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가(11) 제 1 부

추가 사람이 어떤 길을 가는지가 최종적으로 무엇을 수확할지를 결정한다

무엇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느냐? 은혜와 축복을 얻기 위함이냐? 공허하지 않게 살고 저급한 취미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냐? (진리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진리를 얻기 위해서이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매일 하는 일이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냐? 네가 매일 본분을 이행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것은 이 목표를 위함이냐?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없으며, 마음속에 이 측면의 이상(異象)도 뚜렷하지 않고,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지도 알지 못한다. 마치 마음속으로 단지 복받기 위한 것이라고만 알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는 복을 받으려면 반드시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겠느냐? 그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이건 큰 문제가 아니야.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겠지.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라고 생각한다. 때로 다른 사람은 체험 간증이 있는데 자기는 말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될 때면, 마음이 괴로워지기도 하고 조금은 조급해지고 애가 타기도 하지만, 별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가 더 많다. 이렇게 훌쩍 5년이 지나가고, 또 훌쩍 10년이 지나가 30, 40대가 된 사람도 있고 50대가 된 사람도 있는데, 여전히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줄곧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진리를 얻었느냐? 생명은 있느냐? 그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 채 ‘적지 않은 진리를 깨달은 거 같아. 또 설교를 많이 할 줄 아니까 생명이 있겠지?’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는 예배를 드릴 때든, 본분을 이행하다 문제가 닥칠 때든 한바탕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어떤 진리든 다 깨달은 것처럼 굴지만, 실제 문제는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이론을 이야기해도 본분을 이행할 때는 여전히 진리 원칙대로 행하지 못하고, 심지어 많은 일에서 여전히 자기 뜻을 따르며 진리 원칙을 전혀 깨닫지 못한다. 그는 속으로 ‘내가 과연 진리를 깨달은 사람일까?’라고 생각하며 의혹을 품는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 그가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는 사람이겠느냐? 그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진리를 얻었겠느냐? 이것도 여전히 의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생명이 있겠느냐? 생명이란 대체 무엇이냐? 생명이 있는 사람은 어떤 느낌이겠느냐? 사람의 생활에 어떤 변화가 생기겠느냐? 사상에 어떤 변화가 생기겠느냐? 인성에 어떤 변화가 생기겠느냐? 그는 이런 것들을 다 모른다.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어떤 측면의 진리에 대해 말할 때는 글귀와 이론을 어느 정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진리 실행 원칙과 관련될 때는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특히 어떤 사람은 원칙을 어긴 일 처리로 책망을 받으면, 소극적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곤혹스러워하고 자신을 의심하며 “내가 과연 생명을 얻었을까? 진리가 내 마음속에서 지위를 가졌을까? 내 생명이 되었을까? 내가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그는 진리와 관련된 이런 일에 대해서는 모두 흐리멍덩하지만, 진리와 관련 없는 표면적인 일에 대해서는 무척 똑똑히 기억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 몇 개월 며칠이 되었는지, 어느 직급의 리더 일꾼을 했는지, 어떤 본분을 이행했는지, 교회 사역을 얼마나 했는지, 얼마나 많은 곳을 다녔는지, 복음을 전해 몇 명이나 얻었는지, 몇 곳의 교회를 양육했는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헌금을 얼마나 했는지, 형제자매들에게 어떤 물건을 기부했는지, 체포되어 감옥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얼마나 많이 맞고 고문을 당하며 몇 번이나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서 증거했는지 등 이 표면적인 일들은 모두 마음에 새겨 두고 머릿속에 수시로 떠올린다. 또 마음속으로 다 셈을 하고 있어서 모든 내역을 똑똑히 기억하고 영원히 잊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고 실제를 얼마나 갖추었는지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흐리멍덩하여 도무지 알지 못한다. 