네가 무엇에서 환생했든 결국 너는 지금 사람의 신분이다. 너도 엄연히 사람의 신분을 가진 만큼 체면도 차리고 싶고 존엄도 지키고 싶을 테니, 우리는 너를 존엄하게 대할 것이다. 이 측면에 관해서는 그렇게 상세히 교제하지 않겠다. 대략적으로는 이러니, 스스로 비춰 보아라. 사람은 자기 모습이 동물에서 환생한 사람의 모습에 해당할 경우 굉장히 기분 나빠한다. 자기 신분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냐며 자신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인격적으로 모욕당했고, 자신의 존엄이 위협받았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문득 자신의 지위가 곤두박질쳐서 남보다 열등하다는 느낌을 받고, 더 이상 자신에게 존귀한 구석이 있다거나, 자신의 인격이 고상하고 신분이 존귀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별안간 마음속에 희망과 기댈 곳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고, 앞으로의 종착지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바람직하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람직하지 않고,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들이 잘 지낼 수 있게 우리가 길을 찾아 주어야 한다. 이는 그들을 기만하거나 속이는 게 아니라, 그들이 올바르게 대하고, 진리 원칙대로 실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는 이 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먼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무엇에서 환생했든 이는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지, 사람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사람에게 선택하게 하면, 동물에서 동물로 환생하는 것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동물에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을 택하겠느냐? (동물에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을 택할 것입니다.) 왜 동물에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을 택하겠느냐? (동물에서 사람으로 환생해야 하나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생기고, 하나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동물에서 동물로 환생하는 경우는 어떻겠느냐? (하나님 말씀을 들을 기회가 사라집니다.) 이 경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기회가 영원히 없을 것이다. 그래서 네가 동물에서 사람으로 환생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았다면,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더더욱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네게 사람이 될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해야 한다. 더군다나 이는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사람을 구원하러 왔는데, 너는 대다수 사람이 받지 못한 이 구원의 은혜를 받아 복 있게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이 선포하는 진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네 복이다. 이는 피조된 생물로서는 몇 세대 혹은 수많은 세월을 거쳐도 구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마침 이 시대에 하나님이 너를 택해 사람으로 환생하게 했고, 하나님 집에서 생활하며 사람들과 함께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게 했다. 네 신분을 동물에서 인류 중 한 명으로 바꾸어 사람의 본분을 이행하게 해 주었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영예로운 일이냐! 수많은 생물이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일을 오늘날 너는 얻었고, 누리고 있다. 이런 기회는 절대 흔치 않다. 어떤 생물한테든 이것은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그래서 의기소침해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괴로워하거나 자신의 지위가 남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고 높여 준 것에 감사해라. 하나님의 행사는 너무나도 좋은 것이다. 하나님의 행사는 분명 피조물에 대한 은혜와 긍휼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나서는 하나님이 네 신분과 속성을 바꿔 준 것에 감사해야 한다. 하지만 그저 감사만 하고 끝나서는 안 된다. 감사하는 것 외에 이 기회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 한다. 원래 신분에 상관없이 사람이라는 현재 신분에 따라 본분을 이행할 수 있으니, 이것은 신분을 바꾸고 피조된 속성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꾸겠느냐? 첫째는 바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만약 네가 여러 가지 선천적인 조건의 제약으로 인해 오로지 힘을 쓰는 일만 할 수 있고, 지저분하고 고된 일밖에 할 수 없다면, 그리고 네 신분과 가치에 따라 네가 이행하는 본분이 영원히 그 범위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완화될 여지나 개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너는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겠느냐? 어떤 측면의 모습에서 보더라도 네 지능, 인품, 선천적인 조건을 보면, 사람들 사이에서 네 가치는 영원히 그런 수준이다. 너는 쓸모없는 인간, 바보, 흐리멍덩한 사람, 무감각하고 우둔한 사람, 치우친 사람이다. 네 가치는 높아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너는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네 가치가 영원히 높아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너는 영영 이렇다 할 만한 존엄을 갖지 못하며, 하나님 눈에도 그런 놈으로 영원히 정형화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네 속성에는 겉으로 보기에도 명확한 특징이 있고, 영원히 동물에서 진정한 사람이 되지 못하며, 네게는 구원받을 희망도 없다고, 너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람의 지능도 갖추지 못했으며, 이상(異象)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데다가 하나님 집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각 분야의 업무와 관련된 본분도 이행하지 못하며, 감당하지도 못한다고 말이다. 너는 영원히 더럽고 힘든 일만 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치자. 