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2) 제 2 부
많은 사람이 어떤 분야에 흥미와 기호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런 흥미나 기호가 없는 사람도 있다. 즉, 세상의 직업, 업무 혹은 사람이 자주 접하는 다방면의 사람과 일, 사물에 대해 특별한 흥미나 기호가 없는 평범한 사람 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문학을 좋아하는지, 평소에 일기나 글을 쓰는지 물으면 그는 “좋아하지도 않고 소질도 없습니다. 책을 보거나 글을 쓰면 머리가 아파요.”라고 답한다. 문학 명작을 읽으라고 하면 그는 머리가 터질 것 같고, 속으로 여간 내키지가 않는다. 심지어 이렇게 답하는 사람도 있다. “글자만 보면 눈이 침침한 게 노화가 시작됐어요. 그래서 문학을 좋아하지 않죠.” 그에게 춤추는 게 좋은지 물으면 그는 “춤추는 건 본연의 일이 아닙니다. 배부른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죠. 전 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면서 춤이 본연의 일이 아니라고 핑계를 대는 것 좀 보아라. 사람이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 얼마나 긍정적인 일이냐! 노래하며 춤추고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고 하나님이 칭찬하는 일인데, 어찌 본연의 일이 아닐 수 있겠느냐? 그는 자기가 싫어하는 일은 깎아내리면서 다 부정적인 사물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춤추는 게 싫으시면 노래하는 건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노래는 무슨 노래요! 노래만 하면 음정이 틀려서 제가 들어도 못 들어 주겠는걸요. 안 좋아해요. 하나님을 믿고 나서 이제 겨우 하나님 말씀 찬양이랑 체험 찬양을 배웠는걸요. 예전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땐 절대 노래하지 않았어요. 남들이 하는 노래도 듣기 싫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럼 기분 좋을 땐 어떻게 표현하세요?” “기분 좋을 땐 잠을 잠깐 자요.” “그럼 힘든 일이 있어서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하세요?” “그럴 땐 간식을 좀 먹거나, 그러지 않으면 잠을 좀 잡니다.” “노래하는 게 싫으면 음악 듣는 것은 좋아하시나요?” “그런 것에 흥미가 없어요. 음악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게 뭔지 이해하지도 못하는걸요. 음악 속에 인간의 희로애락과 생각과 정서가 표현되어 있다고들 하는데, 저는 알아듣지도 못하겠고 그럴 능력도 없어요. 음악은 고상한 예술이잖아요. 저희같이 교양 없는 사람들은 음악을 몰라요. 좋아하지도 않고요.” “맛있는 음식은 좋아하세요?” “맛있는 음식도 안 좋아합니다. 아무거나 먹으면 되죠. 저는 원래가 투박한 사람이라 옥수숫가루 음식도 잘 먹고 케이크도 잘 먹어요. 중식, 양식 가리지 않고 다 먹죠. 배고파 죽겠는데 먹을 게 없으면 개밥이라도 먹을 거예요.” 이 사람은 이렇게 거칠고 투박하다. 어떤 여자에게 “화장을 좋아하시나요?”라고 물으면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관심 없어요.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거죠. 볼 테면 보고 말 테면 말라죠!” 어떤 남자에게 “전자기기나 자동차 같은 기계를 좋아하시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그런 거 좋아해 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신경만 쓰이고 머리만 아파요. 그럴 시간에 잠을 자든가 그냥 얘기나 하는 게 낫죠!”라고 대답한다. 그는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고 어떤 흥미나 기호도 없다. 생물이든, 과학기술이든, 수준이 높든 낮든 전부 좋아하지 않는다. “인성에 관련된 것은 고상하든 속되든 모두 싫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고양이나 개, 새 같은 동물들은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그런 건 더 싫어요. 동물은 사람이랑 소통도 안 되는데 그런 걸 좋아해서 뭐 해요?”라고 답한다. 개에 흥미가 있는 사람은 자주 개와 대화를 하는데, 개도 사람 말을 알아듣는다. 좋아하는 게 아무것도 없고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흥미나 기호는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특히 어떤 분야에 특기가 있는 사람, 선천적으로 그 분야에 재능이 대단하고 특출난 사람이 있죠. 이는 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고, 높여 주시고, 마음에 들어 하신 겁니다. 특히 오늘날 하나님 집에서 관련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의 신분과 가치는 더없이 존귀합니다. 평범하지 않죠. 아무런 기호나 특기도 없는 사람은 막노동이나 기술이 필요 없는 사역밖에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섬기는 일, 식사 준비, 청소, 농사, 양돈, 양계 따위의 일 말이죠. 그렇다면 흥미나 기호, 특기에서 볼 때 사람 간에 우열이나 귀천의 구분이 있지 않겠습니까? 계급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관점이 옳겠느냐? (옳지 않습니다.) 보아라,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기를 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흥미나 기호를 정해 주었다. 하나님이 정해 주지 않아서 아무런 특기가 없는 사람도 있다. 노래도 못하고, 춤도 못추고, 문학도 모르고, 각 분야의 기술 업무에 대해 까막눈인 것이다. 마침 섬김 가정에서 개 두 마리를 키우고 있으니 그에게는 개를 먹이는 일이 적합할 것이다. 이것은 가장 간단한 일이다. 그런데 그는 개에게 먹이를 주는 것 말고는 산책도 시키지 않고, 돌볼 줄도 모른다. 1, 2년간 개에게 먹이를 주었는데도 개는 그를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 그는 어떤 사람이냐? 