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오늘 너희는 어떤 측면의 진리를 가장 듣고 싶으냐? 몇 가지 주제 중 너희가 선택한 주제를 가지고 교제하도록 하겠다. 첫 번째 주제,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느냐? 자신을 인식하는 길은 무엇이냐? 왜 자신을 인식해야 하느냐? 두 번째 주제,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있었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살고 있었느냐, 아니면 사탄 성품과 사탄 철학으로 살고 있었느냐? 너의 어떤 모습들이 네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살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느냐? 네가 사탄 성품과 사탄 철학으로 살고 있다면, 어떤 패괴 표출이 있고 어떤 패괴된 모습을 보이느냐? 세 번째 주제, 패괴 성품이란 무엇이냐? 예전에 이야기한 여섯 가지 패괴 성품에 이어, 어떤 내적 상태가 이러한 패괴 성품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인지 이야기하겠다. 이제 너희가 선택하여라. 너희가 지금 가장 알고 싶지만 가장 잘 모르겠고, 도달하기 가장 어려운 주제는 무엇이냐? (저희는 두 번째 주제를 선택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주제로 교제하겠다. 깊이 생각해 보아라.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있었는가?’라는 주제는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 이 말의 핵심은 ‘무엇’이라는 두 글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라는 범주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느냐?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로는 무엇이 있느냐? 너희가 생각하기에 가장 핵심적이고, 하나님을 믿으며 마땅히 실행해야 하는 것이자 사람이 갖춰야 하는 것이 바로 ‘무엇’이란 단어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너희가 평소 생활 속에서 접하는 것, 너희의 자질과 이해 능력으로 닿을 수 있는 것, 너희가 그것이 긍정적이고, 진리에 근접하고 부합하는 것이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너희는 이제까지 하나님을 따르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왔으니 그것을 가지고 교제할 수 있다. 너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들로는 무엇이 있느냐? (저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고난을 겪으며 대가를 치르고, 본분 이행에 성과를 얻기만 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관점이 바로 네가 생각하는 긍정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관점은 바울의 관점과 무엇이 다르냐? 본질은 같은 것 아니냐? (그렇습니다.) 본질은 같다. 그럼 이 관점의 본질은 일종의 상상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동안 너는 일종의 상상에 의지해,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왔으며, 또한 이런 것들에 의지해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이행하면서 교회 생활을 해 왔다. 이것이 한 가지 상황이다. 우선 너의 이러한 생각과 관점이 옳은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인지 확정해야 한다. 만약 네가 옳고, 근거가 있으며,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사실 그렇지 않다면, 이와 관련된 것들이 바로 우리가 교제할 주제이다.

‘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측면의 진리를 교제하는 가장 간단하고 빠른 방법은 먼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주제인 바울의 사례로 시작해서 너희의 내적 상태와 관련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다. 왜 바울을 이야기하려 하겠느냐? 대다수 사람이 바울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성경에 바울과 관련된 이야기나 주제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예를 들어, 바울이 늘 말하던 명언은 무엇인지 혹은 바울이라는 사람의 특징, 성격, 특기는 무엇인지 등등 말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바울은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는데, 이것이 바울에게는 당시 아주 좋은 간판으로, 명문 대학을 졸업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바울은 이름난 신학원을 졸업한 신학생이었다. 이것이 첫 번째로, 바울과 관련된 비교적 대표적인 주제이다. 바로 그의 배경, 학력, 사회적 지위이다. 두 번째, 바울이 한 유명한 말은 무엇이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딤후 4:7~8)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열심히 뛰어다닌 원동력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바울이 고난을 겪으며 대가를 치르고, 사역을 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두 번째이다. 계속 이야기하여라. (바울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바울이 한 유명한 말로, 이것이 세 번째이다. 방금 세 가지를 이야기했다. 첫째, 바울은 교법사 가말리엘의 학생으로, 지금으로 치면 신학원 졸업생이라 일반 사람보다 더 많은 성경 지식을 갖춘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그런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구약 성경 지식을 갖췄는데, 이것이 바로 바울이라는 사람의 학문적 배경이다. 이는 훗날 그의 선교와 교회 공급에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 이점이 좀 있었다고는 하지만, 나쁜 점은 없었느냐? (나쁜 점이 있었습니다.) 신학 지식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부합하지 않습니다.) 신학 지식은 전부 겉모습만 그럴듯한 공허한 이론이며, 실제적이지 않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 말대로 살았고, 이 말대로 추구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바울이 고난을 겪으며 대가를 치른 속셈과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해, 그는 상을 받으려는 속셈이었다. 즉, 열심히 뛰어다니고, 대가를 치르고, 아름다운 싸움의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공의의 면류관을 바꾸려 했던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바울이 여러 해 추구한 것은 상과 공의의 면류관을 받기 위한 것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만약 그에게 그런 속셈과 목적이 없었다면, 그가 그렇게 고난을 겪으며 대가를 치를 수 있었겠느냐? 바울이라는 사람의 품성과 야심, 욕망을 놓고 볼 때, 그는 그런 사역을 하고 그런 대가를 치를 수 있었겠느냐?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미리 그에게 “내가 땅에서 사역할 때 너는 나를 박해하였다. 너 같은 자는 이미 벌과 저주를 받았으니 네가 무얼 하든 그 잘못을 만회할 수 없으며, 네가 아무리 회개해도 나는 너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려 주었다면, 바울은 어떤 태도를 보였겠느냐? (하나님을 저버리고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을 부정하고,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정하고, 하늘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으로 살았던 것이냐?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그렇게 많은 환난을 겪고도 계속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겠느냐? 복을 얻겠다는 욕망에 지배되어 그런 열의가 생기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은 당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의 큰 빛을 보고는 두 눈이 멀었다. 땅에 엎드려 온몸을 떨면서 하나님의 큰 권능과 위엄을 느꼈고, 하나님이 자신을 쓰러뜨릴까 두려워 하나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무리 큰 고난을 겪어도 복음 전파를 게을리하지 않고 계속해야 했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가장 주된 것은 여전히 복을 받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 너무 강렬했다는 점이다. 만약 복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면, 그런 일말의 희망이 없었다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느냐?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 번째, 바울은 자신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증거했다. 우선 바울이 한 사역을 보자. 바울은 풍부한 종교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명성도 있었고, 특별한 학문적 배경도 갖고 있었기에 보통 사람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에 의지해 사역하였느냐? (은사와 특기, 성경 지식에 의지해 사역했습니다.) 겉으로는 그도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증거했지만, 그저 예수의 이름만 증거했을 뿐 예수는 하나님이 나타나 사역한 것임을,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진실하게 증거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를 증거하였느냐? (그 자신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이 암시하는 바는 무엇이냐? 예수가 그리스도도, 주도, 하나님도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 주,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가 그렇게 뛰어다니며 전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속셈과 야심에 의지한 것이었다. 그의 야심은 무엇이냐? 바로 모든 사람들, 그러니까 그가 전도한 사람들이나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임을 증명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의지해 살았던 것이다. 그 밖에 바울은 성경 지식에 의지해 사역하였다. 그가 전도한 내용과 설교는 그에게 성경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성령의 역사, 성령의 깨우침, 진리 실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그의 서신에서도 이러한 말들이 보이지 않고, 그 또한 이런 측면의 체험은 분명 없었다. 바울은 사역하면서 한 번도 예수의 말씀을 증거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예수가 사람들에게 자백하고 회개하려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를 가르쳤고, 또 예수가 사람을 가르치면서 한 많은 말씀이 있었지만, 바울은 전혀 전파하지 않았다. 바울이 한 모든 사역은 예수의 말씀과는 관계가 없었으며, 바울이 전파한 것은 전부 그가 배운 신학 지식과 이론이었다. 그렇다면 신학 지식과 이론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느냐? 사람의 관념, 상상, 철학, 추리, 그리고 거기에서 얻어진 경험과 교훈 등이다. 요컨대 이러한 것들은 모두 사람의 사유를 통해 생긴 것으로, 사람의 사상 관점을 대표하는 것이고, 진리이기는커녕 진리에 부합하지도 않고 진리와 전혀 맞지 않는 것이다.

바울의 예를 다 들었으니 너희 자신과 대조해 보아라. 오늘 이야기한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있었는가’라는 이 주제에 관해 생각나는 자신의 내적 상태나 모습이 있느냐?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으며 큰 시련이 닥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선 결국 저를 죽게 하지 않으실 거라고 여겼던 게 생각납니다.) 이는 일방적인 소망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교제하려는 주제에 약간 근접했다. 실제 내적 상태와 관련이 있는, 실생활에서 실제로 추구하는 하나의 관점이다. 또 있느냐? (저는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따르기만 한다면 반드시 복을 받을 수 있고 좋은 결말과 종착지를 얻을 수 있다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매우 많지 않으냐? 이는 기본적으로 모두가 비교적 공감할 수 있는 관점이다. 이와 다른 관점은 또 무엇이 있는지 말해 보아라. 힌트를 주겠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으며 자신의 경험과 상상, 혹은 과거에 읽었던 영적 서적에서 알게 된 체험과 범례에 의지해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떻게 해야 영적인 것에 도달할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 등 실행에 관한 방식을 도출해 낸다. 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며,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질병으로 고통받을 경우, 그는 그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진리를 구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가장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실행하느냐? 그는 “병에 걸린 이 일은 하나님이 배치하신 것입니다. 저는 믿음으로 살 것입니다. 약도 먹지 않고, 주사도 맞지 않고, 병원에도 가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보기에 제 믿음이 어떤가요? 괜찮지 않나요?”라고 말한다. 이 사람에게 믿음이 있느냐? (있습니다.) 너희는 이 사람의 관점에 찬성하고, 너희 또한 이렇게 실행한 것이다. 병에 걸렸을 때 주사도 맞지 않고, 약도 먹지 않고, 병원에도 가지 않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이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이렇게 실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근거는 무엇이냐? 확증되었느냐? 너희는 아직 잘 모른다. 이렇게 하는 게 진리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면서 왜 너희는 이렇게 실행하려는 것이냐? 병이 있어도 하나님께 계속 기도만 할 뿐 주사도 맞지 않고, 약도 먹지 않으며, 진찰도 받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하며 병을 낫게 해 달라고 하거나 하나님의 지배에 맡겨 버린다. 이런 실행 방법이 정확하겠느냐?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제서야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냐, 아니면 예전부터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냐? (예전에는 병이 나면 진찰을 받거나 약을 먹는 것이 겉면의 행동 방식이라고, 믿음이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해 기도나 다른 방법으로 대처했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네게 질병을 주었는데 네가 이 병을 고쳐 버리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안배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것 아니냐? (네.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관점은 옳으냐, 그르냐? 아니면 뭔가 의구심은 들고 이러는 게 옳은지 그른지 전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껏 이렇게 해 왔고, 다들 이렇게 하는 것이 그르다고 이야기하지 않고, 스스로도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으니 그냥 쭉 이렇게 실행하는 것이냐? (이제까지 줄곧 이렇게 실행해서 별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가 이렇게 하는 것은 막막한 것 아니겠느냐?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하다. 최소한 그렇게 하는 것은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리에 부합한다면 최소한 어떤 원칙을 지키는 것인지, 어떤 원칙의 범주 내에서 행하는 것인지 분명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보면 사람들의 이런 행동은 자신의 상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스스로 억제한 것이다. 또한, 사람은 상상에 따라 스스로에게 어떤 기준을 정해 놓고 병에 걸리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요구를 한 건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상상으로 규정한 방식에 따라 행하고, 대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본인도 잘 모른다. 이러한 내적 상태는 무엇으로 살고 있는 것이냐? (상상입니다.) 이 상상에 관념이 담겨 있지 않느냐? 그런 관념은 무엇이냐? (이렇게 실행한다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념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해 방법이 순수하고 올바르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정의가 내려졌고 결과가 나왔다. 이러한 상상과 관념에 의지해 사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너희는 ‘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주제에 관해 기본적으로 다 숙고해 보았으니 이 주제에 대해 주로 무엇을 교제할지 알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내적 상태를 이야기할 테니, 잘 들으면서 숙고해 보아라. 숙고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바로 자신과 대조하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내적 상태를 잘 파악하고, 자신에게 이러한 내적 상태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진리를 구해 해결하여 진리와 무관한 것들이 아닌 진리에 의지해 살 수 있도록 노력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이 주제와 관련된 내용은 매우 많은데, 우선 은사부터 이야기해 보자. 어떤 사람은 말주변이 좋아 말이 청산유수인데 세 치 혀와 유려한 말솜씨로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왕래를 한다. 이들은 머리 회전이 빨라 사람을 만나면 사람 말을 하고 귀신을 만나면 귀신 말을 한다. 하나님 집에서 그는 자신의 세 치 혀와 민첩한 사고력에 의지해 본분을 이행한다. 평범한 문제는 그의 현란한 말솜씨를 거치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으니 마치 그가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가 좋은 데다가 사회적인 경험과 식견도 있어서 평범한 일이 닥치면 분명히 알 수 있고, 말 몇 마디로 문제를 해결해 버린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은 무슨 일이 닥치든 몇 마디면 다 해결하는데, 왜 나는 안 될까?’라며 모두 그를 부러워하고, 그 자신도 마음속으로 ‘다들 보라고,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뛰어난 언변과 총명한 두뇌를 주셨어. 식견이 있는 데다 반응도 빨라 무슨 일이든 문제가 안 돼. 내게 주어지면 바로 해결이 되지!’라며 흐뭇해한다. 이제 문제가 생겼다. 말주변이 좋고 머리 회전이 빠른 사람이 이런 특기와 재능에 의지해 본분을 이행했고, 본분을 이행하는 기간 문제들도 해결했으며, 하나님 집을 위해 일도 했지만, 자세히 따지고 보면 그가 한 모든 일들이 진리에 부합하는지, 진리 원칙에 따라 한 것인지,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물음표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진리에 부합하는지 모를 때가 많지만, 그래도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든지 간에 그는 무엇에 의지하고 있느냐? 본분을 이행함에 있어 그 출발점은 무엇이냐? 바로 그의 사고력과 식견, 그리고 세 치 혀이다. 너희 중에 이러한 사람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뇌, 높은 IQ, 좋은 말주변에 의지해 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이 진리 원칙에 부합하는지 아닌지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너희는 일할 때 원칙이 있느냐? 바꿔 말하면, 너희는 사탄 철학, 자신의 두뇌, 총명과 지혜에 의지해 일을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해 일을 하느냐? 너희가 항상 사탄 철학, 자신의 기호와 생각에 따라 일한다면, 이는 일 처리에 원칙이 없는 것이다.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 말씀과 진리 원칙에 근거해 일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일 처리에 원칙이 있는 것이다. 지금 너희의 말과 일 처리에서 진리에 위배되는 부분이 있느냐? 원칙을 위배하였느냐? 너희는 알고 있느냐? (알 때도 있습니다.) 그럼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 기도하고, 다짐하고, 회개합니다. 다시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닥치면 또 그렇게 하고 또 다짐하느냐? (그렇습니다.) 언제 일이 닥치든 항상 다짐하는데, 그렇다면 다짐한 후에 진리를 실행해 냈느냐? 원칙에 따라 일 처리를 하였느냐? 마음속으로 명확히 알았느냐? 많은 사람이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구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잔머리와 은사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런데 머리가 잘 돌아가거나 말주변이 좋은 은사만 있겠느냐? 은사에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으로는 또 무엇이 있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노래 부르는 것을 특히 좋아하고, 두세 번 듣기만 해도 그 노래를 부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이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면서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준 본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느낌은 틀림없고 정확한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는 많은 찬양을 배웠고 노래 실력도 나날이 좋아졌지만, 그 자신도 모르고 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이 문제는 무엇이겠느냐? 