또 자신이 어떤 진리를 깨달았는지, 어떤 진리를 실행해 냈는지,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고수할 수 있는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마음속으로 늘 명확히 알지 못하고 흐리멍덩하다. 자신의 어떤 패괴 성품에 진실한 인식이 생겼는지, 그것을 벗어 버렸는지, 자주 표출하지만 아직 벗어 버리지 못한 패괴 성품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마음속으로 알지 못하고 흐리멍덩하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어떤 진리는 실행해 낼 수 있고 어떤 진리는 실행해 내지 못하는지, 어떤 측면의 진리에서 성장이 있고 얼마나 성장했는지에 대해서도 흐리멍덩하다. 자신의 인성의 살아 냄이 어떠한지, 양심과 이성을 갖추었는지, 정상 인성을 살아 냈는지에 대해서도 흐리멍덩하다. 자신이 이행한 본분 중 진심을 보이고 충성을 다한 것은 얼마나 되는지, 고의로 대충 한 것은 얼마나 되는지, 기준에 맞게 이행한 것은 얼마나 되는지, 아직 기준에 미치지 못한 것은 얼마나 되는지,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은 어떤 것들인지, 아직 진리 원칙을 파악하지 못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한 것은 어떤 것들인지에 대해서도 흐리멍덩하다. 자신이 과연 어떤 측면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하고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 있는지, 하나님에게 어느 정도로 순종할 수 있는지, 어떤 측면에서 아직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는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진입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계획이나 생각이 없고, 당연히 명확한 길도 없다. 또 그는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는 일을 얼마나 하고 선행을 얼마나 예비했는지 알지 못하며, 악을 얼마나 행했는지, 방해하고 교란하는 일을 얼마나 했는지도 알지 못한다. 기억하기로는 그런 일을 좀 한 것 같기도 하지만, 악을 행한 후 회개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가끔은 악을 행했음을 의식하고 괴로워하며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죄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죄 사함을 얻었는지, 마음속에 참소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참소가 있든 말든, 어쨌든 지금 나는 잘 살고 있잖아. 본분도 계속 이행하고 있고.’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가 이행한 본분에는 선행이 얼마나 되느냐? 그 자신도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최근 복음을 전해 두 명을 얻었으니, 자신에게도 선행이 좀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약간의 선행이 있기는 하지만, 일 처리에 원칙이 없으며 여전히 자기 뜻대로 하고 함부로 굴 수 있다. 이를 악행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 자신도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는 교회에서 자신에게 처분을 내리지 않고, 리더 또한 자신을 책망하지도, 이 일을 추궁하지도 않았으니 악행이 아니라고, 추궁한다면 그것이 악행일 거라고 생각한다. 또 그는 얼마나 많은 선행을 예비했는지 알지 못하며, 지금 한 일이 선행인지 악행인지, 선행의 성분이 얼마나 되고 악행의 성분이 얼마나 되는지,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 것은 얼마나 되는지, 사역지침과 진리 원칙을 위배한 것은 얼마나 되는지 등도 모두 알지 못한다. 그는 이런 일들을 한 번도 기록한 적이 없다. 어쨌든 매일 제때 밥 먹고 잠을 자며, 시간이 되면 일어나 묵상 시간을 갖거나 사역을 한다. 또 매일 전날의 사역 상태와 사역 절차를 이어 가며, 예전부터 늘 하던 일을 한다.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패괴 성품을 벗어 버리고 생명을 얻는 이런 일에 대해서는 한 번도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정리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진리 추구와 생명 진입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에게는 모두 흐리멍덩할 뿐이다. 말해 보아라, 사람이 매일 이런 생활 상태 속에서 이런 내적 상태로 살아간다면, 무지몽매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무지몽매하다’는 문어체 표현이고, 속된 말로 하면 바로 ‘그럭저럭 대충 사는 것’이다. 그럭저럭 대충 사는 이런 생활 상태와 생존 상태가 좋겠느냐? (좋지 않습니다.)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와 모습은 없지만, 진리 추구와 생명 진입이라는 일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되는대로 하는 것, 이런 상태가 바로 ‘무지몽매한’ 것이다. 이는 사람의 문제를 잘 보여 주며,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떤 길을 가는지 분명히 드러낸다.