이런 부류와 한 분야에 흥미와 기호, 혹은 특기를 가진 사람을 비교했을 때 차이가 있지 않으냐? 이 둘은 선천적인 조건에서 차이가 나는 다른 부류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 부류는 우월감을 느끼며 내실 있고 재미나게 살지만, 다른 한 부류는 삶이 공허하고 우월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면 사람 간에 지위와 신분의 차이를 구분한다면 이 원칙에 따라 구분하는 게 적절하겠느냐?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원칙에 따라 구분하는 게 적절하겠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과 사람 간에 차이가 있느냐?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차이가 있느냐? 어떻게 구별하느냐? 적어도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진리를 대하는 사람의 태도를 근거로 사람의 본질, 우열과 귀천, 부류를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론적으로 간단하게 구별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다소 단순하지 않으냐? 타고난 특기가 하나도 없고 흥미나 기호도 없는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진리를 사랑하고 깨닫고, 진리에 대한 체험과 인식이 있어서 진리를 교제할 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할 수 있고, 생명 진입 측면도 보통 사람보다 나아서 많은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면, 이런 부류를 천하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사람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사람의 본질, 우열과 귀천, 부류를 구분해야 한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구분하느냐?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 교제해 보겠다.
사람의 유래에 따라 구분한 사람의 세 가지 유형
한 사람의 선천적인 흥미, 기호, 특기의 유무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면 있고, 주지 않으면 없다. 네가 배우려 해도 배울 수 없고 따라 하려 해도 따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네가 어떤 분야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면 “이 분야의 특기와 관련된 본분을 이행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 분야의 특기는 원치 않습니다.”라며 싫다고 해도 떼어 낼 수 없고,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도 없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빼앗을 수 없고, 네게 없는 것을 남에게서 빼앗아 오거나 쟁취할 수도 없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예정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네게 한 분야의 흥미와 기호, 특기를 주었다고 해서 반드시 네 흥미나 기호, 특기와 관련된 본분이나 일을 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분야의 본분을 이행하거나 이 분야의 일에 종사하게 할 것도 아니면서 왜 제게 이런 흥미와 기호, 특기를 주신 겁니까?” 하나님은 절대다수의 사람에게 저마다의 다양한 상황에 따라 흥미와 기호를 준다. 물론 이는 여러 측면을 고려한 것이다.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사람의 생계와 생존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한 가지 측면에서 보면 사람의 인생을 다채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한 분야에 대한 흥미와 기호가 필요할 때가 있다. 취미를 즐기거나 본연의 일을 좀 하면서 알차게 생활하는 것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보든 하나님이 주는 데는 다 도리가 있고, 하나님이 주지 않는 데도 하나님의 도리나 이유가 있다. 어쩌면 네 인간적인 생활이나 생존에 하나님이 준 흥미나 기호, 특기가 필요 없을 수도 있으며, 다른 경로를 통해 네 생계를 유지하거나 네 인간적인 생활을 알차고 풍부하게 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하나님이 사람에게 흥미와 기호, 특기를 주었든 주지 않았든 그것은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설령 특별한 특기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성의 결함이 아니니 사람은 올바로 받아들이고, 올바르게 대해야 한다. 만약 한 분야에 대한 흥미나 기호, 특기를 가졌다면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올바로 활용해야 하며 가지지 못했어도 원망해선 안 된다. 흥미와 기호, 특기의 관점에서 본 실제 상황은 이렇지만 그것이 곧 한 사람의 가치나 지위, 신분이 어떻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 설사 하나님이 네게 준 고상한 흥미와 기호, 특기가 네 사유 재산이자 우월한 조건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네가 다른 사람보다 고귀하고 우위에 있으며 어떤 일을 할 특권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기에 누가 어떤 선천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든 그는 패괴된 인류 중 한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비록 선천적인 조건에 패괴의 요소는 없지만 선천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두 사탄의 패괴를 거쳐 사탄 성품에 따라 살아간다. 그들의 생명 본질이 사탄의 패괴 성품인 것이다. 