그가 노래를 점점 더 잘 부르게 되면서 이 은사를 생명으로 여긴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것 아니겠느냐? 그는 날마다 은사에 의지해 살고, 날마다 찬양을 부르며 생명을 얻었다고 여기는데, 이는 사람의 착각 아니냐? 설령 네가 노래하면서 감동을 받고, 다른 사람도 듣고는 즐거워하고 퍽 도움을 받았더라도, 이것으로 네게 생명이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겠느냐? 이는 확언할 수 없다. 이는 네가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는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지, 본분 이행과 일 처리에 원칙이 있는지, 진실한 체험 간증이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 몇 가지 측면에서 가늠해야만 그 사람에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 알 수 있다. 만약 정말로 진리 실제가 있다면, 이는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특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생명이 있는 사람이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은사와 특기가 있고 본분 이행에서도 성과가 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항상 은사에 의지해 살아가며 고참이라고 으스대고 누구에게도 불복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생명이 있겠느냐? 생명이 있는지의 핵심은 사람이 진리 실제를 지니고 있는지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특기와 은사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은사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이런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 진리를 구해야 한다. 우선, 은사란 무엇인지, 생명이란 무엇인지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은사와 특기란 사람이 어떤 측면에서 선천적으로 남보다 훌륭하고 뛰어난 것을 지칭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보다 반응이나 이해력이 빠르거나, 특정 업무 기술을 지니고 있거나, 말주변이 좋거나 하는 것 등이 바로 사람의 은사와 특기이다. 너에게 어떤 측면의 특기와 장점이 있다면, 이러한 은사와 특기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네가 너의 특기와 은사를 다른 사람은 대체할 수 없다고, 너의 은사와 특기에 의지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바로 진리 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관점은 옳은 것이냐, 틀린 것이냐? (틀린 것입니다.) 왜 틀렸다고 하는 것이냐? 특기와 은사란 대체 무엇이냐?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대해야 하느냐? 사실, 어떤 측면의 은사와 특기가 있든 그것이 진리와 생명이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에게 어떤 측면의 은사와 특기가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측면의 본분 이행에 적합하다는 것이지, 그 사람이 진리를 실행한다는 뜻은 아니고 일 처리에 원칙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예를 들어, 너에게 선천적으로 노래를 잘하는 은사가 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네가 노래를 잘하는 것이 진리 실행을 의미하겠느냐? 네 노래에 원칙이 있음을 의미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예컨대, 네가 글재주를 타고나 글을 잘 쓴다고 해 보자. 그런데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네가 쓴 글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너에게 체험 간증이 있음을 의미하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사와 특기는 진리와는 별개의 것이며, 함께 논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은사가 있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항상 은사를 자랑하고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해 남들을 무시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도 다른 사람과 협력하기 싫어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려고 해 본분 이행 과정에서 수시로 원칙에 위배되고 일의 효율이 무척 떨어지는 결과가 초래된다. 은사가 그를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남을 깔보게 만들어 그는 늘 자신이 남들보다 나으며 자신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쭐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은사 때문에 망쳐진 것 아니겠느냐? 사실이 바로 그렇다. 사람은 은사와 특기가 있으면 교만해지고 독선적으로 변하기가 쉽다.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항상 은사에 의지해 살아간다면 매우 위험해질 것이다. 하나님 집에서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어느 측면의 특기가 있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절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다. 어떤 측면의 은사와 특기가 있다면, 그 측면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한다. 만약 거기서 더 나아가 진리를 깨달아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은사와 특기는 본분 이행 과정에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으며, 오로지 은사에 의지해 일한다면, 본분 이행에서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할 것이며, 자칫 잘못하면 도태될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어떤 사람이 글재주는 있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해 그가 써낸 것들에 진리 실제가 전혀 없다면, 남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 그렇다면 문화적 소양은 없어도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 간증하여 성과를 내는 것보다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은사 속에서 살아가며 자신이 하나님 집에 유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들이 가치가 있겠느냐? 만약 사람에게 은사와 특기는 있는데 진리 원칙이 없다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진정으로 이 일을 깨닫고 이해하면 은사와 특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항상 은사에 의지해 허풍을 떨고, 자신에게 진리 실제가 있으니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늘 다른 사람을 깔본다면, 이런 내적 상태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겠느냐? 진리를 구해야 하고, 은사에 의지해 허풍 떠는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은사에 의지해 허풍을 떠는 것은 너무 우매하고 무지한 것 아니겠느냐? 말주변이 좋다고 해서 진리 실제가 있다는 의미가 되겠느냐? 또 은사가 있다는 것이 진리 생명이 있다는 의미가 되겠느냐? 사람이 실제가 전혀 없으면서도 은사에 의지해 자신을 뽐낸다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아니겠느냐? 이러한 일들을 꿰뚫어 보면 자화자찬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어느 정도 은사와 특기를 지닌 사람들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겠느냐? 너희는 이런 체험과 경험이 있느냐?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고 자신의 모든 것이 다 훌륭하다고 생각해 무척 교만하고 잘난 체하며, 다른 사람들을 깔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거나 실행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한 가지 측면이다. 또 있느냐? (자신의 은사와 특기를 내려놓기 힘듭니다. 항상 은사와 특기를 적용하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리에 근거해 일을 바라볼 줄 전혀 모릅니다.) (은사가 있는 사람은 늘 자신이 일을 잘 처리한다고 생각하므로 일이 닥쳤을 때 하나님께 의지하기 어렵고 진리를 구하려 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말한 것은 모두 틀림없는 실제 상황이다. 은사와 특기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매우 똑똑해 어떤 일이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은사와 특기가 진리를 의미하지 않으며, 진리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사람이 은사와 상상에 의지해 일할 때, 그의 생각과 관점은 종종 진리에 위배된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난 정말 똑똑해. 이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고 영명한 결단이야! 당신들은 나만큼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 항상 나르시시즘과 자아도취의 내적 상태로 살아가니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진리란 무엇인지, 진리 원칙이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기 어렵다. 이러면 진리를 깨닫기 어렵다. 설령 본분을 이행한다 하더라도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가 힘들다. 요컨대, 어떤 은사와 특기를 지니고 있든, 진리를 추구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하다.

은사와 특기는 동일한 측면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특정 기술이 특히 탁월하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들은 전기 기기를 다루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전자 기술이 비교적 능숙해 그 안의 프로그램이나 어떤 소프트웨어라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으며 매우 빨리 파악하고 기억한다. 즉,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력과 기억력이 출중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특기이다. 어떤 사람들은 언어 학습에 뛰어나 어떤 언어를 배우든 매우 빨리 습득하며, 기억력도 평범한 사람보다 출중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춤과 노래, 그리고 문화 예술 분야에 뛰어나고, 어떤 사람은 분장과 연기를 잘하며, 또 어떤 사람은 감독 등을 할 수도 있다. 어떤 분야의 특기이든, 한 가지 일에 종사하기만 하면 “사람은 도대체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라는 주제와 관련된다. 왜 사람의 은사와 특기를 분석하겠느냐? 바로 사람은 모두 은사와 특기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고, 게다가 은사와 특기를 밑천으로, 철밥통으로, 생명으로, 삶의 가치로, 삶의 추구 목표와 의미로 삼으며,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한 이를 사람 생명에서 필수 불가결한 일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거의 모든 사람이 은사와 특기에 의지해 살아간다. 너희 모두는 어떤 측면의 은사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느냐? (저는 제가 언어 측면의 은사가 있다고 생각해 이 측면의 은사에 의지해 복음을 전합니다. 참도를 알아보는 사람과 소통할 때 그들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어서 그들이 기꺼이 제 말을 듣습니다.) 그렇다면 너에게 그런 은사가 있는 것이 좋은 것이냐, 아니면 나쁜 것이냐? (하나님의 교제를 듣고 나니 그 은사가 제가 진리 원칙을 구하는 데 장애물이 될 것 같습니다.) 네 뜻은 언어 은사가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앞으로 그 언어 은사를 사용하기 싫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이냐? 지금 너희는 오늘 이야기한 이 주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너희의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은사에 의지해 살아갈 때 어떤 부분이 옳고 그른지를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만약 이런 것들을 명확히 알지 못한다면, 자꾸 곱씹다가 결국에는 옳은 부분도 그르게 느껴지고, 그른 부분도 그르게 느껴져 어찌해도 다 그르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은사에 의지해 살아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언어 측면의 은사에 의지해 복음을 전하는 속셈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과시와 자기도취로 자신이 매우 훌륭하다고 느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은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의 그릇된 부분을 말한 것이다. 너는 그것이 너의 밑천이고 일종의 자기 가치 실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근원과 사상이 잘못되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은사는 단지 본분 이행의 도구일 뿐이며, 은사를 사용하는 목적은 자신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여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설마 그렇게 생각하기만 하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은사에 의지해 살아가지 않고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본분을 이행할 때 너의 은사를 사용해 네 개인의 기교와 능력을 과시한다면, 이는 은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너의 은사와 네가 파악한 지식을 사용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충심을 다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하나님이 요구한 효과에 이른다면, 만약 네가 어떻게 말하고, 어떤 말을 해야 더 잘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역을 더 잘 알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면, 그리하여 결국에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면 이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다르지 않으냐? (다릅니다.) 너희는 자신의 은사, 특기, 재능을 과시할 때,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잊거나 자신이 본분을 이행하고 있다는 것은 잊고 마치 이방인처럼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뽐낸 적이 있느냐? 이런 상황이 있지 않았느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사람 내면은 어떤 내적 상태였느냐? 방종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제약과 가책도 없다. 게다가 일할 때 마음속에 목표와 원칙이 없어 이미 크리스천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존엄과 품위를 상실하였다. 그럼 어떻게 되겠느냐? 기교를 과시하고 인격을 파는 것이 된다. 너는 본분을 이행할 때, 자신의 특기와 은사를 발휘하는 데만 집중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 이런 내적 상태가 많지 않으냐? 이런 내적 상태일 때, 너 스스로 이를 의식할 수 있느냐? 바로잡을 수 있느냐? 의식할 수 있고 바로잡을 수 있다면 진리 실행에 이를 수 있지만, 만약 네가 항상 이렇게 오랫동안 거듭한다면 너는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고 완전히 은사에만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의 자제력은 어디에서 나오겠느냐? 사람에게 있는 자제력의 크기는 무엇에 근거하느냐? 네가 진리를 사랑하는 정도에 근거하고, 사악하거나 부정적인 사물을 증오하는 정도에 근거한다. 진리를 깨달으면 더는 악을 행하지 않으려 하게 되고, 부정적인 사물을 증오하게 되어도 역시 악을 행하지 않으려 하게 된다. 자제력은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악한 사물을 증오할 수 없으므로 자제력이 없다. 그래서 방탕하고, 제약을 받지 않으며,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행동하고, 악을 아무리 많이 행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은사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또 다른 내적 상태가 있다. 사람이 어느 측면의 특기와 은사 또는 기능을 지니고 있든, 만약 그가 일만 하고 힘만 쓸 뿐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찾지도 않는다면, 마치 마음속에 진리 실행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처럼 그의 유일한 출발점이 그 일을 잘 해내거나 그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라면 이는 완전히 은사와 특기에 의지해, 자신의 재능과 기교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그들은 하나님을 믿을 때 그저 힘만 쓰고 복을 받으려 하며, 자신의 은사와 기능을 팔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생각만 한다. 대부분 사람의 내적 상태가 이러하다. 특히 하나님 집에서 사무적인 사역을 맡겼을 때, 대부분 사람이 이런 관점을 갖고 일하며 그저 힘만 쓴다. 여기에 내포된 의미는 바로 힘만 써서 목적을 달성하려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입과 눈을 움직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손을 사용하거나 다리품을 팔고는 자신이 큰 공헌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은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어째서 은사와 특기 등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을 힘쓰는 것일 뿐 본분 이행은 아니라고, 진리 실행은 더더욱 아니라고 하겠느냐?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임무를 하나 맡겼다고 하자. 그 임무를 받은 후, 너는 어떻게 하면 그 임무를 최대한 빨리 완성해서 리더에게 보고해 칭찬받을지를 생각할 것이다. 아마도 계획을 하나하나 나열해 진지한 태도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 일을 완수해 남에게 보여 주는 것에만 집중하거나, 임무를 수행할 때 자신만의 기준을 정해 놓고 어떻게 해야 기쁘고 만족할 수 있을지, 너 자신이 추구하는 완벽한 수준에 이를지에만 집중한다. 네가 어떤 기준을 세우든, 그것이 진리와 관련이 없다면, 진리를 구해 하나님의 요구를 깨닫고 확인한 후 한 것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한 것이라면 이는 모두 힘을 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방적인 바람으로 자기 두뇌와 은사, 또는 재능과 기교에 의지해 일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면 결과가 어떻겠느냐? 아무도 트집을 잡지 않고 너 자신도 기뻐할 정도로 일을 완수할 수도 있지만, 일하는 과정에서 첫째로 너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고, 둘째로 너는 마음, 뜻, 힘을 다하지 않았으며, 너의 마음은 진리를 구하지 않았다. 만약 네가 진리 원칙과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면 이 일을 해서 합격할 수 있을 것이며, 너 또한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고, 네가 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함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마음을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한다면, 일을 끝내고 임무는 완수했어도 어떻게 했는지는 네 마음속으로도 분명히 알지 못할 것이다. 너에게 기준이 없어 그 일을 하나님 뜻에 부합하게 했는지, 진리에 부합하게 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는 본분을 이행한 것이 아니라 힘만 쓰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만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합격한 본분 이행이다.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는 데는 기준이 있다. 예수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한 바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는 어떻게 구현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해야 한다. 실제 상황에 적용시키는 것이 바로 사람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본문 이행의 기준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피조물의 본문을 제대로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쓰는 것이 중요하며, 마음을 쓰면 그 밖의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은 쉽게 이를 수 있다. 만약 머릿속의 상상과 은사에만 의지해 본분을 이행한다면 하나님의 요구에 이를 수 있겠느냐?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한 것이고, 또 충성을 다해 제대로 본분을 이행한 것이겠느냐? 바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이다. 제대로 본분을 이행하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참되고 강렬할수록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본분을 이행할 수 있는 법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것 중 가장 마지막이 바로 힘을 다하는 것이고, 마음을 다하는 것은 가장 앞에 있다. 