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관련된 진리 추구와 생명 진입 등의 일에 대해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든, 주관적인 바람이 무엇이든, 어떤 모습을 보이든 하나님이 보기에는 그 사람이 처한 상태가 바로 그가 가고 있는 길을 보여 준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아무리 진리를 교제해 줘도 받아들이지 않는데, 이들이 가는 것은 지옥과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의 요구를 알지 못하고 오직 복받고 천국에 가는 것만 추구하지만,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진리를 깨닫고, 나아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으며, 진리를 얻기 위해 고생하고 대가를 치를 수 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그가 가는 길이 빛과 천국으로 통하는 길임을 알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생명 진입이라는 일에서 모두 똑같이 목표가 그리 명확하지 않고 흐리멍덩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혹자는 진리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고 본분을 이행할 때 시종일관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며,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어도 전혀 변화가 없다. 그들이 가는 길은 멸망으로 향하는 길, 지옥으로 통하는 길이다. 반면, 혹자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책망과 훈계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진실한 순종이 조금씩 생겨나고 점차 기준에 맞게 본분을 이행하게 된다. 그들이 가는 길은 빛으로 통하는 길,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다.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즉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 진리를 위배하여 하나님이 혐오하는 일을 수시로 저지르며, 교회 생활과 교회 사역을 교란한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특수한’ 모습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늘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고, 꾀를 부리고, 몸을 사리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키지 않는다. 또 몹시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자신의 누림만 챙긴다. 이러한 것 역시 이 사람들의 한 가지 특징이다. 더 악한 사람들은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고 함부로 굴며, 사역지침대로 실행하거나 실천하는 법이 없다. 또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할 때 늘 지위를 다투고, 자신을 높이고 증거하며, 사람을 끌어들여 독립 왕국을 세운다. 이 밖에도 어떤 사람은 본분을 이행하면서 제물을 훔쳐 먹고 낭비하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긴다. 이것이 긍정적인 모습이겠느냐, 부정적인 모습이겠느냐? (부정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부터 이런 모습을 보였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준다. 누가 자질이 좀 있으면 책임자의 본분을 이행하도록 안배하지만, 일정 기간 좋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한 가지 본분만 이행하도록 안배한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일만 하는 본분도 여전히 건성으로 대충대충 이행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며, 함부로 굴고, 방해와 교란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지위, 권력과 세력을 다투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하지 않으며, 심지어 기회가 생기면 제물을 훔쳐 먹거나 낭비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아무리 오래 믿어도 그들의 이런 모습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결국 그들에게서 보이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들은 본분을 이행할 때 한결같이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고, 꾀부리고, 몸을 사리며, 심지어 육적인 편안함을 즐기며 무책임하게 군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가끔 또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늘 한결같이 나타나며, 그래서 문제가 된다. 그들은 본분을 한결같이 건성으로 대충 이행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며, 방해하고 교란한다. 누가 말해도 고치지 않으며,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회개하지 않고, 후회하는 마음도 없다. 또 어떤 사람은 한결같이 지위를 다투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전혀 수호하지 않는다. ‘한결같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누구든 본분을 이행할 때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거나 함부로 굴거나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도 하나님 집에서는 몇 번이고 회개할 기회를 준다. 한때의 모습 때문에 사람을 쫓아내고 본분을 이행하지 못하게 하는 일은 없으며, 거듭 권면하고, 진리를 교제해 주고, 사랑으로 돕고 붙들어 준다. 