그래서 네 선천적인 조건이 무엇이든, 흥미와 기호, 특기가 있든 없든 하나님 눈에 사람의 생명 본질은 똑같기 때문에 네 가치는 다른 사람과 동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한 분야에서 우월한 조건이나 우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사람의 본질과 패괴 성품으로 보면 사람의 본질은 똑같다는 것, 사람은 모두 동일하다는 것,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야 하는 하나님의 구원 대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육의 생명 본질에서 보면 사람은 모두 똑같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사람 간에는 차이도 있다. 이 차이에 대해 우리는 구체적으로 교제해 봐야 한다. 어떻게 구별하겠느냐? 사람의 유래를 통해 살펴봐야 한다. 유래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이겠느냐? 사람이 무엇에서 환생했느냐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네가 어디에서 어떻게 왔는지에 따라 구별한다는 말이다. 개괄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세 부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 두 번째는 각종 마귀에서 환생한 부류, 세 번째는 사람에서 환생한 부류이다. 이 세 가지 유형은 사람 간의 차이를 유래로 구분한 것이다.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이유는 각 부류의 유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동물에서 환생했고, 누가 마귀에서 환생했으며 또 누가 사람에서 환생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그의 살아 냄과 행동의 특징을 봐야 한다. 예전에 민간이나 다른 어떤 경로를 통해 이런 내용을 들어 본 적이 있지 않으냐? (들어 봤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가 너희에게 아주 생소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 마귀에서 환생한 부류, 사람에서 환생한 부류 중 어느 것부터 듣고 싶으냐? (첫 번째 부류입니다.) 첫 번째 부류는 동물에서 환생한 경우다. 너희가 정말 이 일의 실상을 알게 된다면 너희 삶에 지장이 생기지 않겠느냐? 골치 아픈 일이나 장애물이 생기지 않겠느냐? (아마도 자기가 무엇에서 환생했는지 생각해 볼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부류의 사람이고 특정한 부류의 사람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정말로 알게 됐을 때 사람에서 환생한 경우에는 다행이라며 좋아하겠지만, 사람에서 환생한 게 아니면 괴로워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고충이 생길 것이고 괴로울 것이다. 그렇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괴로워지고 고충이 생길 수 있다면 사람이 아는 게 낫겠느냐, 모르는 게 낫겠느냐? (그래도 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점이 좋겠느냐? (이 측면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또 주위 사람과 일, 사물을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번 교제해 보자.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의 특징
우선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부터 교제하겠다. 동물에서 환생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 사람이 동물에서 환생해 다시 태어났다는 말이다. 동물의 범위는 굉장히 넓다. 사람으로 환생할 수 있는 동물이 얼마나 되는지는 우리가 교제할 범위가 아니다. 어쨌든 전생에 동물이었던 부류가 있는데, 그의 원래 신분이나 피조된 유형은 피조된 인류의 일원이 아니다. 그 사람의 최초, 가장 원시적인 생물 유형은 동물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생물계에서 동물의 신분이었던 그가 이번에 사람으로 환생한 것이다. 즉, 이 동물이 더 이상 동물들 사이에서 윤회하면서 다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환생하여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가정, 특정한 가족, 특정한 국가에서 태어난 것이다. 동물에서 환생하여 인류 중 한 명이 되었다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그는 전생에 사람이 아닌 동물이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동물계에서 생존하면서 동물계에서 동물 간에 서로 윤회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동물계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었고, 신분이 전환되어 인류 중 한 명이 된 것이다. 이것을 동물에서 환생했다고 한다. 동물이 사람으로 환생하면 그 생김새의 특징이나 본능은 보통 사람과 거의 일치한다. 다시 말해, 직립 보행을 할 수 있고, 인간의 외모와 사고,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다가 인간 특유의 언어 능력까지 가지는 등 사람의 특징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 이것을 가리켜 동물이 사람으로 환생했다고 한다. 즉, 육의 형태나 외관, 육의 생활 특징에서 동물의 특징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인간의 특징만 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가 동물에서 환생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갖는 문제가 이것이다. 당연히 알아볼 수 있다. 