마음을 다하지 않으면 어떻게 힘을 다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그저 힘을 다하기만 해서는 성과를 이룰 수 없으며 원칙에도 도달할 수 없다. 하나님의 요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마음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어떤 본분이나 일을 부탁하든, 네가 힘만 쓰고 분주히 뛰어다니고 힘껏 일하기만 하면 진리 원칙에 부합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겠느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마음을 다한다’는 말은 쉽게 얘기할 수 있고, 사람들도 늘 이 말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는 것이겠느냐? 어떤 사람은 “일할 때 마음을 좀 더 많이 쓰고, 공을 좀 더 많이 들이고, 많이 고민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속으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일을 할지만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라고 하는데, 이렇게 간단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기본적인 실행 원칙을 몇 가지 이야기해 보자. 너희가 평소에 실행하거나 준수하는 원칙에 따르면, 마음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선 어떻게 해야 하느냐? 건성으로 대충 하지 않고, 온 마음과 에너지를 다 바쳐 마음을 써서 해야 한다. 만약 사람이 마음을 다할 수 없다면, 그것은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것처럼 말도 건성으로 하고, 일 처리에 영 마음을 쓰지 않으며, 무슨 일이든 아무 생각 없이 하는데, 이러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 본분을 이행할 때 마음을 다할 수 없고, 마음을 전부 쓰지 않는다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다. 설령 본분을 몇 년이나 이행해도 합격할 수 없다. 마음을 쓰지 않으면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일을 불성실하게 처리하며, 항상 이랬다저랬다 하고 제 분수를 모르고 목표만 높게 잡는다.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사람에게 마음이 있겠느냐? 사람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거의 읽지 않는다면 마음이 있는 것이겠느냐? 무슨 일이 닥치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있는 것이겠느냐?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진리를 전혀 구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있는 것이겠느냐? 본분을 몇 년이나 이행했어도 내내 명확한 성과가 없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있는 것이겠느냐?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본분을 이행해야 마음을 다하는 것이겠느냐? 우선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나의 책임이니 내가 책임져야지 도망가면 안 돼. 이걸 제대로 해서 하나님께 보고해야 해.’ 이런 이론적인 기초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론적인 기초만 있으면 마음을 다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마음을 다하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기에는 아직 멀었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이겠느냐?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다할 수 있겠느냐? 우선 ‘누구를 위해 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위해서인가, 아니면 교회를 위해서인가, 그것도 아니면 어떤 사람을 위해서 이행하는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을 반드시 명확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 밖에도 ‘이 본분은 누가 나에게 부탁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부탁하신 건가, 아니면 어떤 리더나 어느 교회에서 부탁한 건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하찮은 일이라고 해도 이 또한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너희의 본분은 어떤 리더 일꾼이나 어느 교회에서 너희에게 부탁한 것이냐? (아닙니다.) 네가 마음속으로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으니 됐다. 본분은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한 것임을 굳게 믿어야 한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교회 리더가 너에게 맡긴 것 같지만, 사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안배에서 나온 것이다. 간혹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더라도 그 또한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체험 방법은 올바른 것이다.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인다면, 이런 체험을 할 때 너에게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가 있을 것이다. 만약 네가 항상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며 모두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너의 체험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 또한 없을 것이다. 이는 네가 지나치게 잔꾀가 많고, 영적인 이해력이 너무 없으며, 마음가짐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네가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의지해 모든 일을 대한다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주재하기 때문에 하나님 집에서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일을 안배하든 모두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서 비롯되며, 그 안에는 모두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담겨 있다는 점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를 분명히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도리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마음속으로 ‘이 본분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거야. 나는 하나님을 마주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지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피조물인 나 자신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부탁이야.’라고 굳게 믿어야 한다. 이 본분이 하나님이 너에게 부탁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너에게 어떻게 부탁하였느냐? 이는 마음을 다하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진리를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이 부탁한 이 본분에 대한 요구치, 기준, 원칙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했는지를 구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분명하게 말씀했다면, 이때 너는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고 구체화할지를 고민하고, 또 진리를 깨달은 사람과 교제한 다음 하나님의 요구대로 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는 것이다. 또한, 이 일을 하기 전에는 네가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진리를 깨달았으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일할 때 자기 생각이 또 진리 원칙과 차이가 나고 모순이 생긴다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마음을 다한다는 원칙을 지켜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 개인의 불순물이 있어서는 안 되며, 자기 뜻에 따라 일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저는 그런 일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어차피 이 본분은 저에게 맡겨졌으니 제가 결정하겠어요. 주도권도 제가 쥐고 있으니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습니다. 이 또한 마음을 다하는 것인데 당신이 트집을 잡을 수 있겠어요?”라고 말하고는 자기가 어떻게 할지를 공들여 고민한다. 결국 일을 하기는 했지만, 이런 실행 방법과 내적 상태가 옳은 것이겠느냐? 마음을 다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무슨 문제이겠느냐? 이는 교만하고, 독단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이는 사람의 경영을 하는 것이지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뜻에 따라 자기가 만족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 마음을 다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전에 특기와 은사를 집중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특기와 은사에 지식이 포함되겠느냐? 지식과 특기는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특기는 뛰어난 재주를 지칭하며, 남들보다 뛰어난 점이나 사람의 비교적 특출한 자질일 수도 있다. 이는 가장 잘하는 것이거나 비교적 탄탄하고 완벽하게 통달한 기능으로, 이런 것들을 모두 특기와 은사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지식은 무엇이냐? 지식은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것이겠느냐? 만약 어떤 지식인이 오랫동안 공부를 했고 많은 명저를 읽었다면, 어떤 전공이나 지식을 특별히 파고들어 성과를 거둬 비교적 자세하고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다면, 이는 특기나 은사와 관계가 있겠느냐? 지식을 특기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특기에 의지해 사역한다면, 그는 무식쟁이이거나 농사꾼일 가능성이 있다. 학력도 높지 않고, 명저를 읽은 적도 없으며, 심지어 성경조차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질이 좀 있고 언변이 좋다면, 이는 특기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특기가 있다고 해서 그가 지식이 있다는 의미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지식이란 무엇이겠느냐? 어떻게 정의하겠느냐? 이렇게 말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교육을 전공했다면, 그는 어떻게 교육하는지, 어떻게 지식을 전수하고 어떤 내용을 전수하는지 등등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겠느냐? 그 분야의 지식을 갖췄으니 그는 이 분야의 지식인 아니겠느냐? 그가 바로 이 분야의 지식을 갖춘 인재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것을 예로 들어 보자. 만약 그가 교육에 종사하는 지식인이라면, 보통 이런 사람은 사역을 하거나 교회를 인도할 때 어떻게 하겠느냐? 상투적인 행동 방식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겠느냐? 누구와 이야기하든 선생님이 학생을 대하듯 하지 않겠느냐? 어떤 말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바로 그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입하고 전수하느냐이다. 오랫동안 이런 지식에 의지해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지식은 기본적으로 그의 생명의 일부분이 되었다. 심지어 그의 처세 방식이나 생활 곳곳 모두에서 그가 이 분야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흔적을 볼 수 있으며, 그가 자신이 배운 지식이 내포된 삶을 살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흔히 볼 수 있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항상 무엇에 의지해 사역하겠느냐? 자신이 배운 지식에 의지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저는 하나님 말씀을 읽을 줄 몰라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나님 말씀을 읽을 줄도 모르는데 진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하나님 말씀을 읽을 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어요?”라고 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할 줄 압니다. 제가 지식이 있으니 당신을 도와드릴게요. 이 편의 말씀은 총 네 단락으로 나뉩니다. 보통 문장이 서술문일 경우, 시간, 장소, 인물, 사건의 원인, 사건의 경과, 결과라는 6개의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이 편의 하나님 말씀이 선포된 시간은 끝머리에 있는 ‘2011년 10월’로, 이것이 첫 번째 요소입니다. 인물의 경우, 하나님 말씀에서 ‘나’를 언급했으니 가장 중요한 인물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다음으로는 하나님께서 또 ‘너희’라고 하셨으니 바로 저희입니다. 그런 다음 또 일부 사람들의 내적 상태를 분석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패역하고 교만한데, 이는 교만하고 패역한 사람,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사람,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피우는 사람, 나쁜 사람과 악인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사건의 경과는 바로 사람이 나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다른 측면의 것들입니다.” 이런 사역 방식은 어떠하냐?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도운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는 무엇에 근거해 행동하였느냐? (지식입니다.) 내가 왜 이런 예를 들었겠느냐? 바로 지식이 무엇인지를 더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말씀은 읽을 줄 모르지만 학교에 다닌 적이 있고 재학 시절에는 문과 성적이 괜찮았을 수도 있는 사람이 하나님 말씀 한 편을 펼쳐 보고는 “이 편의 하나님 말씀이 매우 좋습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는 하나님께서 매우 직설적으로 말씀하셨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말투에 위엄과 진노가 있으며, 세 번째 단락에서는 구체적이고 명백하게 폭로하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말씀이죠. 네 번째 단락에서는 이를 종합해서 실행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완벽해요!”라고 말한다면, 그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종합하고 귀납하는 것은 지식에서 나온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비록 내가 든 예가 그다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너희가 무엇을 깨닫게 하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지식을 적용해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추한 모습, 그것이 매우 혐오스럽다는 것을 너희로 하여금 분명히 보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도 지식에 의지해 읽는다. 그런 그가 일할 때 진리에 의지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지식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은 일할 때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느냐? 우선, 그는 자신의 장점이 무엇이라 생각하겠느냐? 그는 지식과 학문을 지니고 있으며, 지식 산업에 종사한 적이 있는 지식인이다. 지식인이 일할 때는 지식인의 풍격, 특징, 패턴이 있어서 일할 때 자신도 모르게 위신을 갖게 되어 남들의 부러움을 산다. 지식인들은 일할 때 이런 식으로 항상 위신을 강조한다. 겉으로는 문약해 보이지만, 내면은 결코 그렇게 문약하지 않아서 모든 일에 자신만의 관점을 지니고 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을 뽐내고 싶어 하고 잔머리를 쓰려고 하며, 지식의 관점, 태도, 사고방식으로 분석하고 대하려 한다. 그런 그에게 진리란 부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가장 먼저 분석하는 태도로 진리를 대한다고 하는 것이다. 분석의 근거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지식이다. 예를 들어 보자. 감독 일을 배운 적이 있는 사람은 감독 분야의 지식을 갖고 있지 않겠느냐? 책을 통해 체계적으로 배웠든, 아니면 실제로 이런 일을 배우거나 해 봤든, 어쨌든 이 분야의 지식을 파악하고 있다. 그 배움의 깊이가 어떠하든, 이방에서 감독 업무에 종사한다면 네가 배운 감독 분야의 지식이나 경험이 매우 유용하고 가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에게 이런 지식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 집의 영상 사역을 반드시 잘해 낼 수 있겠느냐? 네가 습득한 지식이 진정으로 영화를 통해 하나님을 증거하는 성과를 얻도록 네게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 만약 네가 무턱대고 책에서 어떻게 가르쳤는지, 이 업계의 지식으로는 어떻게 규정하고 요구하는지만 강조한다면,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충돌과 다툼이 있는 부분이 있지 않겠느냐? 진리 원칙과 이 분야의 지식이 충돌할 때, 너는 어떻게 해결하겠느냐? 너는 지식이 주도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느냐, 아니면 진리 원칙이 주도하는 것을 받아들이겠느냐? 너희가 촬영한 모든 화면과 작품에 너희의 지식이라는 성분이 섞여 있지 않거나 적게 섞여 있다고, 온전히 하나님 집에서 요구한 기준과 원칙에 따라 한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느냐? 보장할 수 없다면, 너희가 습득한 지식은 하나님 집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지식은 대체 어떤 쓸모가 있느냐? 어떤 지식이 쓸모가 있느냐? 어떤 지식이 진리에 위배되느냐? 지식이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사람이 지식을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경건해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되느냐, 아니면 더 교만하고 독선적으로 변하느냐? 지식을 많이 배우면 사람은 복잡해지고, 교조적이 되며, 교만해진다. 그리고 또 사람이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알고 있는 지식이 많아지면 마음이 혼란해지고 원칙이 없어지며, 알고 있는 지식이 많을수록 혼란해진다는 것이다. 지식을 통해 사람이 왜 살아가는지, 사람의 생존 가치와 의의가 무엇인지, 이런 답을 찾을 수 있겠느냐? 사람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이런 결론을 찾아낼 수 있겠느냐? 지식이 너에게 네가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고 알려 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식이 연구해 낸 것이거나 너에게 주입한 것은 대체 무엇이겠느냐? 물질적이고 무신론적인 것, 사람이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사상과 머릿속의 것이다. 많은 것들이 사람의 머릿속 상상에서 나온 것으로, 전혀 실제적이지 않다. 지식은 또 사람에게 철학, 사상이론, 자연법칙 등을 주입하지만, 많은 일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보자. 천둥과 번개는 어떻게 생기는지, 사계절이 왜 교대되는지, 지식이 너에게 진정한 답을 알려 줄 수 있겠느냐? 요즘 왜 이상 기후 변화 현상이 나타나는지, 지식이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느냐?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지식은 만물의 근원적인 문제를 알려 주지 못한다. 그래서 지식이 해결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 혹자는 “어떤 사람은 죽고 나서 어떻게 다시 살아났나요?”라고 묻는데, 지식이 답을 알려 주었느냐?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지식은 또 너에게 무엇을 알려 주었느냐? 지식은 사람에게 많은 규율과 규례를 알려 주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녀를 양육하고 부모를 섬기고 공경해야 한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인성의 생활 측면의 지식이다. 이런 지식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전통문화가 교육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지식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느냐? 지식의 본질은 무엇이냐?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이 명저를 읽었고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다. 그럼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길에서 올바른 방향과 목표를 갖고 있느냐? 처신의 마지노선과 원칙을 가지고 있느냐? 나아가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줄 아느냐? (모릅니다.) 더 나아가 그들이 진리를 한 가지라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지식이란 무엇이냐? 지식은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준 것이냐? 어쩌면 사람이 다들 조금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과거 지식이 없었을 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단순했다. 하지만 지식이 생긴 후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여전히 단순하겠느냐? 지식은 사람을 복잡하고 더 이상 단순하지 않게 만들며, 더욱 정상 인성이 부족하고 인생의 목표가 없게 만든다. 지식을 배우면 배울수록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부인하게 되며, 지식이 많을수록 고집스러워지고 터무니없어진다. 그 결과가 어떻겠느냐? 세상이 갈수록 어둡고 사악해진다.