그럼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 믿는 것을 그만두겠느냐? 자포자기하겠느냐? 목숨을 버리려는 사람도 있지 않겠느냐? “살고 싶지 않아요. 살길이 없는걸요. 이렇게 살아서 뭐 해요?”라고 하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아무리 노력하고 열과 성을 다하며 공을 들이고 대가를 치러도 영원히 네 가치가 변하지 않고, 하나님 집에서 언제까지나 힘을 쓰고 땀 흘리는 사람, 남에게 무시당하고 전혀 존엄하지 않은 비천한 사람일 뿐이라면,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의 부탁과 창조주의 여러 가지 요구를 대할 때, 어떤 실행법을 택해야겠느냐?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원칙적으로, 이론적으로 네 가치와 신분은 정해져 있지만, 사실상 현재 사람들 사이에서, 혹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네 진정한 신분은 사람이다. 왜 사람이라고 하겠느냐? 네가 이행할 수 있는 본분, 너의 일상적인 표출, 선천적인 조건의 각 본능이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범주 안에 있고, 사람의 기본 조건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너는 네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겠느냐? 동물은 어떤 진리 원칙도 알아듣지 못한다. 어떻게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어떻게 해야 자신의 본분을 지킬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충성을 다해 본분을 이행해서 끝까지 힘쓸 수 있는지 모른다. 동물은 이런 것들을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너는 지금 사람으로서 깨닫고 이해하고 있으니, 마땅히 해내야 한다. 네가 할 수 있기에 하나님이 그 원칙에 따라 네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만약 신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면, 또 삶이 창피하고 존엄하지 않다는 생각에 본분 이행을 포기하고,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는다면, 너는 대역무도한 자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기준에 맞는 피조물이 아닌 별종이다.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지금 네 가치가 존귀하든 비천하든, 네가 무엇에서 유래했든, 네 선천적인 조건에 어떤 문제가 있든, 어쨌든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온 힘을 다해 그것을 해내야 하고 제대로 해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제대로 했는데도 진리 원칙에 이를 수 없는 경우, 하나님은 각 부류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요구 기준을 가지고 있다. 즉, 네가 최선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며 충성을 바치기만 하면 기준에 맞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100점을 요구하지 않는다. 60점이면 족하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느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네 태도이다.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고자 하는 태도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이루어야 할 일을 아쉬움 없이 제대로 한다면, 하나님은 이런 태도를 열납하고 칭찬할 것이며, 네가 길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보호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길 끝까지 걸어가면 어떤 결과가 있나요?”라고 묻는다. 미리 알려 주지 않고 나중에 말해 주겠다. 길 끝까지 걸어가면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이 일을 어떻게 대하고, 하나님이 준 본분을 어떻게 대하며, 그 본분을 어떻게 제대로 이행하느냐는 것이다. 그 본분이 무엇이든 하나님 집에서 네게 맡긴 것이라면, 온 힘을 다해 해야 한다. 네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안다면 그릇된 논리는 최대한 펼치지 말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일과 말도 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과 하나님 집에 유익한 일과 말을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그런 건 아직 못 하겠어요.”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해라. 오늘 못 하면 내일 하고, 올해 못하면 내년에 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천천히 해 나가라. 그런데 만약 결말을 선포할 때까지도 하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너의 몫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아무도 네 온갖 행위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이 일은 쉽게 해결될 것이다. 사람의 이성이 어떤지,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에 달렸다. 알아듣는다면 이 일은 너무나도 쉽게 해결될 것이다. 몇몇 사람은 조금 어렵다고 하겠지만, 이런 방향으로 노력하면 결국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네가 이 길을 따라가지 않아도 어쩌면 살아갈 수는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아무도 네게 장담해 주거나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늘 교제한 주제를 듣고 나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무척 괴로운 기분이 들지는 않느냐? 하나님을 믿은 이래로 가장 마주하기 싫은 주제는 아니었느냐? 봉사자에 관한 주제를 듣는 것보다 더 괴롭거나 받아들이기 어렵지는 않았느냐? 받아들일 때 어려움이 있었느냐?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신분을 확실히 파악하고,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찾는다면, 이런 말과 이런 측면의 문제는 그다지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힘들어하는 사람도 몇몇 있겠지만, 듣고 나면 대부분은 자신의 가치나 신분이 무엇인지 따져 묻지 않을 것이다. 정말 자기가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에 해당하더라도 올바로 대할 수 있을 것이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 교제는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보도록 하자!
2024년 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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