만약 동물에서 사람으로 환생한 부류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환생한 부류와 차이가 없다면,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의 사람에게는 아무런 분명한 특징도 없을 것이다.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와 진짜 사람에서 환생한 부류 사이에 명확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두 부류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에게는 어떤 특징들이 있느냐? 첫 번째 특징은 이 부류가 치우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두 번째 특징은 대단히 무감각하다는 것이며, 세 번째 특징은 무척 흐리멍덩하다는 것이고, 네 번째 특징은 어리석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 특징을 통해 동물에서 환생한 사람과 진짜 사람의 차이를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
1. 첫 번째 특징, 치우침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의 첫 번째 특징은 치우침이다. 치우침은 먼저 무엇에 관련되느냐? 그의 사상 관점 측면의 문제와 관련되고 사물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며 이해하는 인지 능력과 관련된다. 이 부류는 한 가지 사물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올바로 바라보지 못한다. 사람과 일을 바라보고, 처신하고 일을 처리할 때 특히 황당하고 편집적이고 터무니없으며, 정상 인성의 사고나 사물을 바라보는 정상 인성의 사상 관점에서 완전히 어긋난다. 물론, 이렇게 치우친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은 어림도 없고 결코 진리에 이르지 못하며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대하든 그의 관점은 죄다 치우쳐 있다. 그에게 교제해 주면 그는 도리상으로는 이해하지만, 얼마 지나면 그의 인식은 여전히 치우쳐 있다. 좀 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사례를 들어 주면 그땐 알아듣지만, 시간이 지나 그런 일이 닥치면 그의 관점은 여전히 치우쳐 있고 아무리 교제해도 시정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의 이런 상태나 사물을 받아들이는 이런 방식은 계속 유지되어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 누가 진리를 교제해도 그를 바꿀 수 없다. 설령 내가 교제하고 설교할지라도 그의 이런 치우친 사상 관점, 치우친 이해 방식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니 이런 부류는 골치 아프다. 예를 들어, 그가 어떤 일을 잘못해서 그에게 “이 일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원칙에 어긋나요. 개인의 불순물이 들어 있습니다.”라고 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저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요. 당신들이 그렇게 잘났고, 모두 진리를 갖추고 있고, 할 줄도 알면서 왜 직접 하지 않고 저한테 시키죠? 제가 잘못했다는 건 제가 눈에 거슬린다는 말 아닌가요? 당신들 모두 인성이 있는데 저만 없으니, 저는 지옥에 가고 당신들은 천국에 가겠군요!” 그는 심지어 핑계를 대면서 변명하고 해명하며, 책임을 회피할 구실을 찾는다. 그는 그 일을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앞으로 반드시 시정하겠다거나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올바른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절대로 이렇게 인식하지 않을 것이고, 인성의 관점에서 그 일을 순수하고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역할 때 가지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진리를 교제해 주면 이런 말을 한다. “지금 저를 무시하시나요? 저를 못 배운 촌놈이라고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제 신분을 천시하는 거 아니냐고요. 하나님께서도 업신여기지 않는 저를 당신이 뭔데 업신여겨요!” 그는 절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진리를 구해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하고 인식해서 올바른 실행의 길을 찾아 해결하지도 않는다. 그는 왜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인의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나타난 잘못을 정상인의 방식으로 대하지 못하며, 잘못을 대할 때 정상인이 가져야 할 태도를 지니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를 본 적이 있느냐? 이참에 너도 자기 이성이 정상적인지 반성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예를 들면, 방금 바닥을 닦아서 바닥이 젖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모르고 지나가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 사람이 일어나서는 이렇게 말한다. “바닥을 닦고 나서 물기를 안 훔쳤으면, 주의 문구가 적힌 입간판을 세워 놨어야죠! 다행히 저는 젊어서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었지만 노인이었으면 골절되지 않았겠어요? 더 세심하게 신경 썼어야죠!” 정당하고 정상적인 말 아니냐? (정상적인 말입니다.) 그는 이 일을 할 때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했으니, 다음번에는 세심하게 신경 쓰면 된다. 사람을 넘어지게 만든 것은 분명한 잘못이지만, 실수일 뿐이니 아무도 정죄하지 않는다. 시정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람의 관점에서 사람의 사고를 통해 이 일을 올바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대할 줄 모른다.