조금 전 지식을 적용하는 것이 진리 원칙과 모순이나 충돌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관해 언급하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너희는 어떻게 하였느냐? 어떤 사람은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는 게 뭐가 어렵고, 내려놓지 못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라며 도리를 말하지만, 일이 닥치면 여전히 자기 뜻과 관념, 상상에 따른다. 때로는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도리상으로는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옳으며, 지식은 분명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고, 이 두 가지가 모순되고 다툼이 생길 때는 반드시 우선 진리 원칙에 따라 실행하고 지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간단하겠느냐?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렇다면 실행할 때 어떤 어려움이 있겠느냐? 어떻게 해야 진리 원칙에 따라 일 처리를 할 수 있겠느냐? 이는 실제적인 문제 아니겠느냐?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첫째는 순종해야 한다. 하지만 사람은 패괴 성품이 있어 때로는 순종하지 못하고 “저더러 순종하라는 것은 소에게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하는 것 아닙니까? 지식에 의지해 행하는 게 뭐가 나쁜가요? 반드시 진리 원칙에 따라 하라고 하시면 저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패역 성품이 방해할 때 너는 어떻게 하느냐? (기도합니다.) 때로는 기도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네가 기도하고 나면 태도와 마음가짐이 좀 나아지고 내적 상태가 일부분 돌아설 수 있지만, 만약 네가 이 측면의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하고 명백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의 순종은 그저 형식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때 진리를 깨닫고 이 측면의 진리를 구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 집 사역과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 하나님 말씀 전파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하고, 마음속으로 명확히 알아야 한다. 어떤 측면의 본분을 이행하든, 어떻게 하든, 우선 하나님 집의 사역과 이익을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 전파나 너의 본분 이행으로 이루려는 목표를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우선순위로, 어떤 순간에도 소홀히 하거나 에누리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때 네가 에누리한다면 이는 참된 본분 이행이 아니며, 진리 실행이 아니다. 더 심각하게는 네가 개인의 경영을 하고 있으며, 너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지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의 부탁을 완수하고 사람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장 먼저 깨닫고 실행해야 하며, 이런 이상(異象)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본분 이행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며, 너 자신의 경영을 하는 것도 아니고, 너 자신을 증거하고 치켜세우거나 너 자신의 명리와 지위를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너의 목표는 이것이 아니라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며, 자신의 책임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함이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성을 살아 내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 내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함이다. 이런 올바른 마음가짐이 있으면, 지식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 고비를 매우 쉽게 넘길 수 있다. 여전히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과정에서 점차 바뀌어 상황이 점점 좋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는 어떻게 체험하고 있느냐? 나날이 좋아지고 있느냐, 아니면 정체되어 있느냐? 만약 너희가 시종일관 지식과 자기 두뇌에 의지해 행하고 진리 원칙을 구하지 않는다면 생명이 자랄 수 있겠느냐? 너희는 이를 정리해 본 적이 있느냐? 보아하니, 너희는 생명 진입이라는 이 일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고 구체적인 원칙이 없는 것 같구나. 즉, 마음속에 진리 실행의 원칙과 길에 대한 더 심도 있고 참된 깨달음이 없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일이 닥치든 늘 지식에 의지해 행한다. 그저 눈에 띄거나 간단한 일에서만 진리 원칙을 좀 지킬 뿐이다. 바로 이렇게 줄곧 지식이 주도하고 진리 원칙은 종속되도록 조율하고 에누리해 가면서 실행할 뿐, 완벽한 순종과 절대적으로 진리 원칙에 따른 일 처리를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게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는 대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이런 식으로 실행하면 어떤 위험이 있겠느냐?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 쉽지 않겠느냐?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기 쉽지 않겠느냐? 이는 사람이 가장 잘 헤아려야 할 일이다. 지금 너희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세상에서 일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느냐? 마음속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느냐? 너희는 이 문제를 항상 고려하고 고민해야 한다.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냐? 알고 있느냐?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진리를 얻어 패괴 성품이 변화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일하는 것은 육적인 생활을 위한 것입니다.) 거의 정확하지만 한 가지가 빠졌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은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이겠느냐? 사람의 경우에는 성품이 변화해 결국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경우에는 하나님이 너라는 피조물을 얻을 수 있고 그가 너를 창조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일할 때 사람은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겠느냐? (사탄 철학입니다.) 사탄 철학에 의지하는데, 이를 통칭하여 사탄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명리와 지위를 위해서든, 재물을 위해서든, 세속적인 삶이나 생존을 위해서든 모두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간다. 세상에서 일할 때는 머리를 쥐어짜 가며 돈을 벌어야 하고, 명리와 지위를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은 경쟁, 다툼, 약탈, 무자비함, 독기, 살생과 같은 것에 의지해야만 발붙일 수 있다.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면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사탄의 부정적인 것을 쓸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것을 벗어 버려야 한다. 사탄의 것은 어느 하나 발붙일 수 있는 것이 없다. 사탄의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하고, 누가 사탄의 것에 의지해 살아가면서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도태되고 버림받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는 것과 세상에서 일하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사람이 지식에 의지해 살아갈 때, 어떤 내적 상태 속에서 살고 있겠느냐? 가장 깊은 깨달음은 무엇이겠느냐? 일단 어떤 분야의 지식을 배우면 너는 자기가 능력이 생겼다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지식에 얽매이게 된다. 네가 지식을 생명으로 여기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지식이 곧바로 튀어나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너를 지배하게 되며, 네가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이는 지식이 이미 네 마음속에 각인되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는 선입견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어떤 분야의 지식은 아예 안 배우는 것만 못해서 배워 봤자 짐이고 골칫덩이이다. 지식에는 교육, 법률, 문학, 수학, 의학, 생물학 등 많은 분야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지식은 모두 사람이 실천을 통해 종합해 낸 것으로, 실용적인 지식이며, 사람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 당연히 배워야 하는 지식이다. 하지만 어떤 지식은 인류에게 해악을 가져다주는 사탄의 독소로, 사탄에게서 유래되었다. 예를 들어, 무신론, 유물론, 진화론과 같은 사회 과학 지식, 그리고 유가 학설과 공산주의 이론, 봉건 미신 사상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탄의 부정적인 지식에서 나왔으며, 그 역할은 주로 사람의 사상을 잠식하고, 부식시키고, 변화시켜 사람의 사상을 속박하고 통제함으로써 사람을 패괴시키고, 곤경에 빠뜨리고, 망치는 결과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를 잇는 것,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가문을 빛내는 것, 그리고 “먼저 몸과 마음을 수양하여 집안을 안정시킨 후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라는 것, 이러한 것들은 전통문화 교육이다. 이러한 지식 이외에도 민간 사회에서 전해지는 불교, 도교, 현대 종교의 각종 신학 이론 역시 지식의 범주에 속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들이 목사나 설교자였거나 또는 신학을 공부했었다면 이런 지식을 배운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복이 되겠느냐, 아니면 화가 되겠느냐? (화가 됩니다.) 어째서 화가 되겠느냐? 입을 열지 않으면 몰라도 그는 입만 열었다 하면 종교 도리를 말하는데, 항상 영적 도리를 말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그런 행동 방식을 남들에게 주입하여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한다. 신학 지식은 주로 신학 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신학 이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이 매우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남들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런 거짓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면 이것이 선입견이 되어 설령 네가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을 듣더라도 한동안은 깨닫지 못하며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바리새인의 지식 이론에 속박받게 되니 이는 매우 위험하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지 않겠느냐? 결국, 네가 도리와 지식에 의지해 살아간다면, 은사에 의지해 본분을 이행하고 일을 한다면 비록 남들이 보기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내적 상태로 살고 있을 때 너 자신은 이를 알고 있느냐? 그것이 지식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임을 의식할 수 있겠느냐? 지식에 의지해 살아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느낄 수 있겠느냐? 결국, 마음속이 텅 빈 느낌이 들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이는 대체 무엇 때문이겠느냐? 이런 문제들을 전부 명확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지식에 관한 문제이다.

조금 전 은사와 지식 이 두 측면을 이야기했다. 또 다른 측면이 하나 있는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진리란 무엇인지, 어떻게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늘 어떤 신념이나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의지해 살아간다. 간단히 말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지해 살아가며, 줄곧 그것을 집요하게 고수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진리로 여겨 끝까지 실행을 고수하면 이긴 자가 되고 살아남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관념에 의지해 하나님을 믿는다. 고난을 겪을 수도 있고, 가정과 직장도 버릴 수 있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것도 포기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또 몇몇 규례를 도출해 내 진리로 삼아 실행한다. 예를 들어 보자. 누가 어려움에 처했거나 누구네 집이 형편이 안 좋으면 자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도와주고, 물어봐 주고, 관심을 가져 주고, 보살펴 준다. 더럽고 힘든 일이 있는 곳에도 자발적으로 가서 일하고, 더럽거나 힘들다고 피하지 않으며, 고르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도 다투지 않으며, 되도록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함께 지내려고 한다. 이것저것 시시콜콜 따지지 않으며, 선의로 남을 돕고 양보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그와 함께 지내는 모든 사람이 그가 좋은 사람이며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하나님이 가라는 대로 가며, 반항하지 않는다. 이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열의입니다.) 이는 그저 단순한 열의가 아니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을 오래 믿어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며, 또한 진리 실행이란 무엇인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진리를 구하는 것이란 무엇인지, 진리 원칙이란 무엇인지를 전부 알지 못한다. 심지어 정직한 사람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정직한 사람이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렇게 살고 계속 따를 거야. 하나님 집에서 어떤 도를 전하든 나 자신의 이런 행동 방식을 고수할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시든 하나님을 믿는 걸 포기하거나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거야. 무슨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셔도 난 다 이행할 수 있어.’ 그는 이렇게 실행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비록 그의 태도에 큰 문제는 없지만, 그는 그렇게 오랜 세월 설교를 들었어도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했다. 순종의 진리를 깨닫지 못해 실행할 줄 모르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진리도 깨닫지 못했으며, 충심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진리도 깨닫지 못했고, 건성으로 대충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지, 간사한 사람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가련하지 않으냐? (가련합니다.) 그는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그가 ‘내 마음은 하늘과 땅만 알지 사람은 잘 모르고 보지도 못해. 하지만 하늘과 땅은 알고 있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이 너무나 ‘진심’이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며 평범한 사람은 이 수준에 이를 수 없다. 어째서 이를 적자지심이라고 하겠느냐? 그는 정서와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이런 개인의 감정이나 일방적인 바람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이해하고, 본분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또한, 이런 감정을 하나님의 요구에 적용해 ‘하나님께는 사실 사람이 무엇을 할 필요가 없고, 사람이 뭐 얼마나 큰 능력이 있거나 많은 진리를 깨달을 필요도 없어. 사람에게 적자지심만 있으면 돼. 하나님을 믿는 일이 얼마나 간단해. 바로 적자지심에 의지해 계속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거짓말하고, 반발하고, 거역하고, 관념이 생기고, 배반하며, 자신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아무도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갈라놓을 수는 없으며, 아무도 하나님에 대한 나의 사랑을 단념시킬 수 없고, 아무도 하나님에 대한 나의 충심에 영향을 줄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심리이냐? 무척 황당무계하지 않으냐? 매우 황당무계하고, 또 매우 가련하다. 이런 사람의 영 안에는 메마르고 가난하고 초라한 내적 상태가 있다. 어째서 메말랐다고 하겠느냐? 간단한 일이 닥쳤을 때, 예를 들어 그가 거짓말했을 경우, 스스로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며, 자책하지 않고, 어떤 느낌도 받지 않는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따르면서 무슨 일을 하든 엄격한 잣대를 대지 않아 자기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간사한 사람인지 아닌지, 정직한 사람이 되기는 했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할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런 것들을 전부 알지 못하니 이 정도로 불쌍하고 영적으로 메마른 것이다. 어째서 영적으로 메말랐다고 하겠느냐? 하나님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어도 알지 못하고, 자기가 왜 하나님을 믿는지 알지 못하며, 어떤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어떤 일들이 비이성적이고 진리 원칙을 어기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또한, 악인을 어떤 태도로 대하고 좋은 사람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 어떤 사람들과 교류하고 가까이 지내야 하는지, 자기가 소극적으로 변하면 어떤 내적 상태에 빠지는지, 이런 것들을 전부 알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메마른 것이다. 너희가 이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니 내 마음도 괴롭구나. 하지만 너희는 바로 이런 내적 상태이고, 늘 감정적이다. 언제 변화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감정적이란 어떤 것이냐?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을 무척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말세에 태어나 이 단계 사역을 받아들여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사역을 경험할 수 있으니 무척이나 영광스럽고 행복스럽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의 적자지심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표현했겠느냐? 감정이 고조되고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고 이성을 잃고 감정이 비정상적이 되어 추태가 드러난 것이다. 예전에 중국에서 하나님을 믿을 때는 환경이 너무 열악해 억눌려 살았다. 그때는 피가 끓어올라 “전능하신 하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치고 싶어도 적당한 장소가 없었고, 잡혀갈까 봐 두려워 외칠 수가 없었다. 지금은 해외에 있고 신앙의 자유가 있다. 마침내 그의 적자지심을 발설할 장소가 생겼으니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표현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큰길에서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은 곳을 찾아 외치려 했다. 하지만 외치기 전에 왠지 자신이 없어 다시 한번 주변 환경을 둘러보고는 결국 외치지 못했다. 이때, 그는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겠느냐? ‘안 돼. 적자지심만으로는 아직 안 돼. 아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어쩐지 외칠 수가 없더라니.’ 그래서 그는 고통스럽고 괴로워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께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 예전에는 환경이 적합하지 않아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칠 용기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환경이 갖춰졌는데도 제가 아직 그런 믿음이 없어서 외칠 수가 없어요. 저의 분량과 믿음이 지나치게 작아 생명이 없나 봅니다.” 그 후로 그는 그 일을 위해 기도하고, 예비하고, 공을 들였다. 늘 하나님 말씀을 보고, 하나님 말씀에 감동해 눈물을 흘리며, 마음속으로 그런 감정과 열정을 준비하고 모았다. 이렇게 모아 가던 어느 날, 수천 명을 수용하는 광장에서 사람들을 향해 “전능하신 하나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감정이 비교적 충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광장에 도착해 사람이 그렇게나 많은 것을 보고는 여전히 외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지금까지도 외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외쳤든 아니든, 이는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이런 외침이 진리 실행이겠느냐?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굳이 그렇게 외치려고 했겠느냐? 그가 마음속으로 그 외침이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어떤 행동 방식보다 힘이 있고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적자지심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이런 감정을 갖는 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정상 인성의 범주 안에 분류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이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본분을 이행하게 하고,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게 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정이나 본분을 이행하는 감정이 더 고조되도록 하기 위함이겠느냐? (아닙니다.) 너희는 때때로 또는 자주 이런 감정을 갖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감정이 생길 때, 너는 이 감정이 매우 갑작스럽고, 비정상이거나 억제가 잘 안 된다고 느끼느냐? 억제가 잘 안 되어도 억제해야 한다. 어쨌든 이는 그저 감정일 뿐,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거나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나서 거두는 성과가 아니다. 이는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이다. 그렇다면 이런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를 편집증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겠느냐? 이는 상황과 정도에 따라 다르다. 어떤 것은 편집증의 범주에 들지만, 어떤 것은 황당해지기도 한다. 사람이 간혹 이런 심정을 표출하는 것은 정상이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 비정상이겠느냐? 바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일을 하며, 매일 이 일만을 위해 살아가고 동분서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복음 전파 또한 이를 위한 것이며, 어떤 본분을 이행하든 모두 이를 위한 것으로, 모든 것이 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면, 이는 그의 생존이나 삶의 가치와 의미가 되는데, 그러면 문제가 된다. 목표와 방향이 빗나가 버린 것이다.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은 추태가 좀 있고, 집요한 것도 좀 있고, 또 비정상적인 감정도 좀 있다. 사람이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며, 늘 이런 내적 상태 속에서 살고 있으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설교를 듣겠느냐?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읽겠느냐? 항상 적자지심과 종교 의식에 의지해 하나님을 믿는다면 진리를 깨닫고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이냐?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종교 이론, 관념과 상상에 근거하며, 또한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진리란 무엇인지, 하나님 말씀에서 어떻게 얘기했는지를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마치 하나님을 믿을 때 적자지심만 있으면 되고, 자기가 여전히 교회에서 일을 하고 힘을 쏟을 수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다는 식으로 생각해 이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또 무엇을 추구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지도 알지 못한다. 어쩌면 때로는 마음속으로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생각해도 밝히 알지 못해 마음속으로 줄곧 ‘열의가 있고 감정이 고조되기만 하면, 끝까지 고수할 수만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감정이 고조되어 이성을 잃고 온갖 어리석은 짓과 진리 원칙에 어긋나는 짓을 하여 결국에는 드러나 내쳐진다. 보아하니 감정이 고조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에는 또 하나의 비교적 심각한 내적 상태가 있다. 즉, 어떤 사람들은 항상 열의에 의지해 하나님을 믿으며 마음속의 불꽃이 언제나 꺼지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을 때 적자지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진리를 깨달을 필요도 없고, 자기를 성찰할 필요도 없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자백하고 회개할 필요도 없으며, 어떤 심판, 형벌, 책망, 훈계 또는 누군가의 질책과 비난은 더더욱 받을 필요 없다고. 이런 것들은 필요치 않아. 그저 적자지심만 있으면 돼.’라고 말이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을 믿는 원칙이다. 그는 ‘나는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 그저 내가 느끼기에 괜찮으면 돼. 내 생각에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기뻐하실 거야. 내가 기뻐하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니 그러면 되는 거야.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을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너무 유치하지 않으냐? 너희도 예전에는 이런 내적 상태 아니었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너희가 줄곧 이런 내적 상태로 살면서 전혀 바로잡지 못했다면, 너희는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해 진리와 무관하며,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종교를 믿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이겠느냐? 사람들이 관념으로 사람은 살길이 막막하거나, 집안에 어려움이 닥치거나, 기댈 곳이나 정신적인 의지처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종교를 믿는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종교를 믿는 것은 좋은 사람이 되라고, 다른 사람을 도우라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베풀라고, 선의로 남을 대하라고, 좋은 일을 많이 해 덕을 쌓으라고, 살인과 방화를 하지 말라고, 법을 위반하거나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라고, 훔치거나 뺏지 말라고, 남을 속이거나 기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관념 속에 있는 종교를 믿는 것의 개념이다. 종교를 믿는 것의 개념이 현재 너희 마음속에 얼마나 존재하느냐? 종교의 그런 것들이 진리에 부합하겠느냐? 대체 어디에서 유래된 것이겠느냐? 너희는 이를 분별할 줄 아느냐? 만약 종교를 믿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결과가 어떻겠느냐?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옳겠느냐? 종교를 믿는 내적 상태와 하나님을 믿는 내적 상태가 차이가 있지 않겠느냐? 종교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이겠느냐? 어쩌면 네가 처음 믿을 때는 종교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같은 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까지 몇 년간 하나님을 믿었는데, 너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종교를 믿는 것과 차이가 있지 않으냐? 종교를 믿는 것은 종교 의식을 지키는 것으로, 정신적 즐거움과 위안을 얻기 위함이다. 그것은 사람이 어떤 길을 가는지, 그리고 사람의 삶의 방식과는 관련이 없다. 너의 내면세계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고, 너는 여전히 너이고, 너의 본성 본질은 줄곧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서 온 진리를 받아들여 생명으로 삼지 않으며, 너는 그저 좋은 일을 했거나 의식과 규례를 좀 지켰고, 종교를 믿는 활동에 좀 참여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무엇을 지칭하느냐? 바로 삶의 방식이 변하고, 생존의 가치와 평생 살아가는 목표가 이미 변한 것이다. 원래 너는 가문을 빛내기 위해, 남들보다 뛰어나기 위해, 부유한 삶을 살기 위해, 명예와 이익을 좇기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너는 그런 것들을 버렸고, 사탄을 따르지 않으며, 사탄과 그런 사악한 흐름을 저버리고자 한다. 네가 하나님을 따르며 진리를 받아들이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게 되어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즉, 하나님을 믿은 후로 삶의 방식이 달라져 다른 삶의 방식으로 바뀌고, 창조주를 따르며 창조주의 주재와 안배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창조주의 구원을 받아들여 진정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는 삶의 방식이 바뀐 것 아니겠느냐? 이는 원래 네 삶의 방식, 추구, 모든 일을 하는 동기 및 의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서로 다른 별개의 일이다. 종교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의 차이점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겠다. 조금 전에 ‘적자지심’이라는 내적 상태에 대해 말했는데, 너희는 자신과 대조할 수 있느냐? (대조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지금 대부분 시간을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느냐, 아니면 가끔 이런 내적 상태가 있느냐? 만약 가끔 있다면, 이는 네가 이미 이런 내적 상태에서 벗어나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만약 네가 대부분 시간을 여전히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며, 어떻게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또 어떻게 적자지심의 속박에서 벗어나 이런 내적 상태에서 빠져나올지 알지 못한다면 이는 네가 아직 하나님 앞에 살고 있지 않으며,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진리를 구할 줄 모른다는 증거이다. 차이점이 크지 않으냐? (큽니다.) 만약 네가 여전히 이런 방식으로 살아가며 전혀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매우 위험하고, 조만간 도태될 것이다. 이런 적자지심은 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진리를 구해 이런 내적 상태를 분석하고 바꿔야 한다. 어째서 이런 적자지심이 있는지, 열의에 의지해 하나님을 믿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이렇게 하나님을 믿으면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이 더 커지게 할지, 이런 문제들을 마음속으로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는 자신과 대조해 보고 반성하여 해결을 구해야 한다.