그자도 힘을 좀 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부류는 마음이 강퍅하고, 진리를 싫어하며, 진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형제자매의 도움과 질책, 점검, 감독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으며, 설령 성령의 깨우침과 채찍질이 있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을 3, 5년 믿어도 그렇고, 10, 20년 믿어도 여전히 그렇다. 비록 지금은 나이가 들어 조금 성숙하고 노련해 보일지 몰라도 본분을 이행할 때는 여전히 그 모양이다. 한결같이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는데, 지난 20년 동안 늘 그래 왔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런 사람은 입만 열면 거짓말뿐, 진실한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어느 말이 진짜이고 어느 말이 가짜인지 알 수 없으며, 진실한 말이라고는 단 한 마디도 없다. 그는 지난 20년간 본분을 이행하며 고생을 좀 하고 복음을 전해 얼마간 사람도 얻었지만, 생명 성품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으며 여전히 몹시 교활하고 간사하다. 진실한 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능구렁이인 것이다. 이것으로 그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님이 십분 증명된다. 그는 진리를 조금 깨달을지라도 실행해 내지 못한다. 이는 어떤 사람이겠느냐? 한결같이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는 사람이고, 한결같이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고 함부로 구는 사람이며, 한결같이 방해하고 교란하며 권력과 세력을 다투고, 한결같이 수단을 부리며 거짓말하고 기만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노회하고 교활한 자로, 능구렁이, 뺀질이, 늙은 마귀, 늙은 사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모든 행위 앞에는 ‘한결같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한다. ‘한결같이’가 붙었다면, 그것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 아니라 그 소행의 소치이다. 모두의 눈에 그는 이미 한두 번 그런 것이 아니라 상습범이다. 각국의 경찰서는 상습범을 어떻게 대하더냐? 상습범의 전과는 모두 기록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그리고 범죄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이 상습범들이 첫 번째 용의자가 되며, 가장 먼저 그들부터 수사하고 조사를 펼쳐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집에서 한결같이 건성으로 대충대충 본분을 이행하는 사람은 어떻겠느냐? 건성으로 대충 하고 제멋대로 나쁜 짓을 하는 모습은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니며, 특수한 상황에서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 내적 상태와 모습이 그들이 본분을 대하는 평소 모습이다. 본분을 대하는 평소 모습을 통해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가 어떤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태도로 진리를 대하겠느냐? (싫어하고 거부감을 갖습니다.) 이 부류는 진리를 싫어하고 거부감을 가지며,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마음속 깊이 진리를 경시하고 긍정적인 사물을 멸시한다. 누가 진리를 교제해 줘도 듣지 않으며, 회개할 기회를 아무리 많이 주어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성령의 감동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고 귀하게 여기지도 않으며, 사람의 권면과 도움은 싫어하고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누가 또 책망하고 훈계하면 화가 나고 분노하며, 상대에게 성질을 부리고 마음속으로 반감을 품는다. 교회는 각 사람의 시기별 모습을 전부 평가하는데, 이 평가는 사람의 결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에 ‘한결같이’라는 말을 붙여 규정해 버리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들이 대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가 매우 명확해지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는 길은 대체 어떤 길이겠느냐? 멸망으로 향하는 길이겠느냐, 아니면 구원받는 길이겠느냐? (멸망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생기겠느냐? 이것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겠느냐? 실제 사정에 맞지 않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들에게 더 회개의 기회를 주어야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면 안 됩니다. 언젠가는 회개할지도 몰라요!”라고 말한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수많은 악을 행했고, 그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귀에 들어갔다. 