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바닥이 젖어 있는 게 안 보여요? 눈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겁니까? 당신은 넘어져도 싸요! 자기가 못 봐 놓고 왜 제 탓을 합니까? 방금 닦아서 젖어 있는 바닥을 왜 지나가고 그래요? 제가 지나가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넘어진 건 본인이 재수 없어서 그런 거죠. 저랑은 상관없다고요!” 이 말이 이성적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비이성적이다. 속된 말로 뭐라고 하느냐? 억지를 부린다고 한다. 바닥을 닦고 물기를 훔치지 않아 사람이 넘어졌다. 반드시 미안해하거나 사과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남들이 자신의 문제를 일러 주고 지적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다치진 않으셨어요? 병원에 가서 검사나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인성의 관점에서 실수한 일을 대할 때는 이렇게 이성적으로 대하고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는 인성이 없고 치우치게 받아들인다. 그는 절대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고, 문제를 이렇게 생각하기는커녕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릴 것이다. 바닥을 닦고 나서 물기를 훔치지 않아 사람이 넘어졌으면 다음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게 주의하고 잘못을 시정하면 그만이다. 그럼 이 일이 해결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아무도 그를 정죄하지 않으며 그 역시 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들만 잘났고, 인성을 갖췄죠. 저는 악인이라 일부러 사람을 해친 거고요. 악의적으로요! 당신들은 천국에 가고 전 지옥에 가겠군요!”라고 한다. 정상인이 이런 말들을 내뱉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오직 이렇게 동물에서 환생한 사람만이 몹시 극단적이고 편집적이며 터무니없는 관점으로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고 바라본다. 사소한 일이나 지극히 정당한 일에도 그는 온갖 억지스럽고 그릇된 논리를 늘어놓아 듣는 사람을 어이없게 만든다. 책망이나 훈계를 받을 때면 그는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자기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렇게 하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온갖 논리를 대며 필사적으로 해명하고 변명한다. 그에게 왜 그를 책망하고 훈계하는지, 잘못했을 땐 어떻게 시정하고 어떻게 진리 원칙을 구해야 하는지, 그 일을 하는 원칙은 무엇인지 교제해 주어도 그는 한마디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속으로 분해하고 답답해하며 억울함과 치욕을 삼키면서 뒤에서 남들한테 이런 말을 한다. “쳇! 이런 문제들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고의로 그렇게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방해하고 교란했다며 저를 정죄하다니. 제가 그렇게 악한가요? 제가 악인인가요?” 그는 진리 원칙에 관한 일에 결코 이르지 못하고, 그 일을 알아듣지도 못하며, 대단히 치우치고 터무니없게 받아들인다. 어떤 진리 원칙을 교제해 주어도 그의 관점에서 그것은 한마디 말, 한 가지 행동 방식이나 형식, 일종의 의식이나 규례일 뿐이다. 단지 단편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무척 터무니없고 황당하게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이런 부류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유독 우둔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어느 정도로 어리석겠느냐? 남들이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구역질이 나고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을 정도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더 말해 봤자 헛수고이다. 더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니 더 이상 이들과 진리 원칙을 논하면 안 된다. 그들은 어떤 일이든 그 일이 설사 삶의 지극히 사소한 일이더라도 몹시 비정상적이고 터무니없으며 치우치게 처리하고, 인성의 이성 범위 안에서 바라보거나 처리하지 못한다. 또 무슨 일이든 편집적이고 터무니없이 바라본다. 그가 어떤 일에 대한 견해를 말하든 듣고 나면 너는 평생 구역질이 날 것이다. 네가 마침 밥을 먹고 있을 때 그 말을 듣는다면 다 토할 수도 있다. 말해 보아라, 어느 정도로 치우쳐 있겠느냐? 이것이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가 보이는 한 측면의 주된 특징인 편집적이고 터무니없는 모습이다. 인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편집적이고 터무니없는 모습은 주로 인성의 정상적인 사고가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인성의 정상적인 사고로 생각하지 못하고 매우 극단적이고 치우쳐 있으며 편집적인 것이다. 아무리 진리를 교제하고 객관적 사실이나 구체적인 상황을 교제해 줘도 그는 자신의 논리를 포기하지 않고 물고 늘어지면서 ‘이번엔 내 말이 맞으니까 트집 못 잡을 거야. 계속 물고 늘어지면 내 말이 진리가 되겠지. 당신이 뭐라고 하든 소용없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동물에서 환생한 부류가 보이는 특징 중 하나인 치우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클릭하세요! 하나님에게서 온 기쁜 소식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