어떤 부류의 사람은 열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으며 어떤 본분도 다 이행하고 고난도 참아 내지만, 성품이 불안정하고 감정적이며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데다가 오직 기분에 따라 일한다. 기분이 좋을 때는 수중의 일을 매우 잘하며, 누구와 협력하거나 함께 지내든 잘 어울리고, 본분도 더 많이 이행하고 싶어 하고, 어떤 본분이든 책임감을 갖고 이행한다. 이는 내적 상태가 좋을 때의 모습이다. 그의 내적 상태가 좋은 데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본분을 훌륭히 이행해 칭찬을 받았거나 모두에게 우러름과 인정을 받았을 수도 있고, 또는 많은 사람이 그가 만든 작품을 마음에 들어 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치 바람을 가득 넣은 풍선처럼 점점 더 고조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날마다 똑같은 본분을 이행하면서도 결코 하나님의 뜻을 모색하거나 진리 원칙을 구하지는 않고, 늘 경험에 의지해 일한다. 경험이 진리겠느냐? 경험에 의지해 일하는 것이 믿을 만하겠느냐? 진리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경험에 의지해 일하는 것은 원칙에 부합하지 않으니 반드시 실패할 때가 온다. 그 결과, 어느 날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많은 문제가 생겨 책망을 받고 다들 그에게 불만을 느끼게 되면, 그는 소극적으로 변해 “저는 이 본분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으니 그만두겠습니다. 누가 하든 저보다 낫겠죠. 저만 못 하는 것일 테고요. 그러니 하고 싶은 사람이 하세요!”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진리를 교제해 주어도 귀담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이 일에 교제할 만한 게 뭐가 있나요? 자꾸 진리가 어쩌고저쩌고하는데, 기분 좋으면 하고 기분 나쁘면 안 하는 거지 뭐가 그렇게 복잡합니까? 저는 안 하겠습니다. 나중에 기분이 좋을 때 할게요.”라고 말한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본분 이행이든,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든, 남들과 교제하는 것이든, 삶과 관련된 모든 면에서 그는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밝아지고, 고조되었다가 갑자기 침체되고, 열의에 차 있다가 갑자기 식어지고, 적극적이다가 갑자기 소극적으로 변하는 등의 모습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그의 내적 상태는 좋든 나쁘든 특히 두드러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꾸준히 하는 법 없이 자기 성질대로 한다. 기분이 좋으면 좀 제대로 하지만, 기분이 나쁘면 제대로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일을 하지 않고 내팽개치기도 한다. 그는 어떤 일을 하든 모두 자기 기분과 요구, 그리고 환경을 따라야 하며, 고난을 겪을 의지는 전혀 없다. 귀하게만 자라 버릇이 없고, 억지를 부리고 난폭하게 굴면서도 자제하지 않으며, 아무도 자기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누가 건드리기만 하면 그 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노발대발한다. 그러고 난 후에는 바로 소극적으로 변하고 기분이 가라앉는다. 이 밖에도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자기 기호를 따른다. “이 일이 좋으면 하겠지만, 싫으면 안 할 거예요. 어떤 경우에도 안 할 겁니다. 하고 싶은 사람이 하세요. 저랑은 상관없으니까요.”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기쁘고 내적 상태가 좋고 마음이 감동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말하며 감격해서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는데,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겠느냐?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정상적인 내적 상태지만, 그의 이런 성품, 모습, 표출을 보면, 남들은 그가 열 살 정도 되는 아이인 줄 알 것이다. 그는 성품도, 삶의 방식도 제멋대로여서 무슨 일을 하든 꾸준함과 충성심, 책임감, 부담이 없다. 고난을 겪는 법도 없고 책임을 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가 기분이 좋으면 어떻게 하든, 고난을 좀 겪든, 자기 이익이 손실을 보든 다 괜찮지만, 기분이 나쁘면 아무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런 내적 상태가 정상이겠느냐? (비정상입니다.) 이는 단순히 비정상적인 내적 상태 문제에 그치지 않는, 지나치게 제멋대로이고 무지몽매하며 유치한 모습이다. 제멋대로인 것은 어떤 문제겠느냐? 어떤 사람은 “성품이 불안정한 것입니다. 너무 어리고 고난을 너무 조금 겪은 데다가 변덕스러워서 종종 제멋대로인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사실, 제멋대로인 것은 나이와는 상관없다. 마흔이 넘은 성인도, 일흔이 넘은 노인도 제멋대로일 때가 있다. 그럼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제멋대로인 것은 사실 성품 문제로,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만약 그가 중요한 본분을 이행한다면 본분과 사역 진도에 지장을 주어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실을 끼칠 수 있다. 평범한 본분을 이행한다 해도 때때로 본분에 영향을 주고 일을 망치니 타인과 자신에게, 그리고 교회 사역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가 얼마간 일을 하고 대가를 치른다고 해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지나치게 제멋대로인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이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며, 이런 사람은 적지 않다. 제멋대로인 것은 패괴 성품 중 가장 흔하게 보이는 모습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다.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물론, 패괴 성품은 다 사탄 성품의 일종이며, 제멋대로인 것 또한 패괴 성품 중의 하나이다. 그것을 가볍게 말하자면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심각하게 말하자면 진리를 싫어하고 증오하는 것이다. 제멋대로인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겠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그는 기분이 좋고 이익을 얻었을 때만 잠깐 순종할 수 있지 기분이 나쁘고 이익이 없으면 부끄러운 나머지 화를 내고, 대적하고, 배반한다. 그는 마음속으로 ‘진리니 뭐니 하는데, 중요한 건 내 기쁨과 만족이야. 내가 기분이 안 좋으면 누가 뭐래도 다 소용없다고! 진리는 뭐고, 하나님은 또 뭔데? 내가 대장이야!’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어떤 측면의 패괴 성품이냐? (진리를 증오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증오하고 싫어하는 성품이다. 여기에 교만함과 방자함이 있지 않겠느냐? 강퍅함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그것 외에도 심각한 내적 상태가 하나 더 있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누구에게나 잘하는 데다가 본분도 책임지고 이행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매우 훌륭하고 순종적이며, 기꺼이 대가를 치르고, 진리를 몹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소극적인 상태에 빠지는 순간, 책임을 내팽개치고 원망하며, 심지어는 말이 통하지 않기도 한다. 그 흉악한 모습이 드러나면 누가 책망해도 소용이 없다. 또 그는 “저는 모든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저 실행하지 않을 뿐이죠. 저만 편하면 그만이니까요.”라고 말한다. 이는 무슨 성품이겠느냐? (흉악한 성품입니다.) 이런 악인을 누가 책망하기라도 하면, 그는 반항할 뿐만 아니라 마치 악귀처럼 상대방을 상처 입히고 해치기에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한다. 이는 지나치게 제멋대로이고 흉악한 것 아니겠느냐? 이것이 나이가 어려서 생긴 문제겠느냐? 나이가 많으면 제멋대로 굴지 않겠느냐? 나이가 들면 철이 들고 이성이 생기겠느냐? 아니다. 이는 사람의 성격이나 나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패괴 성품이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숨어 있는 것이며, 패괴 성품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는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패괴 성품 속에서 살아가는데 순종하겠느냐? 진리를 구할 수 있겠느냐? 진리를 사랑하는 요소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전부 없다. 너희는 누구나 제멋대로인 내적 상태를 갖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만약 교제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했겠느냐?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교제를 마치고 나니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간혹 약간 제멋대로 구는 것은 객관적인 원인에 의한 것으로, 성품 문제가 아니다. 성품 문제라면 일할 때 패괴 성품을 표출해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오늘 어떤 객관적인 원인 때문에 위통이 무척 심했다고 해 보자. 그는 너무 괴로워서 말할 힘도 없고 그저 눕고만 싶었다. 이때, 누군가 다가와 그와 몇 마디를 나누었는데 그의 말투가 좀 딱딱했다면, 이것이 성품 문제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는 병 때문에 괴로워서 그랬던 것이다. 만약 그가 평소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서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성품 문제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극심한 고통 때문에 말투가 좋지 않은 것이니 이는 정상적인 현상이다. 만약 객관적인 원인이 있고 다들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말하거나 그렇게 일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경우에 들어맞는다고, 인지상정이라고 공인한다면, 그것은 정상 인성의 모습이자 표출이다. 마치 가족이 죽었을 때 고통스러워 우는 일이 지극히 정상인 것처럼 말이다. “이 사람은 너무 감정적이에요. 하나님을 믿은 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가족에 대한 정을 놓지 못하고 가족이 죽었다고 울기까지 하다니 정말 어리석습니다!”라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막상 자기 어머니가 죽을 때 그 누구보다도 많이 운다. 이 일은 어떻게 봐야겠느냐? 함부로 규례에 맞춰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은 객관적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정상 인성의 모습이자 표출이다. 무엇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자 표출이고, 무엇이 정상 인성의 모습이나 표출이 아니겠느냐? 이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는 한편으로는 사람의 성품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의 관점, 추구하는 방식, 추구하는 길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코 성질이나 성격 또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또 다른 내적 상태로는 처세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 있다. 대부분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때 명리와 지위를 추구할 뿐 진리 추구를 중시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자질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사탄의 철학과 인생 법칙을 지니고 있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지, 어떻게 살아야 사람들 가운데서 두각을 드러내고 가문을 빛내어 모두의 동조를 얻을지 등에 대해 자기만의 ‘묘책’을 갖고 있다. 어떤 묘책이겠느냐? 바로 ‘지극히 높은’ 처세 철학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 ‘지극히 높다’와 ‘처세 철학’이라는 두 가지 표현은 함께 사용할 수 없는 괴상한 조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여기에 ‘지극히 높다’라는 말을 사용했겠느냐? 일반적으로 처세 철학이 있는 사람은 살아가는 데 반드시 생존의 법칙, 즉 생존의 비결을 갖춰야 하며, 그래야만 자신의 인생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 생존 법칙, 즉 처세 철학을 최고의 신조로 삼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좌우명처럼 처세 철학을 진리로 삼아 굳건히 고수하는데, 하나님 선민을 대할 때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속세를 떠나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 것 아니었어? 원칙을 지키는 것 아니었냐고. 진리를 깨달았다며? 좋아, 내가 처세 철학으로 당신을 대해 주겠어. 당신은 참답게 대한다며? 진리 원칙을 중시한다며? 난 진리 원칙을 깨닫지 못했지만 똑같이 당신이 내게 호감을 느끼게 할 수 있고, 당신들을 가지고 놀 수도 있어. 내 주변을 맴돌며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뒤에서도 내 욕을 하지 않게 할 수 있다고. 심지어 내가 뒤에서 당신들을 판단하고 배신하며 농간을 부려도 당신들은 알지 못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처세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의 처세 철학에는 무엇이 있느냐? 음모, 계략, 수법이 있고, 방식과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자기 눈에 지위와 쓸모가 있는 사람한테는 예의 바르게 대하고 굽실거리며 치켜세워 준다. 하지만 상대가 능력이 별로 없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항상 높은 자리에 앉아 내려다보듯이 이야기하여 사람들이 그를 대단하게 여기고 우러러보게 한다. 그는 내면에 사람을 우롱하고 조종하는 수법이 있으며, 어떤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방법을 다 알고 있다. 또 그는 매우 성숙하고 노련해서 사람을 만나면 첫눈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며, 상대를 어떻게 책망해야 할지, 어떤 식으로 같이 지내야 할지 등이 바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런 처세 철학을 적용할 때 그는 생각할 필요도, 미리 준비할 필요도, 누군가의 지도를 받을 필요도 없다. 자신만의 수법을 지니고 있는데, 그중에는 자신이 생각해 낸 것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고 보고 영향받은 것도 있다. 어쩌면 상대가 알려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나 그는 요령껏 그런 처세 철학, 수단, 방식 방법, 음모, 계략을 배웠다. 이런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이 진리를 갖추고 있겠느냐?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그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겠느냐? 사람들은 늘 그에게 기만당하고 속아 넘어가며, 이용당하고 우롱당한다. 이런 처세 철학은 지식인이나 어떤 특정 무리만의 전매특허가 아니라 사실 모든 사람이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으로는 또 무엇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말재간이 있어서 남들을 즐겁고 흐뭇하게 한다. 그의 말을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실질적인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감언이설로 남들을 우롱하는 사람이다. 어떤 리더 일꾼은 일정 기간 사역한 후 마음속으로 ‘상부에서 나를 알고 있을까? 하나님께서 나란 사람을 알고 계실까? 문제를 몇 가지 보고해서 내가 사역하고 있다는 걸 알려야겠어. 내가 보고한 문제가 매우 사실적이고 무게감 있는 중요한 문제라는 걸 알게 되면, 상부에서 내가 실제적인 사역을 할 줄 안다고 판단하고 중용할지도 몰라.’라고 생각해서 기회를 봐 문제를 제기한다. 이치상으로 보면 그의 문제 제기는 정당하며 사역에 필요하다. 하지만 개인의 속셈이라는 불순물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너희는 이 사람이 문제를 보고한 속셈을 알아볼 수 있겠느냐? 이런 속셈은 대체 무엇이 문제이겠느냐? 이는 생각하고 분별해야 하는 문제이다. 만약 그가 본분을 제대로 이행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문제를 제기했다면, 이는 정당하다. 이는 그가 책임감 있는 사람이고 실제적인 사역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지금 일부 리더 일꾼은 실제적인 사역을 하지 않는 데다가 기회를 틈타 사리사욕을 채우며 윗사람을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이는 한편, 인기인이 되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고 싶어 한다. 