하나님이 그들을 훼멸시키려 할 때,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 40일 후에 니느웨를 훼멸시킬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 그들은 40일 안에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하나님에게 회개하였다. 그런데 지금 본분을 이행하면서 한결같이 불량한 모습을 보인 사람들에게는 회개할 시간으로 몇 번의 40일이 주어졌느냐? 그들은 회개하였느냐? 그들에게 회개하려는 의지가 있느냐? 회개하려는 기미가 있느냐? (없습니다.) 지난 10년, 20년 동안 그들은 한결같이 악을 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10년, 20년 동안 그들이 변할 수 있겠느냐?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미지수일 것이다. 하지만 지난 10년, 20년 동안의 여러 모습으로 보아 그들의 행위와 모습은 모두 진리에 위배되는 것,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 모두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이 마음속으로 진리를 싫어하고, 본성 본질이 사악하며, 진리를 사랑하는 성분이 없고, 진리를 사랑하고 실행하는 인성도 갖추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들의 지난 10년, 20년 동안의 모습을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지금까지의 결론이 이렇다면, 그 인성과 본질을 볼 때, 앞으로 10년, 20년, 30년 동안 그들 중 진정으로 회개하고 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30명 중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50명 중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100명 중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이 사람들이 앞으로 10년, 20년 동안 갑자기 양심의 지각이 생겨 진리와 긍정적인 사물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인식하고 진실로 회개하여 과거에 저지른 악을 뉘우치고 죄스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너희가 관찰하기에는 그 비율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 천 명 중에 한 명이라도 있겠느냐? (천 명 중 한 명도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말하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10년, 20년 동안 한결같이 반감과 거부감을 갖고 진리를 대했고, 진리를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회개하는 모습도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앞으로도 진실로 회개하지 않을 것임을 증명합니다.) 이 말이 정확하냐? (정확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람에게 관용과 포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가 지난 10년, 20년 동안 회개하지 않은 건 나이가 어려서 철이 없었거나, 가정 형편이 좋아 응석받이로 자랐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고 특기가 좀 있어서 그런 겁니다. 특수한 상황 때문에, 몇몇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향후 10년, 20년 동안에는 그런 가정 환경이나 부정적인 요인의 영향에서 벗어나 변화될지도 모릅니다.” 이 역시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난 모습을 볼 때, 그 앞에 ‘한결같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면, 이런 부류는 무척 위험하다. 이 부류에는 진실로 회개하는 사람이 백 명 중 한 명이든, 천 명 중 한 명이든 없을 것이다. 만약 그의 모든 악행 앞에 아직 ‘한결같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았다면, 이런 부류는 그래도 조금은 희망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앞으로 3, 5년의 모습이 어떤지에 달려 있다. 만약 그가 어려서 철이 없거나 하나님을 믿는 데 토대가 없어서, 또는 자질이 부족하거나 어떤 객관적인 환경 요인으로 인해 진리를 받아들이고 깨닫는 데 영향을 받았다면, 이런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가 악을 행하는 모습이 단지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면, 좀 더 지켜봐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악행을 끊임없이 저지르는 사람들, 즉 그 모습 앞에 ‘한결같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착지를 위해 충분한 선행을 예비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단지 자신이 악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게다가 그들은 고생하며 대가를 치른 것과 하나님을 오래 믿은 자격을 내세워 자기를 위해 변명한다. 그들이 가는 길은 그들 앞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 드러나 있다. 그들의 표출과 모습, 행위, 본분 이행과 진리를 대하는 태도, 모든 긍정적인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이미 그들의 본질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본분과 진리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 또한 이미 그들이 가는 길을 드러냈다.

사람이 가는 길에 따라 최종적인 수확이 달라진다. 사람이 멸망의 길을 가면, 최종적으로 얻는 것은 지옥문을 들이받아 결국 그 문을 열고 지옥에 떨어지는 결과이다. 이는 다른 사람과 상관없는 일로, 다른 사람이 네게 초래한 것이 아니라 네가 걸어온 길이 최종적으로 초래한 결과이다. 네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면서 많은 과오가 있었고, 잘못된 길을 걸었으며, 바른길에서 벗어난 일을 했다고, 심지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일을 했다고 해 보자. 이런 모습은 좋지 않고 하나님이 보기에 정죄받을 일이지만, 네가 패괴 성품을 표출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동시에 자신을 반성하고 진실로 돌아설 수 있다면, 너의 진심과 네가 대가를 치르는 것을 통해, 또 진리 실행을 통해, 진리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통해 주동적으로 많은 선행을 예비했다면, 너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 역시 바뀔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적그리스도와 악인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며 형제자매들을 미혹할 때, 네가 제때 적그리스도와 악인의 악행을 폭로하여 그들의 방해와 교란을 제지하고, 형제자매들을 보호하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지켜 냈다. 또 본분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 많은 어려움과 장애물에 부딪혔을 때, 너는 시간과 에너지, 체력을 쏟고, 육적으로 누리는 즐거운 시간을 희생하면서 전력을 다해 그 어려움과 문제들을 해결했다. 너의 독촉과 감독, 점검하에, 그리고 네가 고생하며 대가를 치른 덕에 복음 사역이 정상적이고 순조롭게 전개되고 진행되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너는 자질이 좋고 진리 이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여 각종 진리를 명확하게 교제함으로써 그들이 참도에 뿌리를 내리고, 교회에서 본분을 이행해 어떤 사역의 유능한 조력자가 되게 하였다. 또는 하나님 집의 어떤 특수한 업무 사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여 효과적인 사역 방식이나 사역 절차를 통해 사역을 진전시키고 사역 성과를 높이기도 하였다. 또는 교회 생활 중에 소극적이고 연약하거나 길이 없어 방황하는 형제자매들을 도와 그들이 나아갈 길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으며, 의지를 갖고 진리를 추구하게 해 주기도 하였다. 더 좋은 점은, 네가 이런 사람들을 격려하여 그들이 기꺼이 본분을 이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도록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는 어떤 업무적인 사역에서 꼭 필요한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고되고 힘들며 알아주는 이 없는 일일지라도 너는 기꺼이 묵묵히 뒤에서 사역하는 사람이 되어 이를 위해 헌신하고 보수를 바라지 않았으며, 오직 네 진심과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모습은 하나님이 보기에 기억할 만한 선행이다. 반대로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기는커녕 뒷짐만 지고 서서 한쪽에서 구경하고 비웃으며,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한다면, 네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제안 하나 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며, 자신이 피곤해질까 봐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숨을 수 있으면 숨으며 한가할수록 좋아한다면, 늘 진지하게 대하거나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사역을 위해 신경 쓰는 것은 너무 번거롭다고 느낀다면, 비록 그런 모습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는 악행과는 차이가 있고 하나님이 나쁜 평가를 내리지는 않겠지만, 좋은 평가 역시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겠느냐? 바로 네가 이런 일들에서 선행을 예비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에게 기억될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너는 이런 일들이 닥쳤을 때 선행을 예비할 기회를 놓친 것이니, 어리석은 데다가 신뢰하고 발탁할 가치가 없으며, 높여 줄 가치도, 하나님이 일을 맡길 가치도 없는 사람이다. 너를 노아나 아브라함과 비교해 보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어떤 일도 맡길 수 없는 사람이 마지막에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알 수 없다고밖에 할 수 없으며, 그 뒤에 수많은 물음표를 붙여야 한다. 즉, 불확실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그 사람의 한결같은 모습에 근거한 것이다. 네가 각각의 사람에게 왜 하나님을 믿느냐고, 천국에 가고 싶어서냐고, 아니면 지옥에 가고 싶어서냐고 물으면, 혹자는 어리석은 질문을 한다며 너를 비웃을 것이다. “지옥에 가고 멸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누군들 천국에 가고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것은 정말 물어봐야 하며,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 번도 이렇게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그는 일이 닥치면 늘 번거로워질까 봐, 말썽이 생길까 봐 걱정한다. 특히 악인이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며, 하나님 선민들이 미혹되고 이용당해 교회 사역을 전개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이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이 사람을 감찰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며, 그것이 바로 선행을 예비할 기회라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무골호인이 되어 진리 원칙을 버린다. 그는 전혀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는다. 너의 책임은 무엇이냐? 너의 의무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너에게 한 부탁은 무엇이냐? 하나님은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고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하였는데, 너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엇이냐? 너는 하나님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할 수 있느냐? 너는 선행을 예비하였느냐? 이런 일들에 있어서 늘 스스로를 반성하고 마음속으로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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