그가 이렇게 실행하는 것은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만약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어떤 진리를 구해야 할지, 어떻게 인식하고 분별해야 할지 등을 반드시 명확히 해야만 이 패괴된 속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다. 두 사람이 협력해 본분을 이행할 때, 외지 교회에 가서 문제를 처리해야 했다. 그런데 그 지역의 생활 환경이 열악한 편이고 치안도 좋지 않고 위험이 좀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그 교회 사람들은 저를 싫어합니다. 제가 간다고 해도 반드시 문제를 해결한다는 보장은 없죠. 하지만 다들 당신을 좋아하니 당신이 문제를 해결하러 가면 성과가 있을 겁니다.”라고 하자 다른 사람은 그 말이 진실하다고 생각해 자기가 갔다. 결론적으로, 이유와 핑계를 대고 가지 않은 그 사람은 문제가 있지 않겠느냐? 그의 핑계와 이유가 말이 되든 안 되든 그의 이런 행동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겠느냐? 형제자매를 위해 고려한 것이겠느냐? 아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감언이설로 자기 목적을 이룬 것이다. 이는 수법 아니겠느냐? 너는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했다. 너는 육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여전히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네가 스스로를 저버릴 수 있다면, 사탄 철학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떻게 했겠느냐? 처음에는 문제를 처리하러 그 교회에 가기 싫었을 테지만, 고민을 좀 해 보고는 ‘아니야, 그런 생각은 내가 나쁜 사람이고 부도덕하다는 의미야. 내가 한 말을 빨리 취소해야겠어. 그에게 사과하고 내가 표출한 패괴를 털어놔야 해. 오늘 나는 반드시 그곳에 갈 거야. 그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말이야.’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고 꼭 죽는 건 아니다. 죽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느냐? 생사는 모두 하나님이 정하는 일이다. 요컨대, 이 경우에는 의지가 있고 자기 자신을 저버릴 수 있어야만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다. 두 사람이 협력해서 본분을 이행할 때, 둘 다 책임지는 게 두려워 암투를 벌이는 경우이다. 한 사람이 “이 일은 당신이 하세요.”라고 하자, 다른 사람은 “당신이 하는 게 좋겠어요. 제 자질은 당신만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실 그는 마음속으로 ‘이 일은 잘해도 상을 못 받고, 잘못하면 책망을 받게 돼. 그러니까 안 갈 거야. 난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고! 당신이 무슨 의도인지 알아. 나한테 가라고 부추기지 마.’라고 생각했다. 암투를 벌이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겠느냐? 아무도 가지 않아서 결국 사역을 그르치고 말았다. 이는 부도덕한 것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사역을 그르쳤으니 결과가 심각하지 않으냐? 결과가 좋지 않다.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은 모두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모두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사탄 철학과 자신의 간계에 속박되고 얽매여 진리 실행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니 그 두 사람이 이행한 본분은 합격할 수 없다. 그것은 조금도 증거하지 못하고 대충 건성으로 임한 것에 불과하다. 만약 두 사람이 협력해서 본분을 이행할 때, 그중 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려 하고 늘 자기가 결정하려 하는데 다른 한 사람은 마음속으로 ‘그는 대단한 데다가 나서기 좋아하니 무슨 일이든 나서게 하자. 실수하면 그가 책망 훈계를 받는 거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잖아! 난 나서지 말아야겠어. 나는 자질도 부족하고 마음 쓰는 것도 싫어하니까. 그는 나서기 좋아하잖아? 그가 하도록 일을 남겨 줘야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자는 무골호인이나 졸개 노릇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본분을 이행하는 게 어떠하냐? 이는 무엇으로 살아가는 것이냐? (처세 철학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만약 내가 그보다 돋보이면 나한테 화를 내지 않을까? 그럼 앞으로 우리 둘이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는 거 아냐? 우리 둘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면 함께 지내기 힘들어질 테니까 그냥 그의 말대로 하자.’라는 생각이 있다. 이는 처세 철학 아니겠느냐? 이렇게 살면 번거롭지 않고,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 하라는 대로 따라 하면 되고, 남들 앞에 나설 필요도 없으며, 무슨 문제를 고려할 필요도 없다. 무슨 일이든 다른 사람이 앞에서 버티고 있으니 힘들지 않다. 졸개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그에게 책임감이 없다는 증거이다. 그는 처세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원칙을 고수하지도 않는다. 이는 졸개이고 무골호인이지 조화롭게 협력하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협력하는 게 아니라고 하겠느냐?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고, 마음과 뜻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힘을 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진리가 아닌 처세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더 들어 보겠다. 어떤 사람이 본분을 이행할 때 나쁜 짓을 해서 하나님 집 이익에 손실을 줬는데, 네가 그것을 보고도 마음속으로 ‘저 일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고, 내 이익에 손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야. 게다가 내가 책임자도 아닌데 쓸데없는 일에 뭐 하러 간섭해? 다른 사람 보고 신경 쓰라고 하자. 원하는 사람이 신경 쓰면 되지. 난 내 사역만 지키면 돼. 다른 사람이 어떤 나쁜 짓을 하든 나와는 상관없어. 내 눈으로 봤어도, 그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난 신경 쓰지 않을 거야. 교회 사역에 손실이 생겨도 나와는 무관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처세 철학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씨가 어떠냐? (나쁩니다.) 이는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어쩌다 한 번 이렇게 하지만, 어떤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하면서 전혀 진리를 구해 자신을 반성하거나 자기의 패괴 성품을 해결하는 법이 없다. 이 두 유형의 사람은 상황이 다르다. 한 가지 일을 이렇게 하든, 아니면 모든 일을 다 이렇게 하든 이는 패괴 성품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는 단순한 행동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이 자주 보고 접하는 처세 철학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작은 선심을 써서 다른 사람을 매수하거나 다른 사람의 기호에 영합하고 칭찬해 주고 아첨하는 것 등이 있습니다.) 남들의 기호에 영합하는 것은 하나의 수법으로, 처세 철학의 일종이다. 또 무엇이 있느냐? (다른 사람이 원칙을 어기며 일하는 것을 보고도 감정이 상할까 봐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말을 직설적으로 하지 않고 항상 에둘러 말하며, 듣기 좋은 말, 원칙이나 본질 문제와 관련이 없는 말만 골라서 한다면, 이 또한 처세 철학의 일종이다. 또 있느냐? (지위가 높은 사람을 만나면 아첨과 아부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이 또한 처세 철학의 일종이다.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특히 간사해서 늘 남을 음해하고 이용하려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어디를 가든 인기인이 되는데, 사람 봐 가면서 말을 골라 하고, 머리 회전이 무척 빨라서 눈만 마주쳐도 상대방을 어떻게 응대해야 할지를 안다. 이런 사람은 지나치게 교활해서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수 없다. 처세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모습으로는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문제를 발견하고도 잘못 말해서 책임지게 될까 봐 말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대다수가 말하고 난 후에야 자기 관점을 표현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종종 대세를 따르면서 틀려도 다수가 틀리면 처벌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떤 문제이고 어떤 성품이냐? 이는 간사한 성품 아니겠느냐? 늘 무골호인이 되고 싶어 하고 남에게 밉보일까 두려워 진리 원칙을 고수하지 못하고, 또 진리를 실행하지 않아 폭로되고 도태될까 두려워하니 정말 진퇴양난이다! 이것이 무골호인의 불쌍한 모습이다.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이런 추한 몰골로 살아가게 된다. 모두가 사탄의 귀신 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데, 음험하고 간사하고 비열하며 야비하고 비천하고 불쌍하다. 너희는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누가 리더가 되면 그에게 아첨하고, 어느 리더가 교체되거나 도태되면 아는 척도 하지 않으며, 누가 리더로 뽑히기만 하면 그에게 아부하면서 온갖 낯간지러운 말을 다 쏟아 낸다. “아, 정말 예쁘네요. 키도 딱 적당하고요. 미인이세요. 말할 때 목소리는 아나운서 같고, 노래할 때는 꾀꼬리 같아요.”라고 말이다. 이렇게 온갖 방법을 동원해 비위를 맞추고, 기회를 틈타 아부하고 아첨하며, 또 작은 선심을 베푼다. 평소에도 늘 상대방의 눈치를 살펴 리더가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온갖 방법을 생각해 충족시켜 준다. 너희에게 이런 수법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때로는 리더 일꾼에게서 문제나 결점을 발견하고도 리더 일꾼이 저를 책망하고 제게서 안 좋은 인상을 받을까 봐 말을 못 합니다.) 그것이 바로 원칙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가 발견한 그 문제들이 옳은지 그른지, 그것을 밝힐 때 교회 사역에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알고 있느냐? (약간은 알고 있습니다.) 약간 알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진리 원칙에 부합하겠느냐? 만약 네가 문제를 발견했다고 확신하며, 그 문제를 해결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사역을 그르치게 되리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밉보일까 봐 원칙을 고수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떤 문제이겠느냐? 너는 어째서 원칙을 고수하지 못하는 것이냐? 이는 매우 심각한 성질의 문제로, 진리를 사랑하는지, 정의감이 있는지 여부와 관련된다. 네 견해가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해도 말을 해야 한다. 너에게 이런 견해와 생각이 있다면 그것을 말해서 다 같이 분별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너도 도움을 얻고 문제 해결에도 이롭다. 만약 네가 마음속으로 ‘난 그런 일들은 신경 쓰지 않을 거야. 내 말이 맞아도 공을 인정받을 수 없고, 내 말이 틀리기라도 하면 책망받아야 하잖아. 그럴 가치는 없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이기적이고 비열한 것 아니겠느냐? 항상 자기 이익을 고려하면서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람의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다. 너희 내면에는 이런 처세 철학과 꿍꿍이수작이 매우 많지 않으냐? 사람은 누구나 사탄 철학에 속하는 것을 많이 지니고 있으며, 마음속은 일찌감치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니 몇 년 동안 설교를 들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 실제 진입도 매우 더디며, 분량이 늘 지나치게 작은 것이다. 이 패괴된 것들이 방해하고 교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 사람은 어떤 것에 의지해 살아가느냐? 바로 이런 패괴 성품, 관념, 상상, 처세 철학, 그리고 은사에 의지해 살아간다. 사람이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짐이 지나치게 많고, 멍에가 지나치게 무겁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면 진리와 동떨어지게 되며, 이런 것들이 진리를 깨닫고 실행하는 것을 방해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이 깊어질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분명 깊어지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는 매우 슬프고 두려운 일이다.

사람은 어떤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가, 이는 사람이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관련이 있으며, 사람의 성품과도 관련이 있다. 어떤 사람이 항상 꿈과 욕망을 위해 분투한다면, 이는 꿈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늘 욕망에 의지해 살아가는데, 욕망에는 무엇이 포함되겠느냐? 사역의 욕망과 자기를 뽐내려는 욕망, 그리고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망이 있다. 예를 들어 보겠다. 어떤 사람들은 지위를 좋아한다. 지위가 없으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무것도 할 마음이 들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그는 지위를 추구하는 욕망에 의지해 살아가며,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본인이 어떤 지위를 가졌든 굉장히 소중하게 여긴다. 무슨 일을 하든 오로지 지위만을 위해서 일한다. 지위를 지키고 공고히 하고, 지배 구역을 확장하는 등 어디에서나 이 욕망을 위해 일한다. 이것이 바로 욕망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매우 불쌍하게 살았다. 사람이 온순해서 늘 업신여김을 당하고, 가정 환경도 좋지 않으며, 별다른 사회적 배경도 없었다. 의지할 만한 사람도 별로 없어 외롭고 쓸쓸했던 그가 하나님을 믿고 나서 드디어 의지할 곳을 찾았다고 느꼈다. 그는 한 가지 바람이 있었고, 그 바람에 떠밀려 하나님을 믿었으며, 지금까지도 그의 바람은 변함이 없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존엄성 있고 기개 있게 살기 위해서야. 하나님을 믿으면 남들보다 뛰어날 수 있고, 남들보다 우월하게 살 수 있어. 나중에 내가 천당에 가면, 다들 나를 우러러보게 될 거야. 더 이상 아무도 나를 우습게 보지 못할 거야.’ 그의 이런 생각은 매우 공허하고 막연한 바람이자 기대이다. 가정 환경이나 다른 원인 때문에 그는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불쌍하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집에서 살면서 의지처가 생기고 형제자매도 그를 업신여기지 않으니 더 이상 불쌍한 사람도 아니고, 의지할 대상이 생겼다. 또한, 그에게는 죽은 후나 현생에서 아름다운 종착지를 얻어 기를 펴고 사는 큰 희망이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목표이다. 이런 바람에 의지해 살면서 어디서나 어떤 일에서나 이런 생각과 소원을 원동력으로 삼았으니 그가 진리에 의지해 살기는 매우 어렵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삶이 매우 불쌍하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연기하거나 뽐내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탓에 무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무리 속에서 이런저런 일을 해서 사람들에게 우러름을 받으면서 그의 허영심을 채운다. 그는 ‘리더는 아니지만 사람들 속에서 내 특기를 발휘해서 화려해 보이고 후광이 비친다면, 하나님을 믿을 가치가 있어. 이걸 위해 사는 것도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한다. 이때부터 그는 이를 위해 살아간다. 매일매일, 한 해 한 해를 이렇게 살아가며 자기의 초심을 바꾸지 않는다. 이것이 진리에 의지해 사는 것이겠느냐? 절대 아니다. 그는 이방인처럼 꿈과 욕망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일을 바라보는 관점과 관련된 문제이자 패괴 성품과 관련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진리를 깨닫거나 실행할 수 없고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기 매우 어렵다.

그 밖에 외모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항상 자기는 아름다워서 어디를 가든 남들이 좋아해 주고, 우러러보고, 인정해 주고, 어디를 가든 남들이 칭찬해 주고 웃어 준다고 생각하며, 행복해하고 자신감을 갖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밑천이 있고 가치가 있다고, 최소한 많은 사람이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한다. 남자도 외모에 의지해 살아가지 않느냐? 예를 들어, 네가 잘 생기고, 자매들 사이에서 말을 재미있고, 시원하고, 로맨틱하게 해서 남들이 우러러보고 네 주위를 맴돈다면 너는 우쭐할 것이다. ‘누구랑 사귀지도 않고 이렇게 사는 게 얼마나 좋아! 진리를 실행하는 게 얼마나 따분한데!’ 또 어떤 사람은 일종의 밑천에 의지해 살아간다. 밑천이라고 하면 당연히 본인이 어떤 진실한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어떤 진실한 것이겠느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을 50년 넘게 믿었으니 그걸 밑천이라고 생각한다. 형제자매를 만나 “하나님을 몇 년 믿으셨나요?”라고 물었는데 상대방이 “5년이요.”라고 대답하면,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그 10배인 것을 알고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네가 나만큼 오래 하나님을 믿었어? 나이도 이렇게 어린데 나한테 얌전히 굴어. 넌 아직 멀었어!’ 이것이 밑천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또 어떤 밑천이 있느냐? 어떤 사람은 각급 리더 일꾼으로 일하면서 오랫동안 외지에서 사역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교회들을 순방했다. 경험이 풍부하고, 상부의 사역지침, 교회 내 여러 부류의 사람들, 여러 측면의 사역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는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베테랑 리더라 오랜 밑천을 갖고 있어. 오랫동안 사역하여 경험이 있지. 너희가 뭘 알겠어? 다들 애송인데, 사역을 며칠이나 해 봤겠어? 너희는 미숙하고 아무것도 모르니 내 설교만 잘 들으면 돼!’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참을 얘기해도 그의 설교에 실제적인 것은 전혀 없고 전부 글귀와 도리였다. 그러고도 “오늘은 기분이 별로 안 좋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방해하고 교란해서 제 마음이 영향을 받았어요. 다음에는 제대로 하겠습니다.”라며 핑계를 댔다. 진상이 드러나지 않았느냐? 오랜 밑천에 의지해 살면서 득의양양해하다니 정말 구역질이 나고 낯간지럽다! 이것은 일종의 밑천이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옥살이한 적이 있거나 특별한 체험을 했거나 특별한 본분을 이행하며 고난을 겪은 적이 있는데, 이 또한 밑천의 일종이 되었다. 어째서 사람은 항상 밑천에 의지해 살아가겠느냐?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그가 이런 밑천을 자기의 생명이라고, 밑천에 의지해 살아가기만 하면 수시로 자기만족과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다고, 그런 다음에 이런 밑천을 이용해 다른 사람을 가르치거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면 칭찬을 받을 수 있다고, 자기가 이 밑천의 기초 위에서 또 진리를 추구하거나 본분을 제대로 이행하고 선행을 좀 하면, 바울처럼 그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될 수도 있으니 분명 살아남을 수 있고 아름다운 종착지가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점이다. 밑천에 의지해 살 때, 그는 항상 우쭐거리고, 득의양양하고, 자만자족하는 내적 상태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밑천을 열납하고 그를 기뻐하니 최후까지 그를 남겨두리라 생각한다. 이는 밑천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아니겠느냐? 그는 곳곳에서 이런 생각을 드러낸다. 그가 드러낸 것, 그가 의지해 살아가는 것, 그가 곳곳에서 남들에게 이야기한 것을 통해 그가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보살핌을 받은 적이 있다. 다른 사람은 다들 받지 못했는데 오직 그만 받았다면, 그는 자기가 특별하고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는 “당신들이 하나님을 믿는 건 저와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당신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푸시어 당신들을 인도하셨습니다. 당신들이 조금씩 진리를 깨닫게 되고 나서는 또 당신들에게 책망, 훈계, 심판, 형벌을 주셨습니다. 당신들은 모두 이렇게 체험했지만, 저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고, 특별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이 특별한 은총이 바로 저의 밑천이며, 제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근거이자 입장권입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그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알고 있느냐? 그가 자기 자신을 알고 있느냐?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진리를 깨닫지 못했으며, 자기는 진리를 추구하거나 구하지 않아도,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내적 상태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냐? 바로 이상(異象)을 본 적이 있는 사람, 특별한 보호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 큰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 또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그리고 일부 특수한 간증이나 체험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이런 것들을 생명이자 살아가는 근거로 삼고, 이런 것들로 진리 실행을 대신한다. 게다가 이런 것들을 구원의 징표이자 기준으로 여기는데, 이것이 바로 밑천이다. 너희는 이런 것들을 갖고 있느냐? 어쩌면 너희에게는 이런 특별한 체험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희가 오랫동안 한 가지 특별한 본분을 이행해 성과를 거뒀다면 자기도 밑천이 생겼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오랫동안 감독이라는 본분을 이행해 좋은 작품 몇 편을 만들어 냈다면, 그에 해당하는 밑천이 형성된 것이다. 어쩌면 네가 아직 작품을 내놓지 않았거나 너 자신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영화를 두 편 찍기는 했지만 아직 밑천으로 삼을 용기가 없어서 지금은 밑천이 없을 수도 있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자신이 아직 경력과 밑천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신중하고, 자제하며, 낮은 자세를 취하고,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건방을 떨거나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더더욱 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항상 우쭐거리고 자기만족을 하며,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간다. 이것이 패괴된 인류의 불쌍한 모습 아니겠느냐?

어떤 사람은 생김새가 특히 흉악하고 덩치도 큰 데다가 힘도 세서 늘 다른 사람을 괴롭히려 했다. 또한, 말을 지나치게 거만하고 오만하게 하며, 누구에게도 승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보고 무서워서 공손하게 굴고 아첨하면, 그는 득의양양하고 살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것도 능력이라고, 이렇게 살면 아무도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리 속에서 굳게 서려면 반드시 혼자 서고, 강해져야 하며, 주먹이 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삶의 신조였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굳게 서고, 괴롭힘이나 우롱을 당하지 않기 위해 또는 기만당하거나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이런 결론을 내렸다. ‘잘 살기 위해서는 주먹이 세야 해. 셀수록 좋아. 그러면 어디를 가든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 그 결과 이렇게 몇 년을 살고 나니 정말 괴롭히는 사람이 없어져 드디어 그의 목적을 이루었다. 어떤 무리에 가든 늘 엄숙한 표정과 진지한 모습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냉정한 태도를 보이니 감히 말을 거는 사람도 없고, 아이들은 그를 보면 울음을 터뜨렸다. 이는 악귀가 환생한 것 아니겠느냐? 주먹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이는 어떤 성품이겠느냐? 흉악한 성품이다. 그는 어디를 가든 사람을 우롱하고 이용하는 것을 가장 먼저 배웠다. 또한, 사람을 통제하려 했으며, 사람을 제압할 수 있었다. 누가 그에게 공손하게 굴지 않으면 본때를 보여 줄 방법을 찾았으며, 그에게 예의 없게 말하거나 날이 선 말을 하면 기회를 틈타 괴롭혔다. 이런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이는 악독하지 않으냐? 주먹에 의지해 일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아 많은 사람이 그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세상에서 형통하였다. 하지만 혈기와 악독한 성품에 의지해 살아가는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이는 그가 사탄 철학과 무력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오직 사탄 철학과 무력에만 의지해 살아가면서 남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면, 그는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그에게는 평판이 안 좋을 게 걱정이 아니라 평판이 나쁘지 않을 게 걱정이다. 이것이 그의 원칙이다. 이렇게 해서 목적을 이룬 후 그는 ‘이제 하나님 집과 이 무리 속에서 굳게 섰어. 다들 날 무서워해 건드리지도 못하고 공손하게 대해.’라며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한다. 사실 다른 사람들이 용기가 없어 그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겠느냐? 겉으로는 용기가 없어 건드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사람은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이런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의문의 여지 없이 싫어하고, 역겨워하고, 증오하고, 멀리하고, 피할 것이다. 너희는 이런 사람과 교류하고 싶겠느냐? (싫습니다.) 어째서이냐? 항상 너를 괴롭힐 생각을 하는데, 네가 견딜 수 있겠느냐? 때로는 무력을 사용해 너를 위협하는 게 아니라 수단을 써서 속인 후 너를 위협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용서를 빌고 사탄에게 투항했다. 악인은 일하거나 말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소심하고 겁이 많은 사람이 악인에게 투항해 악인을 따르며 말하고 행동하는데, 이는 악인과 한패가 아니겠느냐? 너희는 이런 악인을 보면 어찌하느냐? 우선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 그를 책망하고 폭로해야 한다. 또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형제자매와 연합해 그를 고발할 수도 있다. 두려움은 소용이 없으며, 두려워할수록 그는 더욱 너를 괴롭히고 성가시게 굴 것이다. 연합해 그를 고발해야만 악인이 두려움과 수치를 느끼게 할 수 있다. 겁이 너무 많고 지혜마저 없다면 악인에게 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사람의 믿음이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다! 사실, 악인이 아무리 악하다 한들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그가 제멋대로 주먹을 휘둘러 사람을 때려죽이겠느냐? 지금은 법치 사회라 그도 그런 담력은 없다. 또한, 흉악무도한 사람은 그저 몇몇 소수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감히 사람을 괴롭히고, 교회에서 제멋대로 하려 한다면 두세 명만 연합해도 그를 고발하고 폭로해 해결할 수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하나님 선민 몇 명만 뜻을 합치면 쉽게 악인을 해결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이 공의롭고 전능한 하나님임을, 하나님이 악인을 혐오한다는 사실을, 하나님 선민을 뒷받침해 주리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악인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거기에 더해 지혜와 방법을 발휘해 연합할 수 있다면, 악인은 자연히 고개를 숙이게 된다. 만약 네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고, 악인을 두려워하며, 악인이 너를 장악하고 너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끝이고, 아무런 간증도 없다. 너는 변변치 못하고, 무능하고 구질구질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겠느냐? 어떤 사람은 늘 자기의 잔꾀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디 계시는지 난 몰라. 상부에서 이 일을 알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 만약 내가 고발했는데 악인이 그걸 알게 되면 나를 더 괴롭히지 않겠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두려워져 탁자 밑으로 숨어들어 가고 싶을 지경이 된다. 이런데도 진리를 실행하고 원칙을 고수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자는 무능한 사람 아니겠느냐? 너희 대부분이 다 이렇다. 얼마 전에 적그리스도가 일부 사람들을 괴롭혔는데, 그들이 그렇게 무능하니까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사람이 보기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좀 억울하기도 하고 고통스럽지만 공과를 배우고 도움을 얻는다면 그때는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은 지혜가 모자라고 무골충이어서 누가 그를 괴롭히고 업신여기면, 자기가 옳아도 반항하지 않으며, 거짓 리더나 적그리스도임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고, 반박하거나 폭로하지도 못한다. 이런 자가 바로 못난이다! 이런 일이 닥쳤을 때 눈치를 보는 것에서 사람의 분량이 지나치게 작고, 사람의 믿음이 너무나 보잘것없고,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르고, 교회 사역을 수호할 줄 모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 선민에게는 악인이나 적그리스도와 투쟁할 권리가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는 일이다. 네가 사탄과 싸울 줄 모르고, 사탄을 이기지 못하면 불쌍하지 않으냐? 분명 그는 악을 행하는 자로, 부정적인 세력이고, 사탄, 마귀, 악령, 더러운 귀신인데, 오히려 네가 괴롭힘을 당한다. 게다가 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 많은 사람이 모두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다니 이는 무능한 것 아니겠느냐? 너희는 어째서 몇 명이 연합해 그와 싸우지 못하는 것이냐? 총명과 지혜가 너무 부족한 것 아니겠느냐? 진리를 깨닫고 분별력이 있는 사람을 몇 명 찾아 그 사람의 행동을 분석하면, 대부분의 하나님 선민이 실상을 분명히 알고 일어날 수 있다. 그러면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겠느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일어나 적그리스도와 싸울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가 얼마나 많은 적그리스도를 해결하고 처리할 수 있는지 보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이긴 자의 증거이다. 너희가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일이 닥쳤을 때 원칙을 고수할 수 있겠느냐? 자칫 잘못하면 또 놀라 탁자 밑으로 기어들어 갈지도 모른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일이 닥쳤을 때의 그 불쌍하고 슬픈 모습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 너무나 불쌍하다! 괴롭힘을 당해도 말도 못 하고, 그 일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고, 간이 콩알만 해졌다. 악인조차 꿰뚫어 보지 못하고, 분량도 너무 작고 진리도 전혀 깨닫지 못하니 불쌍하지 않으냐? 악인은 주먹에 의지해 살아가며, 남을 억압하고, 착한 사람을 괴롭히고, 남을 등쳐먹으면서 살아가고, 악독한 본성과 흉악한 성품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아첨하며 재물을 갖다 바친다. 그는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매우 좋다고 느낀다. 그건 산적 두목이 아니냐? 토적이나 강도가 아니냐? 너희가 악인은 아니지만, 너희에게도 이런 내적 상태가 있지 않으냐? 너희 또한 이런 것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아니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협력할 때, 상대방이 나이 어리면 ‘넌 아무것도 몰라. 내가 너를 괴롭혀도 나를 어쩌지 못해. 내가 너보다 대단하고, 우위에 있어. 키도 더 크고, 주먹도 더 세니까 난 널 괴롭힐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이는 무엇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겠느냐? 주먹에 의지해 살아가고, 흉악한 성품에 의지해 살아가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상대방이 온순한 사람이면 괴롭히고, 독한 사람이면 피하는데,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사람이다. 어떤 악인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멀리하는 것을 보고는 외톨이가 될까 두려워 온순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을 골라 함께 지내고 친구로 삼아 자기의 세력을 확장한다. 그런 다음에 온순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을 이용해 좋은 사람을 괴롭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공격하며, 자기에게 승복하지 않고 불만을 품는 모든 사람을 괴롭힌다. 이를 통해 악인이 몇 명의 온순한 사람과 교분을 맺는 것 또한 속셈과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네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또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만약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의 행위가 악을 행한 것인지 아니면 선을 행한 것인지 반성하지 못한다면 진정으로 회개할 수 없다. 설령 네가 성품이 흉악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갈 뿐이라 해도, 비록 악을 행하지 않았거나 선행을 했더라도 네가 여전히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지 않는다면 너는 진리와 상관없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네가 하나님을 얼마나 오래 믿었든 상관없이 사탄의 패괴 성품을 지니고 있다면, 너는 진리와 전혀 상관없는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게 된다. 이런 것들은 형태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형태가 없는 것일 수도 있으며, 네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네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외부에서 온 것일 수도 있고 성품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것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런 것들은 모두 진리가 아니며, 모두 패괴된 인류 자체에서 생겨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로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사탄의 이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갈 때, 사람은 대체 어떤 길을 걷겠느냐?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겠느냐? 분명 아니다. 만약 사람의 행위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엄밀히 말해 피조물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겉으로는 본분 이행으로 보이지만 본분 이행의 기준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으며, 주로 속셈과 거래라는 불순물이 있다. 비록 본분을 이행했어도 충성심과 원칙이 없고, 당연히 실제 성과도 없다. 이는 그의 본분 이행이 사실은 진리와 무관한 일을 많이 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건 모두 진리 원칙과 관련이 없는 일이고, 모두 자기의 상상과 취향에 의지해 한 일이다. 이렇게 본분을 이행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겠느냐?

이러한 다양한 내적 상태를 교제하면, 너희는 자기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가늠할 수 있지 않으냐? 본분 이행이나 일상생활에서 너희가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때가 많으냐? (많지 않습니다.) 너희에게 교제해 줄 때 늘 너희의 내막을 폭로하니 너희는 삶이 불명예스럽다고, 자신감을 잃었다고,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고 느낀다. 또 많은 일을 입에 담기 부끄러워하게 되고, 나중에 복을 받거나 좋은 종착지가 생겨도 그렇게 떳떳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내막을 폭로하는 것은 좋은 일 아니냐? (좋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내막을 폭로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사람은 자기가 대체 어떠한 내적 상태로 살아가는지, 어떤 내적 상태 속에서 살아가는지, 사람이 가는 길은 무엇인지,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어떤 비정상적인 모습들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일들을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은 것인지, 네가 이렇게 살아가면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너는 “저는 이렇게 사는 게 마음이 편해요. 한 번도 불안하거나 불쾌함을 느껴 본 적이 없고, 공허함도 전혀 느끼지 않습니다.”라고 하지만 결과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걷는 길은 진정한 인생길이 아니고, 하나님이 너에게 알려 준 인생길도 아니라 네가 일방적으로 상상에 의지해 찾아 걷는 길이다. 비록 네가 즐겁게 일하고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최종 결과는 어떠하겠느냐? 너의 속셈과 욕망, 그리고 네가 간 길이 너를 곤경에 빠뜨리고 망쳤으니 너는 하나님을 믿는 데 분명 실패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결말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보면, 그것은 네가 진리를 얻지 못해 초래한 결과이다. 하나님을 오랫동안 믿었으면서도 진리를 얻는 것을 중시하지 않아 결국 어느 날 무슨 일 때문인지도 모르게 드러나고 도태될 것이다. 후회해도 늦을 것이다. 너는 “저의 이런 삶의 방식은 매우 합리적입니다. 이렇게 사는 데 자신감이 있고, 마음이 특히나 충만하고 풍요롭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길을 어떻게 갔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에 의지해 살아갔어야 옳은 것인지, 이는 결과를 봐야 한다. 즉, 네가 최종적으로 진리를 얻었는지, 참된 간증이 있는지, 생명 성품의 변화가 있는지, 인생의 가치를 살아 냈는지를 보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다 있다면, 너는 하나님의 인정과 하나님 선민의 찬성을 받을 것이다. 이는 네가 바른길을 갔다는 증거이다. 만약 이런 긍정적인 결과가 없다면, 참된 체험 간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생명 성품 변화도 없다면 그것은 네가 잘못된 길을 갔다는 증거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으냐? 결국, 네가 어떻게 살아가든, 네 삶이 얼마나 윤택하든, 남들이 얼마나 찬성하든 이는 모두 중요하지 않다. 너는 “저는 이렇게 살아가고 이렇게 실행하니 특히 즐겁습니다. 무척 행복하고 영광스럽습니다. 증거도 있어요.”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를 속이는 것 아니겠느냐? 다른 사람이 너에게 “당신은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실행했나요?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실행할 때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요? 어떤 상황에서 정직한 사람이 되기 어려웠나요? 체험이 있다면 이야기 좀 해 주세요.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를 갖고 있나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한 체험이 있나요? 심판과 형벌,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인 후 성품이 변화한 체험이 있나요? 생명 성장의 과정에서 어떤 특별한 일을 체험했기에 끊임없이 당신 인생의 전환점이 만들어졌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정해 주신 목표와 달성하라고 요구하신 목표에 끊임없이 접근할 수 있었나요?”라고 물었을 때, 이런 것들을 네가 마음속으로 짐작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네가 잘못된 길을 갔다는 증거이다. 이는 자명한 일이다.

위에서 교제한 내용은 그저 간단하게 말한 것일 뿐이다. 이 밖에도 세부적인 부분이 있지만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사람이 의지력, 선의, 고난을 겪겠다는 다짐, 관념과 상상 등에 의지해 일을 하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일방적인 바람, 패괴 성품, 인위적인 선량함, 사탄의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며, 더 나아가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에 의지해 살아가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원하지 않으니 아무리 좋아도 소용이 없다. 이것이 진리 실행이 아니라 사탄 철학과 패괴 성품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지 참된 증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네가 “저는 이런 행동 방식들이 단지 사람의 선의일 뿐 결코 진리 원칙에 부합하지 않으니 이렇게 실행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네가 마음속으로 진정으로 깨닫고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느낀다면 이는 인식이 생기고 관점이 변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결과를 원한다. 너는 자신의 치우친 부분을 인식하고 관점을 바꾸고 관념을 버림으로써 진리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깨달은 후에는 점점 이 측면을 향해 실행하여 정확한 길을 가야만 하나님이 너에게 부여한 목표에 도달할 희망이 있다. 만약 네가 하나님이 요구한 방법대로 실행하거나 진입하지 않으며, “저는 그냥 이렇게 하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한가하지는 않으니까요. 본분을 계속 이행하고 있으니 저는 피조물이 분명하고, 창조주 또한 제가 굳게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이 말이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없다. 이는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것이고, 강퍅한 것이다! 지금은 인생길을 선택해야 하는 때이다. 네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네게 요구한 길을 갈 수 있는지,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둘째, 사람의 뜻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셋째, 사람의 취향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넷째, 사람의 감정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패괴 성품에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빨리 벗어 버려야 한다. 너에게 어떤 밑천이 있든 하나님에게는 모두 가치 없는 싸구려이며, 전혀 실제에 도달할 수 없으니 일일이 밖으로 던져 전부 버려야 한다. 그러면 진리 실행을 통해 얻은 것만이 가치가 있으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에 부합한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모두 가치가 없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결국에는 다 소용이 없으니 전부 폐물이고 쓰레기이다. 오직 하나님이 베풀어 준 진리만이 보배이자 생명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너는 늘 자기의 것을 고수하며 ‘이 재간은 내가 오랫동안 어렵고 힘들게 공부해서 배운 거야. 부모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고 많은 돈을 쓰며 심혈의 대가를 치렀는데, 어떻게 내가 함부로 그걸 분석하고 정죄할 수 있겠어? 이건 엄청난 일이고, 목숨이 걸린 일이야!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난 무엇으로 살아야 하지?’라고 생각하는데, 지나치게 어리석다. 네가 그런 것들에 의지해 살아가면 지옥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너는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 살아가야 한다. 삶의 방식을 바꿔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낡은 그것들을 깨끗이 비워 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분석하고 인식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아 다른 사람들이 분별력이 생기게 해야 한다.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것들을 혐오하게 되고, 예전에 사랑했던 것들, 생존을 위해 의지했던 것들, 너의 생명이자 지극히 귀중한 보물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혐오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야 네가 그것과 완전히 차단되고 단절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행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물론 이는 매우 복잡하고 험난한 과정이자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사람은 반드시 이 과정을 체험해야 한다.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는 것은 병을 치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종양이 생겼으면 반드시 수술대에 올라 절개해야만 해결할 수 있고, 수술대에 오르지 않고 절개해서 그 종양을 꺼내지 않는다면, 그 병을 치료받지 못해 건강해지지 못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정직한 사람을 바보 취급하며,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행해서 정직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면 정말로 정직한 사람이 되어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는데, 이건 바보 아닌가? 정직한 사람이 되더라도 최소한 손해를 보거나 손실을 입지는 않아야 하잖아. 뭐든지 다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 속사정을 다 말해 버리면, 그건 바보 아냐?’라고 생각한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리석은 것이겠느냐? 이런 사람이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이는 그가 ‘하나님 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진리야.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어. 그러니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할 거야. 하나님께서 나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면 언제까지라도 순종하겠어. 누군가가 나를 어리석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해 주시기만 하면 돼.’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가장 똑똑한 사람 아니겠느냐? 그는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정확하게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속내를 숨기며 ‘뭐든지 다 순종하는 거는 바보 아냐? 이러면 자주권이 없어지는 것 아냐? 자아도 없는 사람에게 존엄이 있겠어? 아무리 그래도 자기 존엄은 남겨 놔야 하잖아? 완벽하게 순종할 수는 없잖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충 적당히 순종하는데, 이러면 진리 실행의 기준에 이를 수 있겠느냐? 차이가 너무나 많이 나니 이르지 못한다! 만약 네가 원칙에 따른 진리 실행을 하지 않고 항상 절충안을 선택하려 한다면, 진리 쪽으로 기울지 않지만 그렇다고 사탄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중용의 길을 간다면 이것이 진리 실행이겠느냐? 이는 사탄의 철학으로, 하나님이 가장 증오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혐오하며, 사람이 항상 진리와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을, 하나님 말씀을 대할 때 늘 의혹을 품거나 경시하고, 멸시하고, 단정하지 못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혐오한다. 일단 사람이 그런 태도를 갖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의혹을 품고, 의문을 제기하고, 분석하고, 오해하며, 항상 연구하고 늘 머리로 가늠한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모습을 감춘다. 하나님이 너에게 모습을 감추면, 네가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저는 얻을 수 있습니다!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항상 예배에 참석하고, 매주 설교를 듣습니다. 듣고 난 후에는 매일 묵상하고 필기합니다. 또 찬양을 부르고 기도합니다. 저는 제 내면에 성령의 역사가 있다고 느낍니다.”라고 말한들 소용이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이런 방식이 틀리지는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너라는 사람과 마음이 바른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만 하나님은 너에게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에게 모습을 감추지 않고, 항상 너를 깨우쳐 주고 인도해 주며, 모든 일에서 네가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깨닫게 하여 최종적으로 진리를 얻게 한다면, 이는 네가 큰 복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너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면, 네가 늘 너의 잔꾀와 관점 또는 너의 지식과 사탄 철학을 이용해 하나님을 의심하고, 경계하고, 시험하고, 오해한다면 문제가 된다. 어떤 사람은 경계하고, 시험하고, 의심하고, 오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반발하고 하나님과 대립하는데, 이는 사탄이 된 것이다. 이러면 더 문제가 된다. 네가 진리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해서, 간단한 도리를 이해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이런 오해를 하고 있으며, 여러 번 강조해도 여전히 각성하지 못하고 ‘난 매일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며, 해마다 본분 이행을 계속하고 있어. 마치 땅에 심어진 농작물처럼 말이지. 물이나 비료를 주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비가 내리면 천천히 자라다가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는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람의 협력하는 성분과 방식, 사람의 마음, 진리와 하나님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가 가장 관건이며, 지극히 중요하다. 이런 것들은 또 사람이 무엇으로 살아가는지와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네가 늘 사람의 취향과 사탄의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고, 항상 하나님을 경계하며,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데, 네가 또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창조주가 너를 상대하지도 않으면 너는 그의 피조물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마귀나 사탄으로 여기는데, 네가 여전히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있겠느냐? 네가 여전히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겠느냐? 여전히 네가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너의 가정 환경과 자질이 어떠하든, 너에게 얼마나 큰 은사가 있든, 또는 네가 교회에서 어떤 사역을 하고, 어떤 본분을 이행하고, 어떤 역할을 하든, 네가 예전에 어떤 과오를 범했든, 지금 너의 내적 상태가 어떠하든, 생명이 어느 정도로 성장했든, 분량이 얼마나 크든 이런 것은 다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떠한가이다. 네가 시종일관 하나님을 의심하고 오해하거나 연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너의 마음이 올바른지 이런 것들이 특히나 중요하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이런 중요한 것들을 알 수 있겠느냐? 항상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 멋모르고 이방인처럼 한가할 때 이방의 동영상을 보거나, 놀거나, 장난을 쳐서는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수 없는데 어떻게 본분을 이행하겠느냐? 네가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지 않으면 하나님도 네게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억지로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리를 선포한 것은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진리를 받아들이겠느냐? 만약 사람이 늘 수동적이며, 하나님을 찾지 않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성령이 어떻게 사람에게 역사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 이것이 관건 아니겠느냐? 이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 믿는 일을 부업과 취미로 여긴다면 문제가 된다! 어떤 사람은 지금까지 믿으면서 설교도 많이 들었지만 여전히 하나님 믿는 일을 종교를 믿는 것이자 취미라고 생각한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일을 얼마나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냐!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런 관점이라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못했다면, 하나님 또한 네가 그를 따르는 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구원받을 희망이 있겠느냐? 희망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정상적인 관계는 어떤 기초 위에서 맺어지는 것이겠느냐? 사람이 협력해야 한다. 그럼 사람이 어떤 입장과 관점을 지니고 있어야 하겠느냐? 어떤 내적 상태여야 하겠느냐?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겠느냐? 너의 마음이 어떻게 진리를 대해야 하겠느냐? 의심하겠느냐? 연구하겠느냐? 의혹을 품겠느냐? 저버리겠느냐? 이런 것들이 있다면 너의 마음이 올바르겠느냐? (올바르지 않습니다.) 마음이 올발라지려면 어떤 태도를 갖춰야 하겠느냐? 반드시 순종하는 마음을 갖춰야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어떤 요구를 하든 진심으로 순종해야 하며, 의심하거나 이치를 따져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태도이다. 너는 에누리 없이 믿고, 받아들이고, 순종해야 한다. 에누리 없다고 해서 금방 이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하지만 진입하고자 시도해 봐야 한다. 하나님이 “너는 병에 걸렸다.”라고 했을 때, 네가 “저는 병에 걸리지 않았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네가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네 병이 심각하니 약을 먹어라.”라고 했을 때, 네가 “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약을 먹는 것도 괜찮아요. 어쨌든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만약 병에 걸렸다면, 약을 먹고 나을지도 모르니 먹어 보죠.”라고 말하고, 약을 먹고 나서 몸이 예전과 다르다고 느껴져 일정 분량을 계속해서 먹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몸이 점점 좋아졌다고 느끼면, 그때 너는 하나님이 말한 그 병이 어쩌면 진짜였을 거라고 믿게 된다. 이렇게 실행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느냐? 네가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에 병이 치유된다. 비록 처음 약을 먹을 때는 하나님이 말씀한 양만큼 먹지 않고 좀 줄여서 먹었으며, 약간은 의혹을 품었고, 달갑지 않았고,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그래도 하나님 말씀대로 약을 먹었다. 먹고 나서는 효과가 괜찮다고 느껴져 계속해서 먹었고, 먹을수록 믿음이 커져 점점 하나님 말씀이 옳고 자기가 틀렸다고 믿게 되었으며, 점점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의심해서는 안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너는 하나님이 먹으라고 요구한 약을 다 먹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때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이 점점 진실해지지 않았느냐? 너는 하나님 말씀이 옳으니 에누리 없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예는 무슨 의미이겠느냐? 사람의 병은 주로 패괴 성품을 말하고, 약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주된 의미는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이면 패괴가 정결함을 얻을 수 있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해 얻는 성과이다. 너희는 실패를 두려워하느냐? 네가 “저는 완벽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에누리 없이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처음 하나님 말씀을 실행할 때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이번에 절대적으로 할 수 없다면, 이번에는 아예 실행하지 않고 다음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좋으냐?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진리 실행에는 과정이 있으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기회를 준다. 사람이 패괴된 내적 상태를 지니고 있을 때, 하나님은 “너는 에누리를 두고 순종하지 않았다. 너에게 패역이 있다.”라고 폭로한다. 그렇다면 폭로하는 목적은 무엇이겠느냐? 바로 네가 점점 덜 에누리하고, 점점 더 순종하게 하며, 네가 점점 더 순수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점점 더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 진실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너를 폭로하는 동안 너를 징벌하였느냐? 하나님이 네게 책망, 훈계, 시련을 준 것은 그저 너를 징계, 처벌, 폭로, 질책하여 약간 아프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너의 목숨을 앗아 가기라도 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의 목숨을 앗아 가지 않았고, 너를 사탄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이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너를 구원하려 한다는 것이다. 때로 사람은 약간의 고난도 겪기 싫어해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하지 않으시니 난 희망이 없어.’라고 생각한다. 네가 항상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오해하면 문제가 심각하다. 이러면 생명 성장이 너무나 지체된다. 그래서 언제든, 네가 나약하든 강인하든, 내적 상태가 좋든 나쁘든, 너의 생명 성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든 우선은 이런 것들에 신경 쓸 필요가 없고,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는 것에만 신경 써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시험 삼아 실행해 보는 것이라도 괜찮다. 열심히 협력해 자기가 이룰 수 있는 것을 이루어 내고, 하나님 말씀에서 언급한 내적 상태에 진입하여 네가 하나님이 선포한 이런 진리를 실행할 때 어떤 느낌인지, 자기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생명 진입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진리에 공을 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은 생명 성장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늘 첫술에 배부르려 한다. 늘 ‘나는 절대적인 순종은 할 수 없으니 순종하지 않겠어. 절대적인 순종을 할 수 있을 때만 순종할 거야. 난 뻔뻔한 사람이 아니야. 이러면 내가 얼마나 기개 있고, 인격과 존엄이 있어 보이겠어?’라고 생각하는데, 이게 무슨 기개냐? 이것은 패역이고 강퍅함이다!

조금 전 교제한 이런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있었는가?”의 네 가지 소제목에 대한 교제를 마쳤다. 은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지식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적자지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사탄 철학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 너희는 이 네 가지 내적 상태를 듣고 이해하지 않았느냐? 자신과 비춰 볼 수 있느냐? 이해할 수 있느냐? 예전에 이런 주제로 교제한 적이 있느냐? 어쩌면 어떤 내적 상태는 사람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진리 실행과 관련이 없으며, 또 우리가 오늘 교제한 이 주제와도 관련이 없다. 오늘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있었는가?”라는 주제와 관점으로 이런 내적 상태들에 대해 교제하였다. 이로써 진리 실행과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에 좀 더 가까워졌다. 문제가 하나 더 있으니 너희도 적어 놓아라. 그것은 바로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은 네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천천히 교제하겠다. 오늘은 주로 사람이 의지해 살고 있는 몇몇 부정적인 내적 상태를 폭로하였을 뿐 그런 부정적인 내적 상태를 겨냥해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는 교제하지 않았다. 비록 교제하지는 않았지만, 너희는 그런 내적 상태들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겠느냐?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하였겠느냐? 무슨 성품이겠느냐?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겠느냐? 그런 일이 닥치고, 그런 내적 상태와 행동 방식이 있을 때 어떻게 진리로 대체해야 하겠느냐? 어떤 진리를 실행해야 하겠느냐? 지금 중요하고 기초적인 것은 바로 네가 먼저 그런 내적 상태를 파악하고 자기를 분석하여 자기가 그런 내적 상태 속에서 살아갈 때 적어도 네 마음속으로는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다음 단계에서 바로잡을 수 있다. 만약 너 자신조차 그것의 옳고 그름과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모른다면 어떻게 바로잡겠느냐? 그래서 우선 첫 단계에서는 그런 내적 상태의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다음 단계에서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를 알 수 있다. 오늘 사람 내면의 다양한 패괴된 내적 상태 문제에 관해서만 교제했는데도 이렇게 많은 말을 했으니 대체 어떻게 해야 진리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는지와 같은 구체적인 일들을 너희가 많이 생각해 본다면 어느 정도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17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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